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북한
김현희 “국정원은 내가 수녀 되기를 원했다”
김정우 기자
2012. 11. 30.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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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형 선고를 받을 때 떠오른 어머니 얼굴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 국정원은 구두로 ‘김현희 가짜 만들기’는 정부 차원 공작 인정했었다
⊙ 국정원 직원은 “이민을 가라”고까지 했다
⊙ 남산 지하실에서 처음 만난 남편과는 2년간 교제 후 결혼
⊙ 유치원도 못 보낸 두 아이 생각하면 가슴 아파
11월 29일은 KAL 858기 폭파사건 25주기가 되는 날이다. KAL 858기 폭파가 북한 김정일(金正日)의 지령에 의해 벌어진 일이라는 증거로, 증인으로 살고 있는 폭파범 김현희(金賢姬)의 남한생활도 만 25년이 돼 가고 있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녀의 나이는 올해로 만 50이다. 북한에서 25년, 남한에서 25년을 산 셈이다. 공작원 훈련을 위해 해외에 나가 있던 기간을 감안하면 남한에서 산 시간이 더 길지만 아직도 그녀의 어투 곳곳에서는 북한 말씨가 배어 나오곤 한다.
그녀는 남한에 온 지 10년 만에 한 남자를 만나 결혼했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됐다. 한 남자의 아내이자 두 아이의 엄마가 됐다는 외피만을 놓고 볼 때 그녀는 평범한 주부의 삶을 살아야 하지만 그녀의 삶은 여전히 고단하다. 북한의 테러를 입증하는 증거로 살아야 하는 운명이었기에 그 증거를 없애버리고 싶은 세력이나 가짜로 만들어 북한을 이롭게 하고 싶은 세력들에 의해 끊임없이 시달려 왔고 지금도 시달리고 있다.
좌파 정권과 좌파적 언론의 ‘가짜 만들기’ 공세에 시달리다 못해 2003년 11월 젖먹이 아이 등 가족과 함께 집을 나온 그녀는 지금까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결혼생활 중 절반 이상의 세월을 바깥을 떠돌며 지내고 있는 것이다. 내년 이맘때면 집 나온 지 10주년 기념식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최근에도 일부 좌파 언론은 김현희씨가 국회 국정감사에 출석하지는 않고 TV 조선 프로에만 출연한다고, 사실과 다른 공격을 하고 있다. 김현희씨는 국감에 출석해 ‘김현희 가짜 만들기’의 진상을 밝히겠다는 입장이었지만 국회는 그녀에게 출석을 통보하지 않았다. 김현희씨와는 상대적 입장을 가진 김만복(金萬福) 전 국정원장만 증인으로 출석시켰을 뿐이다. 좌파 언론은 주소 불명을 이유로 김현희씨에게 출석 통보를 하지 않은 국회의 직무유기를 지적했어야 옳았다. 김현희씨와 연락이 가능하다는 것을 국회가 모를 리 없기 때문이다.
김현희씨는 사건 발생 25주기를 맞아 가진 《월간조선(月刊朝鮮)》과의 인터뷰에서도 “국회가 부르면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부르지 않았다”고 분명히 밝혔다.
“서울 오는 비행기에서 혁명가 부르며 눈 감았다”
- 이달 말이면 KAL기 폭파 사건 25주기를 맞게 됩니다. 김현희씨와 관련 지금도 가장 많이 인용되는 사진이 한국 이송 후 비행기 트랩에서 내려오는 장면인데 그때 심정이 기억나는지요.
“전쟁기념관을 갔었는데 그 사진을 큼지막하게 해서 걸어놨더군요. 지금도 그 사진을 보면 기분이 썩 좋진 않아요. 그땐 그냥 ‘죽었구나’ 하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체포된) 바레인에서부터 계속 남한에만은 절대 안 가겠다고 버텼죠. 바레인에서 재판받고 사형당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요. 남한에 가봐야 비밀만 다 털리고 죽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죠. 그러다 밤에 갑자기 차에 실려 어디론가 떠났는데 공항이었어요. 엔진 소음을 들으며 문득 비행기 창밖을 보는데 KAL기 마크가 보이더군요. 순간 눈이 저절로 감기는데 그때부터 눈을 감아버리고 안 떴어요. 속으로 혁명가요를 부르며 어떻게 하면 ‘악랄한 고문’ 속에서 비밀을 지킬 수 있을까만을 생각했습니다.”
- 압송돼 오는 비행기 안에서 북한에 있는 가족 생각은 나지 않던가요.
“그때는 가족을 떠올리고 할 여유가 없었어요. 당장 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만 생각했죠.”
- 한국행 비행기 안의 분위기는 기억납니까.
“수사관들이 자기들끼리 계속 대화를 나눴어요. ‘건강한 애가 밥을 안 먹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나’는 등 잡담을 하더군요. 도착할 때쯤 되니 간부 같은 사람이 와서 ‘다 왔다’며 말을 하는데 계속 눈물만 났어요. 그 간부는 ‘좋은 데 왔는데 왜 울어’라고 하더군요. 죽으려 해도 죽을 수가 없는 상황이 보기도 싫고 세상도 싫었어요. 처절한 심정이었습니다.”
당시 상황이 떠오르는 듯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그녀는 그 당시의 심정과 북한에 두고 온 가족 얘기, 유족에 대한 심정을 묻는 질문에 눈물을 보였다. 기자는 오래전에도 그녀의 눈물을 본 적이 있다. 그녀와 식사를 하는 자리에 김일성 대학을 졸업한 탈북자를 불렀는데 그 탈북자와 자신이 다니던 대학 부근의 국숫집 등 평양거리를 이야기하면서였다.
김현희씨가 졸업한 평양외대는 김일성대와 서로 마주보는 곳에 있다. 스무 살 남짓 적은 그 탈북자가 자신이 다니던 평양 삼흥역 부근 골목에 있는 국숫집 이야기를 하자 “아, 그 집이 그때까지도 있었어?” 하며 한참을 울먹였던 적이 있었다. 삼흥역 골목 왼쪽으로 가면 평양외대, 오른쪽으로 가면 김일성대 기숙사가 있었다고 한다. 그녀에게 고향은 언제나 아픔이었던 것이다.
잠꼬대할까 봐 잠도 못 자
- 남한에 와서 조사를 받던 중 가장 어려웠던 점은 어떤 겁니까.
“한국어를 모르는 척 연기하는 게 힘들었어요. 잠꼬대를 조선말로 할까 봐 밤에 잠도 잘 못 잤죠. 수사 초반엔 계속 거짓말을 했어요.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출신 고아라고 꾸며댔죠. 김승일(金勝一)과 어떻게 만났는지도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했습니다. 교육받은 대로 거짓말을 했지만 한계가 오더군요. 진짜 중국인까지 불러내 중국어의 허점을 잡아내니 버텨낼 수가 없었어요. 이후 남산에서 나와 서울을 둘러보게 됐는데 북에서 교육받은 것과 달리 좋은 곳이란 것을 알게 됐죠. 거짓말도 한계가 왔고 죄책감까지 들어 힘들었어요. 결국 8일 만에 자백했죠. 처음 ‘김현희’란 본명을 말하고 나서 여성 수사관에게 ‘언니 미안해’라고 조선말을 할 땐 후련하기까지 했어요.”
또 한 번 그녀를 울리는 질문을 했다.
- 사형선고를 받을 때 심정은 어떠했습니까.
