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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남한 종북좌파는 외국에서 조롱당한다” - 폴란드 출신 북한인권운동가 요안나 호사냑

김정우 기자 2011.11.21 12:54
폴란드 출신 북한인권운동가 요안나 호사냑
“남한 종북좌파는 외국에서 조롱당한다”

⊙ “대놓고 북한 추종하는 ‘그들’, 정신이상인가요?”
⊙ 한국어 전공 후 인권단체 활동 中 한국行… “통일되면 북한 가서 인권운동할래요”
⊙ “유럽 공산정권은 모두 갑자기 붕괴… 통일은 기획이 아니라 대비하는 것”

김정우 월간조선 기자 (hgu@chosun.com)

요안나 호사냑

요안나 호사냑 북한인권시민연합 국제협력캠페인팀장.

북한 인권 관련 행사에 가면 유독 눈에 띄는 외국인이 있다. 금발에 벽안(碧眼)인 이 여성을 보며 처음엔 ‘잠시 들른 외신 특파원’ 정도로 생각했다. 행사 횟수와 햇수가 늘어도 여전히 자리를 지키는 그의 정체가 궁금해 조심스레 물었다. 뜻밖에 한국어가 유창했다.
 
  그의 이름은 요안나 호사냑(Hosaniak), 직책은 북한인권시민연합 국제협력캠페인팀장. 폴란드에서 태어나고 자라 바르샤바 대학을 졸업한 인재다. 졸업 후 주(駐)폴란드 한국대사관에서 근무하며 북한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해 2004년 6월 한국에 왔다. 이역만리 땅에서 7년 반째 머무르며 대북(對北) 인권운동에 모든 관심과 열정을 쏟았다. 20년간 무관심했던 ‘머나먼 극동의 나라’를 연구하고 정착한 이유는 무엇일까.
 
 
 
모두가 무관심해 선택한 나라
 
  “1989년 민주화 이후 폴란드 대학에선 경제학이나 법학 같은 전공이 인기가 제일 많았어요. 그런데 전 이상하게 남들과 다른, 특이한 전공을 하고 싶었어요. 무슨 마음에서인지 일본어와 한국어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겠다 했죠.”
 
  마지막 결정은 한국어문학과. 그의 전공에 아버지는 불만이 많았다. “졸업해도 할 게 없다”는 이유였다. 한국과 수교는 됐지만, 진출한 한국기업은 거의 없었고 한국인도 쉽게 볼 수 없었다. 호사냑 씨 본인도 한국에 대해 무지했다. 지금과 같은 케이팝(K-Pop)이나 한류(韓流) 열풍은 상상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일본 문화는 1980년대 초 일부 유입됐어요. 일본 영화는 몇 편 기억나는데, 한국 영화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 공부하고 싶었죠. 유럽에도 꽤 알려진 일본이나 중국보단 한국에 대한 매력이 컸습니다.”
 
  ―학창시절 한국인을 만난 적은 없었습니까.
 
  “대학 입학하고 처음 한국인을 봤어요. 한국 기업도 서서히 진출할 즈음이었고, 쇼팽음악대나 우지(Lodz·폴란드 제3의 도시)의 영화학교가 유명해 유학생이 점점 늘었습니다. 1996년에 3개월 동안 서울 연세어학당에서 연수받으며 한국을 제대로 알게 됐죠.”
 
  ―한국어 전공은 북한을 염두에 둔 건가요.
 
  “전혀. 폴란드도 이미 민주화가 진행돼 직접 연구하긴 어려울 거라 봤어요. 한국에서 공부하면 잠깐 들어갈 순 있겠다 생각했었죠. 지금은 인권 활동을 해 온 이상 북한이 자유롭게 되기 전까지 직접 가 보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북한 인권에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대학 시절엔 크게 인식하지 못했어요. 북한 인권 문제가 지금과 같이 세계화한 이슈가 아니었고, 인터넷이 없으니 정보도 제한적이었습니다.”
 
