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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남 "사실을 얘기하면 사람들이 싫어한다"

유쾌한 직설

by 김정우 기자 2014. 3. 25.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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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항상 욕을 먹는다. 종교책을 쓰면 ‘사이비’란 비난을 받았고, 일본에 관한 책을 쓰니 ‘친일(親日)’이란 낙인(烙印)이 찍혔다. ‘29명 여친(女親)’이 있다는 발언엔 ‘바람둥이’란 반응이 돌아왔다. 그가 유일하게 욕을 먹지 않는 순간은 노래할 때다. 조영남(趙英男)씨 얘기다.

그는 이름 앞에 ‘가수’란 수식어가 붙는 걸 별로 반기지 않았다. 조영남은 가수이자 화가이며, 신학자이고 작가다. 현재 진행자로 활동하며 과거엔 연기도 했다. 그림을 그리면서 ‘화수(畵手·화가+가수)’로 불리기 원했던 그는 이제 그 ‘화수’란 타이틀에서마저 해방하려 했다. ‘사람 조영남’으로 불리고 싶단다. 그가 사람인 것은 불변(不變)의 진리(眞理)이기 때문이다.

‘최고가(最高價) 연예인 집’으로 통하는 그의 청담동 자택에 들어섰을 때, 현관부터 거실까지 그림으로 가득했다. 마침 오는 8월 서울 예술의전당과 제주도 남단 가파도에서 동시에 열릴 계획인 전시회를 준비하기 위해 작품을 옮기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그는 인터뷰를 하는 내내 붓질을 멈추지 않았다. 집 안에 사람과 그림은 많았고, 기타는 안 보였다.

조영남씨.

조영남씨. ⓒ서경리


그는 인맥이 넓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광대역(廣帶域) 인간관계’다. 정운찬, 김한길, 정몽준, 이장희, 김용옥, 조정래, 김지하, 빌리 그레이엄 등 그의 인맥은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 그는 ‘앨범으로 보관해 봐야 장롱 속에나 있다’는 이유로 사진을 모아 작품을 만든다. 주로 ‘여친들’과 ‘절친들’의 모습이 담긴 그의 작품에 모든 인맥을 다 포함하려면 그의 집만한 ‘화폭(畵幅)’이 필요할 듯했다. 과거 한 신문은 그의 광폭(廣幅) 인맥을 두고 ‘인간 복덕방’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솔직해서 피해를 자주 봤다. 대중(大衆)은 그에게 끊임없이 ‘왜(why)’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의 언행(言行)을 두고 왈가왈부(曰可曰否)하지만, 정체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가식을 싫어하는 그는 직설(直說)을 좋아하지만 독설(毒舌)은 자제한다. 숨기는 게 없지만, 묻지 않는 것은 말하지 않는다.

“내가 혀를 깨물면서 ‘늙은 티를 내지 말아야겠다’고 하는 이유가 있어요. 남자들은 예외가 없어. 나이 들면 말을 많이 해요. 묻지도 않은 얘기를. 어렸을 때부터 노인들이 묻지도 않은 것들을 얘기하는 게 질색이었어. 다 뻔한 소리지. 거기에 지갑이나 열면 들어줄 만한데, 그것도 안 하면 끔찍하잖아. 그래서 나는 일찍부터 묻지 않으면 얘길 안 해요.”

사실이다. 그는 물으면 답한다. 단, 조건이 있다. 자신에 대한 얘기여야 한다. 삼자가 피해 볼 만한 선은 넘지 않는다는 나름의 방침이 있었다.

임재민・김정우의 ‘유쾌한 직설’ ⑦ ‘광대역 아웃사이더’ 조영남

시쳇말로 ‘돌직구’가 대세다. 촌철살인(寸鐵殺人)도 고담준론(高談峻論)이 되면 그 가치가 무색(無色)해지는 시대다. 이유 없는 막말과 목적 없는 독설의 난무(亂舞)는 ‘핫(hot)’한 시류만 좇다 생긴 부작용이다. 이른바 ‘B급 정서’에 ‘격(格)’을 살짝 덧칠한 인터뷰로 ‘유쾌한 직설’을 시도해 봤다.

