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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동부연합의 정체, 從北의 실체

정치·북한

by 김정우 기자 2012. 6. 20.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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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주민 해방운동 벌이는 ‘원조 주사파’
투표부정·폭력으로 금배지 빼앗은 ‘당권 주사파’

⊙ 민혁당 결성해 金日成 만난 ‘주사파의 代父’ 김영환, 北 체제 변환운동으로 中서 구금
⊙ 민혁당 출신 이석기와 통합진보당 당권파, 투표부정·폭력·불법 사태에도 결사저항
⊙ “경기동부는 유령단체” 주장한 김미희(성남중원), 경기동부연합 대의원 명단에 이름 올라 있어
⊙ “北 추종하든, 그렇지 않든 중요하지 않다. 단지 남한에서 혁명하는 것이 중요”(이석기 판결문 中)
⊙ 對北전문가들 “‘몸통’이 누구든 의미없어… 北은 결국 ‘머리’를 차지하려 할 것”
 

지난 5월 12일 통합진보당 중앙위원회에서 당권파 중앙위원들이 의장석 진입을 시도하고 있다.


 “한 유령이 대한민국을 휩쓸고 있다. ‘경기동부연합’이란 유령이.”
 
  160여 년 전 칼 마르크스(Marx)가 쓴 《공산당 선언》의 첫 구절을 누군가 ‘경기동부연합’으로 바꿨다. 국회 의석 13석을 확보한 ‘괴상한 세력’이 대한민국 정치판을 말 그대로 ‘휩쓰는’ 모양새를 빗대 한 말이다.
 
  ‘경기동부연합’이란 이름은 좌파 성향의 진중권 동양대 교수가 지난 3월 22일 라디오방송에 출연해 “이정희(李正姬) 대표가 속한 계파(系派)”라고 언급하면서 실체가 드러났다. 지난해 초부터 일부 매체가 “(이 대표가) 경기동부연합에 휘둘린다”며 관련 내용을 간간이 보도했지만, 큰 파장 없이 이른바 ‘진보진영’의 논란으로 머물고 말았다.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의 야권 단일후보 경선 여론조사 조작을 배후 조종한다는 ‘통합진보당 당권파’의 실체가 ‘경기동부연합’이란 이름으로 수면 위에 떠오르자 통진당 내 비(非)당권파와 과거 운동권에서 활동했던 인사들은 “결국 올 것이 왔다”는 분위기였다. 이정희 대표가 서울 관악을 선거구 국회의원 후보에서 사퇴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했지만, 4·11 총선 직후 비례대표 부정선거 사태로 경기동부연합은 다시 이슈의 중심이 됐다. 이석기 비례대표 당선자는 경기동부연합의 ‘몸통’으로 지목됐다.
 
한 여성 당원에 머리채를 잡힌 조준호 통합진보당 공동대표 사진을 1면에 보도한 《중앙일보》.
  NL(민족해방·주사파)과 PD(민중해방·마르크스-레닌주의) 간에 벌어진 당 내분은 최악의 폭력사태로 이어졌다. 지난 5월 12일 인터넷으로 생중계된 당 중앙위원회는 주먹질과 발길질이 오간 전쟁터였다. 통진당 비당권파는 14일 비례대표 후보(14명) 총사퇴를 결의하고, 강기갑(姜基甲) 의원을 위원장으로 하는 비상대책위원회 구성을 선언했다.
 
  같은 날 김영환(金永煥)씨가 중국에서 북한 내 지하당 구축 등의 운동을 전개하다 중국 국가안전부(한국의 국가정보원 격) 산하 랴오닝성(遼寧省) 국가안전청에 체포돼 50일 가까이 구금 중인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김씨는 1980년대 대학가에 퍼졌던 주체사상 교범 《강철서신》의 저자로, 북한의 지령으로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을 창당하고, 간첩과 함께 밀입북해 김일성(金日成)을 두 차례 만나고 온 ‘종북의 원조’다. 김일성의 주체사상 지식 수준에 실망한 그는 황장엽(黃長燁) 북한 노동당 비서의 망명을 계기로 전향해 북한 민주화 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이석기 당선자와 김영환씨는 ‘민혁당’이란 같은 뿌리를 둔 주사파다. 두 사람 중 한 명이 이끄는 계파는 투표 부정을 통해 금배지를 강탈, 이를 지키기 위해 폭력에 분신(焚身)까지 자행하고, 다른 한 명은 ‘과거 동지들’과 함께 북한 주민의 해방을 위해 몸을 던졌다. 그들은 어떻게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됐을까.
 
 
  단독입수한 경기동부연합 대의원 명단 보니…
 
성추문으로 물러난 통합진보당 윤원석 후보를 대신해 경기도 성남중원에 출마한 김미희 후보가 출마회견을 하며 《조선일보》 기사 내용을 비난하고 있다.
  통진당 당권파의 핵심으로 알려진 ‘경기동부연합’은 4·11 총선 직전까지 베일에 싸여 있었다. 투표 부정이 밝혀진 이후 많은 내용이 보도됐지만, 진짜 ‘실체’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경기동부연합의 표면적 의미는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약칭 전국연합) 산하 지역단체다. 경기도 용인과 성남 등 경기동부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해 이런 이름이 붙었다.
 
  전국연합은 1991년 12월 1일 연세대에서 재야운동권 13개 부문 단체와 12개 지역단체가 참여해 결성했다. 당시엔 경기동부연합이 없었으며, 대신 ‘경기남부연합’이 해당 지역에서 활동했다고 한다.
 
