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일본에서 ‘일제 만행’ 가르친 한국인 교사들 - 日 중학생에 “이토 히로부미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니…

국제

by 김정우 기자 2010. 11. 25. 14:53

본문

반응형
⊙ 日 학생들, 강제병합·식민지배 등 역사엔 무관심… 한국 가수, 음식, 드라마엔 열광
⊙ 보아·불고기 사진에 들떴다가 위안부·창씨개명·학도병 설명에 숙연해진 수업 분위기
⊙ 日 고교생, “상처를 준 나라와 받은 나라는 서로 망각의 속도가 다르다는 것 깨달아…
    한국에 무척 미안하다”
⊙ 동북아역사재단 주최로 韓ㆍ中ㆍ日 역사교사 20명 교환 방문 수업… ‘제대로 된’ 한국史 전파


하남고 역사교사 박성기씨가 일본 지유노모리 고등학생들에게 일제강점기에 대한 수업을 하고 있다.


이 사진이 뭘 뜻하는지 아시나요. 어린 학생들이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를 암송하는 장면입니다. ‘우리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입니다’란 말로 시작하죠. 못하면 엄벌에 처해졌습니다. 여러분, 혹시 1930년대 당시 일본에서도 이걸 했었나요?”
 
  한국인 역사교사 김성진(金聖鎭)씨의 질문에 일본 중학생들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수업 초반 가수 ‘소녀시대’나 일본 만화 ‘슬램덩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까지의 환하게 웃던 표정은 이내 사라졌다. 19세기 말 일본의 무력 정벌 계획인 ‘정한론’(征韓論)부터 1940년대 민족말살정책에 이르기까지, 70여 년 동안 자행된 일본의 침략 행위에 대한 한국인 역사교사의 수업이 일본 학생들에겐 너무 생소했다.
 
  한국에서 추석 연휴가 막 끝난 지난 9월 24일 오전, 일본 사이타마(埼玉)현 한노(飯能)시에 위치한 대안학교 지유노모리가쿠엔(自由の森學園ㆍ자유의숲학원)의 한 교실에서 독특한 수업이 진행됐다. 경기도 하남시 하남고등학교의 역사교사인 박성기(朴星奇)씨와 김성진씨가 학교를 직접 방문해 중ㆍ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일(韓日) 강제병합 100년, 한일 고교생 인식 비교’란 주제로 강의를 한 것이다.
 
 
 
“한국인의 복수심 때문에 할머니가 한국인을 무서워했다”
 
  90분씩 진행된 두 교사의 수업은 한국 음식, 한류 드라마, 한글 등 가벼운 주제로 시작해 한일 양국 국민의 과거사에 대한 인식 비교를 거쳐 일본군 위안부, 창씨개명, 학도병 등 일제의 잔인한 만행까지 이어졌다. 한국 학생들에겐 모두 익숙한 내용이지만, 이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는 일본 학생들에겐 비사(?史)였다.
 
  수업은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鄭在貞)이 추진한 ‘제2회 역사교사 해외 방문교환수업’의 일환으로 이뤄졌다. 공모를 통해 재단이 선발한 한ㆍ중ㆍ일 교사 20명은 지난 7월부터 3개월 동안 각 학교를 상호 방문해 각 나라의 역사에 대한 인식을 학생들에게 전했다.
 
  박성기씨의 수업 초반은 한글, 불고기, 비빔밥, 월드컵 등 일본 학생들이 흥미를 가질 만한 주제로 시작됐다. 1996년부터 지유노모리와 인연을 맺어온 박씨는 유창한 일본어를 구사했다. 총 23명의 고교 2학년 학생들은 가수 동방신기와 배우 배용준의 사진을 보며 즐거워했다.
 
  수업 중반, 한 도표가 화면에 등장했다. <중앙일보>와 일본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 신문이 공동 실시한 한일 양국 국민 인식 조사 내용이었다. 상대국에 대한 호감도를 묻는 질문에서 한국인은 36.2%가 일본을 ‘나쁘다’(‘좋다’는 18.7%)고 했지만, 일본인은 단 10%가 ‘나쁘다’(‘좋다’는 33%)고 했다.
 
