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북한
이석기와 내란음모, 그리고 민혁당
김정우 기자
2013. 9. 6.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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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끝까지 당당했다. 헌정 사상 초유의 사태를 즐기는 듯 했다.
그는 국회 본회의장 앞에 집결해 "이석기 사랑해"를 외치는 당원들의 '열렬한 성원'을 받으며 입장했다. 오병윤 원내대표의 의사진행발언, 이상규 의원의 질의, 그리고 이석기 의원 본인의 신상발언이 이어졌지만, 단 한 번 '대한민국 국민에 대한 사과나 반성'은 없었다. 이들은 수차례 '절두산 성지'를 '결전 성지'로, '총을 가지고 다니지 말라'가 '총기지시'로 기록됐다며 체포동의요구서의 녹취록을 '교열'했다. 그게 전부였다.
이석기 의원의 '사과'는 체포동의안이 가결된 후 본회의장 앞 연설에서야 들을 수 있었다. 자신을 응원하는 당원들에게 "체포동의안을 막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했다. 그는 "정의와 진실이 승리할 것이라 믿는다"고 했다.
대중은 환호했다. 방금 자신의 체포동의안이 통과된 현직 국회의원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그는 '내란음모 피의자'가 아니라 '개선장군' 같았다. 체포동의안 통과를 당론으로 정한 민주당과 정의당까지 적으로 몰아세웠다. PD파를 무시하는 NL주사파들의 주특기가 반복된 현장이었다.
김선동 의원은 국회의원 298명 중 찬성표를 던진 258명을 뺀 '40명의 항거'를 자랑스러워했다. 참고로 이날 표결에선 289명 출석에 찬성 258표, 반대 14표, 기권 11표, 무효 6표로 가결됐다. 이들은 불출석, 반대, 기권, 무효표 전체를 자기편으로 인식한 것이다.
"체포동의안 결사반대"를 외치는 이들의 환호와 함성이 '마지막 발악'으로 보인 건 나뿐이었을까. 현장에 있던 기자들 상당수가 이들의 '쇼 아닌 쇼'를 보며 혀를 찼다. 그들은 오만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를 너무 우습게 보는듯했다.
방금 통진당 홍성규 대변인이 "오늘 민주주의와 정의가 질식사했다"며 "통합진보당은 민주주의와 정의를 지키는 유일한 야당"이라고 브리핑했다. 민주당을 겨냥한 발언이다. '민주주의'나 '정의'와 무관한듯 보이는 이들의 입에서 단어가 계속 반복된다.
진정한 민주주의와 정의에 대해 고민해봐야겠다.
[정치·북한] - 경기동부연합의 정체, 從北의 실체
-이들은 반제청년동맹 강령에 “김일성 장군님과 한국민족민주전선(한민전)의 향도 따라 나아가는 김일성주의 청년 혁명조직”이라고 명시했다.
-'반제청년동맹'은 북한 김일성이 15세 때 중국에서 결성한 지하청년혁명 조직인 ‘반제청년동맹’과 이름이 같다.
-이들은 김일성 생일 때 전국 대학가에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 장군님의 77회 탄생일을 축하드린다”는 유인물을 뿌리며 조직의 실체를 최초로 알렸다.
-반제청년동맹은 '강철서신' 김영환이 조직을 주도하면서 ‘민혁당’이란 이름으로 개편했다.
-김영환은 남파간첩 윤택림에게 포섭, 밀입북해 김일성을 직접 두 차례 만난 인물이다.
-대호명 '관악산 1호'이자 민혁당 총책 김영환은 북한으로부터 미화 40만 달러, 권총, 무전기, 난수표 등을 받고 당 조직 결성과 선거 지원자금으로 사용했다.
-김영환은 민혁당의 중앙위원장이었으며, 하영옥과 박ㅇㅇ은 중앙위원을 맡았다. 이석기는 경기남부위원장으로서 하영옥의 지도를 받았다.
-김영환, 하영옥, 박○○은 모두 서울대 법대 출신 엘리트였다.
-이상규(現 통진당 국회의원)는 당시 수도남부지역사업부를 맡았고, 박경순(現 통진당 부설 진보정책연구원 부원장)은 울산지역위원장, 이의엽(前 통합진보당 정책위의장)은 부산지역위원장이었다.
-김일성을 직접 만난 후 그에 대한 환상을 깬 김영환은 1997년 주체철학 창시자 황장엽의 망명 후 민혁당 해체를 선언했다.
-하영옥은 이석기 등과 함께 민혁당 재건에 나섰다.
