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한 직설
임백천 "강호동은 에너자이저, 유재석은 대가의 풍모, 신동엽은 천재"
김정우 기자
2013. 11. 18. 13:28
반응형
임백천(林白千)은 튀는 인물이 아니다. 스스로 “인생 자체가 무미건조(無味乾燥)한 사람”이라고 규정한다. ‘직설 인터뷰’를 제안하자 그는 “가늘고 길게 사는 게 인생 모토”라며 되받아쳤다. ‘평소 질문을 주로 하는 직업이라 대답이 별로 시원찮을 것’이라고 걱정했다. 막상 대화가 시작되니 기우(杞憂)란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쌓인 게 꽤 많은 듯했다.
인터뷰를 진행하는 3시간 동안 그는 담담했다. TV에서 본 점잖은 이미지 그대로였다. 말투는 차분했지만, 말 속엔 뼈가 있었다. 연예계와 정치계의 현실을 논하는 그에게서 두루뭉수리한 모습은 찾기 어려웠다.
—인터뷰를 위해 기사 검색을 했더니 아무 내용이 없던데요. 너무 재미없는 삶 아닌가요.
“나도 시쳇말로 ‘엣지(edge)’가 있고 싶었죠. 미성(美聲)인 사람이 굵은 목소리를 원하듯, 생머리인 사람이 곱슬머리를 원하듯, 한 번쯤 크게 소리도 질러보길 바랐습니다. 그런데 정작 소리지른 건 아내에게였어요. 반성을 많이 하고 지금은 소리를 안 지릅니다.”
—부인(방송인 김연주)도 진행자(MC)인데, 논리적이고 말 잘하는 MC끼리 싸우면 누가 이기나요?
“그런 걸 떠나 내가 논리부족입니다. 지금은 싸움 자체를 안 하려고 합니다. 부부 사이뿐 아니라 모든 관계에서 그렇습니다. 방송일 하면서 카리스마를 내세운 적이 없습니다. 부드러운 게 가장 강하다고 생각해요. 젊은 시절 가끔 ‘욱’할 때도 있었지만, 나이 들면서 그러지 않습니다.”
—‘욱’해봐야 소용없다는 인생의 진리를 어떻게 터득하게 됐나요.
“체력이 워낙 저질이라 일찍 깨우쳤습니다.”
대화는 이런 식으로 진행됐다.
“MC는 스타가 아니라 스태프”
임백천은 1978년 MBC 대학가요제를 통해 데뷔했다. 어느 날 생방송 중 대본 대신 자기 마음대로 얘기하는 임백천에게 담당 PD는 다음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겼다. MBC ‘젊음이 있는 곳에’를 진행할 당시 그는 대학교 2학년, 국내 최연소 MC였다.
대학 졸업 후 그는 전공을 살려 건설회사에 취직했다. 방송 분야는 앞날이 보장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6년간 건축기사로 근무했지만, 그의 적성은 방송이었다. 1986년 방송에 복귀한 후 각종 프로그램을 종횡무진(縱橫無盡)하며 버라이어티쇼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MC 데뷔 30년을 넘긴 그에게 MC란 무엇인지 물었다.
“MC는 ‘스타’가 아니라 ‘스태프’입니다. 연출, 카메라, 조명, 소품, 의상 등 스태프 중 한 사람이 MC죠. 나는 철저히 스태프로 살았지, 스타로 산 적이 거의 없습니다. 가수로 활동할 땐 나도 스타였습니다. 노래하고 연기하는 사람은 모두 스타입니다. MC는 그런 스타를 소개하고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죠. 나는 MC가 스타가 돼선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내 ‘MC론(論)’입니다.”
—시대가 바뀌었는데 MC론도 변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전문 MC 시대에서 코미디언 MC 시대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MC는 스타가 됐죠. 강호동, 유재석, 신동엽과 같은 후배들이 잘하고 있습니다. 다만 내가 변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나는 스타가 될 필요충분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습니다. 몸도, 얼굴도, 끼도, 스타와는 거리가 멉니다.”
—유재석과 같이 올곧은 MC 때문에 요즘엔 “카메라 뒤에서도 착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유재석 때문만은 아니고,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열풍과 함께 모든 게 투명한 세상입니다. 사건의 진위와 관련 없이 한 방에 뜨고 한 방에 가는 시대입니다. 연예인들이 가장 주목받기 때문에 몸조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 나온 김에 대표 MC인 강호동, 유재석, 신동엽에 대해 평가한다면.
“강호동은 ‘에너자이저’, 활력을 주는 사람이죠. 머리가 아주 비상해 굉장히 뛰어난 면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원래 잘나가던 사람이 살짝 비틀거리면 주변에서 그걸 놔두지 않고 공격하는 게 이 바닥 현실입니다. 강호동은 이를 잘 극복하리라 봅니다. 유재석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진행자입니다. 본인이 나서기보단 출연자에게 기회를 균등하게 줍니다. 탁월한 능력에 대가(大家)의 풍모(風貌)를 지녔습니다. 신동엽은 천재입니다. 한국에서 단독 성인토크쇼를 진행할 만한 몇 안 되는 인물이죠.”
“성인토크쇼는 신동엽이 적격”
—성인토크쇼라고 하면 구체적으로 어느 수준의 것을 말하죠?