⊙ 가수, 화가, 신학자, 작가, 진행자… 가장 마음에 드는 수식어는 ‘사람 조영남’
⊙ “묻지 않으면 답하지 않고, 숨기지 않으면 자유로워진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잘 모른다”
⊙ 정운찬, 김한길, 손학규, 정동영, 정몽준 등과 ‘광대역 인맥’… “王의 남자 되고 싶다”
⊙ 이상의 詩와 화투짝의 흑싸리를 오가는 그의 작품과 인생


‘탁자 위 세 물건’

인터뷰를 하려 소파에 앉으니 탁자 위가 심상치 않았다. 책들과 잡지 사이로 전처(前妻)의 사진, 혈압체크 표, 보험증서가 눈에 띄었다.

—일부러 훔쳐본 건 아닌데, 직업상 이 물건들이 눈에 자꾸 들어옵니다. 공식적으론 1945년생으로 알려졌는데, 보험증서엔 1944년생으로 나오는군요.

“호적엔 1944년생으로 돼 있어요. 우리 아버지 조승초(趙勝楚)씨가 이북(以北)에서 다 데리고 내려왔잖아. 아버지도 나처럼 기억력이 ‘멍청’하셔서 나를 1944년생으로 해 놨어요. 그런데 엄마가 평생 ‘너는 해방둥이’라고 우기셨지. 해방 때 핏덩이를 안고 어디 숨고 그랬던 기억이 있대요. 그래서 나는 1945년생으로 알고 있지.”

—정확하게 몇 년생인가요.

“정확한 건 없지. 고향도 연도에 따라 바뀌어요. 충청도일 수도 있고, 황해도일 수도 있고. 중학교 때부터 서울에 살았기 때문에 제1고향은 서울이기도 하고. 고향이 세 개야.”

인터넷엔 1945년생이라고 나오지만, 그의 책은 이 사연을 그대로 설명하고 있다. 저자 소개에 적힌 그의 생애는 이렇다.

<1944년과 1945년 사이에 황해도 남천과 신천 사이에서 태어남. 1950년 1·4후퇴 때 온 가족이 충남 예산군, 흔히 삽다리로 더 알려진, 삽교면으로 영구 이주.>

—혈압체크 표도 신경이 쓰입니다. 이제 69세 아니면 70세인데, 건강은 어떻습니까.

“보다시피… 큰 문제가 있으면 이렇게 인터뷰하겠어요?”

—요즘 진행하는 TV조선 <낭만논객>이란 프로그램을 보면, 함께 출연하는 김동길(金東吉·86) 교수와 김동건(金東鍵·75) 아나운서를 큰형님, 작은형님으로 부르더군요.

“형님들에 비하면 난 아직 애기지, 애기. 연대 나온 동건이 형은 김동길 선생이 스승이니까 ‘형’이란 소릴 잘 못하더라고. 난 내 선생이 아니니까 편하게 하는 거죠. 왜냐하면 시청자가 보기에 ‘선생님’ 이런 거 자꾸 하면 따분하거든. 그래서 미리 ‘형’이란 장치를 해 놓고 그렇게 부르는 거죠.”

—세 분이 토크쇼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우리 매니저인가? 누군가가 ‘김동길, 김동건, 조영남, 이렇게 모아서 쇼하면 어떻겠냐’고 그랬어요. 그래서 ‘재미있겠다’ 해서 바로 시작한 거죠. 원래 엄청나게 친했어요. 친교가 있었기 때문에 그 동력으로 지금 가는 거지. 큰형님은 매우 교육적이고, 선천적으로 바른 작은형님은 ‘정도(正道)’를 말하고, 나는 재미를 맡아야 해…. 내 역할은 거기에 있다고 봐요. 대한민국에서 누가 두 사람 앞에서 자유롭게 말하겠어. 나도 처음엔 굉장히 조심스러웠는데, 두 형님이 내 역할을 잘 이해해 주시죠.”

낭만논객

조영남씨는 TV조선 '낭만논객'을 함께 진행하는 김동길 교수(가운데)와 김동건 아나운서(왼쪽)를 각각 큰형님, 작은형님이라고 부른다. ⓒ서경리


女福, 男福, 人福

—평균연령 77세인데, 지치거나 힘들진 않나요.

“내가 지치고 힘들다는 얘길 못해, 그 노인들 앞에선. 그 쇼가 재미있는 건, ‘아무 보장이 없다’는 겁니다. 그 두 분과 내가 매주 출석한다는 보장도 없고. 한 분 안 나오면 뭐 물어볼 것도 없어요. 적당히 하고 장례식장으로 가면 되니까. 아주 웃기는 쇼야. 나는 그럴 때까지만 길게 했으면 좋겠어요. 누구 하나 출석 못하는 지경까지 가는 게 내 꿈이지. 오해할 수도 있는 게, 일찍 죽으라고 저주하는 게 아니에요. 지금 실제 상황이 그렇다는 거지. 누가 어떻게 될지 몰라. 내가 제일 먼저 ‘아웃’될 수도 있고.”

