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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북한

로버트 박, 入北 5개월 전 중국 현지에서 사전 점검 마쳤다

김정우 기자 2010.03.10 13:06
로버트 朴 누구인가 - 한국 첫 입국 후 20개월 행적 추적

入北 5개월 전 중국 현지에서 사전 점검 마쳐

⊙ 출국 하루 전 “감 안 좋다”며 교통·숙박 계획 전면 수정
⊙ “入北 직전 北 친척의 존재는 절대 공개하지 말라 했다” (趙聖來 팍스코리아나 대표)
⊙ “북한은 바보가 아니다. 로버트 박의 약점을 철저히 파고들었을 것” (對北선교사 L씨)
⊙ “두만강변에서 그를 끌어안자 사람 앓는 냄새가 났다” (두만강까지 동행한 탈북자 A씨)
⊙ “그의 도전적 몸짓은 한국통일 역사에 기록될 중대한 사건” (黃祐呂 의원)

金正友 月刊朝鮮 기자 (hgu@chosun.com)

지난해 12월 22일, 입북 전 로이터통신과 인터뷰 중인 로버트 박씨. 북한의 인권탄압 실상에 대해 토로했다.
 2009년 12월 25일 오후 5시(현지시각), 재미교포 인권운동가 로버트 박(28·한국명 박동훈)씨가 북한 인권 개선을 촉구하며 두만강을 건너 입북(入北)했다. 손에 든 것은 작은 성경책과 기독교 노래 가사가 적힌 종이쪽지가 전부였다. 북한 체제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며 자진 입북한 최초의 사례다.
 
 42일 후인 2월 5일,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조사 결과 미국 공민(로버트 박)은 조선(북한)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가지고 들어오게 됐다”며 “자기가 저지른 행위에 대해 인정하고 심심하게 뉘우친 점을 고려해 해당 기관에서 관대하게 용서하고 석방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박씨는 이튿날인 2월 6일 오전 북한 고려항공편으로 중국 베이징(北京) 서우두(首都) 공항에 도착했다. 국내외 취재진은 공항에서 박씨에게 조선중앙통신과의 인터뷰가 북한의 강압에 의한 것인지 물었지만, 그는 바닥에 시선을 둔 채 아무런 말이 없었고, 곧바로 미국행(行) 여객기에 올랐다.
 
 북한 인권단체와 대북(對北) 전문가들은 조선중앙통신의 보도 내용에 대해 신뢰성이 없다고 입을 모았다. 북한 정권이 박씨에게 어떠한 방법으로든 심리적·물리적 압박을 가했다는 주장이다. 입북 전 박씨와 함께 대북인권운동을 전개해 온 ‘글로벌정의기도네트워크’는 2월 10일 성명을 내고 “조선중앙통신은 북한 정권의 입장을 대변하는 대외용 선전 매체로서 그 진실성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순교(죽음)를 각오하고 당당하게 두만강을 건넜던 그는 왜 고개를 떨어뜨린 채 돌아왔을까. 그의 석연찮은 모습은 지금도 많은 의문을 자아내고 있다. 박씨의 그간 행적에 대해 다양한 추측과 예측이 오갔지만, 당사자인 그와 가족은 현재 아무런 말이 없는 상태다. 그가 두만강을 건넌 이유와 다시 돌아오기까지의 상황을 추적했다.
 
 
 수용소 존재 알고 북한에 관심 가져
 
억류 43일 만에 풀려난 로버트 박씨가 2월 6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공항에서 부모와 함께 차를 타고 이동하고 있다.

 1981년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 태어난 박씨는 어린 시절을 애리조나주(州) 투손(Tucson)에서 보냈다. 박씨의 부모인 박평길·조혜련씨는 4년 전 투손에서 샌디에이고 북쪽 엔시니타스로 이주했다. 북한 평안북도 선천 출신 친할머니의 영향을 받아 온 가족이 기독교인이 됐지만, 박씨가 본격적인 기독교 선교 활동을 하기 시작한 것은 20세 때부터다. 그는 스스로 지인들에게 “20세 전까진 기독교와 무관한 삶을 살아왔다”고 말해 왔다.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시작한 그는 주변의 노숙자와 장애인을 찾아다니며 기독교 전도 활동을 했다. 멕시코 접경지를 오가며 빈민들을 대상으로 봉사했고, 직접 노숙을 하면서 어려운 이들을 도왔다. 박씨의 한 지인은 “로버트가 ‘당시 노숙자·빈민 봉사는 모두 지금의 북한 선교를 위해 준비한 것’이란 말을 했다”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神)이 그의 길을 예비했다고 믿었다”고 말했다.
 
 박씨가 한국 땅을 처음 밟은 것은 2008년 6월이다. 미국의 한 기독교 단체가 주최한 북한 선교 콘퍼런스에 참가한 후, 계속 한국에 남아 탈북자와 북한 주민을 위한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
 
 강철환 조선일보 기자는 지난해 12월 <조갑제닷컴>에 기고한 글을 통해 “히틀러의 아우슈비츠 같은 정치범 수용소가 북한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박씨가 북한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다”며 박씨의 대북 선교 활동 동기를 밝혔다. 박씨는 탈북자들과 인권운동가들을 만난 자리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 인류는 두 번 다시 히틀러의 만행과 같은 수용소를 용납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왜, 북한의 수용소를 용납하고 있느냐”며 흥분했다고 한다. 또 “미국산 쇠고기를 안 먹겠다고 수십만이 광화문 광장에 나오면서도, 수용소에서 쥐 고기도 못 먹어 죽어 가는 북한 동포들을 위해선 누구도 나서는 사람이 없는 한국사회를 이해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장애인을 위한 봉사활동도 계속했다. 박씨는 2008년 8월 사단법인 ‘함께걷는길벗회’가 운영하는 인천의 한 섬김의 집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했다. 중증장애인 16명의 대소변을 받아 내며 그들과 한 달 동안 함께 지냈다.
 
 
 박형규 목사 아들과 姻戚
 
 박씨의 장애인 봉사활동을 주선한 이는 남북평화재단 경인본부 공동대표인 박종열(朴鍾烈) 목사다. 박 목사는 로버트 박에 대해 ‘외5촌뻘’이라고 했다. 박종열 목사의 외숙모와 로버트 박 할머니가 형제간이라고 한다. 박종열 목사는 박정희(朴正熙) 정권 시절 재야(在野) 운동권에서 활동했던 박형규(朴炯圭) 목사(남북평화재단 이사장)의 아들로, 로버트 박이 어릴 때부터 가깝게 지내 왔다.
 
 박종열 목사는 기자와의 전화인터뷰에서 “당시 하루 한 끼만 먹고 계속 장애인들과 함께 기도와 찬송을 했다”면서 “어려운 이웃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 아주 간절한 청년”이라고 밝혔다. 또 “로버트는 북한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 같았다”면서 “그의 순수한 마음은 존중하지만, (자진 입북 등) 방법적인 측면에선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이들이 있어 말하기 곤란하다”며 말을 아꼈다.
 
 장애인 선교를 마친 로버트 박은 미국에 2달간 머무른 후 2008년 11월쯤 다시 한국을 찾았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대북 선교 활동을 시...

계속...

기사全文 보기 : http://monthly.chosun.com/board/view_turn.asp?tnu=201003100026&catecode=I&c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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