  당권파들의 주장과 달리 경기동부연합의 실체는 분명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월간조선》이 최근 단독 입수한 ‘전국연합 대의원 명단’을 보면, 총 35명의 대의원을 보유한 지역연합 단체로 기록돼 있다. 2000년대 초에 작성한 이 명단엔 우위영 통합진보당 대변인, 김미희(金美希) 통합진보당 국회의원 당선자(성남시 중원구), 편재승(片在承) 통합진보당 의정지원단장, 김배곤(金培坤) 통합진보당 용인시위원장, 한용진 성남평화연대 정책위원장, 김기창 전(前) 민주노동당 성남시협의회의장, 이양수 전 민주노총 조직실장 등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다. 편 단장과 김 위원장은 19대 총선 예비후보 등록자이며, 편재승, 이양수, 한용진 등 3명은 전국연합 10기 중앙위원회에 경기동부연합 대표로 올라 있다.
 
  이름이 명시된 김미희 당선자의 경우, 총선 전 《조선일보》가 경기동부연합 출신 계파 소속이라고 보도하자, 기자회견을 열고 “지금은 존재하지도 않는 ‘경기동부’라는 유령단체를 만들어 색깔론을 제기하는 《조선일보》는 이미 언론이길 포기했다”며 비난했었다. 우위영 대변인은 당시 논평을 통해 “우리 당 출마 후보들에 대한 명백한 허위사실”이라며 “명예훼손과 근거 없는 비방에 대해 법적인 책임을 묻겠다”고 주장했다.
 
  논란이 된 이석기 당선자의 이름은 당시 대의원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 NL 주사파 계열에 정통한 한 인사는 이에 대해 “당시(2000년대 초 명단을 작성했을 때) 이 당선자는 반국가단체 혐의로 도피 중인 상태였거나 대의원 대신 배후에서 활동했을 가능성 등 여러 가지로 짐작할 수 있다”고 증언했다. 이름이 올라 있는 대의원 상당수가 이석기 당선자의 모교인 한국외국어대 용인캠퍼스 출신인 데다, 지하당 출신이 굳이 이름을 내걸 필요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청년비례대표’ 김재연(金在姸) 당선자는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소속 대의원으로 표기됐다. 김 당선자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한총련은 잘못한 것이 없는 단체라고 판단했다”라며 “학교 안에서 3년간 수배자 생활을 했다”고 밝힌 바 있다.
 
 
  김영환과 하영옥, 그리고 이석기
 
1980년대 대학가에 퍼졌던 주체사상 교범 《강철서신》의 저자로, 북한의 지령으로 민족민주혁명당을 창당한 ‘종북의 원조’ 김영환씨. 최근 중국에 구금 중인 사실이 밝혀졌다.
  경기동부연합과 한총련 등이 참가한 ‘전국연합’은 어느 정도 공개적으로 활동을 해왔다. 연방제 통일방안을 지지하는 등 친북통일투쟁 노선을 전개했지만, 조직의 존재 자체를 숨기진 않았다.
 
  문제는 이석기 당선자가 활동했던 북한의 대남 지하당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이다. 민혁당의 뿌리는 1989년 3월 3일 서울대 법대 출신의 하영옥(河永沃)씨와 박모씨가 이석기 당선자와 함께 결성한 ‘반제(反帝)청년동맹’이다. 북한 김일성이 15세 때 중국 지린(吉林)에서 결성한 비합법 지하청년혁명 조직인 ‘반제청년동맹’과 이름이 같다.
 
  하영옥, 이석기 등 5명의 중앙위원은 김일성 생일인 4월 15일을 기해 전국 대학가에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 장군님의 77회 탄생일을 축하드린다”는 유인물을 뿌리며 조직의 실체를 최초로 알렸다. 그들은 지도이념으로 ‘김일성 주체사상’을 채택하고, 강령에 “김일성 장군님과 한국민족민주전선(한민전)의 향도 따라 나아가는 김일성주의 청년 혁명조직”이라고 명시했다.
 
  반제청년동맹은 이후 김영환씨가 조직을 주도하면서 ‘민혁당’이란 이름으로 개편했다. 그는 반제청년동맹 가입 후 남파간첩 윤택림에게 포섭돼 대학 1년 후배인 조유식(曺裕植)씨와 함께 밀입북했다. 김일성과 두 차례 면담한 그는 남한에 돌아온 후 반체청년동맹의 총책이 됐다.
 
  1992년 3월 16일 김씨의 주도로 민혁당이 창당됐다. 김씨는 중앙위원장이 됐고, 하영옥씨와 박모씨는 중앙위원을 맡았다. 이들은 3명으로 구성된 당 중앙지도부 산하에 도당 성격의 위원회를 뒀는데, 당시 경기남부위원장이 지금의 통진당 이석기 당선자이다. 《월간조선》이 최근 입수한 이 당선자의 민혁당 관련 판결문(2003년)을 보면, 당시 그는 하영옥씨의 지도를 받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통합진보당 부설 진보정책연구원의 박경순 부원장은 당시 울산지역위원장, 이의엽(李義燁) 통합진보당 정책위의장은 부산지역위원장이었다. 이 당선자는 산하 지역위원회인 성남지역위원회도 관리했다. 이정희 대표 쪽의 투표 부정으로 대신 서울 관악을 지역에 출마해 당선된 이상규(李相奎) 통합진보당 정책위 부의장은 수도남부지역사업부를 맡았다.
 
