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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24년 前 인천공항 최초 계획한 박연수 소방방재청장 인터뷰

김정우 기자 2010.05.26 16:05

1986년 인천직할시장 집무실, 시장 앞에 선 33세 도시계획국장은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인천 앞바다 섬과 섬 사이를 메워 국제적 규모의 공항과 관광단지, 그리고 신도시를 건설한다는 내용의 병풍식 브리핑차트가 그의 옆에 놓여 있었다. 잠시 후,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킨 그가 보고를 시작했다.

"영종도와 용유도 사이 바다를 매립해…."

당시 영종도는 갯벌이 끝없이 펼쳐진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외딴 섬이었다. 그곳에 짓겠다는 신(新)공항은 이미 충북 청주로 부지가 결정돼 상당 부분 토지 매입이 끝난 상태였다. 인천과 경기도는 수도권 개발 억제 정책의 중점 대상이었고, 섬들은 북한 대포의 사정거리 안에 있다는 이유로 인프라가 열악했다. 게다가 사업의 중심 무대인 영종도와 용유도는 인천시가 아닌 경기도의 행정구역이었다.

풋내기 국장의 말도 안되는 보고를 끝까지 들은 시장이 말도 안되는 대답을 내놓았다.

"충분히 공감이 가는 청사진이다. 청와대에 가서 보고를 드려 보는 것이 좋겠다."

'말도 안된다던' 이 보고는 20년 후 현실이 됐다. 소설 같던 계획안은 100조원 규모의 초대형 프로젝트로 변신했다. 당시 송도신도시 계획을 보고받은 이는 박배근(朴培根) 전(前) 시장, 보고 당사자인 도시계획국장은 박연수(朴演守) 현(現) 소방방재청장이었다.

⊙ 33세 인천시 국장이 홀로 新도시 기획… '한국 지도를 바꾼 남자'
⊙ "당시 인천은 매력은 고사하고 미래를 차단당한 枯死 직전의 도시"
⊙ 新도시 계획안 처음 본 기자들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냐…"
⊙ 홍콩ㆍ암스테르담ㆍ싱가포르 벤치마킹해 인천공항과 신도시 기획
⊙ 도시계획 전문가 입장에서 본 세종市는 '허구'


'미래를 차단당한 도시'

"인천국제공항 건설이 1986년 계획되고 추진됐다는 것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었다. 그 모든 움직임의 중심에 박연수 박사가 있었다. 1980년대 중반 당시 33세에 불과했던 지방정부 국장이 이 국가적이고 역사적인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추진해 성공적으로 실현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남덕우(南悳祐) 전 총리가 박연수 청장에 대해 회고한 내용이다.

강동석(姜東錫) 전 건설교통부 장관은 "서른을 갓 넘긴 지방공무원이 국가와 지역의 장래를 위해 이처럼 대담한 구상과 계획을 했다는 데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면서 "그의 꿈과 구상이 실현돼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가장 역동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인천의 발전상을 볼 때, 시대를 앞서가는 한 공직자의 혜안과 집념이 역사를 바꾸는 데 얼마나 크게 기여하는지 실감할 수 있다"고 했다.

"소방방재청장 임명 후 첫 대외행사가 인천대교 개통식 참석이었습니다. 20여 년 전 머릿속으로만 그렸던 그 위용을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순간 눈물이 핑 돌더군요. 대한민국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단 한 장의 사진으로 찍은 느낌이었습니다."

2009년 12월 4일 오전,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사무실에서 만난 박연수 청장은 2009년 10월 16일에 열린 인천대교 개통식을 회상하는 것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인천대교는 송도신도시를 국제 비즈니스 중심도시로 만들기 위해 박 청장이 도시계획국장 시절 최초 계획 단계부터 구상해 추진한 프로젝트다.

박 청장은 2주 후인 10월 30일에 한 번 더 눈물을 흘려야 했다. 국제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탄 오사카행(行) 비행기에서 창 아래로 펼쳐진 인천대교의 장관을 보고 나서다.

