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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연 친일 논란 - 盧 정부는 ‘독립운동가’, 李 정부는 ‘親日행위자’

사회

by 김정우 기자 2011. 5. 17.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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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일야방성대곡' 장지연 친일 논란
盧 정부는 ‘독립운동가’, 李 정부는 ‘親日행위자’

⊙ 국무회의의 서훈 취소 결정에 다음 날 李明博 대통령 승인

⊙ 국가보훈처, 좌파단체의 《친일인명사전》에 위암 등재되자 행안부에 서훈 취소 요청
⊙ “친일반민족진상규명委 조사결과에 따라 심사 결정하겠다”던 국가보훈처, 4년 만에 입장 바꿔
⊙ “국감에서 밝힌 공식입장을 국가보훈처 스스로 뒤엎는 행위는 親日 논란을 떠나 절차상 문제” (한나라당 朴大海 의원)

김정우 월간조선
기자 (hgu@chosun.com)

장지연

독립유공자 서훈을 박탈당한 언론인 위암 장지연

 “아! 원통한지고, 아! 분한지고. 우리 이천만 동포여, 노예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 기자 이래 사천년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홀연히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시일야방성대곡 中)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ㆍ1864~ 1921)의 역사적 평가를 두고 논란이 거세다. 그는 을사늑약(乙巳勒約) 직후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ㆍ오늘 목놓아 통곡하노라)’이란 논설을 써 강압적 조약의 부당함을 전 세계에 알린 인물이다.
 
  정부는 지난 4월 5일 국무회의에서 위암을 포함한 독립유공자 19명에 대한 서훈 취소를 결정했다.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일제를 찬양하는 글을 기고하는 등 친일(親日)행적이 분명하다는 이유였다. 국가보훈처는 이명박(李明博) 대통령이 바로 다음 날인 6일 국무회의 결정을 보고받았다고 밝혔다.
 
  ‘독립운동가’ 위암이 졸지에 친일파로 전락하자 반발이 거세게 일었다. 위암 장지연상(賞)을 수상했던 인사들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쪽만을 부각시켜 사람에 대한 평가를 갑자기 뒤엎는 것은 성숙한 역사관이 아니다”며 “아주 잘못된 결정”이라고 입을 모았다. 《문화일보》는 사설을 통해 “이명박 정부가 단편적인 판단으로 친일 낙인을 찍어 매도하고 있다”며 “사회 일각의 편협하고 빗나간 역사 인식을 그대로 추종하는 행태”라고 현 정부를 비판했다.
 
  반면 한 좌파매체는 “보수신문이 서훈 취소를 ‘논란’으로 여론몰이한다”면서 위암의 친일 의혹을 제기했던 ‘민족문제연구소’ 측과의 인터뷰를 통해 “국가가 결자해지(結者解之) 차원에서 잘못을 스스로 바로잡은 선례”라고 옹호했다.
 
 
  “天長節 祝詩는 《경향신문》의 오버”
 
  ‘장지연 친일 논란’은 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3년 3월 경남의 한 지역신문이 “위암이 《매일신보》에 일본을 찬양하는 글을 연재했다”며 의혹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신문은 부산대 한문학과 강명관(姜明官) 교수와 연세대 사학과 김도형(金度亨) 교수 등의 연구자료를 근거로 “위암은 너무나도 뚜렷한 친일 행적을 갖고 있다”며 “그의 친일은 적어도 1915년부터 1918년까지 꾸준히 이어졌고, 강압이 아니라 자가발전의 결과라는 데서 오히려 더 심각하다”고 주장했다. 이를 보도한 신문사 기자회는 보도 후 매년 해오던 위암 묘소 참배를 “친일행적이 드러났다”며 중단했다.
 