  민혁당 총책 김씨는 북한으로부터 미화 40만 달러, 권총, 무전기, 난수표 등을 받고 당 조직 결성과 선거 지원자금으로 사용했다. 1998년 현직 구청장 신분으로 구속된 김창현(金昌鉉)씨도 1995년 지방선거 당시 자금 일부를 지원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통합진보당 울산시당 공동위원장인 김씨는 19대 총선에서 울산 북구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1995년 10월, 남파공작원 김동식이 충남 부여에서 군경과 총격전 끝에 체포됐는데, 그의 진술을 보면 김영환씨의 존재가 확인된다. 그는 “‘남한 주사파의 대부(代父)가 북한에 다녀갔다’는 말을 윤택림으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윤택림은 사회문화부 6과장 시절 김동식의 직속상관이었다.

민혁당 김경환

 

[바로잡습니다]
2012년 6월호 '[대해부] 경기동부연합의 정체, 종북의 실체'라는 기사 중 민혁당 연락책이었던 김경환 전(前) 월간 《말》지 기자는 김경환 현(現) '일하는사람들' 대표와 무관하기에 바로잡습니다. 김경환 '일하는사람들' 대표는 민혁당 사건과 무관합니다. 김경환 대표와 '일하는사람들' 관계자분들께 깊이 사과드립니다.


  역사를 바꾼 반잠수정 격침
 
  북한 엘리트 공작원 출신 A씨는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윤택림이 ‘중요한 사람이 (북한에) 왔다 갔는데, 곧 NL이 PD를 통일할 것’이라고 했다”며 “그땐 누군지 몰랐는데 후에 남한에 와서 자료를 보고 시기를 계산했더니 김영환이었다”고 설명했다.
 
  1997년 4월 주체철학의 창시자 황장엽 북한 노동당 비서가 남한으로 망명한 후, 김영환씨는 사상적으로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북한과의 연락을 끊은 김씨는 같은 해 9월 민혁당 해체를 선언했다. 크게 반발한 하영옥씨는 이후 당 재건에 나섰다.
 
  1998년 5월, 김영환씨는 월간 《말》에 “북한의 수령론은 완전한 허구이자 거대한 사기극”이란 제목의 글을 통해 김일성·김정일 체제를 정면 비판하며 북한과의 완전한 결별을 선언했다. 북한은 이에 간첩 ‘원진우’를 남파해 하영옥씨를 민혁당 총책으로 추인하고 ‘광명성’이란 대호명을 부여했다. ‘김영환의 변심’을 확인한 원진우는 당시 중국에 머물던 김씨의 주소지를 확보하고 하영옥을 북으로 데려가려 했다.
 
  하씨는 ‘개인사정’으로 동행하지 못했고, 1998년 12월 18일 새벽 원진우를 태운 북한 반잠수정이 대한민국 해군에 의해 격침됐다. 정확히 한 달 후 격침 위치 부근 150m 해저에서 반잠수정이 발견됐고, 해군은 잠수함 구조함과 잠수사 등을 동원해 인양 작업에 들어갔다.
 
  감압실에서 적응훈련을 거친 후 포화잠수법(혼합기체로 호흡)을 이용해 수심 150m까지 내려가 선체를 인양한 것은 당시로선 유례가 없었다. 약 두 달간의 작업 끝에 인양된 반잠수정은 ‘정보 덩어리’ 그 자체였다.
 
  원진우가 소지했던 전화번호 수첩(암호화), 주민등록증, 쓰레기봉투, 필름 등을 확보한 국정원은 간첩의 은신처와 행적, 그리고 주요인물 명단을 밝혀냈다. 그리고 ‘결정적 증거’인 김영환씨가 중국에서 귀국하면서 민혁당 사건의 전모가 드러났다. 만약 반잠수정 격침이 실패했다면, 원진우는 무사히 북으로 귀환하고 김영환은 암살됐을 가능성이 크다. 민혁당의 실체는 영원히 미궁에 빠졌을 것이다.
 
  김씨는 귀국 직전 《월간조선》과의 단독 서면 인터뷰에서 “황장엽 선생의 망명으로 주체사상은 북한체제와 분리됐으며, 김정일 정권은 주체사상의 적(敵)”이라고 공식선언했다. 김씨 측으로부터 귀국 의사를 전해들은 조갑제(趙甲濟) 당시 《월간조선》 편집장은 정부 측에 “주사파에서 전향해 북한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는 김씨에게 정부가 관용을 베풀면 어떻겠느냐”는 견해를 전달했다.
 
  이후 한기홍(韓基弘) 《시대정신》 발행인과 김씨의 어머니 조성자씨가 탄원서를 작성해 제출했고, 김씨의 귀국이 성사됐다.
 
 
  이석기 “北 추종하든, 그렇지 않든 중요하지 않다”
 

경기동부연합의 ‘몸통’으로 알려진 이석기 당선자. 김영환씨와 하영옥씨가 결성한 민혁당 경기남부위원회 출신이다.
  김씨는 집과 대공상담실 등을 오가며 약 9일 동안 4차례 ‘조사’가 아닌 ‘심사’를 받던 중 월간 《말》 기자를 만나러 간다고 한 후 잠적했다. 이틀 후 국정원은 김포공항을 통해 홍콩으로 탈출하려는 김씨를 체포했다. 김씨의 어머니는 탈출시도 이유에 대해 “친구들에게 피를 묻히기 싫었을 것”이라고 했다.
 
