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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암 장지연 서훈취소의 전말 - 확인된 보훈처 심사위원 6명 中 5명이 민족문제硏 《친일人名사전》 편찬위원 본문

사회

위암 장지연 서훈취소의 전말 - 확인된 보훈처 심사위원 6명 中 5명이 민족문제硏 《친일人名사전》 편찬위원

김정우 기자 2011.09.26 10:54
위암 장지연 서훈취소의 전말
확인된 보훈처 심사위원 6명 中 5명이 민족문제硏 《친일人名사전》 편찬위원

⊙ 보훈처, 《월간조선》의 7차례 정보공개 청구에 서훈취소심사委 위원 명단 非공개 고수
⊙ MB정부가 좌파 민족문제연구소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 서훈취소심사委 개최 직전 민족문제연구소와 공문 주고받은 국가보훈처, “서훈취소 관련 공문 접수한 사실 없다”
⊙ 국가보훈처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각 분야 전공 연구자 230여명 참여… 그대로 인용한 것은 아니다”
⊙ “결과적으로 민족문제연구소가 시작부터 끝까지 주도… MB정부는 그대로 인정” (이종석 위암장지연선생기념사업회 회장)
⊙ “친일ㆍ반민족규명委에서 논란된 자체가 親日행위와 무관치 않음을 의미”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김정우 월간조선 기자 hgu@chosun.com

장지연

위암 장지연

6세 때 한자를 익혀 21세 때 향시(鄕試)에 응시하기 시작했다. 몇 차례 낙방 후 10년 만에 진사(進士) 병과(丙科)에 급제했지만, 관직 대신 고향에 머물렀다. 33세에 상경해 아관(俄館)에 파천(播遷)한 국왕에게 환궁을 요청하는 ‘만인소(萬人疏)’ 운동에 참여해 제소(製疏)를 맡았다. 사례소(史禮所) 직원으로 임명돼 1년3개월 동안 관직생활을 한 후 언론계에 뛰어들었다.
 
  38세에 신문사 사장으로 취임해 4년 후 국난(國難)을 당하자 부당한 조약체결에 항의하는 논설을 썼다. 전문(全文)이 영역(英譯)돼 서방 여러 나라에까지 퍼졌다. 신문은 정간당했고, 사장은 감옥행이었고 결국 쫓겨났다.
 
  석방 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교포신문의 주필로 활약했다. 전에 쓴 논설 때문에 폭력배들에게 구타와 감금을 당했다. 경영난으로 신문사는 문을 닫았고, 중국 난징(南京)을 거쳐 상하이(上海)로 향하던 중 괴한의 습격을 받아 중상을 입었다.
 
  고향으로 돌아와 국내 최초의 지방지 주필로 활약했지만, 몸은 병약에 시달렸고 나라는 결국 일제(日帝)에 합병됐다. 주필을 사임하자 총독부 기관지의 초빙을 받았고, 단호히 거절했다. 2달 동안 계속된 회유에 “사원 대신 객례(客禮)로 대하라”는 등의 조건을 걸고 조선의 유교와 역사에 관한 글 700여 편을 기고했다. 말년엔 개인의 울분을 시문(詩文)과 술에 의탁하면서 여생을 마쳤다.
 
 
 
정부, 위원명단과 근거자료 모두 “비공개”
 
   풍운의 격랑기 가운데 희귀한 경력을 지닌 인물, 한말 언론가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1864~1921)의 일생이다. 을사늑약(乙巳勒約) 직후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란 제목으로 쓴 글은 현재까지 명논설로 꼽히고, 광복 후 60여년간 국민 대다수는 그를 독립운동가로 기억하고 있다.
 
  최근 그의 길지 않은 인생을 두고 평가가 엇갈렸다. 정부가 지난 4월 5일 국무회의에서 위암을 포함한 독립유공자 19명에 대한 서훈취소를 결정하면서 논란이 거세게 일었다. 핵심쟁점은 위암이 말년에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기고한 글들의 친일(親日) 여부다.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지만, 정부는 서훈취소 이유에 대해 김황식(金滉植) 국무총리의 짧은 언급만 공개했을 뿐 구체적인 이유나 근거자료를 제시하지 않았다. 독립유공자의 서훈취소를 최초로 의결한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서훈취소심사위원회의 위원장 및 위원 명단도 일절 공개하지 않았다.
 
  《월간조선》은 지난 5월호 <‘시일야방성대곡’ 장지연 친일 논란> 기사에서 정부가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근거해 서훈을 취소했다는 사실을 보도한 바 있다. 당시 입수한 ‘독립유공자 서훈취소 요청’ 공문에 따르면, 국가보훈처는 서훈취소의 배경으로 “민족문제연구소 간행 《친일인명사전》에 독립유공 서훈자 20명 등재”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발표 친일행위자에 독립유공 서훈자 5명 포함(《친일인명사전》 등재자와 중복)”을 명시했다.
 
  《월간조선》은 당시 여러 차례 정보공개 청구 등을 통해 서훈취소 사유와 근거자료, 심사위원 명단을 요청했지만, 국가보훈처는 비공개 결정을 내렸다. ‘위암장지연선생기념사업회’는 “정부가 서훈취소에 대한 근거자료는 물론, 이를 결정한 위원 명단까지 비공개로 결정해 반론 및 반박의 기회를 원천적으로 차단했다”며 항의했지만, 국무총리실, 행정안전부, 국가보훈처 등 관계 기관은 비공개 결정을 유지했다. 정부 내에서 누가 어떤 근거로 서훈을 취소했는지 국민은 전혀 알 수 없었다.
 
