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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북한

[동행취재] 6·25 戰死者 유해발굴 현장

김정우 기자 2009.01.28 09:42
“10㎝만 더….
지금 포기하면 영원히 못 찾는다”


2000년 4월 ‘6·25전쟁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시작된 유해 발굴사업으로 2008년 7월 현재 총 2612구의 유해가 발굴됐다. 국군 2002구와 미군 8구가 아군으로 분류됐고, 북한군 399구와 중공군 173구가 적군으로 수습됐다. 국군유해 2002구 중 72구의 신원확인에 성공했고, 42명은 DNA 검사를 통해 유가족까지 밝혀졌다.

金正友 月刊朝鮮 기자 (hgu@chosun.com)

 “이제 곧 비가 그칠 겁니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 도마치고개(경기도 가평군과 강원도 화천군 경계) 정상, 유해발굴감식단의 李庸碩(이용석·중령) 발굴과장은 이렇게 말했다.
 
  “유해를 찾는 것은 단순 발굴이 아니라, ‘영혼과의 대화’입니다. 날씨가 우리를 협조 안 하면 누가 협조하겠어요.”
 
  경기도 가평군 화악산 자락, 이날 일기예보는 “아침 일찍 내리기 시작한 빗줄기가 오후 들어 더 굵어질 것”이었다. 예상 강우량은 40㎜. 이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 중령은 장병들에게 우의를 벗으라고 지시했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과 육군 이기자부대 합동으로 구성된 30여 명의 장병들은 우의를 벗고 다시 집결했다.
 
  10분간 준비를 마친 후 능선을 따라 올라서는 순간, 산 중턱의 안개가 우리 주변을 에워쌌다. 그리고 비가 그쳤다.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은 6·25전쟁 당시 戰死(전사)했지만 수습되지 못한 13만여 호국용사들의 유해를 찾는 사업이다. 2000년 4월 ‘6·25전쟁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시작해 2003년 사업 지속 추진을 결정했다. 2005년 6월에 국가영구사업으로 지정돼 2007년 1월 ‘국방부 유해발굴 감식단’이 창설됐다.
 
  2008년 7월 현재 총 2612구의 유해가 발굴됐다. 국군 2002구와 미군 8구가 아군으로 분류됐고, 북한군 399구와 중공군 173구가 적군으로 수습됐다. 국군유해 2002구 중 72구의 신원확인에 성공했고, 42명은 DNA 검사를 통해 유가족까지 밝혀졌다.
 
 
  “58년 전 태어났다면 내가 이곳에 묻혔을 수도…”
 
유해 수습을 마친 후 약식 제례가 진행된다. 지휘관과 장병들이 경례하고 있는 모습.

  첫 행선지는 경기도 가평군 북면 화악1리의 한 작은 마을. 도로 안쪽 100m쯤에 자리잡은 수풀 뒤로 큰 구덩이가 보였다. 6ㆍ25 전쟁 당시 포구로 추정되는 곳으로, 국군 2구에 중공군 8구, 총 10구의 유해가 발견됐다.
 
  병사들의 유품도 보였다. 수통과 탄피를 비롯해 치약, 칫솔, 버클, 무전기, 건전지…. 남겨진 유품들이 58년 세월의 간극을 덮어주고 있었다.
 
  “김 기자, 이것 좀 봐요.”
 
  취재 안내를 하던 정훈참모 李相金(이상금) 소령이 한 유품을 가리켰다. 작은 병 두 개가 반쯤 흙 속에 묻혀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병 무늬를 확인했다. ‘펩시’였다.
 
  1951년 4월 말, 주야로 공세를 펼쳐오는 중공군 제20군과 맞선 국군 6사단은 퇴로까지 차단되는 위기를 겪고 있었다. 85㎜ 곡사포가 빗발치는 참호 속에서 두 병사는 ‘귀한 콜라’ 한 병을 나눠 마시며 어떤 대화를 나눴을까.
 
  취재에 동행한 북한 인민군 출신 탈북자 강민철(가명) 씨에게 느낌을 물었다. 그는 대답을 미룬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가 처음 내뱉은 말은 “이상하다”였다. 58년 전 서로 총부리를 겨누며 처절한 전투를 벌였고, 불과 몇 달 전까지도 적군과 아군의 관계였던 상황. 그는 ‘혼란스런’ 감정을 억누르려 잠시 침묵했던 것이다.
 
