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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곳곳에 방치된 이승만 독립운동의 흔적들

국제

by 김정우 기자 2013. 11. 6.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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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선 너머 해가 떠올랐다. 거대한 증기선은 어느새 열도를 통과해 섬을 크게 둘러 항구로 향하고 있었다. 갑판에 선 자그마한 체구의 동양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10개월 전 요코하마(橫濱)항(港)에서 캐나다 빅토리아항으로 가던 선상에서 타이타닉(Titanic)호의 비극적 침몰을 단파 방송으로 들었다. 다행히 이번 여정에선 별다른 사고 소식이 없었다.

아침 8시, 그가 탄 배는 서서히 항구에 정박했다. 1월 28일 오후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6일 동안 약 3840km를 항해한 시에라(Sierra)호였다. 대양(大洋)을 횡단한 배만큼 승선한 이들도 지쳐 있었지만, 호놀룰루항의 ‘이국적 풍광(風光)’은 금세 여독(旅毒)을 잊게 했다.

하와이 팔리(Pali) 전망대에서 바라본 오아후섬 동쪽 해안 전경. ⓒ김정우


미국인들로 가득한 갑판 사이로 동양인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른 아침인데도 부두엔 그를 환영하는 인파가 꽤 많았다. 조지워싱턴대와 하버드대를 거쳐 프린스턴대에서 한인 최초로 정치학 박사 학위까지 받은 그의 입도(入島) 소식은 호놀룰루 현지 신문에 크게 보도될 만큼 미국인들 사이에서도 큰 이슈였다.

1913년 2월 3일, 38세 청년 이승만(李承晩)이 하와이(Hawaii) 제도(諸島)에 처음 정착하는 순간이었다.

이날로부터 100년 후, 그가 기획하고 설계한 나라의 청년 20명이 호놀룰루를 찾았다. ‘우남아카데미’의 주관으로 결성된 ‘하와이 독립운동 사적지 탐방단’ 일행은 지난 6월 26일부터 1주일간 오아후(Oahu)섬과 하와이섬 일대를 돌며 100년 전 독립운동 역사의 흔적을 추적했다.

 

⊙ ‘하와이 독립운동 사적지 탐방단’ 20명, 100년 전 독립운동 현장 돌아
⊙ 표지석 하나 없이 民家 상태로 방치된 유적… “정부와 주민 설득 필요”
⊙ “雩南의 功過, 더도 말고 過를 강조하고 가르치는 만큼만 功을 알아 갔으면…”


팻말이나 표지석 하나 없는 유적

 

박용만이 카할루 지역 아후이마누 마을에 설립한 대조선국민군단 병학교터. ⓒ김정우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여창동(呂彰東)씨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와이 한인관광협회 고문인 그는 이번 행사를 위해 가이드를 자청했다. 하와이에서 그보다 독립유적지 위치를 더 잘 알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로 지리에 통달한 그였다. 그런데 그가 아후이마누(Ahuimanu)가(街)를 30분째 헤매고 있었다.

독립운동가 박용만(朴容萬)의 ‘대조선국민군단’ 병영터는 여러 한인 연구가들이 과거 사진의 지형을 대조해 최근 새롭게 조명된 곳이다. 이미 수차례 답사까지 온 그였지만, 100년의 간극(間隙)을 넘어 유적을 찾는 게 쉽지 않았다. 같은 길을 10여 차례 돌았을까, 그가 크게 환호했다.

“드디어 찾았습니다!”

100년 전 군도(軍刀)와 목총(木銃)을 들고 독립군이 훈련을 받던 아후이마누 마을의 병영은 현재 깔끔히 정돈된 주택가로 변해 있었다. 평일 낮이라 인적도 드물었고, 가끔 오가는 주민들은 동양인 20명이 단체로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모습을 의아해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는 동네가 한국의 독립유적지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국민군단 병영을 끝으로 7일간 방문한 24곳의 유적지 상황은 대체로 비슷했다. 대부분 평범한 주택가가 된 역사의 현장은 팻말이나 표지석 하나 없었다. 집 앞에서 사진 찍는 모습을 발견한 주인이 항의하는 일도 있었다. 독립운동의 주요 자금원이었던 하와이는 지금까지 상하이(上海)나 만주 지역 등 중국의 독립유적에 비해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김효선 건국이념보급회 사무총장. ⓒ김정우


이승만 연구가로서 탐방단을 이끈 김효선(金孝善) 건국이념보급회 사무총장은 “하와이 독립유적 현장을 방문할 때마다 번듯한 안내판 하나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며 “하와이주 정부와 해당 지역 주민들을 잘 설득해 유적이 잊히는 일을 막아야 한다”고 했다.

1912년 4월 두 번째 도미(渡美) 길에 오른 이승만은 민주당 대선후보가 된 프린스턴대 시절 은사(恩師) 우드로 윌슨(Wilson·28대 미국 대통령)을 직접 만나는 등 활동영역을 넓혀 나갔다. 네브래스카주(州)의 헤이스팅스(Hastings)에서 만난 옥중동지 박용만은 이승만에게 하와이 독립운동의 포부를 전했고, 12월 하와이에 먼저 도착한 그는 대한인국민회를 통해 이승만을 불러들였다. 하와이 제일감리교회의 감리사 와드먼(Wadman)의 초청도 큰 몫을 했다. 와드먼은 1904년 첫 도미 때 하와이를 경유한 이승만을 한인 동포 연설 연단에 세운 인물이다.

