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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기습 도발을 응징했던 朴定仁 장군 “신라가 대화로 삼국통일 했나” 본문

인터뷰

北 기습 도발을 응징했던 朴定仁 장군 “신라가 대화로 삼국통일 했나”

김정우 기자 2011.01.03 13:53
⊙ 백골 사단장 시절 北 기습사격 도발에 사단 포병 포 사격 명령… 敵 병사 30여 명 사망
⊙ 귀순 북한군, “포격 이후 백골부대는 치가 떨리고 악랄한, 인민군이 가장 겁내는 부대로 알려져”
⊙ 사단장 취임 직후 ‘백골’ 구호 부활 명령, “총검술도 평양 방향, 오줌도 북쪽으로 싸라”
⊙ “北傀는 막가파 살인집단… 우리 아들들이 죽었는데 왜 때리지 못하는가”

金正友

사진: 서경리

“전부 정신머리를 포로 갈겨 버려야 해!”
  
  연평도 포격과 관련해 인터뷰를 하겠다고 하자 수화기 너머 쩌렁쩌렁한 고함이 들렸다. 갈겨 버릴 대상을 굳이 언급하지 않았지만, 안보 불감증에 걸린 국가 리더십을 뜻하는 게 분명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무례하다 하겠지만, 그는 그렇게 말할 자격이 충분히 있었다. 북한군의 사격 도발을 포격으로 응징한 백골부대의 전설, 박정인(朴定仁·82·예비역 준장) 장군이기 때문이다.
 
  2010년 12월 10일 서울 을지로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기개(氣槪)가 남달랐다. 비록 등은 굽었지만, 180cm 거구(巨軀)는 대화 상대를 충분히 압도했다. 인터뷰 중 전화가 걸려 오면 “여보세요” 대신 아직도 ‘백골!’을 외쳤다. 80대에 접어든 퇴역 장성이 아니라 당장에라도 진격 명령을 내릴 것 같은 현역 사단장의 모습이었다.
 
  “반만년 역사 우리 민족이 이 땅에 살아 왔습니다. 1000여 회에 걸친 외침을 당하면서 오늘날까지 지켜 온 조국을 지키는 것은 군인으로서 당연한 임무입니다. 대대장, 연대장, 사단장은 자신이 맡은 지역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대한민국 주권을 지키라고 그 지역에 대한 책임을 준 것이죠.”
 
 
 
“손가락이 넘어오면 손가락을, 발가락이 넘어오면 발가락을 잘라라”
 
  1961년, 그가 전방 연대장을 할 때였다. 군사분계선(MDL)을 적이 멋대로 오가며 아군과 물물교환까지 하고 있었다. 이를 목격한 그가 중대장에게 “적이 넘어오는데 왜 그냥 두느냐”고 물었다. 중대장은 “건드리면 보복하기 때문에 그대로 둔다”고 답했다. 대대장에게도 물었지만 대답은 같았다. 그는 고함을 버럭 질렀다.
 
  “대대장의 총과 무기는 목숨을 걸고 조국의 땅을 지키라고 준 것이다. 적의 손가락이 넘어오면 손가락을 자르고, 발가락이 넘어오면 발가락을 잘라라. 그게 대한민국이 당신을 무장시킨 유일한 이유다. 우리 지역에 침투하는 적은 즉각 사살하거나 포로로 하라!”
 
  그는 후속조치로 연대 내에 특공소대를 편성했다. 소대장은 함병용 중위(육사16기)에게 맡겼다. 인민군은 군사분계선을 또 넘었다. 사단 수색중대가 사격을 실시했는데, 현장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다. 사단장의 명령이 떨어졌고, 그는 특공소대를 현장에 투입해 적 부상병 5명을 생포했다.
 