  “58년 전 태어났다면 내가 이곳에 묻혀 있을 수도 있겠죠.”
 
  바로 위쪽에서 중공군으로 추정되는 유해 10여 구가 발견됐다. 발굴단 관계자는 “유해가 가지런히 매장된 것으로 볼 때 중공군이 이곳을 점령한 후 직접 처리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아군이든 적군이든 패전 지역인 곳에는 주로 뒤엉킨 유해가 발굴되기 때문이다.
 
  탄띠와 칫솔 등 유품들도 다량 발굴됐다. 중공군 유품의 특징인 ‘모신나강’탄과 사기그릇이 함께 발견됐다.
 
 
  유해 들어올리는 꿈꾼 후 최초 발견
 
수습을 마친 유해가 소형관에 입관된 뒤 운구되는 모습. 신원이 확인될 경우 화장 후 현충원 묘역에 안장된다.

  같은 날 오후 화악1리에서 30분 거리에 위치한 적목리의 한 언덕에는 유해발굴 작업이 한창이었다. 6·25 당시 전투가 끝난 후 마을 주민들이 시신 2구를 수습해 묻은 곳이다. 현장을 제보한 朴泰奎(박태규·65) 씨는 “7살이었던 당시 마을 어른들한테서 숯가마 터에 묻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58년 동안 무섭고 측은해 마음에 걸렸다”고 했다.
 
  “저 산 너머가 ‘가림마을’이에요. ‘아름다운 숲’이란 뜻이죠. 그곳에서 목숨을 바친 이 두 영혼이 이제 진짜 ‘아름다운 숲’으로 돌아갔으리라 믿어요.”
 
  박 씨가 제보한 숯가마 터에서 국군으로 추측되는 유해 2구가 발견됐다. 유해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ㅇㅇㅇ부대 6중대 본부소대의 柳任奎(유임규·22) 상병. 유 상병은 발견하기 전날 꿈에서 ‘유해를 들어올리는 꿈’을 꿨다고 말했다.
 
  “저희 부대에 탄약고가 하나 있어요. 저희가 초소근무를 서는 곳인데, 그곳에서 유해를 제가 직접 들어올리는 꿈을 꿨습니다.”
 
  유 상병은 아침 식사 중 포반장인 慶奎奕(경규혁) 하사에게 그가 꾼 꿈 이야기를 했다. 경 하사는 오전 회의 때 모인 부대원들에게 꿈 내용을 전했다고 한다. 그날 오후, 발굴현장에 투입된 유 상병은 땅을 파기 시작했다. 제보자의 증언에 의한 장소였지만, 워낙 오랜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정확한 지점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제보자가 말한 숯가마 터는 몇 시간 후 발견됐지만, 유해는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바닥지층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층이 바뀌었다는 것은 ‘허탕’을 의미한다.
 
  “그때 생각난 말이 ‘10cm만 더’였어요. 여기서 멈추면 영원히 못 찾을 거라 생각했죠.”
 
  그리고 두 삽을 더 팠다. 나무막대기 같은 긴 물체가 삽 끝에 걸렸다. 곧장 달려온 유해발굴병은 시신의 정강이뼈라며 1차 유해 판정을 내렸다.
 
  현장 점검을 하던 대대장 李龍勸(이용권) 중령은 “조상의 氣(기)와 후손의 기가 통하듯, 선후배 기운이 서로 통한 것”이라면서 “우리가 찾아내는 게 아니라 묻힌 영혼들이 우리를 찾아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처음 며칠 동안 허탕만 치던 장병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심마니가 산삼 캐러 가듯 마음을 정갈하게 하라’고. 그러면 산야에 묻힌 분들이 스스로 돌아와 주실 거라고 했습니다. 유 상병의 정성에 선배 전우 분들이 도장까지 갖고 나타나셨네요.”
 
  전투복 앞 주머니에서 도장 하나가 발견됐다. 도장에 새겨진 이름은 ‘문성신’. 이것이 신원 확인에 결정적 도움이 됐다.
 