-김영환은 “북한의 수령론은 완전한 허구이자 거대한 사기극”이라며 김일성·김정일 체제를 정면 비판, 북한과의 완전한 결별을 선언했다.
-북한은 간첩 원진우를 남파해 하영옥을 민혁당 총책으로 추인하고 ‘광명성’이란 대호명을 부여했다.
-간첩 원진우는 김영환의 중국 주소지를 파악해 북한으로 돌아가는 중 그가 탄 반잠수정이 대한민국 해군에 격침돼 사망했다.
-약 두 달간의 작업 끝에 인양된 반잠수정은 ‘정보 덩어리’ 그 자체였다.
-원진우가 소지했던 전화번호 수첩(암호화), 주민등록증, 쓰레기봉투, 필름 등을 확보한 국정원은 간첩의 은신처와 행적, 그리고 주요인물 명단을 밝혀냈다.
-만약 반잠수정 격침이 실패했다면, 원진우는 무사히 북으로 귀환하고, 김영환은 암살됐을 가능성이 크며, 민혁당의 실체는 영원히 미궁에 빠졌을 것이다.
-하영옥은 1999년에 검거됐지만, 도피한 이석기는 2002년 5월에야 체포됐다.
-이석기가 사라진 약 3년간의 행적은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 그는 이 즈음 NL계열의 핵심이자 실세로 떠올랐다.
-하영옥은 징역 8년형을 선고받았지만 4년 복역 후 2003년 4월 특별사면돼 석방됐다.
-하영옥은 석방 후 이석기 석방운동을 벌였다.
-징역 2년6월형을 선고받은 이석기는 2003년 8월 사면돼 석방됐다.
-하영옥과 이석기는 2005년 광복절 특사 때 특별복권을 받았다.
-김영환을 비롯해 박○○, 조유식, 홍진표 등은 전향했으며, 특히 김영환과 홍진표는 현재 대북인권운동을 하고 있다.
-이석기와 이상규는 민혁당 이후 국회의원 신분인 현재까지 단 한 번도 전향의사를 밝힌 적이 없다.
-한기홍 북한민주화네트워크 대표는 작년 총선 때 “이석기의 비례대표 출마는 결국 자충수”라며 이렇게 말했다.
“주사파들이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를 너무 무시한 것 같다.”
[정치·북한] - 경기동부연합의 정체, 從北의 실체
그는 국회 본회의장 앞에 집결해 "이석기 사랑해"를 외치는 당원들의 '열렬한 성원'을 받으며 입장했다. 오병윤 원내대표의 의사진행발언, 이상규 의원의 질의, 그리고 이석기 의원 본인의 신상발언이 이어졌지만, 단 한 번 '대한민국 국민에 대한 사과나 반성'은 없었다. 이들은 수차례 '절두산 성지'를 '결전 성지'로, '총을 가지고 다니지 말라'가 '총기지시'로 기록됐다며 체포동의요구서의 녹취록을 '교열'했다. 그게 전부였다.
이석기 의원의 '사과'는 체포동의안이 가결된 후 본회의장 앞 연설에서야 들을 수 있었다. 자신을 응원하는 당원들에게 "체포동의안을 막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했다. 그는 "정의와 진실이 승리할 것이라 믿는다"고 했다.
대중은 환호했다. 방금 자신의 체포동의안이 통과된 현직 국회의원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그는 '내란음모 피의자'가 아니라 '개선장군' 같았다. 체포동의안 통과를 당론으로 정한 민주당과 정의당까지 적으로 몰아세웠다. PD파를 무시하는 NL주사파들의 주특기가 반복된 현장이었다.
김선동 의원은 국회의원 298명 중 찬성표를 던진 258명을 뺀 '40명의 항거'를 자랑스러워했다. 참고로 이날 표결에선 289명 출석에 찬성 258표, 반대 14표, 기권 11표, 무효 6표로 가결됐다. 이들은 불출석, 반대, 기권, 무효표 전체를 자기편으로 인식한 것이다.
"체포동의안 결사반대"를 외치는 이들의 환호와 함성이 '마지막 발악'으로 보인 건 나뿐이었을까. 현장에 있던 기자들 상당수가 이들의 '쇼 아닌 쇼'를 보며 혀를 찼다. 그들은 오만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를 너무 우습게 보는듯했다.
방금 통진당 홍성규 대변인이 "오늘 민주주의와 정의가 질식사했다"며 "통합진보당은 민주주의와 정의를 지키는 유일한 야당"이라고 브리핑했다. 민주당을 겨냥한 발언이다. '민주주의'나 '정의'와 무관한듯 보이는 이들의 입에서 단어가 계속 반복된다.
