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김父子 동상 까부수는 날 반드시 온다"
김정우 기자
2012. 8. 30.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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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까모' 金聖珉 대표가 밝히는 '동상 파괴 조직'의 實相
"김父子 동상 까부수는 날 반드시 온다"
⊙ “‘동까모’는 자발적 친목 모임… 북한 內 반체제 단체 지원이 목표”
⊙ 北 유명 詩人 김순석의 아들… 軍 복무 중 《月刊朝鮮》과 交信 후 1995年 탈북
⊙ 中 공안에 정치망명 신청했지만 北送돼… 달리는 열차 창문 깨고 뛰어내려 再탈북 성공
⊙ “北 정권 차원의 대형 사기극, 결국 진실 앞에 무릎 꿇을 것”
전씨는 남한에 ‘동까모’(김일성 동상을 까는 모임)란 조직이 결성됐다며 보온병 형태의 폭발물 투척기와 원격 조종기를 이용한 동상 파괴를 계획했다고 말했다. 그의 발언은 약 한 달에 걸쳐 《노동신문》과 《우리민족끼리》 등 북한 매체에 80차례 이상 오르내리며 대남(對南)·대미(對美) 압박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국가정보원과 통일부는 남한 정부 및 정보기관 개입 주장에 대해 “사실이 아니다”면서 “북한의 선전선동에 대응하지 않겠다”며 선을 그었다.
전씨가 ‘동까모’의 핵심으로 지목한 이는 김성민(金聖珉) 자유북한방송 대표다. 전씨는 “김 대표의 ‘평생 먹고살 돈을 받게 된다’는 말에 빠져 동상 파괴 계획에 가담했다”고 주장했다. 김 대표는 최근 중국에서 고문과 가혹행위를 당한 북한인권운동가 김영환(金永煥)씨, 탈북자 출신 새누리당 조명철(趙明哲) 의원, ‘대북 삐라’로 유명한 박상학(朴相學) 자유북한운동연합 대표와 함께 북한의 ‘처단 대상 4인’으로 지목됐다.
김일성 동상은 북한에서 가장 신성한 대우를 받는 조형물이다. 북한 주민 입장에서 김일성 동상 파괴는 평생 신(神)이라 모셔온 우상을 제거하는 것과 같은 충격 그 자체다. 북한은 ‘동상파괴 미수범’을 체포했다며 연일 선전·선동을 하고 있고, 북한이 배후로 지목한 이들은 “구체적인 계획을 세운 바 없다”고 반박한다. 진실은 무엇일까. 김성민 대표를 만나 ‘동까모’란 조직의 배경과 현재 상황에 대해 들어봤다.
‘동까모’ 총 모금액 140만원
“북한에서 김현희(金賢姬)씨의 KAL기 폭파 사건이나 천안함 폭침 사건 등을 ‘조작’이라며 난리 칠 땐 제삼자의 입장이어서 그런지 그냥 ‘그러려니’ 했습니다. 대북인권운동을 하는 탈북자이지만, 북한에 대한 약간의 미련 비슷한 게 남아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직접 ‘날조의 대상’이 돼보니 북한독재정권의 추악한 본성을 제대로 깨달았습니다.”
김 대표는 전영철씨를 한 번 만난 적이 있다고 했다. 2011년 4월경으로, 장소는 김씨가 근무하는 자유북한방송 사무실에서였다. 전씨를 소개한 이는 함께 대북전단 활동을 해온 탈북자 이수복씨였다. 김 대표가 가진 전씨에 대한 기억은 남한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 북민전(북한인민해방전선·군 출신 탈북자 모임)과 같은 단체 활동을 하고 싶어했다는 것, 그리고 그가 사는 곳이 강원도라고 한 것이다.
전씨는 김 대표를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군 관련 인맥을 과시했다. 대화 중 북한 국경경비대 참모장과 통화를 하겠다며 직접 전화를 걸었고, 북한 내부 동영상이나 강연자료도 확보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당시 전씨는 자신에게 1억원만 주면 ‘동상도 깨부술 수 있다’고 호언했다.
‘동까모’의 실체에 대한 김 대표의 증언이다.
“2009년 12월 31일, 저희 방송국 사무실에서 송년회가 있었습니다. 주요 탈북자 단체의 대표를 비롯해 100명쯤 참석했어요. 모임 자리에 무대와 마이크가 있었는데, 돌아가면서 노래하기는 뭐 하고 해서 새해 계획 같은 주제로 한 사람씩 얘길 해보자고 했죠. 북한의 ‘총화’(결산의 뜻) 비슷한 겁니다.”
김 대표는 당시 “탈북자들이 북한 민주화를 위한 헌신적인 자세가 부족하다”며 “군인, 삐라, 방송 등 각자 분야에서 활동하는 이들이 함께 어울려서 친목회 비슷한 모임을 만들어보자”고 했다.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져나오는 등 반응이 좋았다고 한다.
“자금도 남한이나 미국에서 지원받을 것이 아니라 직접 모아서 북한 민주화를 위해 의미 있게 써보자”는 말에 십시일반 성금까지 걷었다. “동상을 까는 모임이란 이름을 달고 북한 내부에서 이런 일을 계획하고 도와달라는 주민이 있으면 도와주자”고도 했다. 박상학 자유북한운동연합 대표는 “이름이 너무 기니까 ‘동까모’로 부르자”며 그 자리에서 이름을 지었다.
뜻과 계획은 거창했지만, 현실은 소박했다. 그날 모인 돈은 약 40만원. 이후 현재까지 추가로 모인 자금은 총 140만원 정도다. 동상 파괴 공작은커녕 기본적인 대북활동을 하기에도 한참 모자란 액수다. 김 대표는 “방송국이나 개인 통장에 넣으면 오해를 살 수 있어 한 시중은행에 ‘동까모’란 이름으로 계좌를 만들어 넣어뒀다”며 “지금까지 한번도 사용한 적 없다”고 밝혔다.
“전영철은 ‘동까모’와 무관한 사람”
‘동까모’의 존재가 외부에 알려진 것은 2011년 9월경이다. 미국 워싱턴에서 연방의원 관계자들을 만난 김 대표가 “소수이지만 북한 반체제 활동을 위해 ‘동까모’란 조직을 구성해 활동 중”이라고 설명했고, 이를 ‘자유아시아방송’이 보도하면서 전 세계에 알려졌다. 당시 김 대표는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동까모’의 의미에 대해 “인민군 출신의 탈북자들이 한국에서도 김정일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인민군들에게 알리기 위한 측면도 있다. 실제로 북한에서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공개적으로 이런 시도를 해볼 필요가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
김 대표는 “전영철은 ‘동까모’와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며 “이미 과거 언론을 통해 다 공개했던 얘기를 북한정권이 전영철을 내세워 다시 우려먹고 있다”고 했다. 구체적인 계획을 통한 동상 파괴 실행보다는 북한 주민과 군에 진실을 알리고 동기를 부여하는 등 상징적인 의미가 더 컸다는 뜻이다.