  이들을 구하기 위해 인민군이 추가 도발을 해 왔다. 그는 확성기를 들고 “전차로 증강한 1개 연대가 대기하고 있으니 올 테면 오라”고 외쳤다. 주춤한 적은 별다른 공격 없이 돌아갔다. 후송된 포로 중 부상자 2명은 숨을 거뒀고, 나머지는 판문점을 통해 북송(北送)됐다. 당시 사단 내에서 ‘문제를 일으킨 박 연대장이 처벌을 받을 것’이란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그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군인 본연의 임무를 수행해 국토를 지켰을 뿐”이란 이유였다. 며칠 후 1군사령부 고문단장인 야브로스키 소장이 그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박 대령, 정말 잘했소. 판문점에 갈 때마다 우리 군이 인민군에게 얻어맞는 사건만 있었는데, 이번엔 통쾌했소. 휴전협정을 위반한 적에 대한 대응은 합법적이오. 축하하오.”
 
  1972년 백골부대 사단장으로 부임한 그는 부대의 기강부터 바꿔 나갔다. 당시 백골부대는 지휘검열 서열이 가장 낮게 나올 정도로 기강이 약해졌다. 백골부대 출신의 1군 사령관 한신(韓信) 장군은 박 장군에게 6·25 전쟁 당시 무적의 전투력을 되살리라고 지시했다.
 
  “사단장으로 부임해 부대에 가 보니 아무도 철모를 안 쓰는 겁니다. 그래서 나부터 썼어요. 지휘지시 1호가 철모 착용이었습니다. 전방에 갔더니 총기를 시건장치로 잠가 놓았습니다. 지휘지시 2호를 내렸죠. 사단 내에선 모두 실탄을 장전하고 다니라고.”
 
  박 장군은 사라졌던 ‘백골’ 경례 구호를 부활시켰다. 부대원들이 남쪽을 향해 총검술 훈련을 하자 “왜 부모가 계신 남쪽을 향해 총검을 휘두르느냐”며 “김일성이 있는 평양을 향해 총검술 훈련을 하라”고 명령했다. 훈련장에서 남쪽을 향해 소변을 보는 장병들을 보고선 당시 소변기로 쓰이던 81mm 탄통 방향을 모두 북쪽으로 바꿨다. “전쟁 역사에서 언제나 최고의 무기는 군인정신”이란 소신을 행동으로 옮겼다.
 
 
 
全 차량 남방한계선으로 돌진, 北 全軍 비상 동원령
 
  1973년 3월 7일 오후 1시20분, 박정인 사단장에게 긴급보고가 올라왔다. 철원 비무장지대(DMZ) 내에서 표지판 정기 보수작업을 마치고 귀대하던 백골부대원을 향해 북한이 기습총격을 가했다는 것이었다. 이 공격으로 황정복 대위, 김윤복 중사, 서휘수 병장 등이 총상을 입었다.
 
  박 장군은 즉시 북한군에 대한 응징책을 준비시키고 현장에 가서 마이크로 적군의 사격중지를 요구했다. “지휘관은 현장에서 진두지휘해야 한다”는 평소 신념에 따른 행동이었다. 그러나 부상자와 소대병력은 여전히 위험지역에 있었고, 적의 사격은 멈추지 않았다.
 
  박 장군은 결단을 내렸다. 관측기를 상공에 띄워 적 벙커 559GP를 표적으로 지정했다. 사단 포병대대를 총동원해 포를 발사했다. 백골 포병부대의 105mm와 155mm 곡사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그날 박 장군은 6·25 전쟁 휴전 이후 북한 지역에 처음으로 포격을 가한 지휘관이 됐다. 부상자를 구출하기 위해 백린 연막탄도 동시에 발사했다. 연막탄에 불이 붙어 지뢰 터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적은 사격을 멈추고 도망하기 시작했다. 군사령관은 “부상자에 구애받지 말고 과감하게 작전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군단장은 “환자 구출을 위해 무리하게 사격하지 마라”는 명령을 내렸다. 지시가 엇갈린 가운데, 박 장군은 가장 합리적인 작전을 선택했다. 적진에 포격을 가하고 부상 장병 후송에 성공하는 것이었다.
 