이승만의 첫 정착 가옥

푸누이 거리에 자리한 이승만의 첫 정착 가옥. ⓒ김정우


하와이에 도착한 이승만이 처음 정착한 곳은 하와이 교민들이 마련해 준 푸누이(Puunui) 거리의 한 가옥이었다. 한인 동포는 물론 미국인들 사이에서도 그의 행적은 큰 관심을 모았다. 1913년 2월 8일 하와이의 유력지 《호놀룰루 스타 불리틴(Honolulu Star-Bulletin)》은 박사모를 쓴 이승만의 사진과 함께 그를 ‘한국의 위대한 지도자(great leader of Koreans)’로 소개했다.

탐방단의 첫 방문지로 찾은 푸누이 가옥은 평범한 개인주택과 다를 바 없었다. 높지 않은 담 사이로 조그만 차고가 보이는 전형적인 미국의 2층 주택이었다. 현재 집주인은 자신이 한국의 초대 대통령이 정착한 터에 산다는 사실을 모른다고 한다. 한인들도 혹여 집주인이 엉뚱한 생각을 할까 조심스럽게 관망하는 중이다. 일부 유적의 경우, 사연을 안 집주인이 부동산 가격을 크게 올려 부르는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이 집에 머물면서 책을 저술했다. 《한국교회핍박》이란 제목의 이 책은 1913년 4월 신한국보사(新韓國報社)를 통해 발행됐다. 서문을 쓴 날짜가 3월로 돼 있어 이승만이 한 달 남짓 걸려 책을 쓴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의 ‘105인 사건’ 날조에 대해 기록한 이 책은 일본의 한국 기독교 핍박 이유와 기독교의 혁명사상 등 이승만의 기독교 세계관을 담아 냈다.

이승만의 첫 가옥 앞에 서면 바로 길 건너 한인중앙학교 여학생 기숙사터가 보인다. 1914년 하와이 섬들을 돌며 순회집회를 열던 이승만은 하와이 동포 소녀 중 상당수가 학교에 가지 못하거나, 중국인 또는 하와이 본토인에게 팔려 시집을 가는 경우가 빈번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한국어까지 잊은 소녀를 보며 이승만은 그들에게 교육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됐고, 순회 마지막 방문지였던 마우이섬 카훌루이(Kahului)에서 소녀들을 데려왔다.

그즈음 한인기숙학교 교장으로 취임한 이승만은 교명(校名)을 한인중앙학교로 변경했다. 이승만에 대한 소문을 들은 교민들은 앞다퉈 자녀를 학교로 보냈다. 그는 하와이 한인사회를 ‘기독교 국가’로 만들겠다는 소명으로 학생들에게 한글과 한자, 그리고 성경을 가르쳤다.

이승만은 처음 이 소녀들을 감리교 여선교회에서 운영하는 수잔나 웨슬리 홈(Susannah Wesley Home)에 맡겼는데, 여선교회 측이 이들을 한인중앙학교에 보내는 것을 동의하지 않았다. 추가로 여학생이 입학하면서 이승만은 학교를 남녀공학제로 바꾸고, 학교 근처에 집 한 채를 월세로 구해 여학생 기숙사를 마련했다. 후에 집을 2400달러에 매입한 이승만은 1200달러를 들여 집을 증축해 여학생 45명을 수용했다.

항의하는 집주인들

옛 국민회관 건물인 한국독립문화원 옆 마당에 설치된 무명애국지사 추모비를 탐방단원들이 살펴보고 있다. ⓒ김정우


1913년 9월, 이승만은 월간지 《태평양잡지》 발행을 시작했다. 혼자 한 달에 100쪽 정도의 기사를 작성해 사진과 그림까지 곁들일 정도로 종교·교육 활동보다 큰 정력을 쏟아 부은 사업이었다. 이승만 ‘사장 겸 주필’은 잡지의 가장 많은 지면을 국제정세 소개에 할애했다. ‘윌슨 정책과 하와이 사탕’, ‘중일 양국 배상문제’, ‘멕시코와 각국’ 등 제목에서 볼 수 있듯 전 세계를 조망한 논설들이 실렸다.

이승만의 독립 비전을 선전하고 지지자들을 결속시키는 역할을 한 《태평양잡지》는 1930년 12월 20쪽 분량의 주간지가 됐고, 1944년 7월부턴 주간신문으로 발행됐다.

《태평양잡지》 발행소는 호놀룰루 동남쪽 팔롤로(Palolo) 거리의 한적한 주택가에 자리 잡았다. 동행한 일부 한인 인사가 태평양잡지 터로 지목한 주택건물은 사진을 찍는다고 집주인의 항의까지 받았는데, 후에 확인한 결과 전혀 무관한 곳이었다. 실제 위치는 주택 뒤편 공터였다.

1914년 8월, 박용만은 대조선국민군단 병학교(兵學校)를 지어 개교했다. 호놀룰루 동북쪽 산 너머 카할루(Kahaluu) 지역 아후이마누 마을의 계곡 인근에 한인 동포 청년 120여 명을 모아 낮에는 파인애플 농사를 짓고 밤엔 군사교육을 받게 했다. 박용만은 국민군단 단장과 병학교 교장직을 겸임했다. 성대하게 치러진 낙성식(落成式)과 개교식(開校式)에 수백 명의 동포가 모였다. 한인 동포들은 이 학교를 ‘산너머 병학교’로 불렀다. 학생들에겐 ‘산너머 아이들’이란 별명이 붙었다.

수차례 길을 헤맨 끝에 힘겹게 찾은 병영터는 그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현대식 미국 주택으로 정돈된 마을엔 인적이 드물었고, 주민 대부분 과거 사연을 전혀 알지 못했다.