—그래도 모두 체력도 좋고 열정도 있는 것 같습니다.

“생명이란 게 그래. 열정 없이 죽은 사람이 있나요? 다 열정 가지고 죽지. ‘나는 천살 만살까지 살 수 있다’ 이러면서 다 죽는 겁니다. 건방진 소리가 아니라, 현실을 얘기하는 겁니다. 굉장히 웃기는 쇼야. 매주 출연하면서 ‘아, 이 노인들 아직도 살아있네…’ 나는 그 재미가 굉장해요.”

—그래서 더욱 의미 있는 프로그램이라고 생각됩니다.

“큰형님의 건강과 기억력은 정말 대단하고 신기해요. 나이 칠십만 돼도 깜빡깜빡하는데, 팔십 훌쩍 넘은 형님이 어떻게 기억력이 그렇게 좋으냐고. 나는 무슨 얘기하려다 ‘뭐였지?’ 하는데, 형님은 사건 연도부터 좔좔 나옵니다. 환상이에요. 천하에 이렇게 멋진 분들이 없어. 내가 평소에 여자복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말년에 드니 남자복도 있는 거예요.”

—결국 인복(人福)이 있다는 의미군요.

“옛날에 부모님 돌아가시면 3년간 시묘(侍墓)하고 매일 인사 드렸잖아요. 형님들껜 내가 사실 그래야 해요. 특별히 좋아하니까. 생전에 특별히 매주 매일 찾아뵈어야 할 분들. 김장환(金章煥) 목사, 김성수(金成洙) 대주교, 그리고 돌아가셨지만 김수환(金壽煥) 추기경. 자주 찾아뵈어야 할 분들인데, 그중 두 형님을 TV조선에서 매주 만나게 해 주니까, 복을 타고난 거지.”

—보통 ‘여복(女福)’은 처복(妻福)을 말하는 것 아닌가요.

“내가 처복이 없는 것 같아요?”

—생각하는 ‘여복’의 정의가 뭡니까.

“내가 만난 여자들, 그리고 지금 만나는 여친들. 그걸 생각하면 여복이 많죠. 여친들 다 멋진 사람들이야. 몇 명은 죽었지만. 김점선(金點善·화가), 장영희(張英嬉·수필가), 최윤희(카피라이터). 이 시대에 그렇게 멋있는 여자가 없었지. 다 내 친구들이었고, 나를 지지해 줬고, 나를 살게 만들어 줬고.”

—살게 만들어 줬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요.

“그때 ‘일본 파동’이 났을 때, 주변을 보니 우후죽순(雨後竹筍) 자살을 하더라고. 부산시장도 자살하고, 대우건설 사장도 자살하고, 현대 회장도 자살하고. 그래서 ‘나도 자살해야 하는 건가?’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나를 살려준 게 뜬금없이 찾아온 그 친구들이었어요. ‘오빠는 죄가 없다’고 위로해 줘서 내가 죽지 않게 지켜 준 친구들이에요. 여복이 있죠.”

‘인간 복덕방’이라는 소리를 듣는 조영남씨의 對人관계를 보여주는 사진작품들.


윤여정은 최고의 여자

그가 말한 ‘일본 파동’은 2005년 책 《맞아 죽을 각오로 쓴 친일선언》 출판 후폭풍을 말한다. 그는 극일(克日)을 위해 지일(知日)과 친일 단계를 거쳐 가야 한다고 생각해 쓴 책인데, 자극적인 제목 때문에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일본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앞뒤를 빼먹은 기사 때문에 그는 사실상 ‘매국노’ 취급을 받았다. 그는 2011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친일이라는 말이 원래는 ‘일본과 친하게 지낸다’는 건데 매국(賣國) 비슷하게 돼 버렸잖아요. 가든(garden)이 고깃집으로 바뀐 건 재미라도 있지만 이건 안 된다는 거죠. 원래 말뜻대로 하자, 친일이라는 말을 제자리에 갖다 놓자는 취지에서 친일 선언이라 했죠.”

2003년 8월 정몽헌(鄭夢憲) 현대 회장, 2004년 2월 안상영(安相英) 부산시장, 2004년 3월 남상국(南相國) 대우건설 사장 등 명사(名士)들의 자살이 이어지던 시절이었다. 자살은 전염된다. 조영남은 쏟아지는 비난에 한강에 투신할지, 집에서 뛰어내릴지 고민했다. 그를 지켜 낸 건 친구들이었다. 그들 중 세 명이 세상을 떠났다.

