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북한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당시 北 특수무장병력 침투했었다!

김정우 기자 2013. 2. 18. 19:06
반응형
1976년 8월 18일 오전 10시, 유엔사 경비대장 보니파스(Bonifas) 대위 등 15명의 한·미(韓美) 경비병과 노무자들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제3초소 부근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여름이라 잎이 무성해 시야(視野)를 가렸기 때문이다. 북한군 장교 박철이 작업 중단을 요구했고, 보니파스는 이를 무시했다.

쇠몽둥이를 든 30여 명의 북한군이 트럭을 타고 난입했다. 박철의 중단 요구를 보니파스는 듣지 않았다. 손목시계를 푼 박철이 "죽여!"라고 고함지르자 30여 명의 북한군이 도끼와 몽둥이를 들고 난동을 부렸다. 보니파스 대위와 배럿(Barrett) 중위가 도끼 공격을 받고 현장에서 사망했다.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의 시작이었다.

미국은 데프콘2(공격준비태세)를 발령하고 공동경비구역 내 북한군이 설치한 불법 방벽(防壁) 등을 제거하는 '폴 버니언 작전(Operation Paul Bunyan)'을 펼쳤다. 미드웨이를 비롯한 항공모함 3척을 한국 해역에 급파했으며, 미국 본토에서 핵무기 탑재가 가능한 F-111 전투기 20대가 날아올랐다. 괌에서 B-52 폭격기 3대가 이륙했고, 오키나와에선 F4 팬텀 24대가 발진해 한반도 상공을 선회했다.

판문점에 진입한 미 2사단 병력은 작전개시 42분 만에 미루나무 절단에 성공했고, 비밀리에 무장한 64명의 한국 특전사는 북한 초소 4개를 초토화했다. 전쟁까지 갈 뻔한 순간이었지만, 북한군은 꿈쩍도 하지 못했다.

작전 종결 후 북한은 미국 측에 긴급 수석대표회의를 요청했다. 김일성(金日成)이 유엔군 사령부에 쓴 '유감표명' 편지가 전달됐다. 미국은 이를 사과로 받아들였고, 대치 상황은 일단락됐다. 현재까지 알려진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의 전말이다.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모습. 당시 북한이 미국과의 전면전에 대비해 특수 병력을 남한에 침투시킨 사실이 최근 밝혀졌다.(조선DB)


'인민무력부 산하 특수전 병력 對南 은밀 침투'

미국의 무력시위에 북한이 침묵과 사과로 대응했다는 지금까지의 기록과 달리, 북한이 미국과의 전면전에 대비해 특수 병력을 남한에 침투시킨 사실이 최근 밝혀졌다.

북한 무장공작원 출신 김동식씨가 최근 발표한 박사학위 논문 〈북한의 대남혁명전략 전개와 변화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북한은 당시 인민무력부 산하 특수전 무장병력 수십 명을 남한에 극비 침투시켜 전국 각지의 군사기지 주변에 은폐해 대기토록 했다. 김씨는 남한 혁명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제주도로 두 번 침투했다가 1995년 충남 부여에서 군경과 총격전 끝에 체포된 인물이다. 무장공작원 출신 인사가 박사학위를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전직 대남공작요원 K씨의 증언'을 출처로 기록한 논문 내용에 따르면, 1976년 침투한 특수전 무장병력의 임무는 전쟁이 발발할 경우 일차적으로 남한의 군사기지를 타격한 후, 후방지역에 남아 게릴라 활동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김일성의 유감표명을 미군이 수용하면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고, 북한은 남파했던 병력 전원을 조용히 철수시켰다. 이들의 침투경로는 해상이었으며, 복귀 후 병력 전원이 김일성의 이름이 새겨진 고급 손목시계, 일명 '명함시계'를 받았다.

당시 북한은 대외적으로 유화적 제스처를 보이며 사실상 사과까지 표명했지만, 내부적으론 무력도발을 치밀하게 준비하는 '화전양면(和戰兩面) 전술'을 펼쳤다. 만약 미군이 나무를 절단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폭격과 시설파괴 등 작전을 실행에 옮겼다면, 북한도 '벼랑끝 전술'에 입각해 무력도발을 시작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북한 전역은 실제 전투상황과 다름없었다. 사건 다음 날부터 평양 시민 30만여 명이 지방으로 소개(疏開·분산)됐다. 학생들은 교도대로 소집됐으며, 등화관제로 도시에선 불빛이 사라졌다. 당일제 배급이 실시됐고, 북한군과 주민들은 사실상 전면전을 준비했다.

