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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것은 의미가 있다

by 김정우 기자 2016. 7. 6.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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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지나치게 많은 DJ는 별로였다. 분위기 탄답시고 전주(前奏)까지 침범하며 느끼한 멘트를 날려버리면 망칠 수밖에 없었다. 광고 때문에 음악이 중간에 잘리는 건 더 별로였다. 사연과 선곡이 중요한 만큼 '완전한 한 곡'이 절실하던 시절, 전곡을 깔끔하게 틀어주는 DJ가 귀했다.

종일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며 곡을 기다렸다. DJ가 곡명을 말하는 순간, 녹음 버튼에 손을 얹고, 정확한 시점에 맞춰 녹음을 시작한다. 녹음용 공테이프가 다 떨어졌을 땐 남아돌던 일반 테이프 모서리 구멍에 '스카치테이프'를 붙여 개조했다.

소위 '길보드차트'보다 위대한 나만의 앨범이다. 공정(工程) 과정은 쉽지 않았다. 돈은 별로 안 들었지만, 긴 시간을 들여야 했다. 하지만 원초적 사용자 제작 컨텐츠(UCC)가 완성되는 순간의 그 쾌감을 아는 우리는 어느새 두 번째 녹음 테이프를 이미 손에 들고 있었다. '한 땀 한 땀' 정성들여 만든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앨범이 워크맨에서 제대로 작동하는 바로 그 순간, 세상의 음악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장인정신 수준의 노력을 요구했던 공정이 2000년쯤부턴 컴퓨터 앞에서 클릭 몇 번으로 가능하게 됐다. 그리고 십수 년이 더 흘러 이젠 언제 어디서든 터치 몇 번이면 '내 앨범'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마저도 귀찮은 이들을 위해 빅데이터(big data)란 것이 사용자 취향까지 분석해서 앨범을 만들어주는 시대다. 인공지능이 소설을 쓰고 작곡도 하는 시대인데, 곡 선정이야 어려운 일도 아닐 테다.

20여 년 전 공테이프 기법도 긴 녹음의 역사 속에선 나름 '첨단'의 범주에 속한다. 1930년대 78rpm 속도의 디스크 제작 공정을 보자. 한 장의 디스크를 만들기까지 프로듀서는 물론 기술자와 지휘자, 그리고 오케스트라까지 혼연일체로 힘을 모아야 했다. 78rpm 디스크의 또 다른 이름은 SP(Standard Play), 그 다음 단계가 우리에게 익숙한 LP(Long Play)다. 불과 100년도 안 된 기간 동안 녹음과 재생의 기술은 그야말로 천지개벽을 한 셈이다.


어느 순간 우리는 별다른 공정 없이 맞춤형 음악 앨범까지 생성하는 기술을 유용하고 있다. 그만큼 휘발성만 높아진 감성덩어리에 추억은 점점 사라지는 느낌이다. '과정'이 사라진 추억은 단지 하나의 '점'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온갖 매개체를 통해 대량생산되는 '경험되지 않은 공유'가 껍데기처럼 기억들을 잠식한다. 파편적인 공감이 전파를 타고 여기저기를 떠돈다.

축적된 경험적 산물들이 기술의 진보에 의미를 부여하고, 직관과 통찰로 사물을 볼 수 있게 해준다. 타인에게서 차용된 경험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기억의 공간에 자리잡지 못한 채 허공을 맴돌 뿐이다. 굳이 78rpm 디스크 제작까진 안 가더라도, LP판을 돌려보거나 공테이프에 녹음 정도는 해본 사람이 앨범에 깃든 노력의 흔적을 더 잘 이해할 것이다.

스마트폰과 함께 성장한 이들은 이런 하소연을 뭉뚱그려 '꼰대'라고 비아냥댈지도 모른다. 30~40대가 “옛날엔”이란 말을 시작할 때가 가장 위험한 순간이라고 한다. 이미 '기성세대' 범주에 들어섰다고 자책하더라도, 공유된 기억에 대한 자극은 여전히 강력하다.

모두가 바쁜 시대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경험을 생략하고 공감마저 인용한다. 새로움을 잃어버리고 창조를 흉내내기 급급하다. 설렘은 사라지고 교만의 표출이 가득하다.

서랍 속 깊이 녹음테이프들이 남아있다. 80년 전 78rpm 디스크 제작 공정을 유튜브에 업로드된 영상을 통해 회상한다. 비디오가 라디오 스타를 없애버린다는 노래가 나온 지 37년이 지났지만 라디오는 건재하다. 시절(時節)은 그렇게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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