  《미디어오늘》과 《기자협회보》 등의 매체가 기사 내용을 소개하면서 논란이 확대됐지만, 국가보훈처는 2004년 1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위암을 선정했다. 당시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광복회, 민족문제연구소, 독립기념관 인사들이 포함된 심의위원회에서 검토한 결과”라며 “해당 기사가 삶 전체를 훼손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노무현(盧武鉉) 정부는 잇따른 의혹 제기에도 결국 위암을 ‘독립운동가’로 인정했다.
 
  잠잠해진 논란은 ‘한시(漢詩)’로 재점화됐다. 《경향신문》은 2005년 3월 5일자 1면에 “장지연 ‘일왕찬양’ 漢詩 게재”란 제목으로 “위암이 《경남일보》 주필 시절 장기간에 걸쳐 친일행위를 한 사실이 드러났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김경현씨의 주장을 인용해 “1911년 《경남일보》에 일왕 메이지(明治)의 생일인 천장절을 축하하는 한시와 일장기를 싣는 등 앞장서서 일제를 찬양하는 기사를 썼다”고 했다. KBS <시사투나잇>은 “장지연의 친일행적이 문제가 되고 있다”면서 “국사 교과서나 초등학생들이 읽는 위인전도 재검토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천장절(天長節) 축시를 위암이 게재했다는 역사적 증거는 지금까지 발견된 바 없다. 2003년 의혹을 처음 제기했던 지역신문 기자도 “기명이 아닌데다 장지연이 썼다는 기록을 찾지 못했다”며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했다.
 
  《경향신문》은 보도 한 달 후 “장지연 선생의 후손은 ‘장지연 선생이 일왕을 찬양하는 한시와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추모사를 쓴 사실이 없다’고 주장했다”는 반론보도문을 게재했다. 위암의 손자 장재수씨는 ‘친일 한시’ 의혹을 제기한 김경현씨를 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 김씨는 당시 “‘장지연이 일제 찬양 기사를 썼다’거나 ‘기재한 것이 확실해 보인다’고 말한 적이 없는데 신문(경향신문)에서 ‘오버’했으며, 《경남일보》에 일왕 찬양 한시 등이 실린 사실을 적시하면서 주필로 있던 장지연의 동의 없이는 실릴 수 없다는 ‘주필 책임론’을 제기했던 것”이라고 해명했다.
 
  ‘추론’이 덧붙은 친일 의혹은 2005년 5월 출범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진상규명위)’로 이어졌다. 일부 단체들은 위원회에 장지연 친일논쟁 조사를 의뢰했고, 민족문제연구소는 같은 해 8월 공개한 친일파 명단에 위암을 포함했다.
 
  당시 열린우리당 강혜숙(姜惠淑) 의원은 한국언론재단 국정감사에서 “총독부 기관지에 기고하고 총독을 환영하는 한시를 썼다”며 “친일에 가까운 게 아니라 친일”이라고 단정했다. 다음 해 국감에선 장지연 기념사업에 대한 언론재단 지원이 중단된 것에 대해 “부끄러운 역사에 대한 언론재단의 단절 의지로 ‘잘하신 일’”이라고 평했다.
 
위암 장지연이 을사늑약 직후 《황성신문》에 쓴 ‘시일야방성대곡’.

 
  이명박 정부, 좌파 논란 단체의 주장 근거로 서훈 취소
 
2009년 11월 8일 백범 김구 선생 묘소에서 열린 《친일인명사전》 발간 국민보고대회에 참석한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맨 왼쪽).

  같은 당 채수찬(蔡秀澯) 의원은 국가보훈처 국정감사에서 “초반에 독립운동을 하다 말기에 변절한 사람들은 서훈을 받았는데, 선(先)친일ㆍ후(後)독립운동은 포상이 표류됐다”며 독립유공자 심사기준에 문제를 제기했다. 당시 박유철(朴維徹) 국가보훈처장은 “국가의 가장 근간이 되는 정신문제이기 때문에 엄격하게 처리하겠다”고 답했다.
 
