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추적] 침묵 깬 황우석 - 최초 인터뷰

인터뷰

by 김정우 기자 2009. 8. 17. 16:21

본문

반응형
[추적] 침묵 깬 黃禹錫
“시간이 없다. 제발 나에게 연구할 기회를 달라”


⊙ 수사 中 “숨겨놓은 돈 없느냐”는 검찰 질문에 “찾으면 당신 다 가져라”
⊙ “盧聖一, 내게 노벨상 탈 거라며 자신은 2인자 하겠다고 말해”
⊙ 2006년 파문 당시 연구원들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자살 포기
⊙ 만남 후 기자에게 “내가 정말 국제적인 사기꾼 같습니까?”라고 물어

金正友 月刊朝鮮 기자 (hgu@chosun.com




 “같이 들어가서 식사라도 하시죠.” 지난 3월 16일 저녁 서울시 방배동의 한 식당, 문 밖에 서 있던 필자에게 黃禹錫(황우석) 박사가 방으로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일명 ‘황우석 사태’ 이후 3년 반 동안 언론과의 접촉을 끊어 왔던 그였다. 그날은 황 박사의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사기) 등’에 대한 34차 공판이 진행된 날이었다.
 
  月刊朝鮮은 2007년 11월 황 박사를 만나 짧은 시간 인터뷰를 가졌다. 그는 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취재기자의 여러 질문에 “나중에 기회가 오면 이야기하자”면서 즉답을 피했었다.
 
  필자는 2007년 8월부터 1년8개월 동안 황우석 박사를 취재해 왔다. 공판이 있을 때마다 법정에 찾아가 그들의 논쟁을 지켜봤고, 전국 각지 지지자들의 집회 현장을 오가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전국 주요 도시를 다니며 황 박사의 측근들을 만나 설득했다. 민감한 법정 이야기는 모두 빼놓고 외국에서 고생하는 이야기라도 들려달라고 했지만, 그럴수록 황 박사는 더욱 멀어져 갔다.
 
  황 박사는 공판이 끝나면 방청석에 있는 지지자들의 손을 일일이 잡고 인사한 후, 방청객이 다니는 통로를 통해 주로 법원 뒷문으로 나간다. 그때마다 필자는 황 박사 옆으로 가서 수차례 인터뷰를 시도했지만, 그는 안부를 묻는 인사만 나눈 후 곧바로 차를 타고 사라졌다.
 
  직접 자필로 편지까지 썼다. “국민이 황 박사의 연구에 대해 궁금해하니, 당당하게 나타나 진실을 밝혀 달라”는 내용이었다. 2월 2일 32차 공판을 마치고 떠나는 황 박사에게 이 편지를 직접 전달했다. 며칠 후, 황 박사는 필자에게 전화를 걸어 “보내준 편지는 정말 잘 읽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니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날 필자의 휴대전화에 찍힌 번호는 경기도 용인시의 수암생명공학연구원 번호였다.
 
  황 박사와의 통화는 이날이 두 번째였다. 첫 통화는 지난해 여름 황 박사의 한 측근과 인터뷰를 하던 중 갑자기 이뤄졌다. 지방 모처에서 필자를 만난 황 박사의 측근은 자신의 휴대전화로 즉시 황 박사를 연결해 줬고, 필자는 기회를 놓칠세라 질문을 던졌다. 황 박사의 대답은 일관되게 똑같았다.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
 
  그는 자신이 언론에 등장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필자의 눈엔 그가 ‘언론’ 때문에 무너진 자신의 꿈이 다시 한번 짓밟힐까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제발 왜곡만은 하지 말아 달라”
 
공판을 끝난 후 황우석 박사가 방청석에 있던 스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36차에 이르는 재판 기간 동안 방청석은 항상 황 박사의 지지자들로 가득찼다.

  3월 16일, 그날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간의 공판 내용을 담은 ‘줄기세포 진위 논란’의 기사 마감이 끝나 다음날 발행될 月刊朝鮮 4월호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공판이 있는 날이라 다시 법정을 찾았고, 재판이 끝난 후엔 황 박사가 즐겨 찾는 식당을 찾아갔다.
 
