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도서국 14개국 르포] ② 팔라우, 급성장하는 태평양의 新부국
에메랄드빛 바다와 행복지수의 낙원을 체감하기도 전에 엉뚱한 물음이 떠올랐다. 팔라우 코로르(Koror) 공항에서 긴 여정을 막 시작할 때였다. 눈앞에 보이는 바다색 바탕의 노란색 원은 일장기를 닮은 듯 보였다. 1980년에 소개된 국기를 두고 한 연구자는 "일본 일장기에 대한 경의를 표하고자 중심에서 어긋나게 했다는 설이 있다"고 했다.
믿기 어려운 설이라 3일간의 팔라우 일정 중 섬 곳곳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이유를 물었다. 한쪽으로 치우친 사실은 모두 알고 있었지만, 그 이유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었다. '대통령 인터뷰 때 직접 물어봐야 하나' 생각할 때쯤, 뜻밖의 장소에서 답이 나왔다. 벨라우(Belau) 국립 박물관 한편에 국기에 대한 정보가 있었다. 답은 허무했다. 바람에 휘날릴 때 가운데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함이었다.
'말도 안 되는' 답 속에 태평양 섬나라의 본질이 담겨 있다. 대양 한가운데 사는 그네들의 이해는 이른바 문명과 자본의 논리 속에 교육받고 성장한 '우리의 상식'과 많이 달랐다. 그들이 사회주의적 공동체로 산다든가 그들의 삶이 우리보다 우월하다는 뜻은 아니다. 팔라우부터 시작한 태평양 여정은 가까우면서도 먼 문명의 간극(間隙)을 채워나가는 과정이었다.
팔라우는 적도 부근인 북위 7도에 자리 잡은 작은 섬나라다. 8개의 주요 섬과 250여 개의 작은 섬으로 구성된 국가의 면적은 약 459㎢로, 강화도보다 조금 더 크고 제주도의 4분의 1쯤 된다. 세계에서 196번째 크기의 '땅'에 약 2만명이 살고 있다. 위키피디아(Wikipedia) 기준으로 세계 242개국 중 224번째 인구 규모다. 팔라우의 뒤를 잇는 18개 국가 중 독립국은 투발루, 나우루, 바티칸 3개국이 전부다.
2만명 중 6000명은 외국인들이며, 1만4000명이 현지 출신 국민이다. 한국인을 비롯한 외국인은 3개월 이상 체류하거나 현지사업을 하려면 상당히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미국 또는 일본 출신은 팔라우 국민과 거의 비슷한 조건으로 체류할 수 있다.
팔라우 코로르 지역에서 바라본 태평양. ⓒ김정우
우연히 만난 대통령 부인
팔라우의 국민소득은 약 9000달러에 이른다. 태평양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중 하나다. 주수입원은 미국·일본의 원조와 관광수입이다. 연간 10만명이 넘는 외국인이 팔라우를 방문하며, 그중 1만5000명(2011년 기준) 이상이 한국인이다. 매년 급증해 최근엔 2만명에 육박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약 3만7000여 명을 보내는 일본과 타이완 다음으로 많은 수치다. 기자 일행이 탄 국적기 승객 대부분은 주말에 결혼식을 올린 신혼부부들이었다.
공항에 내려서는 순간부터 소국(小國) 체험이 시작된다. 관광객이 많이 찾는 팔라우 공항은 인천공항에 익숙한 한국인에겐 시골 버스정류장 수준이지만, 다른 마이크로네시아 섬들에 비해 상당히 큰 편이다. 한국인 신혼부부와 인천을 경유한 유럽인들이 입국 심사를 위해 외국인 심사대 앞에 줄을 길게 섰다. 내국인 심사대를 통과한 이는 단 한 명이었다. 그는 심사관들과 잘 아는 사이인 듯 가벼운 인사와 함께 곧바로 통과했다. 인구 2만명인 나라에서 해외를 다니는 사람이 천여 명에 불과한 데다 대부분 공무원 신분인 것을 감안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기자 일행이 묵은 호텔은 타이완인이 운영하는 '팔라시아'였다. 마이크로네시아 전체에서 최고층인 7층 높이를 자랑하는 곳이다. 호텔 앞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10분 정도 운전하면 관공서, 학교, 상점 등이 즐비한 코로르 중심가를 통과할 수 있다. 팔라우의 도로는 대부분 왕복 2차선이지만, 중심가는 3차선이다. 가운데 차선은 좌회전이나 유턴이 필요한 차량이 양쪽에서 모두 이용할 수 있다. 섬사람들의 융통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팔라우 여정은 우연의 연속이었다. 취재 첫날 팔라우 국제산호초센터로 찾아가던 중 길을 잃었다. 멀리 건물은 보이는데 들어가는 길을 못 찾아 헤매다 마침 집에서 나와 차를 타려던 여성에게 길을 물었다. 그녀는 차를 타며 자신을 따라오라고 했다. 알고 보니 우리가 찾아가려던 센터의 직원이었다.
저녁에 찾은 인도 식당에서는 작년 12월 임기를 마친 존슨 토리비옹(Toribiong) 전(前) 대통령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건너편 테이블엔 태평양 도서국의 현지 방송국인 OTV의 수석 프로듀서가 일행과 함께 식사 중이었다.