  호사냑 씨는 1999년 졸업 후 4년간 한국대사관에서 일했다. 여러 한국인을 만나 한국에 관한 일을 하면서 자연스레 북한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궁금한 마음에 한국인 직원에게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해 몇 차례 물었지만, 모두 대답을 회피했다. 대신 폴란드의 민주화 인사들이 세운 헬싱키인권재단에서 교육받으며 인권 문제를 연구했다.
 
 
 
“한국 오라”는 말에 비자 대신 짐부터 싸
 
  북한을 마음에 품은 순간, 기회가 찾아왔다. 2004년 바르샤바에서 열린 북한인권·난민문제 국제회의에 진행기획자로 참여한 그는 현장을 누비며 성심껏 도왔다. 행사를 마칠 때쯤, 주최 단체인 북한인권시민연합의 윤현(尹玄) 이사장이 “한국에 와서 일해 보겠느냐”고 물었다. 호사냑 씨는 망설임 없이 “예스”라 답했다. 윤 이사장은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헬싱키인권재단과 함께 국제회의를 준비하는데, 2달 전쯤 저희 단체에서 만든 계간지와 자료들을 보내 줬어요. 호사냑 씨는 2달 만에 이를 모두 폴란드어로 번역하고 책자로 만들어 회의 주요 참석자들에게 배포까지 마쳤어요. 완벽했죠. 한국어는 물론 영어도 유창한 데다 북한 인권에 대한 열정이 컸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오라고 했죠.”
 
  호사냑 씨는 그날 집에 돌아가 짐부터 쌌다. 당시 한국에 오기 위해선 비자 발급만 한 달 정도 걸리던 시기였다. 꿈꾸던 일을 할 수 있다는 기대에 짐을 싼 채로 한 달간 비자 수속을 밟고 2004년 6월 한국에 왔다.
 
  ―가족의 반대는 없었나요.
 
  “그 부분이 가장 감사해요. 부모님이 적극적으로 지지해 줬어요. 사실 아버진 조금 걱정하셨지만, 그래도 딸이 원하는 일이고 꼭 필요한 일이었기에 흔쾌히 허락해 주셨죠.”
 
  ―대학에선 한국어만 공부했나요.
 
  “제가 다닐 때만 해도 폴란드 대학은 학·석사 통합 과정이었어요. 석사는 바르샤바대학에서 했고, 박사는 현재 서강대에서 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전공은 국제학이에요.”
 
  ―논문 주제가 궁금합니다.
 
  “석사 땐 고려청자 문양에 관한 내용이었고, 지금 준비하는 박사논문은 과도기의 정의에 대한 내용입니다. 공산주의 독재정권이 붕괴하고 체제가 무너지면 과거 정권에서 인권탄압을 자행한 비밀경찰과 같은 인사들을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지를 연구하고 있어요. 폴란드는 동유럽에서 가장 먼저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왔고, 가장 먼저 붕괴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구(舊)체제 인사에 대한 제대로 된 정리를 하지 못했어요. 후에 통일한 독일이나 체코는 비교적 성공사례를 만들었죠. 한국은 이를 잘 준비해야 합니다. 통일은 ‘언제’보다 ‘어떻게’가 더 중요해요.”
 
  ―한국의 경우 친일(親日) 청산 문제로 60년 넘게 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비슷한 개념인가요.
 
  “완전히 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인권 탄압을 직접 당한 피해자 입장에선 고통을 준 당사자가 새로운 국회나 정부에 참여하는 상황을 보기가 쉽지 않겠죠. 그러한 ‘정의’에 대해 고민해 봐야죠.”
 
 
 
“종북파들은 北에서 살아 봐야”
 
  ―동구권 출신으로 한국에서 북한 인권 운동을 하는 사람이 또 있나요.
 
