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한 직설

'삼류 트로트 통속 연애 시인' 류근 "시인에게 좌·우파가 어디 있나… 난 낭만주의자"

김정우 기자 2013. 12. 9.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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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날 그렇게 취해 있으면 시는 도대체 언제 써요?라고 어떤 분이 물었다. 나는 말없이 또 한 병을 비우며 혼자 조용히 천장을 바라봤다. 파리똥 무늬가 고요했다. 술 안 마실 때에만 골라 쓰느라 18년 만에 시집을 냈다는 걸 말해 주기 싫었다.〉

시인 류근(柳根)의 글은 이런 식이다. 화자(話者)는 지독한 가난과 낮술을 앞세워 자신의 상처와 고통을 극대화한다. ‘페이스북 스타’라는 ‘폐인 시인’을 이해하기 위해 그가 작사했다는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을 들으며 그의 산문집 《사랑이 다시 내게 말을 거네》를 꺼내들었다.

그의 문장엔 ‘조낸’과 ‘시바’와 같은 욕설과 비속어가 난무(亂舞)한다. 화려한 문체에 고난도 수사(修辭)가 이어지지만, 내면의 공허함을 덮으려는 시도로 비쳤다. 라면, 연탄불, 사글셋방과 같은 빈곤한 단어들 이면엔 물적·정신적 부요(富饒)함이 숨겨진 듯했다. 술술 읽히는 책장을 모두 넘기면 뒤표지에 소설가 이외수(李外秀)의 추천사가 눈에 들어온다.

〈아니, 이런 개 같은 시인이 아직도 이 척박한 땅에 살아남아 있었다니.〉

그의 정체가 궁금했다. ‘글발’만큼 ‘말발’도 대단할까. 그의 지인을 통해 인터뷰를 요청했다. 취중(醉中)에 덜컥 약속을 잡은 그는 다음 날 기자와 통화한 직후 이런 글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렸다.

〈나는 술에 취하면 단숨에 푼수 예스맨이 되어버린다. 도무지 어떤 일에도 거절이 불가능해진다. 그것도 집을 떠나 객지를 떠돌며 그 풍광과 사람에 취해 술맛이 깊어지면 증세가 더 걷잡을 수 없게 된다. 만사 예스!〉

‘인기인’답게 이 글엔 곧바로 600여 개의 ‘좋아요’와 90여 개의 댓글이 달렸다.

류근 시인. ⓒ서경리


⊙ 김광석의 가난한 작사가에서 벤처 CEO로… 다시 詩人 되고선 여전히 ‘폐인 술꾼’
⊙ 욕설·비속어 난무한 페이스북이 이뤄낸 베스트셀러 작가
⊙ SNS가 열광한 혹독한 자기부정과 자기조롱의 ‘삼류 직설’
⊙ “내가 《월간조선》을 구독하는 이유는, 적들의 동태 살피기 위해서다”


‘페이스북 스타’

우여곡절 끝에 폐쇄공포증에 채식주의자라는 ‘까다로운 시인’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을 스스로 ‘삼류 트로트 통속 야매 연애 시인’이라고 일컫는다. 《월간조선》 ‘유쾌한 직설’ 시리즈가 지향하는 ‘B급 정서’ 인터뷰에 적합하다며 “삼류보다는 B급이 더 낫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욱한 그는 “사람에게 C급과 B급이 어디 있느냐”고 답했다.

그는 요즘 페이스북에서 유명하다. 친구는 2000여 명이지만, 친구 대기자가 1000명을 넘어 더 이상 친구를 맺을 수 없다. 5200여 명이 현재 팔로우 중이며, 그가 쓴 글엔 언제나 수백 개의 좋아요와 댓글이 달린다. 소설가 이외수나 김영하(金英夏)의 인기는 기존 인지도를 페이스북에 그대로 끌어온 사례지만, 시인 류근은 페이스북을 통해 유명세를 탄 경우다.