“토크쇼는 미국이 원조입니다. 미국엔 자니 카슨(Carson)과 데이비드 레터맨(Letterman)이란 양대(兩大) 거장이 있었습니다. 카슨이 세상을 떠난 후, 제이 레노(Leno)가 그 계보를 이어 받았습니다. 그저 막 웃고 떠드는 토크쇼가 아니라 오피니언 리더들이 보며 인정할 만한 쇼입니다. 연예인도 출연하고 대통령도 출연합니다. 한국엔 지금 시사프로그램도 있고 코미디쇼도 있지만, 엄밀한 기준에서 토크쇼는 없습니다. 후보 시절 열세였던 빌 클린턴(Clinton)이 ‘아세니오 홀(Arsenio Hall)쇼’라는, 별로 인기도 없는 토크쇼에 출연해 색소폰을 연주하고 열풍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게 토크쇼의 힘입니다.”
—대선 후보까지 출연한 SBS ‘힐링캠프’는 그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는 것 아닌가요.
“토크쇼는 기본적으로 ‘퍼스낼러티쇼’입니다. 만약 ‘이경규쇼’란 이름으로 단독 진행을 했다면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훌륭한 프로그램이지만, 의미는 조금 다릅니다.”
—최근 박중훈과 고현정이 단독 토크쇼를 시도했지만, 결과가 좋지 못했다고 합니다.
“토크쇼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토크쇼는 기다려야 합니다. 기본 1년은 해 봐야 하는데, 너무 일찍 끝났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체육행사가 미식축구 결승경기 ‘수퍼보울(Super Bowl)’입니다. 수퍼보울이 끝나면 우승팀 쿼터백을 데이비드 레터맨과 제이 레노 중 누가 잡아내느냐가 관건입니다. 결국 섭외작전에선 레노가 이겼지만, 시청률은 레터맨이 더 높게 나왔습니다. 레터맨은 진 팀의 수비수를 출연시켰는데, 결국 토크쇼는 누굴 불러내서 무슨 얘기를 하느냐가 결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진행자의 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하루빨리 우리도 중년이 볼 만한 진정한 토크쇼가 나오길 바랍니다.”
—후배들이 진행하는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을 보면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끼겠네요.
“사실 내가 처음 ‘버라이어티’를 시도할 때와 기본 포맷은 크게 변한 게 없더라고요. 각 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들을 모아서 시청자의 시각을 붙잡는 방식인데, 큰 틀에선 차이가 없습니다. 달라진 점은 녹화시간입니다. 요즘은 10시간 녹화하고 한 시간으로 편집해 방송하던데요. 예전엔 2시간이면 충분했습니다. 녹화시간이 길어지면 실패라고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땐 여백이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는데, 지금은 지나치게 압축된 느낌입니다.”
—신동엽과 이경규 두 명 모두 잠시 옆길로 샜다가 망한 사례가 있습니다. 연예인들이 사업을 하거나 후배양성을 하다 보면 여러 일이 벌어지는데, 지금까지 ‘임백천이 딴짓했다’는 얘기는 못 들어 봤습니다.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나는 사업가들을 굉장히 존경하며, 내 능력 밖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전엔 자본금을 가져와 기획사를 차려 내게 이수만 역할을 해 달라는 사람들도 꽤 있었죠. 모두 거절했습니다.”
“나가수는 기분 나쁜 프로그램”
—거절한 이유가 능력 때문이라고 생각해서인가요.
“사람을 골라 낼 혜안(慧眼)도, 키워 낼 인내력도 없습니다. 대통령이 추천해도 안 될 사람은 안 되고, 대통령이 방해해도 될 사람은 되는 게 스타의 세계입니다. 스타는 타고납니다. 가장 중요한 게 유전자죠. 음치가 훈련을 받고 노래를 잘할 수는 있지만, 가수가 되긴 어렵습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타고난 인물을 발견해도 그를 스타로 만들려면 수만 명과 경쟁해야 합니다. 이 과정을 해 낼 능력이 없습니다.”
—요즘 즐겨 보는 예능프로그램이 있나요.
“젊은이들만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너무 많아졌습니다. 대다수 방송사가 토·일요일 6~8시에 10대와 20대를 위한 프로그램을 전진배치했습니다. 내가 진행할 땐 그 시간이 ‘패밀리타임’이었습니다. 2대 또는 3대 가족이 모여 함께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회의에서부터 신경을 썼습니다. MBC에서 하는 ‘진짜사나이’를 보는데, 요즘 세태와 달리 여러 세대가 함께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 좋았습니다. KBS 개그콘서트도 젊은 감각을 놓치지 않기 위해 꾸준히 보고 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프로그램이 있습니까.
“예전에 《주간조선》에서 MBC ‘나는 가수다’에 대해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가수, 관객, 시청자 모두 지는 게임이었다는 거죠. 이기는 쪽은 돈을 버는 방송사뿐입니다. 가수 입장에선 소리를 크게 지르는 게 진짜 가수인 것처럼 돼 버렸습니다. 객석에서도 속을 수밖에 없습니다. 밴드음악을 하는 가수들이 개성이 강하고 소리가 크니 그쪽으로 기웁니다. 대표적 화가 두 사람을 두고 누가 더 낫고 못하다는 평을 하지 않습니다. ‘무한경쟁 시대에서 1등도 안주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준 측면에선 긍정적이지만, 굉장히 기분 나쁜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서바이벌’이란 요소가 시대적 흐름으로 나타난 이상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요.
“KBS ‘불후의명곡’이란 프로그램을 보세요. 모두가 이기는 게임입니다. 최선을 다해 편곡해 노래를 부르고 기분 좋게 승복합니다. 선배 가수를 모셔 놓으니 당사자는 얼마나 흡족하겠습니까. 객석에서도 감동의 눈물을 흘립니다.”