  이어 구체적인 조치 계획을 묻는 한나라당 이계경(李啓卿) 의원의 질의에 박 처장은 “민족문제연구소 연구는 그쪽에서 한 것”이라며 “정부단체인 진상규명위에 의해 친일행위자로 확정될 경우, 공적심사위원회 심사 등을 통해 적절한 조치방안을 강구하겠다”는 공식입장을 밝혔다.
 
  진상규명위는 2009년 6월 위암을 친일행위 조사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통지문을 위암장지연선생기념사업회에 보냈다. “여러 정황상 특별법을 엄격히 적용하기엔 다소 미흡하다”는 이유였다. 위암 유족과 기념사업회 측의 이의신청을 정부가 정식으로 받아들인 셈이다. 국가보훈처장이 국감에서 밝힌 절차상 공적심사위원회를 열 명분도 사라졌다.
 
  하지만 민족문제연구소를 중심으로 의혹 제기는 계속됐다. 연구소가 2009년 11월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은 박정희(朴正熙) 전(前) 대통령과 위암 장지연 등 4389명을 친일인사로 수록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인 임헌영(任軒永ㆍ본명 임준열)씨는 1974년 문인(文人)간첩단 사건, 1979년 남민전(南民戰ㆍ남조선 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사건으로 투옥되는 등 친북(親北)적 과거행적이 있는 인물이다. 임씨는 김대중(金大中) 정부 시절 “좌파(左派)의 범죄경력 세탁소”라 비판받은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를 통해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명예회복됐다.
 
  2010년, 이명박 정부의 국가보훈처는 ‘친북좌파’ 논란이 있는 단체의 인명사전을 근거로 위암을 포함한 19명의 독립유공자 서훈 취소를 요청했다.
 
  한나라당 박대해(朴大海) 의원이 행정안전부로부터 받은 ‘독립유공자 서훈 취소 요청’ 공문에 따르면, 국가보훈처는 서훈취소의 배경으로 “민족문제연구소 간행 《친일인명사전》에 독립유공 서훈자 20명 등재”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발표 친일행위자에 독립유공 서훈자 5명 포함(《친일인명사전》 등재자와 중복)”을 명시했다.
 
  박 의원은 “국정감사에서 밝힌 ‘민간단체가 아닌 진상규명위에 의해 친일행위자로 확정한 독립유공자를 심사하겠다’는 국가보훈처장의 공식입장을 국가보훈처 스스로 뒤엎었다”며 “해당 인사들의 친일 논란을 떠나 절차상 중대한 문제가 있다”고 했다.
 
 
  親日 논란 쟁점은
 
  ‘장지연 친일 논란’의 쟁점은 ▲《경남일보》 천장절 축시 게재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친일 논설 기고 ▲총독부 조선물산공진회 선전 및 참가 권유 등이다.
 
  《경향신문》의 보도로 논란이 시작된 ‘천장절 축시’는 위암이 주필로 재직하던 《경남일보》가 1910년과 1911년 두 차례 일왕 메이지의 생일인 천장절을 기념한 한시다. 《경남일보》는 당시 일장기와 오얏문양으로 제호를 장식하고 아래엔 ‘축천장절(祝天長節)’이란 표기와 함께 한시를 게재했다. 내용은 친일이 명백하나, 현재까지 이를 주필인 위암이 게재했다는 증거나 자료는 발견된 바가 없다. 위암은 자신의 한시엔 ‘숭양산인(嵩陽山人)’이란 필명을 달아왔는데, 문제의 한시는 무기명이었다.
 
  오히려 축시 게재가 이뤄지기 한 달 전인 10월 11일에 위암은 매천(梅泉) 황현(黃玹)의 유시(遺詩)를 자신의 해설과 함께 게재했다. 매천은 8월 30일 일제의 합병을 비난하며 자결한 인물이다. 위암의 유시 게재로 《경남일보》는 10일간 정간을 당했다.
 
  ‘위암장지연선생기념사업회’ 이종석(李種奭) 회장은 “정간 후 사설란이 없어지고 위암은 신문사 부설 야학교 한문 교사를 맡는 등 위암의 역할이 크게 축소됐다”면서 “사설도 없는 신문의 주필에게 신문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우는 주장은 비방을 위한 억지”라고 했다.
 