  박씨가 한국인은 일본을 싫어하고, 일본인은 한국을 좋아한다는 조사 결과에 대한 이유를 물었다. 한 학생이 “오래전 서로 대립했던 시기가 있었다”며 모호한 답변을 내놓았다. 태평양전쟁과 청일전쟁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고,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처형 장면이 등장했다. 나무 기둥에 시신이 주렁주렁 매달린 사진이었다. 순간 학생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박씨가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폭압에 그 감정이 수십 년 후인 지금까지 남아 있다”며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폭도 한국인’이란 유언비어가 돌아 많은 분이 희생됐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히라하라 가나(平原加奈) 양은 “당시 수상한 사람을 불심검문해 일본어 발음이 잘 안될 경우 한국인으로 판단해 죽였다는 얘기를 어르신들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다른 여학생은 “한국인의 복수심 때문에 할머니가 한국인을 무서워했다”고 했다.
 
 
 
日 학생들에게 위안부 역사 수업
 
지유노모리 중학생들을 대상으로 일제강점기 수업을 진행한 하남고 역사교사 김성진씨.

  수업은 한국인 차별과 창씨개명을 거쳐 일본군 위안부 문제로 이어졌다. 박씨는 위안부 할머니들이 그린 그림을 보여주며 그들의 가슴 깊은 상처와 아픔을 소개했다. 특히 일본군의 참회 육성 증언이 담긴 다큐멘터리 <고백>의 주요 장면이 상영되자, 일부 학생들은 눈시울을 붉혔다.
 
  이어 1939년 원산에서 기차를 타려고 기다리다 일본 순사에게 맞은 아버지를 본 딸의 기억, 그리고 1933년 학교 입학 때 일본어를 모른다고 했다 일본인 교사에게 맞았던 한 어린이의 기억 등, 사연들이 소개됐다. 사연들은 사실 모두 박씨의 조부모들이 실제로 겪었던 일들이었다.
 
  박씨는 “당시 한국인들이 당했던 핍박은 역사 교과서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혈육과 정신으로 현재까지 이어져 온다”며 “한국인에게 일제강점기는 역사인 동시에 현재진행형”이라고 했다.
 
  수업을 들은 시마마스 유카(島松友香) 양은 “평소 한국에 대해 별다른 생각 없이 지냈는데, 오늘 수업을 듣고 많은 사실을 깨달았다”며 “과거 역사에 대해 일본인이 확실한 사죄를 하지 않은 것에 대해 무척 미안하다”고 했다.
 
  스기모토 가도(杉本廉) 군은 “상처를 준 나라와 받은 나라는 서로 망각의 속도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한국 젊은이들은 여전히 일본을 미워할지 몰라도, 일본엔 한국에 꼭 사죄하려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하세베 아즈사(長谷部梓) 군은 “지금까지 한국에 대해 그저 ‘일본이 한 일에 대해 질질 끌며 치근덕거리는 나라’라고 생각했는데, 수업을 통해 일본이 어떤 일을 했는지, 그리고 한국인이 왜 일본에 호감을 갖지 않는지 알게 됐다”고 했다.
 
  90분 동안의 수업이 끝난 후, 중학교 3학년생들을 대상으로 한 김성진씨의 강의가 진행됐다. 김씨는 한일 양국 국민의 식민지 지배 사죄에 대한 인식과 강제병합에 대한 평가 조사 결과를 소개하며 양국 국민 간에 큰 견해차가 있음을 설명했다. 특히 강제병합에 대해 일본인 60%(한국인은 16.3%)가 ‘나쁜 점도 있지만 좋은 점도 있었다’고 평가한 것에 대해 김씨가 직접 학생들에게 “어떤 점이 좋았다고 생각하는지” 물어봤다. 대답하는 학생이 없자 김씨가 “한국인들도 16.3%가 좋은 점이 있었다고 했는데, 아마 근대적인 시설과 제도가 도입됐기 때문일 것이다”고 설명했다.
 
 
  이토 히로부미를 모르는 日 학생들
 
  아직 중학생이어서인지, 일본 학생이어서인지 한국 식민지 역사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었다. 정한론을 설명하던 김씨가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전혀 안 배우시나요?”
 
  김씨가 한 차례 더 물었다.
 
  “거기까진 아직 배우지 않았습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당한 것은 알고 계신가요?”
 
  “안중근데쓰.”
 
  한류 드라마에 관심이 많아 한국어를 공부하던 학생이 겨우 ‘안중근’이란 답을 했다. 다른 학생들은 여전히 잘 모르는 눈치였다. 김씨는 “한국에선 일본의 식민지 정책과 그 저항의 역사를 상당히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면서 “오늘 한국 학생들이 배우는 역사에 대해 소개하겠다”고 했다.
 