—두 프로그램의 차이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한끝 차이입니다. ‘나가수’는 꼴찌를 뽑았고, ‘불후의명곡’은 1등을 뽑았습니다. 사실 노래 부른 모두가 1등입니다. 수많은 경쟁을 뚫고 무대에 선 이들은 기본적으로 검증된 가수들인데, 굳이 그렇게 평가할 필요가 있었나 싶어요. 연출이란 게 그렇게 중요합니다.”
“대통령은 연출가다”
‘연출’ 얘기가 나오자 대화가 자연스럽게 ‘국가’와 ‘대통령’으로 이어졌다. TV 프로그램을 국가로 확대하면 대통령중심제 국가인 대한민국의 연출자는 대통령이 되는 셈이다. 그는 “이미지로 대통령을 해도 되는 시대이고, 사람들은 감동을 원한다”며 “TV 프로그램 하나보다 감동을 못 주는 대통령이 뭘 하겠냐”고 말했다.
“모든 정치가가 자신이 ‘경제를 해결하겠다’고 하는데, 요즘 글로벌 경제 해법은 케인스(Keynes)와 스미스(Smith)가 환생해도 어렵지 않을까요? 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 조직을 제외하면 똑같이 한 사람일 뿐입니다. 복잡한 구조의 현대사회에서 이들이 무슨 용빼는 능력이 있겠습니까. 그들에게 필요한 건 ‘국민에게 감동을 보여주는 능력’입니다. 아내는 항상 남편이 사랑을 표현하길 원합니다. 뻔한 이벤트라도 보여주길 바라는 게 아내의 마음이죠. 국민도 마찬가지예요. 지도자가 국가와 국민을 사랑한다는 표현을 듣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 주고, 웃어 주고, 울어 주고… 이게 대통령과 정치인이 해야 할 역할 아닌가요.”
그를 따르는 수식어에 얼마 전 ‘친박(親朴)’이란 단어가 추가됐다. 오래전부터 유지해 온 박지만(朴志晩) EG 회장과의 친분 때문이었다. 지난 3월 KBS 노조와 민주통합당은 임백천을 정치평론가 고성국, 가수 은지원과 함께 ‘정권 코드 맞추기 개편’의 당사자로 지목한 바 있다.
“대통령 동생과 친하면 모두 친박인가요. 나는 친박이 아니라 친(親)박지만입니다. 김대중(金大中)도 찍었고, 노무현(盧武鉉)도 찍었던 사람인데, 어느 순간 어디선가 그렇게 분류가 된 모양입니다. 15년 넘게 지켜 온 우정을 버리란 말인가요.”
—그런 이미지가 도움이 된 경우는 없습니까.
“전혀. 요즘엔 오히려 역차별을 당합니다. 은지원은 태어날 때부터 박 대통령의 조카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논리대로 하면 은지원은 아무리 잘해도 새 프로그램을 맡을 수 없습니다. 이게 말이 되나요. 은지원 입장에선 이게 직업인데, 이런 억지가 어디 있어요.”
—실제 정치성향은 어떤가요.
“미국의 경우 스타가 공개적으로 지지 선언을 할 수 있습니다. 바브라 스트라이샌드(Streisand) 같은 이들은 선거자금 모금 콘서트까지 열 정도입니다. 하지만 한국은 다르죠. 내게도 정치성향은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30년 넘게 MC를 하면서 단 한 번도 그 성향을 방송에서 드러낸 적은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는 입장입니다.”
—한국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방송계에 한바탕 회오리바람이 몰아칩니다.
“방송을 포함한 문화예술계 전체가 진영논리에 빠져 있습니다. 선거가 끝나면 항상 ‘개혁’이 화두가 됩니다. 방송국에서도 누군가 바람을 몰고 다니지만, 이게 최고결정자나 대통령의 뜻은 아니라고 봅니다. 어느 정권이든 분명 잘못된 생각을 가진 실무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문제는 기왕 하는 것 개혁에 성공하라는 것입니다.”
“박지만에 대한 추측성 보도 너무 많아”
—개혁에 성공한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중국의 주룽지(朱鎔基) 전 총리는 ‘100개의 관(棺)을 준비하라. 99개는 탐관오리 것이고, 나머지 한 개는 나의 것이 될 것’이란 말로 단호한 개혁의지를 보였습니다. 적어도 개혁을 하겠다면 이 정도 정신은 갖고 하라는 뜻입니다. 엉뚱한 사람이 엉뚱한 방향으로 개혁하다 보니 사고가 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피해는 전혀 무관한 사람이 보죠.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김미화, 김제동, 이효리 등 많은 연예인이 정치적 성향 때문에 논란이 됐습니다.
“이들 세 사람을 떠나 요즘 SNS상에서 슬쩍 치고 빠지는 유명인이 많습니다. 연예인, 작가, 교수 등 다양하죠. 그런 주장을 하려면 진성 당원 활동을 하는 게 낫습니다. 연예인들이 이름 내세워 외곽에서 변죽만 울리는 것은 비겁한 짓입니다. ‘자기 직업이 무엇이든 민주주의 국가에서 못할 말이 뭐 있냐’고 하면 할 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진행자는 그래선 안 됩니다. 만약 정치적 성향을 드러낸 사람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이라면 나는 볼 생각이 없습니다.”
—연예인이 정치인처럼 되고, 정치인은 연예인처럼 됐습니다.
“연예인들이 문제 터지면 ‘공인(公人)으로서’란 얘기를 하는데, 연예인이 무슨 공인입니까. 우리는 사리사욕(私利私慾)을 좇는 사인(私人)입니다. 다만 요즘 공인이 사인보다 못한 경우가 많아 문제입니다. 공무원과 정치인들도 많이 변해야 합니다.”