  다음 날 국방부 유해발굴 감식단으로 옮겨진 유해를 조사한 결과, 제주도 북제주군 출신의 ‘문성신’ 씨로 추정됐다. 2사단 소속으로, 1951년 1월 1일에 전사한 것으로 기록됐다. 유가족은 현재 딸 한 명이 생존해 있다. 하지만 도장의 주인이 유해와 일치한다는 증거가 없으므로, 추후 DNA 검사를 통해 최종 신원이 확정된다.
 
  오후 5시, 발굴작업이 마무리됐다. 두개골과 팔 한 쪽, 정강이뼈가 발견돼 ‘부분유해’로 판정됐다. 전문 감식병들은 유해를 차례차례 오동나무로 만들어진 작은 관에 넣었다. ‘완전유해’는 대형관에, ‘부분유해’는 소형관에 입관된다. 국군으로 판정될 경우 태극기로 포장되고, 적군은 흰 종이로 포장된다.
 
  신원이 확인된 국군 유해는 화장 후 현충원 묘역에 안장된다. 미확인 유해는 현재 화장 후 현충원에 임시 안장하고 있으나, 2009년부터 DNA 기술 발전추세를 고려해 화장하지 않고 별도시설에 보관할 계획이다.
 
  우방국(UN군) 전사자는 본국으로 인계된다. 북한군과 중공군 등 적군은 경기도 파주의 적군묘지 임시매장에 안치된다. 국방부는 매년 ‘UN사 군사정전위’를 통해 본국 인수 의사를 타진하고 있지만, 아직 구체적인 답변은 없는 상태다.
 
  입관을 마친 뒤 약식祭禮(제례)가 거행됐다. 대대장 이용권 중령이 집도한 가운데 발굴현장의 전 장병이 유해 앞에 모여 故人(고인)을 위한 묵념과 기도를 했다. 이 중령은 장병들에게 “우리가 군복을 입고 이 사업을 한다는 자체가 자랑스러운 경험”이라며 “조국을 위해 돌아가신 분들께 정성을 다한다면 우리 후배들도 국가에 정성을 다할 것”이라고 했다.
 
  제보자 박태규 씨는 발굴 현장 바로 옆 부모의 묘를 바라보며 “지난 58년간 마음이 불편해 이쪽으로 잘 오지도 않았다”면서 “부모님들도 마음이 편하실 것 같다”고 말했다.
 
 
  戰史 분석ㆍ발굴경험ㆍ정확한 제보
 
한 유해 발굴병이 유해를 수습하고 있다.

  경기도 가평군, 해발 700m의 도마치고개 정상에 장병 30명이 모였다. 이날 고개 정상엔 안개가 자욱했다. 발굴 전반을 지휘하는 이용석 중령이 교육을 시작했다.
 
  “있어서 찾고, 없어서 안 찾는 게 아니야. 일단 올라가 보고 가타부타 이야기를 해야지. 이곳 산야에 외롭게 묻혀진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영웅들이지. 이 사람들을 우리가 안 안아주면 누가 안아주겠어.”
 
  이 중령은 발굴 사업이 과거를 되찾기보다는 미래를 선도할 사업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2000년부터 9년 동안 전국을 누비며 유해를 발굴했다.
 
  “우리는 지금 58년 전 과거를 되찾고, 동시에 58년 후의 미래를 내다보고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조국이 국민을 배신하지 않음을 보여줄 때 국민은 국가에 충성할 수 있어요.”
 
  이 중령은 “발굴의 시작은 치밀한 戰史(전사) 분석으로부터 시작된다”고 강조했다. 6·25 당시 접전이 벌어졌던 곳을 집중적으로 추적해, 최대한 정확한 지점을 찾아낸다는 것이다.
 
  경험적인 지식도 강조된다. 아무리 이론적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접근하더라도, 마지막 순간에 유해현장을 찾아내는 것은 오랫동안 축적된 경험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한다.
 
  도마치고개 정상 부근은 1소대가 하루 전 작업을 시작했다. 전쟁 당시 개인호로 추정되는 곳마다 땅이 깊게 파여 있었다. 이 중령은 1소대가 작업한 호의 위치가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다. 신세대 장병들이 실제 전쟁 당시 호로 사용했던 곳을 발굴하기보다는 현대전의 개념으로 호를 추적했기 때문이다.
 