  김씨가 체포된 후, 조유식, 하영옥, 심재춘, 김경환, 최진수, 이의엽, 이석기 등 민혁당 관련자들이 차례로 붙잡혔다. 조유식씨는 김영환씨와 함께 전향이 인정돼 공소보류 조치됐다. 다른 이들은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대부분 노무현(盧武鉉) 정부 때 특별사면됐다.
 
  10여 년 후, ‘민혁당’이란 이름이 다시 언론에 등장했다. 주요 언론들은 ‘경기동부연합’의 핵심으로 하영옥, 이석기 등 민혁당 재건파를 지목했다. 지난 5월 9일 《동아일보》는 “정보당국이 민혁당 조직이 재건된 것으로 보고 하영옥씨의 행방을 찾고 있다”고 보도했다. 다음 날 《세계일보》는 한기홍 북한민주화네트워크 대표의 발언을 인용해 “이석기 당선자가 ‘숨은 실세’ 하영옥씨와 함께 조직 재건에 나섰다”고 보도했다.
 
  이석기 당선자의 2003년 판결문에 따르면, 이 당선자는 김영환씨가 민혁당을 이탈한 후 조직을 장악한 하영옥씨로부터 조직관리 지시를 받았다. 이 당선자는 당시 민혁당 조직을 이탈하려는 박모씨를 만나 “조직 내부에 사상적으로 변절한 사람들이 있어 전부 제명을 시켰다”며 만류했다. 박씨는 과거 이 당선자가 직접 반제청년동맹에 가입시켜 민혁당 선전국 소속 출판담당책으로 활동해 오던 인물이다. 판결문은 당시 이 당선자의 발언을 이렇게 기록했다.
 
  “제명된 인간들이 마치 조직의 중앙위원인 양 행세하며 많은 동지를 이탈시키고 있다. 북한을 추종하든, 그렇지 않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단지 남한에서 혁명을 하는 것이 중요한데 너는 왜 이탈하려 하느냐. 다시 조직에 합류하여 활동하자.”
 
  “북한을 추종하든, 그렇지 않든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이 당선자가 최근 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종북(從北)보다 종미(從美)가 훨씬 더 문제”라고 발언한 것과 묘하게 비교된다.
 
  이석기 당선자의 배후가 지금도 하영옥씨인지는 현재까지 확인된 바가 없다. 하씨는 “정보당국이 행방을 찾고 있다”는 보도에 대해 “지금 통합진보당 당원이지만 아무런 활동을 한 바 없다”며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씨는 지난 5월 11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경기동부연합과의 연관성에 대해 “그 친구들이 뭔가 그룹을 만들어서 같이 서로 결속해서 활동한다. 그건 그럴 수 있는데 활동방식에 사람들이 문제제기를 많이 하는 것 같고, 그 부분은 반성할 일이 있겠다”고 했다.
 
 
  ‘단선연계 복선포치’
 
  하씨가 배후로 지목되는 가장 큰 이유는 당권파의 실세로 꼽히는 이석기 당선자와 이의엽 정책위의장이 민혁당 시절 모두 하씨의 지도를 받았기 때문이다. 각각 경기남부위원회와 부산지역위원회를 맡은 두 사람은 하씨에게 수시로 조직활동과 현황을 보고했었다.
 
  지난 5월 9일, 하영옥씨에게 직접 전화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의 연락처와 주소지는 포털 검색을 통해 찾아냈다. 그는 기자의 소속과 이름을 되물은 후, ‘민혁당’ 관련 질문에 “됐습니다”란 한마디만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다음 날 ▲민혁당 재건 ▲북한 체제에 대한 입장 ▲북한과의 관계 ▲당권파와 관계 등과 관련한 질문을 적어 하씨 이메일로 보냈지만, 《월간조선》 마감일인 5월 16일까지 답장이 없었다.
 
  하씨를 비롯한 민혁당 관련자들은 ‘민혁당사건구속자모임’이란 인터넷 카페까지 만든 것으로 확인됐다. 2004년부터 운영된 카페는 11명의 회원이 서로 근황을 교류했으며, 2009년 1월 이후 글이 더 이상 올라오지 않고 있다.
 
  하씨는 자신이 ‘보안관찰대상자’라며 근황을 종종 올렸다. 2004년 작성한 글에선 “병원 입원 중 정형근을 비롯한 1986년 안기부 고문수사관을 고소하는 고소장을 작성해 퇴원 후 즉시 서울지검에 접수시켰다”라며 “공소시효가 지나 안 받는다는 접수담당자들에게 반인륜범죄에 해당하는 것을 검찰 측이 공소시효를 이유로 불기소 처리하면 그에 대해 헌법소원 등으로 다툴 것이라고 설득해 겨우 접수시켰다”고 적었다.
 
  그는 또 국가보안법과 보안관찰법에 대해 “21세기 새 시대에 이런 악법이 존재하고 현실적으로 기능 한다는 것은 참기 어려운 일”이라며 “그 법이 있다는 자체로 오히려 그들이 내세우고 있는 자유니 민주주의니 하는 것이 얼마나 허구적인지 잘 보여준다”고 했다.
 
  민혁당 수사에 관여했던 정보기관 관계자는 최근 기자와 만나 “경기동부연합 사태는 ‘제2 민혁당 사건’으로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깊이 연관돼 있다”며 “지하당에서 활동하던 이들이 10년 좌파정부를 거치며 지상에 올라와 공개적으로 투쟁을 벌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북한 대남공작부는 남한 내 여러 지하조직을 통해 공작을 벌이는데, 전체 현황과 실체를 가장 정확히 아는 것은 북한밖에 없다”며 “통합진보당이나 전국연합 내에서도 누가 북한과 연관됐는지 서로 모를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단선연계 복선포치’(單線連繫 複線布置)라고 불리는 이 방식은 여러 루트로 조직원을 배치하되, 하부 조직원들은 서로 모르게 한다. 조직 최상부 입장에선 과장·허위 보고를 걸러내고 무너진 조직망을 대체할 수 있어 효과가 크다.
 