"인천대교는 한마디로 '세계최고'입니다. 바다와 공항, 그리고 신도시를 연결하는 의미와 규모를 모두 갖춘 세계적인 교량이에요. 앞으로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이 가장 먼저 바라보고 평가할 잣대 역할을 인천대교가 감당할 것이라 생각하니 두근거리는 마음에 눈물이 나더군요."

25년 전엔 꿈에도조차 없던 일이었다. 1985년 6월, 7년간의 경남도청 근무를 마치고 인천시 도시계획 행정을 맡게 된 박연수 과장의 눈에 비친 인천은 '미래를 차단당한 도시'였다. 서울의 해상 관문인 인천은 근대 문물의 도입 통로였고, 일찍이 공업화가 이뤄진 곳이었다. 하지만 서울과 가까운 임해(臨海)도시란 이유로 돌아온 것은 혜택이 아니라 규제였다.

"당시 인천이 가진 매력적인 요소가 여럿 보였습니다. 우선 한국의 관문으로 불리는 지리적 입지가 있었고, 좀 더 시야를 넓히면 한·중·일(韓中日) 3국의 중심에 위치한 동북아 허브로서의 모양새가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반대였죠. 매력은 고사하고, 고사(枯死)해 가는 도시였습니다."


포스트 홍콩을 겨냥하다

인천을 고사시킨 가장 큰 원인은 수도권 억제정책이었다. 도시발전의 주축을 이뤘던 제조업이 장기간 중단된 인프라 구축으로 인해 인천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1987년 한국도시연감에 따르면, 인천의 2차 산업 비중은 근로자 수 기준으로 77.2%였다. 1986년 경제기획원의 지역별 도ㆍ소매업 현황 통계는 인천의 인구 대비 사업체 수와 판매액이 5개 직할시 중 최저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경인(京仁) 간 1일 교통인구는 50만명에 육박했다. 한마디로 인천은 생활권의 독립도 이루지 못한 서울의 부속 공단 역할에 머무르는 '의존의 도시'였다. 박 청장의 설명이다.

"명색이 한국의 대표 항구도시인데 1주일이 가도 배 한 척이 들어오지 않는 겁니다. 인구 130만명의 4대 직할시에 들어오는 도로가 4차선의 고속도로와 국도, 2차선 산업도로로 3개밖에 없었죠. 요즘은 인구 10만명이 안되는 군 소재지도 진입도로가 10개는 넘을 겁니다. 당시 인천의 실상에서 미국 자동차 산업의 상징이었던 디트로이트의 몰락이 연상됐습니다. 디트로이트는 도시 경영자들의 대를 이은 무능과 무책임 때문에 몰락했죠."

그가 생각한 대책은 명확했다. 정부에 사정하고 반발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명운(命運)이 걸린 프로젝트를 전략적으로 진행하는 것이었다. '나라가 살 길'과 일치하는 '인천이 살 길'을 찾아야만 했다. 20년 뒤를 내다보고, 새로운 성장 동력을 발굴해 추진하는 것이 그의 전략이었다.

"일단 동북아로 시선을 넓혔습니다. 세계 경제의 중심이 한·중·일 3국이 모인 동북아로 올 것이란 전망이 보였죠. 중국의 개방은 세계적인 변화였고, 몇 년 후 반환될 예정인 홍콩을 대체할 새로운 중심이 필요했습니다. 홍콩을 모델로 두고 '포스트 홍콩' 전략을 세웠습니다."

그의 예측은 20년 후 그대로 들어맞았다. 중국은 개혁개방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해 13억 중국인 시장을 세상에 내놓았고, 기술과 자본이 아시아로 집중됐다. 미국과 유럽이 주도하던 세계 경제의 축이 21세기를 맞아 아시아로 이동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거대한 빈국이었던 중국은 'G2'라는 신조어가 나올 정도로 어느새 미국을 위협하고 있다. 인천을 동북아의 중심이자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겠다는 박 청장의 계획은 시대적 화두를 선점하는 데 결정적 요인이 됐다.