“원통한 것도 있었지만 지은 죄가 있으니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도 인간인지라 ‘사형’이란 말을 듣는 순간, ‘정말 끝이구나, 내 인생이 이렇게 끝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맥이 탁 풀렸어요. 부모님과 동생들 생각이 났어요. 특히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났어요. ‘나를 예쁘게 키워주셨는데 딸 소식을 들으면 얼마나 가슴이 아프실까….”
인터뷰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잠시 시간이 필요했다.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는 눈물 위로 그녀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몇 번인가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그녀 마음속의 미움을 끌어내야 했다.
- 사형 선고를 받았을 때 김정일에 대한 원망은 떠오르지 않던가요.
“저를 이렇게 만든 게 김정일, 김일성(金日成)인데 어떻게 그런 마음이 생기지 않겠어요. 만감이 교차했다고 해야 하나.”
- 사면(赦免)이 된다는 언질을 사전에 받은 것은 아닌가요.
“사실 그런 질문을 많이 들었어요. 분명한 것은 사전에 전혀 몰랐다는 사실이에요. 그때는 제가 진 죄가 무거운 걸 잘 알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사형을 당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죄인이니 제가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는 심정이었죠. 제 사면 소식은 TV뉴스를 보고 알았어요.”
- 사면이 됐다는 뉴스를 들을 때는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내가 살아도 되는가’ 하는 생각부터 들더군요. 제가 아는 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큰 죄인의 몸으로 혼자 어떻게 살아갈까 걱정도 됐고요. 기독교를 받아들인 터라 죽었던 저를 살려주시고 새 생명을 주신 하나님과 대한민국에 감사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슬프거나 기쁠 땐 부모님 생각이 납니다. 죽음의 문턱에 섰다가 다시 살아난 소식을 부모님께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임수경씨와의 만남
김현희씨는 국정원의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 남산 지하실에 있으면서 체포된 간첩이나 북한의 주장에 동조하는 인사들을 만나기도 했다. 그녀가 기억하는 대표적인 인사는 현재 민주통합당 국회의원이 된 임수경씨다.
임수경씨는 한국 외국어대학교 용인캠퍼스 4학년에 재학 중이던 1989년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석하기 위해 밀입북했다가 그해 8월 15일 판문점을 통해서 돌아왔다. 이 밀입북 사건으로 임씨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국가안전기획부에서 조사를 받고 있었다. 이때 두 사람이 만나게 된 것이다.
- 임수경씨와 만난 때를 기억합니까.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남산 지하실에 오래 있다가 건강이 안 좋아져 거처를 옥상 쪽으로 옮겼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대화 내용이 정확히는 기억 안 나지만, 그는 북한에도 좋은 아파트가 있고 인민들이 잘산다는 식으로 얘기했죠. 저는 겉으로만 그럴 뿐 실상은 다르다고 했지만, 잘 받아들이는 것 같지 않았어요. 자기는 자기대로 저는 저대로 얘기를 해 대화가 잘 안 됐던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 그때 말이 통하지 않는 임수경씨를 보면서 어떤 느낌이 들었습니까.
“솔직히 철없어 보였죠. 남한 젊은이들이 정말 환상에 젖어 북한 실상을 너무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북한은 ‘쇼의 나라’예요. 실상을 절대 보여주지 않습니다. 환상에 젖은 그녀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웠습니다.”
- 그랬던 그녀가 지금은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 됐습니다. 그런 걸 보면서 혹시 남산 지하실에서 만났을 때의 그 광경이 다시 떠오르지는 않던가요.
“얼마 전 탈북자에게 배신자라고 해 논란이 된 것으로 압니다. 목숨을 걸고 자유를 찾아왔는데, 그들을 도와주고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우지는 못할망정 잘못된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듯해서 여전히 안타까움을 느꼈죠. 대부분 탈북자가 그의 ‘배신자’란 발언에 분노하지만, 사실 저는 누군가가 저를 배신자라고 해줬으면 하는 심정입니다. 저는 ‘배신자’도 못 돼 ‘가짜’라는 공격을 받지 않았습니까. 북한이 제게 배신자라고 한 번만 말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 안기부 지하실에서 임수경씨 외에 만난 사람은 없었나요.
“수사 중엔 이상규와 전충남을 만났습니다. 이후 ‘부부간첩’으로 유명한 최정남, ‘신세대 간첩’ 김동식 등을 만났는데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만난 자리였습니다. 남한이 어떤 곳인지 얘기했지만, 긴 대화는 나누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황장엽(黃長燁) 선생도 망명 후 만났죠.”
안기부 지하실에서 처음 만난 남편
- 사건 발생 10년 후 김현희씨 수사에 참여했던 안기부 요원과 결혼을 하게 되는데 혹시 안기부가 결혼을 지원했던 것은 아닌가요.
“안기부는 제 결혼을 반대했어요. 결혼 이야기만 나와도 담당자들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혹시 수녀가 될 생각은 없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수녀에 대해 잘 모르기도 했고, 신(神)의 뜻이라 생각해 ‘마음대로 수녀 되는 건 아니지 않으냐’고 답했습니다. 그런데 저를 어떻게 사회에 내보낼지 방안을 쓴 안기부 보고서를 보니 수녀로 만드는 항목도 있더군요. 담당자들이 결혼 얘기는 꺼려 했지만, 수녀 얘기는 좋아했습니다.”
김현희씨와 인터뷰가 끝난 후 남편 정모씨에게 “당시 안기부가 김현희씨를 수녀로 만들고 싶어 했느냐”고 물었다. 정씨는 “당시 안기부에서 김현희씨가 수녀가 되기를 원했던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 남편은 어떻게 만났습니까.
“항상 보호와 감시 속에 있어 외롭고 답답했습니다. 안기부가 저를 할머니가 될 때까지 보호해 줄 것은 아니지 않으냐는 생각도 들었고요. 독립을 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혼자 나간다 하면 보내주지도 않을 것 같아 결혼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중 남편을 만났습니다. 저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았던 수사관이라 차라도 한 잔 하고 싶다고 얘기했는데, 1995년 말 둘이 만날 기회가 생겨 교제를 시작했습니다. 2년간 교제한 거죠”
-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게 되리라고 예상했습니까.
“전혀요. 지금 돌이켜보니, 수사관 중에 가장 오랜 세월 알았던 사람이 지금의 남편이에요. 남산 지하실로 끌려갔을 때 만났으니까요. 마음이 따뜻하고 남을 배려하는 모습이 인상에 남았습니다. 저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니 서로 대화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 교제를 할 때는 안기부 몰래 만났습니다.”
- 두 사람이 결혼한다고 했을 때 안기부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안기부에 얘길하니 당장 어떻게 조치할지 당황해 하더군요. 희생자 유가족 문제도 있고 해서 언론에 퍼질까 쉬쉬하며 2년을 끌었습니다. 그런데 1997년 12월 대선(大選)에서 정권이 바뀐다 하니 갑자기 결혼하라고 하더군요. 12월 18일이 대선이었고, 정확히 10일 후인 28일에 결혼했습니다.”
- 결혼 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혔다가 ‘김현희 가짜 만들기’ 때문에 다시 여론의 주목을 받게 됐습니다. 좌파 단체뿐 아니라 유족까지 가짜라고 주장했는데요.
“너무 안쓰러워 보였습니다. 결혼 직전에 유가족 분들 뵙고 서로 울며 인사까지 나눴는데, 정권 바뀌고 일부 유가족 분들이 그렇게 나오니 당황스러웠습니다. 좌파 단체가 ‘KAL 858 대책위’라고 만들면서 일부 유가족 분들을 회유해 이용했다고 생각합니다. ‘대책위’라고 만들었는데 유가족 분들을 빼면 명목이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명목을 위해 유가족을 방패로 내세우고 뒤에서 조종했다고 봅니다. 이런 배후 세력들은 유가족뿐 아니라 돌아가신 희생자의 영혼까지 이용하는 질이 나쁜 이들입니다.”
