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한 직설
강용석 “안철수보단 내가 낫다”
김정우 기자
2013. 11. 5.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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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용석(康容碩)이 이렇게 뜰 줄은 아무도 몰랐다. 자신도 놀랍다고 한다. 호사다마(好事多魔)와 새옹지마(塞翁之馬)에 최적화한 이 인물은 젊은이들 사이에 ‘인생역전’의 상징이 됐다. ‘찌질이’와 ‘스토커’로 불리던 ‘비호감 정치인’은 어느새 상한가를 치는 ‘호감 방송인’으로 변신했다.
재선(再選)에 실패한 정치초년생의 이름을 이제 전 국민이 다 안다. 그가 출연하는 TV프로그램에 출연하려는 다선(多選) 의원들의 청탁성 전화 또한 부쩍 늘었다. ‘작전주 차트’보다 기복이 심한 시절을 보낸 그는 “작년까지는 (부정적인) ‘인지도’만 높았는데 이젠 ‘호감도’도 높다”며 좋아했다.
1년 전 만났을 때도 그의 표정은 상당히 밝았다. 마침 낙선(落選) 후 선거사무소의 짐을 빼느라 상당히 분주했는데, 그는 당선이라도 한 양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일부러 여유 있는 척하는 거냐”는 질문에 그는 “그렇다고 앉아서 울기만 하기엔 책임져야 할 조직과 가족이 너무 많다”고 답했다.
박원순(朴元淳) 서울시장 아들의 병역비리 의혹을 제기했다가 세브란스병원의 재검(再檢) 후 의원직 사퇴를 선언했던 지난해 2월 22일에도 분위기는 비슷했다. 자정이 다 된 시각 자택에서 만난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남의 일 말하듯’ 보좌관과 대책을 논하고 있었다. ‘아나운서 비하 발언’ 이후 찾아온 ‘최대위기’였지만, 그는 “정치하다 보면 항상 고비가 있기 마련”이라며 “언젠가 기회는 다시 오게 돼 있다”고 했다.
아나운서 발언으로 시작된 ‘정치적 위기’는 개그맨 최효종 고소 사건, 한나라당 제명(除名), 박원순 시장 아들 병역기피 의혹 제기, 의원직 사퇴, 지역구 낙선 등을 거치며 그를 ‘국민 비호감’으로 만들었다. 여느 정치인이라면 산속으로 들어가거나 유학길을 택했을 텐데, 그는 방송을 통해 정면 돌파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강용석 성향이 어딜 가겠나”
1년 만에 다시 만난 ‘방송인 강용석’은 여전히 이슈의 중심이었다. 인터뷰를 두 차례 진행하는 동안 NLL 포기 발언 논란과 박상도 SBS 아나운서의 비판 등 매주 새로운 뉴스를 만들어냈다. 박 아나운서는 지난 6월 14일 ‘자유칼럼세상’이란 사이트에 ‘강용석의 변신은 무죄?’란 제목으로 “예능으로 이미지 세탁을 한다고 과거 잘못이 용서될 수 있겠느냐”며 강용석 전 의원을 비판했다.
—박상도(朴相度) 아나운서의 비판에 대한 입장이 뭔가.
“〈썰전〉에서 얘기한 그대로다. 작은아들이 ‘과속방지턱’이라고 하더라. 속도를 적절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열심히 하라는 의미로 알고 노력하겠다.”
—방송에서 노무현-김정일 대화록 내용을 두고 “NLL 포기라고 보기 어렵다”고 발언해 보수층의 비난을 받고 있다. 지난 7월 11일 방송에서도 입장을 그대로 고수한 것으로 보인다.
“11일 방송 녹화를 월요일인 8일에 했다. 녹화 이후 국정원과 국방부가 연일 잇달아 입장을 표명하더라. 발표 내용을 보니 현재 공개된 대화록 전문보다 뭔가 숨겨진 게 더 있다는 생각도 든다. ‘NLL 포기라고 보기 어렵다’고 말한 건 대화록 전문 내용만 보고 얘기한 거다. 기존에 공개됐던 발췌록 내용과 분위기가 달라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가기록원이 보유한 원문을 국회가 곧 열람하기로 했으니 모든 사실이 명명백백(明明白白)히 밝혀졌으면 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밝혀져야 한다고 보는가.
“문재인 의원의 주장인 ‘NLL 기준 등거리·등면적 공동어로수역 설정’이란 내용이 공개된 전문엔 없다. 그리고 발췌록에선 노 전 대통령이 ‘저는’, ‘위원장님’이란 표현을 쓴 것으로 돼 있는데, 전문엔 ‘나는’, ‘위원장’이라고 나온다. 실제로 대통령이 ‘저는’, ‘위원장님’이라고 했다면, NLL 포기 문제보다 훨씬 심각해진다. 이러한 부분을 철저하게 공개해야 한다고 본다.”
—보수논객 변희재(邊熙宰)씨가 이번 발언을 두고 ‘강용석 같은 호구’라며 비난했고, 성재기(成在基) 남성연대 대표로부터 욕설까지 들었다.
“기분 나쁠 건 없다.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변절’은 아니란 사실을 알아줬으면 한다. ‘보수’라고 불리는 이들이 서로 친목하자고 모인 것은 아니지 않나. 이슈에 대해 건전하게 해석하고 논의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본다. 감정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우리가 싸우던 종북좌파의 교조주의를 닮아가는 것밖에 안 된다. 성재기씨와는 전화 통화를 통해 오해를 풀었다. 변희재씨와도 곧 한번 자리를 마련할 계획이다. 안 그래도 부족한 보수논객들인데, 우리끼리 치고받고 싸울 이유가 없다. 강용석 성향이 어딜 가겠나.”
“본업은 변호사, 방송은 부업”
방송인으로서 강용석은 초고속 성장 중이다. 지난 6월 4일 첫 전파를 탄 JTBC 〈유자식 상팔자〉는 당일 종합편성채널 프로그램 중 최고시청률(3.68%)을 기록했다. 강용석의 ‘예능 멘토’ 김구라가 진행하는 SBS 〈화신〉은 5.8%를 기록했다. 지상파와 종편의 상황을 비교해 ‘강용석의 사실상 판정승’이란 제목의 보도도 나왔다.
