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북한

[현대사 발굴] 반세기 전 전국 뒤흔든 6·25 납북인사 송환 100만인 서명운동

김정우 기자 2013. 7. 24.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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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本社)는 만전의 준비를 갖추기 위해 본 운동 개시 기일을 내(來) 7월 1일부터 금추(今秋) 유엔개회를 앞둔 10월 말일까지로 정하고 한국 적십자사의 적극적 협찬 아래 본사와 지사 총국 지국 등 중앙과 지방의 전 조직망을 총동원할 것입니다.〉

1964년 6월 25일 《조선일보》 1면에 실린 기사 내용이다. 신문은 6·25전쟁 14년을 맞아 총 3개 지면을 ‘납북인사 송환을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 소식으로 채웠다. 이 운동은 당시 침체 국면에 있던 납북자 송환 활동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다.

신문은 〈몽매(夢寐)에도 잊지 못하는 우리의 부형자제(父兄子弟), 3000만의 가족을 찾는 운동〉이라며 〈자유와 인권의 회복을 위한 거족적인 운동에 모든 국민이 적극 호응해 줄 것을 기대해 마지 않는다〉고 했다.

1964년 ‘납북인사 송환을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에 참여한 시민들과 《조선일보》 1면.


⊙ 6·25 14주년 계기로 《조선일보》 주최… 한 달 만에 82만명 돌파하는 등 전국적 호응 불러와
⊙ 8만여 전쟁 납북자 중 단 한 명도 귀환 못해… 戰後 처리의 최대 흠결
⊙ 전쟁납북 부정한 DJ정부에 맞서 송환운동 펼친 납북자 가족들, “마감 임박한 납북피해 신고 관련 대국민 홍보 필요”


서명운동을 위해 전국 조직망을 총동원했다. 대한적십자사가 협력했을 뿐 아니라 서명운동 첫날부터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부부와 정·관계 주요인사가 서명에 대거 참여해 국제적 관심사로 대두됐다. 6월 25일부터 12월 13일까지 총 19회 관련 기사를 실었으며(단신 보도 제외), 이 중 11회는 신문 1면에 보도했다. 당시 납북자 문제에 대한 언론사와 국민의 절실함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사선을 밟고 끌려간… ‘애끊는 14년’ 납북인사 7000여 명의 안부〉 〈기다려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은 그이… 어언 14년〉 〈손은 도장 찍고 눈은 북녘으로〉 〈메아리치는 이 인간의 절규가… 북녘에는 들리지 않는가〉 등으로 뽑힌 기사 제목은 14년간 응축한 가족의 분노를 쥐어짠 듯 처절했다. 6월 26일자 사설 내용 중 일부다.

〈전쟁에 진 일본의 전범들도 이제는 거의 다 시베리아로부터 풀려 나와 저희의 고국으로 돌아왔고, 넓디넓은 남양각도(南洋各島)에 퍼져 있던 그들의 백골마저 도로 찾았다고 하지 않는가. 중공에 갇혔던 미국의 비행사도 나라의 힘으로 빠져나왔다. 그런데도 우리만은 아직 이에 대한 아무런 서광(曙光)도 보이지 않으며 재봉(再逢)의 기쁨은 둘째치고 생사의 소식 하나 들을 생각조차 못 내고 있는 안타까움이란 인류 역사 이래 그리 흔하지는 않을 것이다.〉

〈기다리는 사람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란 제목으로 3일에 한 번 연재된 기획기사는 한학자 정인보(鄭寅普), 역사학자 손진태(孫晉泰), 목사 오하영(吳夏英), 고려대 총장 현상윤(玄相允), 국군 장성 유동열(柳東說) 등 독립운동가의 납북 사례를 가족 인터뷰와 함께 풀어 냈다.

3주 만에 50만명 돌파

세종로에 세워진 100만인 서명운동 기념탑.