"그동안 '막다른 골목'이었던 서해가 열린 바다가 되리라 믿었습니다. 홍콩이 중심이 된 냉전시대 경제중심의 판도가 흔들릴 것으로 보였어요.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실질적인 무게중심이 한국으로 이동할 수도 있었습니다. 아니 우리가 주도적으로 그 중심을 흔들어 상권이동을 시도해야만 했죠. 대한민국에서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은 인천밖에 없었습니다."


고3 때 여자친구와 영종도에 가

전략만 가지고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전략을 뒷받침할 만한 프로젝트가 필요했다. 박 국장이 선택한 길은 첨단기술과 친환경 정책이 결합한 홍콩을 능가하는 신도시 건설이었다.

"3개 도시를 벤치마킹했습니다. 홍콩의 국제비즈니스 역할과 기능을, 암스테르담의 물류허브기능, 싱가포르의 신도시 계획 사례를 집중적으로 분석했죠. 100% 완성 단계는 아니지만, 기대 이상으로 성공했다는 사실은 인천국제공항이 국제 공항서비스 평가에서 4년 연속 1위를 한 사실에서 증명됐습니다."

―벤치마킹한 도시를 따라잡은 셈이 됐는데, 그렇다면 현재의 인천이 주목해야 할 곳은 어디인가요.

"스웨덴 스톡홀름의 생태도시 함마르비(Hammarby)입니다. 제조업 쇠퇴로 산업기능이 상실된 공장지대를 친환경 인공도시로 가꿔 '가장 살고 싶은 도시'로 바꿨죠. 인공도시를 친환경 녹색도시로 어떻게 현실화했는지 주목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두바이입니다. 두바이에서 배워야 할 점은 '두바이처럼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죠. 건물만 무작정 지어선 제대로 된 도시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합니다. 도시는 일시적인 유행이 아니라 사람이 지속적으로 살아야 하는 커뮤니티 공간입니다."

박 청장은 2008년 11월 펴낸 그의 책 <대한민국의 지도를 바꿔놓은 남자>에서 "두바이식(式) 개발모델을 지향해선 안된다"고 쓴소리를 한 바 있다. 모두가 "두바이를 따르자"며 목소리를 키우던 시절, '창조도시 전략'을 강조하며 최근 벌어진 두바이의 위기를 1년 전에 정확히 짚어낸 셈이다.

'천혜(天惠)의 공항터' 영종도와 그의 인연은 엉뚱하게 시작됐다. 1970년의 어느 일요일, 대입(大入) 시험을 앞둔 고3 박연수는 "머리를 식힌다"는 핑계로 여자친구와 함께 경인선 열차에 올라탔다. 인천에서 배를 타고 건너간 영종도에서 둘은 온종일 섬을 구경하며 놀았다.

15년 후인 1985년, 인천시 도시계획과장으로 부임한 그는 어린 시절 추억에 다시 한 번 영종도를 찾았다. 철든 후 다시 본 영종도는 아름다웠다. 수줍은 듯 피어난 들꽃과 드넓은 갯벌은 뭉게구름 아래 펼쳐진 마을 전경과 함께 섬의 운치를 더하고 있었다.

도시계획자는 풍경 감상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의 눈엔 아름다운 풍경 너머 또 다른 풍경이 보였다. 뭔가 아쉬운 느낌이 남았고, 끊임없는 질문이 마음속에서 이어졌다.

'인천 코앞에 있는 섬이 왜 인천의 행정구역이 아닐까.'

'이렇게 가치 있는 섬이 왜 버려진 채 있을까.'

아쉬운 마음에 그는 바쁜 업무 중에도 몇 차례 더 영종도를 찾았다. 그리고 1년 후, '동북아 국제 비즈니스 중심도시' 프로젝트 구상이 시작됐다. 그의 머릿속에서 영종도를 주제로 한 '드라마'가 탄생하고 있었다.

영종·용유·무의 개발 구상도1986년 최초의 영종·용유·무의 개발 구상도와 소도시 개발 구상도.