—‘멘토’에게 판정승해서 기분이 좋은가.
“기분도 좋고 기획도 좋았다. SBS 〈스타주니어쇼 붕어빵〉의 ‘중학생 버전’인데, 사춘기 애들과 진지한 얘기를 하는 거라 처음엔 반신반의(半信半疑)했다. 사전에 작가들이 청소년 100명을 만나 물어보니 반응이 괜찮아서 진행했다. 찍을 때까진 크게 기대 안 했는데, 방송은 역시 편집이더라.”
—방송인과 정치인 중 본업이 뭔가?
“나도 헷갈린다. 여전히 변호사로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 녹화는 주로 오후 늦게 하는데, 나 같은 변호사는 사무실에 가도 오후 3시 넘으면 별로 할 일이 없다. 그 시간에 녹화한다. 변호사가 본업이고 방송이 부업인 셈인데, 수입은 방송이 더 많다.”
—대충 직업이 3개로 모이는데, 어떤 게 제일 좋던가.
“변호사는 생계가 걸린, 그야말로 직업이다. 방송은 하면 할수록 호감도와 인지도가 확실히 높아진다. 정치는 ‘생각하는 것을 할 수 있다’는 매력이 있다. 정치하다가 방송을 해보니 확실히 체감이 되더라. 방송에서 어느 정도 입지가 되면 사회적 영향력이 정치보다 높다.”
—요즘 대표적 역폴리테이너(逆politainer·정치인에서 연예인이 된 인물)로 불리는데, 유명세를 느끼나.
“얼마 전 홍대 앞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데, 젊은 청년이 와서 같이 사진 찍자고 하더라. 알고 보니 유명 밴드의 기타리스트였다. 한번은 정치권 인사들과 만났을 때 젊은 회사원들이 사인해 달라고 했다. 한 선배가 ‘너 몇 선 한다고 이렇게 되겠느냐’고 하더라. 전국에 낙천·낙선한 초선의원이 얼마나 많은데, 이렇게 《월간조선》까지 찾아와서 인터뷰해 준다는 자체가 대단한 것 아닌가.”
‘10년 주기 대통령 2명 탄생説’
그는 《월간조선》과 인터뷰하게 된 것을 영광이라고 했다. 1985년, 고교 1학년생 강용석은 박찬종(朴燦鍾) 의원 인터뷰 기사를 읽고 언젠가 자신도 《월간조선》에 실릴 날을 꿈꿨다. ‘정계의 감초 박찬종’이란 제목의 당시 기사엔 〈…뉴스의 각광을 받으며 정계에 회오리를 일으킨 그는 누구인가. 그에게 쏟아지는 격려와 야유는 어떤 것인가. 그리고 그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란 부제가 달렸다. 당시 박찬종의 나이는 46세, 현재 강용석의 나이는 44세다.
—강용석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방송 잘되면 정치는 그만둘 건가.
“전혀. 최종 목표는 언제나 정치다.”
—최종 목표가 대통령이라고 대놓고 말하는 이유가 있나.
“정치인이라면 대통령 꿈을 모두 꾼다. 다만 그런 얘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을 뿐이다. 지방은 좀 다르겠지만, 서울의 경우 지역구 주민들 절반이 국회의원이 누군지 잘 모른다. 매년 구별로 20%가 이사를 하는데 유명인사가 아니고선 인지도 50%를 넘기기 어렵다. 지금 서울시민 중 주소지의 구청장 이름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이런 상황에서 정치신인이나 다름없는 국회의원이 ‘나 대통령 되겠다’고 하면 이상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을 설명하면서 자연스레 대통령이 꿈이라고 했는데, 어찌하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대선 출마는 언제쯤 할 계획인가.
“얼마 전 <썰전>에서 ‘10년 주기 대통령 2명 탄생설’을 밝혀냈다. 박정희와 최규하는 1910년대생, 김영삼과 김대중은 1920년대생, 전두환과 노태우는 1930년대생, 이명박과 노무현은 1940년대생, 박근혜는 1950년대생이다. 이 법칙대로 하면 다음 대통령은 1950년대생이 한 번 더 하고, 그다음이 1960년대생이다. 현재 1960년대생 중 가장 유력한 후보는 안철수와 강용석이다.”
그는 정치를 시작한 이유로 “이루지 못한 꿈은 슬프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변호사가 되고 시민단체 활동을 했다. 법의 힘을 체험하고선 국회의원까지 됐는데, 보다 더 근본적인 권력이 필요함을 느꼈다. 바로 대통령이다. 그는 대통령이 되면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루겠다고 공언했다.
그가 방송을 하는 목적은 ‘정계복귀’를 위해서다. 초선 국회의원 때 ‘낮은 인지도의 서러움’을 체험한 그는 방송을 통해 정치적 기반을 다져 재출마한다는 계획을 공공연히 말하고 다닌다. 특히 JTBC 〈썰전〉의 경우 “예능 프로그램은 출연자의 호감도를 높여준다”는 연출자 여운혁(呂運赫) CP의 말에 출연을 결심했다고 한다.
등록금 벌기 위해 장학퀴즈 출전
그에게 “예전엔 늦둥이 보는 재미로 산다고 했는데, 요즘은 무슨 낙으로 사느냐”고 물으니 “방송 녹화”란 답이 돌아왔다. 낙선한 정치인은 시간 때우는 게 고역인데, 요일별로 잡힌 녹화 일정에 지겨울 틈이 없단다. 매일 시청률 통계를 보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다.
“성적표 받아보는 게 고역일 수 있겠지만, 학창시절부터 그 ‘스릴’을 즐겼던 것 같다. 매일 시청률 성적표 받는 것을 즐긴다. 신문에서 종편으로 건너온 기자분들도 비슷한 심정인 것 같더라. 즉각적 반응에 적응되면 은근히 재미있다.”
그는 학창시절 공부를 잘했다. 학력은 경기고-서울대 법대-하버드대 로스쿨이다. 화려한 학력과 경력 때문에 강남부잣집 도련님으로 오해받지만, 실상은 상당히 불우한 성장기를 보냈다.