  《월간조선》이 최근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행정안전부로부터 받은 서훈취소결정 당일 국무회의 회의록에 따르면, 김황식 국무총리는 “지난해(2010년 11월) 보류 후 국무총리실을 중심으로 절차적·실체적 검토를 했다”며 “독립유공자로서 국민에게 알려진 분들에 대해 ‘추후 친일행적이 발견됐다고 서훈을 취소하는 것은 조심스럽지 않으냐’는 점에서 논의했는데, 지금까지 해 온 실무나 법 정신 등에 비춰 보면 서훈을 취소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판단이 나와서 다시 국무회의에서 결정하게 됐다”고 말했다.
 
  국무총리가 밝힌 ‘절차적·실체적 검토 과정’과 관련, 구체적인 자료 및 절차에 대해 정보공개를 청구했지만, 국무총리실은 “정보 부존재”로 인한 비공개 결정을 내렸다.
 
 
 
‘서훈취소’와 ‘사생활 침해’
 
2010년 12월 21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정부는 위암 장지연 등 독립유공자 서훈취소 결정을 보류했으나, 이듬해 4월 5일 재상정해 취소를 결정했다.
  《월간조선》은 지난 5월호 발간 후 국무총리실, 행정안전부, 국가보훈처에 정보공개 청구, 공문, 인터뷰 등 약 4개월에 걸쳐 총 9차례 관련 질의를 했다. 국무총리실과 행정안전부는 관련 청구를 대부분 국가보훈처로 이관했고, 국가보훈처는 정보공개법 제9조를 내세워 “공개할 수 없다”는 입장을 지켰다.
 
  정보공개법 제9조에 따르면, 공공기관이 보유·관리하는 정보는 공개대상이 되나 “감사·감독·검사·시험·규제·입찰계약·기술개발·인사관리·의사결정과정 또는 내부검토과정에 있는 사항 등으로서 공개될 경우 업무의 공정한 수행이나 연구·개발에 현저한 지장을 초래한다고 인정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정보”(제5호)와 “당해 정보에 포함되어 있는 이름·주민등록번호 등 개인에 관한 사항으로서 공개될 경우 개인의 사생활의 비밀 또는 자유를 침해할 우려가 있다고 인정되는 정보”(제6호)는 공개하지 않을 수 있다.
 
  제6호의 경우 ▲공공기관이 공표를 목적으로 작성하거나 취득한 정보로서 개인의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부당하게 침해하지 않는 정보 ▲공공기관이 작성하거나 취득한 정보로서 공개하는 것이 공익 또는 개인의 권리구제를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정보 ▲직무를 수행한 공무원의 성명·직위 ▲공개하는 것이 공익을 위하여 필요한 경우로서 법령에 의하여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가 업무의 일부를 위탁 또는 위촉한 개인의 성명·직업 등은 공개하도록 돼 있다.
 
  박용상(朴容相) 변호사(전 헌법재판소 사무처장)는 이에 대해 “서훈취소에 관한 사항은 공공기관의 공적인 활동이므로 (위원 명단에 대해) 개인의 사생활을 적용하기 어려우며, 공정하게 위원을 구성했는지 국민이 알 권리가 있다”며 “정보공개법 제9조를 근거로 명단을 비공개로 해야 한다면, 판사는 물론 한국 내 대부분 공공 위원회는 모두 명단을 비공개로 해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부가 공식 위원회의 활동과 주체를 공개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한 사람의 인생 또는 생사(生死)까지 결정할 수 있는 법원도 판사의 신상은 물론 판결문과 재판진행과정을 공개한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등 관련 위원회들이 자유로운 발언을 보장하기 위해 회의록을 대외비로 정하는 경우가 있지만, 위원 명단을 비롯해 결정문까지 비공개로 삼는 경우는 보기 어렵다. 협박과 로비 등을 우려해 공개하지 않는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부족하다. 해당 사항은 모두 그에 따른 법과 위원의 기본 양심으로 해결해야 한다.
 
 
  정부 “親日 여부 ‘객관적 자료’ 통해 확인”
  
  지난 4월 21일, 《월간조선》은 구체적 질의 내용이 담긴 공문을 박승춘(朴勝椿) 국가보훈처장 앞으로 발송했고, 2주 후 회신을 받았다. 다음은 질문과 답변 내용이다.
 
  ―서훈취소와 관련, 2010년 11월 국무회의 반려와 2011년 4월 재(再)상정 사이 국가보훈처가 취한 조치에 대해 설명해 달라.
 
  “‘상훈법’ 제8조 제3항에 따라 행정안전부에 서훈취소를 요청한 것이며, 국무회의 상정은 행정안전부의 소관이므로 이후 별도의 조치가 필요하지 않다.”
 
  ―심사위원회의 결정 내용은 자동으로 국가보훈처의 입장으로, 또 국가보훈처의 입장은 국무회의를 통해 그대로 대한민국 정부의 입장으로 확정되는가.
 
  “심사위원회는 심사 대상자의 행적에 대해 객관적인 자료에 입각해 서훈취소 여부를 심의했으며, 국가보훈처장이 이러한 심의 결과를 감안해 행정안전부에 서훈취소를 요청했다.”
 