“죽은 느낌이 전혀 안 들어요. 전화하면 금방 나올 것 같고. 동길이형(김동길 교수)한테 그 얘길 했더니 영적 지수가 높아서 그런 생각이 든대요. 좋은 얘기 들었어.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요. 부르면 나오지만 단지 안 만날 뿐이지. 이대(梨大) 후문 카페에서 만나자고 하면 당장 나올 듯한 내 여자친구들.”

탁자 위에 놓인 마지막 물건에 대해 물었다.

—윤여정(尹汝貞)씨 사진은 왜 여기 있나요.

“그림 그리려고 갖다 놓은 거예요.”

—현재 조영남에게 윤여정은 정확히 어떤 존재입니까.

“이게 또 욕먹을 소리지만… 질문을 하니까 얘기하는 건데, 생각하면 좋은 점밖에 없어요. 어쩌다 이 시대 최고의 여자와 우연히 사귀어서 결혼했는데, 지금도 그 사실이 자랑스럽고 기분을 좋게 해요. 좋은 추억으로 남았고. 미묘한 얘기인데, 헤어지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봐요. 그가 나를 놔줬기 때문에 다 잘된 것이라고. 결과적으론 엄연한 사실이잖아요. 결혼해서 잘사는 여자들 입장에선 ‘어떻게 저렇게 얘기할 수 있나’ 최악의 소리로 들리겠지만, 팩트를 얘기하자는 거지. 그가 지금까지 내 아내였으면 좋은 내조하는 최고의 아내가 됐겠죠. 그런데 헤어지면서 살아야 하니까 지금처럼 독보적인 배우가 된 거죠. 내 공로라는 게 아니라, 헤어진 것 때문에 그랬다는 거예요. 내가 생각해도 궤변이죠.”

—남자 얘기로 좀 돌아가 보겠습니다. 최근 정운찬(鄭雲燦) 전(前) 총리의 동반성장연구소를 후원하기 위해 디너쇼까지 했는데, 어떤 사이입니까.

“서울대 총장 때 만나기 시작했어요. 우연히 만나고 보니 대학 학번이 내가 좀 더 위라서 형, 동생 하다가 총리가 되더군요. 사실 내가 아티스트로서 ‘왕의 남자’가 꿈이었어요. 굉장히 파워가 세잖아요. 특히 과거 왕정(王政) 시절엔 왕의 초상화를 그린 화가의 파워가 엄청났잖아? 친하니까. 그걸 보니 나도 이제 ‘왕의 남자’가 되면 ‘끗발’을 누릴 수 있겠다 싶었지. 손학규, 정동영, 김한길이 다 내 친구들인데 두 사람이 대선 나갔잖아요. 그때 ‘대통령 되면 내가 왕의 남자가 되는구나’ 그런 꿈을 꾸다가 결국 ‘영의정의 남자’까지 된 거죠. 정운찬 총리 때문에.”

조영남씨의 자택에서 그를 인터뷰하는 방송인 임재민씨(가운데)와 김정우 기자. 그는 인터뷰 내내 붓을 놓지 않았다. ⓒ서경리


‘왕의 남자’

—미완(未完)인 ‘왕의 남자’ 대신 확실한 ‘영의정의 남자’가 됐군요.

“영의정의 남자는 돼 봐야 파워가 없어요. 왕의 남자가 진짜지. 만약 정동영, 손학규, 김한길 중 한 명이 대통령 됐으면, 밖에선 격식을 갖춰도 칸막이 안에선 ‘야자’할 수 있잖아요. 예를 들어, ‘야, 숭례문이 무너졌다. 이건 어차피 잘해 봐야 재건축이다. 나한테 재건축 임명권을 달라’ 이렇게 말하면 대통령이 ‘형이 어떡할 건데?’라고 물을 것 아녜요. 그럼 ‘앞으로 불에 안 타게 기왓장 하나에서부터 기둥까지 모두 알루미늄이나 티타늄으로 만들겠다’고 하는 거죠.”