특히 아버지의 전과가 문제였다. 대부분 생계형 사기와 횡령 등 경제범죄였다. 강용석이 예닐곱 살 되던 해 구속된 후 초·중·고교 시절 내내 교도소를 들락날락했다. 그가 29세 되던 1998년 10월 의식을 잃어 형집행정지가 됐고,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아들의 인생 29년 중 13년이 넘는 기간을 교도소에 있었다.
가정형편이 좋을 리 없었다. 네 식구가 단칸방과 반지하 방을 옮겨다녔다. 성적이 좋았던 그는 대학 등록금을 벌기 위해 MBC 〈장학퀴즈〉에 출전했다. 기(期) 장원을 하면 장학금을 받는다는 말에 열정적으로 나섰지만, 욕심이 과했는지 버저(buzzer)를 신나게 누르다 많이 맞춘 만큼 틀린 바람에 월(月) 장원을 수상하는 데 그쳤다.
우여곡절 끝에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고시까지 통과했지만, 아버지의 전력으로 판사에 임용되지 못했다. 지나간 전과는 결격사유가 아니었지만, 아버지가 구속수감된 상태에서의 판사 임용은 불가능하다는 이유였다.
—아버지 원망을 많이 했겠다.
“솔직히 안 했다면 거짓말이다. 학창시절에 ‘아버지 뭐 하시느냐’란 질문이 가장 듣기 싫었다. 우물쭈물하며 대충 ‘사업한다’고 답하면 ‘무슨 사업’이냐고 되묻는다. 경기고 특성상 잘사는 친구들이 많아 상처를 많이 받았다. 중학교 3학년 때까지 반장을 한데다 연합고사도 만점 받았는데, 고등학교 가니 반장을 안 시켜 주더라. 그래서 더 죽어라 공부했다.”
—말 그대로 “개천에서 용 난” 케이스다.
“예전처럼 입시가 단발 승부면 개천에서 용 날 수 있다. 고3 때 1년 열심히 공부해서 학력고사 점수 50점 올리는 게 가능했던 시기였다. 그런데 요즘의 입학사정관제 등은 입시를 ‘장기 레이스’로 바꿨다. 물론 선진국일수록 그렇게 갈 수밖에 없다는데, 너무 심한 감이 있다. 이런 환경에선 개천에서 용이 못 나온다.”
“아나운서 발언 지금도 기억 못 해”
국회의원이란 자리까지 꿰찬 ‘강용석’이란 용은 2010년 ‘아나운서 비하 발언 논란’이 불거지면서 곤두박질치며 추락했다. 여학생에게 “다 줄 생각을 해야 하는데 그래도 아나운서 할래”라는 ‘성희롱적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당에서 제명당했다. 아나운서들에게 고소를 당했고, 1심 재판에서 징역형까지 받았다. 그는 지금도 이 사건에 대해선 아쉬움이 남은 듯했다.
—당시 심경은 어땠나.
“돌이켜보면 어쩔 수 없지만, 그땐 정말 황당했다. 술에 취해 실수했다면 곧바로 인정했을 것이다. 난 잘못한 일에 대해선 분명히 사과하는 성격이다. 그런데 그날 마신 주량이 폭탄주 두어 잔 정도였다. 학생 30여 명이 함께 있었고, 취할 정도로 마시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솔직히 그날 정확히 어떤 발언을 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왜 기억을 못 했나.
“7월 16일에 사건이 났다는데, 4일 후인 20일에 첫 기사가 나왔다. 4일 전에 한 말을 어떻게 다 기억하나. 후에 일정표를 보니 면담과 지역행사 등 그날만 총 11개의 일정이 있었다. 대학생들과 식사자리엔 1시간20분 정도 머물렀고, 이후 일정이 2개 더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4일 전에 어디에서 무슨 얘기 했는지 물으면 누가 대답을 하겠나.”
—후회한 적은 없나.
“후회할 일이 아니다. 만약 당시에 기자가 함께 자리해 메모나 녹음을 한 상황이라면 ‘조심했어야 하는구나’란 생각을 했을 텐데, 그것도 아니었다. 여학생이 누군가에게 한 얘기가 기자에게 전달돼 사건이 벌어졌다. 그런 식이라면 대한민국에 일어나지 못할 사건은 없다고 본다.”
—집안 분위기는 어땠나?
“안 좋았다. 초등학생이었던 아들이 ‘신문사 나쁘다’며 울었다. 그런데 중학생이 되더니 이젠 좀 무덤덤하다. 아빠와 함께 내공이 쌓인 듯하다. 사춘기를 세게 보내서인지 멘털이 상당히 강하다.”
—국회의원 출신 장인어른(윤재기 변호사)은 뭐라고 하던가?
“정치인 출신이라 통이 크셨다. ‘이렇게 터지는 거 보니 너 크게 되겠다’고 하더라. ‘모든 게 다 과정’이라고 하셨는데, 지금도 그 말을 항상 적용하며 산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생겨도 20년 후를 생각해 보면 별것 아니다.”
‘병 주고 약 준 《중앙일보》’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아나운서 발언’을 당시 최초로 폭로했던 《중앙일보》의 방송국에서 현재 맹활약 중이다. JTBC에서만 2개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으며, 《여성중앙》엔 직접 인터뷰 기사를 연재할 계획이다. 요즘 ‘준(準) 중앙일보 직원’처럼 됐다는 그는 “병 주고 약 준 셈”이라며 “월급은 정규직보다 더 많이 받을 것 같다”고 농을 했다.
2011년부터 그는 ‘박원순 저격수’로 활동하며 정치적 재기(再起)를 꿈꿨지만, 이듬해 2월 그가 병역의혹을 제기했던 박 시장이 아들 주신씨의 재신검 결과를 공개하면서 다시 위기에 봉착했다. 최근 일부 인사를 통해 제기된 추가의혹에 대해선 “관심 있게 지켜보고는 있지만, 직접 나설 입장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당시 왜 곧바로 사퇴 발표를 했나?
“국회 사무실에서 기자 몇 명과 생방송 속보를 같이 보고 있었다. 세브란스병원에서 검사 결과가 중계되자마자 기자들이 입장을 얘기해 달라고 하더라. 그냥 내려가서 사퇴 기자회견을 했다. 어떻게 보면 떠밀리듯 한 셈이다. 지금 생각해도 그땐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다.”
