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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 규모 對北 逆공작 ‘Z작전’의 전모 - 통혁당 간부 구출 시도한 北 간첩선 검거는 한국 中情의 逆공작이었다

정치·북한

by 김정우 기자 2010. 9. 27.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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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정보부, A-3 통신 통해 북한과 비밀지령 주고받으며 무장공작선 제주도로 유인
⊙ 逆공작에 걸려 통혁당 간부 구출 시도한 北 무장공작선, 軍·警·情 합동작전에 섬멸
⊙ 작전 참가 요원 “한명숙 前 총리의 남편 박성준 교수는 통혁당 중간 간부인 소조책”
⊙ 韓 前 총리의 北 시누이, 2006년 총리 임명 직후 이산가족 상봉 신청
 

金成東 月刊朝鮮 기자 / 金正友 月刊朝鮮 기자

1968년 11월 16일 열린 통혁당 사건 군(軍) 관련 피고인 4명에 대한 구형공판 장면. 이날 공판에서 군 검찰은 당시 신영복 피고인(사진 맨 왼쪽)에게 국가보안법, 반공법, 내란예비음모죄 등을 적용하여 사형을 구형했고 나머지 3명에게는 징역 7~10년을 구형했다.



통일혁명당(통혁당) 핵심간부를 구출하기 위해 북한이 1968년 8월 20일 제주도 서귀포 해안으로 보냈다가 우리 군·경·정(軍警情) 합동작전에 의해 나포됐던 무장공작선은 중앙정보부(국정원 전신)의 역(逆)공작에 의해 밀파됐었다는 사실이 42년 만에 밝혀졌다.
 
  이날 군·경·정 합동작전에서는 북한군 12명 사살, 2명 생포와 함께 공작선을 나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우리 군경은 작전 중 2명이 중상을 입었고 2명이 경상을 입었으나 사망자는 없었다. ‘독 안의 쥐 작전(훗날 Z 작전으로 불림)’으로 불렸던 이 작전에는 중앙정보부를 비롯해, 육·해·공·해병대 작전참모부와 합동참모본부, 치안국이 동시에 참여했다.
 
1979년 4월 20일 당시 치안본부가 발표한 통혁당 재건 사건의 증거물들. 당시 북한의 지령에 따라 통혁당 재건을 기도해 오던 북한간첩 임동규 등 일당 10명이 검거됐다. 1968년 통혁당이 일망타진된 후에도 북한은 지속적으로 통혁당 재건을 시도했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통혁당 사건의 전모를 제주도 무장공작선 격침 4일 후인 8월 24일 공식 발표했다. 중앙정보부 발표에 따르면 당시 통혁당 간부들은 ▲민중봉기 ▲무장집단 유격투쟁을 통한 수도권 장악 ▲북한으로부터 무기수령을 위한 양륙(揚陸)거점 정찰 ▲특수요원 포섭 ▲월북(越北) 등 14개 항목의 공작임무를 띠고 있었다고 한다. 8월 20일 제주도 서귀포로 침투했다 섬멸된 북한의 무장공작선 탑승 생존 공비들에 대한 기자회견도 같은 날 열렸다. 인민군 소속 이승탁(李承卓)과 김일룡(金一龍)은 자신들의 임무에 대해 ‘접선(接線)’이라고만 답했다. 이날 언론에 공개된 이승탁과 김일룡이란 이름은 가명으로 이들의 실명(實名)은 훗날 이관학과 김승환인 것으로 밝혀졌다. 두 사람 모두 인민군 현역 장교들이었다.
 
  이후 판결문과 관련 자료들이 공개되면서 무장공작선은 북한 753부대 소속 공작선으로 김종태 등 통혁당 간부를 구출하기 위해 남파됐던 것으로 밝혀졌다. Z작전에 대해 현재까지 관련 사료들은 통혁당 간부들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정보당국이 간첩선을 섬멸한 것으로 설명해 왔다.
 
1969년 1월 22일 서울형사지방법원 통혁당 결심공판에 나온 피고인들.

  하지만 <월간조선>의 취재 결과 무장간첩선은 애초 남한 중앙정보부 요원이 보낸 A-3 지령(간첩 지령용 방송)을 통혁당 간부들이 보낸 것으로 판단한 북한이 통혁당 간부들을 구출하기 위해 밀파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남한의 유인공작(역공작)에 북한이 걸려든 보기 드문 사례다.
 
  1983년 12월에 있었던 부산 다대포 간첩사건도 1960년대에 귀순했던 간첩을 이용한 역공작 사건이었지만 규모면에서 제주도 서귀포 무장간첩선 사건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부산 다대포 간첩사건은 다대포에 남파간첩을 내려놓고 귀환하려던 간첩선을 격침한 사건으로 1명을 사살하고 2명을 생포했다.
 
  1968년 당시 중앙정보부의 역공작에 의한 무장공작선 검거작전에 참가했던 군·경·정 관계자들은 대다수 작고(作故)하거나 노환(老患)으로 증언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다행히 극소수의 전직 요원이 작전 당시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어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이 밝힌 ‘통혁당 구출시도 북한 무장공작선 유인·섬멸 작전’(Z작전)은 한 편의 첩보영화를 방불케 했다. 전직 요원의 증언과 관련 자료를 토대로 사건을 재구성했다.
 
 
  A-3 간첩 지령 이용해 북한軍 유인
 
무장공작선에 승선, 통혁당의 이문규를 구출하기 위해 남파됐다가 생포된 이관학(오른쪽)과 김승환. 두 사람 모두 인민군 장교였다.

  통혁당 총책격인 김종태가 검거된 시기는 사건 발생 두 달여 전인 1968년 6월이었다.
 
  통혁당 전체를 주도한 핵심 인물은 김종태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북한에선 통혁당 내 엘리트 그룹을 이끌고 있던 서울대 문리대 출신 이문규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친북반미(親北反美) 성향의 월간지 <청맥사> 편집장이었던 이문규는 공군 정훈장교 출신이며, 통혁당 내에 민족해방전선과 조국해방전선을 조직한 인물이다. 1967년 5월에 월북해 북한 노동당에 입당했다.
 
  김종태가 체포된 후 이문규는 경남 지역을 다니며 도피하다 대구에서 검거됐으며, 그의 집을 압수수색하는 과정에서 암호문건이 발견된다. 중앙정보부를 비롯한 정보당국은 도피 상태에 있던 이문규를 북한이 어떻게든 데려가기 위해 작전을 펼칠 것이라 판단, 이문...

월간조선 2010년 10월호 <기사 전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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