페이스북 글들을 모아 지난 7월 낸 산문집 《사랑이 다시 내게 말을 거네》는 온라인 입소문을 타고 두 달 만에 7쇄를 돌파했다. 꾸준히 팔리던 3년 전 시집 《상처적 체질》도 덩달아 인기를 얻어 총 1만 부 가까이 팔렸다. 초판도 제대로 소화하기 어려운 문학계에서 신인이나 다름없는 시인이 이렇게 인기를 얻은 것은 고무적이다.

그가 페이스북을 하게 된 계기는 간단했다. 친분이 깊었던 이외수씨가 트위터를 해보라고 몇 번 권유했지만, 그는 “시인이 할 만한 짓이 아닌데다 천박하기 이를 데 없다”며 거절했다. 그는 익명성에 기대 할 말 못 할 말 다 해버리는 트위터가 체질에 맞지 않았다.

2011년 가을 문인들이 모이는 연희문학창작촌에 갔을 때였다. 막막하게 방만 하나 내주고 그의 표현대로 ‘재수 없게’ 공동취사를 시키는 곳이었다. 대학원 여후배가 와서 “오빠 같은 훌륭한 시인은 페이스북을 해야 한다”며 반(半)강제로 가입시켰다. 그때까지 그는 페이스북이 뭐 하는 데인 줄도 몰랐다. 지인 몇 명이 소통하는 곳인 줄로만 알았던 그는 ‘장난질’을 시작했다.

“빈티 자취생, 노총각, 홀아비 코스프레를 했다. 그냥 막 놀았다. 전체공개가 뭔지, 친구신청이 뭔지도 몰랐다. 한 20일쯤 지나니 난리가 나더라. 어떻게 이렇게 가난한 사람이 있나, 요즘도 이런 사람이 있느냐는 둥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됐다. 내가 만든 캐릭터 안에 들어가 버린 셈이다.”

그가 처음 ‘대박’을 친 포스팅을 찾아봤다. 그의 페이스북 글들은 이후 큰 수정 없이 그대로 산문집에 옮겨졌다.

〈어쩌다 공짜 술 얻어먹겠다고 문인들 행사에 가면, 17초 만에 후회하게 된다. 서로의 암내를 확인하는 똥개들처럼 저마다 이해를 향해 쏠리고 몰리는 행태들이 자못 비애롭다. (중략) 공짜 술에 속지 말 일이다. 술은, 그냥 외상술이라도 내 돈으로 마실 일이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시바.〉

류근 시인의 페이스북. 그가 자기비하와 조롱으로 해석한 그의 일상은 팬들을 열광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시바’와 ‘조낸’

 —흔히 하는 욕도 막상 텍스트화(化)하려면 상당한 노력과 용기가 필요하다. 욕과 비속어를 자주 쓰는 이유가 있나.

“잘 몰라서 그랬다. 페이스북 메커니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처음엔 친한 사람들끼리니까, 평소에 더 심한 욕도 하니까 부드럽게 감탄사처럼 썼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시바’ 이렇게 하다 보니 재미있었다. 착착 달라붙지 않나. 말맛을 살리기 위해 ‘조낸’이란 부사와 ‘시바’란 감탄사를 구사하게 된 것이다. 욕한다고 뭐라 하는 놈들이 있는데, 그들은 과연 얼마나 깨끗할지 궁금하다.”

그는 20대 문청(文靑) 시절로 돌아간 듯 재미있었다고 했다. 그의 글은 시도 아니고 산문도 아니었다. 시점도 1980년대와 1990년대, 그리고 최근이 뒤섞였다.

“트위터는 젊은 아이들이 많이 하는 것 같다. 페이스북은 어느 정도 자기 콘텐츠를 갖춰야 한다. 연륜과 경륜이 있어야 제대로 유지된다는 나름 장점이 있다. 트위터는 사회부적응자가 90%라고 본다. 페이스북은 85% 정도다. 상당히 ‘큰 차이’가 있다. 은근히 여성 팬이 많은 줄 아는데, 아저씨들이 더 좋아한다. 남녀 비율이 대충 55:45 정도다.”

—이유가 뭔가.