  ―국가보훈처장이 지난 2005년 국정감사에서 밝힌 “민간단체(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명단만으로 취소하기는 곤란하며,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의해 친일행위자로 확정하는 사람에 대해 적절한 조치방안을 강구하겠다”는 입장을 번복한 이유는.
 
  “2005년 당시엔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활동을 개시한 상태였으므로 그 활동의 결과를 감안한다는 것이며, 독립유공자 서훈취소는 자료를 제기한 기관의 소속 여부와 무관하게 독립운동 이후 친일행위 여부를 객관적인 자료를 통해 확인하고 이러한 행위가 서훈취소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판단한 것이므로 입장의 번복이라 할 수 없다.”
 
 
 
답변 대신 “정보공개 청구하라”
 
  ―정보공개법 제9조 제1항 제6호의 “공개하는 것이 공익을 위하여 필요한 경우 법령에 의해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가 업무의 일부를 위탁 또는 위촉한 개인의 성명·직업” 등 비공개의 예외사항에 심사위원회가 해당하지 않는 이유는.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위원회의 운영에 관한 정보로 질의내용에 해당하지 않으며, ▲회의의 내용이 대부분 개인의 신상·재산 등 사생활의 비밀과 관련한 정보 ▲회의의 내용이 공개로 인해 외부의 부당한 압력 등 업무의 공정성을 저해할 우려가 있는 정보 ▲회의 참석자의 심리적 부담으로 인해 솔직하고 자유로운 의사교환이 이뤄질 수 없다고 인정되는 정보 등 사유로 ‘비공개 정보’에 해당한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및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등은 모두 위원장과 위원의 명단을 공개했는데, 국가보훈처장이 독립유공자 서훈취소심사위원회 위원 명단을 “개인의 사생활의 비밀 또는 자유를 침해할 우려가 있는 정보”로 보는 이유는.
 
  “위 답변으로 갈음한다.”
 
  답변 중 서훈취소의 국무회의 상정이 “행정안전부의 소관”이란 설명이 있어, 행정안전부에 상훈법을 근거로 관련자료에 대한 정보공개 청구를 했지만, 결국 국가보훈처로 이관돼 전과 같은 근거의 비공개 결정을 통보했다.
 
  문서로 내용이 오가서인지 질문과 답변이 계속 엇갈리고 반복됐다. 직접 만나 들어야겠다는 판단에 지난 5월 24일 국가보훈처를 찾아갔다. 대변인실 담당관은 “공식 보도자료나 답변 자료가 없어 정식 답변을 일절 할 수 없다”며 “담당 부서 책임자에게 직접 질문하라”고 했다. 담당 부서인 공훈심사과 담당관은 “정식으로 절차를 밟고 인터뷰를 요청하라”고 했다. “대변인실을 통한 것은 정식 절차가 아니냐”고 물으니, “갑자기 들이닥치는 식의 취재는 거부한다”며 문서를 통한 취재요청서를 보내라고 했다.
 
  5월 26일 취재요청서와 예상질의 내용을 보냈고, 현충일 행사로 인해 한 차례 연기 후 6월 10일로 담당자 면담 날짜를 확정했다. 그는 1시간여 동안 진행한 인터뷰에서 “정부는 위암을 친일파로 규정한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 후 일제에 협력한 행위가 있기 때문에 서훈을 취소한 것”이라며 “서훈을 취소해도 위암이 한말에 애국계몽운동 등을 한 흔적은 그대로 남아 평가받을 수 있다”고 했다. 주요 질문과 답변 내용이다.
 
  ―위암의 친일행적에 대한 정부의 공식 자료가 하나도 없다. 왜 공개하지 않는가.
 
  “위원 명단부터 의결서 및 자료들을 통째로 청구하니까 공개할 수 없다고 답변한 것이다. 내용의 경우, 위암이 《매일신보》에 기고한 기사는 지금도 분명히 남아 있고, 《친일인명사전》에 날짜까지 자세히 나왔다. 그 부분들을 다 확인해 봤는가.
 
  ―일반인의 상식으로 봤을 때, 전문가가 모여 결정하고 정부가 확정했으면 국민에게 설명을 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정보공개의 경우 위암에 관한 사항이라도 선별해서 공개할 수는 없나.
 
  “그 부분만 따로 빼서 정보공개 청구를 하라. 사무관이 결정할 수 없는 사항이다.”
 
  ―이미 수차례 청구했고, 정식 취재요청을 해서 만난 것 아닌가. 지금 이 자리에서 요청하면 안 되는가.
 
  “근거가 있어야 결재가 가능하다. 다시 요청하라.”
 
 
 
“서훈취소가 친일파 규정은 아니다”
 
이승만 동상 제막식이 열린 지난 8월 25일 서울 남산의 자유총연맹 광장에서 민족문제연구소와 4·19 관련 단체 등 회원 100여명이 동상 철거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국무회의에서 나온 국무총리의 몇 마디 말 외엔 언론에 공개된 내용이 없다. 판결문도 공개하는 시대에 국민에게 모든 정보를 막아야 할 이유가 있나.
 