탈북자와 대북인권단체들의 ‘김일성 동상 파괴 계획’은 관련 계통에선 공공연히 알려진 ‘비밀 아닌 비밀’이다. 박상학 대표는 지난 7월 19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의 자생적 반체제 단체인 ‘압록강동지회’가 최근 양강도 혜산시에 있는 ‘보천보 전투 승리 기념탑’과 삼지연 부근의 ‘조국 진군 김일성 동상’ 등 두 곳 폭파를 기획하다가 보위부에 체포돼 올해 2월 처형당했다”고 밝힌 바 있다.
과거에도 1991년 신의주에서 김일성 동상의 한쪽 팔이 절단된 사건, 1994년 신의주의 한 공장에 걸린 김일성 초상화 방화 사건, 1994년 원산조선소의 김일성 영생탑이 파손된 사건, 2011년 함경북도 회령의 김정숙(김정일 생모) 동상 훼손 사건, 2011년 평양 당 창건 기념탑 파손 사건 등이 보도된 적이 있지만, 그 결과가 공식 확인된 바는 없다.
김성민 대표도 지금까지 동상 파괴에 대한 필요성은 계속 알려왔다. 동상에 폭약을 설치하거나 중국 접경에서 무선 조종 헬기를 날려 기념탑을 공격하는 등 여러 방식을 고안했지만, 실제 행동으로 옮기진 못했다. 성공 가능성이 불확실한데다, 위험성이 높기 때문이다. 특히 황장엽(黃長燁) 전(前) 북한노동당 비서가 작고 전 “무모한 시도로 무고한 인명이 희생될 수 있다”며 반대했던 영향이 컸다고 한다. ‘동까모’는 결국 “상징적인 목표를 두고 북한 내 자생적인 민주화 운동을 적극 지원한다”는 목적으로 세워진 셈이다.
아버지는 北 최고 詩人
북한은 ‘전영철의 테러 미수’를 내세워 대미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고 대남 압박 강도를 높이는 등 강경책을 고수한다는 전략이다. 또 북한 내 반체제 활동 가능성을 원천 봉쇄해 내부 결속을 강화하는 것도 목적 중 하나다. 북한은 최근 전영철의 기자회견문을 유엔 사무총장,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사무소,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반테러위원회 등 해당 기관에 발송했다고 밝힌 바 있다.
김성민 대표는 북한의 이러한 전략에 대해 “득보다 실이 클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일성을 신격화하는 북한 주민들이 지금 당장은 분노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그들 기억 속엔 탈북자 단체가 80개나 존재한다는 것과 그들이 동상을 파괴할 수 있다는 가능성만 남게 될 것”이라고 했다.
“북한에서 이번 공작을 계획한 사람은 상당히 머리가 나쁜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민족끼리》와 같은 북한 매체들이 연일 ‘남조선에 탈북자 단체가 80개나 있고, 그들이 동상을 까려 했다’고 스스로 선전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북한 주민들이 다 듣고 보고 있어요. 장기적으론 분명히 역효과죠.”
김 대표는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미리 알았더라면, 북한에서 쓰던 본명을 사용할 걸 그랬다”며 “탈북 전 작가로서 꽤 유명세를 떨쳤기 때문에, 당시 동지들이 ‘동까모’의 김성민이 바로 나라는 것을 알면 그들 중 상당수가 혼란스러워 할 것”이라고 했다.
“제 본명은 ‘김진’입니다. 북한 빨치산 영웅 중 김진이란 사람이 있어 북한에선 유명한 이름이에요. 저도 선전대에서 활동할 당시 시를 많이 써 팬레터를 받을 정도로 꽤 알려졌었습니다. 영웅과 동명(同名)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제 이름을 기억하는 동지들이 꽤 있을 겁니다. ‘자유북한방송 대표 김성민’이 아니라, ‘시인 출신 탈북자 김진’이라고 북한이 보도하면, 또 얘기가 달라지겠죠.”
김 대표의 아버지는 더 유명한 시인이다. 북한의 대표적인 서정시인인 김순석(金淳石·1922~1974)은 《황금의 땅》 등 시집을 출간해 “북한 최고의 시인”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가 작사한 ‘벼가을 하러 갈 때’란 노래는 상당수 탈북자가 가사를 외울 정도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그는 광복 직후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해 1954년엔 소련 작가동맹 초청으로 3년간 소련 각지를 여행하는 특권을 누리기도 했다. 1956년부터 1958년까지 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시분과 위원장으로 활동했지만, 1959년 “부르주아 의식을 청산하지 못한, 배부른 개인 취미로 시를 쓰는 작가”라는 비판을 받고 자강도 희천의 공작기계 공장으로 좌천됐다.
코미디 작가 군인
김성민 대표는 1962년생으로, 아버지가 심심산골 유배 중일 때 태어나 두 살까지 살았다.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라는 최고 엘리트 자리에서 하루아침에 추방 노동자 신세가 된 김순석은 공작기계 공장에서 노동자 서클을 만들어 시집을 펴냈다. 북한 최초의 ‘노동자 시집’이었다.
“북한에선 시집 한 권 내는 게 결코 쉽지 않습니다. 국가의 허락을 받고 당의 비준을 받는 등 절차가 상당히 복잡한데 혁명화 대상자가 노동자 시집을 펴내니 당국에서 무시할 수 없었죠. 혁명화가 다 됐으니 어쩌겠습니까. 평양으로 다시 불러들여 《조선문학》이란 잡지의 편집장을 맡게 했습니다. 북한의 유일한 문학잡지예요.”
평양 옥류관 인근의 ‘좋은 동네’에서 자란 소년 김진(김성민 대표)은 14세 때 부모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누나 5명 중 첫째와 둘째는 철들기 전 시집을 갔고, 나머지 세 명과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작가동맹에선 살던 집을 내놓으라 했고, 그는 얼마 후 군에 입대했다.
“사병생활을 총 10년 동안 했는데, 글을 무지 많이 썼습니다. 시인 김순석의 외아들로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야겠다는 마음도 컸어요. 처음 4년간 근무했던 28사단 경보대대는 남한의 특전사와 비슷합니다. 강도 높은 훈련을 이겨내기 위해 글을 써서 《노동신문》에 기고하기도 했어요.”