1914년 12월엔 국민회 하와이 총회가 동포들의 모금을 통해 숙원사업이던 회관 건축을 완료했다. 이 낙성식엔 이승만도 참여해 연설을 했다. 핑크함(Pinkham) 지사와 와드먼 목사,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국민회 중앙회 등이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국민보》를 발행하던 호놀룰루 밀러(Miller) 거리의 건물은 현재 소실됐다. 하와이 주정부가 주지사 관저를 확장하면서 루크(Rooke)가에 자리한 건물과 바꿀 것을 제안했으며, 1947년 국민회 총회관이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1925년경 저명한 건축가 하트 우드(Wood)가 포르투갈 총영사 아들을 위해 지은 이 건물은 1980년 미(美)연방 및 주정부 문화재로 등록됐다.

초등학교로 남은 이승만의 학교터

한인기독학원은 알리올라니 캠퍼스(위)와 칼리히 캠퍼스. 두 건물 모두 현재 초등학교로 쓰이고 있다. ⓒ김정우


1990년대 들어 건물 개·보수 비용이 부족했던 국민회는 한국 정부에 회관 기증을 제안했지만,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위기를 겪은 정부는 인수를 할 수 없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홍우준(洪禹俊) 경민학원 이사장(현 홍문종 새누리당 사무총장의 부친)이 한국독립문화원을 설립하며 2001년 국민회관을 인수했다.

2003년 1월 미주 한인 이민 100주년을 맞이해 개관한 한국독립문화원은 총 4개의 전시장에 사진과 유물을 전시하고 있으며, 마당엔 무명애국지사 추모비를 설치해 방문객들로 하여금 하와이 독립운동의 정신을 되새기게 한다. 하와이 독립운동 사적지 탐방단도 이곳에서 순국선열을 위한 묵념 및 추모행사를 가졌다.

논란과 공방 끝에 저돌적으로 국민회를 장악한 이승만은 1915년 6월 한인중앙학교 교장직을 사임했다. 독자적으로 한인여학원을 새로 설립한 그는 총 75명의 농장 노동자의 딸들을 모집해 개교했다. 미국인 여교사 5명이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학비는 연간 4달러였다.

1918년 한인여학원을 확장해 남녀공학 학교를 세우기로 결심한 이승만은 카이무키(Kaimuki) 지역 알리올라니(Aliiolani) 캠퍼스를 월 60달러에 임차해 새 교실과 기숙사를 지었다. 한인기독학원이란 이름으로 개교한 이 학교는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국인으로서의 주체성과 리더십을 가르쳤다.

학생수는 매년 80~90명이었고, 많을 때는 140명까지 늘었다. 그의 학교 운영은 하와이 현지 언론에 상세히 보도될 정도로 많은 관심을 모았다. 《애드버타이저》지(誌)는 이승만을 두고 ‘통찰력과 현명한 예지의 인물’이라고 표현했다.

한인기독학원은 1922년 알리올라니 캠퍼스를 비워 줘야 했다. 이승만은 학원 재산을 정리한 후 칼리히(Kalihi) 지역의 한 언덕에 새 교실과 기숙사를 지어 학교를 옮겼다. 현재 알리올라니 캠퍼스는 초등학교로 사용되고 있다. 마침 담장 너머 바라본 운동장엔 학생 20여 명이 테니스 수업 중이었다. 이승만이 세웠던 부지에 그대로 남은 학교에서 이승만이 가장 좋아했던 스포츠를 배우는 모습이 묘했다.

학교 부지 매각해 인하대 설립

노스 킹 거리의 마지막 동지회관 건물. ⓒ김정우


칼리히 지역으로 확장 이전한 학교는 재정난으로 고국방문단을 한국에 보내는 등 각양의 노력 끝에 1923년 9월 완공됐다. 학교는 1947년 폐교될 때까지 200~300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칼리히 언덕 일대의 남은 땅은 1955년 팔렸다. 이승만 대통령은 15만 달러의 부지 매각 대금을 인천에 새로 설립한 공과대학에 전액 투입했다. 이 대학이 현재의 인하대다. 학교명 ‘인하’는 인천과 하와이의 첫 글자를 딴 이름이다.

현재 ‘쿨라 콜레아(Kula Kolea)’란 하와이식(式) 지명으로 불리는 학교터에는 칼리히 초등학교가 자리 잡고 있다. 쿨라 콜레아는 영어로 번역하면 ‘스쿨 코리아(School Korea)’다. 호놀룰루 북쪽 한적한 언덕에 있어 탁 트인 호놀룰루 전경과 태평양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마을에 이승만과 한국의 흔적이 지명으로 남아 있었다.

동지회관 건물도 팔아 인하대에 보탰다. 매각 자금 절반은 인하공대 설립자금으로, 나머지는 동지회 자녀 장학금으로 쓰였다. 대한인동지회는 1921년 이승만과 민찬호, 안현경(安顯京), 이종관(李鍾寬) 등 인사가 모여 만든 독립운동 단체로, 이승만에게 평생 강력한 지지기반이 됐다.

첫 동지회관 자리는 쿠아키니(Kuakini) 거리 139번지에 위치했으나, 현재 건물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동지회관은 1932년 노스 킹(N. King) 거리의 한 건물을 장기임차해 옮겼으며, 1942년 건물을 매입했다. 1949년 건물을 신축해 재입주했다. 이때 지은 2층의 일자형 동지회관은 현재 싸구려 음식점들이 들어찬 건물로 변해 있었다. 한적한 도로 너머엔 ‘팔라마수퍼’란 한국어가 적힌 수퍼마켓이 보였다.

