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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계 '미다스의 손' 박명성 신시컴퍼니 대표…"창작 뮤지컬 브로드웨이에 수출하겠다"

인터뷰

by 김정우 기자 2010. 5. 26.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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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맘마미아〉 〈시카고〉 〈아이다〉 〈렌트〉 등 해외 유명 뮤지컬 수입해 흥행 성공시켜 '브로드웨이 朴'으로 불려
⊙ 한정된 작품 놓고 한국인끼리 출혈 경쟁…로열티 10년 새 5배 폭등
⊙ "신시컴퍼니는 더 이상 새로운 뮤지컬 수입 경쟁에 참여하지 않겠다"
⊙ "배우로서의 정신과 인격, 그리고 품위를 생각한다면 최정원씨가 최고의 뮤지컬 배우"

취재지원 : 姜振圭 月刊朝鮮 인턴기자

朴明誠(박명성) 신시컴퍼니 대표는 〈맘마미아〉 〈시카고〉 등 해외 대형 뮤지컬을 한국 무대에 올린 주인공이다. 그는 오래된 해외 유명 작품을 베껴 무대에 올리던 국내 뮤지컬계의 기존 관행을 깨고, 최초로 정당한 저작권료를 지불하고 공연을 해 흥행에 성공했다.

1998년 첫 계약에 성공한 뮤지컬 〈더 라이프〉는 연일 매진을 기록하며 제작비 6억8000만원을 훌쩍 넘는 수익을 남겼다. 이후 〈렌트〉 〈헤어스프레이〉 〈아이다〉 〈댄싱 섀도우〉 등으로 '대박'을 터뜨린 그는 2007년 한국뮤지컬대상 최우수작품상 등 각종 상을 휩쓸었다. 덕분에 그는 한국 뮤지컬계에서 '미다스의 손'으로 통한다.

그랬던 그가 최근 해외 뮤지컬 수입 과정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공개하고 나서 파문이 일었다. 계약 과정에서 국내 뮤지컬계의 경쟁이 벌어져 로열티 선급금(공연 계약금)이 과도하게 폭등했다는 것이다.

박 대표는 계약서에서도 못 밝히게 돼 있는 로열티를 언론에 공개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토로했다.

"한국 뮤지컬 시장이 급성장하는 과정에서 여러 회사가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났습니다. 공급(작품)은 한정돼 있는데, 수요가 과다해진 거죠. 덕분에 저작권료를 3만 달러만 줘도 될 것을 30만 달러까지 부르는 곳이 나오는 등 거품이 형성됐어요. 흥행이 될 만한 작품의 저작권 계약을 따내기 위해 국내 업체들끼리 치열하게 경쟁하다 보니 그 거품 때문에 관련업체 모두가 죽게 생겼습니다."

박 대표는 지난 9월 1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신시컴퍼니가 초연한 해외 화제작들의 로열티를 공개했다. 1999년 초연한 〈시카고〉는 선급금 2만 달러, 〈렌트〉는 3만 달러, 2002년에 계약하고 2004년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초연한 〈맘마미아〉는 선급금 2억원에 로열티가 13.5%(매출액 기준)에 불과했다.

박 대표는 "지난 10년 동안 로열티가 비정상적으로 폭등했다"면서 현재 로열티 수준이 10년 전에 비해 최소 5배 이상 올랐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인터뷰에서 "요즘은 소규모 뮤지컬도 선급금을 15만 달러는 줘야 겨우 경쟁에 참여할 수 있을 정도"라며 "지금 〈맘마미아〉를 계약한다면 최소 10억원이 들 것"이라고 토로했다.

출혈 경쟁을 불러온 가장 큰 원인을 묻자 박 대표는 "공연계에 퍼진 한탕주의"라고 지적했다. 박 대표의 신시컴퍼니 등 몇몇 국내 뮤지컬 제작사가 해외 작품을 수입해 흥행에 성공하자 대기업 자본 등 투자자들의 자금이 공연계로 흘러 들어왔다. 작품성이나 관객의 호응도보다는 일단 유명 작품을 수입해 '대박'을 터뜨리겠다는 한탕주의로 인해 무리한 계약을 남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는 것이다.