입대 6년차 되던 해 사단 본부로부터 글을 본격적으로 쓰라는 명령을 받았고, 후에 군단 예술선전대에 들어가 작가 활동을 계속했다. 몇 해 후 김정일의 명령으로 군단 선전대가 해산됐다. 선전대가 한 연대에 들어갈 부식물을 다 먹는다는 이유였다. 그는 인민군 총정치국 문예창작실로 옮겨 1년간 더 근무하다 김형직사범대학 작가 양성반에 소속됐다.
“글을 꽤 잘 쓰니까 군에서 직접 대학을 추천해 보내주는 겁니다. 비용은 군에서 모두 지원했어요. 단, 3년간 교육받고 졸업하면 다시 군대로 간다는 조건이었죠. 재담(만담), 사이극(막간극)을 군인교육용으로 제작해 무대에 많이 올렸어요. 한국으로 치면 코미디 작가, 희극 작가였죠. 짬짬이 부업으로 시도 썼는데, <병사의 자서전> 같은 작품은 비슷한 또래 탈북자들이 지금도 달달 외웁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황해북도 신계의 주체포(한국의 자주포) 군단으로 소속됐다. 해산됐던 선전대가 다시 부활해 1991년부터 1995년까지 부대 메인 작가로도 활동했다. 당시 북한은 25개 군단의 선전대가 1년마다 경연을 벌였다.
《월간조선》과의 인연
25개 부대 중 12개 부대가 선정돼 김정일 앞에서 직접 공연을 실시했는데, 그는 두 차례 작품이 출품돼 모두 김정일로부터 ‘방침’을 받았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최고의 영예를 안은 것이다. 1년마다 한 번씩 승진해 대위 계급까지 달 정도로 ‘잘나가는’ 군인작가가 됐다.
그즈음 남한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국경지역 출신의 부하 한 명이 1년에 두 차례 중국에 다녀왔는데, 그때마다 중국과 남한의 물건을 몰래 가져다 보여줬다.
“하루는 중국에서 가져온 담배를 받았는데, 책 종이로 싸왔어요. 호기심에 펼쳐봤더니 《월간조선》이었습니다. 처음 보는 남한 잡지였죠. 구석구석 읽어보니 남한의 대통령 선거 얘기도 나오고 재미있더라고요. 중간에 민족의 통일을 염원하는 기독교 조직 얘기가 나오는데, 남북 양측에서 50명씩 참가한다고 해요. 북측 인사들은 유명인들이라 다 알 만한 사람들이었고, 남쪽 사람 이름을 훑어봤죠. ‘김관석’이란 이름이 눈에 띄었습니다. 어릴 적 아버지께 들었던 삼촌 이름과 같았죠.”
그가 당시 《월간조선》에서 발견한 이름과 직책은 김관석(金觀錫) 기독교교회협의회(NCC) 총무였다. 김 목사는 후에 기독교방송 사장과 《새누리신문》 발행인을 역임하는 등 재야 활동과 개신교 연합 운동에 큰 역할을 담당하다 2002년 별세했다. 김성민 대표는 당시 아버지 김순석이 광복 직후 청진에서 기독교 단체 간사를 했던 기억을 떠올려 김관석 목사가 자신의 삼촌일 거라 추정했다.
“책 뒤쪽에 조선일보사 주소가 있더라고요. 편지를 적어서 부하한테 중국 가서 부치라고 했습니다. 내용은 별것 없었어요. ‘저는 공화국 공민입니다’로 시작해 통일을 바라는 일념에 대해 얘기하다가 ‘제 삼촌이 서울 기독교 총무 목사 김관석인데 형님은 돌아가시고 조카는 잘 살고 있다고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위험한 일이었지만, 가족 안부 전하는 게 나쁠 것도 없잖아요.”
그는 2년에 걸쳐 두 차례 《월간조선》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김관석 목사는 실향민은 맞지만 당신의 삼촌이 아닌 동명이인”이란 답장이 돌아왔다. 당시 서울에서 편지를 보낸 이가 우종창(禹鍾昌) 기자였다는 사실은 탈북 후 알게 됐다.
김정일에게 편지 썼다 계급장 떼여
‘고속승진’으로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위기가 닥쳤다. 발단은 선전대 대항 경연 때 기악 부문의 문제였다. 당시 북한제 악기를 사용하니 외제 악기를 쓰는 다른 군단에 뒤질 수밖에 없었다. 선전대 대장이 개성의 학생소년궁전에 아까워서 쓰지 않는 일제 악기들이 있다며 부대원들을 데리고 가 몰래 트럭 2대에 나눠 싣고 돌아왔다. 고급 악기를 확보해 사용해 오다 2년 후 적발됐다.
“당시 전 도로 공사 현장에 지원을 나가 있었는데, 갑자기 당국에서 들이닥친 거죠. 학생소년궁전에서 온 관계자가 악기를 보고 자기들 것이 맞다고 확인했고, 선전대장, 지휘자, 작곡가 모두 출당 제대 조치를 받았습니다. 저는 작가 신분이라 직접 관련이 없었죠. 윗사람들이 모두 나가버리니 제가 대장 대행이 됐어요.”
선전대 대장은 상좌 계급으로 남한의 대령급에 해당한다. 어린 나이에 고위직 대행을 맡자 부하들이 그의 말을 듣지 않기 시작했다. 군단과 선전대 사이 표창 추천 과정에서까지 따돌림을 당한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자신이 입당 보증을 서줬던 16명을 모두 불러모았다.
“북한에서 입당 보증은 부모보다 더한 권력을 상징합니다. 정치적 생명의 어머니와 같은 존재죠. 16명 다 불러모아서 ‘지금 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다 불라’고 했더니, 한 녀석이 ‘악기 도난 사건을 중앙당에 신소(伸訴·신고)한 장본인이 김진 작가 동지란 소문이 돈다’고 해요. 제가 대장 되려고 윗사람들을 고발했다는 얘기죠. 누군가 저를 시샘해서 흘린 소문에 제가 군단 장교들에게 ‘왕따’를 당한 겁니다. 군단 정치위원은 절 만나주지도 않고, 부대 정문에선 저보고 사전에 출입조치를 안 했다고 들여보내 주지 않는 겁니다. 예전엔 김진 작가 동지 하면 무조건 통과였거든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죠.”