  대한제국(大韓帝國)의 황제인 고종(高宗)의 옥새(玉璽) 대신 외무대신 박제순(朴齊純)의 직인이 찍힌 을사늑약(乙巳勒約)은 원천 무효라는 사실, 그리고 을사늑약이 무효이기 때문에 5년 후 이뤄지는 강제병합 조약도 무효라는 점이 일본 학생들에게 전해졌다.
 
  “여러분, 이 사진은 1926년에 새로 지어진 조선총독부의 모습입니다. 당시 동양 최대의 건물이었다고 합니다. 광복 후 한국정부청사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됐었죠. 뒤에 보이는 파란 기와집이 한국 대통령이 집무를 보는 청와대라는 곳이며, 그 앞쪽은 조선의 왕궁인 경복궁입니다. 한국의 가장 중심부에 세워졌던 셈이죠. 다음 사진을 보시죠.”
 
  화면엔 같은 각도에서 촬영한 현재의 광화문 전경이 펼쳐졌다.
 
  “지금 현재 모습은 이렇습니다. 1995년, 김영삼 정권 당시 ‘역사 바로 세우기 정책’의 일환으로 철거됐습니다. 그리고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경복궁과 광화문을 복원해 놓았습니다.”
 
  학생들은 두 사진 비교에 큰 관심을 보였다. TV와 인터넷을 통해 볼 수 있었던 서울의 중심부에 일본인이 세운 건물이 있었다는 사실에 신기해했다. 김씨는 1910년대 무단통치 시기부터 1930년대 민족말살통치 시기까지 연대별로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일본은 다시 한 번 깊이 사죄해야”
 
20여 분 동안 홀로 교실에 남아 감상문을 작성한 기쓰다시 미카코 양은 “별 관심 없었던 일제강점기에 대해 오늘 제대로 알게 됐다”고 했다.

  “일본군이 한국 민간인에게 자행한 폭력적 통치 모습을 찍은 사진입니다. 독립운동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민간인을 학살하고, 그들의 집을 불태웠습니다. 1910년대 당시 이런 식으로 헌병경찰정치를 펼쳐나갔는데, 이를 일제강점기 제1기, ‘무단통치시기’라고 합니다. 그러자 1919년 3월, 한국인들에 의한 평화적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이를 3ㆍ1운동이라고 부르며, 국경일로 정해 지금도 매년 3월 1일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1920년대 문화통치 시기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민족지에 여백이 있는 사진을 보여주며 시작됐다. 김씨는 “3ㆍ1운동 이후 겉으론 부드러운 통치 방식이었지만, 실제론 기사를 강제로 삭제할 만큼 일제의 기만적 정치기술이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당시 일제는 신문과 도서를 철저히 검열해 압수ㆍ정간ㆍ폐간 등으로 조치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언론인이 추방 또는 투옥됐다.
 
  어린 학생들이 황국신민서사를 암송하는 모습, 태평양전쟁에 강제로 동원된 조선학도병 사진, 내선일체를 홍보하는 포스터, 창씨개명을 위해 줄을 서 있는 한국인의 모습 등 1930년대 민족말살통치 당시 자행된 일제의 만행에 대한 자료도 보여줬다. 마지막 자료는 종군위안부 여성들의 사진이었다.
 
  “전쟁터에 끌려갔던 종군위안부입니다.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공장에 취직할 수 있다’는 말만 믿고 따라온 여성들이었습니다. 전쟁 중에 강제로 임신을 당하는 등 말 못할 고초를 당했습니다. 지금도 생존해 계신 분들이 일본대사관 앞에 매주 모여 일본 측의 사죄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종군위안부 문제는 먼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지금까지 이어진 현실입니다.”
 
  시라이시 가노코(白石鹿子) 양은 “한국과 일본 사이에 이런 역사적 골이 깊었다는 사실을 수업을 듣고서야 알았다”면서 “일본은 한국에 한 행동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이 사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야마자키 세나(山崎世南) 양은 “일본이 어떻게 이런 일을 자행했는지, 한국은 어떻게 당했는지, 수업을 통해 과거의 슬픈 역사를 알 수 있었다”면서 “두 나라의 바람직한 관계를 위해선 서로의 역사를 좀 더 자세히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한국에서 수업한 日 교사들
 
  기쓰다시 미카코(岸田三華子) 양은 수업이 끝난 후 한참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수업에 대한 감상문을 쓰는 시간이었는데, 다른 학생들이 모두 떠난 후에도 20여 분간 자리에 남아 글을 썼다. “과거 일본이 한국에 어떤 짓을 행했는지 몰랐는데, 수업을 통해 제대로 알게 됐다”는 이유였다.
 