국내 뮤지컬계에 사실상 처음으로 '정식 수입' 개념을 들여온 박 대표는 지난 9월 "더 이상 시장을 어지럽히는 소모적인 수입 경쟁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지난 10년이 한국 뮤지컬과 박 대표의 마음을 어떻게 바꿔놓은 것일까.

그는 1962년 전남 해남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천상 '촌놈'인 까까머리 고등학생의 마음을 뒤흔든 것은 車凡錫(차범석)의 〈산불〉이란 연극이었다. 1979년, 광주 서석고에 재학 중이던 박명성은 당시 상황을 그의 저서 〈뮤지컬 드림〉에서 이렇게 회상했다.

〈진짜 촌놈이었던 나는 극이 시작되자 넋을 잃고 빠져들었다. 공산당이라면 무조건 때려잡거나 물리쳐야 했던 시절, 극의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전쟁으로 인해 여자들만 남겨진 마을에 낙오된 북한군이 숨어들고 두 여자가 그에게 사랑을 느낀다. 때려잡지는 못할망정 '괴뢰군'과 사랑에 빠지다니,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인생을 바꾼 한 편의 연극

그날 시골 학생 박명성의 장래가 결정됐다. 배우. 그에겐 한 편의 연극 관람이 '혁명에 버금가는 일대사건'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청소년 시절엔 한 권의 책이, 사람의 말 한마디가, 한 번의 음악회가 그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잖아요. 저는 연극 한 편이 제 인생을 바꾼 셈이죠."

이듬해 대학에 낙방한 그는 무작정 上京(상경)해 극단을 찾았다. 우연히 전봇대에 붙은 연구생(연습생) 모집 광고를 보고 찾아간 곳이 '동인극단'이었다. 서울에 친구도, 친척도 없었던 그는 극단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온갖 잡일을 도맡아 했다. 이듬해인 1983년, 그는 서울예전(現 서울예술대학) 무용과에 입학했다.

―포기했던 대학에 다시 도전한 이유가 뭐였습니까.

"불효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였죠. 당시엔 대학 안 가고 연극만 하면 말 그대로 '딴따라'였잖아요. 기왕 대학 가는 것, 연극과 관련된 학과를 찾았죠. 연극과와 무용과를 놓고 고민했는데, 경력자들이 많이 지원하는 연극과보단 남자가 귀한 무용과가 낫겠다 싶어 지원했습니다."

―연극과 무용은 많이 다른 분야 아닙니까.

"대학에서 한국무용을 전공했는데, 너무 재미가 있어 '그냥 무용을 계속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남자가 귀하기도 했고, 저의 체형도 무용에 유리했습니다. 한국무용은 170cm를 전후한 무용수가 가장 적합한 체형이라고들 하는데, 제 키가 171cm예요."

하지만 '무용의 꿈'은 잠깐이었다. 그는 다시 배우로 돌아왔고, 학교보다 극단을 더 많이 찾아다니는 연극인이 됐다. 그의 연극계 첫 데뷔작은 〈여자의 창〉이란 작품이었다. 그는 이 작품에 단역으로 출연하게 된다.

"제 평생 그렇게 긴장했던 적이 없었습니다. 분장실에서 무대까지 가는 길이 한없이 멀게 느껴졌어요. 갑수 형(金甲洙)이 주인공이었고 저는 그 친구역이었는데, 대사도 열 마디가 채 안되는 단역이었습니다. 연극을 끔찍하게 사랑했지만, 배우로선 소질이 없었나 봐요. 사실 지금까지 배우로 3분 이상 무대에 서본 적이 없어요."