북한 공작원 서열

대규모 간첩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적발된 공작원의 '급'을 두고 설왕설래가 벌어진다. 전직 대남공작원 김동식씨에 따르면, 북한 대남공작원의 서열은 '특사' '당대표' '당연락대표' '연락원' 순으로 구분한다. 특사는 말 그대로 '최고지도자'(김정은)와 같은 권한을 갖고 남파된 '거물급'을 뜻한다. 당대표와 당연락대표는 남한 현지에서 노동당 입당을 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인물이다. 김씨는 1990년 첫 남파 땐 연락원(조원) 신분으로 활동했고, 1995년 2차 남파 땐 당대표(조장) 신분이었다.

북한의 사건 왜곡·조작

사건이 발생한 지 30년을 훌쩍 넘겼지만, 북한의 전술과 태도는 변한 것이 없다. 북한은 판문점 북측 '정전협정조인장'에 당시 미군 장교를 살해한 도끼를 전시해 놓고 남한이나 해외에서 온 관광객들에게 둘러보게 한다.

1976년 당시 김일성은 한·미 양국의 무력에 굴복했지만, 현재 북한은 태도를 바꿔 사건의 책임을 미국에 돌리고 있다. 2006년 8월 18일 북한 《노동신문》은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을 두고 〈철두철미하게 미제 침략군의 도발에 의해 일어난 사건으로 미제가 조선반도 평화의 파괴자라는 것을 똑똑히 보여줬다〉는 주장을 펼쳤다.

남한의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노총)이 지난해 5월 발간한 《노동자통일교과서》의 논조도 북한 측과 크게 다르지 않다. '포플러나무 벌채사건'으로 명기된 책 내용 중 일부다.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 있는 포플러나무를 미군 측이 북한과 사전 상의 없이 벌채하려다 발생한 사건이다. 미군 장교 두 명이 시야를 방해하는 포플러나무를 도끼로 베려다가 이를 제지하려고 달려든 북한 경비병을 향해 도끼를 던졌다. 하지만 북한 경비병은 이 도끼를 맞받아 미군 장교 두 명에게 던졌는데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미국은 이를 '북한에 의한 잔학한 학살 사건'이라고 전 세계에 보도하였다.〉

김일성이 사과까지 한 사건을 시간이 흐른 뒤 왜곡·조작해 미국 측에 책임을 전가하는 북한의 행태는 노무현(盧武鉉) 정권 당시 KAL 858기 폭파범인 김현희(金賢姬)를 가짜로 몰아 한국 측에 책임을 전가한 것과 닮았다.

1980년 5월 광주 금남로에서 대치한 시위대와 계엄군 모습. 북한은 같은 상황이 다시 발생할 경우를 대비해 100명의 정예요원을 선발, 3년간 특수전 훈련을 시켰다고 한다.(조선DB)


5·18 직후 정예요원 선발해 특수전 훈련

북한의 무장침투 공작은 1976년 판문점에서 그치지 않았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유혈사태가 발생한 후, 북한은 같은 상황이 다시 발생할 경우를 대비해 100명의 정예요원을 선발, 특수전 훈련을 시켰다. 5·18 직후 북한이 남파 공작원 훈련을 대대적으로 실시한 사실이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씨의 논문에 따르면, 당시 북한은 5·18과 비슷한 상황이 다시 발생할 경우 1968년 울진·삼척으로 침투시켰던 '무장선전대'(무장공비)와 같은 게릴라부대를 투입해 무장봉기를 남한 전역으로 확산시킬 계획이었다. 기획은 노동당 통일전선사업부(통전부)가 담당했으며, 훈련은 노동당 작전부가 담당해 1981년부터 1984년까지 3년간 진행했다.