 
  “통합 파탄될 경우 진보신당 고사시켜라”
 
이정희 전 통합진보당 공동대표(오른쪽)와 ‘제2의 이정희’로 불리는 김재연 국회의원 당선자.
  북한이 남한 내 다수 좌파조직에 접근해 포섭을 시도하고 조직을 구성한 사실은 여러 간첩단 사례를 통해 드러난 바 있다. 과거엔 통일혁명당(통혁당)이나 민혁당 등 주로 지하당 구축을 통한 투쟁노선을 전개했다면, 최근엔 2006년 ‘일심회 사건’이나 2011년 ‘왕재산 사건’ 사례처럼 ‘정치권 상층부 공작’을 통해 합법정당 장악을 시도하는 형태로 바뀌고 있다. 왕재산(김일성이 항일무장 투쟁전략을 제시했다고 주장하는 함북 온성의 산 이름) 수사자료에 따르면, 2011년 5월 북한 ‘225국’은 ‘왕재산 간첩단’에 “‘진보세력’과 ‘개혁민주세력’의 역량을 확대하고, 민노당을 중심으로 진보 대통합정당을 구성하라”고 지령을 내렸다. 검찰이 공개한 당시 지령문 중 일부다.
 
  “진보신당의 통합 반대세력은 민주노총 등이 내외협공을 들이대어 통합에로 몰아세우고, 통합이 파탄될 경우 진보신당을 고사시키라.”
 
  “사회당은 점차 악질분자들을 고립 축출 … 국민참여당은 이라크 파병 주장 등에 대해 공개 반성할 경우 통합에 참여시키라.”
 
  현재는 통합진보당이 된 당시 ‘진보대통합정당’ 논의와 관련한 내용으로, 통합진보당 내 권력 구도에 대한 북한의 의중과 목표를 알 수 있다. 북한은 현재 남한 내 상층부와 하층부를 망라하는 통일전선을 구축해 적화혁명 역량을 조성하고 있다.
 
  2001년 9월 경기동부연합의 상급단체인 전국연합은 충북 괴산군의 군자산에 모여 연방통일을 주창하는 이른바 ‘9월 테제(these)’를 결의했다. NL계가 주도한 이날 결의의 슬로건은 “3년의 계획! 10년의 전망! 광범위한 민족민주전선, 정당 건설로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하여 연방통일조국 건설하자”였다. 최근 《월간조선》이 입수한 ‘9월 테제’ 전문(全文) 중 일부다.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반민주적이며 반통일적인 악법들이 사문화되는 등 분단지배체제가 근저에서부터 무너져내리는 가운데 민족대단결운동이 유례없는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 반미자주화투쟁이 일부 선각자들과 특정단체를 넘어 노동자, 농민들과 지역민중들, 그리고 시민운동단체, 지식인들에게까지 들불처럼 확산되고 있다.”
 
  “(민족민주전선을 위해) 지역연합이 없는 곳에서는 시급히 다양한 방법으로 주체를 세워 지역연합을 건설하자. 전략근거지를 선정하여 지역정치활동과 조직활동의 정형과 모범을 창조하고 이를 확산하자. 시, 군, 구 단위로 사업을 심화시켜 지역주민들과의 혈연적 연계를 강화하자.”
 
  ‘정치 조직방침’은 노동자, 농민, 학생, 여성 등을 중심으로 한 부문조직 결집을 강조하는 한편, 전국민중연대를 강화해 각계각층 민중을 반미자주화투쟁으로 안내하자고 주장한다. 또 그들이 세울 정당에 대해선 “자주, 민주, 통일을 강령으로 하며 애국적 민주역량을 망라한 통일전선적 대중정당”, “각계각층 대중조직에 기반하고 민족민주전선에 복무하며 선거투쟁과 대중투쟁을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정당”이라고 목표를 정했다.
 
 
  “이석기 출마는 자충수”
 
  이날 재미(在美)교포인 한호석 통일학연구소 소장은 “조·미 관계 10년을 통해 본 한(조선)반도의 통일 정세”란 제목의 글을 통해 북한의 군사력과 정치외교력을 찬양하고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했다. 내용 중 일부다. 그는 북한을 ‘북(조선)’으로 표기했다.
 
  “북(조선)은 사회주의 혁명의 최대 시련기에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입지도 못한 채 허리띠를 졸라매고 국가역량을 총동원하여 대륙 간 탄도미사일 개발에 성공하였으며, 그로써 난관과 역경을 정면돌파하고 제국주의 세력과의 대결에서 전세를 역전시켰다.”
 
  “북(조선)은 교활한 제국주의 세력이 선의로 위장하고 접근해 올 때 방심하거나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또한 북(조선)은 제국주의 세력이 핵전쟁도 불사하겠다고 하면서 강경하게 나왔을 때 겁을 먹고 뒤로 물러서거나 적당히 타협하여 위기를 넘기려는 비굴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2000년 6월 평양회담에서 채택한 6·15공동선언은 앞으로 10년 안에 분단체제를 제거하고 조국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방략을 제시한 역사적인 문서다. 북(조선)의 견해에 따르면, 조국통일의 실현방략을 제시하고 있는 6·15공동선언이 2000년 6월에 채택될 수 있었던 것은 사회주의혁명 역량과 친미예속 세력의 대결에서 사회주의혁명 역량이 승리국면에 들어섰기 때문이라고 한다.”
 