배우의 길 포기

함께 연기한 배우 김갑수씨와의 인연이 '박명성 연극인생'의 시작이었다. 차세대 배우로 각광받고 있던 김씨는 출연섭외가 들어오는 대로 작은 배역이나마 박씨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배려했다.

"장충동에 '연극촌'이란 소극장이 있었습니다. 거기서 2년 넘게 갑수 형과 함께 살았어요. 둘 다 결혼 전이었고, 어려운 시절이었죠. 같이 라면 끓여먹고 족발 시켜 먹으면서 연극인의 꿈을 키웠습니다. 극단이 없어진 후에도 갑수 형이 저를 여러 군데 소개시켜줬어요. 제가 함께 출연하거나 조연출을 맡는 조건으로 자신의 출연을 결정하기도 했고요."

연출가 故(고) 金相烈(김상렬)씨와의 만남도 김갑수씨를 통해 이뤄졌다. 극작가와 연출가로 큰 이름을 남긴 그는 '김상렬 사단'이란 추종자들이 있을 정도로 연극계의 '거물'이었다.

"하루는 갑수 형이 저를 불렀습니다. '이번엔 어떤 배역일까' 하는 생각으로 갔는데, 마당세실극장의 김상렬 선생이 자신을 불렀는데 같이 가자는 겁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면담을 했죠. 너무 긴장해서 무슨 질문을 하셨고, 제가 무슨 대답을 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요."

박씨는 세실극장에 입단하자마자 준비 중이던 뮤지컬 〈님의 침묵〉에 배우로 출연했다. 맡은 역할은 코러스, 사실상 모든 장면에 출연하는 一人多役(일인다역)이었다. 눈에 띄지 않는 역이었지만 그는 밤잠을 설쳐 가며 연습했다.

1984년부터 3개월간 이어진 공연은 대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님의 침묵〉을 끝으로 극단 운영 방침이 바뀌었다. 배우가 적게 나오는 작품만 공연해 후배들에겐 출연 기회가 오지 않았다.

박씨는 결국 배우의 길을 포기했다. 하지만 연극판을 떠나고 싶지는 않았다. 김상렬 대표를 찾아간 그는 배우가 아닌 스태프를 하겠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순순히 승낙하고선 조연출 직책을 맡겼다.

"말이 좋아 조연출이지 사실상 허드렛일입니다.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허드렛일과 연출 공부를 병행하며 열심히 노력했어요."


박명성 대표의 연극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들. (왼쪽부터) 정우스님, 연극인 故 김상렬, 김갑수, 허준호.


"악마에게라도 연출력을 빌리고 싶었다"

연출에 재미를 붙여갈 때쯤 입영통지서가 날아왔다. 3년 군생활을 마치고 그가 다시 찾은 곳은 고향이 아닌 대학로였다. 며칠 동안 연극판을 기웃거렸다. 김상렬 대표를 다시 만나고 싶었지만 달가워하지 않을 것 같은 마음에 선뜻 찾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대한민국 연극제' 개막식 행사장에서 韓甫炅(한보경) 선배에게 '딱 걸렸죠'. 하필 그 선배에게 걸리다니,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그 선배가 김상렬 선생의 부인이에요."

부인을 통해 "박명성이 한 행사장에서 '얼쩡거린다'"란 소식을 들은 김상렬씨는 곧바로 박씨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왜 엉뚱한 데서 기웃거려. 제대했으면 빨리 올 일이지."

박씨는 다시 '김상렬 사단'으로 돌아왔다. 김갑수, 이도경, 최정우, 조용태, 이창훈 등 실력파 배우들과 한솥밥을 먹으며 연출을 배웠다. 현대극장의 대한민국 연극제 출품작 〈로미오 20〉을 시작으로 다시 조연출을 맡아 극단의 소소한 일을 처리했다.