  “초등학교 때 친구의 엄마가 한국인이었어요. 함께 김치도 먹고 했는데, 그 가족이 내가 한국에 대해 아는 전부였습니다. 별 관심 없었던 일제강점기에 대해 오늘 제대로 알게 됐어요. 지금은 오랜 세월이 지나 이렇게 평화롭지만, 당시 36년이란 긴 시간 그런 것(식민지배)을 겪는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봅니다. 다시는 한국과 일본 사이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일본 현지 수업에 앞서 지난 7월 16일엔 지유노모리의 교장인 오니자와 마사유키(鬼??之) 씨와 역사교사 후지와라 사토시(藤原敏) 씨가 한국 하남고를 방문해 식민지 역사에 대해 수업을 했다. 당시 일본 고교생이 배우는 역사 내용을 소개한 후지와라 씨는 각 출판사의 역사 교과서를 일일이 비교하며 일본의 식민지 역사 교육에 대해 설명했다.
 
  두 일본인 교사의 수업을 들은 하남고 학생들은 “지금까지 일본에 대해 무조건 그릇된 태도를 갖고 있었는데, 수업을 통해 다르게 생각하는 일본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는 반응을 내놓았다. 박송이(18) 양은 “일본은 나쁘게 여겨지지도, 그렇다고 반겨지지도 않는 그런 나라였다. 하지만 후지와라 선생님의 수업을 통해 모든 일본인이 역사를 왜곡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 변서현(18) 양은 “한국과 일본은 공통의 역사를 많이 가진 이웃나라”라며 “이런 수업을 통해 서로의 관점을 이해하고 양보해서 ‘역사 속 진실’에 가까이 갈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한다”고 했다.
 
  이번 교환수업 전반을 직접 계획하고 주도한 교사 박성기씨는 “좋은 목적으로 행사를 시작하더라도, 한일 양국 간 외교적 문제가 생기면 그 지원이 최소화돼 난처함을 겪는 경우가 있다”면서 “지금 교류의 대상이 되는 이들은 진정으로 한국 편이 돼줄 건전한 시민인데, 무작정 교류 계획을 취소해 그들을 실망시키는 일이 발생하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인터뷰] 오니자와 마사유키 지유노모리학원 교장
 
  “일본 학생이 한국史 제대로 배운 소중한 수업”
 
  지유노모리가쿠엔(自由の森學園ㆍ자유의숲학원)은 일본의 대표적인 대안학교다. 학교엔 시험과 성적표가 없다. 학생들은 교사에게 반말을 한다. 목공, 염색, 제빵 등 수업이 정규과정에 포함돼 있고, 학교 행사에서 히노마루(일장기) 게양과 기미가요 제창도 강요하지 않는다. 오니자와 마사유키(鬼??之) 교장은 이 특이한 학교를 “인생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방법을 배우는 곳”이라고 정의했다.
 
  ―학교가 생긴 배경은 무엇인가.
 
  “이론적 배경은 도오야마 히라쿠(遠山啓ㆍ1909~1979) 교수의 교육 사상이 담긴 <경쟁원리를 넘어서>란 책에서 시작됐다. 지유노모리는 1985년 개교했는데, 당시 점수로 인간을 평가하고 서열화시키는 분위기가 일본 사회에 팽배했다. 도쿄 메이세이(明星)학원의 엔도 유타카(遠藤豊) 원장이 새로운 교육을 위해 학교를 세웠고, 도오야마 교수의 영향을 받은 교사들이 전국에서 모였다.”
 
  ―지유노모리가 다른 학교들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은 무엇인가.
 
  “시험과 성적이 없다는 것이다. 등수는 학생들도 모르고, 교사들도 모른다. 만약 이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점수를 매기려고 한다면 모든 학교 제도와 수업 방식을 바꿔야 한다. 경쟁논리에 기초한 주입식 교육은 이 학교에서 통하지 않는다.”
 
  ―부작용은 없었나.
 
  “시험이 없으니 학생들이 공부를 안 한다(웃음). 하지만 억지로 공부하는 것보다, 스스로 배우는 목적과 이유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그 능력을 키워준다. 스스로 할 줄 아는 사람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
 
  ―졸업생의 성공이 학교의 교육 성과라고 할 수 있는데, 초기 졸업생들은 지금 어떤 분야에 진출했나.
 