  “위암의 구체적인 행위에 대해선 알려지지 않은 게 사실이다. 이런 행위는 개인에게 치명적인 내용이 될 수 있다. 항일 언론인으로 알려진 위암은 서훈취소가 됐지만, 그의 항일 활동 부분은 그대로 남아 있다. 하지만 독립운동 때문에 준 서훈을 후에 그와 배치되는 행위가 밝혀져도 그대로 두는 것은 옳지 않다. 서훈취소가 친일파 규정은 아니다.”
 
  ―배치되는 행위를 했느냐가 논란인데, 정부의 입장이 없으니 논란 자체가 성립되지 않고 있다.
 
  “구체적인 친일행위 자료가 공개되면, 오히려 친일파로 매도될 수 있다.”
 
  ―친일파가 확실하면 친일파로 규정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친일파와 다르다. 이분들은 친일파가 아니다. 독립운동을 했는데, 이후 일제에 협력한 행위가 있어 서훈을 취소한 것이다. 내부 과정에 있는 부분을 제외하고 사실에 관한 것은 정보공개 청구를 하라.”
 
  ―서훈취소를 결정한 심사위원 명단은 왜 공개하지 않는가.
 
  “심사위원회는 공적뿐 아니라 공적 외 전(全) 생애를 논의한다. 서훈이 안된 사람의 경우 심사위원이 공개되면 민원을 제기하는 등 여러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 공정한 심사에 장애가 된다.”
 
  ―법원의 판사는 물론 정부 산하 각종 위원회는 위원 명단을 당연히 공개한다.
 
  “경우가 다르다고 본다. 판사는 당사자와 대면해 질문과 답변을 하면서 판단한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한시적 기구로 개인의 생애 전체를 판단하는 게 아니라 개별 사건에 대해 논의한다.”
 
  ―명단이 알려지면 심사에 어떤 장애가 있는가. 협박이나 로비를 말하는 건가.
 
  “그런 걸 직접 말할 순 없다.”
 
  ―결정과정에서 유족 등의 이의제기 절차가 있는가.
 
  “현재까진 없다. 대신 심의 전 《친일인명사전》의 해당 내용을 복사해 공문으로 보낸 후 소명하라고 안내했다.”
 
  ―결과적으로 《친일인명사전》과 유족의 소명자료를 기초로 판단한 셈인데, 민간단체의 《친일인명사전》 발간은 자유지만, 정부에서 이를 기초로 심사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친일인명사전》만 본 것은 아니다. 심사위원회를 별도로 구성해 두 차례 심사한 이유도 제기된 자료들과 소명자료를 두고 종합적으로 판단하기 위해서다. 어떻게 《친일인명사전》을 놓고 심사할 수 있나.”
 
 
  “1차 결정은 국가보훈처장의 몫”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한 민족문제연구소가 국가보훈처에 문서 등으로 서훈취소와 관련한 검토 등을 요청한 적이 있는가.
 
  “이번 서훈취소와 관련해서 문서가 오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민족문제연구소와 같은 민간단체에서 또 자료를 만들면 재심사를 할 수 있나.
 
  “그럴 수 있다. 근거자료가 제시되면 또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독립유공자란 큰 틀이 있고 그 영예가 있는데, 그 부분과 반대되는 친일 근거자료가 제시됐다고 하면 가만히 있는 게 공무원인가.”
 
  ―지난번 질의서에서 서훈취소 경위에 대해 “국가보훈처장이 심의결과를 ‘감안해’ 행정안전부에 서훈취소를 요청했다”고 답했다. 결국 서훈취소 요청이 심사위원회가 아니라 국가보훈처장의 권한이라는 뜻인가. 심사위원회의 심의결과와 달리 국가보훈처장이 요청하지 않을 수도 있는가.
 
  “그렇다. 전문적인 판단을 위해서다. 국가보훈처장이 모든 사안을 심사할 순 없다.”
 
  인터뷰 후 다시 문서를 작성해야 했다. 국가보훈처의 답변에 따르면 서훈취소에 대한 1차적 책임과 권한은 국가보훈처장에게 있으므로 박승춘(朴勝椿) 국가보훈처장 또는 김양(金揚) 전(前) 국가보훈처장에게 취재요청서를 보냈다. 얼마 후 “궁금하신 사항은 공훈심사과 포상담당 사무관 ○○○에게 문의하시면 친절하게 답변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란 답변이 돌아왔다.
 
  같은 날 서훈취소 자료와 관련해 절차상 정보공개 청구가 필요하다고 한 담당관의 답변에 따라 “사생활의 비밀과 관련한 자료, 업무의 공정성을 저해할 수 있는 정보, 솔직하고 자유로운 의사교환이 이뤄질 수 없다고 인정되는 정보”를 제외한 사항 중 최대한 원문(原文)이나 전문(全文)에 가까운 자료를 공개할 것을 청구했다.
 
  국가보훈처 측은 “관련 자료에 대한 정보공개 여부를 신중하게 검토하기 위해” 한 차례 기간을 연장한 후 7월 4일 부분공개 결정을 통지했다. “심사위원 명단 및 심의의결서 등 서훈취소 자료는 (전과 같은 법적 근거로) 공개할 수 없다”면서 서훈취소와 관련한 친일행적 자료는 별도 우편으로 송부했다고 밝혔다.
 