‘박원순 저격’에 실패한 그는 지난해 총선에서 4.3% 득표율로 낙선한다. ‘사실상 현역 의원’이 이렇게 추락하는 경우도 드물다. 실패를 통해 그가 얻게 된 것은 “절대로 무소속으로 출마하지 않는다”는 다짐이다. 선거는 막바지가 될수록 모든 이슈가 양당 구도로 좁혀짐을 느꼈기 때문이다.
—지난 2월엔 노무현 전 대통령을 두고 “대통령감이 아니라 3선 의원에 장관 정도가 적당하다”고 발언해 논란이 있었다.
“지금도 같은 생각이다. 대통령으로선 뭔가 불안했다. 우리는 최근까지 ‘국민이 대통령을 걱정해야 하던 시절’을 보냈다. 자고 일어나면 ‘오늘은 대통령이 무슨 사고 칠까’ 걱정했다. 그런데 적어도 현(現) 대통령은 그 정도는 아닌 것 같다.”
“안철수의 책 보니 수준이 보이더라”
—이명박(李明博) 전 대통령과는 사돈 관계였는데.
“막내 동생의 처남댁이 김윤옥(金潤玉) 여사의 조카다. 이 전 대통령의 처남인 김재정씨가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됐을 때, 그 딸이 결혼한 거다. 2010년 5월경인데, 그때 대통령 내외를 처음 뵈었다. ‘사돈에 팔촌’보다는 가깝지만, 그렇다고 친한 사이는 아니다.”
—본인은 대통령감이 된다고 보나?
“안철수(安哲秀)보다는 낫지 않을까?”
—만약 이번 노원구 보궐선거에서 안철수와 일대 일로 붙었다면 스코어가 어떻게 났을까?
“지역선거는 지지층이 중요하다. 주민의 과반(過半)이 ‘반(反) 새누리당’ 정서인 곳에서 무슨 수로 이기나. 하지만 전국 선거로 하면 지금 당장 붙어도 이길 자신 있다.”
—그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나?
“양자 TV토론 세 번 정도만 하면 탈탈 털리지 않을까? 《안철수의 생각》이란 책을 읽어 보니 그 수준이 보이더라. 그의 생각이 너무 실망스러웠다.”
—서울시장에 출마할 거란 얘기가 돌더라.
“내년에 나간다면 순전히 운(運)이고, 2020년 지나서 나간다면 그건 기획이다. 내년에 출마하려면 이미 올해 초부터 움직여야 했다. 2006년 지방선거 때 원외 당직을 맡았던 덕에 그 과정을 자세히 지켜볼 수 있었다. 맹형규(孟亨奎)·홍준표(洪準杓)란 거물급이 그렇게 오랫동안 준비했는데, 열린우리당이 강금실(康錦實)을 내놓자 결국 한나라당은 오세훈(吳世勳)을 선택했다.”
—운이 좋으면 내년에 서울시장에 출마할 수도 있다는 뜻인가.
“굳이 부정하진 않겠지만, 나한테 그런 운과 기회가 과연 오겠나.”
—예능에선 김구라가 멘토라고 했는데, 정치계에서 롤모델은 누구인가.
“현재 우리나라엔 딱히 없다. 외국에서 찾는다면 윈스턴 처칠(Churchill)과 마거릿 대처(Thatcher)다.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 직전 나치 독일의 위험성을 경고했고, 대처는 극우파로 몰리면서까지 자신의 소신을 지켰다.”
“목표는 시청률 15%”
현재 ‘방송인 강용석’의 목표는 시청률 15%다. 시청률 15%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느낌이 어떨지 궁금하다는 게 이유였다. ‘정치인 강용석’의 목표는 ‘정계복귀’다. 일본에서 성공해 타이완의 국민가수가 된 덩리쥔(鄧麗君)처럼, 방송계에서 입지를 굳힌 후 정계로 복귀하겠다는 계획이다.
그는 확실히 미디어란 힘을 얻었다. 2011년 가을 그가 집단 모욕죄로 고소했던 개그맨 최효종이 〈개그콘서트〉를 통해 그를 조롱했을 때, 여론은 모두 개그맨 편이었다. 지난 6월 9일 방송된 〈개그콘서트〉 700회 특집에선 상황이 바뀌었다. 〈썰전〉 멤버 이철희(李哲熙), 김구라와 함께 등장한 강용석은 “최효종 많이 띄워 줬는데 요즘 기대에 못 미치는 것 같다”며 ‘해학적 복수’에 성공했다.
바쁜 방송 일정 중에 책까지 낸다고 한다. 7월 말 출간할 《강용석의 직설》 안에는 그가 살아온 과정과 최근 겪었던 여러 사건에 대한 못다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각종 논쟁적 이슈에 대한 가감 없는 해설도 포함된다.
지난해 1월, 우연히 받은 강용석의 새 명함을 트위터에 올린 적이 있다. “국회의원 명함 중에 제일 웃기다. 이분 이번 4월 총선 때 ‘모 아니면 도’가 될 가장 유력한 인물”이란 글과 함께 공개한 명함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포기를 모르는 남자, 불꽃남자, 고소고발 집착남, 화성인, 박원순 안철수 저격수, 특권 종결남, 병역비리 스토커, 개천표 용, 극우보수의 아이콘, 예능 늦둥이, 아들 바보, 모두까기 인형, 미친 인지도, 내가 제일 고소해.”
상당부분 이룬 것도 있고, 일부는 현재진행형이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그의 뜻대로 다시 정치인이 됐을 때, 지금 방송에서 쏟아낸 당돌한 발언이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인터뷰를 마친 후 그와 함께 찍은 사진을 다시 SNS에 올려봤다. 1년 전보다 확실히 팬이 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월간조선 2013년 8월호 '임재민·김정우의 유쾌한 직설'
재선(再選)에 실패한 정치초년생의 이름을 이제 전 국민이 다 안다. 그가 출연하는 TV프로그램에 출연하려는 다선(多選) 의원들의 청탁성 전화 또한 부쩍 늘었다. ‘작전주 차트’보다 기복이 심한 시절을 보낸 그는 “작년까지는 (부정적인) ‘인지도’만 높았는데 이젠 ‘호감도’도 높다”며 좋아했다.