  필자가 식당 홀에서 한 지지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황 박사가 식당에 도착했다. 그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김 기자, 여기까지 오셨어요? 자, 방으로 어서 들어갑시다.”
 
  황 박사는 필자를 언론사 기자라기보단 오랫동안 함께해 온 지지자의 한 사람처럼 대했다. 1년반 동안의 ‘황우석 추적’이 그의 마음을 돌려놓은 것일까.
 
  방 안에 들어서자 황우석 박사와 그의 지지자 20여 명이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황 박사는 자신의 맞은편 자리를 필자에게 내줬다. 먼저 취재 중이던 내용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鄭明熙(정명희) 서울대 교수의 발언과 鄭義培(정의배) 충북대 교수의 연구 결과는 그 중대성에 비해 언론이 전혀 다루지 않았습니다. (2006년 1월 서울대조사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정명희 교수는 조사결과 발표 당시 황우석의 줄기세포는 ‘처녀생식’이라고 했지만, 그는 지난 2월 2일 32차 공판에서 “흥분을 해 의도와 다르게 말했다”는 발언을 해 논란을 일으켰다. 충북대 정 교수팀은 황 박사의 줄기세포를 재검증, 2008년 12월 22일 공판에서 “1번 줄기세포는 사실상 체세포 핵이식 유래의 줄기세포임을 확인했다”고 증언했다.)
 
  “(사실을) 알릴 때는 나의 입장에서 알려서도 안되고, 너무 왜곡되게 알려서도 안되고, 독자들이 궁금해하는 객관적 ‘진실’을 알려야 하겠죠.”
 
  ―이번 사건의 가장 핵심적인 진실은 무엇인가요.
 
  “그건 훗날 이야기합시다.”
 
  東問西答(동문서답)과 같은 대화가 오갔다.
 
 
  해외 스카우트 제의 모두 거절
 
  그는 민감한 사안에 대해선 언급 자체를 꺼렸다. 법정공방이 한창인 상황에서 자신의 한마디가 부정확하게 기사화돼 일파만파로 퍼지는 것을 염려하고 있었다. 황 박사는 필자가 공판 관련 내용을 취재 중이라는 것을 이미 아는 듯했다. “내일(3월 17일) 발매되는 책(4월호)에 황 박사에 대한 기사가 나오니 꼭 챙겨 보라”고 말하자, 그는 “안타깝게도 오늘(16일) 출국해 바로 볼 순 없겠지만, 꼭 확인하겠다”며 필자와 동행한 인턴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중에 정식 기자가 되거든) 제발 왜곡만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지금 보니까 눈이 참 맑네요. 그 눈에서 왜곡의 글이 나오지 않길 바랍니다. 여기 길 위에 지렁이가 있어요. 사람이 지나가다 무심코 밟으면 지렁이는 그곳에서 생을 마칩니다. 무심코 쓴 한 단의 기사가 한 사람과 그의 가정을 파멸로 몰 수 있는 곳이 대한민국입니다. 맑은 눈이 굴절되지 않길 기대해요.”
 
  ―오늘(3월 16일) 재판 중엔 직접 발언까지 하셨는데요. 많이 답답했나 봅니다.
 
  “아무리 억울해도 어지간하면 재판 중엔 입을 다물고 있으려고 하는데 아까는 참…. 제가 서울대 1호 석좌교수입니다. 그때 연봉이 2억원으로 책정됐어요. 일반교수는 8000만원쯤 되니까, 모두 더하면 2억8000만원쯤 됐었죠. 저는 (석좌교수 연봉인) 2억원은 사양하고 모두 연구비로 배정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 법정에서 검찰들이 ‘보통 교수는 8000만원인데 황우석은 2억8000만원’이라고 하는 거예요. 증인은 또 그렇다고 대답하는 겁니다. 답답해서 말을 안 할 수가 없었어요.”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서울대는 2004년 9월 1일 황 박사를 서울대 첫 석좌교수로 임명했다. 그는 정년인 2019년 2월까지 포스코의 출연금 등으로 보수와 장려금을 포함해 연 2억원 이상의 지원을 받을 예정이었다. 또 세계 각국에서 거액의 연봉과 대규모 목장, 연구실 제공을 조건으로 스카우트 경쟁을 벌였지만, 황 박사는 모두 거절했다.
 