몇 년 후 사건이 발생했다. 배우들과 마당세실극장 사이에 출연료 문제로 마찰이 생겼다. 김상렬 사단은 극장에서 철수했고, 단원들은 모두 흩어졌다. 김상렬씨를 중심으로 남은 단원들은 九龍寺(구룡사)의 頂宇(정우) 스님을 찾아갔다.

〈님의 침묵〉 공연 당시 인연을 맺은 정우 스님은 그들에게 대학로 사무실을 마련해 주고 임차료에서부터 전화료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구룡사가 완공되자 절 지하 1층에 100석 규모의 소극장과 사무실까지 만들어 주었다. 그들은 절간 방에서 기거하면서 절 공양간에서 식사까지 해결했다.

'신시'란 이름도 정우 스님에게서 나왔다. 그는 "삼국유사에 '환웅천왕이 태백산 신단수 밑에 3000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내려와 神市(신시)를 열었다'는 구절이 있다"며 새 극단 이름으로 '신시'를 제안했다. 그렇게 하여 극단 이름은 신시로, 극단 대표는 김상렬씨가 맡았다.

1989년, 조연출로 활동하던 박씨에게 '단원 워크숍을 위한 작품의 연출'이란 기회가 찾아왔다. 〈동물농장〉이란 작품을 연출하며 그는 의욕적으로 덤볐지만 연출이란 작업이 쉽지 않았다. 박씨는 그의 저서 〈뮤지컬 드림〉에서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회상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잘해 보고 싶었다. 악마에게라도 연출력을 빌리고 싶었다. 한 달의 연습 기간 동안 나는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굶주린 짐승은 점점 더 허기에 시달렸다. 늘 머리가 지끈거렸다.〉

결과는 참담했다. 김상렬 대표는 "이걸 연극이라고 만들었느냐"며 "농사를 짓든지 다른 기술을 배우는 게 낫겠다"고 했다. 호된 호통이 아니라 답답한 표정으로 조용히 말했다. 더 열심히 하라는 뜻이 아니라 '너는 정말 안되겠다'란 뜻이었다.

배우로도, 연출로도 실패한 박씨는 벼랑 끝에 몰린 심정이었다. 김상렬 대표를 찾아가 "죽어도 연극판은 못 떠나겠다"면서 '기획자'를 해 보겠다고 했다. 김 대표는 흔쾌히 허락했고, '기획자 박명성'은 그렇게 태어났다.

해외로 눈을 돌리다

박명성 대표가 생각하는 최고의 배우는 최정원(가운데)씨다. 최씨는 〈맘마미아〉 공연 당시 담석 수술을 미루면서까지 공연에 집중했다.

기획자로 변신하면서 박 대표는 일에 확신을 가지게 됐다. 신시는 〈그리스〉 〈웨스트사이드스토리〉 〈7인의 신부〉 등 대형 뮤지컬을 제작하는 기획사로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해외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한국 관객들은 왜 브로드웨이에서 30~40년 전에 끝난 레퍼토리만 봐야 하는지 궁금해했어요. 뮤지컬의 본고장에선 수십 편의 작품이 현재 진행형인데, 국내에선 그 소식조차 알 수 없었으니까요."

문제는 라이선스였다. 오래된 작품을 베껴 무대에 올리고는 문제가 생기기 전에 내리는 비양심적 관행이 공연계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솔직히 과거엔 신시도 무단으로 외국 작품을 올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스〉와 〈웨스트사이드스토리〉가 그런 경우죠. 2주 정도면 공연이 끝나기 때문에 라이선스를 대행하는 회사에서 가처분신청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어요."

―무단 공연은 어떻게 하는 겁니까.

"런던이나 뉴욕에 가면 인기 뮤지컬의 대본과 악보를 쉽게 구할 수 있어요. 문제는 100% 완벽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죠. 중간중간 공백이 있는 악보와 대본을 가지고 공연을 하니 아무래도 완성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관객을 위해서라도 정식으로 라이선스를 받아낼 필요가 있었습니다."