1920년,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인 이승만은 상하이 밀항을 결심했다. 그의 극적인 비밀 항해는 미국인 친구 윌리엄 보드윅(Borthwick)에 의해 성사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장의회사를 운영하던 하와이 유지였다. 이승만 일행은 일본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호놀룰루 반대편에 자리한 보드윅의 별장으로 가면서 이미 호놀룰루를 떠났다는 소문을 냈다.

호놀룰루로 돌아온 이승만은 임병직(林炳稷)과 함께 중국인으로 위장해 화물선에 올랐다. 당시 호놀룰루에서 극동아시아로 가는 모든 선박은 일본 항구를 거쳐야 했다. 보드윅은 캘리포니아에서 목재를 싣고 상하이로 직행하는 네덜란드 국적선의 이등항해사에게 부탁해 두 사람을 몰래 태웠다.

흔적 없이 사라진 교회터

하와이섬 교민 김종만씨가 지금은 주차장이 된 힐로 한인기독교회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정우


이등항해사는 이승만과 임병직을 큰 철제 창고에 들어가게 하고 문을 잠갔다. 마냥 대기해야 했던 그들은 창고 안 나무궤짝 위에 누워 있었다. 그 궤짝이 고향에 묻히기 위해 옮겨지는 중국인 시신을 담은 관(棺)이란 사실은 한참 후에 알았다. 하와이 제도의 서북쪽 끝 섬인 카우아이(Kauai) 섬 인근에서 한 차례 발각됐지만, 가난 때문에 고국으로 돌아가려는 이민자로 위장해 위기를 모면했다. 당시 선장이 이들을 묵인하지 않았다면, 한국의 근·현대사가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

호놀룰루 서북쪽 마우나케아(Maunakea) 거리를 지나던 중 우연히 보드윅 장례사 건물을 발견했다. 차를 세우고 문을 두드렸더니, 당직 직원이 기자 일행을 맞았다. 예정되지 않은 방문이라 내부를 둘러볼 순 없었지만, 직원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는 회사의 창업주가 한국 초대 대통령과 겪은 스토리를 전혀 알지 못했다.

1922년 11월 이승만이 설립한 한인기독교회의 예배당이 완공됐다. 노스 스쿨(N. School) 거리에 자리한 교회와 그를 두고 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예배당 헌당식에 일본영사를 초청하고 기부금 50달러까지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상하이까지 와전돼 《독립신문》에도 기사가 나왔다.

사실은 전혀 달랐다. 헌당식을 앞두고 목사 민찬호(閔燦鎬)가 영자신문과 중국어신문 등을 통해 공지를 했을 뿐, 영사를 초청한 적은 없었다. 많은 사람이 헌당식 당시 예배당을 가득 메웠고, 새로 부임한 일본 영사도 따라 들어왔다. 그는 예배가 끝나고 헌금을 거둘 때 뒷문으로 나가 버렸다. ‘문제의 50달러’는 한인기독학원 교사 안셀 길리스(Gillis·吉理書) 내외가 무명으로 기부한 금액이었다.

현재 노스 스쿨 거리의 교회터는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여창동씨가 안내한 621번지엔 낡은 모습의 2층 목조 건물이 자리 잡았다. 대신 몇 발자국 건너 616번지에 새로 세워진 ‘사모아인(Samoan) 연합기독교회’는 그럴듯한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한인기독교회는 1928년 교회를 확장하기 위해 건물을 팔았지만, 새 건물을 못 지어 10년 동안 신흥국어학교를 예배당으로 사용했다. 이승만은 1935년 한인기독교회 건축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위원회를 조직하고 청년지도자 양유찬(梁裕燦)을 위원장으로 위촉했다. 미국인 재력가들이 거금의 기부금을 내놓으면서 릴리하(Liliha) 거리의 약 6000m²(1800평) 부지를 1만2750달러에 구입할 수 있었다. 몇 년간 내분(內紛)을 겪었던 교회도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인터뷰 | 서영길 駐호놀룰루 총영사
 
“하와이는 建國의 母體”

서영길 주호놀룰루 총영사. ⓒ김정우


 “이승만은 안보의 선각자입니다. 그가 60년 전 이끌어 낸 한미(韓美)상호방위조약은 대한민국 평화와 안정의 큰 보루(堡壘)가 됐습니다. 이승만이 독립운동에 열정을 쏟은 하와이는 건국의 모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1차 연평해전 당시 해군작전사령관을 지낸 서영길(徐榮吉) 주(駐)호놀룰루 총영사는 ‘하와이 독립운동 사적지 탐방단’과의 면담에서 예비역 중장답게 이승만의 안보 정신을 강조했다. 그는 작년과 올해 음력 3월 26일 두 차례에 걸쳐 한인 동포들에게 이승만의 전쟁관과 외교적 역량에 대해 강연을 한 바 있다. 음력 3월 26일은 이승만의 생일이다.

—이번 탐방단이 유적을 둘러보면서 가장 답답해한 것은 어떤 표지도 없이 방치된 현실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대책이 있습니까.

“작년부터 정부에 유적 기념비 사업을 건의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 과제가 있는데, 첫째는 하와이 현지 주민의 공감을 얻는 것이고, 둘째는 국내 반대세력의 방해활동입니다.”

—두 가지 난관 중 어떤 부분이 더 어렵다고 봅니까.

“하와이 주민들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이해시키고 설득하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 문제는 국내 반대세력이겠죠.”

—유적 표지석은 임기 내에 어느 정도 성과를 볼 수 있을까요.