  전국연합은 이날 ‘특별결의문’을 통해 “분단과 억압의 근원, 미국 부시 대통령의 방한을 기필코 저지한다”면서 “매국역적 이회창을 우두머리로 한 한나라당과 그 나팔수인 《조선일보》를 비롯한 반통일 세력들의 사대매국적 민족분열 책동에 철퇴를 가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10여 년 전 이들의 전략은 이번 4·11 총선을 통해 일부 완성될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통합진보당 내분으로 이들 입장에선 다시 몇 년을 후퇴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다. 한기홍 북한민주화네트워크 대표는 “이석기의 비례대표 출마는 결국 자충수”라며 “주사파들이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를 너무 무시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유동렬(柳東烈) 치안정책연구소 연구관은 “남파간첩들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은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 국내 주사파 핵심분자 약 1500명의 신상분석을 완료했다”면서 “A급에 속하는 김영환씨는 물론, B~C급인 왕재산 총책 김○○씨까지 포섭에 성공한 것을 보면, 여전히 발각되지 않고 활동하는 간첩망이 상당히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분석했다.
 
 
  北 엘리트 공작원의 예상 적중
 
김영환, 홍진표 등 ‘시대정신’ 그룹을 인터뷰한 《월간조선》 1999년 6월호.
  북한의 입장에서도 이른바 ‘경기동부’ 지역은 주요 거점 중 하나였다. 현재 경기동부연합의 활동지역인 용인과 성남은 1990년대까지 서울 출신 철거민과 소규모 무허가 공장 등이 모인 곳이었다. 도시빈민과 열악한 환경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들은 공작원들의 주요 타깃이 됐다. 유 연구관은 이 지역을 “당시 북한의 혁명인자 발굴거점이었다”고 설명했다.
 
  취재 중 만난 다수의 전문가는 “누가 통합진보당의 ‘몸통’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며 “‘몸통’이 누구든, 북한은 ‘머리’를 차지하려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북한의 ‘단선연계 복선포치’ 전략에 따라, 종북세력이 밀려나도, 또 다른 이들이 그 자리를 그대로 차지하기 때문이다.
 
  지난 5월 7일 오후 만난 북한 엘리트 공작원 출신인 A씨는 “만약 현재 상황에서 북한 대남공작 책임자라면 어떤 결정을 내리겠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직접 북한이 드러내놓고 반응을 보이기보단, 이른바 ‘조·중·동’으로 불리는 보수 언론에 화살을 돌려 관심을 집중시킬 것”이라고 답했다.
 
  A씨와 인터뷰를 끝낼 즈음 이석기 당선자의 “조·중·동 등에 의해서 ‘당권파’의 실세로 낙인찍혔다”는 발언을 보도한 속보가 올라왔다. 이 당선자의 첫 공식입장 발표였다.
 
  1990년대 초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와 한총련에서 NL 계열 활동을 하다 전향한 최홍재(崔弘在) 전 방송문화진흥회 이사는 선거 전후 통합진보당의 행태에 대해 “NL 통일전선전술의 전형적인 케이스”라며 “자신들의 힘만으론 다수 의석을 차지할 수 없으니 보다 큰 정당과 연대해 흔드는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최 전 이사는 또 “평범한 국민은 사상의 자유가 있고 이를 굳이 밝힐 이유도 없지만, 입법권자는 상황이 다르다”며 “이석기 당선자는 국회의원이 되려면 자신의 사상을 정확하게 밝히는 게 유권자에 대한 예의”라고 했다.
 
  안철수(安哲秀)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아버지 안영모 범천의원 원장은 4월 말 《국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안철수 원장이 “대한민국에 빨갱이가 어디 있습니까”란 말을 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이 같은 발언에 대한 답으로 강규형(姜圭炯) 명지대 교수는 《조선일보》 칼럼을 통해 시인 최영미(崔泳美)의 ‘돼지의 변신’이란 시를 소개했다.
 
  “그는 원래 평범한 돼지였다/감방에서 한 이십년 썩은 후에/그는 여우가 되었다… 감옥을 나온 뒤/그를 사람들이 높이 쳐다보면서/… 냄새 나는 돼지 중의 돼지를/하늘에서 내려온 선비로 모시며/언제까지나 사람들은 그를 찬미하고 또 찬미하리라….”⊙
 
이석기·김재연 물러난다 해도…
 
  주사파에 이어 이번엔 ‘남파간첩’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사형선고를 받았던 강종헌씨.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부정경선 여파로 당권파 이석기·김재연 비례대표 당선자가 물러날 경우, 이를 승계할 후보들에게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통합진보당은 지난 5월 14일 두 당선자를 포함한 경선 비례대표 후보자 14명 전원 사퇴를 결의했다.
 
  만약 총사퇴가 관철된다면, 남은 비례대표 후보는 4번 정진후 전 전교조 위원장, 5번 김제남 전 녹색연합 사무처장, 6번 조윤숙 장애인푸른아우성 대표, 12번 유시민 전 통합진보당 공동대표, 14번 서기호 전 서울북부지법 판사, 18번 강종헌 한국문제연구소 대표 등 6명이다.
 