  “김 기자, 여길 봐요. 능선 옆으로 숨을 만한 위치에 이렇게 흔적이 남아있죠?”
 
  이 중령이 가리킨 곳은 풀숲이 주변과 약간 뒤틀어진 모습이었다. 능선 좌우로 10m마다 있었지만 일반인의 관점에선 아무리 집중해도 찾아내기 어려웠다.
 
  “여기서부턴 정말 ‘경험’이에요. 아무리 연구하고 조사해도 마지막에 정확한 위치를 잡아야 하는데, 그건 경험적인 눈으로 봐야 잡혀요.”
 
  처음 발굴사업이 시작했을 땐 이 중령도 방향을 못 잡긴 마찬가지였다. 유해 탐사도, 발굴 방법도, 개토식과 사후처리 방법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한 고고학 전문학회에 자문을 요청했다.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6·25 기념사업과 발굴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했지만 대답은 간단했다.
 
  “여보셔, 우린 장의사가 아냐.”
 
  결국 지방의 한 문화재연구원에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발굴조사부장인 이호형 연구원이 기꺼이 자문위원을 하겠다고 답했다. 그에게 시굴작업부터 시작해 발굴 진행과 산신들에게 제를 올리는 법까지 모두 배웠다. 2000년 4월 경북 칠곡의 다부동 328고지에서 첫 삽을 떴고, 2008년 6월 현재 2557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이 중령은 지난 9년간 겪었던 이야기들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몇 해 전이었어요. 제가 ‘유해발굴 감식단’ 조끼를 입고 산을 탐사하고 있었습니다. 한 노인 분이 저를 보고 ‘에라 이 몹쓸…’이라고 하더군요.”
 
  이 중령이 이유를 묻자 그는 “당신이 아니라 역사 앞에 욕을 하는 것”이라며 “그 긴 시간 동안 뭘 하다 이제 왔냐”고 했다.
 
  “할 말이 없었죠. ‘나라 전체가 먹고살기 힘들어 이제서야 시작했다’며 사과했죠.”
 
  노인은 이 중령에게 자신이 알고 있던 유해지역을 알려 주고선, “우리가 했어야 할 일을 하느라 고생한다”며 등을 두드려 주었다고 한다. 지난해 6월 5일, 盧武鉉(노무현) 前(전) 대통령이 경기도 포천 지역에서 진행 중이던 유해 발굴 현장을 방문했다. 군 통수권자로선 처음이었다.
 
  “7군데의 현장을 모두 돌아볼 때까지 아무 말이 없더군요. 그리고 첫 마디가 ‘너무 늦었습니다’였습니다. 그리고 ‘힘들겠지만 좀 더 빨리 발굴해 달라’고 했어요. 개인적으로 감명을 받았습니다.”
 
  대통령의 방문은 ‘유해 발굴사업이 국가의 무한책임’이라는 인식을 확산케 했다. 결국 올 3월 ‘6·25 전사자 유해의 발굴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다. 노 전 대통령이 발굴 현장을 방문하게 된 계기는 지난해 4월 빌 리처드슨 미국 뉴멕시코 주지사 일행과의 만남이라고 한다. 그들은 직접 북한을 방문해 미군 전사자 유해 6구를 찾아냈다.
 
  미국은 현재 유해 발굴 사업에서 가장 모범을 보이는 나라다. ‘나라를 위해 희생한 사람은 끝까지 찾아낸다’는 국가적 약속을 성실히 지키고 있는 것이다.
 
 
  “조국은 당신을 잊지 않는다”
 
경기도 가평군 적목리에서 발굴된 유해와 도장. 제주도 출신의 故 문성신 씨 유품으로 추정된다.

  미국의 ‘전쟁포로·실종자 확인 합동사령부(JPAC)’는 지난 5월 20일 수중탐사팀 13명을 동원해 한강 바닥을 샅샅이 수색했다. 1950년 9월 22일 한강 밤섬 근처에 추락했던 전투기 조종사의 유해를 찾기 위해서였다. 58년이면 강산이 6번째 변해 갈 무렵이다. 한강의 물줄기 자체가 바뀌었을 가능성도 컸다. 하지만 그들은 수중 음파탐지기와 GPS, 인류학자와 폭발물 전문가까지 동원했다.
 