내게 “자동차 바퀴는 네모”라고 말하게 하려는 사람들
- 노무현(盧武鉉) 정권이 들어선 후 벌어진 일들을 간략히 설명해 주시죠.
차분했던 그녀의 목소리가 격앙됐다.
“별난 일이 많았어요. 조작설(說)에 대한 책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MBC 취재진이 아파트까지 들이닥치는 일이 벌어졌죠. 국정원에선 대놓고 MBC에 출연하라고 강요했습니다. ‘지휘부’가 (MBC에) 총지원하라고 했으니 무조건 방송에 나가라는 거예요. 계속 거부하니까 직접 못 만나겠으면 전화인터뷰라도 하라고 했습니다. 심지어 ‘인터뷰해 주면 집 공개는 안 하겠다’는 MBC 기자의 말을 그대로 전하는 담당관까지 있었습니다. 남편이 너무 화가 나서 ‘담당관이란 사람이 그 소리 듣고도 가만히 있었느냐, 국정원이 MBC에 집 주소 알려준 것 맞구나’라고 했더니 아무 말도 못하더군요. 그렇게 전화를 끊고 나서부터 휴대전화와 집전화를 모두 없애버렸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공중전화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 2003년 11월 MBC 취재진이 집에 온 날 상황은 어땠나요.
“남편이 경기도 모처에서 국정원 직원들과 MBC 출연 문제로 만나고 있을 때였습니다. 출연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짓고 국정원 내부 설명회에만 참석하기로 합의를 봤답니다. 남편이 그러는 사이 저와 아이들밖에 없는 집에 취재진이 ‘습격’을 한 겁니다. 국정원이 알려주지 않았다면 MBC가 어떻게 알고 남편도 없는 정확한 시점에 집까지 찾아왔겠습니까.”
- ‘김현희의 편지’를 단독 보도한 《월간조선》 2008년 12월호의 제목이 “나는 법원의 3심, 국정원의 4심을 거쳐, 진실화해위(委)에서 5심을 당하고 있다”였는데요.
“국정원 과거사위의 경우 고영구(高泳耉) 국정원장이 처음엔 안 만든다고 하다가 결국 만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집요하게 국정원에서 조사받을 것을 강요했습니다. 그건 조사를 위한 조사가 아닙니다. 이른바 ‘의혹’은 구실일 뿐이었고요. 국정원은 그 누구보다 제가 가짜가 아니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른 목적이 있었던 겁니다. 저는 자동차 바퀴가 동그랗다고 말하는데, 그들은 제 입에서 네모란 말이 나올 때까지 흔들어대려 했어요. 그들은 제게 절대로 직접적으로 ‘바퀴가 네모라 말해’라고는 하지 않죠. 스스로 말하게끔 괴롭히는 게 그들의 공작입니다. 끈질기게 찾아온 수사관들 중에는 폭파사건 당시 저를 직접 조사했던 이들도 있었습니다. 서로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자기가 파헤쳐낸 진실을 스스로 뒤엎으려 하는 데 놀랐습니다.”
- 국정원 직원들이 어떻게 설득하려 했습니까.
“회유, 설득, 위협, 협박, 모든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남편의 친구, 친척까지 동원해서 그들을 통해 이야기를 전해오기도 했습니다. ‘쉽게 살지 왜 그렇게 사느냐’고 말하는 이도 있었고, 나중엔 가족을 죽인다는 소리까지 나오더군요. 아이들이 많이 울었습니다. ‘시커먼 사람들’이 집 앞에 와서 문 열라고 소리칠 때마다 종일 바깥으로 못 나갔죠. 외출 중 마주친 남자들과 아빠가 싸우는 모습을 많이 봐서 한동안 양복 입은 사람만 봐도 ‘나쁜 사람’이라며 기겁하고 울 정도였습니다.”
아이들, 유치원도 못 보내
- 25년 전 사건 땐 혼자였지만, ‘김현희 가짜 만들기’ 몰이 때는 온 가족이 함께 고통을 당했는데요.
“육체적, 정신적으로 모두 최악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배신감과 비참함에 치를 떨었습니다. 등에 칼을 꽂힌 심정이 그런 거였을 겁니다. 나중엔 이민 가라는 얘기까지 나오더군요. 처음엔 2년만 이민 가 있으라고 하다가 안 되니까 1년만 가라는 식으로 기간을 줄이면서요. 그 난리통에 아이들 유치원도 못 보냈습니다. 요즘 학교에 다니는 애들이 ‘나는 왜 유치원 못 갔어’라고 묻는데 뭐라 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녁에 애들 자는 모습 보면 부모 잘못 만나 이렇게 고생하는 것 같아서 눈물이 납니다.”
아이들 앞에서는 그녀 역시 어쩔 수 없는 한 어머니였다. 격앙되어 피를 토하듯 말을 쏟아내던 그녀였지만 아이들 이야기를 하면서는 다시 눈물을 보였다. 오늘 인터뷰 중 몇 번째인가? 우리는 또 잠시 숨고르기에 들어간 채 창밖으로 내리는 가을비를 함께 바라보았다. 그녀가 다시 몸을 곧추세웠다.
- 이민 가라는 얘기는 어떻게 받아들였습니까.
“제가 마음을 잘못 먹든가, 멀리 어디론가 떠나버리는 게 바로 그들이 바라는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를 악물고 버텨야 한다고 결심했죠. 한국에서 ‘증거’가 눈 뜨고 버티니 노골적으로 조작을 못 했지만, 만약 그때 이민 갔다면 그들 마음대로 이 사건을 뒤흔들었을 겁니다. ‘가짜라서 도망갔다’고 하고 귀국 못 하게 하면 어떻게 할 방법이 없지 않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외국으로 나갔다가 청부살인당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힘들어도 죽겠다는 각오로 목숨 내놓고 한국에서 버텨야 했습니다.”
- 이민 가라는 얘기는 직접 들었습니까.
“국정원 측은 저를 만나기 전에 먼저 남편에게 접촉합니다. 남편에게 두 번에 걸쳐 이민을 가라고 얘기했다고 해요. ‘가짜 만들기’ 내사 결과도 보면, (이민 가라고 한) 직원 이름도 다르게 나오더군요.”
집으로 못 돌아간다
김현희씨가 말한 ‘가짜 만들기’ 내사 결과라는 것은 2009년 초 김현희씨가 진정을 통해 ‘김현희 가짜 만들기’에 나선 국정원 직원 조사와 처벌 등을 요구한 사건에 대해 내사를 벌인 국정원이 검찰에 조사를 의뢰한 사건을 말한다. 서울중앙지검은 지난 2009년 11월 10일 국정원이 조사의뢰한 이 사건에 대해 ‘혐의 없음’ 결정을 내렸다.
- 《월간조선》 보도 후 국정원 자체조사가 진행된 것으로 아는데요.
“갑자기 조사한다고 했는데 크게 기대하진 않았어요. 제대로 할 리도 없었고요. 제 일본어 선생이었던 일본인 납북자 다구치 야에코(田口八重子) 가족을 부산에서 만난 직후인 2009년 3월 말 자체조사팀에서 내려와 고통을 준 것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며 중간조사 결과 ‘정황상 (국정원의) 공작’이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정부 차원에서 가짜 만들기 공작을 했다고 국정원이 인정한 셈이죠. 《월간조선》이 공개한 제 편지 내용 중 틀린 게 있느냐고 물었더니 없다고도 했어요. 모두 맞는 내용이지만, 조사에 한계가 있으니 4월경에 검찰에 넘겨 확실히 보강하겠다고 했습니다.”