“이번에 알았다. 그들은 내 페이스북을 통해 상당한 위안을 느꼈던 것. ‘저렇게 지질한 놈도 살고 있구나, 난 이 정도면 멀쩡하구나’라고 생각한단다. 맨날 술 마시지, 맨날 쌀 떨어지지, 맨날 라면 먹지, 맨날 쫓겨나지, 맨날 다치고 엎어지고 자빠지는… 이런 모습을 보고 좋아한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이유는 모성애를 느끼게 해줘서란다. 어떤 사진작가는 ‘이렇게 불쌍한 사람은 존재 자체가 사회적 문제’라며 100만원을 준비해서 양평까지 나를 찾아나섰다. 그러던 중 사기 캐릭터란 걸 알고 크게 실망했다고 한다.”

—출판 불황에 ‘대박’을 냈다. 어떤 힘이 작용했다고 보나.

“여러 가지가 잘 맞아떨어졌다. 제목도 좋았고, 특히 페친(페이스북 친구)의 힘이 컸다. 보통 친구 2000명에 ‘좋아요’가 300개쯤 되면 대충 14만명에 노출이 된다고 한다. 꽤 많은 사람이 주시하고 있었나 보다.”

—출판사는 물론, 상당수 기업이 페이스북 마케팅을 하는데, 결코 쉽지 않다.

“나는 그럴 자격이 있지 않나? 날마다 무상(無償)으로 얼마나 재미있게 해주는데.”

—내용은 ‘삼류 트로트 통속’인데 제목은 상당히 서정적이다.

“원래 스승이 쓸 제목이었다.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Mahler)의 ‘음악이 말해 주는 것’이란 제목에서 영감을 얻어 ‘사랑이 다시 내게 말해 주는 것들’이란 제목을 정해 뒀었다. 대학원 지도교수의 산문집에 쓰려고 했다. 책은 아직 안 나왔는데, 혜민 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그 사이 나와버렸다. ‘것들’이란 표현의 독창성이 떨어졌기 때문에 ‘사랑이 다시 내게 말을 거네’로 바꿨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결국 내 책에 쓰이게 됐다. 사실은 ‘사랑이 다시 내게 발을 거네’다.”

김광석과의 인연

—등단 후 책 2권을 낸 셈인데, ‘김광석 작사가’란 명성이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3년 전 낸 시집은 잘 모르겠지만, 이번 산문집은 확실히 영향이 있다. 띠지에까지 김광석을 언급했다. 출판사에서, 쪽팔리게…. 문인들 모임에 가면 이런 분위기다. ‘시인 누구입니다’ 하면 그러려니 한다. 고만고만하니까. 그런데 누군가 소개하길 ‘김광석 노래 중에’라고 하면 모두 돌아본다. 그리고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까지 나오면 탄성을 내지른다. 이런 반응은 외부에서도 마찬가지다. 시보다 노래 하나가 더 큰 힘을 발휘하는 게 현실이다.”

시인 류근이 김광석을 만난 인연도 기구(崎嶇)하다. 군 제대 후 그를 맞은 건 지독한 가난이었다. 폭삭 망한 집엔 입대 전 신었던 양말 한 켤레 남아 있지 않았다. 풍비박산(風飛雹散)난 집을 떠나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을 할 수밖에 없었다. 등록금도 못 내던 그에게 학교 후배가 노랫말을 써보라고 권했다. 이미 등단(登壇)까지 한 시인이었지만,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며 하룻밤에 29곡의 가사를 썼다. 운동권 가수 윤선애의 앨범에 들어갈 예정이었는데, 음반사가 망했다. 자포자기(自暴自棄)한 그에게 1년 만에 연락이 온 가수가 김광석이었다. 당시 3집까지 낸 김광석은 이미 유명가수였다.