 
  석사학위 논문도 근거자료에 포함
 
  며칠 후 행적 관련 서류가 도착했다. 연구논문, 단행본, 《매일신보》 번역문 등 총 10편으로, 제목은 ▲<장지연 시세계의 변모와 사상>(강명관·1987년) ▲<장지연의 변법론과 그 변화>(김도형·2000년) ▲<위암 장지연의 언론활동과 시세계에 관한 일고찰>(임동석·2002) ▲《부산·경남 언론사 연구》(김대상·1981년) ▲《언론조선총독부》(정진석·2005년) ▲《식민지 조선과 매일신보:1910년대》(수요역사연구회·2003년·2편) ▲《일본언론계와 조선》(강동진·1987년) ▲《근대한국 명논설집》(신동아편집실·1979년) ▲장지연 선생 친일행적 관련자료(《매일신보》 번역문) 등이다.
 
  위암의 서훈취소와 관련해 정부가 공개한 최초의 자료들이다. 하지만 이들 중 ‘위암의 친일행적’에 대해 구체적으로 명시한 자료는 부산대 한문학과 강명관(姜明官) 교수와 연세대 사학과 김도형(金度亨) 교수의 논문 등 극히 일부였다. 이들 논문도 2003년 경남의 한 지역신문이 친일 의혹으로 논란을 일으킬 때부터 근거로 삼은 자료들이다.
 
이종석 위암장지연선생기념사업회 회장.
  《월간조선》은 자료 전체를 위암장지연선생기념사업회에 보내 의견을 제시해 달라고 요청했다. 기념사업회의 이종석(李種奭) 회장은 “강명관 교수와 김도형 교수의 논문은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졌고 반론도 충분히 제기했으니 그렇다 쳐도, 다른 자료들은 위암에 대한 언급 자체가 없거나 엉뚱한 내용만 가득한 것이 많았다”고 했다.
 
  이 회장의 반론에 따르면, 김대상(金大商) 전 부산 MBC 이사의 《부산·경남 언론사 연구》는 《경남일보》에 대해 친일 성향 대신, 위암이 게재한 매천(梅泉) 황현(黃玹)의 유시(遺詩) 게재로 정간당하는 내용을 소개했다. 수요역사연구회의 논문 두 편은 《매일신보》를 통한 일제의 언론탄압과 조선물산공진회를 통한 일제의 식민지배를 심층 연구했지만, 위암의 논설에 대한 언급 자체가 없다. 강동진(姜東鎭) 전 건국대 교수의 《일본언론계와 조선》도 위암에 대한 내용이 없다.
 
  이종석 회장은 “굳이 석사학위 논문을 자료에 포함시킨 것도 이상하고, 나 자신이 《동아일보》 근무 당시 직접 편집에 참여한 《근대한국 명논설집》은 왜 넣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자료에 포함된 《언론조선총독부》를 쓴 정진석(鄭晉錫) 한국외대 명예교수는 “위암의 친일 논란에 대해 분명히 반대하는 사람의 글까지 인용해서 역이용을 하는 의도를 모르겠다”며 “책에서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내용을 소개하고 논란을 간략하게 덧붙이긴 했지만, 친일행적 자료로 쓰일 내용은 결코 아니다”고 반박했다.
 
 
  “미시적 잣대로 규정 말라”
 
국가보훈처 서훈취소심사위원회에 참여한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전 국사편찬위원장).
  책에 등장한 논란 내용은 강명관 교수의 논문을 인용해 “《매일신보》에 연재한 그(위암)의 글 가운데는 친일적인 내용이 들어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고 기록한 것이 전부다. 정 교수의 설명이다.
 
  “친일 논란에 자주 거론했던 1917년 6월 8일자 ‘봉송이왕전하동상(奉送李王殿下東上)’의 경우, 기사 게재 이튿날 바로 글쓴이가 위암이 아니라고 정정했습니다. 이게 위암의 진면목입니다. 보통 기사도 아니고 크게 낸 글인데 정정보도를 했다는 것은 당시 위암이 크게 반발했음을 의미합니다. 《매일신보》에 기고할 당시 어떤 상황과 조건이었는지는 여러 연구를 통해 충분히 입증됐어요. 인물을 전체적으로 평가하지 않고, 미시적인 잣대로 규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이종석 회장은 “결국 기존에 공개된 논문 외 결정적 자료가 추가되지 않은 상황에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을 근거로 서훈 취소 결정을 내린 셈”이라며 “기념사업회 차원에서 친일ㆍ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때부터 끊임없이 친일 의혹에 대한 구체적인 반론을 제기해 왔는데, 서훈취소심사위원이나 국무위원들이 이를 제대로 본 적은 있는지 의문”이라고 했다.
 
  논란의 쟁점은 다시 《친일인명사전》으로 돌아왔다. 《월간조선》은 지난 5월호에서 ▲《경남일보》 천장절(天長節) 축시 게재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친일 논설 기고 ▲총독부 조선물산공진회 선전 및 참가 권유 등을 주요 쟁점으로 두고 민족문제연구소 측과 기념사업회 측의 입장을 정리해 보도한 바 있다.
 
  ‘천장절 축시’는 위암이 주필로 재직하던 《경남일보》가 일왕 메이지(明治)의 생일인 천장절을 기념한 한시다. 내용은 친일이 명백하지만, 주필인 위암이 게재했다는 증거나 자료가 없는 무기명 한시로 밝혀져 친일 여부 논란에서 사실상 제외됐다.
 