진정한 민주주의와 정의에 대해 고민해봐야겠다.
[정치·북한] - 경기동부연합의 정체, 從北의 실체
이석기 체포동의안 통과 현장. ⓒ김정우
-이석기가 29세 때 하영옥, 박○○과 함께 결성한 '반제청년동맹'의 지도이념은 '김일성 주체사상'이었다.
-이들은 반제청년동맹 강령에 “김일성 장군님과 한국민족민주전선(한민전)의 향도 따라 나아가는 김일성주의 청년 혁명조직”이라고 명시했다.
-'반제청년동맹'은 북한 김일성이 15세 때 중국에서 결성한 지하청년혁명 조직인 ‘반제청년동맹’과 이름이 같다.
-이들은 김일성 생일 때 전국 대학가에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 장군님의 77회 탄생일을 축하드린다”는 유인물을 뿌리며 조직의 실체를 최초로 알렸다.
-반제청년동맹은 '강철서신' 김영환이 조직을 주도하면서 ‘민혁당’이란 이름으로 개편했다.
-김영환은 남파간첩 윤택림에게 포섭, 밀입북해 김일성을 직접 두 차례 만난 인물이다.
-대호명 '관악산 1호'이자 민혁당 총책 김영환은 북한으로부터 미화 40만 달러, 권총, 무전기, 난수표 등을 받고 당 조직 결성과 선거 지원자금으로 사용했다.
-김영환은 민혁당의 중앙위원장이었으며, 하영옥과 박ㅇㅇ은 중앙위원을 맡았다. 이석기는 경기남부위원장으로서 하영옥의 지도를 받았다.
-김영환, 하영옥, 박○○은 모두 서울대 법대 출신 엘리트였다.
-이상규(現 통진당 국회의원)는 당시 수도남부지역사업부를 맡았고, 박경순(現 통진당 부설 진보정책연구원 부원장)은 울산지역위원장, 이의엽(前 통합진보당 정책위의장)은 부산지역위원장이었다.
-김일성을 직접 만난 후 그에 대한 환상을 깬 김영환은 1997년 주체철학 창시자 황장엽의 망명 후 민혁당 해체를 선언했다.
-하영옥은 이석기 등과 함께 민혁당 재건에 나섰다.
-김영환은 “북한의 수령론은 완전한 허구이자 거대한 사기극”이라며 김일성·김정일 체제를 정면 비판, 북한과의 완전한 결별을 선언했다.
-북한은 간첩 원진우를 남파해 하영옥을 민혁당 총책으로 추인하고 ‘광명성’이란 대호명을 부여했다.
-간첩 원진우는 김영환의 중국 주소지를 파악해 북한으로 돌아가는 중 그가 탄 반잠수정이 대한민국 해군에 격침돼 사망했다.
-약 두 달간의 작업 끝에 인양된 반잠수정은 ‘정보 덩어리’ 그 자체였다.
-원진우가 소지했던 전화번호 수첩(암호화), 주민등록증, 쓰레기봉투, 필름 등을 확보한 국정원은 간첩의 은신처와 행적, 그리고 주요인물 명단을 밝혀냈다.
-만약 반잠수정 격침이 실패했다면, 원진우는 무사히 북으로 귀환하고, 김영환은 암살됐을 가능성이 크며, 민혁당의 실체는 영원히 미궁에 빠졌을 것이다.
-하영옥은 1999년에 검거됐지만, 도피한 이석기는 2002년 5월에야 체포됐다.
-이석기가 사라진 약 3년간의 행적은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 그는 이 즈음 NL계열의 핵심이자 실세로 떠올랐다.
-하영옥은 징역 8년형을 선고받았지만 4년 복역 후 2003년 4월 특별사면돼 석방됐다.
-하영옥은 석방 후 이석기 석방운동을 벌였다.
-징역 2년6월형을 선고받은 이석기는 2003년 8월 사면돼 석방됐다.
-하영옥과 이석기는 2005년 광복절 특사 때 특별복권을 받았다.
-김영환을 비롯해 박○○, 조유식, 홍진표 등은 전향했으며, 특히 김영환과 홍진표는 현재 대북인권운동을 하고 있다.
-이석기와 이상규는 민혁당 이후 국회의원 신분인 현재까지 단 한 번도 전향의사를 밝힌 적이 없다.
-한기홍 북한민주화네트워크 대표는 작년 총선 때 “이석기의 비례대표 출마는 결국 자충수”라며 이렇게 말했다.
“주사파들이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를 너무 무시한 것 같다.”
민혁당 조직도
[정치·북한] - 경기동부연합의 정체, 從北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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