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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북한

김현희 “北 공작원 되자 담뱃재로 얼굴 점까지 빼버렸다”

김정우 기자 2011.07.26 11:40
[역사의 현장] ‘金正日의 아킬레스腱’ 3人의 결정적 증언
김현희 “北 공작원 되자 담뱃재로 얼굴 점까지 빼버렸다”

⊙ 좌파세력의 ‘김현희 가짜’ 의혹 해소한 39년 전 사진… 거짓에 대한 사과는 없었다
⊙ 하기와라, “북한에 죽을 수 있다”며 공개 거부한 요미우리 기자 1년간 설득
⊙ 北 매체들, 南 대표단의 ‘억지’ 혁명박물관 방문에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근거해 “감격해 울었다”고
    허위보도


김정우 월간조선 기자 (hgu@chosun.com)

김현희

김현희 씨. ⓒ 서경리 월간조선 기자

KAL 858기 폭파범, 남북조절위원회 남측 대변인, 일본 공산당 기관지 평양 특파원. 1972년 우연한 스침 한 번으로 세 사람의 연(緣)은 영영 끝날 수 있었다. 그러나 테러와 왜곡으로 흘러간 역사의 수레바퀴는 그들의 인연을 끈질기게 옭아맸다. 그 기구한 운명들이 39년 만에 역사적 만남을 가진 목적은 ‘진실의 회복’ 단 하나였다.
 
  지난 7월 12일, 서울 중구의 한 호텔에서 김현희(金賢姬·49), 이동복(李東馥·74), 하기와라 료(萩原遼·74) 세 사람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동복 북한민주화포럼 대표가 1972년 11월 남북조절위 남측 대표단 일행으로 북한을 방문했을 때 10살 소녀 김현희는 꽃다발을 전해 주기 위해 평양 중화구역 공터에 갔다. 한복을 입고 줄을 선 김현희를 《아카하타(赤旗)》의 하기와라가 촬영했고, 도착한 헬기에서 내린 이동복에게 꽃다발을 건넨 이는 김현희였다.
 
  1987년 11월 KAL 858기 폭파 후 검거된 김씨는 당시 상황을 진술했고, 안기부는 엉뚱한 사진을 확인시킨 후 1988년 1월 수사결과 발표 때 공개했다. 장기영 대표가 북한을 떠나던 날 찍힌 흐릿한 사진으로, 김씨는 당시 행사에 참가하지 않았다.
 
  하기와라 씨는 안기부 발표를 본 후 자신이 그 현장에 있었다는 기억을 되살려 사진을 찾아냈다. 안기부가 지목한 소녀를 골라내 공산당 잡지 《그래프 곤니치와》에 ‘김현희인 듯한 소녀’란 제목으로 공개했다. 북한은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를 통해 “당시 지목된 소녀는 김현희가 아닌 정희선”이라며 화동의 귀 모양을 근거로 공세를 취해 왔다. 하기와라 씨는 추가로 사진을 공개했고, 북한도 반박 자료로 사진을 냈다. 이때 하기와라 씨의 사진엔 가려서 보이지 않았던 ‘진짜 김현희’의 사진이 등장했다. 하기와라 씨는 지루한 ‘조작 공방’에 쐐기를 박았다.
 
  ‘다 끝난 논쟁’은 노무현 정권 이후 다시 등장했다. ‘소설가’, ‘변호사’, ‘과거사위원회’, ‘사제단’ 등 간판을 앞세운 이들이 국정원 내부자료를 근거로 “김현희는 가짜”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KBS, MBC, SBS 등 방송 3사도 다큐멘터리를 통해 해묵은 의혹을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특히 MBC 취재진은 보안사항인 김현희씨의 집에 찾아가 문을 두드리며 인터뷰를 시도했고, 내용을 그대로 방송에 내보냈다. 김씨는 5년 동안 피난생활을 하다 이동복 대표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냈고, 이를 조갑제(趙甲濟) 조갑제닷컴 대표가 《월간조선》에 전문을 공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명백한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허위 의혹 제기에 대해 사과한 이는 현재까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번 ‘39년 만의 만남’이 성사된 데는 조갑제 대표의 역할이 컸다. 그는 “세 사람이 사진을 매개로 만나 세상에 알려진 후 오늘의 이 만남은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4명의 이날 대화를 통해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이 사실로 밝혀졌다.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한다.
 