1년 전 만났을 때도 그의 표정은 상당히 밝았다. 마침 낙선(落選) 후 선거사무소의 짐을 빼느라 상당히 분주했는데, 그는 당선이라도 한 양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일부러 여유 있는 척하는 거냐”는 질문에 그는 “그렇다고 앉아서 울기만 하기엔 책임져야 할 조직과 가족이 너무 많다”고 답했다.
강용석 변호사. ⓒ서경리
⊙ 종편 예능·시사프로그램 종횡무진… ‘국민 비호감’에서 ‘시청률 우량주’로 변모
⊙ 정계복귀 위해 방송 활동… “최종 목표는 대통령 당선”
⊙ ‘NLL 발언’ 후 보수층으로부터 뭇매… “변절 아니다. 대화록 원문 열람으로 진실 가려내야”
⊙ “운 좋다면 내년 서울시장 출마”
⊙ 정계복귀 위해 방송 활동… “최종 목표는 대통령 당선”
⊙ ‘NLL 발언’ 후 보수층으로부터 뭇매… “변절 아니다. 대화록 원문 열람으로 진실 가려내야”
⊙ “운 좋다면 내년 서울시장 출마”
박원순(朴元淳) 서울시장 아들의 병역비리 의혹을 제기했다가 세브란스병원의 재검(再檢) 후 의원직 사퇴를 선언했던 지난해 2월 22일에도 분위기는 비슷했다. 자정이 다 된 시각 자택에서 만난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남의 일 말하듯’ 보좌관과 대책을 논하고 있었다. ‘아나운서 비하 발언’ 이후 찾아온 ‘최대위기’였지만, 그는 “정치하다 보면 항상 고비가 있기 마련”이라며 “언젠가 기회는 다시 오게 돼 있다”고 했다.
아나운서 발언으로 시작된 ‘정치적 위기’는 개그맨 최효종 고소 사건, 한나라당 제명(除名), 박원순 시장 아들 병역기피 의혹 제기, 의원직 사퇴, 지역구 낙선 등을 거치며 그를 ‘국민 비호감’으로 만들었다. 여느 정치인이라면 산속으로 들어가거나 유학길을 택했을 텐데, 그는 방송을 통해 정면 돌파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강용석 성향이 어딜 가겠나”
1년 만에 다시 만난 ‘방송인 강용석’은 여전히 이슈의 중심이었다. 인터뷰를 두 차례 진행하는 동안 NLL 포기 발언 논란과 박상도 SBS 아나운서의 비판 등 매주 새로운 뉴스를 만들어냈다. 박 아나운서는 지난 6월 14일 ‘자유칼럼세상’이란 사이트에 ‘강용석의 변신은 무죄?’란 제목으로 “예능으로 이미지 세탁을 한다고 과거 잘못이 용서될 수 있겠느냐”며 강용석 전 의원을 비판했다.
—박상도(朴相度) 아나운서의 비판에 대한 입장이 뭔가.
“〈썰전〉에서 얘기한 그대로다. 작은아들이 ‘과속방지턱’이라고 하더라. 속도를 적절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열심히 하라는 의미로 알고 노력하겠다.”
—방송에서 노무현-김정일 대화록 내용을 두고 “NLL 포기라고 보기 어렵다”고 발언해 보수층의 비난을 받고 있다. 지난 7월 11일 방송에서도 입장을 그대로 고수한 것으로 보인다.
“11일 방송 녹화를 월요일인 8일에 했다. 녹화 이후 국정원과 국방부가 연일 잇달아 입장을 표명하더라. 발표 내용을 보니 현재 공개된 대화록 전문보다 뭔가 숨겨진 게 더 있다는 생각도 든다. ‘NLL 포기라고 보기 어렵다’고 말한 건 대화록 전문 내용만 보고 얘기한 거다. 기존에 공개됐던 발췌록 내용과 분위기가 달라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가기록원이 보유한 원문을 국회가 곧 열람하기로 했으니 모든 사실이 명명백백(明明白白)히 밝혀졌으면 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밝혀져야 한다고 보는가.
“문재인 의원의 주장인 ‘NLL 기준 등거리·등면적 공동어로수역 설정’이란 내용이 공개된 전문엔 없다. 그리고 발췌록에선 노 전 대통령이 ‘저는’, ‘위원장님’이란 표현을 쓴 것으로 돼 있는데, 전문엔 ‘나는’, ‘위원장’이라고 나온다. 실제로 대통령이 ‘저는’, ‘위원장님’이라고 했다면, NLL 포기 문제보다 훨씬 심각해진다. 이러한 부분을 철저하게 공개해야 한다고 본다.”
—보수논객 변희재(邊熙宰)씨가 이번 발언을 두고 ‘강용석 같은 호구’라며 비난했고, 성재기(成在基) 남성연대 대표로부터 욕설까지 들었다.
“기분 나쁠 건 없다.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변절’은 아니란 사실을 알아줬으면 한다. ‘보수’라고 불리는 이들이 서로 친목하자고 모인 것은 아니지 않나. 이슈에 대해 건전하게 해석하고 논의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본다. 감정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우리가 싸우던 종북좌파의 교조주의를 닮아가는 것밖에 안 된다. 성재기씨와는 전화 통화를 통해 오해를 풀었다. 변희재씨와도 곧 한번 자리를 마련할 계획이다. 안 그래도 부족한 보수논객들인데, 우리끼리 치고받고 싸울 이유가 없다. 강용석 성향이 어딜 가겠나.”
“본업은 변호사, 방송은 부업”
등 방송에서의 활약으로 연예인을 능가하는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사진은 JTBC <썰전> 방송의 한 장면.' height=215>
방송인으로서 강용석은 초고속 성장 중이다. 지난 6월 4일 첫 전파를 탄 JTBC 〈유자식 상팔자〉는 당일 종합편성채널 프로그램 중 최고시청률(3.68%)을 기록했다. 강용석의 ‘예능 멘토’ 김구라가 진행하는 SBS 〈화신〉은 5.8%를 기록했다. 지상파와 종편의 상황을 비교해 ‘강용석의 사실상 판정승’이란 제목의 보도도 나왔다.
