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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순·미선 사고 10주기… 유가족과 마을 주민들의 이구동성

사회

by 김정우 기자 2012. 5. 24.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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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인터뷰] 효순·미선 사고 10주기… 유가족과 마을 주민들의 이구동성
“이젠 제발 그만 좀 와 주세요”

⊙ 유가족들 “순수한 개인 추모는 감사드리지만, 정치색 짙은 反美 집회는 자제해 주셨으면”
⊙ 사고현장에 美軍이 세운 추모비, ‘미 2사단 일동’ 문구만 고의적으로 훼손돼
⊙ 미선 양 오빠 “미군이 보낸 조화 뒤엎고 추모비 훼손한 이들에게 너무 화났다”
⊙ 마을 주민들 “기일마다 추모비 주변 난장판… 이른바 ‘국민추모비’ 건립도 반대”


효순 미선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효촌리 56번 지방도로변에 세워진 ‘효순·미선 추모비’. 누군가 추모시 마지막에 적힌 ‘미 2사단’ 부분을 훼손했다. ⓒ김정우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효촌리, 한적한 2차선 도로를 달리다 보면 한쪽에 자그마한 팻말이 눈에 띈다. ‘효순이 미선이 추모공원’이란 안내판 옆으로 ‘신효순 심미선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2002년 6월 13일 미군 궤도차량에 치여 숨진 여중생 효순·미선 양을 기리기 위해 미 2사단이 세운 추모비다. 추모시 마지막에 적힌 ‘2002년 9월 21일 미 2사단 일동’이란 문구 중 ‘미 2사단’이란 단어가 심하게 훼손돼 있었다.
 
 
 
‘시끄러운 추모’
 
  사망 10주기를 한 달 앞둔 지난 5월 12일, 기자 외에 다른 추모객은 현장에 보이지 않았다. 대신 바로 위 사찰을 방문한 신도들의 차량만 종종 오갔다. 자신을 ‘마을 토박이’라고 소개한 연화 스님은 “하루 적으면 5대, 많으면 10대 정도 차량이 추모비를 찾는다”면서 “지나다가 우연히 발견하고 온 이들도 있고 직접 찾아온 이들도 있는데, 대부분 조용히 둘러보고 돌아간다”고 설명했다.
 
  “매년 기일(忌日)마다 오는 단체 추모객들도 조용히 추모하느냐”고 물었더니 “관광버스를 타고 와서 크게 행사를 벌인다”며 “절 앞은 물론 길 건너 부대 앞까지 차량과 사람으로 뒤덮여 시끌벅적하다”고 답했다. 스님은 사찰 주변 상황에 대해선 자세히 설명했지만, 그에 대한 입장이나 판단을 묻는 질문엔 말을 아꼈다.
 
  “이젠 그저 가족들끼리 조용히 추모하게 내버려뒀으면 해요. 정치도 좋고 이념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기자들이 찾아오고 시끄럽게 떠들면 남은 가족들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물론 쉽게 잊을 순 없겠지만, 그래도 잊을 수 있게 돕는 게 도리 아닐까요. 부모님들이 절에도 자주 오시는 분들이라 남의 일 같지 않습니다.”
 
  효순·미선 양의 부모 연락처와 집 위치를 물었더니 스님은 손사래를 쳤다. “기자들과 인터뷰하는 걸 너무 힘들어한다”면서 “웬만하면 그냥 돌아가 달라”고 당부했다. “한 달 후면 10주기라 앞으로 기자들이 계속 올 텐데, 부모들의 정확한 심정을 알려야 조금이라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겠느냐”며 거듭 요청했지만, 끝까지 묵묵부답이었다.
 
  사찰과 추모비를 뒤로하고 인근 효촌리 마을 어귀로 향했다. 주민 몇 사람에게 집 위치를 물었지만, 모두 대답을 꺼렸다. 스님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들은 장갑차 사고에 대해선 한목소리로 “매년 기일마다 추모비 주변과 마을입구가 난장판이 된다”면서 “평소 개인적으로 조용히 오시는 분들이야 그 뜻을 존중하지만, 고인(故人)이 된 두 소녀를 이용해 정치적 이익을 노리는 사람들의 집회는 제발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토로했다. 한 주민의 말이다.
 