 
  “연구비, 수백억 원은커녕 10년간 40억원도 안돼”
 
황우석 박사가 2005년 12월 기자회견을 마친 후,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질문을 받고 있다.

  ―오늘 법정에서 10년 동안 94억원을 지원받았다는 증언이 나왔는데요.
 
  “예를 들어 정부에서 ‘황우석’이란 이름으로 40억원짜리 프로젝트를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돈이 다 저희 팀에 올까요. 아닙니다. 전남대 A 교수, 강원대 B 교수, 서울대 C 교수… 이런 식으로 배정받아서 쓰는 거예요. 94억원이 제 이름으로 나오면 15~20% 정도씩 각 교수팀이 나눠서 씁니다. 그걸 놓고 제가 마치 94억원을 다 받아 쓴 것처럼 말하니…. 그렇게 따진다면 이번 사건과 관련된 서울대 모 교수는 1520억원을 받은 셈이 됩니다. 내가 그 사업단장이었으면 모든 신문에 ‘황우석, 1500억원 썼다’고 나왔을 거예요.”
 
  ―오히려 연구비가 수백억 원쯤 될 줄 알았는데, 10년 동안 총 연구비가 94억원밖에 안됐나요.
 
  “사건 터지고 언론이 만들어낸 이야기입니다. 처음엔 수백억, 그 후엔 600억, 300억… 자꾸 줄어들었어요. 그러더니 오늘 법정에서 내 이름으로 된 모든 연구비를 다 계산해서 94억원이라 하는데, 그것도 잘못된 이야깁니다.
 
  검찰이 ‘연봉이 2억8000만원 정도 됐죠’라 물으니 증인은 ‘예’라고 답하고, 또 ‘10년 동안 94억원 썼죠’라고 물으니 ‘예’라고…. 그대로 넘어가면 방청객들까지 ‘저놈은 10년 동안 어떻게 연구비로 94억원을 썼나’ 할 것 아닙니까. 저희가 실제로 쓴 것은 아무리 많아도 10년 동안 40억원이 안됐을 겁니다.”
 
  ―연구원이 꽤 많았는데, 돈이 많이 필요하지 않았습니까.
 
  “연구소의 제 식구를 다 합치면 50명이었습니다. 봉급은 저와 두 교수, 그리고 한 명의 조교, 이렇게 딱 4명만 받았습니다. 나머지 46명은 봉급 및 등록금을 제가 다 줘야 했죠.”
 
  ―어떻게 충당했습니까.
 
  “후원금이죠. 후원금 아니면 방법이 없어요. 강연으로 품 파는 거죠. 나는 내 강연료를 제가 개인적으로 쓴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숨겨 놓은 돈 없느냐”는 질문에 “찾으면 다 가져라”
 
황우석 박사의 공판이 있는 날이면 전국 각지의 지지자들이 단체로 버스를 타고 서울중앙지방법원으로 모인다.

  황 박사는 언론에 대한 반감이 컸던지, 계속 아쉬움을 토로했다.
 
  “한국 언론을 겪으면서 그런 생각까지 했어요. 일본이나 영국 같은 외국 언론들이라면 그렇게까지 했을까. 그들이라면 마치 수백억 원의 연구비를 타서 수십억 원을 개인적으로 착복한 것처럼 보도했을까요?
 
  검찰이 조사하다 이런 얘기까지 했습니다. ‘어떻게 그 위치에 있으면서 아직 집 한 칸 없으세요’라고 말이죠. 그래서 ‘제가 주변머리가 없어서 그럽니다’라고 대답했죠. 그랬더니 ‘어디 숨겨 놓은 것 있으시죠?’라고 묻더라고요.”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찾으세요. 만약 찾으면 검사 당신에게 드리겠다, 개인적으로 숨겨둔 것 있으면 다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뭐, 제가 정말 고도로 잘 숨겼나 봐요.”
 