—박근혜(朴槿惠) 대통령과는 만난 적 있습니까.
“박지만 결혼식 때 한 번, 국회의원 시절에 한 번. 그게 전부입니다.”
—박지만씨는 주로 어디서 만나나요.
“서울 강남의 한 허름한 지하 바에서 동갑내기 친구들과 함께 만납니다. 거기도 무슨 ‘멤버십이 있는 클럽’이라고 나오던데, 추측성 보도가 너무 심합니다. 우리가 가는 이유는 술값이 다른 곳에 비해 싸고 여자가 안 나오기 때문입니다. 기자들이 직접 와서 확인하더니 더는 그런 얘기가 안 나오더라고요.”
—친구로서 박지만은 어떤 사람인가요.
“내겐 참 좋은 친구입니다.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한 사람입니다. 워낙 비범한 아버지와 누나를 둬서인지 오해가 너무 많아요. 어르신들에겐 여전히 연민(憐憫)의 정서가 남아 있을 테고, 반대파에겐 탕아(蕩兒)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분명 잘못한 점도 있지만, 자신이 모두 인정하고 죗값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끈질기게 괴롭히는 이들을 보면 참 지독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누나 취임식 TV로 지켜본 박지만
임백천은 ‘친구 박지만’ 얘기가 나오자 답답한 게 많았던 듯 목소리를 높였다.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친목모임 ‘58년 개띠 클럽’까지 만들어 모일 정도로 친분이 있다. 박지만-서향희 결혼 전인 2004년경엔 직접 ‘소개팅’을 주선하겠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당시 그 ‘소개팅’은 어떻게 됐나요.
“중매는 본인이 싫다고 해서 성사가 안 됐습니다. 대신 우리가 함께 잘 알고 지내던 한 살 아래 여성이 있었는데, 그와 언니 동생 하며 지내던 이가 지금의 아내 서향희 변호사입니다.”
—박지만씨 가족이 대통령과 함께 여름휴가를 간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던데요.
“제가 알기론 대통령과 전혀 다른 곳에 따로 휴가를 갔습니다.”
—대통령의 올케와 조카는 자주 청와대에 간다는 기사가 있던데요.
“대통령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하고 있습니다. 세현이 엄마(서향희 변호사) 직업이 변호사 아닙니까. 그런데 대통령의 올케라는 이유 때문에 운영하던 로펌도 그만뒀고, 다른 로펌에 취직도 못 합니다. 역차별입니다. 그래서 지금 남편 회사의 고문 변호사로만 있습니다. ‘만사올통’이란 소리도 말이 안 됩니다. 누나의 대통령 취임식 때도 이들 부부는 안 갔습니다.”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 때 동생 부부가 오지 않았다는 말은 처음 듣습니다.
“취임식 준비하는 곳에서 오라고 하니까, 만약 가게 되면 자리를 단하(壇下)에 준비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게 박지만의 생각이었습니다. 사상 최초로 가족석이 연단 아래에 배치됐는데, 결국 작은누나(박근령)만 가고 박지만은 회사에서 TV로 지켜봤습니다.”
대다수 국내 언론은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 당시 박지만·서향희 부부와 아들 세현 군이 참석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이들을 찍은 사진은 어느 매체에서도 찾을 수 없다. 임백천씨의 말이 사실이라면, 국내 거의 모든 언론이 확인도 하지 않고 오보를 한 셈이다.
—최근 시사프로그램도 진행하고, 단순한 방송인으로 끝날 것 같지 않습니다. 정계에 입문할 생각은 없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정치하라는 제의를 지금까지 총 세 번 받았습니다. 한 번은 서울의 지역구, 다른 두 번은 전국구였습니다. 전국구는 꽤 앞선 번호였습니다. 그때 각각 세 사람에게 이렇게 답했습니다. ‘가문의 영광인데, 나는 지금 내 가족도 건사 못해 헤매는 사람이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하기는 벅차다’고 솔직하게 답했습니다. 앞으로도 정치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국가보다 가족이 먼저”
—한선교, 유정현 등 아나운서 출신 정치인도 있고, 이순재, 최불암 등 배우 출신 국회의원도 있습니다. 왜 안 한다고 했습니까.
“사람은 뭘 하든 뜻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유(類)가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를테면 아이에 대한 이해 없이 친구 따라 학원 보내는 학부모처럼 말입니다. 정치를 하려면 소신과 철학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도 없는 사람이 누가 하라고 정치하면 그것만큼 비극이 없습니다.”
그는 가족이 있는 경우엔 국가와 민족보다 자기 가족부터 돌보는 게 가장이자 사람의 도리라고 여겼다.
“가장(家長)에게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 있나요. 일제시대 독립운동 하던 이라면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지금은 나라도 있고, 자유도 있습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고 하지 않았나요. 오늘도 현장 곳곳에선 이 나라의 가장들이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임백천에게 가족은 어떤 존재인가요.
“못난 남편 구제해 준 아내에게 감사할 뿐입니다. 시집을 잘못 와서 고생만 엄청 하고 있습니다. 아내가 딸 아들 공부시키러 미국에 5년 넘게 간 적이 있었는데, 젊었을 때나 ‘기러기아빠’지 나이 드니까 ‘독거노인(獨居老人)’이 달리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 ‘임백천’이란 존재는 더 이상 없다고 생각하며 삽니다. 내 존재의 이유는 가족이기 때문이죠.”⊙
월간조선 2013년 9월호
인터뷰를 진행하는 3시간 동안 그는 담담했다. TV에서 본 점잖은 이미지 그대로였다. 말투는 차분했지만, 말 속엔 뼈가 있었다. 연예계와 정치계의 현실을 논하는 그에게서 두루뭉수리한 모습은 찾기 어려웠다.