북한의 예상과 달리, 5·18과 같은 상황은 다시 발생하지 않았다. 침투계획을 주도했던 노동당 대남담당비서 겸 통전부장인 대남 강경파 김중린(金仲麟)은 1983년 해임됐다. 100명의 정예요원은 '졸업' 후 본래의 목적(무장침투)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101연락소나 개관연락소 등 통전부 산하 기관에 배치됐다.

논문을 쓴 김동식씨는 "이 내용은 전직 대남침투요원 S씨의 진술을 기반으로 작성했다"며 "나 자신도 이들과 인접해 수년간 훈련을 함께 받았기 때문에 누구보다 정확히 당시 상황을 알고 있다"고 밝혔다. 최근 제기된 "5·18 당시 북한군이 직접 개입했다"는 의혹에 대해선 "논문에 게재된 내용 외엔 직접 체험하거나 들은 바가 없어 사실 여부를 전혀 모른다"고 답했다.

1968년 1월 생포된 무장공비 김신조. 1970년대 초 김일성은 대남공작부서 간부들에게 ‘1·21 침투 성과’를 치하하며 향후 추가침투 대책 지시까지 한 것으로 드러났다.(조선DB)


金日成, 1·21 후속 침투대책 지시

김씨의 논문엔 1968년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이후 북한에서 일어난 일화도 처음 소개했다. 총 3차례에 걸쳐 무장공비 120명이 침투해 약 2개월간 게릴라전을 벌이고 소탕된 이후 북한은 작전 실패의 원인을 "남한의 지리적 여건과 특성을 감안하지 않고 무모하게 작전을 전개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당시 북한 지도부의 김창봉, 허봉학 등 빨치산 출신들은 바다와 휴전선으로 둘러싸여 사실상 '섬'과 다름없는 강원도 산악지역을 북·중(北中) 국경지대와 같을 것이라 판단했다. 산속에 비밀 근거지를 구축하고 밤에 경찰서, 관공서, 군부대 등을 습격하려던 계획은 지리적 환경 때문에 실패했다.

1968년 김신조(金新朝) 등 30여 명의 무장공비가 청와대 습격을 시도했던 1·21사태 이후 김일성의 대남공작 지시내용도 공개됐다. "일부 모험주의자들의 행위"라며 자신의 개입을 부정한 것과 달리 김일성은 대남공작부서 간부들에게 향후 추가침투 대책 지시까지 한 것으로 드러났다.

김일성은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을 위해 방북(訪北)한 이후락(李厚洛) 당시 중앙정보부장과 만난 자리에서 1·21사태에 대해 "나는 아는 바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김씨의 논문에 따르면, 김일성은 1970년대 초 대남공작부서 간부들 앞에서 1·21사태를 거론하면서 "30여 명이나 되는 많은 인원이 청와대 뒷산까지 침투했다는 사실 자체가 대단한 일"이라고 치하한 후 "앞으로 많은 인원이 서울까지 은밀하게 침투할 수 있는 대책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북한 대남공작부서는 청와대 습격이 실패한 원인을 "붙잡았던 나무꾼을 살려 보냈기 때문"으로 분석하고 이 같은 교훈을 잊지 말라고 교육했다. 전직 대남침투요원 S씨는 "해당 교육을 받은 요원들은 남한침투 후 이동 중에 만난 남한 주민들을 모두 죽였다"고 증언했다.

1993년 7월 북송된 비전향장기수 이인모가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환영을 받는 모습. 이인모의 정체는 종군기자가 아니라 노동당 간부 출신 남파 대남공작원이었다.(조선DB)


비전향장기수 이인모의 정체는 대남공작원

논문은 1993년 처음으로 북송(北送)된 비전향장기수 이인모(李仁模·2007년 사망)의 정체에 대해 '종군기자'가 아닌 '대남공작원'이라고 확정했다. 이인모는 1952년 빨치산 활동 중 검거돼 7년간 복역한 후 1961년 반국가단체 구성죄로 다시 구속돼 15년형을 받는 등 34년간 감옥생활을 한 인물이다.