  황 박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식사 중 술을 몇 차례 권해 봤지만, 건강과 출국 등 여러 이유로 마실 수 없다며 사양했다.
 
  “수사를 마친 검사가 제게 ‘존경한다’고 했습니다. ‘자기들 검사 생활하면서 저 같은 사람 처음 봤다’며 존경한다고 하더라고요.”
 
  식당 테이블 위에선 불고기가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익어 가고 있었다. 황 박사는 거의 수저를 들지 않았다. 한 점을 권하자, ‘오늘은 괜찮다’며 필자에게 오히려 권한다. 그는 술과 고기를 전혀 하지 않은 채 국수 한 그릇을 시켜 반을 옆 사람에게 덜어 준 후 나머지만 먹었다. 평범한 과학자라기보단 마치 수행을 시작한 佛子(불자)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황우석 박사는 기자들 사이에서 ‘취재하기 어려운 인물’로 알려져 왔다. 어렵게 만나 이것저것 질문을 던져도, 그는 항상 엉뚱한 대답을 내놓기 일쑤였다. 2005~2006년 겨울, 황우석 사태를 취재했던 한 일간지 기자의 말이다.
 
  “사태가 한창 정점으로 흐를 때였어요. 서울대 각 입구와 학교 구석구석에 사회부 수습기자들이 그물처럼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황 박사가 등장했고, 기자들이 벌떼같이 덤벼들었죠. 논문 조작과 조사위 결과 발표 등 수많은 질문을 던졌지만, 황 박사는 오히려 기자들에게 질문했죠. ‘○○부 ○○○ 국장, 그리고 부장들 잘 있느냐’고. 신문사 선배들의 안부를 이리저리 묻는 사이, 차가 도착했고, 그리고 떠나버렸습니다.”
 
 
  “내가 정말 국제적인 사기꾼 같습니까?”
 
2006년 1월 12일 황우석 박사가 심경을 토로하는 기자회견을 마친 뒤 고개를 숙여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다.

  그랬던 황우석 박사가 지금 필자 앞에서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그만큼 그의 긴 공백이 처절해 보였다. 연구 재개를 위해서라면 그는 무엇이라도 할 자세였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사태 이전으로 흘러갔다.
 
  “2005년 9월경이었어요. 서울 모 종합병원의 병원장이 아침을 먹자고 연락이 왔습니다. 미즈메디병원의 盧聖一(노성일) 이사장이 함께 나왔어요. 그때 노 이사장이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교수님은 세상 명예 다 얻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노벨상밖에 없는데, 언젠가는 분명히 타게 될 것이고, 인류가 존재하는 한 교수님이 줄기세포를 만들었다는 것은 인류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고, 저는 그 2인자가 되고 싶습니다’라고요.”
 
  그들의 ‘빗나간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황 박사의 증언에 따르면, 노성일 이사장은 황 박사에게 체세포 핵이식 기술 전수를 요청했다.
 
  “노 이사장은 ‘저와 제 모교가 환자맞춤형 줄기세포를 몇 개만 가지고 싶다, 그러니 체세포 핵이식 기술을 전수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까 법정에 증인으로 나왔던 그 연구원에게 우리 실험실을 최초로 오픈한 겁니다. 원래 아무에게도 안 보여주는 곳이었죠. 반대로 생각해서, 만약 노성일 이사장이 그 당시 독보적인 기술을 가지고 있는 팀의 리더였고, 내가 가서 기술을 전수해 달라고 했으면, 과연 해줬을까요.”
 
  방 안은 꽤 시끄러웠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지지자들이 둘러앉아 술잔을 기울였고, 저마다 그날 법정에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몇 분 후, 황 박사가 국수를 먹던 젓가락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선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
 
  “제가 좀 멀리 다녀와야겠습니다. 두 분 건강하시고, 국민들에게 좋은 기사를 써 주시기 바랍니다.”
 
  문밖을 나서기 전, 그는 여운이 긴 질문을 남기고 사라졌다.
 