—인터뷰를 위해 기사 검색을 했더니 아무 내용이 없던데요. 너무 재미없는 삶 아닌가요.
“나도 시쳇말로 ‘엣지(edge)’가 있고 싶었죠. 미성(美聲)인 사람이 굵은 목소리를 원하듯, 생머리인 사람이 곱슬머리를 원하듯, 한 번쯤 크게 소리도 질러보길 바랐습니다. 그런데 정작 소리지른 건 아내에게였어요. 반성을 많이 하고 지금은 소리를 안 지릅니다.”
—부인(방송인 김연주)도 진행자(MC)인데, 논리적이고 말 잘하는 MC끼리 싸우면 누가 이기나요?
“그런 걸 떠나 내가 논리부족입니다. 지금은 싸움 자체를 안 하려고 합니다. 부부 사이뿐 아니라 모든 관계에서 그렇습니다. 방송일 하면서 카리스마를 내세운 적이 없습니다. 부드러운 게 가장 강하다고 생각해요. 젊은 시절 가끔 ‘욱’할 때도 있었지만, 나이 들면서 그러지 않습니다.”
—‘욱’해봐야 소용없다는 인생의 진리를 어떻게 터득하게 됐나요.
“체력이 워낙 저질이라 일찍 깨우쳤습니다.”
대화는 이런 식으로 진행됐다.
MC 임백천씨. ⓒ서경리
⊙ “연예인들의 변죽만 울리는 정치참여는 비겁한 짓”
⊙ 박지만과의 친분 때문에 親朴 오해… “난 親朴이 아닌 親박지만”
⊙ “박지만, 누나 취임식에 참석 안 해… 회사에서 TV로 봐”
⊙ “정치할 생각도 능력도 없어… 죽을 때까지 방송일 하고 싶다”
⊙ 박지만과의 친분 때문에 親朴 오해… “난 親朴이 아닌 親박지만”
⊙ “박지만, 누나 취임식에 참석 안 해… 회사에서 TV로 봐”
⊙ “정치할 생각도 능력도 없어… 죽을 때까지 방송일 하고 싶다”
“MC는 스타가 아니라 스태프”
임백천은 1978년 MBC 대학가요제를 통해 데뷔했다. 어느 날 생방송 중 대본 대신 자기 마음대로 얘기하는 임백천에게 담당 PD는 다음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겼다. MBC ‘젊음이 있는 곳에’를 진행할 당시 그는 대학교 2학년, 국내 최연소 MC였다.
대학 졸업 후 그는 전공을 살려 건설회사에 취직했다. 방송 분야는 앞날이 보장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6년간 건축기사로 근무했지만, 그의 적성은 방송이었다. 1986년 방송에 복귀한 후 각종 프로그램을 종횡무진(縱橫無盡)하며 버라이어티쇼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MC 데뷔 30년을 넘긴 그에게 MC란 무엇인지 물었다.
“MC는 ‘스타’가 아니라 ‘스태프’입니다. 연출, 카메라, 조명, 소품, 의상 등 스태프 중 한 사람이 MC죠. 나는 철저히 스태프로 살았지, 스타로 산 적이 거의 없습니다. 가수로 활동할 땐 나도 스타였습니다. 노래하고 연기하는 사람은 모두 스타입니다. MC는 그런 스타를 소개하고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죠. 나는 MC가 스타가 돼선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내 ‘MC론(論)’입니다.”
—시대가 바뀌었는데 MC론도 변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전문 MC 시대에서 코미디언 MC 시대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MC는 스타가 됐죠. 강호동, 유재석, 신동엽과 같은 후배들이 잘하고 있습니다. 다만 내가 변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나는 스타가 될 필요충분조건을 갖추고 있지 않습니다. 몸도, 얼굴도, 끼도, 스타와는 거리가 멉니다.”
—유재석과 같이 올곧은 MC 때문에 요즘엔 “카메라 뒤에서도 착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유재석 때문만은 아니고,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열풍과 함께 모든 게 투명한 세상입니다. 사건의 진위와 관련 없이 한 방에 뜨고 한 방에 가는 시대입니다. 연예인들이 가장 주목받기 때문에 몸조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 나온 김에 대표 MC인 강호동, 유재석, 신동엽에 대해 평가한다면.
“강호동은 ‘에너자이저’, 활력을 주는 사람이죠. 머리가 아주 비상해 굉장히 뛰어난 면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원래 잘나가던 사람이 살짝 비틀거리면 주변에서 그걸 놔두지 않고 공격하는 게 이 바닥 현실입니다. 강호동은 이를 잘 극복하리라 봅니다. 유재석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진행자입니다. 본인이 나서기보단 출연자에게 기회를 균등하게 줍니다. 탁월한 능력에 대가(大家)의 풍모(風貌)를 지녔습니다. 신동엽은 천재입니다. 한국에서 단독 성인토크쇼를 진행할 만한 몇 안 되는 인물이죠.”
1998년 KBS ‘일요일은 즐거워’의 한 장면. 왼쪽부터 강호동, 임백천, 김희선, 서세원.
“성인토크쇼는 신동엽이 적격”
—성인토크쇼라고 하면 구체적으로 어느 수준의 것을 말하죠?