“연락을 받고 녹음실에서 처음 김광석을 만났다. 노래 작업이 이미 끝나 있더라. 들어보라는데 처음엔 정말 실망했다. 노래를 ‘이따구로’ 만들었나 싶었다. 전주(前奏)는 지루하기 짝이 없었고, 슬픈 가사를 썼는데 ‘쿵작쿵작’ 포크락을 입히니 이상했다. 솔직히 내심 ‘이문세풍’의 노래를 기대했었다. 그런데 50만원을 주더라. 각종 빚에 시달렸는데, 큰 도움이 됐다.”

그가 마음을 바꾼 건 노래를 세 번 들어본 뒤였다. 예사롭지 않은 노래란 걸 알게 됐다고 한다. ‘서른 즈음에’와 함께 4집에 수록된 노래는 점점 알려져 결국 김광석의 대표곡이 됐다. 가수가 죽기 5시간 전까지 부를 정도로 가장 좋아하던 노래였다.

—본인의 경험 없인 나오기 어려운 노랫말이다.

“군 복무 시절 사귀던 연인을 선배한테 빼앗겼다. 당시 7사단 5연대 최전방에 있었는데, 아침마다 실탄 갖고 GP에 오르며 ‘오늘은 반드시 죽어야지’라고 생각했다. 내려올 때 노을 보며 하루만 더 견뎌보자고 한 게 한 달 동안 반복됐다. 죽음과 맞바꿀만한 상처를 겪어본 셈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는 건데, 그땐 상당히 진지했다.”

—김광석과 각별한 사이였는데, 떠나보내고 마음이 어땠나.

“정말 당황했다. 한창 내 가사를 가지고 5집을 작업하던 때였다.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다. 한동안 ‘뭐 좀 아는 것 있느냐’는 전화도 많이 받았다. 망연자실(茫然自失), 마음이 정말 아팠다. 그의 죽음에 대해선 아는 게 없지만, 지금은 이렇게 생각한다. 홧김에 실수로 죽었거나, 아니면 누가 죽였거나.”

가난했던 대학생 시절 돈 벌기 위해 썼던 가사는 김광석을 통해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로 탄생했다.(조선DB)


저작권료

김광석은 생전(生前)에 “열심히 미는 노래니까 저작권협회에 가입하라”고 류근에게 권했다. 당시 협회 가입비 10만원이 아까웠던 그는 말을 듣지 않았다. 최근 한 후배가 “너무 아까우니 지금이라도 가입하라”며 직접 차에 태워 협회에 데려갔다. 17년 만에 김광석의 ‘유언’을 이룬 셈이다. 협회 직원들도 아까워했다. 저작권료는 소급적용이 안 되기 때문이다. 월 8000원 정도 나올 줄 알았는데, 평균 50만~60만원 나오고 많을 땐 100만원까지 나온다고 한다. 이미 실연당한 자들의 성지(聖地)가 된 노래의 위력 덕분이란다.

시인 류근은 문경에서 육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자유당 시절 지방 공무원이었다. 비료 횡령사건에 휘말리면서 온 집안이 충주로 야반도주했다. 그가 태어나서 1년도 안 됐을 때였다. 그는 모든 프로필에 “경북 문경에서 태어나 충북 충주에서 자랐다”고 명기한다. 그의 설명이다.

“보통은 경북 문경산(産)이라고 하면 된다. 충주를 굳이 밝히는 이유는 문인은 어디서 모국어를 배웠는지 중요하기 때문이다. 언어의 정서가 태어난 곳을 무시할 수 없다.”

군대에서 ‘죽을 만큼’ 고생한 그는 제대 후 간신히 복학했다. 《문화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그였지만, 졸업 후 취업을 하지 못했다. 이력서는 준비했는데 정작 자기소개서를 쓰지 못했다. ‘내가 나에 대해 못 쓰겠다’는 이상한 이유로 ‘빌빌거렸다’고 한다. 소문을 들은 모교 교수가 한 곳을 추천했다. 자기소개서가 필요 없는데다 부장, 과장, 대리가 모두 같은 과 출신인 회사였다.

그의 첫 직장은 대형서점 홍보부였다. 맡은 임무는 신간을 쌓아놓고 보도자료를 옮겨적는 것이었다. 모든 책을 마음껏 볼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에겐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고 한다. 단 한 가지 단점은 월급이 적었다는 것.