지난 7월 12일, 39년 만에 한자리에 모인 이동복 북한민주화포럼 대표, 김현희씨, 하기와라 료 전 《아카하타》 평양 특파원,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왼쪽부터). ⓒ 서경리 월간조선 기자
 
  본인의 오보 증명 위해 1년간 설득
 
  하기와라(이하 하): “오늘 긴장해서 안정제까지 먹었다. 공식적으로 후세에 남는 기록이니까 (한국어가 아닌) 일본어로 말하겠다. 당시 안기부 수사발표 이후 조총련이 선전작업을 많이 했다.”
 
  김현희(이하 김): “어릴 때 다른 행사에도 많이 참석했지만, 남한에서 온다고 해 모의 질의응답 훈련 등 교육을 많이 받았다. 아버지가 외교관인데, 남한 사람이 물으면 ‘서평양역 선로공의 딸’이라고 대답하라고 했다. 다 그런 식이다. 그때 인사를 하고 넥타이를 매어 줬는데, 바로 이분(이동복)이었다. 그땐 누군지도 몰랐다.”
 
  이동복(이하 이): “당시 이후락(李厚洛) 공동위원장(당시 중앙정보부장)의 대변인이었다. 그래서 항상 옆에서 같이 움직였다. 장기영, 최규하, 강인덕 등 인사들이 함께 있었는데, 그들과 상관없이 이후락 부장과 같이 있었다. 헬기에서 내릴 때도 부축하다시피 했다. 마중 나온 소녀가 예뻐서 ‘꽃 이름이 뭐냐’고 물었더니 적대적인 시선으로 ‘조선사람이 조선 꽃도 모르느냐’고 했다. 이 해프닝이 기억에 남아 서울에 돌아온 후 여러 강연에서 소개했다. 그 후 김현희씨가 잡혀 와 ‘장기영씨에게 꽃을 줬다’고 했는데, 속으로 ‘그게 아니라 난데’라고 생각했다. 얼마 후 신문과 방송에 가짜라고 나오기에 직접 전화해 ‘장기영이 아니라 내가 김현희의 꽃을 받았다’고 설명했고, 기사로 나왔다. 안기부에서 김씨를 처음 만나 얘기했더니, ‘아, 그렇군요’ 하더라.”
 
  김: “대화 내용이 평생 비밀이었다. 선생님에게도 숨기고 지나갔다. 그래서 더 기억에 남더라. 처음 한국에 와서 수사관들이 (엉뚱한) 사진을 내밀었는데, 워낙 경황이 없는데다 비슷해 보여서 그냥 맞다고 했다.”
 
  조갑제(이하 조): “결정적 사진이 나오게 된 배경을 설명해 달라.”
 
  하: “조총련이 오보를 막는 역할을 했다. 공개하고 얼마 후 《요미우리(讀賣)신문》 기자가 찾아와 ‘하기와라 당신이 틀렸다’고 했다. 물론 제목엔 ‘김현희인 듯한’이라고 썼지만, 기자로서 굉장히 창피했다. 추가 사진을 공개하려고 마음먹었는데 요미우리 기자가 ‘북한이 자기를 죽일 수 있다’며 반대했다. 1년간 설득해 겨우 책으로 공개했다. 2003년부터 또 김현희씨가 (가짜 논란으로) 고생한단 얘길 듣고 요미우리 기자에게 사진이 더 있느냐고 물었다. 수개월 동안 자료집을 찾았는데 컬러 사진이 나왔다. 논란이 된 귀까지 보여 2004년 1월 4일자 《주간 요미우리》에 발표했다.”
 
  조: “그때 법인류학 전공의 도쿄치과대학의 하시모토(橋本正次) 조교수가 ‘소녀와 김현희는 동일인이 틀림없다’고 단정했다.”
 
 
  “한국이 자유민주주의 국가인지 의심 들 정도”
 
  김: “입술 옆 종기 얘기가 함께 나왔는데, 어릴 땐 종기가 아니라 조금 튀어나온 점이었다. 공작원이 되니 ‘표적이 될 수 있다’(얼굴에 특징이 없어야 한다)며 빼버렸다. 당시 수술 시설이 없어 담뱃재를 붙여 뜸 뜨듯이 떼어버렸다. 그래서 자국이 남았다. 무슨 놈의 팔자가 귀와 이것(입술 점) 때문에….
 