1993년 3월 《주간조선》에 따르면, 이인모와 관련된 모든 수사 및 재판 기록엔 그가 종군기자였다는 진술 내용이 없었다. '종군기자'란 '위조신분'은 출소 후 1989년 10월 월간 《말》에 기고한 수기에 처음 등장했다. 그는 '종군기자'란 신분으로 북송된 후 북한체제 선전도구로 이용됐다. 김영삼(金泳三) 정부는 당시 이인모를 북송하면서 이산가족 면담과 납북자 송환 등 남북관계 개선을 기대했지만, 남한 내 이념적 혼란만 가중시켰다.

김동식씨의 논문은 이인모에 대해 "노동당 지방조직 선전부 간부 출신으로서 6·25전쟁 당시 정치공작대원으로 임명받고 남파돼 활동한 대남공작원"이라고 규정했다. 전직 대남공작요원 C씨의 증언에 따르면, 대남공작을 전담하는 대외연락부(당시 사회문화부)가 북송 초기 이인모의 신병을 관리했으며, 이후 통일전선공작에 활용하기 위해 통전부에 신병을 넘겼다.

논문은 1992년 총선 당시 민중당 공작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김동식씨는 작년 4월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1991년 가을에 한 팀이 들어와서 모 진보정당 선거운동을 배후에서 코치하다가 총선 며칠 앞두고 들어갔다"고 증언한 바 있다.

논문에 기록된 전직 대남공작요원 K씨의 증언은 보다 구체적이다. 북한은 1990년 거물급 공작원 이선실(李善實)을 통해 민중당 창당에 관여한 핵심인사들을 포섭하게 한 다음 당을 장악하는 방법으로 정당 공작을 전개했다. 1992년 총선 때 원내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100만 달러가 넘는 공작금을 투입했다. 1991년 가을엔 남파공작조가 침투돼 이듬해 총선 직전까지 서울에 체류하며 민중당 총선을 지휘하다 복귀했다고 한다.

공작 경험 없는 김정일, 전략개념 이해 못해

논문에 따르면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까지 노동당 사회문화부 소속 공작원 20여 명이 총 10여 개의 공작조로 구성돼 남한에 침투했으며, 이들의 대남공작 활동을 두고 김일성은 "3~4년 동안 거둔 성과가 지난 40여 년간 거둔 것보다 크다"며 치하했다고 한다.

당시 북한의 목적은 이른바 '진보정당'을 장악해 합법적 활동공간을 만들어 짧은 시간 내에 대남혁명 역량을 확충하는 것이었다. 합법적 진보정당 건설에 주력한 이유는 정당활동 공간을 통해 종북세력을 양산하기 위해서였다. 1990년 민중당 창당 당시 북한은 노동당 대남공작부서인 사회문화부 내에 '정당지도과'를 신설할 정도로 '혁신정당 건설'에 심혈을 기울였다.

북한의 대남혁명전략은 노동당 대남공작부서의 정책과와 교시편찬과 실무진으로부터 시작된다. 정책과는 통전부 산하 남조선문제연구소 소속 연구원들과 사회과학연구소 학자 등 최고 전문가들을 선발해 '정책연구개발팀'을 구성한다. 이들은 김일성의 교시와 김정일·김정은의 지시를 바탕으로 대남정책 초안과 대남혁명전략 수정안을 직접 작성하는 일종의 태스크포스(TF)다.

이들의 안(案)은 교시편찬과의 검토를 받은 후 실무책임자인 대남부서 부부장(차관)에게 보고된다. 대남부서 부장(장관)·부부장 협의회에서 보완된 안은 공식 결재를 거쳐 '조직지도부 서기실'(김정은 비서실)로 옮겨진다. 별다른 문제가 발견되지 않으면 최고 정책결정권자(김정은)에게 간다. 김정은이 서명하는 순간 이는 대남혁명전략 또는 대남정책으로 확정돼 대남공작부서는 이를 '김정은의 지시'로 간주하고 실행에 옮긴다.

김씨의 논문에 실린 전직 대남공작요원 K씨의 증언에 따르면, 대내·외 정책과 달리 대남혁명전략과 대남정책은 김정일이 처음부터 구상하고 발표할 사항이 아니었다고 한다. 김일성은 중국에서 지하공작이란 것을 조금이나마 해 본 경험이 있어 단편적 전술을 언급한 바가 있지만, 김정일은 공작 경험도, 배운 적도 없어 공작에 대한 개념 자체를 이해 못했다.