  이 중 강종헌(康宗憲)씨의 이력이 최근 논란이 되고 있다. 재일교포 강씨는 고교생 때 북한 재일(在日)지도원에게 포섭된 후 서울대 의대 유학시절 김일성 회갑 축하선물로 직접 만든 노래와 맹세문을 보내고 국가기밀을 수집한 혐의로 체포돼 대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복역 중 감형돼 1988년 풀려난 인물이다. 이 사건은 일명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불렸다. 강씨는 간첩혐의에 대해 무죄를 주장하면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에 진실규명을 신청했고, 2010년 “불법 고문과 가혹행위를 당했다”는 이유로 재심권고 결정을 받았다. 강씨는 2011년 9월 서울고법에 재심을 청구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강씨가 보안사에 불법구금돼 수사받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고, 수사관들에게 상당한 강도의 가혹행위를 당했음이 인정된다”면서도, 간첩혐의 자체에 대해선 “판결에 나타난 범죄사실과 배치되는 자료 등에 비추어 조작됐을 가능성도 있으나, 중요 참고인 등을 조사할 수 없는 상태에서 범죄사실이 조작됐다고 단정할 수 없다”며 선을 그었다. 강씨에 대한 가혹행위는 인정했지만, 평양에 간 사실 등이 조작됐다는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은 셈이다. 강씨의 가석방 후 일본에서의 행적도 논란의 대상이다. 그는 귀일(歸日) 후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해외본부 공동사무국 차장이 됐다. 범민련은 ▲연방제 통일 지지 ▲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철폐 등을 주장해 1997년 대법원에서 이적단체 판결을 받은 단체다. 강씨 외 다른 한 명의 차장은 조총련 정치국 출신 대남(對南)공작원으로 알려진 박용(朴勇)씨다.
 
  홍형(洪熒) 전 주일공사는 칼럼을 통해 “1990년 8월 평양에서 개최된 범민족대회에 참석하고 1995년 8월 ‘민족통일대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조총련과 함께 만경봉92호 편으로 방북하는 등 이적단체 활동을 계속해 왔다”며 “‘재일동포유학생간첩단사건’보다 일본으로 돌아온 후 행적이 더 심각하다”고 밝혔다.
 
  홍 전 공사에 따르면, 강씨는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한통련) 범민련의 핵심 간부로서 1996년 7월 일본에서 ‘남조선 정치정세 및 통일 운동의 현황과 전망’이란 시국강연을 열고, 같은 해 12월엔 자신이 만든 ‘한국문제연구소’의 홈페이지를 통해 김영삼 정권을 비난했으며, 황장엽 망명에 대해선 ‘한국 정부 모략론’을 주장하는 등 철저히 평양의 입장에서 활동해 왔다.
 
강종헌씨의 정체에 대해 폭로한 김현장씨.
  강씨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1982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을 주도했던 김현장(金鉉奬)씨가 지난 5월 14일 강씨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글을 올렸다. 강씨와 함께 대전교도소 수감생활을 했던 김씨는 “강씨가 ‘평양에서 간첩교육을 받고 유학생의 신분으로 남한에 들어와 활동했던 모든 것을 1심 재판에서 혁명가답게 털어놓았다’고 했다”며 “사형선고를 받은 후 2심에선 1심에서 진술한 모든 것이 고문에 의한 조작이었고, 평양에 들어가 밀봉교육을 받았던 기간에 일본에 있었다는 알리바이를 만들어 제시하는 등으로 법정진술의 방침을 바꾸고 무죄를 주장했다”고 밝혔다. 김씨는 강씨를 “만고에 변하지 않을 김일성주의 신봉자”로 불렀다. 편지글 내용 중 일부다.
 
  “고등학교 다닐 적부터 기타 치기를 좋아했고, 북한의 각종 기념일, 특히 김일성 주석의 생일 때는 찬양하는 노래를 작사, 작곡하여 북으로 보냈다는 이야기며, 그때 마침 북한의 탁구선수가 국제대회에 출전하여 게임을 하던 사진이 실린 잡지책이 들어왔는데 여자선수들로 기억되는 선수들의 가슴에 붙이고 나온 북한 국기를 보고 감격스러워 했던 모습이며, 이 사진을 미전향수들이 요구하자 잘못하면 또 추가 사건이 벌어질 수 있다면서 거절하던 너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구나.”
 
  김씨는 행적을 공개한 이유에 대해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 18번으로 등장한 데 대하여 말문이 막혔다”고 밝힌 후, “나는 자네가 속한 조직의 힘을 알고도 남은 사람이며, 어떤 보복도 달게 받아들일 각오가 돼 있다”고 덧붙였다.⊙
 
민혁당에서 통합진보당까지
 
  1986년
  김영환(서울대 82학번·現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연구위원), 주체사상 교범인 《강철서신》 집필해 대학가에 배포.
 
  1986년 11월
  김영환, ‘민족해방 노동자당’ 사건으로 구속.
 
  1987년 8월
  하영옥(서울대 82학번·現 학원강사), 박○○(서울대 83학번·現 변호사), 이석기(한국외대 82학번·現 국회의원 당선자) 등 5명, 김일성주의 청년혁명조직인 ‘반제청년동맹’ 결성 결정.
 
  1988년 4월
  하영옥, 이석기 등 5명, 반제청년동맹 결성준비위원회 구성하고 중앙위원 됨.
 
  1989년 2월
  김영환 반제청년동맹 가입.
 
  1989년 4월
  하영옥, 이석기 등 5명, 반제청년동맹 결성, 전국 대학가에 김일성 생일 축하 유인물 배포.
 
  1989년 7월
  남파간첩 윤택림, 김영환 포섭 후 공작금과 난수표 등 전달.
 