그러던 중 메이저 광고기획사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카피라이터란 직업을 원했던 그는 이직을 선택했다. 누구나 부러워할 직장이었지만, 7시 출근 4시 퇴근 시스템에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4시에 퇴근하면 다른 사람들은 운동하거나 학원에 가나 보다. 우린 어떡하나. 4시에 퇴근하면 술 마셔야지. 7시 출근이 불가능했다. 울고 싶은데 뺨 때린다고, 파벌 다툼이 심했다. 사수인 팀장을 배신해야 하는 상황까지 오더라. 팀장한테 ‘차마 이렇게 있을 순 없다’고 하고 짐 싸서 집으로 와버렸다.”

그는 이후 문화체육부 산하 기관에서 일했다. 준(準)공무원 대우를 받는 ‘꿈의 직장’이었다. 그러나 ‘문단의 더러운 꼴’을 목격한 시인은 더 이상 근무를 계속할 수 없었다. 교과서, 시집, 소설책에서 봤던 인사들이 늘그막에 벌이는 협잡에 환상이 모두 깨져버렸다.

연봉 수백만 원을 깎이면서 다른 직장으로 또 옮겼다. 주류회사였다. 낮술을 먹어도 괜찮을 만큼 그의 적성에 맞았다. 그러나 시인은 또 오래 버티지 못했다. 부도날 것 같은 회사를 두고 멀쩡하다고 보도자료를 써야 했다. 문학 배운 사람이 거짓을 용납할 수 없었다. 점심시간에 낮술 먹다가 욱해서 팀장 자리에 쪽지 하나 남겨놓고 나왔다. 마지막 직장이었다.

4000억 자산설

스스로 ‘낭중지추(囊中之錐)’라고 생각했던 그는 금방 취직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IMF 사태가 터지면서 일자리가 없어졌다. 그해 겨울은 친형이 운영하는 경동시장 휴대전화 대리점에서 일했다. 죽도 밥도 안 되니 평소 가고 싶었던 인도 여행 계획을 세웠다. 그간 모아둔 적금과 보험을 깨고선 무작정 떠났다. 1998년이었다.

요가의 성지로 유명한 리시케시(Rishikesh)를 포함해 인도 전역을 돌았다. 돈 떨어질 때까지 5개월을 여행한 그는 인도인들이 가난해도 별로 불쌍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았다. 한국인들의 표정과 달랐다. ‘가난의 고통’을 즐기게 된 것이다. 예전 사진들을 모아보면 당시 얼굴이 제일 평온하다고 한다.

한국에 돌아온 후엔 강원도 횡성에 가서 농사를 지었다. 소설가 마루야마 겐지(丸山健二)처럼 욕심 없이 살고 싶었다. 먹거리는 자급자족하고 콩트를 써서 한 달에 50만원 정도만 벌면 되겠다 생각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원고를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예전 주류회사 동료로부터 전화가 왔다. 회사를 그만뒀다는 그는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며 서울로 불렀다. 상경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휴대전화 벨소리 아이템이었다. 특허 하나 믿고 수개월 동안 휴대전화 제조사 다섯 곳과 이동통신사 여섯 곳을 매일 돌며 잡상인처럼 영업했다. 아이디어는 좋았지만, 기술적인 한계가 있었다.

대기업 연구소들도 포기한 기술을 담배 피우다 우연히 만난 한 말단 연구원이 해결했다. 허무하도록 쉬운 방법이었다. ‘콜럼버스의 달걀’이 따로 없었다. 최단기간 코스닥 상장 기록을 세우며 사업은 대박을 쳤다. CEO로 변신한 시인의 재산은 눈덩이처럼 불었다.

—얼마 전 4000억원 벌었다는 소문까지 나왔다.