그가 선택한 해결책은 김정일에게 직접 편지를 쓰는 것이었다. “당에 신소한 사람을 잡아내는 것은 잘못됐지만, 엉뚱한 사람이 신소자로 몰려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 장군님께서 가장 심려하시는 당의 통일과 단결이 깨지고 있다”는 등의 내용으로 쓴 서신을 직접 평양 중앙당 정문 신소통에 넣었다. 평양의 누나 집에서 이틀을 머문 후 부대로 돌아온 그를 맞이한 이들은 신소처리과의 고위 간부였다.
“한국으로 치면 대령급쯤 됐어요. 제가 들어서자마자 ‘야, 묶어. 계급장 떼’라고 하더군요. 곧바로 포박당하고 계급장까지 떼였습니다. 김정일에게 보낸 편지가 잘못됐다는 생각에 ‘난 죽었구나’ 생각했죠.”
北送 후 달리는 열차 창문 깨고 탈출
중앙당의 간부는 그를 앞에 앉혀놓고 “얼마나 무엄한 짓을 했는지 아느냐. 편지가 장군님에게 갔다면 너는 죽은 목숨이다. 우리가 막았으니까 천만다행으로 알아라. 자중하라”고 했다. 그는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었고, 두 시간 후 풀려났다.
“그날 이후 3개월 동안은 어떻게든 버티려고 했습니다. 저만 떳떳하면 상관없다고 생각했죠. 근데 그때 제가 《월간조선》과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사실을 보위부가 모두 체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곧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1995년 9월 30일, 그는 살기 위해 국경을 넘었다. 하지만 이듬해 2월 중국 공안에 잡혔다. 중국의 속성을 제대로 몰랐던 그는 “인민군 대위로서 ‘정치망명’을 하겠다”며 자신이 겪었던 모든 일을 사실대로 불었다. 김정일 정권에 대해 대놓고 비판했다. 중국 공안은 그를 한 달 동안 조사한 후 북송(北送)했다.
함경북도 온성에 끌려온 그는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조사를 피하려고 했다. 중국 공안이 “조사 결과를 북에 보내면 곧바로 사형이니 적당히 둘러대라”고 한 말 때문이었다. 하지만 거짓말이었다. 중국에서 공안과 함께 자신의 모든 자백을 들었던 자가 보위부 사람이란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군 간부 신분인 그는 평양 보위부로 호송됐다. 무조건 공개재판 후 총살감이었다.
그들은 족쇄에 포승줄로 결박까지 했다. 온성에서 평양까지 열차로 약 3일이 걸렸다. 이틀째 되던 날 달리는 열차의 화장실 창문을 깨고 뛰어내렸다. 50여 일간 구금으로 생긴 피부병 때문에 족쇄를 조금 헐렁하게 채운데다 화장실에선 포승줄을 풀어줬기에 가능했다. 북쪽을 향해 달리는 새벽열차 지붕에 매달리고, 하염없이 산길을 걸었다. 그가 지나친 역전엔 수배 사진이 붙었다.
9일 만에 그는 옌지에 도착했고, 과거에 도움을 받았던 교회에 다시 찾아갔다. 교회에서 숙식하며 연탄공장에 다녔다. 월급 300위안이었다. 한국 가치로 3만원쯤 되던 때였다. “남조선에 가겠다”며 꼬박꼬박 돈을 모았지만, 몇 년이 걸릴지 기약 없는 일이었다.
다시 떠오른 게 《월간조선》이었다. ‘작가가 연탄만 쥐고 살 수 없다’는 생각에 글을 써서 서울로 보냈다. 우종창 기자로부터 곧바로 연락이 왔고, 그의 글은 1997년 1월호에 실렸다. ‘인민군 ○○사단 군관 ○○철’이란 가명으로 “중학생에게도 68년식 자동보총과 120발의 탄환을 지급하는 북한”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고발했다. 60만원이 넘는 원고료도 받았다. 당시 중국에선 큰돈이었다.
“동상 파괴는 오랜 꿈”
글을 쓴다는 소문이 나니 탈북자들이 모여들었다. 북민전(북조선 인민들의 생존과 민주를 위한 탈북자 연합전선)이란 단체를 결성해 한 차례 더 투고했다. “북민전 대변인 성명”으로 쓰인 이 글은 《월간조선》 1997년 11월호에 게재됐다.
얼마 후 우종창 기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진짜 삼촌을 찾았다는 소식이었다. 건설사업을 했던 70대 중반의 노인이 중국으로 직접 찾아왔다. 1999년 2월, 그는 삼촌의 도움으로 남한 땅을 밟았다.
“10개월 동안 조사를 받고 KBS 드라마 작가반에 갔어요. 해온 일이 작가니까 당연히 계속하겠다며 6개월 동안 남한의 드라마를 배웠습니다. 대학에서 정식으로 배우려는 욕심에 연세대 국문과에 편입했어요. 그런데 국문과에선 창작이 아니라 국어를 가르치더라고요. 그때 마광수(馬光洙) 교수가 ‘창작을 하려면 문예창작과에 가야 한다’며 중앙대 문창과를 추천해 주었습니다. 대학원에 정식 시험 보고 입학해 석사 학위까지 받았습니다.”
김 대표는 백두한라회 회장, 탈북자동지회 사무국장 등 탈북자 단체에서 활동한 후 현재 자유북한방송을 통한 대북 방송 사업에 전념하고 있다. 지난 8월 초, 남한에 온 지 12년 만에 첫 휴가를 다녀왔다고 했다.
김 대표의 목표는 ‘대북방송을 계속하는 것’이다. 김일성 동상을 ‘까는 것’은 그의 오랜 꿈이다. “오히려 탈북자 전영철의 주장대로 미국과 남한 정부의 지원을 제대로 받아 동상을 제대로 까봤으면 좋겠다”고 한다. 북한은 어쩌면 전영철이란 인질을 내걸고 그의 ‘이루지 못한 꿈’을 ‘과거의 사실’로 조작하는지도 모른다.