  “내가 정말 국제적인 사기꾼 같습니까?”
 
  국내 각종 포털 사이트에서 ‘국제적 사기꾼’으로 검색을 하면 ‘황우석’이란 이름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4년 전까지 한국 역사상 최고의 과학자로 칭송 받던 ‘국민적 영웅’은 몇 달간 벌어진 ‘사태’ 끝에, 연구 권한까지 빼앗긴 사실상 ‘국제적 迷兒(미아)’가 돼 버렸다.
 
 
  사건 이후에도 세계 전문가들, 황 박사에게 공동연구 제의
 
  황 박사와 만난 다음날인 3월 17일 발매된 月刊朝鮮 4월호는 ‘다시 불붙은 황우석의 줄기세포 진위 논란’이란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법정에서 “황우석의 1번 줄기세포는 진짜”라고 했던 충북대 정의배 교수의 증언과, “기자회견 때 흥분을 해 의도와 다르게 말했다”는 정명희 서울대 조사위원장의 발언을 기사화한 것이다.
 
  月刊朝鮮 4월호 보도 후 많은 변화가 있었다. 황 박사의 한 측근은 “최근 유력한 外信(외신)에서까지 인터뷰 요청이 오기 시작했다”며, “국내보다 해외에서 관심을 보이는 것은 여전한 것 같다”고 했다.
 
  황 박사는 母國(모국)에서 ‘국제적 사기꾼’으로 매장당했지만, ‘국제적 관심’은 여전히 그의 객관적 가능성을 인정하는 분위기다. 2006년 논문조작 사건 이후 세계줄기세포학회는 학회 이사인 일본의 니시카와 신이치(西川伸一) 교수를 통해 공동 검증을 제안해 왔고, 중국 한 대학의 院士(원사·중국 최고 과학자에게 국가가 부여하는 호칭)는 “원하는 만큼의 垈地(대지)와 건물, 그리고 연구비를 줄 테니 중국으로 오라”고 스카우트 제의를 해 왔다.
 
  미국의 <뉴욕타임스>지는 2007년 8월, 펜실베이니아주립대 처녀생식 전문가 켄트 브라나 박사의 말을 인용해 “황 박사팀은 그들의 눈을 가리는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독창적인 발견을 인정받았을 것”이라고 전했다. <뉴욕타임스>는 황 박사의 줄기세포가 ‘처녀생식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성취가 높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황 박사 측의 최근 주장대로 그의 줄기세포가 처녀생식이 아닌 체세포복제로 판명 날 경우, 그 파장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된다.
 
  지난 3월 30일, 35차 공판이 끝난 후, 다시 황 박사를 만났다. 그날 만남도 2주 전과 같은 식당에서 이뤄졌다. 그날 진행된 공판 이야기가 나오자, 황 박사는 조심스럽게 옛 이야기를 털어놨다.
 
  “예전에 법정에 서게 된 한 분이 저희 쪽에 찾아왔데요. 직접 만나지 못해 이렇게 전해 주라고 했습니다. ‘무조건 사실대로 말하라. 그게 제일 좋다. 진실을 이길 건 아무 것도 없으니 모두 사실대로 말하고, 잘못한 것이 있으면 그에 맞는 책임을 지면 된다’고요.”
 
 
  “연구원들 때문에 자살 못했다”
 
2006년 1월 12일 기자회견을 마친 황우석 박사가 회견장을 나서며 연구원들을 위로하고 있다. 황 박사는 당시 자신만을 바라보는 연구원들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자살을 포기했다고 한다.

  ―재판은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 것 같습니까.
 
  “우리는 당사자니까 아무 것도 모르죠. 다만 저희는 1심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그대로 받아들일 계획입니다. 지금 3년 가까이 재판이 진행되고 있는데, 2심, 3심까지 가면 언제 연구를 하겠습니까.
 
  저는 재판 관련자 분들께 이렇게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1심 판결이 어떻게 나오든 저는 그 판결 내용을 겸허히 수용할 것입니다. 검찰에서도 저와 같은 판단을 내려주시길 기대합니다. 재판에 시간을 빼앗기는 것보다는 연구에 매진해야 할 때입니다.”
 