  “성공이란 개념 자체가 애매하다. 보통 사람들은 좋은 회사 들어가서 고액 연봉 받는 것이 성공이라고 생각하지만, 지유노모리 학생과 학부모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교사가 돼 학교로 돌아온 졸업생도 있다. 현재 중학교 교장을 비롯해 7명이 이곳 출신 교사다.”
 
  지유노모리는 개교 초기부터 언론의 관심과 일본 내 극우세력의 공격을 받았다. 1990년대 일본 ‘버블 경제’의 붕괴로 학교를 돕던 기업들이 계속 도산했다. 하지만 학교의 ‘자유정신’을 지키기 위해 후원가와 학부모가 10억 엔을 모으는 등 재정적 불안과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학교를 지켜냈다.
 
  ―새로운 교육법에 대한 실험을 25년간 해온 셈이다. 한국에서도 이 방식이 가능할 것이라 보는가.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한국에도 많은 대안학교가 있고 훌륭한 학생과 교사가 있지만, 이런 학교를 만드는 과정은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우리도 수많은 곡절(曲折)을 겪었다.”
 
  ―자의적인 ‘국어(國語)’ 대신 상대적인 ‘일본어(日本語)’란 과목명을 쓸 정도로 국수주의와 거리가 먼 학교다. 이번 교환수업을 통해 지유노모리는 무엇을 얻었나.
 
  “한국 등 이웃나라에 대해 깊이 생각할 기회가 없었던 학생들에게 ‘그들의 역사’가 무엇이고, 또 그 역사가 우리(일본)와 어떻게 연결됐는지 제대로 배운 소중한 수업이었다. 나도 학생들과 함께 두 선생님의 수업을 들었다. 한국인들이 지난 100년의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 그리고 일본인의 관점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생각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인터뷰] 鄭在貞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한국이 유구한 문화와 역사의 나라라는 것 알려준 것만으로 큰 소득”
 
  동북아역사재단은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이나 독도 영유권 주장, 중국의 동북공정 등 한반도 주변국과의 역사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언론에 오르내리는 단체다. 이 재단은 왜곡된 동북아 역사를 바로잡고,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을 도모할 목적으로 2009년 8월 교육과학기술부 산하 법인으로 공식 출범했다. 올해로 출범 3년째지만 업무 성격상 연원은 제법 길다.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 사건이 터진 1982년 정부가 교육개발원 산하에 설치한 ‘한국 바로 알리기 사업’이 재단의 전신이다.
 
  정재정(鄭在貞) 서울시립대 역사학과 교수는 김용덕(金容德) 초대 이사장에 이어 2대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그는 교육개발원 시절부터 인연을 맺고, 20년 넘게 재단 업무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해 왔다. 교육개발원 시절 그는 전 세계에서 발간한 60여 종의 역사 교과서를 수집해 한국에 대해 잘못 기술하거나 왜곡된 부분을 바로잡아 해당 국가에 보내는 일을 했다고 한다.
 
 
  한국史 모르는 中ㆍ日 학생들
 
  ―한ㆍ중ㆍ일 역사문화교사 교환수업 프로그램을 기획하게 된 동기가 무엇인가.
 
  “2001년 일본이 새 교과서를 만들며 또다시 역사를 왜곡하자, 이에 공동으로 대응하기 위해 한국과 일본의 뜻있는 역사교사들이 뭉쳤다. 이들은 매년 양국을 오가며 교환수업을 했고, 그 결과물을 2006년 <마주보는 한일사>라는 단행본으로 엮어냈다. 이해에는 한ㆍ중ㆍ일 교사와 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동아시아 3국의 근현대사를 정리한 책 <미래를 여는 역사>도 나왔다. 이 두 책이 나오기까지 우리 재단은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교환수업은 이 같은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기획된 것이다.”
 
  ―동아시아 3국의 역사 문제 해결이 왜 중요한가.
 
  “한ㆍ중ㆍ일은 아시아는 물론 세계 경제 무대에서 바람개비처럼 서로 얽혀 돌아가는 관계다. 중국은 우리나라 제1의 수입 수출국이고, 일본은 중국의 제1수출국이며, 일본은 우리의 3번째 수입국이다.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세 나라의 관계는 앞으로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는데, 걸림돌로 작용하는 것이 역사 문제다. 교사들의 교환수업이라든가 동아시아사 공동교재 발간 등은 3국의 역사 문제를 적극적으로 풀어가려는 노력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선진적인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이나 일본 학생들은 우리 학생들에 비해 동아시아사(史)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것 같다.
 