  그날 밤, 박 장군은 먼저 휴전협정을 위반하고 부대원에게 총격을 가한 북한군과 김일성(金日成)을 제대로 혼내 주기로 작정했다. 사단 내 모든 군차량을 동원해 헤드라이트를 켜고 DMZ 남방한계선 바로 앞까지 돌진하게 했다. 북한은 한바탕 난리가 났다. 우리 군의 야간기습으로 오해한 김일성은 즉각 전군 비상 동원령을 내렸다. 모두 박 장군이 노린 대로였다.
 
  당시 북한군의 피해 상황은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1975년 귀순한 인민군 유대윤 소위의 증언을 통해 그날의 공격이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 밝혀졌다. 유 소위는 “그날 백골 포병부대의 포탄 1발이 정확히 막사에 명중해 인민군 36명이 사망했다”며 “지금도 백골부대는 북한군이 가장 겁내는 부대”라고 증언했다.
 
  사건 12년 후인 1985년 9월 함경남도 도민회 이상순 회장이 남북 이산가족 평양방문단의 일원으로 평양을 방문했을 때 만난 북한 정치보위부 고위 간부는 대뜸 “함경남도 출신에 박가 성을 가진 그 요란한 사단장은 요즘 뭐 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박정인 장군의 고향은 함경남도 신흥이다.
 
 
 
북한은 ‘막가파’ 집단
 
1973년 3월 13일자 <조선일보>에 보도된 북한군 총격 기사.

  백골부대와 대한민국은 크게 승리했지만, 박 장군은 모든 문제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다. 1973년 4월 3일, 그는 사단장 직에서 해임됐다. 충분히 억울할 만도 했지만, 그는 ‘최선을 다했고, 상부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따른다’는 신조를 갖고 있었기에 담담하게 해임 명령을 받았다. 4월 6일 이임식에서 그는 짧게 소감을 밝혔다.
 
  “북진(北進)통일의 성업을 완수하지 못하고 사단장 직을 떠나게 돼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백골사단 장병은 나의 의도를 받들어 선봉사단과 북진통일의 임무를 기필코 완수할 것을 당부하며 백골사단의 건승과 장병의 무운장구(武運長久)를 기원한다.”
 
  이임식에 참석한 장교 가족들은 모두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전속부관 이계복 대위는 “사단장님은 진정으로 패튼 장군을 닮은, 조국을 사랑하는 장군”이라며 울먹였다. 25년 야전군 생활에 남은 것은 철모 4개뿐이었다. 박 장군은 “내가 군생활 하면서 부정축재를 한 것은 이 철모 4개가 전부”라고 했다. 6·25 전쟁 당시 12사단 37연대 1대대장, 2사단 31연대장, 울산특정지역 경비사령관, 백골 3사단장 때 썼던 철모 4개다.
 
  ―1973년 당시 포격 명령을 내릴 때 어떤 마음이었습니까.
 
  “나는 적을 압니다. 괴뢰는 약한 자가 보이면 더욱 짓밟아 누릅니다. 그때 작살을 내지 않으면, 계속해서 덤벼듭니다. 포를 쏜 이유는 간단해요. 지휘관이 부하를 구하기 위해 쏜 겁니다. 그것보다 더 큰 이유가 필요합니까.”
 
  ―해야 할 임무를 수행하고 해임됐는데, 억울하지 않았습니까.
 
  “전혀 억울하지 않았어요. 내가 한 행위에 대해선 내가 책임을 집니다. 다만 북진 통일을 못하고 옷을 벗은 게 아쉬웠을 뿐입니다.”
 
  ―포격 명령을 내린 것을 후회한 적 없습니까.
 
  “일생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습니다.”
 