  《매일신보》에서의 활동도 명확하지 않다. 위암이 총독부 기관지에 영입돼 적극적으로 친일활동을 했다는 주장은 완전히 검증되지 못했다. 위암의 자필수기에 따르면, 그는 《매일신보》 측의 초빙을 여러 차례 거절하다 다음과 같은 3가지 조건을 걸고 기고에 응했다.
 
  “첫째, 나를 객례(客禮·손님)로 대접하되, 사원 칭호는 안 된다. 둘째, 기고하는 글은 조선의 일사유사(逸士遺事), 풍속(風俗), 종교(宗敎) 등이고 이것도 또한 여관에서 써서 보내고 신문사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셋째, 사장(위의 항을 지키겠다고 약속한)이 사임할 때, 나도 또한 동시에 그만 쓰겠다.”
 
  위암은 조건대로 1918년 사장 아베 미쓰이에(阿部充家)가 사직하자 기고를 중단했다. 이종석 회장은 “당시 한국인이 발행하는 모든 신문이 강제 폐간된 상황에서 유일한 한글 신문인 《매일신보》에 기고를 할 수밖에 없었다”며 “위암 선생의 기고 목적은 사라져가는 민족문화를 보전하기 위함이었다”고 설명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은 “위암이 1914년 12월 23일부터 1918년 12월까지 《매일신보》에 한시를 포함해 약 700여 편의 글을 실었고, 이 중에는 조선총독부의 시정(施政)을 미화하고 옹호하는 여러 편의 글과 한시가 포함됐다”고 명시했다.
 
  하지만 유족과 기념사업회 측은 “123회 연재된 <조선유교연원>과 191회 연재된 <송재만필(松齋漫筆)> 등 대부분 유교와 역사에 대한 글이거나 국토기행문”이라며 “후에 <조선유교연원>과 후에 《일사유사》로 출간된 <송재만필> 모두 국학사에서 주요한 저술”이라고 했다.
 
 
  “親日 漢詩가 아니라 지독한 풍자詩”
 
이종석 위암장지연선생기념사업회 회장.

  1915년 9월 총독부의 시정 5주년을 기념하는 조선물산공진회가 열리자 위암은 “대개 공진회라는 것은 우리 조선의 유사(有史)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니 실로 공전한후(空前罕後)의 일대 성회(盛會)라 하겠다”는 내용을 《매일신보》에 게재했다. 《친일인명사전》은 “위암이 조선물산공진회를 크게 환영하고 관람을 권장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기념사업회 이종석 회장은 “강제병합 이전부터 지속한 그의 자강론(自强論)의 한 단면일 뿐, 천황제나 일제 식민통치에 대한 미화로 연결하기 어렵다”며 “자강사상은 국권상실의 위기 속에서 지식인들이 갈급하게 추구했던 시대정신”이라고 반박했다.
 
  을사늑약 이후 위암은 ‘자강’이 단시간에 이룩되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 투쟁을 통해 획득되는 것으로 판단했으며, 국가자강의 주체도 정부가 아닌 사회의 단합에서 찾았다. 식민 초기 위암은 개인의 각성, 폐습타파, 식산흥업(殖産興業ㆍ생산을 늘리고 산업을 일으킴) 등을 통해 독립을 이룰 것이라 생각했지만, 1919년 3ㆍ1운동 이후 ‘식산흥업을 통한 자강’ 방법론과 결별하고 비타협주의로 전향했다.
 