‘탈북자 김성민’은 북한 이슈가 나올 때마다 언론에 자주 등장했던 이름이다. 김 대표가 자신의 탈북 과정과 어린 시절을 자세히 공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가장 큰 이유는 북한에 자신의 본명과 사연을 제대로 알리고 싶어서다. 전영철씨에 대해서도 특별한 감정이 없었다. 그는 “북한의 협박과 회유 속에서 전씨가 나름 살길을 찾은 것뿐”이라며 “내가 그 입장이 됐더라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들이 북한 주민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을 겁니다. 정권 차원의 대형 사기극도 결국 진실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고통 속에 살고 있는 동포들에게 이 사실을 전하고 싶습니다. 시인 김순석의 아들 작가 김진은 현재 자유로운 대한민국에서 북한 민주화를 위해 목숨 바쳐 일하고 있다고. 언젠가 김 부자(父子)의 동상을 깨부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김父子 동상 까부수는 날 반드시 온다"
⊙ “‘동까모’는 자발적 친목 모임… 북한 內 반체제 단체 지원이 목표”
⊙ 北 유명 詩人 김순석의 아들… 軍 복무 중 《月刊朝鮮》과 交信 후 1995年 탈북
⊙ 中 공안에 정치망명 신청했지만 北送돼… 달리는 열차 창문 깨고 뛰어내려 再탈북 성공
⊙ “北 정권 차원의 대형 사기극, 결국 진실 앞에 무릎 꿇을 것”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 ⓒ서경리
전씨는 남한에 ‘동까모’(김일성 동상을 까는 모임)란 조직이 결성됐다며 보온병 형태의 폭발물 투척기와 원격 조종기를 이용한 동상 파괴를 계획했다고 말했다. 그의 발언은 약 한 달에 걸쳐 《노동신문》과 《우리민족끼리》 등 북한 매체에 80차례 이상 오르내리며 대남(對南)·대미(對美) 압박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국가정보원과 통일부는 남한 정부 및 정보기관 개입 주장에 대해 “사실이 아니다”면서 “북한의 선전선동에 대응하지 않겠다”며 선을 그었다.
전씨가 ‘동까모’의 핵심으로 지목한 이는 김성민(金聖珉) 자유북한방송 대표다. 전씨는 “김 대표의 ‘평생 먹고살 돈을 받게 된다’는 말에 빠져 동상 파괴 계획에 가담했다”고 주장했다. 김 대표는 최근 중국에서 고문과 가혹행위를 당한 북한인권운동가 김영환(金永煥)씨, 탈북자 출신 새누리당 조명철(趙明哲) 의원, ‘대북 삐라’로 유명한 박상학(朴相學) 자유북한운동연합 대표와 함께 북한의 ‘처단 대상 4인’으로 지목됐다.
김일성 동상은 북한에서 가장 신성한 대우를 받는 조형물이다. 북한 주민 입장에서 김일성 동상 파괴는 평생 신(神)이라 모셔온 우상을 제거하는 것과 같은 충격 그 자체다. 북한은 ‘동상파괴 미수범’을 체포했다며 연일 선전·선동을 하고 있고, 북한이 배후로 지목한 이들은 “구체적인 계획을 세운 바 없다”고 반박한다. 진실은 무엇일까. 김성민 대표를 만나 ‘동까모’란 조직의 배경과 현재 상황에 대해 들어봤다.
‘동까모’ 총 모금액 140만원
“북한에서 김현희(金賢姬)씨의 KAL기 폭파 사건이나 천안함 폭침 사건 등을 ‘조작’이라며 난리 칠 땐 제삼자의 입장이어서 그런지 그냥 ‘그러려니’ 했습니다. 대북인권운동을 하는 탈북자이지만, 북한에 대한 약간의 미련 비슷한 게 남아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직접 ‘날조의 대상’이 돼보니 북한독재정권의 추악한 본성을 제대로 깨달았습니다.”
김 대표는 전영철씨를 한 번 만난 적이 있다고 했다. 2011년 4월경으로, 장소는 김씨가 근무하는 자유북한방송 사무실에서였다. 전씨를 소개한 이는 함께 대북전단 활동을 해온 탈북자 이수복씨였다. 김 대표가 가진 전씨에 대한 기억은 남한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 북민전(북한인민해방전선·군 출신 탈북자 모임)과 같은 단체 활동을 하고 싶어했다는 것, 그리고 그가 사는 곳이 강원도라고 한 것이다.
전씨는 김 대표를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군 관련 인맥을 과시했다. 대화 중 북한 국경경비대 참모장과 통화를 하겠다며 직접 전화를 걸었고, 북한 내부 동영상이나 강연자료도 확보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당시 전씨는 자신에게 1억원만 주면 ‘동상도 깨부술 수 있다’고 호언했다.
‘동까모’의 실체에 대한 김 대표의 증언이다.
“2009년 12월 31일, 저희 방송국 사무실에서 송년회가 있었습니다. 주요 탈북자 단체의 대표를 비롯해 100명쯤 참석했어요. 모임 자리에 무대와 마이크가 있었는데, 돌아가면서 노래하기는 뭐 하고 해서 새해 계획 같은 주제로 한 사람씩 얘길 해보자고 했죠. 북한의 ‘총화’(결산의 뜻) 비슷한 겁니다.”
김 대표는 당시 “탈북자들이 북한 민주화를 위한 헌신적인 자세가 부족하다”며 “군인, 삐라, 방송 등 각자 분야에서 활동하는 이들이 함께 어울려서 친목회 비슷한 모임을 만들어보자”고 했다.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져나오는 등 반응이 좋았다고 한다.
“자금도 남한이나 미국에서 지원받을 것이 아니라 직접 모아서 북한 민주화를 위해 의미 있게 써보자”는 말에 십시일반 성금까지 걷었다. “동상을 까는 모임이란 이름을 달고 북한 내부에서 이런 일을 계획하고 도와달라는 주민이 있으면 도와주자”고도 했다. 박상학 자유북한운동연합 대표는 “이름이 너무 기니까 ‘동까모’로 부르자”며 그 자리에서 이름을 지었다.
뜻과 계획은 거창했지만, 현실은 소박했다. 그날 모인 돈은 약 40만원. 이후 현재까지 추가로 모인 자금은 총 140만원 정도다. 동상 파괴 공작은커녕 기본적인 대북활동을 하기에도 한참 모자란 액수다. 김 대표는 “방송국이나 개인 통장에 넣으면 오해를 살 수 있어 한 시중은행에 ‘동까모’란 이름으로 계좌를 만들어 넣어뒀다”며 “지금까지 한번도 사용한 적 없다”고 밝혔다.
“전영철은 ‘동까모’와 무관한 사람”
지난 7월 19일 기자회견을 열고 “미국과 ‘남조선 정보기관’의 임무를 받고 김일성 동상을 파괴하려다 체포됐다”고 주장한 탈북자 전영철씨. 김성민 대표는 “전영철은 ‘동까모’와 무관한 사람”이라며 “북한의 협박과 회유 속에서 전씨가 나름 살길을 찾은 것뿐”이라고 했다. |
김 대표는 “전영철은 ‘동까모’와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이라며 “이미 과거 언론을 통해 다 공개했던 얘기를 북한정권이 전영철을 내세워 다시 우려먹고 있다”고 했다. 구체적인 계획을 통한 동상 파괴 실행보다는 북한 주민과 군에 진실을 알리고 동기를 부여하는 등 상징적인 의미가 더 컸다는 뜻이다.