'35호실'의 뜻

북한의 대남공작 조직은 크게 노동당 통일전선사업부(통전부), 내각 소속 225국(대외연락부의 후신), 북한군 정찰총국, 국가안전보위부 등으로 구분된다. 통전부는 남북대화·교류 등을 총괄하며, 225국은 남한 내 지하당 구축과 대남조직 공작을 실행한다. 필요한 경우 테러와 암살 등 특수공작도 수행한다. 작전부와 35호실 등이 편입된 정찰총국은 대남도발과 공작활동을 벌이고 있다.

전직 대남공작원 김동식씨의 논문에 따르면, '35호실'이란 부서 명칭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부서 책임자의 사무실이 노동당 중앙위원회 본청사의 3층 5호실에 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노동당 내부 조직의 명칭은 '부' '위원회' '연구소' '실' 등으로 구분되는데, 업무성격을 공개하기 어려울 경우 '실' 앞에 상징적인 숫자를 넣는다. 주로 해당 부서 창설 관련 김정일의 재가를 받은 날짜, 창설 기념일, 해당 부서 책임자의 사무실 위치 등이다. 노동당 외화벌이 부서인 38호실과 39호실도 부서 책임자가 3층 8호실과 9호실을 쓴다는 의미일 가능성이 크다.


金正日 '代筆' 문헌

1991년 5월 '김정일이 대남부서 책임간부들 앞에서 한 연설'이라 표기된 이른바 '5·24 비공개 문헌'도 사실상 '대필'로 추정된다. 전문가만이 알 수 있는 내용을 구체적으로 적시할 만큼 김정일의 대남혁명 지식이 해박하지 않은 데다, 200쪽 이상의 방대한 양을 '연설'로 했다는 것도 전례가 없는 일이다.

'5·24 문헌'이 발표 2년 전에 내용 대부분이 포함된 《한국 사회성격 논의의 재조명》이란 제목의 책이 출판돼 대남공작원 교육자료로 쓰인 바 있다. 이 책을 쓴 전문가 중 한 명이 현재 북한 사회민주당 중앙위원장으로 활동하는 김영대다. 그는 1989년 남조선연구소 실장 당시 '김영호'란 가명을 사용했다.

1990년 남한의 도서출판 '한'은 일본을 거쳐 북한공작원으로부터 전달받은 이 책을 가공의 인물인 '김장호'를 필자로 내세워 출판·배포했다. 1년 앞선 1989년 '대동'이란 출판사는 《한국 사회성격 논의》란 제목의 책을 '한기영'이란 가공의 인물을 내세워 비슷한 방법으로 출판했다. '대동'은 지난 2011년 발생한 '왕재산 간첩단 사건'의 서울지역당 조직책 이모씨가 운영했던 출판사다. 두 책 모두 북한 대남공작부서에서 작성한 자료를 글자 하나 바꾸지 않고 찍어낸 책이다. 김정일이 '대필'로 쓴 책이 일본을 거쳐 남한으로 반입·출판돼 의식화 자료로 활용된 셈이다.

분단 후 60여 년 동안 한국과 전 세계는 큰 변화와 발전을 이뤄 낸 반면, 북한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3대 세습을 이룬 '김씨왕조'는 여전히 '유훈'을 앞세워 미사일과 핵무기 개발에 열을 올린다. 그리고 그 왕조에 굴종한 남한 내 세력들의 선동 내용도 수십 년째 그대로다.

김씨의 논문은 "대한민국을 미국의 식민지로, 반자본주의사회로 규정하고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을 통해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남한의 자본주의체제를 전복해야 한다는 북한의 대남혁명전략 목표는 조금도 변함이 없다"며 "앞으로도 남한사회 내부 혼란과 남남갈등 조장을 위해 대남도발과 남북대화를 적절히 배합하는 등 합법과 비합법 수단을 총동원해 대남공작을 전개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씨는 논문 첫머리에 북한 대남혁명전략 변화를 이렇게 요약했다.

"북한의 대남혁명전략 변화는 한마디로 '변화없는 변화'로 표현된다."⊙

월간조선 2013년 3월호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