  황 박사는 여전히 언론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듯했다. 당일 법정에서 있었던 이야기가 오갔지만, 법률상 민감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입을 닫았다. 하지만 두 번째 만남이 좀 익숙해졌는지, 이번엔 소주까지 한 잔 권했다. 필자도 그에게 한 잔을 권했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혹시 건강 때문에 못 마시는 것인지 물으니, 일정 때문에 못 마신다고 했다. 외국 현지에서의 줄기세포 연구 현황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지만, 황 박사는 곧 입을 닫았다. 그는 마지막 보루인 해외 연구현장이 공개되는 것을 극히 꺼리는 분위기였다.
 
  ―해외 연구기간이 계속 길어지고 있습니다. 어려운 점은 없는지요.
 
  “3년 전 사태가 벌어졌을 때, 솔직히 자살하려고 했습니다. ‘다 정리하고 떠나야겠다고’고 마음먹는 순간 제일 먼저 제 눈앞에 떠오른 건 아내와 자식이 아니라, 연구원들이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떠나면 저만 바라보고 있는 연구원들은 어떻게 되나’ 하는 책임감에 차마 자살하지 못했습니다.”
 
  ―외국에서도 줄기세포 연구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하는데요.
 
  “중국 같은 나라는 국가의 역량을 총동원하여 연구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한 연구소에서 저와 공동 연구를 하자고 제의가 와서 연구 현황을 자세히 살필 기회가 있었는데, 자칫 잘못하면 선점 기회를 잃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황우석 박사의 수암연구원은 현재 세계 유력 과학 저널에 논문을 제출한 상태다. 충북대 정의배 교수와 수암연구원의 朴連春(박연춘) 박사가 참여한 이 논문은 1~6개월 사이에 게재 여부가 결정될 예정이다.
 
  황 박사 연구팀은 논문과 관련된 줄기세포 수립을 거의 마무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현재 제3국의 한 연구소에서 막바지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고 황 박사의 측근은 전했다.
 
 
  시간이 없다
 
  ―지난 3월 초 미국 오바마 정부가 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연방정부의 재정지원을 허용하는 내용의 행정명령을 발표한 후, 전 세계 줄기세포 연구가 다시 활기를 띠고 있습니다.
 
  “시간이 없어요. 이렇게 불필요한 논쟁만 하다가 정작 중요한 연구 기회를 빼앗길까 걱정됩니다. 한국 땅에서 연구를 할 수 없다면, 해외에서 연구할 수 있도록 연구 허가를 내달라고 사정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해외에서 연구한 결과를 국내에 가져올 수 있도록 허가를 해 달라고 요구하고 싶습니다. 해외에서 연구한 결과를 국내에 가져오지 못하면 그 기술은 한국의 것이 아니라 외국 것이 되고 맙니다. 더 이상 시간 낭비를 하지 말고, 국익을 위해 대승적 결단을 내려주길 관계자 분들께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황 교수는 “제3국의 연구실에서 계속 연구활동을 하고 있으며, 여기서 얻은 성과를 미국을 비롯한 세계 몇몇 권위 있는 연구소에 검증을 의뢰해 놓은 상황”이라면서 늦어도 2~3개월 안에 내 연구결과에 대한 검증이 끝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 후 자리에서 일어난 황 박사는 옆 테이블로 가 지지자들에게 일일이 술잔을 내밀며 격려했다. 식사를 시작한 지 30여 분 후 “고맙다, 건강하라”는 인사를 건넨 후 떠났다.
 