  30일까지 수색을 진행했지만 결국 찾아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조국은 당신을 잊지 않는다’ (You are not forgotten)는 JPAC’의 구호에 담긴 의지는 확실하게 보여준 셈이다.
 
  미 국방부는 1996년부터 2005년 5월까지 북한 함경남도 장진호 인근과 평안북도 운산에서 총 225구의 미군 유해를 발굴했다. 이때 유해 발굴비로 북한에 지불한 금액이 약 2200만 달러나 된다. 인민군 출신 탈북자 강민철 씨는 “그때 ‘유해는 몇 달러, 인식표는 몇 달러’라 선전하면서 발견자에게 달러로 포상했다’며 당시 직접 참여했던 발굴 작업을 회상했다.
 
  미국 다음으로 유해발굴 전문부대를 창설한 나라는 한국이다. 2006년 5월에 창설법을 제정해 이듬해 1월 ‘국방부 유해발굴 감식단’을 만들었다.
 
  李明博(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6월 6일 거행된 현충일 추념사에서 유해발굴사업의 확대에 대한 강한 의지를 밝혔다. 이 대통령은 “아직도 이 땅 어딘가에 홀로 남겨진 13만여 명의 6ㆍ25 전사자들의 유해발굴사업도 활발하게 추진하겠다”면서 “나라를 위해 희생된 분들은 국가가 끝까지 책임진다는 국가 무한책임 의지를 반드시 실천하겠다”고 했다.
 
  아침 일찍 시작된 굴토작업은 오후까지 이어졌다. 가평군 국망봉 입구 곳곳엔 장병들이 파헤친 호로 가득했다. 수십 개의 호가 다시 만들어졌지만, 특별히 발견된 것은 없었다. 이용석 중령은 “통계상 평균 120개는 파야 하나 발견”한다며 발굴과정을 설명했다.
 
  6월 18일 오전 국립 서울현충원에서 6ㆍ25 전사자 9명의 합동 안장식이 열렸다. 이날 안장된 유해는 군인이 아니라 경찰이다. 전쟁 당시 전남 영광 학동마을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경찰 전사자 가운데 신원과 유가족이 확인된 사람들이다.
 
  1950년 7월 23일 밤, 전남 영광ㆍ화순ㆍ순천ㆍ나주 경찰서에서 차출된 경찰 200여 명은 막 일과를 끝낸 후 저녁 식사를 하려던 참이었다. 당시 초소 근무 중이던 경찰이 북한 지프차를 발견, 타고 있던 척후병 2명을 사살했다. 이에 목포로 향하던 북한군 6사단은 방향을 틀어 학동마을로 진군, 경찰관들의 주둔지를 포위한 후 무차별 포격을 가했다.
 
  밤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 벌어진 전투에서 약 150명의 경찰이 목숨을 잃었다. 박격포와 총탄을 피한 경찰들은 적군에게 무참히 확인 사살을 당했다. 시신들은 모두 인근 야산에 한꺼번에 묻혔다.
 
  26살의 꿈 많던 청년 故(고) 吳鍾八(오종팔) 씨도 그중 한 명이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어린 두 아들, 그리고 아내 뱃속의 딸을 둔 채 떠날 수 없었지만, 그에겐 운명을 거스를 힘이 없었다.
 
  47년이 흘러 1997년, 당시 세 살이었던 둘째 아들 吳夢龍(오몽룡ㆍ61) 씨는 어느새 장년이 돼 영광 땅을 다시 밟았다. 어촌지도소 현지소장으로 파견된 그는 10여 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언을 저버릴 수 없었다. 그에겐 아버지 유해를 찾는 것이 자식 된 道理(도리)요 평생의 使命(사명)이었다. 지난 7월 1일 광주에서 만난 오 씨는 예전 기억을 떠올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온 마을을 다니며 수소문을 했어요. 70세 이상 돼 보이는 노인 분들만 보이면 가서 물어봤죠.”
 