박씨는 답답한 마음에 김상렬 대표를 찾아가 "현재 브로드웨이에서 공연 중인 작품을 정당한 저작권료를 지불하고 국내에 들여오겠다"고 했다. 김 대표는 방법을 찾아보라고 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정식계약을 맺고 수입된 사례가 전무했기 때문이었다.

무작정 뉴욕으로 떠나 브로드웨이에서 수많은 공연을 조사한 후 〈더 라이프〉란 작품을 선택했다. 탄탄한 스토리, 훌륭한 음악, 관객 호응도 등 모든 조건을 다 갖춘 작품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박 대표는 곧바로 저작권자에게 작품을 계약하고 싶다는 메일을 보냈다. 허무한 답변이 돌아왔다.

'당장은 당신들에게 이 작품을 팔 수 없다. 계약조건을 지킬 수 있겠는가. 당신들을 신뢰할 수 있는지 체크해 보고 연락을 주겠다.'

천신만고 끝에 계약한 〈더 라이프〉 흥행 대박

사실상 거절이었다. 하지만 박씨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메일을 보냈다. 한참 후 다시 답장이 돌아왔다. 여전히 믿을 수 없으니, 보증을 서줄 대행사를 소개해 준다는 내용이었다. 일본에 위치한 대행사를 찾아가자 황당한 이야기가 나왔다. 일본 대행사 사장은 "한국은 오래전부터 브로드웨이 공연을 도용해 1~2주 공연하고, 소송을 준비하기 전에 무대에서 내리곤 했다"면서 "신뢰성이 없는 한국과는 계약이 곤란하다"고 했다.

박씨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물러설 곳이 없었던 그는 "도둑질할 사람이 왜 대낮에 집주인을 찾아오겠느냐"면서 "기회의 땅인 한국의 뮤지컬 시장에서 신시를 통해 기회를 잡으라"고 했다. 1998년, 어렵게 계약이 성사됐다.

허준호, 전수경, 이영자 등이 출연한 뮤지컬 〈더 라이프〉는 대성공을 거뒀다.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의 2200석이 연일 가득 찼다. 일본의 저작권 대행사에서도 공연 수준을 높게 평가했다. 자신감을 얻은 박명성 대표는 〈렌트〉 〈시카고〉 〈캬바레〉 〈키스미 케이트〉 등 브로드웨이에서 인기를 끌던 작품을 선별해 계약을 체결했다. '미스터 박'으로 불리던 박 대표가 '브로드웨이 박'이란 호칭으로 불리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더 라이프〉 공연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김상렬 대표가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후임 신시 대표 후보로 김갑수씨 등 여러 인물이 거론됐지만, 김씨가 끝내 고사하는 바람에 결국 단원들의 거수를 통해 박씨로 결정됐다.

1999년, 박 대표는 일단 극단명을 신시뮤지컬컴퍼니로 바꿨다. 극단의 여력을 여러 분야에 분산시키기보다는 뮤지컬에만 집중하겠다는 의지였다. 그리고 대표 선임 후 첫 작품으로 카지노를 배경으로 한 뮤지컬 〈갬블러〉를 택했다. 이 작품은 초연에서 객석 점유율 70%를 넘기는 등 선전했지만 앙코르 공연은 참패였다. 박 대표는 7억원의 손실을 떠안아야 했다.

"자만심에 빠졌었죠. 초연이 막을 내린 지 두 달이 채 안된 시점에서 재공연을 했으니까요. 뮤지컬 시장 규모가 크지 않았던 당시엔 '초연에 어느 정도 흥행이 됐다'는 것은 '볼 사람은 이미 다 봤다'는 의미였죠. 그걸 모르고 덤비다가 엄청난 손해를 봤습니다."