  이종석 회장은 “정간 후 사설란이 없어지고 위암은 신문사 부설 야학교 한문 교사를 맡는 등 위암의 역할이 크게 축소됐다”면서 “사설도 없는 신문의 주필에게 신문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우는 주장은 비방을 위한 억지”라고 했다.
 
  현재 가장 큰 쟁점이 된 《매일신보》 논설의 경우, 위암의 초기 활동부터 친일 의도가 명확하지 않다. 위암은 《매일신보》 측의 초빙을 여러 차례 거절하다 ▲객례(손님)로 대접하되, 사원 칭호는 거부 ▲조선의 일사유사(逸士遺事), 풍속, 종교 등에 대해 기고하며, 신문사에 가지 않고 여관에서 써서 보냄 ▲사장(위의 항을 지키겠다고 약속한)이 사임할 때, 본인도 동시에 중단함 등 3가지 조건을 걸고 기고에 응했으며, 모두 지켰다.
 
 
  논란의 쟁점
 
1921년 5월 5일 재(在)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인 기구치 요시로(菊池義郞)가 본국 외무대신 우치다 야스야(內田康哉)에게 보낸 ‘불령단 관계잡건’은 위암을 불령(저항) 행위자로 기록했다.
  《매일신보》 1916년 12월 10일자에 실린 한시 ‘환영 하세가와 총독(歡迎長谷川總督)’은 양측의 해석이 크게 엇갈린다. “鞭絲帽影擁車塵 文武紛紛握手新 漢水風煙元慣面 寒梅依舊笑欣欣”이란 원문을 두고, 《친일인명사전》은 위암이 합병 후 총독으로 승진해 돌아온 하세가와를 환영했다고 주장한 반면, 기념사업회 측은 “총독을 ‘수레먼지 일으키며 달려오는 채찍 모자 그림자’로 그리고 냉담한 선비와 비웃음으로 해석되는 ‘寒梅’, ‘笑’를 쓰는 등 일반적인 축시의 관습에서 현격하게 벗어난 시”라며 “지독한 풍자시의 행간을 제대로 봐야 한다”고 반박했다.
 
  위암의 말년에 대한 논란도 마무리되지 않았다. 기념사업회 측이 공개한 1921년 일본 공식문서(불령단 관계잡건ㆍ不逞團關係雜件) 기록에 따르면, 위암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의병을 지휘하는 등 ‘불령’(저항) 행위를 한 흔적이 남아 있다. 문건에 기록된 위암 관련 내용은 이렇다.
 
  “전에 경성 매일신보 기자(기고자의 오기인 듯)였던 자인데 김경천(金擎天)의 초청에 응해서 도래(渡來)한 자(者)이다. 지금 주우찌하(河)에 있으면서 의병을 지휘하고 있다고 한다. 주우찌하에는 의병의 발호(跋扈)가 성(盛)하여 작년(1920년) 12월경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곳에 온 한 조선인을 일탐(日探ㆍ일본 정탐)이라 하여 살해했다는 설(說)이 있다.”
 
  김경천은 러시아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며, 주우찌하는 블라디보스토크 인근 마을로 추정된다. 불령단 관계잡건은 일본 경찰과 밀정이 일제에 항거한 조선인의 동태를 기록한 보고서로, 해외에 거주했던 독립운동가를 발굴하는 데 활용되는 공식문서 중 하나다. 국가보훈처도 해당 문건을 독립유공자 포상 근거 중 하나로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위암의 친일행적을 주장하는 측에선 입증할 만한 근거가 부족하다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가보훈처는 위암의 친일행적 근거로 논문자료와 함께 《매일신보》 기고문 27편을 첨부해 보내왔다. 대부분 수년 전 친일행적 논란 당시 언급됐던 내용들로, 새롭게 제기된 의혹은 없었다. 윤전기 증설에 대한 의례적 축하 기사, 위암이 객경으로 초빙됐다는 사고(社告), “조선의 나쁜 구습(舊習)을 개혁하자”는 취지의 글, 실사구시(實事求是)와 신(新)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한 글, ‘아시아 먼로주의’에 대해 예견한 글 등 친일 행적으로 확정하기엔 모호한 표현과 글이 많았다. 위암이 쓰지 않은 글을 위암이 썼다고 표기해 《매일신보》가 다음 날 정정보도를 한 바 있는 ‘봉송이왕전하동상’도 포함돼 있었다.
 
 
  6명 중 5명이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과 同名
 
  수차례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요청한 심사위원회 명단은 ‘엉뚱한’ 곳에서 발견됐다. 포털 ‘구글(Google)’을 통해 위암 관련 내용을 찾던 중 문서등록 대장이 검색됐고, 서훈취소 담당 부서인 공훈심사과의 문서 제목에 연결돼 있었다. 2010년 문서대장 전체를 받아 분석한 결과, 서훈취소심사위원회 위원 명단 일부가 밝혀졌다. 국가보훈처는 내부규정을 근거로 비공개 원칙을 내세웠지만, 홈페이지에선 명단 일부를 직접 게재한 셈이다.
 
  국가보훈처 11월 문서대장에 따르면, ‘독립유공자 서훈취소 제1심사위원회’의 위원으로 이○○, 장○○, 김○○이란 3명의 이름이 나열돼 있고, 제2심사위원회의는 이만열, 배○○, 김○○이란 이름이 명시돼 있다. 이만열(李萬烈) 숙명여대 명예교수(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의 경우 2007년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독립유공자공적심사위원장’을 맡고 있다고 밝혀진 바 있다. 현재 각종 인물DB에도 그의 현 직책을 그대로 명시하고 있다.
 