  1997년 오 씨가 처음 찾은 곳은 영광군 불갑면에 위치한 불갑산 주변. 전투에서 부상을 당한 채 살아 돌아온 한 동료 경찰의 증언으로 찾은 장소다. 그는 “거기서 전사했는지 확실친 않지만, 큰 전투가 있었고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당시 남편을 기다리던 오 씨의 어머니에게 전했다고 한다.
 
 
  57년보다 길었던 9개월
 
합동 발굴팀이 금속탐지기로 유해 추정 지역을 탐색하고 있다.

  한 무속인과의 만남도 장소에 대한 확신을 줬다. 오 씨가 중학생이던 1960년 여름, 교육청 운전기사였던 오 씨의 작은아버지는 영광을 갔다 돌아오는 길에 한 무속인을 만나게 된다.
 
  무속인은 다짜고짜 작은아버지의 따귀부터 때렸다. “왜 그러냐”고 묻는 그에게 무속인의 이렇게 대답했다.
 
  “이 자식아. 이 먼 영광까지 와서 날 찾아오지도 않고 그냥 가냐.”
 
  그날 저녁에 곧바로 굿을 했다. 무속인은 戰死者(전사자)의 神(신)이 들렸는지, 가족들에게 자신의 상황을 자세하게 전했다고 한다.
 
  “그때 기억이 잊혀지지가 않아요. ‘내가 누운 자리는 편안하다. 다만 여러 명이 한 구덩이에 묻혀 좀 답답하다’고 하더군요. 얼마 전 발굴된 현장을 가보니 진짜 ‘명당’ 자리였어요. 유해 보존 상태도 좋았고요.”
 
  시신 10여 구가 한꺼번에 뒤엉킨 것도 적중했다. 무속인은 “턱을 심하게 맞아 사망했다”고 했는데, 48년 후 발굴된 유해를 보니 귀 위쪽 두상에 둔탁한 쇠붙이에 맞아 함몰된 상태였다.
 
  여러 정황을 통해 대략적인 위치는 파악했지만, 여전히 정확한 위치를 찾기 어려웠다. 몇 년 동안 수소문을 한 끝에, 오 씨는 결국 전투 당시 불갑산 인근 삼학출장소에서 給仕(급사)로 근무했던 강대린(86) 씨를 만났다.
 
  당시 18세였던 강 씨는 전투가 있던 날 재래식 화장실 변기통 속에 숨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전투 당시 정황을 상세히 알고 있던 강 씨를 통해 오몽룡 씨는 유해가 묻힌 정확한 지점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수차례 청와대와 경찰청에 진정서를 쓴 끝에, 2007년 5월 국방부와 경찰 합동으로 유해 발굴작업이 시작됐다. 9개월이 지난 후 DNA 감식 결과가 나왔다. 그의 아버지로 확인됐다. 오 씨 평생의 恨(한)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감식 결과가 나오기까지 9개월이 유해를 찾기까지 57년보다 더 길게 느껴졌어요. 하루하루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어머니는 ‘멋쟁이셨던 아버진 이미 그때 금으로 송곳니를 둘러싸고 시계도 차고 계셨다’고 하셨는데, 유해에서 송곳니와 시계가 모두 발견돼 거의 확실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슴을 조아렸습니다.”
 
  그렇게 그는 아버지와 58년 만에 再會(재회)했다. 남은 건 어머니와의 만남이었다. 지난 6월 18일, 죽은 남편을 기다리다 20년 전 세상을 떠난 오 씨의 어머니는 현충원에 남편과 나란히 안장됐다. 오 씨는 그 순간을 이렇게 기억했다.
 
  “하늘도 감격했는지 눈물을 흘리더군요. 엄청난 폭우가 내렸어요.”
 
故 오종달 씨.(동그라미 안)

 
  “10cm만 더….”
 
  병사들이 꽤 지쳐 있었다. 처음엔 ‘설렘 반, 호기심 반’으로 시작했지만, 3주째 접어들면서 ‘언제 끝나나’는 생각이 간절하다. 현장에서 만난 白恩炅(백은경) 소위는 군가 ‘전우야 잘 자라’의 한 소절이 떠오른다고 했다.
 