—숭례문 사고 당시 티타늄까지는 아니더라도 복원 대신 현대식 재건축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습니다만, 그래도 국민 정서상 역풍이 심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왕의 남자’가 하는 거지. 역풍이 세니 방어하는 겁니다. 지금 봐요. 결국 숭례문이 부실 공사로 난리가 났잖아. 숭례문이 국보 1호인데,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특징이 별로 안 보여요. 티타늄 같은 소재로 잘만 지으면 얼마나 멋있겠어. 불에도 절대 안 타고. 문화재를 보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뭐든 한계에 다다르면 새로운 문화재를 만드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니까.”

—문화재는 그렇다 쳐도 방식이 ‘밀실 정치’라 비판받을 것 같습니다.

“비판할 수 있어요. 그런데 내가 워낙 비밀이 없기 때문에, 정확히 말하면 ‘열린 밀실 정치’라고 할 수 있겠죠.”

—손학규, 정동영, 김한길 세 명은 언급했는데, 지금 현재 스코어로 ‘왕’에 가장 근접한 사람은 누굽니까.

“비슷비슷해.”

—친구 아닌 사람까지 포함해서 현재 거론되는 인사 중 누가 차기 대통령으로 유력해 보이나요.

“대통령을 아무나 합니까. 셋 중에 한 명이 해야지.”

—세 명 모두 야권(野圈) 인사인데, 여권(與圈) 후보군 중엔 친구가 없습니까.

“정몽준 의원과는 꽤 친해요.”

—정운찬 총리도 크게 보면 ‘잠룡’에 포함되니 언급된 5명 중 한 명이 당선되면 ‘왕의 남자’가 되는군요.

“다섯 명 모두 대통령 할만 해요. 맡겨도 돼.”

—최근 안철수(安哲秀) 의원의 새정치연합과 통합에 성공한 김한길 민주당 대표가 크게 주목을 받았습니다. 친분이 상당한데, 요즘도 연락합니까.

“자주는 아니고 이따금. 저는 알던 친구가 뭔가 되면 그냥 한발 물러섭니다. 더 달라붙으면 추접스러워지는 걸 많이 봐 와서. ‘영의정’이나 야당 대표가 되면 완전히 물러서는 거지. 거의 모른 척하고. 얘기 안 해도 사람들이 친한 건 다 아니까.”

1974년 안국동 한국화랑에서 열린 조영남씨의 첫 미술 전시회를 찾은 어머니 김정신 여사와 조카들.


대선 출마 선언?

—‘유일한 히트곡’인 ‘화개장터’ 작사를 김한길 대표가 했는데, 당시 어떤 상황이었습니까.

“둘 다 이혼하고 한 열 평짜리 월세방에서 뒹굴거릴 때였어요. 다 주고 와서 돈도 없고 할 일도 없었지. 수개월 욕만 진탕 먹으며 살았어요. 하루는 김한길이 신문을 들고 와선 ‘이걸 노래로 만들면 어떻겠냐’고 해요. 내가 ‘장터 얘기가 어떻게 노래가 되냐’고 했더니 막 된다고 우기더라고. 영호남이 만나는 게 얼마나 의미 있냐고 해서 탄생한 게 ‘화개장터’예요. 그땐 저작권 개념이 없을 때라 내가 작사·작곡 다 한 것으로 올렸지. 그 저작권료를 내가 타 먹고 있어요. 난 정말 김한길이 잘되길 바라는 게, 잘 안 되면 와서 저작권료 달라고 할까봐.”

—굳이 ‘왕의 남자’를 안 해도 본인 스스로 영향력이 꽤 있는데, 직접 정치할 생각은 없나요.

“에이… 안 돼. 왕의 남자쯤 돼야 말하는 것도 권위가 있고, 또 먹혀 들어가지.”

—시장이나 도지사까진 아니더라도, 국회의원 출마는 충분히 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할 수 있죠. 그런데 내 시간을 왜 정치에 빼앗기냐고요. 이렇게 재미있는데. 사실 8년 전쯤 《일간스포츠》에 ‘조영남 대선 출마 선언’이란 기사가 1면 톱으로 나온 적이 있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입니까.

“장상용 기자라고, 굉장히 친한 멤버인데, 그냥 웃자고 대선 출마 얘길 했더니 ‘이거 써도 되느냐’고 묻더라고. 그런데 내가 구질구질하게 ‘쓰면 안 돼’라고 할 사람이 아니잖아. 쓰라고 했더니 정말 기사가 나왔어요. 솔직히 진짜 쓸 줄은 몰랐는데, 엄청 크게 나와 버렸지.”

—반응이 어땠나요.

“욕을 ‘직싸게’ 먹었지. 회사에서도 욕먹고.”

