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에서 '이식'으로… 컨텐츠 주입의 시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신약성경 요한복음 첫 구절이다. '말씀'의 의미는 신학적으로 다양한 의미가 있겠지만, 크게 보면 컨텐츠의 일종으로도 해석된다. 태초에 컨텐츠가 있었으며, 인류 역사와 함께 이어져온 셈이다.
컨텐츠의 중요한 속성 중 하나가 '전달(delivery)'이다. 전달되지 않는 컨텐츠는 의미가 없다. 인간은 항상 컨텐츠를 생성하고 전달해왔으며,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전달의 방식도 큰 변화를 겪었다.
컨텐츠의 전달 수단은 '기억(memory)'에서 '기록(record)'으로, '청각(hearing)'에서 '시각(sight)'으로, '그림(image)'에서 '활자(text)'로 변화했다. 인쇄술이 발명됐고, 영상과 네트워크가 혁신을 불러왔다.
컨텐츠 전달 방식이 바뀔 때마다 인류는 지성의 혁명을 겪었다. 디지털 기술이 발전하면서, 시청각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직접 컨텐츠를 뇌 속에 주입한다는 개념까지 등장했다. 지식과 컨텐츠를 '인식(認識)'하는 게 아니라, '이식(移植)'하는 셈이다.
최근 개봉한 영화 〈트랜센던스〉(Transcendence)는 이런 미래의 가능성을 어느 정도 엿보여 준다. 인간의 두뇌가 업로드 된 슈퍼컴퓨터를 두고 벌어지는 일들을 그려낸 영화다. 허구에 가까운 영화이지만, 기억의 이식과 존재에 대해 많은 질문이 나온다.
영화가 정의한 슈퍼컴퓨터 '트랜센던스'를 이렇게 정의한다.
"온라인에 접속만 하면 지각 있는 기계는 곧 생물학적 한계를 뛰어넘는다. 이 기계의 지적 능력은 인류의 지성을 합친 것보다 위대해질 것이다. 모든 종류의 감정을 갖고 있으면서도 자각 능력까지 갖춘 독립체를 상상해 보라. 이를 '트랜센던스'(초월)라고 부른다."
영화보다 현실이 빠른 시대라고 한다. 뇌 이식에 대한 연구가 이미 진행 중이며, 많은 미래학자가 장밋빛 미래를 제시하고 있다.
인간 두뇌를 컴퓨터에 업로드하는 미래를 그린 영화 〈트랜센던스〉
저명한 미래학자인 레이 커즈와일(Kurzweil)은 "2030년이면 뇌가 클라우드 컴퓨터에 연결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지난해 한국을 찾아 "뇌에 마이크로 칩을 삽입해 클라우드 컴퓨터와 연결하는 방식을 이용하면 얼마든지 뇌의 용량은 확대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컴퓨터 공학자 한스 모라벡은 1988년 저서 <마음의 아이들>에서 컴퓨터가 40년 안에 인간을 넘어선다며, 그때 인간은 '마음 프로그램'을 로봇 속에 이식해 일종의 영생을 얻게 되리라는 전망까지 했다. 책 내용 중 일부다.
"수술실에 누워 있는 당신 옆엔 당신과 똑같이 되려는 컴퓨터가 대기하고 있다. 당신의 두개골이 먼저 마취된다. 그러나 뇌가 마취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의식은 말짱하다. 수술 담당 로봇이 당신의 두개골을 열어 그 표피를, 손에 수없이 많이 달린 미세한 장치로 스캔(주사)한다. 주사하는 순간마다 뇌 신경세포 사이에서 발생하는 전기신호가 기록된다. 로봇 의사는 측정된 결과를 토대로 뇌 조직 각 층이 보여주는 행동을 본뜬 컴퓨터 프로그램을 작성한다. 이 프로그램은 즉시 당신 옆의 컴퓨터에 설치돼 가동된다. 이러한 과정은 뇌 조직을 차근차근 도려내면서 각 층에 반복적으로 시행된다. 말하자면 뇌 조직의 층별 움직임이 모의 실험되는 것이다. 수술이 끝날 즈음 두개골은 텅 빈 상태가 된다."
모라벡이 제시한 40년 후면 2028년으로, 커즈와일이 예상한 2030년과 상당히 근접한 시기다.
'컨텐츠의 이식'은 생명공학과 전자공학이 융합된 결과물이다. 많은 기술적 보완이 필요하지만, 수십년 내에 현실화한다면, 생활의 모든 것이 바뀌게 된다.
인간은 책을 읽지 않게 되고, 영화를 볼 필요가 없다. 음악을 듣는 경험도 마찬가지다. 각종 컨텐츠를 전달하는 방식이 송두리째 바뀐다. 모든 기억의 요소가 이식되며, 지성의 혼재(混在)가 반복된다. 인간은 읽고, 쓰고, 말하고, 들을 필요가 없게 된다. 그저 서로의 기억을 이식하고, 공유할 뿐이다.