  “한국에선 못 본 것 같아요. 가족과 직장을 포기하고 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죠. 언어의 장벽도 높고요. 하지만 공산주의를 직접 삶으로 경험했기 때문에, 누구보다 자유와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쉬운 결정은 아니겠지만, 앞으로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공산주의를 경험해 본 사람으로서, 남한 내 공산주의자를 바라보는 시각은 어떻습니까.
 
  “저도 엄격히 따지면 사회민주주의자입니다. 건전한 이념 논쟁은 바람직하지만, 북한은 이념의 나라가 아니잖아요. 친북·종북파들과는 차이를 둬야죠.”
 
  ―대놓고 북한을 추종하는 그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정신이상 아닌가요? 정상적인 상식으론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얼마 전 큰 행사에서 유럽의회(EP) 한반도 대표단 사람들을 만났는데, 제게 비슷한 질문을 하더군요. 북한 인권 문제에 침묵하는 남한의 종북좌파를 자신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질문이 민감해서인지 공식 브리핑이 끝나고 조용히 얘기했어요. 같은 유럽인이니까 편하게 보였겠죠. 한국의 ‘종북좌파’는 외국에서 북한보다 더 조롱당합니다. 진보·좌파가 모두 종북이란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하죠.”
 
  ―그들은 왜 북한을 추종할까요.
 
  “두 가지 오해 때문입니다. 공산주의가 정말 이상세계를 지향한다는 오해, 북한이 공산주의 국가라는 오해. 이 두 오해는 실제로 경험해 보면 금방 깨닫습니다. 현실과 괴리된 이상을 꿈꾸는 게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 수 있어요. 북한은 그마저도 아니죠. 김씨 세습 왕조는 공산주의보다 더 참혹합니다.”
 
  ―북한은 언제, 어떻게 개방이 될까요.
 
  “폴란드도 민주화 직전까지 그 누구도 예측을 못했습니다. 헬싱키인권재단에서 근무할 때 여러 학자와 운동가들을 만났는데, 1980년대 말까지 모두 10~20년은 더 걸릴 거라고 봤답니다. 지식인들과 반(反)정부 활동가들도 공산정권 붕괴를 예측 못했어요. 자유화, 민주화, 그리고 통일은 항상 갑자기 옵니다. 독일 통일도 아무도 예측 못했죠. 통일은 기획하는 것이 아니라 대비해야 할 대상입니다.”
 
 
 
무상복지는 찬성, 민주당 행태는 반대
 
  ―북한이 동유럽 공산정권과 같이 붕괴할 가능성이 있을까요.
 
  “환경이 너무 다릅니다. 북한 주민에겐 자유가 존재하지 않잖아요. 폴란드와 동유럽엔 그래도 사람이 살 만한 자유는 있었습니다. 까다롭긴 해도 비교적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었고, 외국 문화를 체험할 수도 있었죠. 하지만 북한은 아직 그런 자유가 허용되지 않습니다. 최근 해외 정보가 유입되고 한국 문화를 몰래 접하는 사람이 늘었지만, 더 빠른 개방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해 가장 필요한 조건은 무엇입니까.
 
  “최근 북한에서도 자본주의의 움직임이 보입니다. 배경과 수완이 좋은 사람들은 달러를 만지고 권력을 가졌죠. 자본주의와 함께 정보가 유입돼야 합니다. 엘리트를 중심으로 주민 그룹에 진실을 알리는 정보가 퍼지고 인권의 개념이 알려지면 북한 해방도 시간문제입니다.”
 
  ―북한은 어떻게 대응할까요.
 
  “정보유입을 통제하고 배급제를 강화하려 하겠죠. 독재 공산정권에서 배급은 국가관리의 핵심입니다. 주민봉기 등 문제가 일어났을 때 가장 먼저 음식을 빼앗습니다. 그만큼 강력한 통치수단이 없죠. 폴란드의 경우 1981년 계엄령이 선포되며 배급제가 부활했는데, 가장 힘든 시기였던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북한은 현재 스스로 배급제를 유지할 능력이 없습니다. 남한을 비롯한 전 세계에 협박과 구걸을 반복하는 이유죠.”
 