  노무현 정부 들어서자마자 귀 사진이 부각됐다. ‘귀가 다르기 때문에 김현희는 가짜고, 김현희가 가짜이기 때문에 KAL기 사건은 조작’이라는 논리였다. 방송사들은 사진 몇 장 중 틀린 사진만 계속 보여주다 끝에 잠깐 정확한 사진을 보여줬다. 나도 그 방송을 보니 가짜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당시 ‘안기부 발표는 대국민 사기극’이었다고 주장한 《KAL 858, 무너진 수사발표》란 책을 보면, (책을 들어 보이며) 표지에도 이렇게 내 사진이 나온다. 뻔히 사진을 올려놓고 교묘하게, 헛갈리게 하는 책이다. 지금도 사과나 처벌은커녕 활개를 치는 그들을 보면, 대한민국이 정말 법이 살아있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인지 의심이 들 정도다.
 
  처음으로 용기 있게 사진을 공개해 준 하기와라 씨껜 정말 감사드린다. 사실 그동안 많이 어려웠다. 2003년 가짜로 몰려 집까지 노출돼 어린 아기 업고 피난살이 나와 지금까지 못 들어가고 있다.”
 
  하: “저도 감사드린다.”
 
  조: “김현희씨는 사건의 주인공, 하기와라 씨와 이동복 대표는 조연으로 나름의 역할을 했고, 나는 기자로서 기사를 썼다. 24년 전 KAL기 폭파사건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재조사 얘기가 나오기에 연락을 시도했는데 안됐다. 그러던 중 2008년 김씨가 장문의 편지를 써서 이 대표에게 전달했다. 이 대표는 내게 보냈고, 모든 사실이 확인돼 《월간조선》에 썼다. 그리고 다음해 (자신에게 일본어를 가르쳤던) 납북 일본인 다구치 야에코 가족과 부산에서 만났다.”
 
  김: “처음에 하기와라 씨가 잘못 지목한 정희선이 나와서 내가 거짓이라며 나머지 소녀의 이름을 댔는데, 나를 ‘김송희’라고 했다. ‘거짓을 밝히러’ 나와서 거짓말을 한 셈이다. 북한이 정희선에게 시킨 것 같다. 참고로 남측 대표단이 돌아갈 땐, 난 나가지도 않았다.”
 
  조: “서로 만난 적이 있나.”
 
  김: “《아카하타》와는 결혼하기 전 한국에서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기자가 누구였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하: “KAL기 사건 직후 출판사에서 ‘김현희씨와 공동으로 책을 집필하면 유명인사가 될 것’이라는 제의가 왔는데, 유명해지는 것보단 진실을 밝히는 게 우선이었다. 또 요청을 한다 해도 안 받아들여질 것 같았다.”
 
  김: “하기와라 씨는 북한에 1년 산 것으로 안다. 느낀 점이 많았을 것 같다. 거짓말 시키고, 서로 감시하고. 외부에서 손님 오면 국가에 손해가 가지 않게 일부러 깨끗한 것 입고 그런다. 그게 북한이다. 나도 그런 생활에 젖어 살았다.”
 
 
  ‘역사적 장면’
 
  이: “당시 방북 일정 중 북측에서 우리를 혁명박물관에 데려갔다. 김일성(金日成) 조부(祖父) 때부터 100여 개의 방을 꾸며 놨는데 모두 가기 싫어했다. 하지만 북측 안내사항을 따른다는 조건이 있어 갈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노동신문》을 비롯한 북한 주요 신문이 ‘남조선 적십자대표단 성원들 혁명박물관 돌아보고 감격해 울다’라고 썼다. 기사에 따르면 이름을 거론하지 않은 어느 대표는 그림 앞에서 ‘내가 살아생전 이런 성지에 오다니…’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바로 북측 대표단에 항의했더니, ‘이 신문들은 공화국 인민들 보라고 만든 신문인데, 왜 남조선 사람들이 시비냐’며 ‘사실과 상관없이 인민들을 사상적으로 올바르게 교육하는 것이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보도’라고 했다. 하기와라 씨가 마지막으로 평양에 간 것은 언제였나.”
 