—‘멘토’에게 판정승해서 기분이 좋은가.
“기분도 좋고 기획도 좋았다. SBS 〈스타주니어쇼 붕어빵〉의 ‘중학생 버전’인데, 사춘기 애들과 진지한 얘기를 하는 거라 처음엔 반신반의(半信半疑)했다. 사전에 작가들이 청소년 100명을 만나 물어보니 반응이 괜찮아서 진행했다. 찍을 때까진 크게 기대 안 했는데, 방송은 역시 편집이더라.”
—방송인과 정치인 중 본업이 뭔가?
“나도 헷갈린다. 여전히 변호사로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 녹화는 주로 오후 늦게 하는데, 나 같은 변호사는 사무실에 가도 오후 3시 넘으면 별로 할 일이 없다. 그 시간에 녹화한다. 변호사가 본업이고 방송이 부업인 셈인데, 수입은 방송이 더 많다.”
—대충 직업이 3개로 모이는데, 어떤 게 제일 좋던가.
“변호사는 생계가 걸린, 그야말로 직업이다. 방송은 하면 할수록 호감도와 인지도가 확실히 높아진다. 정치는 ‘생각하는 것을 할 수 있다’는 매력이 있다. 정치하다가 방송을 해보니 확실히 체감이 되더라. 방송에서 어느 정도 입지가 되면 사회적 영향력이 정치보다 높다.”
—요즘 대표적 역폴리테이너(逆politainer·정치인에서 연예인이 된 인물)로 불리는데, 유명세를 느끼나.
“얼마 전 홍대 앞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데, 젊은 청년이 와서 같이 사진 찍자고 하더라. 알고 보니 유명 밴드의 기타리스트였다. 한번은 정치권 인사들과 만났을 때 젊은 회사원들이 사인해 달라고 했다. 한 선배가 ‘너 몇 선 한다고 이렇게 되겠느냐’고 하더라. 전국에 낙천·낙선한 초선의원이 얼마나 많은데, 이렇게 《월간조선》까지 찾아와서 인터뷰해 준다는 자체가 대단한 것 아닌가.”
‘10년 주기 대통령 2명 탄생説’
그는 《월간조선》과 인터뷰하게 된 것을 영광이라고 했다. 1985년, 고교 1학년생 강용석은 박찬종(朴燦鍾) 의원 인터뷰 기사를 읽고 언젠가 자신도 《월간조선》에 실릴 날을 꿈꿨다. ‘정계의 감초 박찬종’이란 제목의 당시 기사엔 〈…뉴스의 각광을 받으며 정계에 회오리를 일으킨 그는 누구인가. 그에게 쏟아지는 격려와 야유는 어떤 것인가. 그리고 그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란 부제가 달렸다. 당시 박찬종의 나이는 46세, 현재 강용석의 나이는 44세다.
—강용석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방송 잘되면 정치는 그만둘 건가.
“전혀. 최종 목표는 언제나 정치다.”
—최종 목표가 대통령이라고 대놓고 말하는 이유가 있나.
“정치인이라면 대통령 꿈을 모두 꾼다. 다만 그런 얘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을 뿐이다. 지방은 좀 다르겠지만, 서울의 경우 지역구 주민들 절반이 국회의원이 누군지 잘 모른다. 매년 구별로 20%가 이사를 하는데 유명인사가 아니고선 인지도 50%를 넘기기 어렵다. 지금 서울시민 중 주소지의 구청장 이름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이런 상황에서 정치신인이나 다름없는 국회의원이 ‘나 대통령 되겠다’고 하면 이상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을 설명하면서 자연스레 대통령이 꿈이라고 했는데, 어찌하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대선 출마는 언제쯤 할 계획인가.
“얼마 전 <썰전>에서 ‘10년 주기 대통령 2명 탄생설’을 밝혀냈다. 박정희와 최규하는 1910년대생, 김영삼과 김대중은 1920년대생, 전두환과 노태우는 1930년대생, 이명박과 노무현은 1940년대생, 박근혜는 1950년대생이다. 이 법칙대로 하면 다음 대통령은 1950년대생이 한 번 더 하고, 그다음이 1960년대생이다. 현재 1960년대생 중 가장 유력한 후보는 안철수와 강용석이다.”
그는 정치를 시작한 이유로 “이루지 못한 꿈은 슬프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변호사가 되고 시민단체 활동을 했다. 법의 힘을 체험하고선 국회의원까지 됐는데, 보다 더 근본적인 권력이 필요함을 느꼈다. 바로 대통령이다. 그는 대통령이 되면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루겠다고 공언했다.
그가 방송을 하는 목적은 ‘정계복귀’를 위해서다. 초선 국회의원 때 ‘낮은 인지도의 서러움’을 체험한 그는 방송을 통해 정치적 기반을 다져 재출마한다는 계획을 공공연히 말하고 다닌다. 특히 JTBC 〈썰전〉의 경우 “예능 프로그램은 출연자의 호감도를 높여준다”는 연출자 여운혁(呂運赫) CP의 말에 출연을 결심했다고 한다.
등록금 벌기 위해 장학퀴즈 출전
그에게 “예전엔 늦둥이 보는 재미로 산다고 했는데, 요즘은 무슨 낙으로 사느냐”고 물으니 “방송 녹화”란 답이 돌아왔다. 낙선한 정치인은 시간 때우는 게 고역인데, 요일별로 잡힌 녹화 일정에 지겨울 틈이 없단다. 매일 시청률 통계를 보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다.
“성적표 받아보는 게 고역일 수 있겠지만, 학창시절부터 그 ‘스릴’을 즐겼던 것 같다. 매일 시청률 성적표 받는 것을 즐긴다. 신문에서 종편으로 건너온 기자분들도 비슷한 심정인 것 같더라. 즉각적 반응에 적응되면 은근히 재미있다.”
그는 학창시절 공부를 잘했다. 학력은 경기고-서울대 법대-하버드대 로스쿨이다. 화려한 학력과 경력 때문에 강남부잣집 도련님으로 오해받지만, 실상은 상당히 불우한 성장기를 보냈다.