“3년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아 확답은 할 수 없지만, 최대한 발판을 마련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1920년대 유토피아니즘 시험 사례’

광화문의 외형을 모델로 설계된 한인기독교회. ⓒ김정우


1937년 10월 3일 개천절에 맞춰 착공한 교회는 서울 광화문(光化門)의 외형을 모델로 설계됐다. 설계자는 이승만이 세운 한인중앙학원의 첫 졸업생이자 한국인 최초의 건축사인 김찬재였다. 공사 중 추가로 기부금이 들어왔고, 1938년 4월 24일 1500여 명의 인파가 모인 가운데 헌당식이 거행됐다.

예배당 봉헌식 기념 책자는 교회 현황을 구체적으로 기록했다. 본 교회를 비롯해 와히아와(Wahiawa), 힐로(Hilo), 파이아(Paia), 로스앤젤레스(LA)에 분교가 설치됐으며, 세례교인은 총 1263명, 주일학교 학생이 573명, 청년회원은 145명이었다.

후에 대통령직에서 하야(下野)한 후 하와이로 돌아온 이승만은 부인과 함께 이 교회를 찾곤 했다. 마지막 방문일은 1965년 7월 21일이었는데, 700여 명의 교인과 조문객이 참석한 장례 예배의 주인공이었다.

릴리하의 한인기독교회는 현재까지 원형을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광화문 누각은 2000년 재건축에 착공해 2006년에 완공됐다. 교회 옆 마당엔 이승만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동상 아래엔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한인기독교회 창설하신 어른 우남 리승만 박사상’이란 문구와 함께 그의 좌우명이었던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란 성경 구절(갈라디아서 5장 1절)이 새겨져 있다. 이 동상은 1985년 광복 40주년을 맞이해 하와이 교민들이 성금을 모아 건립했다.

동지촌의 이승만 거주지. 건물의 외형이 크게 바뀌지 않은 상태다. ⓒ김정우


1925년 3월 이승만은 자본금 7만 달러의 동지식산회사를 설립하고 하와이섬 올라(Olaa) 지방에 임야 3.86km²(약 117만 평)를 매입했다. 그는 곧바로 이 땅에 ‘동지촌(同志村)’이란 이름을 붙이고 개간사업을 시작했다. 사탕수수 농장에서 더 이상 일할 수 없는 노령(老齡)의 한인 동포들을 모아 농사를 함께 지으며 살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월간조선》에 ‘이승만과 김구’ 시리즈를 연재한 손세일(孫世一) 전(前) 의원은 이승만의 동지촌 구상을 ‘1920년대 유토피아니즘 시험 사례’라며 이렇게 설명했다.

<그것은 고난의 세월을 보낸 동포들의 유토피아가 될 수 있을 것이었다. 구미위원부 위원이 되어 이승만의 신임을 받았다가 뒷날 가장 비판적인 정적이 된 김현구(金鉉九)는 이승만의 동지촌 구상이 일종의 사회주의의 소한국(小韓國)을 건설하려 한 것으로서, 박용만의 무형 정부론과 둔병식(屯兵式) 집단거주지론을 본뜬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으나, 특별한 근거는 없다. 이승만의 이러한 동지촌 건설 구상은 안창호(安昌浩)의 이상촌 건설 구상과도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서, 1920년대의 유토피아니즘의 시험 사례의 하나였다.>

90년 된 녹으로 뒤덮인 숯가마터

이승만이 하와이섬에 세운 동지촌 숯가마 내부를 탐방단원들이 둘러보고 있다. ⓒ김정우


이승만은 동지촌의 성공을 위해 모든 여력을 쏟아 부었다. ‘근대적 숯가마’를 설치하기 위해 제조업 전문 에이전트인 터너(Turner)사에 자문을 하고, 호놀룰루 직업학교 강사 조지 윈터(Winter)와 실험을 진행했다. 3개월에 걸친 노력 끝에 ‘과학적 새 방법의 숯가마’를 설치해 하루 4t, 매달 2000포대의 숯을 만들 수 있었다.

90년이 지난 현재까지 이 숯가마터는 비교적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하와이섬 교민인 김종만(金鐘萬)씨의 안내로 탐방단은 수풀 너머 숨겨진 위치를 정확히 찾을 수 있었다. 과거 김씨의 처(妻)이모 민금순(83)씨 부부가 일본인으로부터 산 집 뒷산에서 숯가마터를 발견한 덕분이었다. 현재 숯가마터를 포함한 토지와 건물은 미국인 소유다.

숯가마로 가는 길엔 1m가 넘는 잡초가 무성했다. 바위의 이끼는 바닥을 더욱 미끄럽게 했다. 가시덤불 사이로 지날 땐 모기가 살을 뜯었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숯가마는 90년 역사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크기는 대략 가로·세로 2m 입구에 10m 길이였고 사각 터널식(式)이었다. 아래쪽에 땅을 파 연통을 넣고 위에 레일을 깔아 숯을 만들어 냈다. 내부로 들어가 레일 위를 걸어 보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발을 잘못 내딛는 순간 1m 아래로 빠져 버린다. 내벽에서 90년 된 녹이 뚝뚝 떨어졌다. 입구에 세워진 작은 철 기둥은 세월의 풍파를 못 이기고 작은 충격에도 금세 부서졌다.

이덕희 미주한인재단 이사장. ⓒ김정우


김종만씨는 “하와이에서 그나마 몇 남지 않은 독립 유적인데, 심각할 정도로 방치돼 있다”며 “숯가마의 중요성을 안 현재 집주인이 땅값까지 올려 매입이 더욱 어려워졌다”고 설명했다. 숯가마 입구에 자리한 가옥 철문엔 ‘매물(for sale)’이란 팻말이 걸려 있었다.