  “1년마다 ‘추모’란 이름으로 ‘반미(反美)’와 ‘반(反)정부’를 외치는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도로 한쪽을 막고선 마이크 잡고 행사를 하는데, 진짜 추모인지 뭔지 잘 모르겠어요. 현장에서 연극을 하는가 하면, 이상한 노래도 부릅니다. 유가족과 마을 주민 대다수가 반기지 않는 행사를 그들이 굳이 해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그는 또 “‘국민추모비’란 이름으로 추모비를 하나 더 마을에 세우려고 한다는데, 마을에서 좋게 생각하는 사람 한 명도 없다”며 “마을이 크지 않아 효순이 미선이는 모두의 딸과 다름없는데, 자꾸 시끄러워지는 걸 누가 좋아하겠나”고 했다.
 
강순정 범민련 전 부의장이 북한에 보내 《노동신문》에 게재된 효순·미선 양 관련 사진들. 강씨는 26차례 북한 지령을 받고 김정일 충성서약문 작성과 맥아더 동상 철거·대추리 미군기지 반대시위에 참가했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2006년 12월 구속된 강씨는 시신 사진까지 보냈고, 신문은 이를 그대로 실었다.
 
  忌日 되면 온 가족 피난
 
  지난해 6월, ‘2012년 미선·효순 추모비 건립위원회’는 “미군이 세운 추모비는 무의미하다”면서 “10주기인 올해 6월 13일까지 사고 현장 인근에 추모비를 건립한다”며 기금 마련에 나선 바 있다. 건립위원회는 2010년 1월 의정부 효자고 교사 심우근(54)씨 등이 주도해 결성한 단체다. 심씨는 2002년 사고 당시 미선 양의 언니가 다니던 의정부여고 교사였다.
 
  미선 양의 집을 찾아나섰다. 생각보다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마을 집집이 문패가 있는 데다 마을 어귀에서 멀지 않았기 때문이다.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두드렸지만, 인기척이 없었다. 문앞을 지키는 개들만 크게 짖어댔다. 약 2시간 후, 농사일을 끝낸 모자(母子)가 트럭을 타고 집에 돌아왔다. 인터뷰를 요청하자, 모판을 정리하던 미선 양의 어머니 이옥자(55)씨는 어두운 표정으로 돌아서더니 이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오빠 규진(28)씨가 대신 설명했다.
 
  “멀리서 못 보던 차가 집 앞에 서 있어 무슨 일인가 했는데, 기자님인 걸 보니 ‘결국 또 올 것이 왔구나’란 생각이 드네요. 가족 모두가 너무 지쳐 있습니다. 가슴 깊이 묻고 싶은데, 매년 이렇게 찾아오시니 그것도 쉽지 않아요.”
 
  ―한 달 후면 사고 10주기라 또 많은 사람이 찾아올 것 같은데요.
 
  “6월 12일 즈음이 되면 온 가족이 다른 곳으로 ‘피난’을 갑니다. 집에서 조금만 나오면 멀리 버스들이 오고 추모비 쪽에 올라가시는 모습이 보여요. 마음이 그리 편치는 않습니다. 부모님은 오죽하시겠어요. 부디 가족의 입장도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단순 추모를 넘어 정치집회로 변질됐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순수한 추모는 가족 입장에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개인적으로 조용히 오셨다 가는 분들이 꽤 계시다고 하더라고요. 그렇지만, 단체행동이 시작되면 항상 정치적 이슈가 섞이니까…. (대선이 있는) 올해는 정치적으로도 민감한 시기인 데다 최근 광우병 문제까지 또 터져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겠네요. 추모해 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정치색 짙은 반미 집회는 부디 자제해 주셨으면 합니다.”
 
  ―추모비에 ‘미 2사단’이라 적힌 부분만 심하게 훼손이 됐던데요. 미군이 추모비를 세운 사실에 대해 누군가 불만이 많았나 봅니다.
 
  “그거 발견하고 너무 화가 났습니다. 추모를 위해 세운 건데, 그렇게까지 훼손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매년 미군에서 꽃을 보내 주는데, 추모행사 끝나고 가 보면 내동댕이쳐져 있더라고요. 사고 당시엔 저도 미군이 너무 미웠지만,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하는 건 옳지 않다고 봅니다.”
 
 
  “가족끼리 조용히 추모하게 해주세요”
 
2010년 6월 무단 방북한 한상렬 한국진보연대 상임고문이 평양 모란봉제1중학교 교실에 놓인 효순·미선 양의 사진을 보고 울고 있다.
  ―10년 동안 생각이 많이 달라졌나 봅니다.
 
  “그때 고3이었어요. 철없던 시기였고, 너무 큰일을 당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죠. 온 가족이 뭔가 거대한 흐름에 휩쓸린 느낌입니다. 이젠 벗어나고 싶습니다. 모든 과정이 나름 의미가 있었고 위로해 주신 모든 분께 정말 감사드리지만, ‘이제 그만 오셔 달라’는 말씀도 꼭 드리고 싶습니다. 저희 부모님의 심정도 비슷하다고 보시면 돼요.”
 