특히 아버지의 전과가 문제였다. 대부분 생계형 사기와 횡령 등 경제범죄였다. 강용석이 예닐곱 살 되던 해 구속된 후 초·중·고교 시절 내내 교도소를 들락날락했다. 그가 29세 되던 1998년 10월 의식을 잃어 형집행정지가 됐고,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아들의 인생 29년 중 13년이 넘는 기간을 교도소에 있었다.
가정형편이 좋을 리 없었다. 네 식구가 단칸방과 반지하 방을 옮겨다녔다. 성적이 좋았던 그는 대학 등록금을 벌기 위해 MBC 〈장학퀴즈〉에 출전했다. 기(期) 장원을 하면 장학금을 받는다는 말에 열정적으로 나섰지만, 욕심이 과했는지 버저(buzzer)를 신나게 누르다 많이 맞춘 만큼 틀린 바람에 월(月) 장원을 수상하는 데 그쳤다.
우여곡절 끝에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고시까지 통과했지만, 아버지의 전력으로 판사에 임용되지 못했다. 지나간 전과는 결격사유가 아니었지만, 아버지가 구속수감된 상태에서의 판사 임용은 불가능하다는 이유였다.
—아버지 원망을 많이 했겠다.
“솔직히 안 했다면 거짓말이다. 학창시절에 ‘아버지 뭐 하시느냐’란 질문이 가장 듣기 싫었다. 우물쭈물하며 대충 ‘사업한다’고 답하면 ‘무슨 사업’이냐고 되묻는다. 경기고 특성상 잘사는 친구들이 많아 상처를 많이 받았다. 중학교 3학년 때까지 반장을 한데다 연합고사도 만점 받았는데, 고등학교 가니 반장을 안 시켜 주더라. 그래서 더 죽어라 공부했다.”
—말 그대로 “개천에서 용 난” 케이스다.
“예전처럼 입시가 단발 승부면 개천에서 용 날 수 있다. 고3 때 1년 열심히 공부해서 학력고사 점수 50점 올리는 게 가능했던 시기였다. 그런데 요즘의 입학사정관제 등은 입시를 ‘장기 레이스’로 바꿨다. 물론 선진국일수록 그렇게 갈 수밖에 없다는데, 너무 심한 감이 있다. 이런 환경에선 개천에서 용이 못 나온다.”
“아나운서 발언 지금도 기억 못 해”
국회의원이란 자리까지 꿰찬 ‘강용석’이란 용은 2010년 ‘아나운서 비하 발언 논란’이 불거지면서 곤두박질치며 추락했다. 여학생에게 “다 줄 생각을 해야 하는데 그래도 아나운서 할래”라는 ‘성희롱적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당에서 제명당했다. 아나운서들에게 고소를 당했고, 1심 재판에서 징역형까지 받았다. 그는 지금도 이 사건에 대해선 아쉬움이 남은 듯했다.
—당시 심경은 어땠나.
“돌이켜보면 어쩔 수 없지만, 그땐 정말 황당했다. 술에 취해 실수했다면 곧바로 인정했을 것이다. 난 잘못한 일에 대해선 분명히 사과하는 성격이다. 그런데 그날 마신 주량이 폭탄주 두어 잔 정도였다. 학생 30여 명이 함께 있었고, 취할 정도로 마시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솔직히 그날 정확히 어떤 발언을 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왜 기억을 못 했나.
“7월 16일에 사건이 났다는데, 4일 후인 20일에 첫 기사가 나왔다. 4일 전에 한 말을 어떻게 다 기억하나. 후에 일정표를 보니 면담과 지역행사 등 그날만 총 11개의 일정이 있었다. 대학생들과 식사자리엔 1시간20분 정도 머물렀고, 이후 일정이 2개 더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4일 전에 어디에서 무슨 얘기 했는지 물으면 누가 대답을 하겠나.”
—후회한 적은 없나.
“후회할 일이 아니다. 만약 당시에 기자가 함께 자리해 메모나 녹음을 한 상황이라면 ‘조심했어야 하는구나’란 생각을 했을 텐데, 그것도 아니었다. 여학생이 누군가에게 한 얘기가 기자에게 전달돼 사건이 벌어졌다. 그런 식이라면 대한민국에 일어나지 못할 사건은 없다고 본다.”
—집안 분위기는 어땠나?
“안 좋았다. 초등학생이었던 아들이 ‘신문사 나쁘다’며 울었다. 그런데 중학생이 되더니 이젠 좀 무덤덤하다. 아빠와 함께 내공이 쌓인 듯하다. 사춘기를 세게 보내서인지 멘털이 상당히 강하다.”
—국회의원 출신 장인어른(윤재기 변호사)은 뭐라고 하던가?
“정치인 출신이라 통이 크셨다. ‘이렇게 터지는 거 보니 너 크게 되겠다’고 하더라. ‘모든 게 다 과정’이라고 하셨는데, 지금도 그 말을 항상 적용하며 산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생겨도 20년 후를 생각해 보면 별것 아니다.”
‘병 주고 약 준 《중앙일보》’
강용석 변호사(오른쪽)와 임재민씨. ⓒ서경리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아나운서 발언’을 당시 최초로 폭로했던 《중앙일보》의 방송국에서 현재 맹활약 중이다. JTBC에서만 2개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으며, 《여성중앙》엔 직접 인터뷰 기사를 연재할 계획이다. 요즘 ‘준(準) 중앙일보 직원’처럼 됐다는 그는 “병 주고 약 준 셈”이라며 “월급은 정규직보다 더 많이 받을 것 같다”고 농을 했다.
2011년부터 그는 ‘박원순 저격수’로 활동하며 정치적 재기(再起)를 꿈꿨지만, 이듬해 2월 그가 병역의혹을 제기했던 박 시장이 아들 주신씨의 재신검 결과를 공개하면서 다시 위기에 봉착했다. 최근 일부 인사를 통해 제기된 추가의혹에 대해선 “관심 있게 지켜보고는 있지만, 직접 나설 입장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당시 왜 곧바로 사퇴 발표를 했나?