숯가마터 인근 마을엔 이승만의 동지촌 거주지가 자리 잡고 있다. 90년 세월이 지나면서 몇 차례 개·보수와 증축이 이뤄졌지만, 건물의 원형은 크게 바뀌지 않은 상태다. 이승만이 거주하던, 당시 만든 빗물받이통 받침대는 새로 만든 통 옆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현재 이곳에 거주하는 글로리아(Gloria) 씨는 “벽지(僻地)까지 외국 방문객이 온다는 자체가 신기할 뿐”이라고 놀라워했다.

이덕희(李德姬) 미주한인재단 이사장은 탐방단을 대상으로 한 특별강연에서 “2004년 한인들이 돈을 모아 총 네 개 필지의 경계선에 자리한 숯가마터를 매입하려 했지만, 토지주인 4명 중 1명은 찬성, 1명은 반대, 2명은 연락이 두절돼 결국 실패했다”고 설명했다.

“성인군자가 아니라 선각자였다”

탐방단원들에게 하와이 독립운동사에 대해 설명 중인 강규형 명지대 교수. ⓒ김정우


최근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100년사》란 책을 펴낸 이 이사장은 하와이 독립운동사(史)의 최고 전문가로 손꼽힌다. 그는 “이승만이 하와이에 25년 살면서 가장 주력한 사업은 결국 ‘교육’”이라며 “언젠가 나라를 다시 세우려면 지도자 양성이 가장 시급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국내를 비롯해 만주와 상하이 등 여러 곳에서 독립운동가들이 숭고한 활동을 했지만, 이승만만큼 장기적인 비전을 보고 독립과 건국을 준비한 인물은 없었습니다. 최근 그를 향한 악의적 역사 왜곡은 정말 문제가 크다고 봅니다.”

탐방단 지도교수로 참여한 강규형(姜圭炯) 명지대 교수는 최근 논란이 된 역사논쟁을 두고 “우남을 무작정 우상화하는 것도 문제지만, 경시하는 것은 더 큰 문제”라며 “더도 말고 그의 과(過)를 강조하고 가르치는 만큼만 그의 공(功)을 알아 갔으면 좋겠다”고 설명했다.

“그는 약점이 많은 인물이었습니다. 철저한 정치인이었고, 고령으로 장기 집권을 했죠. 그는 성인군자가 절대 아닙니다. 하지만 선각자(先覺者)였음은 분명합니다. 미국의 전문가들도 예측 못한 일본의 미국 기습공격을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란 책을 통해 경고할 정도로 국제정세에 밝았습니다. 그의 책은 일본의 진주만공격 이후 베스트셀러가 됐죠.”

탐방단원인 한대규(韓大奎·19·성균관대)씨는 “고교시절 조선말기까지만 국사를 배워 근·현대사에 무지(無知)한 데다, ‘건국’이나 ‘초대(初代)’란 개념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며 “이번 탐방을 통해 이승만의 위대한 면모를 배울 수 있었다”고 했다.

허세연(許世姸·20·단국대)씨는 “사학과 학생으로서 독립운동사를 배웠지만 대부분 중국 중심이었다”며 “하와이 독립운동사의 현장 대다수가 민가(民家)로 바뀌어 볼거리는 상대적으로 부족하지만, 이런 기회가 확대돼 역사 공부를 보다 입체적으로 했으면 한다”고 했다.

이현욱(李玹旭·25·부산대)씨는 “한국에서 주류시각은 이승만을 독재자로 규정하고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만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데, 한 사람에 대한 평가는 공과가 구분돼야 한다”며 “이승만의 ‘과’는 많은 이가 잘 알지만, 독립운동에 대한 업적과 행보는 지나치게 무시된 듯하다”고 했다.

“하와이는 남조선”

하와이섬 힐로 지역에 자리한 무연고 한인묘역과 한국이민조상 기념비 앞에서 추모하는 탐방단원들. ⓒ김정우


하와이 제도는 여덟 개의 유인도(有人島)와 부속도서로 이뤄졌다. 1898년 미국에 병합됐으며, 사탕수수 농장 개발 이후 한국, 중국, 일본, 필리핀 등 다국적 노동자가 이민사회를 개척했다. 이승만이 하와이에 도착한 1913년 당시 한인은 총 4533명으로, 전체 인구 19만1909명의 2.4%에 이르렀다. 이승만은 하와이 동포사회를 ‘기독교국가’로 만드는 소명(召命)을 갖고 있었으며, 하와이 제도의 여덟 개 섬을 조선팔도(朝鮮八道)에 비유하며 하와이를 ‘남조선’이라고 불렀다. 이승만의 구상은 코리아 ‘디아스포라’ 였다. 손세일 전 의원이 《월간조선》 2004년 3월호에 기록한 이승만의 발언 내용 중 일부다.

<이 여덟 섬에 한인 아니 가 있는 곳이 없으니, 가위 조선 팔도라. 섬 도(島)자와 길 도(道)자가 뜻은 좀 다르나 음은 일반이니, 이것을 과연 우리의 남조선이라 이를 만한지라. 장차 이 속에서 대조선을 만들어 낼 기초가 잡히기를 바랄지니, 하나님이 십년 전에 이리로 한인을 인도하신 것이 무심한 일이 아니되기를 기약하겠도다. ….