  “노래 마지막에 ‘흙이 묻은 철갑모를 손으로 어루만지니 떠오른다 네 얼굴이 꽃같이 별같이’라는 소절이 있어요. 어쩌면 이리도 시리고 가슴 아플까요. 남겨진 유해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이날 굴토 작업은 탄피와 몇 가지 물건들이 발견됐지만 유해는 나타나지 않았다. 장병들의 사기는 적잖이 떨어졌지만, 그들의 눈은 여전히 숙연한 모습이었다.
 
  “저희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다만 오늘 밤 좋은 꿈을 꾸길 기대할 뿐이죠.”
 
  金東律(김동율·21) 일병은 한 주 전 유해를 찾는 꿈을 꾼 후, 소대장에게 “오늘 기대해도 좋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날 오후 김 일병은 촉대봉 지역에서 처음으로 유해를 발견했다. 장병 대부분은 종교와 과학 등의 이유로 미신을 믿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유해 발굴 과정에서 겪는 신비한 일들에 대해선 모두 공감했다. 박평강 중위의 말이다.
 
  “처음엔 유해가 있긴 있는가 라는 생각이었고, 진행하면서는 ‘발굴이 참 어렵구나’고 생각했어요. 이제는 ‘우리가 준비돼야 그분들이 오신다’고 확신합니다. 유해발굴은 직접 해 본 사람만이 그 소중함을 압니다. 이젠 묻혀 있는 분들과 서로 교감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남들은 시신을 찾는 작업이 무섭지 않은가 하고 말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무섭다기보단 신비롭다고나 할까요.”
 
  박 중위는 발굴작업을 하다 보면 쓰레기와 뱀, 탄피가 한 곳에서 90발 정도 나오기도 하고, 때로는 수류탄이나 81mm 고폭탄도 발견된다”고 했다.
 
  폭발물이 발견되면 폭발물 처리반이 처리한다. 탄피나 수류탄이 나온 장소에서 유해가 집중 발굴되는 경우도 많다. 장병들은 탄피가 나오면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파기 때문에, 처음엔 작은 크기의 호가 어느새 분대 규모까지 커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현충일을 앞둔 6월 5일, 육군 이기자부대에서 실시된 유해발굴 사업이 마무리됐다. 한 달간 발굴된 유해는 총 40구(아군 16구, 적군 24구), 유품은 M-1 소총탄 등 총 11종 291점이 수거됐다.
 
  사단장 金因東(김인동) 소장은 “6·25 격전지인 가평·화천지역엔 수많은 전사자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잠들어 있다”며 “유해 발굴사업이야말로 과거의 아픔을 교훈 삼아 다시는 이 땅의 자유와 평화가 위협받는 일이 없도록 다짐하는 사업”이라고 했다.●
 
 

  [미니기사]
 
  美 전쟁포로 실종자 확인 합동사령부(JPAC)
 
  JPAC(Joint Prisoners of War, Missing in Action Accounting Command)이란 미국이 수행한 각종 전쟁과 미션 수행 중 실종된 미국 군인의 遺骸(유해)를 찾는 부대다. JPAC이 수사를 진행하는 주된 실종 전사자들은 한국전, 베트남전, 걸프전, 냉전,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참전자들이다.
 
  이 부대의 소속원들은 미국 하와이에 있는 오하우를 비롯, 태국, 베트남, 라오스 등 전 세계 4곳에 배치돼 있다. JPAC은 30년 전부터 하와이에 있던 美(미) 육군 중앙신원확인실험실(U.S·Army Central Identification Laboratory)과 11년 된 합동 태스크 포스 팀 (JTF·Joint Task Force)이 2003년 1월 합쳐져 현재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최초의 JPAC 활동은 1973년 태국 방콕에서 시작됐다. 당시 공식 명칭은 중앙신원확인실험실(Central Identification Laboratory·CIL-THAI)이었으며, 이후 1976년 하와이에 두 번째 중앙신원확인실험실(Central Identification Laboratory, Hawaii·CILHI)이 발족됐다. 하와이 부대의 주요 임무는 전 세계에 걸쳐 지금까지 실종된 모든 전사자들을 찾는 것이었다.
 