  ―이번 북한의 연평도 포격에 대한 우리 군의 대응이 효과적이지 못했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군인은 조국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면 됩니다. 사리사욕이 아니라, 부대와 국가를 위해 언제든 목숨 바칠 준비가 돼 있어야 해요. 그게 군과 국가에 혼란을 불러왔다면 깨끗하게 책임지고 옷 벗으면 됩니다. 요즘 군대는 엉망진창이에요.”
 
  ―어떻게 대응했어야 할까요.
 
  “공군 전투기가 떴는데 왜 해안포를 때리지 않았습니까. 해군 함포는 왜 공격을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아들들이 죽는데, 민간인들이 죽는데, 왜 때리지 못합니까. 먼저 휴전협정을 위반한 것은 북한입니다. 저들은 ‘막가파’ 살인집단이에요. 다시는 도발 못하게 모든 화력을 동원해 박살을 냈어야 합니다.”
 
  ―확전에 대한 논란이 제기됐는데요.
 
  “군 체계를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한반도에서 확전은 곧 국제전을 의미합니다. 한미(韓美) 동맹과 복잡한 국제정치를 고려할 때, 이 정도로 확전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확전하면 어떻습니까. 우리는 패전(敗戰)사상이 너무 강해요. 확전하면 진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북한보다 2배의 인구가 있고, 경제력은 수백 배 큽니다. 북한보다 훨씬 부국강병(富國强兵)한 대한민국이 왜 저따위 ‘깡패집단’을 무서워합니까.”
 
 
  “장군은 죽어서도 국가안보에 책임져야”
 
  ―전면전이 발발할 경우, 남북한 모두의 피해가 크기 때문에 국민이 염려하는 듯합니다.
 
  “신라가 대화로 삼국통일 했습니까, 고려가 평화협정으로 귀주대첩에 승리했습니까.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말을 ‘전쟁하자’라고 듣는 참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어요. ‘전쟁만은 안 된다’고 했던 나라는 전쟁으로 망했습니다. 강력한 국방력과 국민의 투철한 의식이 있어야 평화를 지킬 수 있습니다. 생즉사 사즉생(生則死 死則生), 로마의 군사학자 베게티우스(Vegetius)는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후배 군인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군인복무규율에 적혀 있는 대로 하면 됩니다. 이등병부터 장성까지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국토를 지키는 것으로 충분해요. 지휘관은 부대의 승패(勝敗)에 책임을 지는 사람입니다. 특히 장군은 현역이든 예비역이든 죽어서도 국가안보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게 진정한 국군 장성입니다.”
 
  박 장군은 2000년 9월 소위 ‘비(非)전향 장기수’의 북송(北送) 과정에 대해 “간첩과 납치범을 보내는 자리에 국방장관이 직접 환송한 것은 이적행위”라고 토로했다.
 
  “전쟁포로는 제네바 협정에 따라 보내 주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간첩은 시국사범입니다. 대한민국을 전복시키기 위해 침투해 끝까지 반성도 전향도 안 한 이들입니다. 원칙적으로는 사형을 시켜야죠. 그런데 국방장관과 장군이라는 사람들이 나와서 꽃다발을 전달하고 경례를 붙이는 꼴을 보면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전통과 법통을 지키지 않으니 지금 군대가 엉망진창인 겁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그의 방을 나서는데 큰 액자가 눈에 띄었다. ‘우리의 적(敵)’이란 제목에 ‘1. 부정부패 2. 친북좌경세력 3. 적화통일북괴군’이란 글이 적혀 있다. 그 아래엔 ‘지피지기(知彼知己) 자강자립(自强自立)’이란 글귀가 보였다.
 
  박 장군은 “전 국민이 안보 교육을 다시 받아야 한다”며 “우리 민족의 역사적 사명과 대한민국의 통일 임무를 완성해야 한다”고 토로했다. ‘군인다운 군인’의 호소는 힘이 있었다.⊙


월간조선 2011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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