  2005년 11월 MBC 으로부터 시작된 황우석 논란은 2006년 1월 서울대 조사위원회의 조사결과 보고서를 통해 일단락되는 듯했다. 하지만 같은 해 6월부터 시작된 재판 과정에서 새로운 의혹들이 제기되면서,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황우석 재판의 가장 큰 쟁점은 두 가지, 호주 특허와 국내 연구 승인 문제다. 지난해 9월 “황 박사의 인간 복제 배아줄기세포가 호주특허청에 등록될 가능성이 크다”는 언론보도가 나온 지 이틀 만에 호주특허청(IPA)은 “특허가 아직 승인되지 않았다”며 입장을 바꿨다. 현재 호주특허청 측의 결론은 4월 중 날 것으로 보이며, 황 박사 측은 이 특허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지난 4월 7일 차병원의 체세포복제 배아줄기세포 연구계획 심의가 2주 연기됐다.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는 “4월 10일 열기로 했던 차병원의 연구계획에 대한 재심의 개최 일정을 연기하되 이달 중에는 개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조만간 차병원의 연구계획서가 승인될 것으로 전망된다.
 
 
  황 박사측 연구 승인 또 거부되나
 
  이와 별개로, 황우석 박사팀의 줄기세포 연구 승인 신청은 또다시 반려됐다. 지난 4월 8일 <한국경제신문>은 “보건복지가족부 관계자가 ‘수암연구원이 지난해 8월 불허 판정을 받은 연구안과 사실상 똑같은 안을 가져왔기 때문에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에 올리지 않고 반려시켰다’면서, ‘신뢰와 윤리 문제로 작년에 불허 판정을 받았기 때문에 황 박사팀이 다시 연구를 재개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요지의 보도를 했다.
 
  황 박사 측에 이를 확인한 결과 “연구 승인과 관련해 어떤 통보도 받은 적이 없다”며 “곧 발표될 차병원 연구 건에 대한 승인 여부에 따라 대책을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황우석 사태’는 2006년 끝난 것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당시 급박하게 진행됐던 ‘황우석 검증 작업’은 많은 허점을 남긴 채 사태를 마무리했고, 그로 인한 여러 의혹들이 3년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의 줄기세포 연구 승인은 거절당했고, 호주 특허는 발급이 지연됐다. 경쟁국들은 줄기세포 상용화를 위해 국가자원을 총동원하고 있다.
 
  <황우석 이야기>란 책을 펴낸 경인방송의 노광준 PD는 “과학의 요체는 ‘재현 가능함’에 있는데, 황우석 박사팀의 연구 성과에 대해 우리는 단 한 번도 과학적 실험을 통한 검증기회를 갖지 못했다”면서 “신화와 괴담이 휩쓸고 간 그 자리에 과학적 진실이 돋아나고 있다”고 했다.
 
  이런 논란을 아는지 모르는지, 황우석 박사의 연구팀은 여전히 해외에서 망명생활 비슷한 분위기에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의 진실 공방은 언제 마무리될까.⊙
 

  ▣ 황우석 사건’은 지금
 
  ● 법정 공방
  황우석 박사의 공판은 2006년 6월부터 2009년 4월 13일까지 총 36차에 걸쳐 진행됐다. 사건명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 관한 법률 위반(사기) 등”으로 피고인은 ‘황우석, 이병천, 강성근, 윤현수, 김선종, 장상식’이다.
  논문 조작과 연구에 대한 증인신문은 지난달까지 대부분 마무리됐고, 현재 횡령과 관련된 증인들이 출석해 신문을 받고 있다. 황 박사는 全(전) 공판에 직접 출석해 자리를 지켰다. 1심이 진행 중인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올해 상반기 안에 재판을 마무리 지으려 한 달에 한 번 열리던 공판은 2주 간격으로 진행하고 있다.
 
  ● 호주 특허
  수암생명공학연구원은 2008년 9월 21일 “호주 특허청이 5월 18일 인간 복제 배아줄기세포에 대한 특허 등록을 결정하고 6월 12일 이 사실을 인터넷에 공고한 뒤 3개월간 이의 신청을 받았다”고 밝혔다. 특별한 이의가 접수되지 않아 23일 전후 등록될 것으로 알려졌던 호주 특허는 9월 24일 호주특허청이 “특허가 아직 승인되지 않았다”고 밝혔고, 지금까지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다.
  대한변리사회는 이와 관련,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연구 자료들을 검토한 결과 “‘처녀생식’이라고 입증할 수 있는 객관적 자료가 미흡하다”며 황 박사 측의 연구에 힘을 실어줬다. 관계자들에 따르면, 호주 특허 등록 여부는 4월 내에 결정될 것으로 전망된다.
 