7월 1일 서명운동이 시작되자 첫날부터 5만명이 모여들었다. 손진태 교수의 부인인 연영엽(連榮燁)씨가 첫 서명인으로 등록했다. 뒤이어 서명한 독립운동가 안재홍(安在鴻) 선생의 부인 김부례(金富禮)씨는 서명 후 자신이 직접 운동에 나서 하루 만에 100명의 서명을 받아 냈다. 비가 내렸던 이날 서울에서만 2만219명이 서명했고, 원주 4800명, 김천 2890명, 인천 2620명, 청주 2360명, 부산 2114명 등 주요도시가 뒤를 이었다. 7월 2일자 《조선일보》 기사다.

〈10시 정각부터 시작된 이 서명은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지나가던 우산장수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번화한 서울 ‘미도파’ 앞으로부터 두멧골 우물가에 이르기까지 퍼져 모두 5만413명이 줄을 지어 이름을 적었다.〉

서명 첫날 박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직접 한 서명을 보내 왔고, 정일권(丁一權) 국무총리는 조선일보사에 찾아와 직접 서명하고 지장을 찍었다. 대한적십자사 최두선(崔斗善) 총재도 서명을 보냈다. 이틀 후 노르만 액턴(Acton) 세계재향군인연맹(WVF) 사무총장은 ‘유엔(UN) 총회 때 납북자 송환 문제를 적극적으로 피력하겠다’는 서한을 보냈다.

서명인 수는 10일 만에 25만을 육박했고, 3주 만에 50만을 돌파했다. 전국적으로 서명운동 분위기가 고조되자 북한은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성명을 통해 “납북인사란 있지도 않고, 있어 본 적도 없다”며 반발했다. 서명 한 달째인 8월 2일, 《조선일보》 1면엔 〈찌는 무더위 속 줄을 잇는 분노의 ‘사인’, 82만명을 돌파〉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6·25전쟁 중 8만여 명에 이르는 민간인이 납북됐다. 2002년 《월간조선》이 단독 입수한 한국 정부 작성 〈6·25 사변 피랍치자 명부〉엔 총 8만2959명의 납북인사의 신원과 납북 일시·장소 등이 기록돼 있다.

북한 김일성(金日成)의 ‘인테리(지식인) 포섭 계획’에 따라 치밀하게 준비된 작전으로 남한의 정치인, 법률가, 공무원, 종교인, 교사, 언론인, 의사 등 사회지도층 인사가 전쟁 중 대거 끌려갔다. 납북자 명단엔 소설가 이광수(李光洙), 방응모(方應謨) 조선일보 사장, 철학자 한치진(韓稚振) 등 인사가 포함됐다.

《조선일보》는 1952년부터 1964년까지 총 22회에 걸쳐 전쟁 납북자 송환을 촉구하는 사설을 실었다. 6·25전쟁 때 사장이 납북된 이유도 있었지만, 전후(戰後) 처리의 최대 흠결(欠缺)로 남은 납북자 문제가 대한민국의 격(格)과 수준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간파한 것으로 보인다.

“‘솔베이지의 노래’처럼 영원히 기다릴 터”

휴전회담 초기 단계인 1952년 2월 9일 민간인 납북자 송환을 사설로 다룬 《조선일보》는 〈피랍민간인 송환문제는 휴전회담 개시에 앞서 논의되어야 할 중대한 사안으로서 강경히 요구하여 송환을 관철시켜야 한다〉며 북한군 포로와 민간인 납북자의 1대 1일 교환 협상을 포기한 유엔 측의 저자세를 비판했다.

이후 신문은 〈포로와 민간납치인을 무루(無漏)송환하라〉 〈납치자 문제는 ‘유엔’이 해결해야 한다〉 〈피랍치인 구출을 세계에 호소하라〉 〈사변 때의 납치인사를 속히 돌리라〉 등의 제목을 통해 주기적으로 사설을 내보냈다. 대다수 사설은 정전협정 제59항에 근거해 사민(私民)들은 모두 자유의사에 따라 귀향이 가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53년 12월 8일자 사설 중 일부다.