  이 회장은 “자강사상에 내재한 우승열패론을 간파하지 못한 위암의 사상적 한계로 거론할 순 있지만, 이를 친일성을 확증하는 근거로 삼을 수는 없다”고 선을 그었다. 또 “위암이 ‘신무천황 제일(神武天皇祭日)’을 맞이해 천황가의 계통을 소개하며 찬양했다”는 비판에 대해선 “일본 소학교 교과서에 등장하는 신화를 소개한 것일뿐”이라며 “일본의 신화를 언급했다는 것만으로 친일의 혐의를 둘 수 있겠지만, 여운형(呂運亨)의 ‘반도이천오백만동포에게 호소함’과 같은 전쟁 참여 선동 글에 비하면 아주 미미한 수준”이라고 반박했다.
 
  《친일인명사전》은 “(위암이) 조선이 굳이 식민지라는 현실이 아니더라도 하나의 독립된 민족이라기보다 일본과 같은 문화를 가진 범민족의 일원이라고 파악했으며, 나아가 지리ㆍ종족으로 하나 된 일본ㆍ중국ㆍ조선의 연합을 주장했다”고 주장했다.
 
  기념사업회 측은 “아시아삼국단결론은 한말 애국계몽 지식인들 사이에 널리 공유되던 사상”이라며 “안중근 의사가 ‘동양삼국평화론’의 열렬한 신봉자였다는 것도 익히 알려진 사실”이라고 반박했다.
 
  《매일신보》 1916년 12월 10일자에 실린 한시에 대해서 양측의 입장은 크게 엇갈린다. ‘환영 하세가와 총독(歡迎長谷川總督)’이란 제목의 한시 내용은 “鞭絲帽影擁車塵 文武紛紛握手新 漢水風煙元慣面 寒梅依舊笑欣欣”이다. 《친일인명사전》은 이를 “채찍이며 모자 그림자에 수레 먼지 가득한데 / 문관과 무관들 분분히 새로 악수 나누네 / 한수의 풍연 원래 낯이 익으니 / 한겨울 매화도 예전처럼 기뻐 웃는 듯”이라고 풀이해 위암이 합병 후 총독으로 승진해 돌아온 하세가와를 환영했다고 주장했다.
 
 
  떳떳하게 사유 공개 안 하는 국가보훈처
 
  이종석 회장은 “총독을 ‘수레먼지 일으키며 달려오는 채찍 모자 그림자’로 그리고 냉담한 선비와 비웃음으로 해석되는 ‘寒梅’, ‘笑’를 쓰는 등 일반적인 축시의 관습에서 현격하게 벗어난 시”라며 “지독한 풍자시의 행간을 제대로 봐야 한다”고 반박했다. 그가 한 한시 풀이는 이렇다.
 
  “채찍 모자 그림자 마차 먼지를 끼고 오니 / (매국)대신과 점령군이 분주하게 새삼스레 악수 나누네 / 한수의 희뜻한 기운은 전처럼 낯이 익으니 / 차게 식어버린 매화는 예전처럼 흔흔하며 비웃는 듯”
 
  《친일인명사전》은 위암의 말년에 대해 “1919년 4월 양산(梁山)을 유람하고 1921년 1월 병을 얻어 음식을 줄이고 술도 끊었지만 같은 해 10월 2일 사망했다”라고 간단하게 서술했다. 하지만 기념사업회 측은 “2009년 4월경 위암이 말년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무장독립투쟁을 하며 일제에 대한 저항 의지를 굽히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문건이 발견됐다”며 일본 영사의 현지보고서를 공개했다.
 
  1921년 5월 5일 재(在)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인 기구치 요시로(菊池義郞)가 본국 외무대신 우치다 야스야(內田康哉)에게 보낸 ‘불령단 관계잡건(不逞團關係雜件) 조선인의 부 시베리아편’에 위암에 대한 내용이 기록돼 있다. 기념사업회에 따르면, 문건은 해외에 거주했던 독립운동가를 발굴하는 데 중요하게 활용되는 공식문서로, 불령단은 일제 통치에 비협조적이거나 반항적인 ‘불순한 조선인’ 혹은 단체를 일컫는 말이다. 문건에 기록된 위암 관련 내용은 이렇다.
 