하와이 사는 사람들이 이것을 태평양 낙원이라 하나니, 우리 고초 중에 든 민족에게 이곳이 한 낙원되기를 바라노라.>⊙
 
하와이 독립운동 사적지 탐방단 수기
“이승만은 독립을 넘어 독립 그 후를 꿈꿨다”

수기정리 : 朴鍾元 月刊朝鮮 인턴기자

하와이에서 되찾은 민족의 영혼


김진기(金鎭基) 명지대 미술사학과 4학년


1903년부터 조선인들은 사탕수수밭 노동 등을 위해 정착했다. 그해는 우남 이승만이 감옥에 갇혀 감시받는 와중에 《독립정신》을 힘겹게 쓰던 때였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1913년에 이승만은 하와이에 정착했다. 아쉽게도 지금은 그 터와 흔적들만이 남아 있다.

이승만은 교육을 중시했다. 하와이에서의 이승만은 교육의 힘을 최우선시했으며 국제사회에서 독립을 위한 외교적 노력을 병행했다. 일본인과 중국인에 비해 수가 훨씬 적었던 한국인들을 위해 이승만은 ‘한인사회는 한인의, 한인에 의한, 한인을 위한 교육’에 헌신적 노력을 기울였다. 결과는 어느 이주민족도 해내지 못한 자체 교육기관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그의 교육열은 평상시 생각하던 선각자적인 가치관에서 비롯됐다.

이승만은 배재학교에서 선교사들로부터 영어와 신식교육을 착실히 배웠다고 한다. 그는 상당히 실용적인 관점에서 서구문물, 그리고 기독교를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 기독교 전파와 더불어 민족주의적 교육에 전력을 쏟았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이승만과 한인1세대가 민족적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교회가 갖는 중요성은 예배를 드리고 포교활동을 하는 것을 넘어선다. 시설을 통해 한인의 결속과 교육이 병행됐다. 우남은 한인사회가 교회와 교육시설을 중심으로 ‘한국인의 디아스포라’를 지향했다. 당시의 한인들은 독립된 조국을 꿈꾸며 부지런히 살았다. 교육을 위해 자금을 대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다. 독립운동을 위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충당하기도 했다.

1914년은 이승만과 박용만이 활동의 방향을 놓고 각축을 벌이며 모금활동을 했다. 하와이의 동지회와 국민회는 한인들의 정체성을 지키는 동시에 ‘교육’을 위한 단체였다. 이승만은 임시정부가 계파갈등으로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1926년부터 동지촌을 세워 하와이섬(빅아일랜드)에서 한인 집단생활을 시작했다. 빅아일랜드의 숯가마터는 바로 그 흔적이었다. 자체사업을 통한 생활향상이 목표였다. 이후 동지회관과 쿨라 콜레아에 위치한 한인기독학원의 방대한 부지는 매각됐고, 조국의 대학설립(인하대학교)에 기초자금이 되었다.

역사에 대한 객관적 태도 필요해

이번 탐방은 필자에게 있어 ‘영혼을 찾는 일’이었다. 대한민국을 위해 헌신한 분들을 기리는 기회가 어떻게 영혼을 파는 일이겠는가. 국가의 혼을 찾는 여정이었다.

그의 삶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했다. 구한말에 태어나 개화의 세례를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새로운 문명을 읽고 근대화한 조국을 꿈꿨다. 독립을 뛰어넘어 독립 그 후를 꿈꿨다. 총칼이 아닌 교육과 계몽을 통한 근대국가의 출현을 하와이에서 부르짖었다.

현실은 그를 분단의 원흉으로만 치부하고 있다. 객관적 차원에서의 공과(功過) 구분을 해 주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승만과 동료들에 의해서 건국이 가능했고, 그 이후의 노력이 더해져 대한민국의 오늘이 존재한다. 정전 60주년을 맞았다. 이제라도 그들에 대한 차분한 평가가 뒤따라야 한다.

이승만은 《독립정신》에서 ‘진정한 성공의 길은 우리가 다른 사람처럼 부강하게 되어, 예전에 은인이었던 사람들을 오히려 도와주는 것’(319쪽)이라고 밝힌 바 있다. 한국사회의 완성은 과거의 사실에 대한 성숙한 태도에서 비롯된다. 또 국제적인 책임을 준수함에 좌우된다.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사실이다.



李承晩과 하와이, 그리고 한인공동체를 찾아서

곽지섭(郭知燮) 건국대 대학원 한국사 전공


하와이에서 대한민국이 비교적 잘 보전된 유적지는 ‘교회’다. 세계 최초의 한인 감리교회로 발전한 하와이 한인 그리스도연합 감리교회는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다. 감리교 계열이 아닌 한인기독교회의 입구에선 광화문이 연상됐다. 그들의 민족정체성이 교회를 통해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하와이 한인들에게 교회는 고향을 떠나 의지할 곳 없던 그들에게 삶의 안식처였다. 힘이 없었던 그들은 교회라는 커뮤니티를 통해 한인공동체를 형성해 나갔다. 하와이 한인들은 상부상조해 가며 힘든 삶을 이겨 냈다. 교회는 하와이 한인들을 이어 주는 핵심적인 그 무엇이었다.

세계 곳곳으로 흩어진 코리언 디아스포라들은 각 지역에서 교육열이 높은 민족으로 명성이 높다. 하와이 한인들 역시 후진세대의 교육을 위해 힘썼다. 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된 공동체는 훌륭한 교육적 토대를 마련하여 한인사회 발전에 이바지했다. 이를 토대로 고향에 독립자금을 지원할 정도로 성장했다.

하와이는 이승만에겐 제2의 고향이다. 현재에도 흔적들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이승만이 하와이에 처음 들어왔을 때 살았던 가옥 등 거주한 3채의 집이 모두 남아 있다. 현재는 개인주택이다.