- 검찰에선 오히려 국정원 자체조사보다도 못한 ‘무혐의’ 처분이 나왔는데요.
“검찰에서는 확실하게 하겠다면서 계속 기다리라고 하더군요. 4월에 검찰로 넘겨졌다는데, 11월까지 기다려서 받은 결과가 이 ‘혐의 없음’인 거예요. 국정원이 모두 인정한 것을 어떻게 검찰이 뒤집을 수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 원세훈(元世勳) 국정원장과도 따로 만났다고 들었는데요.
“작년 초에 만났습니다.”
- 구두로나마 국정원의 과거 무례에 대해 사과하던가요.
“정식이든 구두로든 사과는 하지 않았어요. ‘국정원 과거사위가 (김현희는) 가짜가 아니라고 결론 냈기 때문에 현재 국정원이 뭘 할 수는 없다’고 하더군요. 억울하면 개인이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 화가 많이 났겠습니다.
“괜히 만났다 싶었습니다. 정말 실망했고 모멸감을 느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잘못 만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원장이란 분이 이 사건의 중요성을 잘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대화 중에 계속 간부에게 이것저것 묻고 보고를 받더군요. 다른 건 모르겠고, (쫓겨난) 집 문제는 개별적으로 해결해 주겠다고 하더군요. 너무 실망했습니다.”
-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아무 대답도 안 했습니다. 더 이상 말하고 싶지도 않았고요. 올 초에도 국정원 사람이 ‘원장이 또 보자고 한다’고 했습니다. 거절했습니다. ‘제대로 해결 안 되면 계속 투쟁할 수밖에 없다’고 전하라고 했습니다.”
- 원래 살던 집으론 언제 돌아갈 것 같습니까.
“모르겠습니다. 국정원의 해당 직원 처벌과 사과 없이는 그냥 돌아갈 순 없습니다. 개인도 아닌 국가기관이 국가의 기강을 흔드는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명백한 범죄행위를 저질렀는데도 그냥 두고 넘어가면 또다시 이런 일이 안 일어나리란 법은 없습니다. 다시는 자국민이 테러를 당한 사건을 두고 장난을 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끝까지 책임을 묻고 싶고 물을 겁니다.”
제일 고마운 사람은 남편
- 세월이 지나면 또다시 ‘가짜 논란’이 제기될 수도 있는데요.
“저는 논란이나 의혹이 제기된 것이 아니라 정부기관이 조직적, 계획적, 체계적으로 자행했다고 봅니다. 개인 몇 사람이 의혹을 제기한다고 해서 이 정도까지 확대되진 않습니다. 국정원이 바로 가짜 만들기 공작의 배후이자 주범입니다. 지난 10월 국정감사 때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가 나를 증인으로 채택했다는 뉴스를 봤습니다. 적극적으로 얘기하기 위해 기다렸는데, 어떤 루트로든 연락이 없더군요. 김만복 전 국정원장만 출석해 ‘조작 없었다’고 한 얘기만 보도된 것으로 압니다. 숨어 살고 있을 때도 잘만 찾아오던 사람들이 TV까지 출연하는 지금은 ‘주소 불분명’이라고 하니 헛웃음만 나옵니다.”
- 정식 통보가 왔으면 국회에 출석할 생각이었습니까.
“부르면 나가서 할 얘기 다 하려고 했습니다. 제가 국회에 나가는 것을 마다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기사를 보니 김만복씨만 출석해 ‘가짜로 만들려고 한 적 없다’고 했다는데, 그들은 제게 대놓고 ‘가짜라고 말해’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드러내놓고 했다면 공작도 아니지요. 공작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강요하는 것보다 몇 배로 괴롭혀 스스로 거짓을 말하게 하려 했던 겁니다. 국감에 못 나간 것을 두고 한 매체에선 ‘TV조선에는 나오고 국정감사에는 안 나왔다’고 비판하던데 정식으로 불러주어야 나갈 것 아닙니까.”
- ‘가짜 만들기’ 당시 노무현 정권의 의도가 무엇이었다고 봅니까.
“KAL기 사건 때문에 북한이 테러지원국이 됐으니 이를 뒤집어 정상회담도 추진하고 하려는 의도가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대한민국 입장에서 이는 이적행위예요. 안보의 최전선에 있는 정부기관이 이적행위를 하는 일은 세계 정보사(史)에 남을 일입니다. 세계의 웃음거리가 될 일, 아니 이미 웃음거리가 된 일입니다. 그걸 아직도 반성 안 하고 있습니다.”
- KAL기 폭파를 직접 지시했던 김정일이 지난해 말 사망했는데 소식을 접했을 당시 기분이 어떻던가요.
“독재자가 죽어 한편 시원했지만, 다른 한편은 사과를 안 하고 죽어서 허무했습니다.”
- 북한 사람으로 25년을 살았고, 대한민국 국민으로 25년을 살았습니다. 소회가 어떻습니까.
“25년 살면서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더 잘 알게 됐습니다. 그걸 아직 잘 모르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안타깝습니다. 제가 할 일이 아직 남은 것 같습니다. 요즘 TV조선에 출연하는 이유도 이를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제가 ‘진짜’라는 것, 북한이 무엇을 했다는 것, 일부 남한 조직이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사건을 뒤집으려고 했다는 것. 작은 외침이지만 조금이나마 안보교육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남한에서 산 25년 동안 제일 고마운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래도 역시 남편이죠. 낮에는 모르지만 밤이 되면 불빛은 더욱 환해지게 마련입니다. 사람도 어려움을 당했을 때 인간성이 드러나는 것 같아요. 친구처럼 지내던 사람이 정권이 바뀌면서 등에 칼을 꽂는 경우도 봤어요. 진실된 사람 찾는 게 쉽진 않더군요.”
희생자 위해 남해 화방사에서 삼천배
- 1995년 3월 KAL 858기 희생자를 위로하기 위해 삼천배(三千拜)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 당시 안기부 담당 간부가 독실한 불교신자였습니다. 저를 많이 도와주신 분인데 경남 남해의 화방사(花芳寺)에 가서 천도재(薦度齋)를 지내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하더군요. 저는 그때 유가족 분들을 위해서라면 뭐라도 해야 한다는 심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있었지만 종교라도 내놓으라면 내놓고 싶은 심정에 승낙했습니다. 여러 스님, 신자분들과 함께 내려가 4일 동안 삼천배를 했습니다.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많은 분이 도와주셨습니다.”
- 희생자를 위해 천도재를 올렸다는 사실이 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나요.
“제가 기독교 신자이기도 했고, 굳이 알리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몸과 마음으로 천도재를 했으니 희생자 분들이 좋은 데 가셨을 거라 믿습니다. 스님도 ‘마음이 좀 가벼워지지 않았느냐’며 위로해 주셨습니다.”
- 유가족에게 전할 말은.
“너무나 큰 고통을 안겨준 것에 대해서 지금도 항상 깊이 사죄드리고 있습니다. 이젠 좀 편안한 삶을 살기를 기도하고 또 할 겁니다.”
창밖으로 내리는 노란 가을비를 보며 그녀는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북한에 두고 온 가족 생각 아니면 남한에서 새로 생긴 가족? 아니면 25년 전 떠나간 KAL 858기 희생자들?