“국회 사무실에서 기자 몇 명과 생방송 속보를 같이 보고 있었다. 세브란스병원에서 검사 결과가 중계되자마자 기자들이 입장을 얘기해 달라고 하더라. 그냥 내려가서 사퇴 기자회견을 했다. 어떻게 보면 떠밀리듯 한 셈이다. 지금 생각해도 그땐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다.”
‘박원순 저격’에 실패한 그는 지난해 총선에서 4.3% 득표율로 낙선한다. ‘사실상 현역 의원’이 이렇게 추락하는 경우도 드물다. 실패를 통해 그가 얻게 된 것은 “절대로 무소속으로 출마하지 않는다”는 다짐이다. 선거는 막바지가 될수록 모든 이슈가 양당 구도로 좁혀짐을 느꼈기 때문이다.
—지난 2월엔 노무현 전 대통령을 두고 “대통령감이 아니라 3선 의원에 장관 정도가 적당하다”고 발언해 논란이 있었다.
“지금도 같은 생각이다. 대통령으로선 뭔가 불안했다. 우리는 최근까지 ‘국민이 대통령을 걱정해야 하던 시절’을 보냈다. 자고 일어나면 ‘오늘은 대통령이 무슨 사고 칠까’ 걱정했다. 그런데 적어도 현(現) 대통령은 그 정도는 아닌 것 같다.”
“안철수의 책 보니 수준이 보이더라”
—이명박(李明博) 전 대통령과는 사돈 관계였는데.
“막내 동생의 처남댁이 김윤옥(金潤玉) 여사의 조카다. 이 전 대통령의 처남인 김재정씨가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됐을 때, 그 딸이 결혼한 거다. 2010년 5월경인데, 그때 대통령 내외를 처음 뵈었다. ‘사돈에 팔촌’보다는 가깝지만, 그렇다고 친한 사이는 아니다.”
—본인은 대통령감이 된다고 보나?
“안철수(安哲秀)보다는 낫지 않을까?”
—만약 이번 노원구 보궐선거에서 안철수와 일대 일로 붙었다면 스코어가 어떻게 났을까?
“지역선거는 지지층이 중요하다. 주민의 과반(過半)이 ‘반(反) 새누리당’ 정서인 곳에서 무슨 수로 이기나. 하지만 전국 선거로 하면 지금 당장 붙어도 이길 자신 있다.”
—그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나?
“양자 TV토론 세 번 정도만 하면 탈탈 털리지 않을까? 《안철수의 생각》이란 책을 읽어 보니 그 수준이 보이더라. 그의 생각이 너무 실망스러웠다.”
—서울시장에 출마할 거란 얘기가 돌더라.
“내년에 나간다면 순전히 운(運)이고, 2020년 지나서 나간다면 그건 기획이다. 내년에 출마하려면 이미 올해 초부터 움직여야 했다. 2006년 지방선거 때 원외 당직을 맡았던 덕에 그 과정을 자세히 지켜볼 수 있었다. 맹형규(孟亨奎)·홍준표(洪準杓)란 거물급이 그렇게 오랫동안 준비했는데, 열린우리당이 강금실(康錦實)을 내놓자 결국 한나라당은 오세훈(吳世勳)을 선택했다.”
—운이 좋으면 내년에 서울시장에 출마할 수도 있다는 뜻인가.
“굳이 부정하진 않겠지만, 나한테 그런 운과 기회가 과연 오겠나.”
—예능에선 김구라가 멘토라고 했는데, 정치계에서 롤모델은 누구인가.
“현재 우리나라엔 딱히 없다. 외국에서 찾는다면 윈스턴 처칠(Churchill)과 마거릿 대처(Thatcher)다.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 직전 나치 독일의 위험성을 경고했고, 대처는 극우파로 몰리면서까지 자신의 소신을 지켰다.”
“목표는 시청률 15%”
현재 ‘방송인 강용석’의 목표는 시청률 15%다. 시청률 15%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느낌이 어떨지 궁금하다는 게 이유였다. ‘정치인 강용석’의 목표는 ‘정계복귀’다. 일본에서 성공해 타이완의 국민가수가 된 덩리쥔(鄧麗君)처럼, 방송계에서 입지를 굳힌 후 정계로 복귀하겠다는 계획이다.
그는 확실히 미디어란 힘을 얻었다. 2011년 가을 그가 집단 모욕죄로 고소했던 개그맨 최효종이 〈개그콘서트〉를 통해 그를 조롱했을 때, 여론은 모두 개그맨 편이었다. 지난 6월 9일 방송된 〈개그콘서트〉 700회 특집에선 상황이 바뀌었다. 〈썰전〉 멤버 이철희(李哲熙), 김구라와 함께 등장한 강용석은 “최효종 많이 띄워 줬는데 요즘 기대에 못 미치는 것 같다”며 ‘해학적 복수’에 성공했다.
바쁜 방송 일정 중에 책까지 낸다고 한다. 7월 말 출간할 《강용석의 직설》 안에는 그가 살아온 과정과 최근 겪었던 여러 사건에 대한 못다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각종 논쟁적 이슈에 대한 가감 없는 해설도 포함된다.
지난해 1월, 우연히 받은 강용석의 새 명함을 트위터에 올린 적이 있다. “국회의원 명함 중에 제일 웃기다. 이분 이번 4월 총선 때 ‘모 아니면 도’가 될 가장 유력한 인물”이란 글과 함께 공개한 명함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포기를 모르는 남자, 불꽃남자, 고소고발 집착남, 화성인, 박원순 안철수 저격수, 특권 종결남, 병역비리 스토커, 개천표 용, 극우보수의 아이콘, 예능 늦둥이, 아들 바보, 모두까기 인형, 미친 인지도, 내가 제일 고소해.”
상당부분 이룬 것도 있고, 일부는 현재진행형이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그의 뜻대로 다시 정치인이 됐을 때, 지금 방송에서 쏟아낸 당돌한 발언이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인터뷰를 마친 후 그와 함께 찍은 사진을 다시 SNS에 올려봤다. 1년 전보다 확실히 팬이 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월간조선 2013년 8월호 '임재민·김정우의 유쾌한 직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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