“토크쇼는 미국이 원조입니다. 미국엔 자니 카슨(Carson)과 데이비드 레터맨(Letterman)이란 양대(兩大) 거장이 있었습니다. 카슨이 세상을 떠난 후, 제이 레노(Leno)가 그 계보를 이어 받았습니다. 그저 막 웃고 떠드는 토크쇼가 아니라 오피니언 리더들이 보며 인정할 만한 쇼입니다. 연예인도 출연하고 대통령도 출연합니다. 한국엔 지금 시사프로그램도 있고 코미디쇼도 있지만, 엄밀한 기준에서 토크쇼는 없습니다. 후보 시절 열세였던 빌 클린턴(Clinton)이 ‘아세니오 홀(Arsenio Hall)쇼’라는, 별로 인기도 없는 토크쇼에 출연해 색소폰을 연주하고 열풍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게 토크쇼의 힘입니다.”
—대선 후보까지 출연한 SBS ‘힐링캠프’는 그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는 것 아닌가요.
“토크쇼는 기본적으로 ‘퍼스낼러티쇼’입니다. 만약 ‘이경규쇼’란 이름으로 단독 진행을 했다면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훌륭한 프로그램이지만, 의미는 조금 다릅니다.”
—최근 박중훈과 고현정이 단독 토크쇼를 시도했지만, 결과가 좋지 못했다고 합니다.
“토크쇼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토크쇼는 기다려야 합니다. 기본 1년은 해 봐야 하는데, 너무 일찍 끝났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체육행사가 미식축구 결승경기 ‘수퍼보울(Super Bowl)’입니다. 수퍼보울이 끝나면 우승팀 쿼터백을 데이비드 레터맨과 제이 레노 중 누가 잡아내느냐가 관건입니다. 결국 섭외작전에선 레노가 이겼지만, 시청률은 레터맨이 더 높게 나왔습니다. 레터맨은 진 팀의 수비수를 출연시켰는데, 결국 토크쇼는 누굴 불러내서 무슨 얘기를 하느냐가 결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진행자의 능력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하루빨리 우리도 중년이 볼 만한 진정한 토크쇼가 나오길 바랍니다.”
—후배들이 진행하는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을 보면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끼겠네요.
“사실 내가 처음 ‘버라이어티’를 시도할 때와 기본 포맷은 크게 변한 게 없더라고요. 각 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들을 모아서 시청자의 시각을 붙잡는 방식인데, 큰 틀에선 차이가 없습니다. 달라진 점은 녹화시간입니다. 요즘은 10시간 녹화하고 한 시간으로 편집해 방송하던데요. 예전엔 2시간이면 충분했습니다. 녹화시간이 길어지면 실패라고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땐 여백이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는데, 지금은 지나치게 압축된 느낌입니다.”
—신동엽과 이경규 두 명 모두 잠시 옆길로 샜다가 망한 사례가 있습니다. 연예인들이 사업을 하거나 후배양성을 하다 보면 여러 일이 벌어지는데, 지금까지 ‘임백천이 딴짓했다’는 얘기는 못 들어 봤습니다.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나는 사업가들을 굉장히 존경하며, 내 능력 밖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예전엔 자본금을 가져와 기획사를 차려 내게 이수만 역할을 해 달라는 사람들도 꽤 있었죠. 모두 거절했습니다.”
“나가수는 기분 나쁜 프로그램”
—거절한 이유가 능력 때문이라고 생각해서인가요.
“사람을 골라 낼 혜안(慧眼)도, 키워 낼 인내력도 없습니다. 대통령이 추천해도 안 될 사람은 안 되고, 대통령이 방해해도 될 사람은 되는 게 스타의 세계입니다. 스타는 타고납니다. 가장 중요한 게 유전자죠. 음치가 훈련을 받고 노래를 잘할 수는 있지만, 가수가 되긴 어렵습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타고난 인물을 발견해도 그를 스타로 만들려면 수만 명과 경쟁해야 합니다. 이 과정을 해 낼 능력이 없습니다.”
—요즘 즐겨 보는 예능프로그램이 있나요.
“젊은이들만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너무 많아졌습니다. 대다수 방송사가 토·일요일 6~8시에 10대와 20대를 위한 프로그램을 전진배치했습니다. 내가 진행할 땐 그 시간이 ‘패밀리타임’이었습니다. 2대 또는 3대 가족이 모여 함께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회의에서부터 신경을 썼습니다. MBC에서 하는 ‘진짜사나이’를 보는데, 요즘 세태와 달리 여러 세대가 함께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 좋았습니다. KBS 개그콘서트도 젊은 감각을 놓치지 않기 위해 꾸준히 보고 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프로그램이 있습니까.
“예전에 《주간조선》에서 MBC ‘나는 가수다’에 대해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가수, 관객, 시청자 모두 지는 게임이었다는 거죠. 이기는 쪽은 돈을 버는 방송사뿐입니다. 가수 입장에선 소리를 크게 지르는 게 진짜 가수인 것처럼 돼 버렸습니다. 객석에서도 속을 수밖에 없습니다. 밴드음악을 하는 가수들이 개성이 강하고 소리가 크니 그쪽으로 기웁니다. 대표적 화가 두 사람을 두고 누가 더 낫고 못하다는 평을 하지 않습니다. ‘무한경쟁 시대에서 1등도 안주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준 측면에선 긍정적이지만, 굉장히 기분 나쁜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서바이벌’이란 요소가 시대적 흐름으로 나타난 이상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요.
“KBS ‘불후의명곡’이란 프로그램을 보세요. 모두가 이기는 게임입니다. 최선을 다해 편곡해 노래를 부르고 기분 좋게 승복합니다. 선배 가수를 모셔 놓으니 당사자는 얼마나 흡족하겠습니까. 객석에서도 감동의 눈물을 흘립니다.”