영종도 공항, 전경환에 먼저 보고

활주로는 넓은 땅만 있다고 적지(適地)가 아니다. 여객기가 내리고 뜨기 위해선 주변 장애물이 없어야 한다. 소음 피해 지역은 이주 보상이 필요하고, 주변 지역 개발이 제한된다. 바람의 방향이 일정해야 하며 안개가 적어야 한다.

영종도는 이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공항의 구조상 흙을 깎아낼 섬들의 위치와 매립지의 위치가 신기할 정도로 붙어있었다. 매립지 주변의 흙과 돌을 파내 그대로 컨베이어 벨트로 쏟아 부으면 돼 수심 20m 바다를 매립해 지은 일본 간사이공항 부지 공사비의 20분의 1밖에 들지 않았다. 박 청장의 말이다.

"철없던 학창시절 시작된 인연이 이렇게 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그야말로 행운이었죠. 영종도는 말 그대로 하늘이 내린 공항입지입니다."

신공항이 들어설 '미래 동북아 중심' 인천에 대한 청사진은 그렇게 그려지기 시작했다. 몇 달 동안 현장 조사와 가능성을 검토한 후 1차 보고서가 만들어졌다. 그의 보고를 들은 박배근 시장은 "먼저 새마을운동중앙회에 가서 전경환(全敬煥) 회장에게 설명을 하고 양해를 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계획의 핵심인 영종ㆍ용유도 지역은 경기도 행정구역인 데다가 당시 막강한 권력 실세였던 전경환 회장이 애착을 가지고 있던 곳이었습니다. 새마을운동중앙회는 영종도에 새마을 연수원을 짓고, 새마을운동의 본산으로 만들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죠. 예민한 사안인 만큼 먼저 설명을 하고 양해를 구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박 국장은 곧바로 서울시 방화동에 위치한 새마을운동중앙회를 찾아가 전 회장에게 40여 분 동안 사업에 대해 설명했다. 전 회장의 대답은 간단했다.

"나는 됐으니 청와대 가서 보고해 보시오."

사실상 반(半)승낙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벽은 높았다. 청와대 비서관 한 명도 만나기 어려운 상황에서 제대로 된 보고가 될지 불가능해 보였다. 계획안을 처음 본 기자들은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냐"란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수도권개발 억제정책의 주무부서인 건설부, 우여곡절 끝에 청주 신공항을 확정 짓고 한숨 돌린 교통부엔 씨도 안 먹힐 이야기였다.

"일단 청와대로 갔죠. 설명을 듣고 어이없어하는 행정관에게 보고서를 주고 왔습니다. 제가 봐도 답답하고 한심한 노릇이었어요.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순 없었습니다. 정면돌파를 시도했죠."

결심을 굳힌 그는 박배근 시장에게 대통령 직접 보고를 건의했다. 박 시장은 "매년 초 열리는 연두순시 별실보고를 노리자"며 철저한 자료 준비를 지시했다. 1987년 2월 16일,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의 임기 중 마지막 연두순시 별실보고에서 박배근 시장의 보고가 이뤄졌다.

"50억원만 주십시오"

"과연 대통령은 그릇이 달랐습니다. 지엽적인 문제에도 불구하고 큰 안목으로 사안을 파악하는 눈이 있었죠. '사업에 타당성이 있다'며 '추진해 보라'는 허락이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희망도 잠시, 그해 5월 큰 힘이 됐던 박배근 시장이 대구시장으로 전임되는 바람에 공든탑이 무너졌어요. 안 그래도 벅찬 사업에, 든든한 사령탑을 잃은 느낌이었습니다."

후임자는 내무부 민방위 본부장 출신의 이재창(李在昌) 시장이었다. 그는 서류를 집에까지 가져가 보는 것으로 유명한 '완벽주의자'였다. 박 국장은 용기를 내어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을 했지만, 이 시장은 가타부타 반응이 없었다.

"온통 서류로 어질러진 사무실로 돌아와 피울 줄 모르는 담배까지 빼어 물었습니다. 모든 것을 잃은 허탈감에 무작정 도망치고 싶었어요. 그때까지 분석하고 씨름했던 자료를 모으니 라면상자로 10여 개나 됐습니다."