  “전에 경성 매일신보 기자(기고자의 오기인 듯)였던 자인데 김경천(金擎天)의 초청에 응해서 도래(渡來)한 자(者)이다. 지금 주우찌하(河)에 있으면서 의병을 지휘하고 있다고 한다. 주우찌하에는 의병의 발호(跋扈)가 성(盛)하여 작년(1920년) 12월경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곳에 온 한 조선인을 일탐(日探ㆍ일본 정탐)이라 하여 살해했다는 설(說)이 있다.”
 
  김경천은 러시아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고, 주우찌하는 블라디보스토크 인근 마을로 추정된다. 이 문서를 발굴한 연세대 국문과 박애경 교수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불령단관계잡건은 일본 경찰과 밀정이 일제에 항거한 조선인의 동태를 기록한 보고서”라며 “《매일신보》 ‘기고자’를 ‘기자’로 잘못 쓴 대목이 있으나 이름이 같고 《매일신보》를 언급했다는 점에서 위암에 대한 기록이 틀림없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노령의 위암이 의병 활동을 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선 다른 사료도 필요하다는 견해가 제기돼 진위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월간조선》은 정보공개청구 등을 통해 국가보훈처에 위암의 서훈취소 사유와 근거자료, 서훈취소심사위원회 위원 명단을 요청했지만, 국가보훈처는 ‘정보공개법 제9조’ 등을 근거로 비공개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정보공개법 제9조 5ㆍ6항은 “공공기관이 작성하거나 취득한 정보로 공개하는 것이 공익 또는 개인의 권리구제를 위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정보”와 “공개하는 것이 공익을 위해 필요한 경우로 법령에 따라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가 업무의 일부를 위탁 또는 위촉한 개인의 성명ㆍ직업”은 공개를 권하고 있다.
 

 
  “후손들의 오만함”
 
  정진석(鄭晉錫) 한국외대 언론정보학부 명예교수는 2005년 5월 《월간조선》에 “과거사 규명이 정치투쟁의 도구로 전락했다”란 제목의 기고문을 통해 “‘시일야방성대곡’과 ‘오건조약청체전말’ 등 그의 공적은 언론인으로서만이 아니라 독립운동사의 측면에서도 높이 평가할 일”이라며 “경술국치 이후의 글 가운데 오늘의 관점에서 비판받을 부분이 있다 하여 그가 글과 행동으로 보여줬던 일생의 업적을 폄하해선 안 된다”고 했다. 정 교수의 기고문 중 일부다.
 
  “정략적(政略的) 목적에서 상대방을 매장하고 정치투쟁의 도구로 역사를 악용(惡用)하는 움직임은 경계해야 한다. 글과 인물을 평가할 때에는 시대상황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 나라의 운명이 다했던 100년 전에 살았던 언론인의 행적을 오늘의 상황에 끌어다 놓고 작은 흠집을 찾아내어 국가와 민족에 기여한 큰 업적을 덮어버리면서 더 치열하고 완벽한 삶을 살지 않았다고 매도하는 일을 역사청산이라고 생각하는 풍조가 만연한다면 역사의 또 다른 왜곡이며, 허무주의밖에 남을 것이 없다.”
 
  박지향(朴枝香)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는 “한 사람이 평생을 살면 여러 행동을 하게 되고 이를 역사적으로 판단할 때는 총체적으로 분석해야 한다”면서 “당시 몇 개 문건으로 모든 공헌을 무시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 박 교수는 《어느 친일 지식인의 독백 - 윤치호의 협력일기》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역사가가 사용하는 개념적 표현 가운데 ‘후손들의 오만함’이란 말이 있다. 현재의 잣대를 과거에 들이대고 왜 그런 일을 했느냐고 선대 사람들을 꾸짖고 비난하는 태도를 이른다. 하지만 우리와 마찬가지로 조상도 ‘불확실한’ 상황에서 ‘이익과 손해를 복잡하게 계산’한 결과, ‘대단히 복잡하고 힘든’ 결정을 내려야 했던 인간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측은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월간조선 2011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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