기자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날은 그녀의 어깨 위로 떨어지는 작은 바람조차 너무나 무거워 보였으므로.⊙
월간조선 2012년 12월호
⊙ 국정원은 구두로 ‘김현희 가짜 만들기’는 정부 차원 공작 인정했었다
⊙ 국정원 직원은 “이민을 가라”고까지 했다
⊙ 남산 지하실에서 처음 만난 남편과는 2년간 교제 후 결혼
⊙ 유치원도 못 보낸 두 아이 생각하면 가슴 아파
김현희 씨. ⓒ서경리
그녀는 남한에 온 지 10년 만에 한 남자를 만나 결혼했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됐다. 한 남자의 아내이자 두 아이의 엄마가 됐다는 외피만을 놓고 볼 때 그녀는 평범한 주부의 삶을 살아야 하지만 그녀의 삶은 여전히 고단하다. 북한의 테러를 입증하는 증거로 살아야 하는 운명이었기에 그 증거를 없애버리고 싶은 세력이나 가짜로 만들어 북한을 이롭게 하고 싶은 세력들에 의해 끊임없이 시달려 왔고 지금도 시달리고 있다.
좌파 정권과 좌파적 언론의 ‘가짜 만들기’ 공세에 시달리다 못해 2003년 11월 젖먹이 아이 등 가족과 함께 집을 나온 그녀는 지금까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결혼생활 중 절반 이상의 세월을 바깥을 떠돌며 지내고 있는 것이다. 내년 이맘때면 집 나온 지 10주년 기념식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최근에도 일부 좌파 언론은 김현희씨가 국회 국정감사에 출석하지는 않고 TV 조선 프로에만 출연한다고, 사실과 다른 공격을 하고 있다. 김현희씨는 국감에 출석해 ‘김현희 가짜 만들기’의 진상을 밝히겠다는 입장이었지만 국회는 그녀에게 출석을 통보하지 않았다. 김현희씨와는 상대적 입장을 가진 김만복(金萬福) 전 국정원장만 증인으로 출석시켰을 뿐이다. 좌파 언론은 주소 불명을 이유로 김현희씨에게 출석 통보를 하지 않은 국회의 직무유기를 지적했어야 옳았다. 김현희씨와 연락이 가능하다는 것을 국회가 모를 리 없기 때문이다.
김현희씨는 사건 발생 25주기를 맞아 가진 《월간조선(月刊朝鮮)》과의 인터뷰에서도 “국회가 부르면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부르지 않았다”고 분명히 밝혔다.
“서울 오는 비행기에서 혁명가 부르며 눈 감았다”
- 이달 말이면 KAL기 폭파 사건 25주기를 맞게 됩니다. 김현희씨와 관련 지금도 가장 많이 인용되는 사진이 한국 이송 후 비행기 트랩에서 내려오는 장면인데 그때 심정이 기억나는지요.
“전쟁기념관을 갔었는데 그 사진을 큼지막하게 해서 걸어놨더군요. 지금도 그 사진을 보면 기분이 썩 좋진 않아요. 그땐 그냥 ‘죽었구나’ 하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체포된) 바레인에서부터 계속 남한에만은 절대 안 가겠다고 버텼죠. 바레인에서 재판받고 사형당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요. 남한에 가봐야 비밀만 다 털리고 죽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죠. 그러다 밤에 갑자기 차에 실려 어디론가 떠났는데 공항이었어요. 엔진 소음을 들으며 문득 비행기 창밖을 보는데 KAL기 마크가 보이더군요. 순간 눈이 저절로 감기는데 그때부터 눈을 감아버리고 안 떴어요. 속으로 혁명가요를 부르며 어떻게 하면 ‘악랄한 고문’ 속에서 비밀을 지킬 수 있을까만을 생각했습니다.”
- 압송돼 오는 비행기 안에서 북한에 있는 가족 생각은 나지 않던가요.
“그때는 가족을 떠올리고 할 여유가 없었어요. 당장 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만 생각했죠.”
- 한국행 비행기 안의 분위기는 기억납니까.
“수사관들이 자기들끼리 계속 대화를 나눴어요. ‘건강한 애가 밥을 안 먹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나’는 등 잡담을 하더군요. 도착할 때쯤 되니 간부 같은 사람이 와서 ‘다 왔다’며 말을 하는데 계속 눈물만 났어요. 그 간부는 ‘좋은 데 왔는데 왜 울어’라고 하더군요. 죽으려 해도 죽을 수가 없는 상황이 보기도 싫고 세상도 싫었어요. 처절한 심정이었습니다.”
당시 상황이 떠오르는 듯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그녀는 그 당시의 심정과 북한에 두고 온 가족 얘기, 유족에 대한 심정을 묻는 질문에 눈물을 보였다. 기자는 오래전에도 그녀의 눈물을 본 적이 있다. 그녀와 식사를 하는 자리에 김일성 대학을 졸업한 탈북자를 불렀는데 그 탈북자와 자신이 다니던 대학 부근의 국숫집 등 평양거리를 이야기하면서였다.
김현희씨가 졸업한 평양외대는 김일성대와 서로 마주보는 곳에 있다. 스무 살 남짓 적은 그 탈북자가 자신이 다니던 평양 삼흥역 부근 골목에 있는 국숫집 이야기를 하자 “아, 그 집이 그때까지도 있었어?” 하며 한참을 울먹였던 적이 있었다. 삼흥역 골목 왼쪽으로 가면 평양외대, 오른쪽으로 가면 김일성대 기숙사가 있었다고 한다. 그녀에게 고향은 언제나 아픔이었던 것이다.
잠꼬대할까 봐 잠도 못 자
1987년 12월 김포공항을 통해 압송돼 오고 있는 김현희씨. 그녀는 지금도 이 사진을 보면 기분이 썩 좋지 않다고 한다. |
“한국어를 모르는 척 연기하는 게 힘들었어요. 잠꼬대를 조선말로 할까 봐 밤에 잠도 잘 못 잤죠. 수사 초반엔 계속 거짓말을 했어요.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출신 고아라고 꾸며댔죠. 김승일(金勝一)과 어떻게 만났는지도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했습니다. 교육받은 대로 거짓말을 했지만 한계가 오더군요. 진짜 중국인까지 불러내 중국어의 허점을 잡아내니 버텨낼 수가 없었어요. 이후 남산에서 나와 서울을 둘러보게 됐는데 북에서 교육받은 것과 달리 좋은 곳이란 것을 알게 됐죠. 거짓말도 한계가 왔고 죄책감까지 들어 힘들었어요. 결국 8일 만에 자백했죠. 처음 ‘김현희’란 본명을 말하고 나서 여성 수사관에게 ‘언니 미안해’라고 조선말을 할 땐 후련하기까지 했어요.”
또 한 번 그녀를 울리는 질문을 했다.
- 사형선고를 받을 때 심정은 어떠했습니까.
“원통한 것도 있었지만 지은 죄가 있으니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도 인간인지라 ‘사형’이란 말을 듣는 순간, ‘정말 끝이구나, 내 인생이 이렇게 끝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맥이 탁 풀렸어요. 부모님과 동생들 생각이 났어요. 특히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났어요. ‘나를 예쁘게 키워주셨는데 딸 소식을 들으면 얼마나 가슴이 아프실까….”
인터뷰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잠시 시간이 필요했다.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는 눈물 위로 그녀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모습이 몇 번인가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그녀 마음속의 미움을 끌어내야 했다.