'기억'과 '존재'에 대한 근원적 질문이 제기되고, 이른바 기억 이식을 통한 '영생(永生)'에 대한 논란도 불거질 전망이다.
미래학자들은 약 15년 후면 현실화한다고 전망했지만, 구체적인 기술은 아직 초보적인 단계다. 우선 현재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과 플렉시블(flexible·휘는) 디스플레이 기술 등을 기반으로 한 웨어러블(wearable·입는) 디지털 디바이스 기술이 활발히 개발 중이다. 현재 시계, 안경, 가발 등 다양한 도구를 이용해 관련 기술이 발전하고 있으며, 이후 콘텍트 렌즈와 메모리칩 자가 이식 등의 방식으로 발전할 것으로 보인다.
인간의 뇌와 컴퓨터를 연결하는 과정에서 '빅데이터' 기술이 큰 관건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단순 저장기능으로서의 클라우드 컴퓨터가 아니라, 제대로 된 언어 인식과 습득 등 기술은 빅데이터 기술을 통해 가능하기 때문이다. 컴퓨터와 인간의 컨텐츠 처리 프로세스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 중 하나가 바로 빅데이터다.
미래학자 커즈와일은 "앞으로 컴퓨터가 인터넷에 있는 모든 정보를 읽고 이해해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예측했다.
미국 국방부 산하 방위고등연구계획국은 뇌 손상 치료 장치를 병사들의 두뇌에 이식하는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 뇌손상 군인들을 돕기 위한 것인데, 일종의 탐침을 두뇌에 이식한 뒤 조직을 자극해 기억을 되살린다는 것이다.
지난해 5월 미국 연구진은 "인간의 두뇌에 메모리칩을 이식하는 연구를 진행 중이며, 10년 안에 상용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CNN 등에 따르면, 서던캘리포니아대(USC)와 웨이크포레스트대 등의 신경외과전문가들은 쥐와 원숭이를 대상으로 실리콘칩에서 발생하는 전극의 신호로 일부 기억을 복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뇌에서 기억이 어떻게 형성·유지되는지를 파악한 뒤, 이 과정을 응용해 뇌의 메시지를 복제·재생산할 수 있는 메모리칩을 만든다는 논리다.
'가짜 기억(false memory)'을 만들어내는 기술도 등장했다. 지난해 7월 미국과 일본 공동연구진은 쥐의 뇌 해마에 가짜 기억을 심는 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1987년 노벨생리의학상을 탄 도네가와 스스무(利根川進) 교수가 이끄는 일본 이화학연구소(RIKEN)·미국 MIT 공동 설립 신경회로유전학센터 연구팀은 광(光) 유전학을 이용해 가짜 기억을 만들어 유전자 조작을 통해 뇌 활동을 제어한다. 쥐의 기억과 인간의 기억은 다르다는 지적도 있지만, 앞으로 인간 기억 조작과 이식에 큰 이론적 기반이 될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에선 이른바 '아바타 프로젝트'까지 나왔다. 뇌를 이식해 불멸영생에 도전한다는 얘기다.
러시아 재벌인 드미트리 이츠보프는 전세계 기업을 상대로 로봇에 뇌를 이식하는 프로젝트 투자 제안을 했다. 내외신이 보도한 그의 프로젝트 계획은 이렇다.
2015년에서 2020년까지, 사람의 뇌파로 로봇을 조정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든다. 2020년부터 2025년까지 사람의 뇌를 이식할 수 있는 아바타를 만든다. 2030년에서 2035년까지 인공두뇌를 가진 아바타를 만들고 여기에 인간의 개성과 의식을 이식한다. 2040년에서 2045년까지 홀로그램 아바타, 즉 불멸의 존재를 완성한다.
심하게 터무니없는 얘기 같지만, 미래학자들의 전망과 현재 연구 수준으로 볼 때 허황된 꿈으로만 볼 수 없는 상황이다.
두뇌를 이식받으려는 사람이 1만 달러짜리 건축가 두뇌와 10만 달러짜리 정치인의 두뇌를 두고 후자를 선택한다는 우스개가 있다. "거의 사용되지 않아서"란 이유인데, 두뇌 전체를 이식하는 것이 아니라, 저장된 기억과 콘텐츠를 다른 뇌로 전자적 주입이 가능한 시대가 온다면, 말 그대로 기억의 '품질'에 따라 가격이 다르게 책정될지도 모른다.◎
- 2014년 5월 쓴 글. 최근 알파고-이세돌 경기를 보다가 2년만에 다시 떠오른 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