한 달 후, 박 국장은 인터폰 호출을 받았다. 이 시장은 대뜸 "그거 한번 다시 가져와 보라"고 했고, 박 국장은 단숨에 시장실로 뛰어갔다. 이 시장은 서류는 보지도 않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얼마나 있으면 될까?"

"50억원만 주십시오."

100조원 규모의 단군 이래 최대 사업은 그렇게 부활했다. 이재창 시장에 대한 박 청장의 설명이다.

"허언(虛言)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심사숙고형이지만, 결정 후엔 앞뒤 안 가리고 밀어붙이는 뚝심이 있었습니다. 1989년 7월 교통부 차관으로 전보될 때까지 2년여 동안 제게 큰 힘이 됐습니다."

1988년 4월, 대통령의 초도순시가 다시 시작됐다. 이재창 시장은 별실보고에서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에게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이해가 빨랐습니다. '서해안 시대'를 주창하고 나서서인지 수도권 규제와 같은 소소한 문제에 얽매이기보단 큰 그림을 보는 사람이었죠."

얼마 후 기다리던 답이 왔다. 수도권 신공항은 '긍정적인 검토', 신도시 건설은 '불가'였다. 절반의 성공에 박 국장은 아쉬워했지만, 첫 번째 철벽이 뚫렸다는 생각에 추진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1988년 12월, 영종ㆍ용유ㆍ무의 지역을 인천시로 편입시키기 위한 '행정구역 조정을 위한 지방자치법 개정안'이 우여곡절 끝에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하지만 내각의 반대는 여전해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에도 불구, 실질적인 진척은 이뤄지지 않았다.

인천시 도시계획국장 시절 미국 올랜도공항을 찾은 박연수 청장인천시 도시계획국장 시절 미국 올랜도공항을 찾은 박연수 청장. 공항도면 입수와 관계자의 브리핑을 통해 박 청장은 영종도 신공항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됐다.


"노태우 전 대통령 결심으로 본격 진전"

이재창 시장은 설득의 범위를 넓히기 위해 인천발전시민협의회를 조직해 전략적인 홍보를 시작했다. 협의회 회원들은 국회의원, 청와대 비서실, 관계 정부부처에 대한 설득을 군사작전처럼 전개했다. 기회만 오면 신문과 잡지에 기고하고, 강연에 나가 설득을 거듭했다.

1989년 3월, 다시 한 번 연두순시 별실보고의 기회가 돌아왔다. 진척이 없다는 이 시장의 보고에 노태우 대통령은 즉각 추진을 지시했다. 곧바로 공영개발사업단이 결성됐고, 본격적인 사업계획이 쏟아져 나왔다.

1997년 11월, 1단계 부지조성 공사가 끝났다. 2000년 6월엔 인천국제공항 기본 시설이 준공됐고, 박 청장의 최초 구상 15년 만인 2001년 3월 29일 개항식이 열렸다.

1단계 사업에만 연인원 1380만명, 연 253만 대의 건설장비, 15t 트럭 100만 대분의 골재와 1800만 대분의 매립 토사, 180층 빌딩 높이에 달하는 48만 장의 설계도면, 서울과 부산을 24회 왕복할 수 있는 1만1079km의 통신케이블이 투입된 대역사(大役事)였다.

"운 좋게 인천시 기획관리실장 자격으로 개항식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인천공항으로 처음 입항한 대한항공 여객기 조종사에게 최기선 시장과 함께 화환을 걸어줬는데, 감동 그 자체였죠."

―사업 기획과 추진 과정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무엇이었습니까.

"전략수정이었습니다. 프로젝트의 목적이 새로운 성장동력을 통해 홍콩과 같은 국제 비즈니스 중심지를 만드는 것인데, 중간에 사람이 바뀌면서 '송도를 매립해 아파트 단지를 만들어 그 수익으로 인천에 지하철을 만들자'고 주장을 하는 겁니다. 완전히 틀어져 버린 셈이죠. 제일 큰 걸림돌이었습니다."