2006년 2월 10일 자 해당 신문 기사를 찾아봤다. ‘자유인’ 조영남이 대선 출마를 선언했는데, “사회에서 소외된 사랑을 대변한다”며 “‘제2사랑당’이란 이름으로 창당(創黨)까지 하겠다”고 밝혔다. 당론은 “30년 후 일부일처제는 무의미하게 된다”는 그의 개방적 성(性) 담론에서 나왔다고 한다.

핵심공약은 ‘결혼 5년 중임제’다. 대통령 임기와 똑같이 5년마다 결혼을 ‘갱신(更新)’하는데, 별 문제가 없으면 ‘재계약’을 하고, 그렇지 않으면 합법적으로 이혼한다는 것이다. 그가 내세운 지지기반은 ‘마누라를 가진 채 뒤로 세컨드를 키우는 벌떼들’이었다. 기사 내용 중 일부다.

<조영남은 “지금 내 나이 또래 친구들이 한 여자와 결혼하고 뒤로 두서너 명의 애인을 두고 있다. 이것이 바로 ‘제2의 사랑’이다. 빙하에 숨어 있는 사랑들을 수면 위로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 그는 “이미 일부 지역에서 나와 뜻을 같이하고 있고, 나도 창당을 위한 행보를 은밀하게 진행하고 있다. 내가 당선되면 당원들이 양심선언할 것이다. 대선에서 2등 정도는 하지 않겠느냐”며 웃었다.>

—이 기사, 진심이었나요.

“진심이었지.”

—당시 기사 쓴 기자에겐 뭐라고 했나요.

“지금도 이 모임에 나와요. 걔도 일정 부분 감동했으니까 기사로 썼겠지.”

—진짜 2등 할 수 있었을까요. 정동영 후보가 당시 2등이었는데.

“대통령은 못 돼도, 2등 정도는 했을 거예요. 정동영이나 손학규보다는 더 많이 나왔을 거야.”

—이거 써도 됩니까.

“써도 돼요. 그 친구들 다 ‘쿨’하니까.”

‘여친’을 가진 비결

조영남은 그들보다 몇 배 더 ‘쿨’해 보였다. 대답에 막힘이 없었다. 인터뷰 전날, 조영남씨가 이번 ‘유쾌한 직설’ 시리즈의 주인공이란 소식을 들은 MC 임백천(林白千)씨는 질문 몇 개를 꼭 해 보라며 알려줬다.

—언제까지 몇 명의 ‘여친’을 더 만들 계획인지 임백천씨가 궁금해합니다.

“걔는 정말 불쌍해. 그런 게 없잖아. 숨 헐떡거리는 소리가 들려.”

—왜 남자들과는 술을 안 마시고, 꼭 예쁘고 젊은 여자들하고만 마시는지요.

“오래된 시든 꽃하고, 젊고 싱싱한 꽃이 딱 둘 있으면 어느 걸 집을까요. 그런 ‘선택권’이 있다는 거지. 당연히 젊은 꽃이 없으면 늙은 꽃과 술을 마셔야 해요. 이건 자연현상이야. 젊은 꽃을 취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사실을 얘기하면 사람들이 다 싫어해요. 솔직하게 얘기하면 욕을 먹고. 그래서 난 평판이 안 좋지. 전체적으로도 그렇고, 여자들한테는 더 그렇고. 그걸 난 각오하고 직설을 하는 거예요.”

70대에 들어선 그에게 ‘이상형’을 물었다. “물으니까 답한다”며 그는 “젊고, 예쁘고, 착하고, 돈 있는 여자”라고 했다. “지갑을 자주 여느냐”는 질문엔 “지갑도 안 열면 나한테 여친이 존재할 것 같으냐”고 반문했다. 그는 “여자들이 ‘지갑 여는 남자’를 좋아하는 것은 철칙”이며, 자신은 그걸 따를 뿐이라고 했다.

—‘지갑’ 말고는 어린 ‘여친’을 많이 가진 비결이 없나요.

“선천적인 조건을 가졌잖아요. 나이가 많잖아. 만나는 여자 대부분 나보다 나이가 훨씬 어릴 수밖에. 물론 아닌 경우도 있어요. 작년에 돌아가신 정광모(鄭光謨) 회장도 내 소중한 여친인데, 이미 그때 80대셨고.”

—2005년 10월 《월간조선》 기획특집 ‘명사들의 미리 쓰는 유서’를 통해 “죽을 때 옆에 있는 여자에게 재산의 4분의 1을 주고, 나머지는 세 자녀에게 준다”는 유서를 썼는데, 최근에 내용이 바뀌었다고 들었습니다.