또 이승만의 흔적은 한인학교의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있다. 1913년 감리교회가 설립한 한인기숙학교의 교장으로 임명됐다. 그리고 한인여학원 건립에도 주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이를 한인기독학원으로 발전시켰다. 또 한인촌 건설을 위해 빅아일랜드에 넓은 토지를 구입하여 동지촌 건설에도 힘썼다.

잊혀 가는 하와이 1세대… 그들을 기억해야 할 때

이번 탐방은 하와이라는 새로운 환경 속에서 국가의 독립을 위해 힘써 온 하와이 한인들의 삶과, 그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지녔던 이승만 전 대통령의 행적을 살펴보자는 취지에서 건국이념보급회 주최와 국가보훈처의 후원으로 진행되었다.

하와이에서 첫 한인 사회는 1903년 1월 13일 갤릭호(The Gaelic)를 타고 호놀룰루항에 도착한 102명의 조선인에 의해 형성되었다. 한글로 쓰인 ‘이민유적지’ 표지판은 많은 한인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노동자로 활약했음을 알려준다. 기계문명을 접한 한인들은 얼마나 당황했을까.

유적지들이 세월의 흐름을 못 이겨 사라지는 것처럼, 우리의 기억 속에서도 하와이 한인의 역사는 점점 잊히고 있다. 역사는 이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에 대한 논의나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인사회가 형성됐다는 단편들만 알려진 것이 고작이다.

이번 탐방을 통해 일제강점기에 이주를 선택한 하와이 한인들이 어떠한 정서와 가치관을 가졌는지, 조국독립과 생존 사이에서의 커다란 고뇌에 대한 의문점들을 가지게 됐다. 하와이 한인이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들도 고민했다. 의미가 깊은 탐방이었고 잊혀 가는 우리 역사를 재음미할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역사의 傷痕을 따라가는 여행길

홍희진(洪喜眞) 인하대 경제학과 4학년


필자는 인천에서 태어나 대학교까지 인천에 위치한 인하대를 다닌다. 최근까지 이승만이 대학을 설립했다는 사실에 대해 전혀 몰랐다. 이후 모교의 역사, 창학(創學)정신, 그리고 교육이념을 공부했다. 이와 같은 관심은 자연스레 우남의 ‘제2의 고향’ 하와이 탐방으로 이어졌다.

하와이 독립사적지 탐방을 통해 한인들이 사탕수수 노동자로 혹독한 노동에 시달렸다는 새로운 사실을 배웠다. 또 독립자금을 모은 선조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독립정신을 글이 아닌 마음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 아울러 모교의 창립자 이승만 박사의 희생정신과 독립정신을 실증적으로 알 수 있었다.

처음으로 한인여학원의 기숙사터를 방문했다. 한인여학원은 이승만이 한인기숙학교 교장을 사임하고 설립한 곳이다. 이승만의 행보를 통해 그가 얼마나 교육에 대하여 뚜렷한 신념이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여자들을 교육하지 않는 것이 상식이었던 당시의 관념을 깨버린 셈이다. 그는 나라를 잃는 과정의 핵심이 국민의 무지몽매이기에 계몽운동의 중요성, 특히 한인 자녀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하와이로 온 초기 한인이민자들이 일한 카후쿠 설탕공장 방문도 인상 깊었다. 사람 키의 약 2배가 넘는 사탕수수들을 바라봤다. 선조의 희생정신과 독립에 대한 열망, 애국심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민사(史) 중 매우 중요한 사적일 수 있음에도 방치되고 있었다.

빅아일랜드에서는 한국 이민자 공동묘지인 알라에 공동묘지를 찾았다. 나라를 위해 고생하다가 세상을 떠난 선조의 수많은 묘지를 눈앞에서 보니 비장함이 감돌았다. 묘지를 방문해 애도하며 선조에 대한 존경심과 함께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다만 일본인들의 묘지에 비하여 한인 선조의 묘비는 비교적 낙후된 느낌이었다. 아쉬웠다.

진주만이 보였다. 진주만 폭격은 모순적으로 우리나라가 해방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바다 앞에는 수많은 비석과 인양하지 않은 배가 진열돼 있었다. 글만으로는 접할 수 없었던 새로운 광경이었다. 국적에 관계없이 진주만 공습이나 세계대전으로 인해 희생된 군인들과 한인들을 위해 묵념했다. 하와이 독립사적지 탐방의 중요성을 인지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나와 조국을 돌이켜보는 생생했던 시간

하와이 독립운동 사적지 탐방은 이승만의 생애와 교육사업에 대한 신념을 되짚어 보는 계기가 되었다. 또 혹독한 노동에 시달림을 감수했던 선조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했다. 경험은 인간을 성장시킨다. 국가와 인류사회 발전에 공헌하려는 의욕적인 자세를 고취한 셈이다.

하와이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서 얻은 것도 있다. 국외에 살면서도 대한민국을 위해서 노력하며 애국심을 갖고 사는 사람이 많다는 점을 확인했다. 지금 한국에서 학생들이 면학(勉學)할 수 있는 이유는 선배들의 노력이 그 밑바탕이 됐기 때문이다.

또 유적지들이 중요한 의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의 관심 밖이라는 사실은 씁쓸하다. 많은 독립사적지를 방문했다. 그러나 사적지보다 ‘그 자리’를 방문한 일이 대부분이다. 그나마도 남아 있지 않은 경우도 수두룩했다. 지금부터라도 유적지를 보호하기 위한 조직적인 움직임이 잇따랐으면 한다.⊙

월간조선 2013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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