  1991년 2~3월
  북한, 김영환에게 “동지 한 명과 입북하라”고 지령.
  김영환의 제의로 반제청년동맹을 지하당인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으로 개편 결정, 북한에 관련 내용 보고.
 
  1991년 5월
  김영환, 조유식(서울대 83학번·연락책·現 알라딘 대표)과 함께 입북해 김일성과 두 차례 면담.
 
  1991년 12월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 결성.
 
  1992년 3월
  김영환(중앙위원장·총책), 하영옥(중앙위원·조직책), 박○○(중앙위원·선전책) 등 3명, 김일성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하는 민혁당 창당.
  도당 성격으로 경기남부위원회(위원장 이석기), 영남위원회, 전북위원회 구성.
  산하 지역별 위원회로 울산지역위원회(박경순·現 통합진보당 부설 진보정책연구원 부원장), 성남지역위원회(이석기), 부산지역위원회(이의엽·現 통합진보당 정책위의장) 등 구성.
  부문별 사업지도부로 통일운동사업부(홍진표·現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 수도남부지역사업부(이상규·現 국회의원 당선자) 등 구성.
 
  1992년 8~10월
  안기부, ‘1995년 적화통일’ 목표 ‘중부지역당’ 총책 황인오(現 참여와개혁실천 부천시민사회단체협의회 공동대표) 등 120명 체포.
 
  1993년 1월
  안재구, 조선노동당 남한 내 지하당 ‘구국전위’ 결성.
 
  1994년 6월
  안기부, 안재구 등 구국전위 관련자 23명 검거.
 
  1995년 10월
  남파공작원 김동식 검거, “‘주체사상의 대부’가 북한에 다녀갔다”고 증언. 안기부 수사 시작.
 
  1997년 4월
  황장엽 북한 노동당 비서, 남한 망명.
 
  1997년 9월
  김영환, 민혁당 해체 선언. 하영옥은 반발.
 
  1997년 10월
  김영환, 중국 거주 아내 만나러 출국.
 
  1997년 10월
  최정남·강연정 부부간첩, “김영환 소개로 왔다”며 정대연 울산연합 집행위원장 접촉하려다 정 위원장의 신고로 체포.
 
  1998년 5월
  김영환, 월간 《말》 기고 통해 김일성·김정일 비판하며 북한과 결별 선언.
 
  1998년 11월
  남파간첩 원진우, 하영옥 만나 민혁당 재결성 약속 후 김정일이 내린 ‘광명성’ 대호명 부여하고 민혁당 총책으로 추인.
  김영환, 홍진표, 한기홍, 조혁 등 전향 386, 북한민주화 주창 《시대정신》 창간.
 
  1998년 12월
  대한민국 해군, 원진우를 태우고 북한으로 가던 반잠수정 격침. 하영옥은 북한에 이를 보고.
 
  1999년 3월
  해군, 북한 반잠수정 인양. 국정원, 민혁당 관련 문건 대량 입수.
 
  1999년 6월
  김영환, 《월간조선》과 단독 서면 인터뷰, “김정일 정권은 주체사상의 적” 선언.
 
  1999년 7월
  김영환, 가족을 통해 탄원서 제출 후 자진 귀국. 밀입북과 민혁당 결성 등 자백.
 
  1999년 8~9월
  김영환, 홍콩으로 탈출 시도하다 김포공항에서 체포. 이후 조유식, 하영옥, 심재춘(서울대 88학번·하영옥의 연락책), 김경환(월간 《말》 기자) 등 체포.
  국정원, 민혁당 사건 중간수사 발표.
 
  2000년 8월
  영남위원장 최진수 등 주요간부 4명 검거.
 
  2000년 9월
  부산지역위원장 이의엽 검거.
 
  2001년 9월
  전국연합, ‘민족민주전선 일꾼전진대회’에서 ‘9월 테제(군자산의 약속)’ 발표.
 
  2002년 5월
  경기남부위원장 이석기 검거.
 
  2003년 4월
  노무현 대통령, 하영옥, 박경순, 김경환 등 공안·노동사범 1424명 특별 사면·복권.
 
  2003년 8월
  이석기, 8·15 특사로 가석방.
 
  2004년 2월
  민주화보상위원회, 구국전위 관련자 홍중희를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
 
  2006년 10월
  국정원, ‘일심회’ 총책 장마이클(장민호), 조직원 이정훈·손정목 등 체포.
 
  2007년 9월
  전국연합 해체, 한국진보연대 창립.
 
  2008년 2월
  민주노동당 비상대책위원회(대표 심상정), 임시전당대회에서 당내 종북주의 청산 위한 ‘일심회 연루자 제명 안건’ 상정. NL 계열 반대로 폐기. 심상정·노회찬 등 PD 계열 탈당 후 진보신당 창당.
 
  2010년 8월
  검찰, 북한 ‘225국’ 지령 지하당 ‘왕재산 간첩단’ 중간수사결과 발표.
 
  2011년 12월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새진보통합연대(진보신당 탈당파)가 결합해 통합진보당 창당.
 
  2012년 3월
  이정희 관악을 지역구 경선조작 논란. 진중권 등 ‘경기동부연합’ 관련 의혹 제기.
 
  2012년 4월
  통합진보당 진상조사위원회(위원장 조준호 공동대표), 비례대표 경선 진상조사보고서 발표.
 
  2012년 5월
  김영환석방대책위원회, 김영환 중국 강제구금 사실 공개.
월간조선 2012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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