“TV조선 ‘낭만논객’ 진행하면서 크게 하나 건진 게 유서 고친 겁니다. 사회환원 부분을 추가했어요. 나머지는 다 똑같아요. 내 옆에서 지켜 주는 여자, 자녀 3명, 나머지 사회환원. 25%로 쪼개던 걸 20%로 바꿨어요.”

대답을 하며 그는 붓질을 이어 나갔다. 캔버스에 가득 찬 판자촌이 저마다 색깔을 찾고 있었다. 50여 년 전 고교시절 교회 가던 길을 회상하며 그려 낸 작품이었다.

“학교 다닐 때 후암동 집에서 창신동 동신교회까지 가려면 전차에서 내려서 이 길로 걸어갔어요. 후에 운동장도 생기고 했지만, 그땐 여기가 창녀촌이었어요. 다른 길로 가도 되는데, 고등학생 때니까 호기심에 계속 뛰어서 지나가 보는 거예요. 일부러 사람 없는 한적한 시간에 지나가면 여자들이 요강 부시러 나오는 풍경도 보고 그랬지. 마침 그때 사진이 한 장 있어서 그걸 보고 회상하며 그리기 시작했어요.”

KBS ‘체험 삶의 현장’을 진행할 당시의 조영남씨.


‘아웃사이더’

조영남은 그가 활약하는 각 분야에 대해 다양한 책을 펴냈다. 《현대인도 못 알아먹는 현대미술》 《예수의 샅바를 잡다》 《맞아죽을 각오로 쓴 100년 만의 친일선언》 《이상은 이상 이상이었다》 《조영남 양심학》 등 제목부터 직설적이다.

—지금까지 저술한 책을 훑어보면 미술, 종교, 일본 등 각 분야에 대해 시비를 거는 듯한 느낌도 듭니다.

“사람들에겐 그렇게 보였죠. 예를 들어, 《예수의 샅바를 잡다》는 내가 알고 싶었던 종교를 파고든 책이에요. 미국에서 신학교 입학하면서 든 생각이 ‘우리 김정신(金貞信)(조영남의 모친) 권사님네 집이나 조승초(부친)씨 댁은 왜 기독교를 믿게 됐을까’, 그게 궁금했어요. 그걸 알아내기 위해 신학공부를 하기 시작했고, 결국 대충 알아낸 내용을 책으로 쓴 거지.”

—2000년에 책이 나왔는데, 그때 결론이 지금도 유효합니까.

“유효하죠. 부처도 있고, 공자(孔子)도 있고, 마호메트(Mahomet)도 있고, 단군(檀君)도 있고, 힌두교 신(神)도 있는데, 왜 하필 예수교를 믿느냐는 것. 그 질문이 함석헌(咸錫憲) 선생께도 갔어요. 내가 함석헌 선생을 가장 높이 보는 이유가 그 질문을 스스로 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한국인인데 왜 기독교를 믿게 됐는가. 결국 알게 된 건, 우리 민족은 항상 수입종교에 매달렸어요. 고구려의 불교, 조선의 유교, 그리고 근대사에 기독교가 들어왔는데, 결국 유행이지. 우리 부모는 그 시절 최고로 유행한 기독교를 믿게 된 것뿐이에요. 조상에게 항의할 수도 없고. 이젠 모든 종교가 다 훌륭하고 똑같이 보이는 겁니다.”

—기독교를 받아들인 게 신의 섭리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까.

“제일 좋아하는 책이 콜린 윌슨(Wilson)의 《아웃사이더》예요. ‘신은 죽었고 더 이상 신의 능력은 작동하지 않는다’는 니체의 실존철학 틀에서 나온 책인데, 나 또한 신의 영역 밖에 있다고 생각해요. 일단 ‘신’이란 얘기가 나오면 벌써 종교가 되는 거지. 내가 특히 시인(詩人) 이상(李箱)에 관심이 많은데, 이상은 종교를 그렇게 얘기 안 해요. ‘오감도’ 중에 ‘2인’이란 시가 있는데, 내 생각과 상당히 비슷해요. 알 카포네가 교회 문앞에서 입장권을 팔고 있다는 대목이 나와요. 알 카포네와 예수를 대비시킨 절묘한 시구(詩句)인데, 내가 아는 한 시 중에서 단연 톱이에요.”

조영남의 시인 이상 연구서인 《이상은 이상 이상이었다》는 이상의 시 ‘2인’을 이렇게 해석했다.