- 사형 선고를 받았을 때 김정일에 대한 원망은 떠오르지 않던가요.
“저를 이렇게 만든 게 김정일, 김일성(金日成)인데 어떻게 그런 마음이 생기지 않겠어요. 만감이 교차했다고 해야 하나.”
- 사면(赦免)이 된다는 언질을 사전에 받은 것은 아닌가요.
“사실 그런 질문을 많이 들었어요. 분명한 것은 사전에 전혀 몰랐다는 사실이에요. 그때는 제가 진 죄가 무거운 걸 잘 알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사형을 당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죄인이니 제가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는 심정이었죠. 제 사면 소식은 TV뉴스를 보고 알았어요.”
- 사면이 됐다는 뉴스를 들을 때는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내가 살아도 되는가’ 하는 생각부터 들더군요. 제가 아는 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큰 죄인의 몸으로 혼자 어떻게 살아갈까 걱정도 됐고요. 기독교를 받아들인 터라 죽었던 저를 살려주시고 새 생명을 주신 하나님과 대한민국에 감사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슬프거나 기쁠 땐 부모님 생각이 납니다. 죽음의 문턱에 섰다가 다시 살아난 소식을 부모님께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임수경씨와의 만남
1988년 1월 15일 기자회견을 갖고 있는 김현희씨. |
임수경씨는 한국 외국어대학교 용인캠퍼스 4학년에 재학 중이던 1989년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석하기 위해 밀입북했다가 그해 8월 15일 판문점을 통해서 돌아왔다. 이 밀입북 사건으로 임씨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국가안전기획부에서 조사를 받고 있었다. 이때 두 사람이 만나게 된 것이다.
- 임수경씨와 만난 때를 기억합니까.
“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남산 지하실에 오래 있다가 건강이 안 좋아져 거처를 옥상 쪽으로 옮겼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대화 내용이 정확히는 기억 안 나지만, 그는 북한에도 좋은 아파트가 있고 인민들이 잘산다는 식으로 얘기했죠. 저는 겉으로만 그럴 뿐 실상은 다르다고 했지만, 잘 받아들이는 것 같지 않았어요. 자기는 자기대로 저는 저대로 얘기를 해 대화가 잘 안 됐던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 그때 말이 통하지 않는 임수경씨를 보면서 어떤 느낌이 들었습니까.
“솔직히 철없어 보였죠. 남한 젊은이들이 정말 환상에 젖어 북한 실상을 너무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북한은 ‘쇼의 나라’예요. 실상을 절대 보여주지 않습니다. 환상에 젖은 그녀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웠습니다.”
- 그랬던 그녀가 지금은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 됐습니다. 그런 걸 보면서 혹시 남산 지하실에서 만났을 때의 그 광경이 다시 떠오르지는 않던가요.
“얼마 전 탈북자에게 배신자라고 해 논란이 된 것으로 압니다. 목숨을 걸고 자유를 찾아왔는데, 그들을 도와주고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우지는 못할망정 잘못된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듯해서 여전히 안타까움을 느꼈죠. 대부분 탈북자가 그의 ‘배신자’란 발언에 분노하지만, 사실 저는 누군가가 저를 배신자라고 해줬으면 하는 심정입니다. 저는 ‘배신자’도 못 돼 ‘가짜’라는 공격을 받지 않았습니까. 북한이 제게 배신자라고 한 번만 말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 안기부 지하실에서 임수경씨 외에 만난 사람은 없었나요.
“수사 중엔 이상규와 전충남을 만났습니다. 이후 ‘부부간첩’으로 유명한 최정남, ‘신세대 간첩’ 김동식 등을 만났는데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서 만난 자리였습니다. 남한이 어떤 곳인지 얘기했지만, 긴 대화는 나누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황장엽(黃長燁) 선생도 망명 후 만났죠.”
안기부 지하실에서 처음 만난 남편
- 사건 발생 10년 후 김현희씨 수사에 참여했던 안기부 요원과 결혼을 하게 되는데 혹시 안기부가 결혼을 지원했던 것은 아닌가요.
“안기부는 제 결혼을 반대했어요. 결혼 이야기만 나와도 담당자들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혹시 수녀가 될 생각은 없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수녀에 대해 잘 모르기도 했고, 신(神)의 뜻이라 생각해 ‘마음대로 수녀 되는 건 아니지 않으냐’고 답했습니다. 그런데 저를 어떻게 사회에 내보낼지 방안을 쓴 안기부 보고서를 보니 수녀로 만드는 항목도 있더군요. 담당자들이 결혼 얘기는 꺼려 했지만, 수녀 얘기는 좋아했습니다.”
김현희씨와 인터뷰가 끝난 후 남편 정모씨에게 “당시 안기부가 김현희씨를 수녀로 만들고 싶어 했느냐”고 물었다. 정씨는 “당시 안기부에서 김현희씨가 수녀가 되기를 원했던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 남편은 어떻게 만났습니까.
“항상 보호와 감시 속에 있어 외롭고 답답했습니다. 안기부가 저를 할머니가 될 때까지 보호해 줄 것은 아니지 않으냐는 생각도 들었고요. 독립을 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혼자 나간다 하면 보내주지도 않을 것 같아 결혼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중 남편을 만났습니다. 저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았던 수사관이라 차라도 한 잔 하고 싶다고 얘기했는데, 1995년 말 둘이 만날 기회가 생겨 교제를 시작했습니다. 2년간 교제한 거죠”
-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게 되리라고 예상했습니까.
“전혀요. 지금 돌이켜보니, 수사관 중에 가장 오랜 세월 알았던 사람이 지금의 남편이에요. 남산 지하실로 끌려갔을 때 만났으니까요. 마음이 따뜻하고 남을 배려하는 모습이 인상에 남았습니다. 저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니 서로 대화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 교제를 할 때는 안기부 몰래 만났습니다.”
- 두 사람이 결혼한다고 했을 때 안기부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안기부에 얘길하니 당장 어떻게 조치할지 당황해 하더군요. 희생자 유가족 문제도 있고 해서 언론에 퍼질까 쉬쉬하며 2년을 끌었습니다. 그런데 1997년 12월 대선(大選)에서 정권이 바뀐다 하니 갑자기 결혼하라고 하더군요. 12월 18일이 대선이었고, 정확히 10일 후인 28일에 결혼했습니다.”
- 결혼 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혔다가 ‘김현희 가짜 만들기’ 때문에 다시 여론의 주목을 받게 됐습니다. 좌파 단체뿐 아니라 유족까지 가짜라고 주장했는데요.
“너무 안쓰러워 보였습니다. 결혼 직전에 유가족 분들 뵙고 서로 울며 인사까지 나눴는데, 정권 바뀌고 일부 유가족 분들이 그렇게 나오니 당황스러웠습니다. 좌파 단체가 ‘KAL 858 대책위’라고 만들면서 일부 유가족 분들을 회유해 이용했다고 생각합니다. ‘대책위’라고 만들었는데 유가족 분들을 빼면 명목이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명목을 위해 유가족을 방패로 내세우고 뒤에서 조종했다고 봅니다. 이런 배후 세력들은 유가족뿐 아니라 돌아가신 희생자의 영혼까지 이용하는 질이 나쁜 이들입니다.”
김현희씨는 TV조선 <북한 사이드스토리>에 고정 출연하고 있다. 지난 10월 24일 녹화장면이다. |
내게 “자동차 바퀴는 네모”라고 말하게 하려는 사람들
- 노무현(盧武鉉) 정권이 들어선 후 벌어진 일들을 간략히 설명해 주시죠.