—두 프로그램의 차이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한끝 차이입니다. ‘나가수’는 꼴찌를 뽑았고, ‘불후의명곡’은 1등을 뽑았습니다. 사실 노래 부른 모두가 1등입니다. 수많은 경쟁을 뚫고 무대에 선 이들은 기본적으로 검증된 가수들인데, 굳이 그렇게 평가할 필요가 있었나 싶어요. 연출이란 게 그렇게 중요합니다.”
1998년 황현정 아나운서(오른쪽)와 KBS ‘연예가중계’를 진행하는 모습.
“대통령은 연출가다”
‘연출’ 얘기가 나오자 대화가 자연스럽게 ‘국가’와 ‘대통령’으로 이어졌다. TV 프로그램을 국가로 확대하면 대통령중심제 국가인 대한민국의 연출자는 대통령이 되는 셈이다. 그는 “이미지로 대통령을 해도 되는 시대이고, 사람들은 감동을 원한다”며 “TV 프로그램 하나보다 감동을 못 주는 대통령이 뭘 하겠냐”고 말했다.
“모든 정치가가 자신이 ‘경제를 해결하겠다’고 하는데, 요즘 글로벌 경제 해법은 케인스(Keynes)와 스미스(Smith)가 환생해도 어렵지 않을까요? 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 조직을 제외하면 똑같이 한 사람일 뿐입니다. 복잡한 구조의 현대사회에서 이들이 무슨 용빼는 능력이 있겠습니까. 그들에게 필요한 건 ‘국민에게 감동을 보여주는 능력’입니다. 아내는 항상 남편이 사랑을 표현하길 원합니다. 뻔한 이벤트라도 보여주길 바라는 게 아내의 마음이죠. 국민도 마찬가지예요. 지도자가 국가와 국민을 사랑한다는 표현을 듣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 주고, 웃어 주고, 울어 주고… 이게 대통령과 정치인이 해야 할 역할 아닌가요.”
그를 따르는 수식어에 얼마 전 ‘친박(親朴)’이란 단어가 추가됐다. 오래전부터 유지해 온 박지만(朴志晩) EG 회장과의 친분 때문이었다. 지난 3월 KBS 노조와 민주통합당은 임백천을 정치평론가 고성국, 가수 은지원과 함께 ‘정권 코드 맞추기 개편’의 당사자로 지목한 바 있다.
“대통령 동생과 친하면 모두 친박인가요. 나는 친박이 아니라 친(親)박지만입니다. 김대중(金大中)도 찍었고, 노무현(盧武鉉)도 찍었던 사람인데, 어느 순간 어디선가 그렇게 분류가 된 모양입니다. 15년 넘게 지켜 온 우정을 버리란 말인가요.”
—그런 이미지가 도움이 된 경우는 없습니까.
“전혀. 요즘엔 오히려 역차별을 당합니다. 은지원은 태어날 때부터 박 대통령의 조카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논리대로 하면 은지원은 아무리 잘해도 새 프로그램을 맡을 수 없습니다. 이게 말이 되나요. 은지원 입장에선 이게 직업인데, 이런 억지가 어디 있어요.”
—실제 정치성향은 어떤가요.
“미국의 경우 스타가 공개적으로 지지 선언을 할 수 있습니다. 바브라 스트라이샌드(Streisand) 같은 이들은 선거자금 모금 콘서트까지 열 정도입니다. 하지만 한국은 다르죠. 내게도 정치성향은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30년 넘게 MC를 하면서 단 한 번도 그 성향을 방송에서 드러낸 적은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는 입장입니다.”
—한국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방송계에 한바탕 회오리바람이 몰아칩니다.
“방송을 포함한 문화예술계 전체가 진영논리에 빠져 있습니다. 선거가 끝나면 항상 ‘개혁’이 화두가 됩니다. 방송국에서도 누군가 바람을 몰고 다니지만, 이게 최고결정자나 대통령의 뜻은 아니라고 봅니다. 어느 정권이든 분명 잘못된 생각을 가진 실무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문제는 기왕 하는 것 개혁에 성공하라는 것입니다.”
“박지만에 대한 추측성 보도 너무 많아”
—개혁에 성공한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중국의 주룽지(朱鎔基) 전 총리는 ‘100개의 관(棺)을 준비하라. 99개는 탐관오리 것이고, 나머지 한 개는 나의 것이 될 것’이란 말로 단호한 개혁의지를 보였습니다. 적어도 개혁을 하겠다면 이 정도 정신은 갖고 하라는 뜻입니다. 엉뚱한 사람이 엉뚱한 방향으로 개혁하다 보니 사고가 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피해는 전혀 무관한 사람이 보죠.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김미화, 김제동, 이효리 등 많은 연예인이 정치적 성향 때문에 논란이 됐습니다.
“이들 세 사람을 떠나 요즘 SNS상에서 슬쩍 치고 빠지는 유명인이 많습니다. 연예인, 작가, 교수 등 다양하죠. 그런 주장을 하려면 진성 당원 활동을 하는 게 낫습니다. 연예인들이 이름 내세워 외곽에서 변죽만 울리는 것은 비겁한 짓입니다. ‘자기 직업이 무엇이든 민주주의 국가에서 못할 말이 뭐 있냐’고 하면 할 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진행자는 그래선 안 됩니다. 만약 정치적 성향을 드러낸 사람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이라면 나는 볼 생각이 없습니다.”
—연예인이 정치인처럼 되고, 정치인은 연예인처럼 됐습니다.
“연예인들이 문제 터지면 ‘공인(公人)으로서’란 얘기를 하는데, 연예인이 무슨 공인입니까. 우리는 사리사욕(私利私慾)을 좇는 사인(私人)입니다. 다만 요즘 공인이 사인보다 못한 경우가 많아 문제입니다. 공무원과 정치인들도 많이 변해야 합니다.”