<시인은 그리스도와 알 카포네를 한 팀으로 묶어 버렸다. 이것은 흑과 백, 백과 흑의 흑백논리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학적 대칭구도다. 보들레르와 랭보는 신을 그토록 저주하고 분노하면서 끝내 신과 결별하지 못한다. … 그들에 비해 우리의 이상 형님은 그렇게 막강하게 밀고 들어온 서양의 예수 그리스도를 저주나 분노 대신 금세기에 가장 악명 높은 조직폭력배 알 카포네와 동격의 인물로 취급해 버린다. 이건 조폭 수준의 횡포지만, 문학과 미학의 최고 정점이다.>

조영남씨의 작품엔 ‘서민적이고 보편적인 오락’인 화투가 자주 등장한다. ⓒ서경리


‘흑싸리 껍데기’

조영남씨는 이 시를 캔버스에 옮긴 후 화투 쪼가리를 추가해 ‘그럴듯한 작품’을 만들어 냈다. 가수 이장희(李章熙)씨가 갖고 싶다고 해서 작품을 넘겨줬고, 얼마 후 그림은 도둑맞았다. 그는 “다른 건 다 좋다. 그런데 ‘납촬(拉撮)’해 간 도둑님이 이장희의 그 그림이 ‘그리스도와 알 카포네’란 무시무시한 제목의 그림인 줄 아는지 모르는지 나는 못내 궁금하다”고 했다.

그의 그림엔 화투가 자주 등장한다. “서민적이고 보편적인 오락”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본을 배척하면서 일본 놀이에 매달려 헤어나지 못하는 이중성”도 그가 화투를 그리는 이유다. 그는 화투짝 48장 중 ‘흑싸리’를 제일 좋아한다.

“철학적인 이유와 미학적인 이유가 있어요. 철학적으론 화투 48장 중에 흑싸리가 제일 무시당하잖아. 소외된 아웃사이더. 우리가 흔히 ‘흑싸리 껍데기 취급한다’고 하듯, 내가 그런 사람이란 뜻이지. 약자에 대한 보호 본능도 있고. 미학적으론 흑싸리가 단순해요. 흑백 조합으로 덜 화려하고, 그래서 가장 아름답고.”

—결국 인생에서 가장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가치가 ‘자유’란 생각이 듭니다. 종교도 자유주의, 연애도 자유연애.

“진리와 자유지. 신학 공부하면서 가장 내 뇌리를 때린 게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였어요.”

—자유를 위해 숨기지 않는 건가요.

“그걸 알아야 해. 숨기지 않으면 엄청나게 자유로워진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잘 몰라요. 다만 타인(他人)을 보호하기 위해 일정 부분 숨길 순 있지만, 그 외엔 숨길 리도 없고, 숨길 까닭도 없다는 게 내 생각이죠. 카뮈(Camus)의 《이방인》을 보면 주인공 뫼르소가 남의 시선에 굴하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하잖아요. 진정한 자유인이지.”

—조영남은 자유주의자라고 해야 할까요, 아웃사이더라고 해야 할까요.

“아웃사이더란 게 진리와 자유를 공동 쟁취하는 사람이라고 봐요. 콜린 윌슨이 아웃사이더로 분류한 니체, 반 고흐, 니진스키,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이런 사람들이 비슷한 생각을 가졌지.”

—현재 꿈이 있습니까.

“꿈이 있으면 자유롭지 못하지. 삶은 기쁨 반 슬픔 반으로, 행복 반 불행 반으로, 희망 반 절망 반으로 이뤄져 있는데, 우리는 늘 그냥 ‘행복해라’, ‘꿈과 야망을 가져라’는 식으로 치우친 교육을 받았어요. 그 중심에 서면 외로울 때도, 슬플 때도 ‘그러려니’ 하고 자유스럽게 소화해 나가는 거지.”

독특한 대화법으로 진행된 인터뷰가 끝날 때쯤, 질문이 떠올랐다. ‘누가 조영남에게 돌을 던지랴.’⊙

趙英男

⊙ 70세(또는 69세). 서울대 성악과 명예 졸업. 미국 플로리다 트리니티신학교 졸업.
⊙ ‘조영남쇼’ ‘체험 삶의 현장’ ‘조영남·최유라의 지금은 라디오 시대’ ‘낭만논객’ 등 진행.
⊙ 저서 《현대인도 못 알아먹는 현대미술》 《예수의 샅바를 잡다》 《이상은 이상 이상이었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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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조선 2014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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