차분했던 그녀의 목소리가 격앙됐다.
“별난 일이 많았어요. 조작설(說)에 대한 책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MBC 취재진이 아파트까지 들이닥치는 일이 벌어졌죠. 국정원에선 대놓고 MBC에 출연하라고 강요했습니다. ‘지휘부’가 (MBC에) 총지원하라고 했으니 무조건 방송에 나가라는 거예요. 계속 거부하니까 직접 못 만나겠으면 전화인터뷰라도 하라고 했습니다. 심지어 ‘인터뷰해 주면 집 공개는 안 하겠다’는 MBC 기자의 말을 그대로 전하는 담당관까지 있었습니다. 남편이 너무 화가 나서 ‘담당관이란 사람이 그 소리 듣고도 가만히 있었느냐, 국정원이 MBC에 집 주소 알려준 것 맞구나’라고 했더니 아무 말도 못하더군요. 그렇게 전화를 끊고 나서부터 휴대전화와 집전화를 모두 없애버렸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공중전화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 2003년 11월 MBC 취재진이 집에 온 날 상황은 어땠나요.
“남편이 경기도 모처에서 국정원 직원들과 MBC 출연 문제로 만나고 있을 때였습니다. 출연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짓고 국정원 내부 설명회에만 참석하기로 합의를 봤답니다. 남편이 그러는 사이 저와 아이들밖에 없는 집에 취재진이 ‘습격’을 한 겁니다. 국정원이 알려주지 않았다면 MBC가 어떻게 알고 남편도 없는 정확한 시점에 집까지 찾아왔겠습니까.”
- ‘김현희의 편지’를 단독 보도한 《월간조선》 2008년 12월호의 제목이 “나는 법원의 3심, 국정원의 4심을 거쳐, 진실화해위(委)에서 5심을 당하고 있다”였는데요.
“국정원 과거사위의 경우 고영구(高泳耉) 국정원장이 처음엔 안 만든다고 하다가 결국 만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집요하게 국정원에서 조사받을 것을 강요했습니다. 그건 조사를 위한 조사가 아닙니다. 이른바 ‘의혹’은 구실일 뿐이었고요. 국정원은 그 누구보다 제가 가짜가 아니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른 목적이 있었던 겁니다. 저는 자동차 바퀴가 동그랗다고 말하는데, 그들은 제 입에서 네모란 말이 나올 때까지 흔들어대려 했어요. 그들은 제게 절대로 직접적으로 ‘바퀴가 네모라 말해’라고는 하지 않죠. 스스로 말하게끔 괴롭히는 게 그들의 공작입니다. 끈질기게 찾아온 수사관들 중에는 폭파사건 당시 저를 직접 조사했던 이들도 있었습니다. 서로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자기가 파헤쳐낸 진실을 스스로 뒤엎으려 하는 데 놀랐습니다.”
- 국정원 직원들이 어떻게 설득하려 했습니까.
“회유, 설득, 위협, 협박, 모든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남편의 친구, 친척까지 동원해서 그들을 통해 이야기를 전해오기도 했습니다. ‘쉽게 살지 왜 그렇게 사느냐’고 말하는 이도 있었고, 나중엔 가족을 죽인다는 소리까지 나오더군요. 아이들이 많이 울었습니다. ‘시커먼 사람들’이 집 앞에 와서 문 열라고 소리칠 때마다 종일 바깥으로 못 나갔죠. 외출 중 마주친 남자들과 아빠가 싸우는 모습을 많이 봐서 한동안 양복 입은 사람만 봐도 ‘나쁜 사람’이라며 기겁하고 울 정도였습니다.”
아이들, 유치원도 못 보내
2009년 3월 11일 부산 벡스코 행사장에서 김현희씨가 북한에 있을 때 자신의 일본어 교사였던 다구치 야에코(田口八重子) 씨의 장남인 이즈카 고이치로(飯塚耕一郞) 씨와 포옹하고 있다. |
“육체적, 정신적으로 모두 최악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배신감과 비참함에 치를 떨었습니다. 등에 칼을 꽂힌 심정이 그런 거였을 겁니다. 나중엔 이민 가라는 얘기까지 나오더군요. 처음엔 2년만 이민 가 있으라고 하다가 안 되니까 1년만 가라는 식으로 기간을 줄이면서요. 그 난리통에 아이들 유치원도 못 보냈습니다. 요즘 학교에 다니는 애들이 ‘나는 왜 유치원 못 갔어’라고 묻는데 뭐라 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녁에 애들 자는 모습 보면 부모 잘못 만나 이렇게 고생하는 것 같아서 눈물이 납니다.”
아이들 앞에서는 그녀 역시 어쩔 수 없는 한 어머니였다. 격앙되어 피를 토하듯 말을 쏟아내던 그녀였지만 아이들 이야기를 하면서는 다시 눈물을 보였다. 오늘 인터뷰 중 몇 번째인가? 우리는 또 잠시 숨고르기에 들어간 채 창밖으로 내리는 가을비를 함께 바라보았다. 그녀가 다시 몸을 곧추세웠다.
- 이민 가라는 얘기는 어떻게 받아들였습니까.
“제가 마음을 잘못 먹든가, 멀리 어디론가 떠나버리는 게 바로 그들이 바라는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를 악물고 버텨야 한다고 결심했죠. 한국에서 ‘증거’가 눈 뜨고 버티니 노골적으로 조작을 못 했지만, 만약 그때 이민 갔다면 그들 마음대로 이 사건을 뒤흔들었을 겁니다. ‘가짜라서 도망갔다’고 하고 귀국 못 하게 하면 어떻게 할 방법이 없지 않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외국으로 나갔다가 청부살인당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힘들어도 죽겠다는 각오로 목숨 내놓고 한국에서 버텨야 했습니다.”
- 이민 가라는 얘기는 직접 들었습니까.
“국정원 측은 저를 만나기 전에 먼저 남편에게 접촉합니다. 남편에게 두 번에 걸쳐 이민을 가라고 얘기했다고 해요. ‘가짜 만들기’ 내사 결과도 보면, (이민 가라고 한) 직원 이름도 다르게 나오더군요.”
집으로 못 돌아간다
김현희씨가 말한 ‘가짜 만들기’ 내사 결과라는 것은 2009년 초 김현희씨가 진정을 통해 ‘김현희 가짜 만들기’에 나선 국정원 직원 조사와 처벌 등을 요구한 사건에 대해 내사를 벌인 국정원이 검찰에 조사를 의뢰한 사건을 말한다. 서울중앙지검은 지난 2009년 11월 10일 국정원이 조사의뢰한 이 사건에 대해 ‘혐의 없음’ 결정을 내렸다.
- 《월간조선》 보도 후 국정원 자체조사가 진행된 것으로 아는데요.
“갑자기 조사한다고 했는데 크게 기대하진 않았어요. 제대로 할 리도 없었고요. 제 일본어 선생이었던 일본인 납북자 다구치 야에코(田口八重子) 가족을 부산에서 만난 직후인 2009년 3월 말 자체조사팀에서 내려와 고통을 준 것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며 중간조사 결과 ‘정황상 (국정원의) 공작’이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정부 차원에서 가짜 만들기 공작을 했다고 국정원이 인정한 셈이죠. 《월간조선》이 공개한 제 편지 내용 중 틀린 게 있느냐고 물었더니 없다고도 했어요. 모두 맞는 내용이지만, 조사에 한계가 있으니 4월경에 검찰에 넘겨 확실히 보강하겠다고 했습니다.”