〈갬블러〉 실패로 빚더미에 오르기도

결과는 혹독했다. 전세를 월세로 돌려야 했고, 신용카드는 정지됐다. 집에는 동전 한 닢 없었고, 아내는 충격 때문에 유산을 했다. 빚더미에 깔린 그는 문화예술위원회에서 지원하는 해외연수 비용 1만 달러를 선불로 받아 빚을 갚는 데 썼다. 돈을 이미 받았으니 일단 연수는 가야 했다. 그는 결국 풍비박산 난 가정을 그대로 둔 채 6개월간의 해외연수 길에 올랐다.

知人(지인)들의 도움으로 뉴욕에 정착했지만, 관람료 등 연수를 계속할 돈이 없었다. 할인 티켓 등 여러 방법을 찾아봤지만, 두 달이 지나자 그의 수중엔 8달러밖에 남지 않았다. '몸살이 났다'고 둘러댄 후 보름 동안 방에 틀어박혀 지내기도 했다.

그러던 중 한국에선 배우 허준호 등이 "신시를 살리자"는 구호 아래 〈사운드 오브 뮤직〉을 성공시켰다. 경제적 여력이 생긴 박 대표는 다음날부터 다시 브로드웨이 거리를 활보할 수 있었다.

길고도 짧은 뉴욕 연수를 다녀온 후, 박 대표는 뮤지컬 제작 시스템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어렵게 배운 선진 뮤지컬의 노하우를 기획 단계부터 오디션, 연습, 공연 전 과정에 걸쳐 적용시켰다.

실패의 아픔을 불러왔던 〈갬블러〉를 다시 무대에 올렸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기념해 일본 13개 도시 순회 공연에도 나섰다. 순수 개런티만 60만 달러에 이르렀고, 50일간 5만명 이상의 관객이 찾았으며, 평균 객석 점유율은 95%를 넘었다. 국내 최초의 장기공연 해외수출작이란 기록을 세웠다. 일본 공연 중 둘째 아이의 출산 소식을 듣기도 했다. 박 대표는 그의 저서에서 〈갬블러〉를 이렇게 회상했다.

〈뮤지컬 '갬블러'는 내게 특별한 작품이다. 어려움을 겪은 초연 때는 뱃속에 있는 아이를 빼앗더니 일본 공연의 성공은 둘째 찬웅이를 안겨주었다.〉

박 대표는 이후 승승장구했다. 록뮤지컬 〈렌트〉, 영국의 대표 뮤지컬 〈맘마미아〉, 브로드웨이의 대표작 〈아이다〉 등 대형 뮤지컬을 연달아 성공시켰다.

"한국 뮤지컬 시장은 〈오페라의 유령〉과 〈맘마미아〉에서 절정을 이뤘습니다. 해외 뮤지컬계도 깜짝 놀랐어요. 가능성은 있다고 봤지만, 이렇게 짧은 기간에 폭발적으로 급성장할 줄은 그들도 예상하지 못했던 겁니다."

단기간의 압축 성장은 항상 부작용을 동반한다. 가장 큰 문제는 '거품'이었다. 박명성 대표의 신시컴퍼니 등 몇몇 회사가 해외 뮤지컬 수입으로 '대박'을 치자, 여기저기서 라이선스 작품 수입 경쟁에 뛰어든 것이다.

"한국인들끼리 경쟁하면서 로열티가 턱없이 비싸졌습니다. 몇 년 전 영국의 〈맘마미아〉 계약기간이 거의 끝나 영국 제작자를 만났는데, '한국 사람들, 참 재미있다'고 그래요. 왜냐고 물으니 '한국에선 신시가 하는 줄 뻔히 알면서도 더 비싼 가격을 부르면서 공연권 계약을 바꿔달라고 한다'는 겁니다."


박명성 대표가 가장 애착을 보인 작품 〈아이다〉. 박 대표는 가수(핑클) 출신인 옥주현(가운데)의 첫 뮤지컬 연기를 '완벽했다'고 평했다.



한국인들끼리 로열티 출혈 경쟁

―결국 어떻게 됐나요.