〈납치인이란 것은 적측(敵側)이 남한지역을 점령하였을 때 피등(彼等)의 군(軍)과 경찰력을 행사하여 구속 납치한 인사들을 말하는 것인데 이렇게 구속 납치한 인사들은 9만에 달한다는 것이 민간 측 집계이다. 또 강제로 북한으로 끌고 간 외에도 기만책(欺瞞策)으로 유치(誘致)하여 간 자 등을 합친다면 기수(其數)는 더 훨씬 많을 것이 확실한데 이들은 다 정전협정 59항의 적용을 받을 수 있음은 물론이다.〉

《동아일보》도 휴전 즈음 납북자 문제의 해결을 위한 대책을 호소했다. 1952년 2월 21일부터 7일간 매일 저명 납북인사 부인 9명을 한자리에 모아 좌담회를 개최했고, 1953년부터 1957년까지 총 7회에 걸쳐 사설을 실었다.

〈그이는 살아있다〉란 이름으로 연재된 좌담회엔 현상윤 총장 부인 백숙량(白淑良)씨, 구자옥(具滋玉) 경기도지사 부인 박인숙(朴仁淑)씨, 강병순(姜炳順) 변호사 부인 박옥출(朴玉出)씨, 박종만(朴鍾萬) 상공부 수산국장 부인 유송죽(兪松竹)씨 등이 참석했다. 이 좌담은 전쟁 중 일어난 납치의 비극과 가족이 겪고 있는 참상을 부인들의 육성을 통해 전했다.

이들은 모두 “남편이 살아 계실 줄 굳게 믿는다”고 확신했다. 가장(家長)의 납치 후 가산(家産)을 모조리 팔아 연명하던 이들은 “‘솔베이지의 노래(Solveigs Lied)’처럼 10년이라도 20년이라도 그이가 돌아오기를 영원히 기다릴 터”라고 다짐했다. 하지만 ‘그이’들은 60여 년이 흘러도 돌아오지 못했다.

한국전쟁납북사건자료원이 2009년 9월 발간한 사료집은 당시 좌담회에 대해 〈납북 당시의 상황을 가장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육성 증언으로서 중요한 1차 자료로 평가된다〉고 했으며, 사설에 대해선 〈납북자 문제에 대한 보편적이고 국제적인 시각에 입각한 탁월한 정론〉이라고 평했다. 1957년 11월 20일자 《동아일보》 사설 말미엔 이런 구절이 실렸다.

〈우리는 생존 인사들의 즉시 송환을 요구한다. 또 미발표된 인사들의 소식을 속속히 밝혀 줄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북한 전역에 있어서 저러한 잔악한 전제정치하에 신음하는 전체 동포들에게 자유, 해방의 날이 속히 오기를 갈망하여 마지않는다.〉

303kg 서명철 UN에 전달

1964년 12월 11일 유엔(UN)본부를 방문한 방우영 조선일보 사장이 존 험프리 유엔 인권국장에게 납북인사 송환 진정서를 전달하고 있다.


1964년 8월 20일, 《조선일보》의 서명운동은 결국 100만명을 돌파했다. 8월 25일 집계된 총 서명 수는 101만1980건이었다. 신문은 이날 1면 기사를 통해 〈그동안 도시에서, 농촌에서, 일선에서 우리의 염원과 절규는 끊이지 않아 이렇게 가슴 죄는 소원을 담은 결실을 한 것〉이라며 〈자유와 인권회복을 위한 거족적(擧族的) 운동으로, 온 겨레의 정성과 기다림과 그리움이 맺혀진 서명자명단〉이라고 선언했다.

8월 26일자 《조선일보》 사설은 〈동일한 목표를 향해 온 겨레가 혼연일체가 되어 민족적 단결을 이룩했다는 결과가 되므로 우리 역사상 전무후무한 국가적 사업〉이라며 〈이 같은 거족적 단결이 진작 이루어졌던들 마의 38장벽을 철폐하여 통일을 이룩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었을 것이 아닌가고 한편 한스러워지기도 한다〉고 했다.

범국민적 운동에 위기감을 느낀 북한은 이를 규탄하는 성토대회를 각처에서 열고 안재홍 의원 등 납북자 15명을 강제로 방송에 출연시켜 “납북된 일이 없다”고 발언하게 했다.