탈북자와 대북인권단체들의 ‘김일성 동상 파괴 계획’은 관련 계통에선 공공연히 알려진 ‘비밀 아닌 비밀’이다. 박상학 대표는 지난 7월 19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의 자생적 반체제 단체인 ‘압록강동지회’가 최근 양강도 혜산시에 있는 ‘보천보 전투 승리 기념탑’과 삼지연 부근의 ‘조국 진군 김일성 동상’ 등 두 곳 폭파를 기획하다가 보위부에 체포돼 올해 2월 처형당했다”고 밝힌 바 있다.
과거에도 1991년 신의주에서 김일성 동상의 한쪽 팔이 절단된 사건, 1994년 신의주의 한 공장에 걸린 김일성 초상화 방화 사건, 1994년 원산조선소의 김일성 영생탑이 파손된 사건, 2011년 함경북도 회령의 김정숙(김정일 생모) 동상 훼손 사건, 2011년 평양 당 창건 기념탑 파손 사건 등이 보도된 적이 있지만, 그 결과가 공식 확인된 바는 없다.
김성민 대표도 지금까지 동상 파괴에 대한 필요성은 계속 알려왔다. 동상에 폭약을 설치하거나 중국 접경에서 무선 조종 헬기를 날려 기념탑을 공격하는 등 여러 방식을 고안했지만, 실제 행동으로 옮기진 못했다. 성공 가능성이 불확실한데다, 위험성이 높기 때문이다. 특히 황장엽(黃長燁) 전(前) 북한노동당 비서가 작고 전 “무모한 시도로 무고한 인명이 희생될 수 있다”며 반대했던 영향이 컸다고 한다. ‘동까모’는 결국 “상징적인 목표를 두고 북한 내 자생적인 민주화 운동을 적극 지원한다”는 목적으로 세워진 셈이다.
아버지는 北 최고 詩人
북한은 ‘전영철의 테러 미수’를 내세워 대미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고 대남 압박 강도를 높이는 등 강경책을 고수한다는 전략이다. 또 북한 내 반체제 활동 가능성을 원천 봉쇄해 내부 결속을 강화하는 것도 목적 중 하나다. 북한은 최근 전영철의 기자회견문을 유엔 사무총장, 유엔 인권고등판무관사무소,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반테러위원회 등 해당 기관에 발송했다고 밝힌 바 있다.
김성민 대표는 북한의 이러한 전략에 대해 “득보다 실이 클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일성을 신격화하는 북한 주민들이 지금 당장은 분노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그들 기억 속엔 탈북자 단체가 80개나 존재한다는 것과 그들이 동상을 파괴할 수 있다는 가능성만 남게 될 것”이라고 했다.
“북한에서 이번 공작을 계획한 사람은 상당히 머리가 나쁜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민족끼리》와 같은 북한 매체들이 연일 ‘남조선에 탈북자 단체가 80개나 있고, 그들이 동상을 까려 했다’고 스스로 선전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북한 주민들이 다 듣고 보고 있어요. 장기적으론 분명히 역효과죠.”
김 대표는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미리 알았더라면, 북한에서 쓰던 본명을 사용할 걸 그랬다”며 “탈북 전 작가로서 꽤 유명세를 떨쳤기 때문에, 당시 동지들이 ‘동까모’의 김성민이 바로 나라는 것을 알면 그들 중 상당수가 혼란스러워 할 것”이라고 했다.
“제 본명은 ‘김진’입니다. 북한 빨치산 영웅 중 김진이란 사람이 있어 북한에선 유명한 이름이에요. 저도 선전대에서 활동할 당시 시를 많이 써 팬레터를 받을 정도로 꽤 알려졌었습니다. 영웅과 동명(同名)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제 이름을 기억하는 동지들이 꽤 있을 겁니다. ‘자유북한방송 대표 김성민’이 아니라, ‘시인 출신 탈북자 김진’이라고 북한이 보도하면, 또 얘기가 달라지겠죠.”
김 대표의 아버지는 더 유명한 시인이다. 북한의 대표적인 서정시인인 김순석(金淳石·1922~1974)은 《황금의 땅》 등 시집을 출간해 “북한 최고의 시인”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가 작사한 ‘벼가을 하러 갈 때’란 노래는 상당수 탈북자가 가사를 외울 정도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그는 광복 직후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해 1954년엔 소련 작가동맹 초청으로 3년간 소련 각지를 여행하는 특권을 누리기도 했다. 1956년부터 1958년까지 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시분과 위원장으로 활동했지만, 1959년 “부르주아 의식을 청산하지 못한, 배부른 개인 취미로 시를 쓰는 작가”라는 비판을 받고 자강도 희천의 공작기계 공장으로 좌천됐다.
코미디 작가 군인
김성민 대표는 1962년생으로, 아버지가 심심산골 유배 중일 때 태어나 두 살까지 살았다.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라는 최고 엘리트 자리에서 하루아침에 추방 노동자 신세가 된 김순석은 공작기계 공장에서 노동자 서클을 만들어 시집을 펴냈다. 북한 최초의 ‘노동자 시집’이었다.
“북한에선 시집 한 권 내는 게 결코 쉽지 않습니다. 국가의 허락을 받고 당의 비준을 받는 등 절차가 상당히 복잡한데 혁명화 대상자가 노동자 시집을 펴내니 당국에서 무시할 수 없었죠. 혁명화가 다 됐으니 어쩌겠습니까. 평양으로 다시 불러들여 《조선문학》이란 잡지의 편집장을 맡게 했습니다. 북한의 유일한 문학잡지예요.”
평양 옥류관 인근의 ‘좋은 동네’에서 자란 소년 김진(김성민 대표)은 14세 때 부모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누나 5명 중 첫째와 둘째는 철들기 전 시집을 갔고, 나머지 세 명과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작가동맹에선 살던 집을 내놓으라 했고, 그는 얼마 후 군에 입대했다.
“사병생활을 총 10년 동안 했는데, 글을 무지 많이 썼습니다. 시인 김순석의 외아들로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야겠다는 마음도 컸어요. 처음 4년간 근무했던 28사단 경보대대는 남한의 특전사와 비슷합니다. 강도 높은 훈련을 이겨내기 위해 글을 써서 《노동신문》에 기고하기도 했어요.”