—박근혜(朴槿惠) 대통령과는 만난 적 있습니까.
“박지만 결혼식 때 한 번, 국회의원 시절에 한 번. 그게 전부입니다.”
—박지만씨는 주로 어디서 만나나요.
“서울 강남의 한 허름한 지하 바에서 동갑내기 친구들과 함께 만납니다. 거기도 무슨 ‘멤버십이 있는 클럽’이라고 나오던데, 추측성 보도가 너무 심합니다. 우리가 가는 이유는 술값이 다른 곳에 비해 싸고 여자가 안 나오기 때문입니다. 기자들이 직접 와서 확인하더니 더는 그런 얘기가 안 나오더라고요.”
—친구로서 박지만은 어떤 사람인가요.
“내겐 참 좋은 친구입니다.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한 사람입니다. 워낙 비범한 아버지와 누나를 둬서인지 오해가 너무 많아요. 어르신들에겐 여전히 연민(憐憫)의 정서가 남아 있을 테고, 반대파에겐 탕아(蕩兒)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분명 잘못한 점도 있지만, 자신이 모두 인정하고 죗값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끈질기게 괴롭히는 이들을 보면 참 지독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누나 취임식 TV로 지켜본 박지만
임백천은 ‘친구 박지만’ 얘기가 나오자 답답한 게 많았던 듯 목소리를 높였다.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친목모임 ‘58년 개띠 클럽’까지 만들어 모일 정도로 친분이 있다. 박지만-서향희 결혼 전인 2004년경엔 직접 ‘소개팅’을 주선하겠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당시 그 ‘소개팅’은 어떻게 됐나요.
“중매는 본인이 싫다고 해서 성사가 안 됐습니다. 대신 우리가 함께 잘 알고 지내던 한 살 아래 여성이 있었는데, 그와 언니 동생 하며 지내던 이가 지금의 아내 서향희 변호사입니다.”
—박지만씨 가족이 대통령과 함께 여름휴가를 간다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던데요.
“제가 알기론 대통령과 전혀 다른 곳에 따로 휴가를 갔습니다.”
—대통령의 올케와 조카는 자주 청와대에 간다는 기사가 있던데요.
“대통령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하고 있습니다. 세현이 엄마(서향희 변호사) 직업이 변호사 아닙니까. 그런데 대통령의 올케라는 이유 때문에 운영하던 로펌도 그만뒀고, 다른 로펌에 취직도 못 합니다. 역차별입니다. 그래서 지금 남편 회사의 고문 변호사로만 있습니다. ‘만사올통’이란 소리도 말이 안 됩니다. 누나의 대통령 취임식 때도 이들 부부는 안 갔습니다.”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 때 동생 부부가 오지 않았다는 말은 처음 듣습니다.
“취임식 준비하는 곳에서 오라고 하니까, 만약 가게 되면 자리를 단하(壇下)에 준비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게 박지만의 생각이었습니다. 사상 최초로 가족석이 연단 아래에 배치됐는데, 결국 작은누나(박근령)만 가고 박지만은 회사에서 TV로 지켜봤습니다.”
대다수 국내 언론은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 당시 박지만·서향희 부부와 아들 세현 군이 참석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이들을 찍은 사진은 어느 매체에서도 찾을 수 없다. 임백천씨의 말이 사실이라면, 국내 거의 모든 언론이 확인도 하지 않고 오보를 한 셈이다.
—최근 시사프로그램도 진행하고, 단순한 방송인으로 끝날 것 같지 않습니다. 정계에 입문할 생각은 없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정치하라는 제의를 지금까지 총 세 번 받았습니다. 한 번은 서울의 지역구, 다른 두 번은 전국구였습니다. 전국구는 꽤 앞선 번호였습니다. 그때 각각 세 사람에게 이렇게 답했습니다. ‘가문의 영광인데, 나는 지금 내 가족도 건사 못해 헤매는 사람이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하기는 벅차다’고 솔직하게 답했습니다. 앞으로도 정치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국가보다 가족이 먼저”
—한선교, 유정현 등 아나운서 출신 정치인도 있고, 이순재, 최불암 등 배우 출신 국회의원도 있습니다. 왜 안 한다고 했습니까.
“사람은 뭘 하든 뜻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유(類)가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를테면 아이에 대한 이해 없이 친구 따라 학원 보내는 학부모처럼 말입니다. 정치를 하려면 소신과 철학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도 없는 사람이 누가 하라고 정치하면 그것만큼 비극이 없습니다.”
그는 가족이 있는 경우엔 국가와 민족보다 자기 가족부터 돌보는 게 가장이자 사람의 도리라고 여겼다.
“가장(家長)에게 가족을 먹여 살리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 있나요. 일제시대 독립운동 하던 이라면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지금은 나라도 있고, 자유도 있습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고 하지 않았나요. 오늘도 현장 곳곳에선 이 나라의 가장들이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임백천에게 가족은 어떤 존재인가요.
“못난 남편 구제해 준 아내에게 감사할 뿐입니다. 시집을 잘못 와서 고생만 엄청 하고 있습니다. 아내가 딸 아들 공부시키러 미국에 5년 넘게 간 적이 있었는데, 젊었을 때나 ‘기러기아빠’지 나이 드니까 ‘독거노인(獨居老人)’이 달리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 ‘임백천’이란 존재는 더 이상 없다고 생각하며 삽니다. 내 존재의 이유는 가족이기 때문이죠.”⊙
월간조선 2013년 9월호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