  ―최근 한국에선 무상복지가 최대 화두이자 논란입니다. 무상급식이 배급과 뭐가 다르냐는 비판도 있는데요.
 
  “무상급식은 배급과 다르죠. 독재국가와 달리 민주주의 사회에선 무상복지가 가능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저는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해요. 민주당과 야권이 내세운 무상 시리즈는 찬성하지만, 지난 무상급식 주민투표 때 보여준 행태는 이해할 수 없었어요. 정책이 아닌 정치싸움이 돼 버렸죠. ‘나쁜 투표 거부하자’란 캠페인을 벌였는데, 그건 독재국가에서나 나올 만한 말입니다. 아무리 투표에서 진다 해도 갈등하는 이슈는 결국 국민이 결정해야 합니다. 당이 모든 것을 결정해 ‘어떤 투표는 하고, 어떤 투표는 하지 마라’고 몰아세우면 특히 젊은이들이 ‘민주주의’에 대해 헷갈릴 수밖에 없습니다. ‘나쁜 투표 거부’란 말은 ‘우리 당이 결정했으니 국민은 투표 말라’란 말과 같다고 봅니다.”
 
 
 
“한국인들의 지식·정보 취득은 너무 편향적”
 
  ―앞으로 비전은 무엇인가요.
 
  “북한에 가서 인권교육을 하고 싶어요. 통일이 되면 변호사, 의사, 기자, 교육가, 사업가 등 사회 각계 사람들에 대한 인권교육이 필요하겠죠. 그때 북한에 들어가 NGO를 만들고 제가 지금까지 배워 왔던 인권에 대해 알려주고 싶어요. 북한만큼은 아니지만, 자유 없는 삶을 분명히 경험해 봤고,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고 있기 때문에 공감이 빠를 거라 믿습니다.”
 
  ―한국인에 대해 가장 답답한 점이 있다면.
 
  “지식과 정보를 얻는 경로가 편향적이란 점입니다. 모두 자신이 설정한 환경에서만 보고 듣죠. 만약 진보라 하면 그들이 지향하는 신문, 잡지, 방송, 인터넷 사이트, 책 등을 통해 모든 상황을 판단하려 합니다. 보수도 마찬가지죠. 혹자는 주입식 교육 때문에 독립적인 사고가 어렵다고 하더군요. 항상 집단으로 여론을 내고, 다른 의견은 묵살해 버리죠. 나라는 자유민주주의인데 개인은 스스로 종속시키고 포용과 열린 마음을 없앴죠. 무상급식, 한·미 FTA 등 최근 이슈도 내용을 잘 몰라도 자신이 속한 조직의 의견을 무조건 따르잖아요.”
 
  ―결혼은 했습니까.
 
  “아직 미혼입니다.”
 
  ―유럽과 달리 한국에선 30대가 넘으면 ‘미혼의 이유’도 묻습니다.
 
  “결혼 안 한 이유는 뭐라 답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굳이 따지면 일이 먼저였어요. 북한에 자유가 올 때까지 아마 결혼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대신 ‘20살 딸’은 한 명 있습니다. 르완다에 있는 친구인데 어릴 때부터 꾸준히 후원해 왔어요. 결혼도 안 했고 남편도 없는데,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장성한 딸만 있네요. 하하.”
 
  ―한국에 온 후 가장 기억나는 일은 무엇인가요.
 
  “기자분들이 항상 묻는데, 가장 어려운 질문이에요. 그러면 이렇게 답하죠. ‘매 순간순간이 모두 중요했다’고.”⊙


요안나 호사냑 Joanna Hosaniak
⊙ 37세. 폴란드 바르샤바대 졸업(석사). 서강대 대학원 국제학 박사 과정.
⊙ 외환은행, 주폴란드 한국대사관, 헬싱키인권재단 등 근무. 현 북한인권시민연합 국제협력캠페인팀장.

월간조선 2011년 12월호 (기사 원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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