- 검찰에선 오히려 국정원 자체조사보다도 못한 ‘무혐의’ 처분이 나왔는데요.
“검찰에서는 확실하게 하겠다면서 계속 기다리라고 하더군요. 4월에 검찰로 넘겨졌다는데, 11월까지 기다려서 받은 결과가 이 ‘혐의 없음’인 거예요. 국정원이 모두 인정한 것을 어떻게 검찰이 뒤집을 수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 원세훈(元世勳) 국정원장과도 따로 만났다고 들었는데요.
“작년 초에 만났습니다.”
- 구두로나마 국정원의 과거 무례에 대해 사과하던가요.
“정식이든 구두로든 사과는 하지 않았어요. ‘국정원 과거사위가 (김현희는) 가짜가 아니라고 결론 냈기 때문에 현재 국정원이 뭘 할 수는 없다’고 하더군요. 억울하면 개인이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 화가 많이 났겠습니다.
“괜히 만났다 싶었습니다. 정말 실망했고 모멸감을 느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잘못 만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원장이란 분이 이 사건의 중요성을 잘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대화 중에 계속 간부에게 이것저것 묻고 보고를 받더군요. 다른 건 모르겠고, (쫓겨난) 집 문제는 개별적으로 해결해 주겠다고 하더군요. 너무 실망했습니다.”
-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아무 대답도 안 했습니다. 더 이상 말하고 싶지도 않았고요. 올 초에도 국정원 사람이 ‘원장이 또 보자고 한다’고 했습니다. 거절했습니다. ‘제대로 해결 안 되면 계속 투쟁할 수밖에 없다’고 전하라고 했습니다.”
- 원래 살던 집으론 언제 돌아갈 것 같습니까.
“모르겠습니다. 국정원의 해당 직원 처벌과 사과 없이는 그냥 돌아갈 순 없습니다. 개인도 아닌 국가기관이 국가의 기강을 흔드는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명백한 범죄행위를 저질렀는데도 그냥 두고 넘어가면 또다시 이런 일이 안 일어나리란 법은 없습니다. 다시는 자국민이 테러를 당한 사건을 두고 장난을 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끝까지 책임을 묻고 싶고 물을 겁니다.”
1995년 4월 경기도 이천에서 열린 평통 강연에 연사로 나선 김현희씨. 사면 후 김씨는 군부대 강연 등을 통해 국민의 안보의식을 고취했다. |
제일 고마운 사람은 남편
- 세월이 지나면 또다시 ‘가짜 논란’이 제기될 수도 있는데요.
“저는 논란이나 의혹이 제기된 것이 아니라 정부기관이 조직적, 계획적, 체계적으로 자행했다고 봅니다. 개인 몇 사람이 의혹을 제기한다고 해서 이 정도까지 확대되진 않습니다. 국정원이 바로 가짜 만들기 공작의 배후이자 주범입니다. 지난 10월 국정감사 때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가 나를 증인으로 채택했다는 뉴스를 봤습니다. 적극적으로 얘기하기 위해 기다렸는데, 어떤 루트로든 연락이 없더군요. 김만복 전 국정원장만 출석해 ‘조작 없었다’고 한 얘기만 보도된 것으로 압니다. 숨어 살고 있을 때도 잘만 찾아오던 사람들이 TV까지 출연하는 지금은 ‘주소 불분명’이라고 하니 헛웃음만 나옵니다.”
- 정식 통보가 왔으면 국회에 출석할 생각이었습니까.
“부르면 나가서 할 얘기 다 하려고 했습니다. 제가 국회에 나가는 것을 마다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기사를 보니 김만복씨만 출석해 ‘가짜로 만들려고 한 적 없다’고 했다는데, 그들은 제게 대놓고 ‘가짜라고 말해’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드러내놓고 했다면 공작도 아니지요. 공작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강요하는 것보다 몇 배로 괴롭혀 스스로 거짓을 말하게 하려 했던 겁니다. 국감에 못 나간 것을 두고 한 매체에선 ‘TV조선에는 나오고 국정감사에는 안 나왔다’고 비판하던데 정식으로 불러주어야 나갈 것 아닙니까.”
- ‘가짜 만들기’ 당시 노무현 정권의 의도가 무엇이었다고 봅니까.
“KAL기 사건 때문에 북한이 테러지원국이 됐으니 이를 뒤집어 정상회담도 추진하고 하려는 의도가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대한민국 입장에서 이는 이적행위예요. 안보의 최전선에 있는 정부기관이 이적행위를 하는 일은 세계 정보사(史)에 남을 일입니다. 세계의 웃음거리가 될 일, 아니 이미 웃음거리가 된 일입니다. 그걸 아직도 반성 안 하고 있습니다.”
- KAL기 폭파를 직접 지시했던 김정일이 지난해 말 사망했는데 소식을 접했을 당시 기분이 어떻던가요.
“독재자가 죽어 한편 시원했지만, 다른 한편은 사과를 안 하고 죽어서 허무했습니다.”
- 북한 사람으로 25년을 살았고, 대한민국 국민으로 25년을 살았습니다. 소회가 어떻습니까.
“25년 살면서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더 잘 알게 됐습니다. 그걸 아직 잘 모르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안타깝습니다. 제가 할 일이 아직 남은 것 같습니다. 요즘 TV조선에 출연하는 이유도 이를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제가 ‘진짜’라는 것, 북한이 무엇을 했다는 것, 일부 남한 조직이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사건을 뒤집으려고 했다는 것. 작은 외침이지만 조금이나마 안보교육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남한에서 산 25년 동안 제일 고마운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래도 역시 남편이죠. 낮에는 모르지만 밤이 되면 불빛은 더욱 환해지게 마련입니다. 사람도 어려움을 당했을 때 인간성이 드러나는 것 같아요. 친구처럼 지내던 사람이 정권이 바뀌면서 등에 칼을 꽂는 경우도 봤어요. 진실된 사람 찾는 게 쉽진 않더군요.”
희생자 위해 남해 화방사에서 삼천배
- 1995년 3월 KAL 858기 희생자를 위로하기 위해 삼천배(三千拜)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 당시 안기부 담당 간부가 독실한 불교신자였습니다. 저를 많이 도와주신 분인데 경남 남해의 화방사(花芳寺)에 가서 천도재(薦度齋)를 지내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하더군요. 저는 그때 유가족 분들을 위해서라면 뭐라도 해야 한다는 심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있었지만 종교라도 내놓으라면 내놓고 싶은 심정에 승낙했습니다. 여러 스님, 신자분들과 함께 내려가 4일 동안 삼천배를 했습니다.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많은 분이 도와주셨습니다.”
- 희생자를 위해 천도재를 올렸다는 사실이 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나요.
“제가 기독교 신자이기도 했고, 굳이 알리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몸과 마음으로 천도재를 했으니 희생자 분들이 좋은 데 가셨을 거라 믿습니다. 스님도 ‘마음이 좀 가벼워지지 않았느냐’며 위로해 주셨습니다.”
- 유가족에게 전할 말은.
“너무나 큰 고통을 안겨준 것에 대해서 지금도 항상 깊이 사죄드리고 있습니다. 이젠 좀 편안한 삶을 살기를 기도하고 또 할 겁니다.”
창밖으로 내리는 노란 가을비를 보며 그녀는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북한에 두고 온 가족 생각 아니면 남한에서 새로 생긴 가족? 아니면 25년 전 떠나간 KAL 858기 희생자들?
기자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날은 그녀의 어깨 위로 떨어지는 작은 바람조차 너무나 무거워 보였으므로.⊙
월간조선 2012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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