  국가보훈처는 지난 4월 16일자 《조선일보》 인터뷰와 6월 10일 《월간조선》 인터뷰를 통해 “서훈취소 결정을 독립유공자 제1공적심사위원회 제2분과(총원 11명)가 1심을, 제2공적심사위원회(총원 17명)가 2심을 맡았다”고 밝힌 바 있다.
 
  문제는 공개된 총 6명 중 이만열 교수를 비롯한 총 5명이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단과 동명(同名)이란 점이다. 이 교수는 2001년부터 2003년까지 초대 편찬위원장을 역임했고, 다른 4명은 부위원장, 편찬위원, 상임위원 등으로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제1공적심사위원회의 타 분과로 활동한 인사들 상당수가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단에 포함돼 있었다. 동명이인을 감안하더라도 상당히 높은 비율이다.
 
  이만열 명예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우선 취재의도를 밝힌 후 약 20분간 대화를 나눴다. 이 교수는 서훈취소 이유와 과정에 대해 논리적인 설명과 함께 개인적 충고도 덧붙였다. 또 자신의 입장은 지난 4월 《한국일보》에 쓴 시론에 정리했으니 참고하라고 했다. 하지만 통화가 끝날 무렵 기자의 타자 소리를 듣더니 “나는 취재에 응한 적 없다. 기사에 쓰지 마라”며 전화를 끊었다.
 
  이 교수는 《한국일보》 기고문에서 “약점이 노출되었다 하더라도 (위암) 선생에 대한 존경심은 개인적으로 얼마든지 유지할 수 있다”며 “경계해야 할 것은 그런 존경심이 객관적으로 입증된 약점까지 감싸려고 하는 유혹을 받을 때”라고 설명했다. 또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대상 제외) 결정은 선생에게 ‘친일행위’가 없었다는 것을 결정한 것은 아니다”라며 “위원회에서 논란되었다는 것 자체가 오히려 그가 ‘친일행위’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이 교수는 글에서 자신이 심사위원이란 사실은 밝히지 않았다.
 
  서훈취소 심사에 참여한 다른 한 인사는 “그쪽(국가보훈처)과는 관련이 없고, 그 부분에 대해선 할 말이 없다”며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문서대장엔 민족문제연구소와 국가보훈처가 주고받은 문건에 대한 기록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2010년 10월 5일 국가보훈처는 민족문제연구소장에게 ‘독립유공 공적심사자 행적조사 의뢰’ 공문을 보냈고, 같은 달 25일 회신을 받았다. 다음날 국가보훈처는 ‘독립유공자 공적 흠결관련 자료조사 의뢰’란 공문을 보냈고, 11월 8일 이에 대한 회신을 접수했다. 위암 등 19명의 서훈을 취소한 심사위원회 개최 공문은 다음날인 9일에 발송됐다. 해당 공문은 모두 규정상 비공개 대상이다.
 
 
  “하나의 정권, 두 개의 결정”
 
  “서훈취소와 관련해 민족문제연구소의 의견 또는 입장 등을 구두, 공식문서로 접수한 사실이 없다”고 답변한 국가보훈처의 공식 입장과 달리, 홈페이지에 내건 문서대장은 양측 공문이 오간 사실을 버젓이 공개하고 있다. 국가보훈처의 답변이 사실이라면, 해당 공문은 이번 서훈취소에 대한 내용이 일절 없어야 한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소장 임헌영(任軒永·본명 임준열)씨가 1979년 자생적 공산주의 지하조직인 남민전(南民戰·남조선 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 사건으로 투옥되는 등 ‘친북(親北)’ 논란이 있는 단체다. 임씨는 김대중(金大中) 정부 시절 “좌파(左派)의 범죄경력 세탁소”라고 비판받은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를 통해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명예회복됐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위원으로 참여했던 한 인사는 “위원 11명 중 진보좌파 성향이 강했던 위원이 훨씬 많았음에도, 당시 위암 장지연 건은 압도적 다수가 조사 대상자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했었다”며 “같은 정권 시기에 국가기관 내에서 서로 의사가 불일치한 것에 대해 결국 ‘좌파세력에 놀아난 MB정부’란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고 했다.
 
  지난해 친북·반국가행위자 명단 발표를 주도했던 고영주(高永宙) 국가정상화추진위원장(변호사)은 “위암 장지연의 친일 여부를 떠나 국가보훈처와 정부가 이러한 문제에 대해 얼마나 무관심한지 위기의 심각성을 보여준다”며 “MB정부가 좌파세력의 전략전술에 무방비상태로 놀아난 사례”라고 비판했다.
 
  윤병석(尹炳奭) 인하대 명예교수는 “을사오적(乙巳五賊)이나 정미칠적(丁未七賊)같이 적극적으로 앞장서거나 조국 문화를 말살하려 한 자들이 진짜 친일파”라며 “친일 평가를 할 땐 어떤 기준보다 명확한 잣대를 가지고 누가 봐도 뚜렷한 사람을 가려내야 한다”고 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원로 사학자는 “이만열 교수 등 명망 있는 학계 권위자 다수가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참여했다고 무조건 좌파인사라 규정지을 순 없지만, 이번 위암에 대한 서훈취소는 분명 잘못된 것”이라며 “정부기관이 정치적인 논란에 휘말린 느낌을 준다”고 밝혔다.
 