"작년에 아무 문제없이 재계약했습니다. 런던에선 한국에서 〈맘마미아〉를 공연할 수 있는 회사는 신시컴퍼니밖에 없다고 한답니다. 전혀 걱정 안 해요. 다만 아쉬운 점은 원래 공연 재계약은 로열티가 내려가야 정상인데, 〈시카고〉와 〈렌트〉 등 여러 작품이 1~2% 정도 올랐어요. 공연권 방어를 위해 어쩔 수 없었습니다."

―과열 경쟁이 벌어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는 제작자가 제작비 중 최소한 절반 이상은 자신의 자본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전 외부 투자를 30% 이상 받지 않습니다. 남의 돈을 받으면 책임감이 떨어지고, 돈 아까운 줄 모르죠. 거품시장이 생긴데다 투기 자본까지 무차별적으로 들어오니까 오로지 '대박' 작품에만 관심을 가지게 된 겁니다. 공연 전문가는 없고, 투자자들의 입김만 더 거세졌습니다. 그나마 수익을 내면 다행인데, 손실을 본 회사가 많아요."

―앞으로 '뮤지컬 수입 경쟁을 하지 않겠다'고 공식 선언했는데요.

"4~5년 전부터 추진했던 〈위키드〉를 제외하곤 더 이상 하지 않을 계획입니다. 기존에 보유한 라이선스 뮤지컬과 새로운 창작 뮤지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우리의 창작 뮤지컬을 가지고 브로드웨이를 비롯해 해외공연이나 라이선스 수출도 계획하고 있습니다. 연극에도 도전할 계획이에요. 그래서 원래 '신시뮤지컬컴퍼니'였던 이름을 '신시컴퍼니'로 바꿨죠. 연극이야말로 가장 기본적인 순수예술입니다. 기반 잡힌 후배들을 양성하기 위해서라도 연극은 꼭 해야 합니다."

박 대표는 "이제 해외 작품에 의존하지 않아도 될 만큼 한국 뮤지컬의 수준이 비약적으로 성장했다"면서 "배우들과 기술팀의 기량을 믿고 창작 뮤지컬에 힘을 쏟겠다"고 했다.

―스스로 생각하는 최고의 배우는 누구입니까.

"배우로서의 정신과 인격, 그리고 품위를 생각한다면 최정원씨가 최고라고 봅니다. 작품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 대단합니다. 책임감도 확실하고요. 한 예로 〈맘마미아〉 공연 때 담석이 생겨 엄청 고통스러워했는데 3개월 동안 끝까지 공연을 마쳤어요. 공연이 끝난 직후 바로 수술을 했죠. 항상 기대 이상을 소화하는 최정원씨의 집념에 놀랍니다."

"해외 출장간다" 속이고 암 수술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무엇입니까.

"〈아이다〉입니다. 158억원이나 들여가면서 가장 힘들게 무대에 올린 작품이에요. 무대 셋업에만 한 달이 걸립니다. 〈맘마미아〉는 자주 할 수 있지만, 〈아이다〉는 환경이 받쳐주지 못하면 공연 자체를 못 해요. 주인공 옥주현씨의 연기도 완벽했어요."

〈아이다〉 연습이 한창 진행 중이던 지난 2004년, 박 대표는 병원에서 초기 위암 선고를 받았다. 단원들에겐 런던에 10일간 출장 다녀온다고 하고선 병원에 입원해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가족 외엔 면회객이 하나도 없어 병원 관계자들의 눈초리가 이상했다고 한다.

"꽤 유명한 뮤지컬 제작자라는데 문병 오는 사람이 없었어요. 유명하다는 소문이 거짓이거나 인간관계가 좋지 않다고 짐작했을지도 모르죠. 수술한 지 8일 만에 퇴원하고 곧바로 연습장에 갔습니다. 단원들이 그러더군요. '출장에서 무리했는지 살이 빠졌다'고요."