“말도 안 되는 소문이다. 아는 형이 지나가다 대뜸 영화 하나 찍어야 하는데 1억만 빌려달라고 하더라. 무슨 ‘돈 만원 빌려줘’ 하는 느낌이었다. ‘4000억 벌었으니 빌려줄 수 있잖아’라고 하는데, 어이가 없어서 눈물이 났다. 예전에 회사 다닐 때 학교 선배들 만나면 근처 좋은 고깃집에 가서 꽃등심을 대접했다. 나는 성공해 이런 대접까지 할 수 있어 자랑스러웠는데, 한참 후에 보니 내가 욕먹고 있었다. ‘지는 날마다 룸살롱 가서 술 마시면서 겨우 고기 사주더라’ 이런 식이었다. 상처 정말 많이 받았다.”

—왜 사업을 그만뒀나.

“나보다 더 잘할 사람에게 넘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을 살아보니, 내가 더 가지면 어딘가에서 그 때문에 빼앗기는 사람이 반드시 생긴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다시 돌아가서 책을 읽고 시를 쓰고 싶었다. 나는 시인이니까. 애국·애족적 은퇴를 마음먹게 됐다.”

방송인 임재민씨(왼쪽)와 류근 시인. ⓒ서경리


공황장애와 폐쇄공포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꿈이 시인이었다. 어떤 상황이 닥쳐도 ‘난 시인인데’란 정신이 있었다. 잘난 놈이 있어도 주눅이 들지 않았던 힘이었다. 사업이 커지면 반드시 사건이 따른다. 더 크게 되려면 이른바 ‘게이트’를 통과해야 했다. ‘내가 시인인데’란 생각이 들더라. ‘수퍼 울트라 갑(甲)들’에게 꿀리지 않았다. 미움도 받고 불이익도 많았다. 몰라서 한 실수는 어쩔 수 없지만, 사업을 정리할 때까지 털어서 먼지 하나 안 나올 만큼 깨끗하게 했다고 자부한다.”

성공은 그를 한없이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유리구두를 신고 뛰어다니는 신데렐라의 기분”이었다고 했다. 결혼하고 처자식까지 생기니 다시 가난해지면 안 된다는 부담이 가중됐다. 타고난 우울증에 매일 긴장상태까지 겹쳐 병원에선 공황장애란 진단까지 나왔다. 환자가 된 그는 비행기와 지하철을 못 탔다. 터널과 다리도 못 지났고, 놀이공원과 극장에도 갈 수 없었다. 수년 동안 유명한 신경정신과 병원을 돌았지만 차도가 없었다.

“어느 날 동네에 비행공포 클리닉이란 게 생겼다. 혹시나 하며 들렀는데, 공황장애 전문가인 원장이 내 증세를 듣더니 공황장애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공황장애 증상과 좀 달랐다.”

그의 산문집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이 무슨 자갈밭에서 숫처녀 허리끈 풀어지는 소리? 그럼 수년 동안 나를 치료해 보겠다고 불철주야 노심초사했던 이 나라의 전문가들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가세가 기울 만큼 병원에 갖다 바친 돈들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의사는 냉정하게 대답했다. 당신은 공황장애가 아니라 단순한 폐쇄공포(광장공포)요!〉

그를 괴롭힌 것은 공황이 아니라 스스로 공황장애라 믿어버린 사고의 오류였다. 그는 “스포츠 신문이나 연예 프로그램에서 함부로 가볍게 공황을 전파하는 것에 신중할 필요가 있다”며 “이는 전염성이 있어 누구나 불편을 불안으로, 다시 불안을 공포로 오해하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오해는 풀렸지만 증세는 계속됐다. 지금도 컨디션 나쁘면 강 건너가기 어렵다. 지하철과 비행기는 여전히 못 탄다. 돈 있으면 뭐 하나. 예쁜 여자 데리고 외국에도 못 도망가는데. 운명이 그런가 보다.”

그의 산문집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나는 몸에게 딴생각을 품게 하면 안 된다. 무조건 술로 조져서 모든 병을 술병으로 단일화시켜야 한다. 바이러스나 박테리아 따위에 몸을 내어줘선 절대 안 된다.〉

—페이스북 글 태반이 술 얘기다. 술은 언제부터 좋아했나.