  규진씨는 주중엔 인근 지역 축협에서 근무하고 농번기 주말엔 집에서 농사일을 돕는다. 짧은 대화를 마칠 때쯤, 미선 양의 아버지 심수보(58)씨가 도착했다. 인터뷰를 요청하니 난감해했다. “모내기를 막 시작해 인터뷰할 겨를이 없다”는 이유였다. 꼭 전하고 싶은 말만 짧게 해 달라고 하니 아들과 비슷한 대답이 돌아왔다.
 
  “드릴 말씀이 별로 없습니다. 딸아이에 대한 관심은 감사드리지만, 정치적으로 확대하는 것은 자제해 주셨으면 해요. 저는 평생 농사만 지어 왔습니다. 정치나 이념에 대해선 잘 몰라요. 이렇게 찾아오시는 것도 편치 않습니다. 가족끼리 조용히 추모할 수 있게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부자(父子)가 논으로 떠난 후, 집 마당에서 텃밭을 가꾸던 미선 양의 할머니 윤석금(78)씨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그는 “이렇게 찾아온다고 손주가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찾아올 때마다 손주가 생각나서 힘들다”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매일같이 한방에서 잠자던 손주인데 어떻게 잊겠습니까.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하지요. 잊으라고 하면 제가 죽는 수밖에 더 있겠어요. 그저 남은 손주들이 건강하게 잘살길 바랄 뿐이에요. 다행히 잘 자라 줘서 고맙고요.”
 
  효순 양의 집은 마을 깊숙이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사람이 오지 않아 떠나려고 할 때쯤, 일가족이 탄 차가 마당에 들어섰다. 그들은 낯선 이의 방문에 당황하다가, 기자임을 알고선 체념한 표정으로 차에서 내렸다. 효순 양의 어머니 전명자(50)씨는 말없이 곧바로 집에 들어갔다.
 
  아버지 신현수(58)씨는 “최근 위암 수술을 해서 몸이 좋지 않다”면서 “길게 대화할 힘도 없고, 할 말도 별로 없다”며 이렇게 말했다.
 
  “자식을 잃었는데, 부모 잃은 거와 같겠어요. 이렇게 자꾸 찾아오면 생각만 자꾸 납니다. 이제부턴 가족끼리 조용히 추모하고 싶으니, 그만 오시면 좋겠어요. 부탁드립니다.”
 
 
  ‘평양 모란봉中 명예학생’ 등록한 北
 
  미군의 사고처리 과정이 매끄럽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분노한 국민은 촛불을 들고 모였고,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한국 정부와 미국은 조지 W. 부시(Bush) 대통령이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에게 전화로 직접 사과하는 등 뒤늦게 사건진화에 나섰다. 추모비를 세우고, 배상금과 성금을 유가족들에게 전달했다. 그렇게 사건은 ‘일단락’됐다. 10년이 지난 현재, 유가족과 마을 주민 중 누구도 이 사건을 ‘현재진행형’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국민의 ‘순수한 분노’와 달리, 남한 내 일부 ‘세력’과 북한은 이를 ‘반미’ 이슈로 확대했다. 이들은 ‘사고’를 ‘살인’이라 불렀고, 한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전면개정과 함께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했다. 북한은 대놓고 두 여학생을 ‘평양 모란봉제1중학교 6학년 9반 명예학생’으로 등록한 후 빈 자리에 영정까지 갖다놓고 장기간 보존했다.
 
  취재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이 편치 않았다. “유가족들의 심정을 정확하게 전달한다”는 목적이었지만, “제발 오지 말아 달라”는 간곡한 호소를 처음부터 어긴 셈이다. 그들은 “올해 처음 온 언론사 기자니 우리의 뜻을 잘 전달해 이제부터 조용히 지내게 해 달라”고 했다. 그들은 지극히 상식적이고 평범한 대한민국 국민이었다.
 
  사건의 당사자인 유가족과 마을 주민 대다수는 두 여학생을 가슴에 덮고 잊으려고 한다. 모두가 ‘정치색’을 띤 시위나 집회로 확산되는 것을 꺼렸다. 그들이 원치 않는 일을 굳이 주도하는 이들은 누구이고, 그들의 최종 목적은 무엇일까.⊙

김정우 월간조선 기자 (hgu@chosun.com)

월간조선 2012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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