 
  “再논의 의향 없다”
 
국가보훈처가 위암 장지연 유족에게 보낸 소명자료 제출 안내 공문과 서훈 및 유족 등록 결정 통보 공문.
  《월간조선》은 “서훈취소 심사위원회 위원 중 상당수가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참여했고, 정부가 《친일인명사전》을 공식 문서 격으로 활용한 것을 두고 ‘좌파단체에 놀아난 MB정부’란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는 내용에 대한 국가보훈처의 공식 입장을 묻는 질의서를 보냈다.
 
  국가보훈처는 “심사 대상자의 일제시기 활동 당시 작성한 자료와 유족의 소명자료 등을 근거로 심의한 것”이라며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동일한 자료가 수록됐다고 해서 이를 그대로 인용한 것은 아니다”라고 답했다. 또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230명 이상의 각 분야 전공 연구자가 참여했다”고 주장했다. 답변서는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 상당수가 서훈취소 심사에 참여한 사항에 대해선 부정하지 않았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위암을 조사대상에서 제외한 것과 관련, ‘정부의 일관성이 부재한 행위’란 비판이 제기된 것에 대해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위암의 친일행위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며, 단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을 적용하기에 다소 미흡하다는 이유로 대상자에서 제외한 것”이라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와 독립유공자의 서훈 및 서훈취소는 그 목적과 취지가 상이하므로 결정 내용도 다를 수 있다”고 밝혔다.
 
  “일종의 ‘국가보훈처 내부 자문위원회’에 의한 국가보훈처장의 의사가 특별법으로 구성된 정부위원회의 결정보다 우선하는가”란 질문엔 “위 답변으로 갈음한다”는 답변이 돌아왔고, 국가보훈처가 《친일인명사전》을 객관적인 자료로 인정 또는 판단하는지 여부에 대해선 “서훈취소 심사는 일제시기 작성된 자료를 근거로 심사한 것이며, 《친일인명사전》의 객관성 여부는 심사와 무관하다”고 답했다.
 
  “김양 전 국가보훈처장이 결정한 사안에 대해 박승춘 현 국가보훈처장이 이념편향 논란이 없도록 새로운 심사위원회를 구성해 재논의할 의사가 있는지”에 대해선 “재논의 의향이 없다”고 했다.
 
 
  “일제에 박해받고 한국에선 버림받아”
 
  국가보훈처의 공식 문서 등을 통해 정리한 위암 장지연 서훈취소 경위는 다음과 같다. 2009년 11월 8일, 민족문제연구소가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위암 장지연 등 4389명을 친일인사로 수록한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했다. 위암을 비롯한 독립유공자 20명도 명단에 포함됐다. 이듬해 2월 5일, 국가보훈처는 ‘독립유공자 공적흠결 관련 소명자료 제출 안내’란 제목의 공문과 《친일인명사전》 수록 내용을 해당 인사의 유가족에게 보낸 후 5월 10일까지 소명자료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2010년 10월 26일과 11월 8일 ‘독립유공자 공적 흠결관련’ 공문이 국가보훈처와 민족문제연구소 사이에 오갔고, 11월 11일과 15일 개최된 ‘독립유공자 서훈취소심사위원회’는 이들에 대한 서훈취소를 만장일치로 결정했다. 같은 달 11월 23일, 국가보훈처장은 ‘독립유공자 서훈취소 요청’이란 제목의 공문을 행정안전부에 보내고 행정소송 중인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전 부통령을 제외한 19명의 서훈취소를 요청했다.
 
  12월 16일 행정안전부를 통과해 차관회의 안건에 상정됐고, 5일 후인 21일 국무회의에 상정됐지만 보류됐다. 해가 넘어가자 서훈취소 심사위원과 민족문제연구소 관계자를 중심으로 “정부가 친일청산과 서훈취소에 미적댄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정부는 2011년 4월 5일 김황식 국무총리 주재로 국무회의를 열고 서훈취소를 결정했다.
 
  위암장지연선생기념사업회의 이종석 회장은 “결과적으로 이번 서훈취소는 민족문제연구소 측이 의혹제기를 시작해 이를 끝까지 주도한 듯한 모습”이라며 “국가보훈처를 비롯한 MB정부는 이를 그대로 인정했다”고 했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결국 정치도, 언론도 아닌 학계의 몫이다. 이제 서양에선 저항과 협력을 윤리적으로 판단하는 일은 중심과제가 되지 못한다고 한다. ‘반일 민족주의자’와 ‘친일 협력자’란 이분법적 구분은 식민지기 조선 사회의 복잡성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는다는 주장도 나온다.
 
  최희조(崔熙助) 세종대 석좌교수가 한 경제지에 쓴 칼럼대로 “한평생 청빈하게 살다 간 위암이 결국 일제로부터 박해받고 대한민국으로부터도 버림받은 것”은 아닐까. ‘후손들의 오만함’이란 역사가들의 표현처럼, 선대 인물을 평가하는 오늘날 우리의 행적도 결국 우리 자신의 후손들에 의해 또다시 평가받게 될 것이다.⊙

기사 원문 보기 : 월간조선 2011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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