〈아이다〉 공연을 모두 마친 뒤에야 그는 단원들에게 수술 사실을 고백했다. "연습 시작하자마자 출장 간다며 자리 비운 것은 놀러간 것이 아니라, 병원에서 수술을 받느라고 그랬다"고 털어놓자 쫑파티 현장은 금세 눈물바다가 됐다고 한다.

―최근 인기 영화배우와 가수들이 뮤지컬로 진출하는 사례가 많습니다. '스타 마케팅'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데요.

"저는 인기 연예인이 뮤지컬에 진출하는 것을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단 조건이 있어요. 방송에서 일거리가 없어서 별 생각 없이 뮤지컬에 도전하는 것은 안됩니다. 새로운 장르에서 다시 공부한다는 자세로 와야 하지, 단순 돈벌이 수단으로 보고 오면 크게 다칩니다. 그런 면에서 옥주현과 바다(본명 최성희)는 아주 성공한 사례라고 생각해요."

박명성 대표는 기획사 간의 출혈 경쟁과 거품 시장으로 인해 공연계 전반의 人的(인적) 기반이 취약해졌다고 지적했다. 그는 현재 한국 공연계의 가장 큰 과제로 '인재양성'과 '콘텐츠 개발'을 꼽았다.

"거품시장의 확대는 인재양성 실패로 돌아왔어요. 누군가의 책임이 아니라 저를 포함한 모두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명 뮤지컬 유치에만 치중하다 보니 우리 자신의 콘텐츠 개발과 차세대 극작가 및 음악감독 양성을 망각해 버렸어요. 계속 해외 인력에만 의존해 적절한 시기를 놓쳐버린 겁니다."

―구체적인 방법이 있습니까.

"실험적인 무대를 만들고, 젊은 예술가들을 적극 고용해야 합니다. 요즘 기본적인 것은 학교에서 다 배웁니다. 저도 지금 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수준이 대단히 높아요. 그들에게 얼마나 다양하고 좋은 기회를 주느냐가 가장 중요한 관건입니다."


2010년 1월 공연 예정인 연극 〈엄마를 부탁해〉. 신시컴퍼니는 소설가 신경숙의 원작을 바탕으로 연극과 뮤지컬을 함께 제작할 계획이다.


"연극도 장사가 된다는 걸 보여주겠다"

박 대표는 공연계에 '원 소스 멀티 유스(one source multi use)' 방식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하나의 스토리를 가지고 연극과 뮤지컬을 동시에 제작하는 것이다. 그 첫 번째 시도로 申京淑(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가 선정됐다. 2010년 1월 연극 공연이 시작되고, 이어 뮤지컬 기획도 함께 진행될 예정이다.

11월 16일에 공연을 마친 연극 〈피아프〉와 12월에 시작되는 〈가을 소나타〉는 박 대표의 연극에 대한 의지를 강하게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신시컴퍼니는 올 겨울 해외 유명 작품인 〈헤어스프레이〉와 〈시카고〉를 공연함과 동시에 창작 뮤지컬인 〈퀴즈쇼〉도 함께 선보일 예정이다.

한국 공연계에서 山戰水戰(산전수전) 다 겪은 박 대표의 인생은 그 자체가 한 편의 뮤지컬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연극과 뮤지컬이란 꿈에 목말라 하고 있었다. 공연계 바닥에서 이룰 수 있는 꿈은 이미 모두 달성한 듯한 그에게 "꿈이 뭐냐"고 물었다.

"창작 뮤지컬을 만들어 아시아권을 비롯해 뮤지컬의 본고장 브로드웨이와 영국에 역수출해 보고 싶습니다. 수입만 하던 나라에서 뮤지컬을 수출하자는 것이죠. 그리고 훌륭한 연극을 만들어 '연극도 장사가 된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습니다. 연극의 대중화를 위해 온 몸을 던질 준비가 돼 있어요.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이 너무 많네요."⊙


월간조선 2009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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