  “우리는 학교에서 중국사를 많이 가르친다. 세계사의 3분의 1이 중국 얘기다. 일본사도 근현대는 우리 역사와 겹치는 부분이 많아 페이지마다 등장하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런데 중국이나 일본은 역사 교과서에서 한국을 배제해 왔다. 그 때문에 중국과 일본의 학생들은 한국의 역사를 전혀 모른다. 한국에 삼국이나 고조선이 존재했다는 얘기를 하면 학생들이 ‘한국의 역사와 문화가 그렇게 유구했느냐’는 반응을 보일 정도다.”
 
  ―왜 그렇게 무관심한가.
 
  “내셔널리즘(민족주의)과 관계가 있다. 내셔널리즘은 보통 한 나라가 팽창하거나 성장ㆍ발전할 때 국민을 하나로 통합하는 기제로 등장하는데, 세 나라의 내셔널리즘에는 차이가 있다. 중국은 중화사상, 일본은 침략과 패전 경험 때문에 주변국인 한국의 역사를 외면하거나 왜곡해 왔다.”
 
 
  한국 통사는 필히 이수해야
 
  ―중국이나 일본이 이번 역사문화 교환수업 제의를 쉽게 수락하던가.
 
  “이명박(李明博)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한ㆍ중ㆍ일 세 나라의 관계를 돈독히 하겠다’고 할 정도로 세 나라 우호 증진에 힘쓰고 있고, 일본 역시 하토야마 전 총리가 ‘동아시아 공동체’라는 말을 자주 언급할 정도로 관심이 많아 쉽게 협조가 됐다. 한ㆍ중ㆍ일 공동교과서 얘기만 나오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던 중국 역시 과거와 달리 괜찮은 제안이라며 받아들였다. 다만 사회주의 국가라 수업이 성사되기까지는 복잡한 절차를 밟아야 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교환수업의 효과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나.
 
  “중국 학생들에게 한국이 유구한 문화와 역사를 가진 나라라는 것을 알려준 것만으로도 큰 소득이었다고 생각한다. 일본 학생들의 경우 역사 문제 때문에 한국인은 공격적이라는 고정관념이 있어서 한국 교사들이 자신들을 야단칠 것으로 생각했는데, 부드럽고 자상하게 한국 이야기를 해주니 고마워했다고 하더라.”
 
  ―역사가 고교 1학년 선택과목이 된 것을 두고 역사 교육을 약화시키는 것 아니냐는 말들이 많다.
 
  “고등학교 1학년 과목은 역사뿐만 아니라 전 과목이 선택과목으로 돼 있다. 문제는 학생들이 국어나 영어와 같이 역사도 필수인 것처럼 선택할 것이냐인데, 이건 좀 위험 부담이 따른다. 역사는 사회나 지리 등 다른 과목에 비해 학습량이 많기 때문이다. 연대에 따라 전개되는 사건이나 사람도 많고, 인간 생활에 관련된 상당히 종합적인 사고를 해야 하는 과목이다 보니 기피할 가능성이 많다.”
 
  ―고교 과정에 역사를 배우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
 
  “우리나라 역사 교과서의 경우 중학교 때 전근대 위주, 고등학교 때 근현대 위주로 편성돼 있다. 고교 때 역사를 선택하지 않으면 근현대 한국사는 모른 채 대학에 진학하거나 사회에 진출하게 된다. 적어도 한국사는 통사를 배우고 사회에 나가야 한다. 역사 과목만큼은 필수로 했으면 좋겠다. 1학년 때 한국사 통사를 배우고, 2, 3학년 때 세계사와 동아시아사 중 선택해서 배운다면 세계를 무대로 살아가야 하는 학생들에게 큰 힘이 될 것이다.”
 
  ―자라나는 세대는 동아시아사나 세계사를 알아야 경쟁력이 있다는 말처럼 들린다.
 
  “한국은 GDP의 80% 이상이 무역에서 나온다. 일본의 경우 무역 의존도가 20%밖에 안돼 세계경제가 망해도 큰 피해가 없다. 한국은 세계를 무대로 뛰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나라다. 동아시아사나 세계사를 알아야 균형감을 가지고 열린 자세로 살아갈 수 있다. 가능하면 전부 이수할 수 있도록 유도했으면 좋겠다.”

=

월간조선 2010년 12월호 - http://goo.gl/di5S6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