  하: “1980년도다. 김영남이 공항에 마중을 나와, 한 사람 한 사람과 악수를 나눴다. 김영남의 손이 떨렸는데, 아마 만감이 교차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조: “하기와라 씨가 찍은 사진이 역사적 의미가 있는 것은 KAL기 폭파사건이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김정일이 서울 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해 비행기를 폭파시켰는데, 김현희씨가 바레인에서 앰풀을 깨물고 자살하려다 간발의 차이로 실패했다. 그 후 김정일을 고발하는 증인이 됐고, 미국은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했다. 일본에선 이은혜(다구치 야에코·김현희의 일본어 교사)로 인해 납치자 문제가 제기됐다. 김정일 입장에선 증거 말살(살해)이 어려우니, 종북세력을 동원해 좌파정권과 국정원까지 나서게 했다. 하지만 진실을 밝히는 데 이 사진이 큰 역할을 했다. 기자가 자신의 오보를 증명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한국에선 여전히 종북세력이 강하기 때문에 김현희씨를 괴롭힌 사람들이 건재하다. 그런 면에서 이 만남은 역사적 장면이다.”
 
  이: “김현희씨는 남한에 온 후 언제 처음으로 북한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나.”
 
  김: “여러 요인이 있었다. 북한에서 6·25전쟁에 대해 배울 때 ‘일요일에 침공했다’는 내용을 보고 ‘북침’에 대해 의심이 갔다. 하지만 북한은 의심 자체가 허용이 안되는 곳이다. 조지 오웰(Orwell)의 《1984》에 등장하는 국가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남한에 와서 조사받을 때, 야경도 보고 명동에도 가 봤다. 너무나 자유롭고 삶의 의욕이 넘치는 다른 세상이었다. 어릴 때 외국을 많이 다녔지만, 다른 민족이라 감동을 못 받았다. 하지만 한국은 달랐다.”
 
 
  “북한, 종착역에 왔다”
 
  조: “1989년 봄 안기부 안가에서 인터뷰할 때 김현희씨는 이런 말을 했다. ‘북한에선 히즈 스토리(His Story)를 가르치는데 남한에 와 보니 히스토리(History)를 가르친다’고. 남한에 와서 역사를 배운 셈이다.”
 
  이: “북한이 거의 종착역에 왔다고 생각한다. 폭동 진압 부대를 만든다는 것은 북한 정권의 종말을 스스로 인정하는 행태다. 중국은 북한의 변화에 일조하리라 본다. 김정일이 2000년 이래 7차례 방중(訪中)했다. 특히 2004년부터 빈도가 잦았다. 양측의 발표 내용을 살펴보면,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은 항상 북한의 개혁·개방과 핵 문제에 대한 성의 있는 조치를 요구한다. 매번 똑같다. 김정일은 굉장히 지능적으로 오리발을 내민다. 전적으로 동감한다고 하고선 엉뚱한 짓을 했다. 중국 측 얘기를 주의 깊게 보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2년 전까지만 해도 ‘개혁·개방’이란 말을 쓰지 않고 완곡하게 표현했는데, 작년부턴 아예 개혁·개방 강의를 한다. 이제 변화의 시기가 왔다. 하기와라 씨도 한반도 문제를 긍정적 방향으로 이끄는 역할을 해 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길 바란다.”
 
  김: “나도 그전부터 (하기와라 씨를) 뵙고 싶었는데, 인연이다. 39년 전엔 서로 모르고 만났지만, 용기 잃지 않고 하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조: “하기와라 씨는 명언을 많이 남겼다. 특히 김정일은 공산주의자의 진정한 적(敵)이자, 눈사람’이라고 했다. 눈사람은 집안에서 난로를 피운 주인이 들어와서 불을 쬐라 해도 들어올 수 없다. 난로는 개방과 진실로 볼 수 있다. 여기 모인 세 분은 김정일이란 눈사람을 녹이는 데 큰 역할을 할 사람들이다.”⊙

기사 全文 보기 : 월간조선 2011년 8월호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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