―2009년 11월 6일자 <조선일보>에 "외자(外資) 유치는 못 하고 아파트만 짓고 있는 경제자유구역"이란 사설까지 나왔는데요.

"사업이 지연되고, 사람이 바뀌어서 생긴 문제죠. 전혀 모르던 사람이 왔다가 도저히 엄두가 안 나니 땅을 팔거나 아파트단지를 만드는 쪽으로 돌아선 거죠."

―프로젝트 성공에 가장 큰 힘이 됐던 사람은 누구입니까.

"대통령 4명 모두입니다. 전두환, 노태우, 김대중(金大中),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입니다. 발상 자체가 너무 획기적이라 많은 사람이 프로젝트에 대해 이해하려는 의지조차 없었는데, 큰 사람들은 역시 다르더라고요."

"포항을 먹여살린 것은 포철이지 포항시청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대통령이 어떻게 도움이 됐습니까.

"전두환 대통령은 추진동력을 만들었고, 노태우 대통령은 어려운 결정을 내렸습니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은 별다른 역할이 없었던 것 아닙니까.

"김대중 대통령은 경제특구법을 통해 동북아 중심국가 건설을 국가적 프로젝트로 만들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균형발전론자라서 걱정을 많이 했었습니다. 경제자유구역은 균형발전론과는 거리가 멀잖아요. 그래서 당선자 시절이던 2003년 2월 인천공항으로 모셔서 보고를 했습니다. 그날 노 대통령은 제2연륙교(인천대교)에 대한 지원 의사를 시장은 물론 인수위원회, 재정경제부, 기획예산처 등 필요한 모든 곳에 알렸습니다. 하지만 측근들이 문제였죠. 기획의도와 다른 방향으로 사업을 바꾸려고 했습니다."

―도시계획 전문가의 입장에서 최근 세종시 논란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합니까.

"일단 정치부문은 배제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전 도시계획가이지, 정치가는 아니거든요. 중부지역 발전을 통한 균형발전 목표는 적합하지 않은 방법입니다. 효과가 없기 때문이죠. 제 박사논문 제목이 '대한민국의 도시성장 발전요인'입니다. 도시성장의 기본은 일자리예요. 일자리가 창출되지 않는 도시는 허구입니다. '행정기관 오면 발전한다'는 것은 먼 옛날 논리예요. 포항을 먹여살린 것은 포항제철이지 포항시청이 아닙니다."

―'4대강 살리기' 사업도 논란이 많습니다.

"소방방재청장의 입장에서 보면, 기후변화를 맞아 준비가 시급합니다. 최근 100년간 세계 평균기온이 0.74°C가 상승했어요. 그런데 한국은 1.5°C입니다. 기후변화로 인한 재앙을 대비해야 합니다. 정치논리가 아닌 치산치수(治山治水)의 개념으로 봐야 해요.

또 4대강 사업이 단순한 홍수방지사업이 아니라는 점에 희망을 느낍니다. 자전거도로 개발이나 수변 환경 개발 등 나름 콘셉트가 있는 개발이죠. 다만 바라는 것은 자연친화적인 면을 보강할 방법을 더 모색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한강의 사례를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그냥 방치했을 때의 한강과 개발 후의 한강을 보면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기준이 섭니다."

그는 1997년 내무부 재난관리국, 2004년 행자부 감사관, 2007년 지방혁신인력개발원 원장 등을 거쳐 2008년 3월 소방방재청 차장이 됐고, 2009년 10월 청장으로 부임했다.

―소방방재청장이란 직책이 도시계획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어려운 점은 없습니까.

"우선 바로잡을 것이 있습니다. 도시계획은 단순히 그림 그리는 학문이나 연구가 아니라 인간의 삶을 직접 다루는 분야입니다. 그리고 도시계획에서 안전부문은 절대 빠질 수 없는 부분입니다. 토목을 바탕으로 한 기술적 전문성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안되는 것이 안전관리예요. 경영능력과 위기관리능력을 함께 갖춰야 합니다. 오히려 진정한 능력 발휘의 기회라고 봅니다."