“고교시절부터 상습 술꾼이었다. 여고 두 곳과 남고 세 곳의 문예 동아리가 모여 토론하곤 했는데, 그때만 해도 문학하는 사람은 일단 폼 잡고 술을 마셔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대학에 갔더니 밤에 2병 마시고 아침 7시에 깨워서 4병을 더 먹이더라.”

‘미남 시인’

—요즘 건강은 괜찮나.

“몹시 나쁘다.”

—류근에게 술은 어떤 존재인가.

“산문집에 이렇게 정리했다. ‘당신은 묻는다. 왜 술을 마시냐고. 나는 대답한다. 외로워서 마신다고. 당신은 묻는다. 술 마시면 안 외로워지냐고. 나 또한 다시 대답한다. 마시면 더 외로워진다고.’ 우연히 썼는데 지금 봐도 명문이다.”

—책에선 자신을 채식주의자라고 소개하던데.

“채식주의까진 아닌데, 일부러 고기를 먹으러 가진 않는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안다고, 어릴 때부터 못 먹어서 별로 마음이 없다.”

—책에 단골로 등장하는 ‘벤츠 타고 온 옛날 애인’은 누구인가.

“마누라다. 원래 누군가의 아내는 모두 옛날 애인 아닌가.”

—‘미남 시인’으로 유명하다. 본인의 외모에 만족하는가.

“시 쓰는 선배가 페이스북에서 그러더라. 한국의 대표 미남 문인 중 내가 들어갔다고. 원래 샴푸의 요정과 같은 미모를 자랑하다가, 최근 2~3년 사이 확 늙었다. 누구는 갱년기라고 하더라.”

—“오산고가 낳은 3대 시인”이라고 하던데.

“오산학교 나온 시인이 소월(素月)과 백석(白石), 그리고 류근이다. 이 부분에 대해선 상당히 자랑스럽다.”

—《월간조선》을 구독하는 이유가 뭔가.

“적(敵)들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서다.”

—작품을 읽어보면 ‘좌파적 향기’가 물씬 풍긴다.

“좌파는 무슨… 시인에게 좌우가 어디 있나. 내 이데올로기는 낭만주의다.”

—이외수는 류근을 ‘이런 개 같은 시인’이라고 했다. 류근에게 이외수는 어떤 존재인가.

“거 참 개 같은 노인네. 우린 술 마시면 서로 그렇게 얘기한다.”

그의 글은 혹독한 자기부정과 자기조롱으로 대변된다. 마치 시인을 둘러싼 온갖 소문과 상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신들린 듯한 문체로 자신을 감싸고 ‘난 이런 놈이니 나한테 뭐라 하지 마쇼’라고 하는 모양새다. 당사자에게 맞는지 물어봤다.

“어쩌면 맞을 것 같다. 그런 식으로 자기 방어막을 치고 합리화할 수 있다. 의식적이든, 아니면 무의식적이든 ‘난 이런 놈인데 어쩔 거야’라고 할 만한 여지가 있다.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이 그랬다. 시인이란 이유로 누구와 경쟁하려 하지 않았다. 잘나가는 사람을 봐도 ‘나는 시인이야’라고 하면 끝이었다. 필요한 방어기제를 가져와 썼던 것이다.”

인터뷰 다음 날, 그의 페이스북엔 이런 글이 올라왔다.

〈어제 나는 우리나라 최고 수준의 보수 언론지와 소위 난상의 인터뷰를 하였는데, 영민한 기자가 역시 잊지 않고 인터뷰 말미에 물어보았다. 당신의 글을 읽어보니 좌파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데 그러합니까?

나는 헐렁한 노숙 베가본드 같은 말투로 심드렁하니 대답하였다. 예술가에게 무슨 좌파니 우파니 나뉘는 나침반이 있겠소. 나의 이데올로기는 낭만주의요!

그러자 그는 역시 영민한 기자답게 금세 나 말의 깊고 얕은 뜻을 알아듣고 술 한 병을 더 시켜줬다.〉⊙

월간조선 2013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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