입대 6년차 되던 해 사단 본부로부터 글을 본격적으로 쓰라는 명령을 받았고, 후에 군단 예술선전대에 들어가 작가 활동을 계속했다. 몇 해 후 김정일의 명령으로 군단 선전대가 해산됐다. 선전대가 한 연대에 들어갈 부식물을 다 먹는다는 이유였다. 그는 인민군 총정치국 문예창작실로 옮겨 1년간 더 근무하다 김형직사범대학 작가 양성반에 소속됐다.
“글을 꽤 잘 쓰니까 군에서 직접 대학을 추천해 보내주는 겁니다. 비용은 군에서 모두 지원했어요. 단, 3년간 교육받고 졸업하면 다시 군대로 간다는 조건이었죠. 재담(만담), 사이극(막간극)을 군인교육용으로 제작해 무대에 많이 올렸어요. 한국으로 치면 코미디 작가, 희극 작가였죠. 짬짬이 부업으로 시도 썼는데, <병사의 자서전> 같은 작품은 비슷한 또래 탈북자들이 지금도 달달 외웁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황해북도 신계의 주체포(한국의 자주포) 군단으로 소속됐다. 해산됐던 선전대가 다시 부활해 1991년부터 1995년까지 부대 메인 작가로도 활동했다. 당시 북한은 25개 군단의 선전대가 1년마다 경연을 벌였다.
《월간조선》과의 인연
김성민 대표가 탈북 직후 《월간조선》에 투고한 글들. ‘인민군 ○○사단 군관 ○○철’, ‘북민전 대변인’이란 이름으로 1997년 1월호와 11월호에 게재됐다. |
그즈음 남한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국경지역 출신의 부하 한 명이 1년에 두 차례 중국에 다녀왔는데, 그때마다 중국과 남한의 물건을 몰래 가져다 보여줬다.
“하루는 중국에서 가져온 담배를 받았는데, 책 종이로 싸왔어요. 호기심에 펼쳐봤더니 《월간조선》이었습니다. 처음 보는 남한 잡지였죠. 구석구석 읽어보니 남한의 대통령 선거 얘기도 나오고 재미있더라고요. 중간에 민족의 통일을 염원하는 기독교 조직 얘기가 나오는데, 남북 양측에서 50명씩 참가한다고 해요. 북측 인사들은 유명인들이라 다 알 만한 사람들이었고, 남쪽 사람 이름을 훑어봤죠. ‘김관석’이란 이름이 눈에 띄었습니다. 어릴 적 아버지께 들었던 삼촌 이름과 같았죠.”
그가 당시 《월간조선》에서 발견한 이름과 직책은 김관석(金觀錫) 기독교교회협의회(NCC) 총무였다. 김 목사는 후에 기독교방송 사장과 《새누리신문》 발행인을 역임하는 등 재야 활동과 개신교 연합 운동에 큰 역할을 담당하다 2002년 별세했다. 김성민 대표는 당시 아버지 김순석이 광복 직후 청진에서 기독교 단체 간사를 했던 기억을 떠올려 김관석 목사가 자신의 삼촌일 거라 추정했다.
“책 뒤쪽에 조선일보사 주소가 있더라고요. 편지를 적어서 부하한테 중국 가서 부치라고 했습니다. 내용은 별것 없었어요. ‘저는 공화국 공민입니다’로 시작해 통일을 바라는 일념에 대해 얘기하다가 ‘제 삼촌이 서울 기독교 총무 목사 김관석인데 형님은 돌아가시고 조카는 잘 살고 있다고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위험한 일이었지만, 가족 안부 전하는 게 나쁠 것도 없잖아요.”
그는 2년에 걸쳐 두 차례 《월간조선》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김관석 목사는 실향민은 맞지만 당신의 삼촌이 아닌 동명이인”이란 답장이 돌아왔다. 당시 서울에서 편지를 보낸 이가 우종창(禹鍾昌) 기자였다는 사실은 탈북 후 알게 됐다.
김정일에게 편지 썼다 계급장 떼여
‘고속승진’으로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위기가 닥쳤다. 발단은 선전대 대항 경연 때 기악 부문의 문제였다. 당시 북한제 악기를 사용하니 외제 악기를 쓰는 다른 군단에 뒤질 수밖에 없었다. 선전대 대장이 개성의 학생소년궁전에 아까워서 쓰지 않는 일제 악기들이 있다며 부대원들을 데리고 가 몰래 트럭 2대에 나눠 싣고 돌아왔다. 고급 악기를 확보해 사용해 오다 2년 후 적발됐다.
“당시 전 도로 공사 현장에 지원을 나가 있었는데, 갑자기 당국에서 들이닥친 거죠. 학생소년궁전에서 온 관계자가 악기를 보고 자기들 것이 맞다고 확인했고, 선전대장, 지휘자, 작곡가 모두 출당 제대 조치를 받았습니다. 저는 작가 신분이라 직접 관련이 없었죠. 윗사람들이 모두 나가버리니 제가 대장 대행이 됐어요.”
선전대 대장은 상좌 계급으로 남한의 대령급에 해당한다. 어린 나이에 고위직 대행을 맡자 부하들이 그의 말을 듣지 않기 시작했다. 군단과 선전대 사이 표창 추천 과정에서까지 따돌림을 당한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자신이 입당 보증을 서줬던 16명을 모두 불러모았다.
“북한에서 입당 보증은 부모보다 더한 권력을 상징합니다. 정치적 생명의 어머니와 같은 존재죠. 16명 다 불러모아서 ‘지금 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다 불라’고 했더니, 한 녀석이 ‘악기 도난 사건을 중앙당에 신소(伸訴·신고)한 장본인이 김진 작가 동지란 소문이 돈다’고 해요. 제가 대장 되려고 윗사람들을 고발했다는 얘기죠. 누군가 저를 시샘해서 흘린 소문에 제가 군단 장교들에게 ‘왕따’를 당한 겁니다. 군단 정치위원은 절 만나주지도 않고, 부대 정문에선 저보고 사전에 출입조치를 안 했다고 들여보내 주지 않는 겁니다. 예전엔 김진 작가 동지 하면 무조건 통과였거든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죠.”