같은 해 11월 24일 박정희 대통령은 방우영(方又榮) 조선일보 대표에게 보낸 감사 서한을 통해 〈정의와 평화를 원천으로 삼는 ‘유엔’의 권위에 향하여 우리는 다시 한 번 그들의 구원을 호소하게 된 것을 본인은 크게 의의 깊게 생각한다〉며 〈귀사의 빛나는 노력이 우리 3천만 민족의 한결같은 통일에의 염원을 대변해 주는 것이라 믿어 그 취지가 귀사에 길이 기록될 것으로 확신한다〉고 했다.

총 11묶음으로 포장된 303kg 무게의 100만인의 서명철은 12월 4일 일본항공(JAL)편으로 유엔 본부가 있는 미국 뉴욕에 보내졌다. 유엔 전달을 위해 방미(訪美)한 방우영 대표 일행은 12월 11일 와병 중인 유엔 사무총장을 대리한 유엔 인권국장 존 험프리(Humphrey) 박사를 직접 만나 자료를 제출했다. 이를 보도한 12월 13일자 《조선일보》 1면 사진엔 〈유엔에 찾아간 ‘비원(悲願)’〉이란 문구가 실렸다.

비장한 염원에도 불구하고, 유엔은 이후 아무런 조처를 하지 못했다. 납북자 송환에 대한 국민적 열망을 확인한 100만인 서명운동은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리고 ‘6·25전쟁 납북자’란 말도 잊혔다. 아득한 세월 속에 방치된 역사는 어느새 설화(說話)가 됐다.

민족의 悲願

이미일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사장.


2000년 9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한 기자회견에서 “납북자는 300~400명”이라고 언급하면서 납북자 송환 운동은 전환점을 맞았다. 납북자 이성환(李聖煥)의 딸 이미일(李美一)씨는 회견을 본 후 큰 충격을 받고 직접 송환운동에 뛰어들었다. 그가 결성한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는 방대한 사료집과 증언록을 제작하고 서명운동을 전개하는 등 본격적인 활동을 펼쳤고, 2010년 3월 ‘6·25전쟁 납북피해 진상규명 및 납북피해자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현재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한 6·25전쟁납북진상규명위원회가 납북 피해신고를 받고 있으며, 올해 12월 31일 신고가 마감될 예정이다. 위원회 측에 따르면 올해 6월까지 약 3000건의 신고가 접수됐고 2000여 명이 납북자로 확인됐다.

이미일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사장은 “60여 년 전 납치사건을 증언할 가족과 지인이 상당수 세상을 떠난 상황에서도 전국 각지에서 수천 건의 신고가 접수된 것은 귀감이 될 만하다”면서 “대한민국 정부가 전쟁납북 피해신고를 받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이 여전히 많아 신고 마감이 임박한 지금 신문, 방송, 온라인매체 등을 통한 대국민 홍보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납북범죄를 계획하고 주도한 장본인의 손자는 지금 민족을 인질로 삼고 전 세계를 상대로 협박과 공갈을 일삼고 있다. “3000만의 염원을 대변한다”며 송환운동을 격려했던 대통령의 딸은 세계 10대 경제대국의 대통령이 됐다. 당시 국제사회의 도움을 받아 서명철을 전달해야 했던 유엔을 현재 대표하는 이는 한국인이다.

1964년 100만인 서명운동 후 반세기가 흐르는 동안 단 한 명의 전쟁납북자도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훗날 납북자들의 후손을 만났을 때 “아버지는 눈을 감는 순간까지 조국에 돌아가길 갈망했다”는 말을 들을지도 모른다. 〈십수 년이 지난 오늘 이 시간에도 납북당한 채 종무소식(終無消息)이 된 내 부모, 내 남편, 내 자식을 그리워하며 원한의 눈초리로 북녘 하늘을 쳐다보며 눈물로 지새우는 수많은 가족의 비원은 곧 우리 민족 전체의 비원〉이라고 호소한 반세기 전 사설은 지금도 유효하다.⊙

월간조선 2013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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