  ● 국내 연구 승인
  2006년 3월 16일, 보건복지부(현 보건복지가족부)는 황우석 박사팀의 체세포복제배아연구 승인을 취소한다고 밝혔다. 체세포핵이식행위와 난자수급을 금지당한 황 박사 연구팀은 이후 해외로 떠나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2007년 9월, 수암생명공학연구원은 복지부에 체세포복제배아연구기관으로 등록됐고, 12월 황 박사를 연구책임자로 한 연구계획서 승인을 신청했다. 하지만 복지부는 2008년 4월 판단에 대한 추가적 시일 소요를 이유로 처리기한을 연장한 후, 8월 1일 불허를 결정했다.
 

  ▣ 黃禹錫 사건 일지
 
  [2004년 2월 12일] 美 과학저널 <사이언스>, 서울대 연구팀(황우석·문신용)의 배아줄기세포 성공 발표.
 
  [2005년 1월 12일] 보건복지부, 황 교수팀 줄기세포 연구 공식 승인.
 
  [2005년 5월 20일] 황 교수팀, 환자맞춤형 배아줄기세포 발표, <사이언스> 게재.
 
  [2005년 11월 22일] MBC ‘황우석 신화의 난자 의혹’편 방영, 황 교수가 매매된 난자를 사용했다고 보도.
 
  [2005년 12월 15일] 노성일 미즈메디 병원 이사장,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황 교수로부터 환자맞춤형 줄기세포는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폭로.
 
  [2005년 12월 15일] MBC, ‘특집 PD수첩-PD수첩은 왜 재검증을 요구했는가’ 방영, 황 교수팀의 줄기세포 진위에 대한 검증 과정 보도.
 
  [2005년 12월 29일] 서울대 조사위원회, “줄기세포는 없었다”고 잠정결론.
 
  [2006년 1월 3일] MBC, ‘줄기세포 신화의 진실’ 방영, 황 교수가 연구원 난자 제공에 개입해다고 보도.
 
  [2006년 1월 10일] 서울대 조사위, 황 교수의 2004년, 2005년 논문이 의도적 조작됐고, 원천기술 역시 독창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공식 발표.
 
  [2006년 1월 12일] <사이언스>, 황 교수팀의 2004년, 2005년 줄기세포 연구논문 모두 직권 취소.
 
  [2006년 3월 16일] 보건복지부, 황 교수팀의 체세포 복제 배아 연구 승인 취소.
 
  [2006년 3월 20일] 서울대 징계위원회, 황 교수 파면 의결.
 
  [2006년 4월 14일] 서울중앙지검 특수3부, 황 박사와 김선종 연구원을 생명윤리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
 
  [2008년 5월 21일] 황 박사 연구팀, 애완견(미씨) 복제 프로젝트 성공.
 
  [2008년 6월 12일] 호주 특허청, 황 박사의 <사이언스>에 발표한 배아줄기세포에 대해 특허등록 통보.
 
  [2008년 8월 1일] 보건복지가족부, 황 박사의 체세포 복제배아 연구 승인 불허.
 
  [2008년 9월 21일] <동아일보> “황우석 배아줄기세포, 호주 특허 등록될 듯” 보도.
 
  [2008년 9월 24일] 호주특허청, “특허출원이 심사기준은 충족시켰지만 아직 승인된 것은 아니다”는 성명 발표.
 
  [2008년 12월 22일] 충북대 수의과대 정의배 교수, 30차 공판에서 “NT-1이 체세포 핵이식 유래의 줄기세포임을 확인했다”고 증언.
 
  [2008년 12월 30일] 서울대,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해외 특허출원 포기.
 
  [2009년 2월 2일] 서울대 조사위원회 정명희 교수, 32차 공판에서 “(기자회견 때) 흥분해 의도와 다르게 말했다”고 증언.


▶ [추적] 다시 불붙은 黃禹錫의 줄기세포 眞僞 논란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