1999년 인천국제공항 건설 현장(사진 왼쪽)과 최근의 모습.


"다리 놓는 사람보다 그걸 결정하는 사람 되려고 했다"

―2009년 11월 일어난 부산 사격장 화재 사건으로 국회 행정안전위에서 홍역을 치렀습니다.

"초동 대처가 중요하다고 판단돼 그날 바로 현장으로 갔습니다. 마침 부산에서 일본 언론 관련 국제 세미나가 열린 터라 한국 기자보다 훨씬 많은 일본 기자가 모였습니다. 외교분쟁까지 날 수 있는 심각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일단 '대한민국 정부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부상자의 생존율을 높이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언론에 밝혔습니다.

부상자들이 입원한 현지 병원에서 부산시장, 병원장, 그리고 저 이렇게 3명이 모여 1차 대책회의를 가졌어요. 그 결과는 ▲의료진 보강 ▲서울 이송 환자를 위해 119 헬기 현장 대기 ▲대책본부 설치 등이었습니다.

다음날 오전 7시, 병원장, 주한일본총영사와 함께 2차 대책회의를 가졌습니다. 환자들의 이송상황을 점검했고, 일본에서 요구하는 사항을 들었습니다. 회의 말미에 일본 총영사의 공식 입장 표명이 있었는데, '한국 정부의 신속하고 적극적인 조치에 감사하다'란 내용이었습니다."

박 청장은 시(詩)와 무예에 조예가 깊다. 1972년 대학생 시절 등록금을 털어 <화단에 서서>란 제목의 시집을 출간했다. 그는 또 태권도 4단에 검도 5단이다. 그의 아내가 검도 4단, 딸은 1단이니 합하면 검도 10단인 '검도 가족'이란다. 고등학교 시절엔 학생 연대장을 하며 리더십을 배웠다고 했다.

―행정가나 공학자라기보단 군인의 풍모가 느껴집니다.

"제가 졸업한 고등학교에서 상당수의 학생이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습니다. 고교 동기 중 6명이 현재 장군이에요. 당시 교련 담당 선생님이 육사에 가라고 3번이나 말했습니다."

―왜 안 갔습니까.

"연대장에서 육사에 가면 소대장이잖아요. 거꾸로는 못 간다고 했죠. 지금 생각하면 좀 어이가 없긴 합니다."

―정치가로서의 꿈은 없습니까.

"정치는 안 합니다. 즐겁지가 않아요. 행정을 통해 국민에게 봉사하는 것이 꿈입니다. 대학교 4학년 때 쓴 일기장에 일생의 계획이 적혀 있습니다. 기업인이 되느냐, 공직 생활을 하느냐를 놓고 치열하게 고민했었죠."

당시 기술고시와 현대그룹 입사 시험에 모두 합격했던 그는 특유의 기업문화와 역동적인 분위기에 매혹됐지만, "다리 하나를 놓는 사람이 되기보다 다리의 건설 자체를 결정하는 사람이 되겠다"며 공직을 선택했다.

"시간이 지나 지금 돌이켜보니 그때 적은 계획이 거의 맞아떨어진 듯해요. 저는 마지막까지 행정가로서 승부를 걸 계획입니다."⊙

朴演守
⊙ 1953년 전북 정읍 출생. ☞ 안티에이징솔루션 허브톡스 세럼
⊙ 성남고ㆍ고려대 토목공학과 졸업. 연세대 대학원 도시계획학 석ㆍ박사, 美 조지타운대 객원연구원.
⊙ 제14회 기술고등고시 합격, 인천시 도시계획국장ㆍ재무국장, 내무부 방재계획과장, 행자부
월드컵문화시민운동추진협의회 운영국장ㆍ지방혁신인력개발원 원장, 인천시 기획관리실장,
소방방재청 차장, 인천대 대학원 겸임교수 등 역임. ☞ 보톡스말고 허브톡스로탱탱하게
⊙ 現 소방방재청 청장.

취재지원 : 조은정 月刊朝鮮 인턴기자
사진 : 서경리 月刊朝鮮 인턴기자

월간조선 2010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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