  JPAC의 요원들은 엄선된 400여 명의 육ㆍ해ㆍ공군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일부 해군 소속의 민간공무원이 포함되어 있다. JPAC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곳은 중앙과학수사실험실(CIL·Central Identification Laboratory)로서, 우리의 국립과학수사연구소와 같은 곳이다. 이곳은 규모가 세계에서 가장 큰 과학수사 실험실이다.
 
  JPAC은 창설 이후 지금까지 모두 1400여 명의 전사자들을 찾아냈다. 이는 대략 한 달에 6명꼴로 신원을 파악한 셈이다. 하지만 이들의 정확한 배경과 신원파악 등을 위해서 1년 정도가 소요된다. 이 기간 동안 수습한 증거물들, 치아, 뼈 등의 단서를 중앙과학수사실험실(CIL)에서 분석한다. 이 분석과정에는 DNA 분석도 포함된다.
 
  JPAC은 현재 이전에 미군이 참전했던 지역에 팀을 파견해서 실종된 전사자들을 찾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JPAC의 자료에 따르면, 앞으로 찾아내야 할 실종 전사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만 약 7만 8000여 명에 달한다.
 
  JPAC의 예산은 미국의 국방비에서 지원된다. 2006년부터 2007년까지 JPAC을 비롯한 미국 내 또는 미국 외에 외국과의 협력, 실종 전사자 찾기 기관에 할애되는 예산은 줄어들고 있는 추세다. ‘조국은 당신을 잊지 않는다’와 ‘그들이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가 이 부대의 슬로건이다. 1996년 이후 북한에서 2200만 달러라는 거액을 지불하며 공동발굴작업을 벌여 229구의 유해를 수습하기도 했다.
 
  <정리 金東衍 月刊朝鮮 인턴기자>
 
 

  [인터뷰] 국방부 유해발굴 감식단장 박신한 대령
 
  “발굴사업 최종목표는 ‘마지막 한 구를 찾는 것’”
 
  “强國(강국)이 전사자 유해를 소중히 하는 것이 아니라 유해를 가장 잘 모시는 나라가 강국이 됩니다.”
 
  국방부 유해발굴 감식단장 朴信漢(박신한) 대령은 “남한의 경우 창군된 지 2년 만에 준비 없이 치른 전쟁이라 戰死者(전사자) 처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며 “이제 과학적 기술과 경제적 여력이 뒷받침되기 때문에 더 늦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고 말했다.
 
  “6ㆍ25 당시 전사자 중 80%가 전투 현장에 그대로 버려졌습니다. 참호 속에 버려져 지금까지 방치됐죠. 나머지는 마을 사람들이 임시로 매장한 경우입니다. 역사는 ‘산 자의 기록’이기 때문에 패전 역사는 자세히 기록되지 않아요.”
 
  ―사업을 진행하면서 가장 어려운 점은 무엇입니까.
 
  “얼마 전 만난 한 할머니는 자신이 새댁일 때 남편이 두 달 후에 돌아오겠다며 전장으로 떠났답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찾아드려야 하는데 어려움이 많죠. 발굴사업을 효용성의 논리로 접근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국가는 1%라도 확률이 있어도 최대한 노력을 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박 대령은 “남북은 2007년 11월 제2차 남북 국방장관 회담에서 남북 공동 유해발굴 사업에 합의했기 때문에 구체적인 이행방안이 합의되면 곧바로 사업이 추진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 단장은 2007년 4월 경남 하동에서 발굴된 학도병들의 유해 수습 과정을 가슴에 담고 있었다.
 
  “산속에 물이 흐르는 곳이라 유해가 많이 남아있지 않아 11구 발굴했습니다. 교복 단추와 배지도 그대로 남아있었죠. M1 탄 클립도 발굴됐는데 9개가 그대로 남아있었어요. 총 한 발 못 쏘아보고 전사했다는 의미죠.”
 
  당시 발굴 현장엔 여수고와 순천고의 후배들도 함께 참석했다. 그들은 직접 오동나무관을 들고 운구에 참여했다. 처음엔 신기해하는 모습이었지만, 운구에 참여할 땐 숙연함이 감돌았다고 박 단장은 전했다.


월간조선 2008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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