그가 선택한 해결책은 김정일에게 직접 편지를 쓰는 것이었다. “당에 신소한 사람을 잡아내는 것은 잘못됐지만, 엉뚱한 사람이 신소자로 몰려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 장군님께서 가장 심려하시는 당의 통일과 단결이 깨지고 있다”는 등의 내용으로 쓴 서신을 직접 평양 중앙당 정문 신소통에 넣었다. 평양의 누나 집에서 이틀을 머문 후 부대로 돌아온 그를 맞이한 이들은 신소처리과의 고위 간부였다.
“한국으로 치면 대령급쯤 됐어요. 제가 들어서자마자 ‘야, 묶어. 계급장 떼’라고 하더군요. 곧바로 포박당하고 계급장까지 떼였습니다. 김정일에게 보낸 편지가 잘못됐다는 생각에 ‘난 죽었구나’ 생각했죠.”
北送 후 달리는 열차 창문 깨고 탈출
2006년 4월 탈북자 김한미(당시 7세) 양, 일본인 납북자 요코다 메구미 씨의 어머니 사케이 씨 등과 함께 조시 부시 미국 대통령을 면담한 김성민 대표. |
“그날 이후 3개월 동안은 어떻게든 버티려고 했습니다. 저만 떳떳하면 상관없다고 생각했죠. 근데 그때 제가 《월간조선》과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사실을 보위부가 모두 체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곧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1995년 9월 30일, 그는 살기 위해 국경을 넘었다. 하지만 이듬해 2월 중국 공안에 잡혔다. 중국의 속성을 제대로 몰랐던 그는 “인민군 대위로서 ‘정치망명’을 하겠다”며 자신이 겪었던 모든 일을 사실대로 불었다. 김정일 정권에 대해 대놓고 비판했다. 중국 공안은 그를 한 달 동안 조사한 후 북송(北送)했다.
함경북도 온성에 끌려온 그는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조사를 피하려고 했다. 중국 공안이 “조사 결과를 북에 보내면 곧바로 사형이니 적당히 둘러대라”고 한 말 때문이었다. 하지만 거짓말이었다. 중국에서 공안과 함께 자신의 모든 자백을 들었던 자가 보위부 사람이란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군 간부 신분인 그는 평양 보위부로 호송됐다. 무조건 공개재판 후 총살감이었다.
그들은 족쇄에 포승줄로 결박까지 했다. 온성에서 평양까지 열차로 약 3일이 걸렸다. 이틀째 되던 날 달리는 열차의 화장실 창문을 깨고 뛰어내렸다. 50여 일간 구금으로 생긴 피부병 때문에 족쇄를 조금 헐렁하게 채운데다 화장실에선 포승줄을 풀어줬기에 가능했다. 북쪽을 향해 달리는 새벽열차 지붕에 매달리고, 하염없이 산길을 걸었다. 그가 지나친 역전엔 수배 사진이 붙었다.
9일 만에 그는 옌지에 도착했고, 과거에 도움을 받았던 교회에 다시 찾아갔다. 교회에서 숙식하며 연탄공장에 다녔다. 월급 300위안이었다. 한국 가치로 3만원쯤 되던 때였다. “남조선에 가겠다”며 꼬박꼬박 돈을 모았지만, 몇 년이 걸릴지 기약 없는 일이었다.
다시 떠오른 게 《월간조선》이었다. ‘작가가 연탄만 쥐고 살 수 없다’는 생각에 글을 써서 서울로 보냈다. 우종창 기자로부터 곧바로 연락이 왔고, 그의 글은 1997년 1월호에 실렸다. ‘인민군 ○○사단 군관 ○○철’이란 가명으로 “중학생에게도 68년식 자동보총과 120발의 탄환을 지급하는 북한”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고발했다. 60만원이 넘는 원고료도 받았다. 당시 중국에선 큰돈이었다.
“동상 파괴는 오랜 꿈”
글을 쓴다는 소문이 나니 탈북자들이 모여들었다. 북민전(북조선 인민들의 생존과 민주를 위한 탈북자 연합전선)이란 단체를 결성해 한 차례 더 투고했다. “북민전 대변인 성명”으로 쓰인 이 글은 《월간조선》 1997년 11월호에 게재됐다.
얼마 후 우종창 기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진짜 삼촌을 찾았다는 소식이었다. 건설사업을 했던 70대 중반의 노인이 중국으로 직접 찾아왔다. 1999년 2월, 그는 삼촌의 도움으로 남한 땅을 밟았다.
“10개월 동안 조사를 받고 KBS 드라마 작가반에 갔어요. 해온 일이 작가니까 당연히 계속하겠다며 6개월 동안 남한의 드라마를 배웠습니다. 대학에서 정식으로 배우려는 욕심에 연세대 국문과에 편입했어요. 그런데 국문과에선 창작이 아니라 국어를 가르치더라고요. 그때 마광수(馬光洙) 교수가 ‘창작을 하려면 문예창작과에 가야 한다’며 중앙대 문창과를 추천해 주었습니다. 대학원에 정식 시험 보고 입학해 석사 학위까지 받았습니다.”
김 대표는 백두한라회 회장, 탈북자동지회 사무국장 등 탈북자 단체에서 활동한 후 현재 자유북한방송을 통한 대북 방송 사업에 전념하고 있다. 지난 8월 초, 남한에 온 지 12년 만에 첫 휴가를 다녀왔다고 했다.
김 대표의 목표는 ‘대북방송을 계속하는 것’이다. 김일성 동상을 ‘까는 것’은 그의 오랜 꿈이다. “오히려 탈북자 전영철의 주장대로 미국과 남한 정부의 지원을 제대로 받아 동상을 제대로 까봤으면 좋겠다”고 한다. 북한은 어쩌면 전영철이란 인질을 내걸고 그의 ‘이루지 못한 꿈’을 ‘과거의 사실’로 조작하는지도 모른다.
‘탈북자 김성민’은 북한 이슈가 나올 때마다 언론에 자주 등장했던 이름이다. 김 대표가 자신의 탈북 과정과 어린 시절을 자세히 공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가장 큰 이유는 북한에 자신의 본명과 사연을 제대로 알리고 싶어서다. 전영철씨에 대해서도 특별한 감정이 없었다. 그는 “북한의 협박과 회유 속에서 전씨가 나름 살길을 찾은 것뿐”이라며 “내가 그 입장이 됐더라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들이 북한 주민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을 겁니다. 정권 차원의 대형 사기극도 결국 진실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고통 속에 살고 있는 동포들에게 이 사실을 전하고 싶습니다. 시인 김순석의 아들 작가 김진은 현재 자유로운 대한민국에서 북한 민주화를 위해 목숨 바쳐 일하고 있다고. 언젠가 김 부자(父子)의 동상을 깨부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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