인터뷰를 요청하기 위해 캐시 버그(Berg) 프로듀서와 대화를 나누던 중 옆에 앉은 여성이 주(駐)UN 대사 스튜어트 벡(Beck) 씨의 부인임을 알게 됐다. 버그 프로듀서와 마주앉은 이는 자신을 평범한 주부(housewife)라고 소개했지만, 알고 보니 현재 대통령 부인이었다. 영부인 데비 레멩게사우(Remengesau) 씨에게 다음 날 오전에 대통령 인터뷰가 있다고 하자, 그는 '환경'에 대해 질문하면 좋겠다고 '힌트'를 줬다.
팔라우 중심가 도로는 3차선인데, 가운데 차선은 좌회전이나 유턴 시 이용하는 차선이다. 흰색 건물은 태평양 도서국 최고층(7층)을 자랑하는 팔라시아호텔. ⓒ김정우
14개국 연대로 국제기구에서 영향력 행사
'섬나라의 우연'은 팔라우를 떠나 마이크로네시아연방과 마셜제도에서도 이어졌다. 축에서 태평양해양연구센터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주 상원의원 알란소 촐리메이(Cholymay)는 다음 날 폰페이에서 만날 예정이었던 마이크로네시아연방 모리(Mori) 대통령이 현재 건강에 문제가 있어 하와이에 갔다고 알려줬다. 그는 축 출신인 대통령과 전날 같은 비행기를 타 이 사실을 알 수 있었다고 했다. 촐리메이 의원은 대신 부통령과 외교장관 인터뷰를 직접 주선했다.
폰페이에선 일요일 점심을 먹기 위해 찾은 중식당에서 '일'이 벌어졌다. 기자 일행 외엔 현지인으로 보이는 부부가 유일한 손님이었는데, 식당 종업원과 대화 중 그들이 부통령 부부란 사실을 알게 됐다. 부통령 알릭(Alik) 씨는 기자 일행을 환영하며 월요일 인터뷰 때 보자고 인사했다.
폰페이공항에선 마셜제도의 에너지 전문가 알란 러셀(Russell) 씨와 마주쳤다. 그는 기자 일행 중 한 명인 김선욱(金善郁) 연구원이 일주일 전 팔라우 호텔 로비에서 우연히 인사한 사람이었다. '완행 비행기'에 동승한 그는 마주로(Majuro)섬에서 다시 보자며 헤어졌다. 따로 만날 시각과 장소를 정하지 않았지만, 2일 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우연이었다.
좁은 섬에서 쉽게 마주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무시해선 안 된다. 우리와 동등하게 국제기구에서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엘리트 정치인들의 자부심이 높은 편이다. 각자의 1표는 큰 힘이 없지만, 14표가 동시에 영향력을 행사할 경우 중요한 의제의 방향이 바뀔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우 UN 안전보장이사회 비상임이사국 진출과 제18차 UN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 유치 과정에서 태평양 14개 도서국 전체의 지지를 확보한 바 있다. 지난해 열린 여수세계박람회(EXPO) 유치에도 이들 도서국의 지지가 한몫했다.
현재 팔라우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가는 미국이다. 팔라우는 1994년부터 2009년까지 자유연합협정(Compact of Free Association)에 따라 15년간 총 8억 달러의 직접 원조를 미국으로부터 받았다. GDP의 20%가 미국 원조금인 팔라우는 대미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현재 GDP의 절반을 차지하는 관광산업과 여러 산업기반을 재구축해 국가재정기반 확대를 시도하고 있다.
팔라우의 현지 신문. 북한 핵위협에 대한 기사가 보인다. ⓒ김정우
'아이고 다리'와 징용의 상흔
팔라우에서의 영향력을 비교하려면 상주공관을 보면 된다. 팔라우에 대사관을 설치한 국가는 미국, 일본, 타이완, 필리핀 총 4개국이다. 필리핀의 경우 자국 출신 주민이 많고 지리적으로 가까워 대사관을 설치했다. 미국, 일본, 타이완은 경제원조와 외교적 협력을 통해 팔라우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한국은 현재 주(駐)필리핀대사관에서 관할 업무를 수행한다.
교민 100여 명에 연간 2만명이 방문하는 급성장 관광지임에도 영사관의 관광객 보호 시스템이 없어 교민들의 불만이 높은 편이다. 한국인의 경우 미국인이나 일본인과 달리 장기체류가 쉽지 않고 교민끼리의 사기사건도 빈번해 불법체류자가 속출하고 있다. 현지에서 레저사업을 하는 교민 제임스 정(Jung) 씨는 "최근 팔라우를 비롯한 태평양 도서국에 한국인의 방문이 급증하고 있는데, 각종 사건·사고가 발생해도 해결할 방법이 없다"며 "국가의 위상이 높아진 만큼, 관광객과 교민에 대한 체계적인 보호 시스템이 시급하다"고 했다.
팔라우는 한국과 비슷한 식민지 역사를 가졌지만, 독립 스토리는 완전히 다르다. 1922년 일제는 당시 팔라우의 수도 코로르에 해군기지와 남양청(南洋廳)을 설치하고 이른바 '남양군도(南洋群島)'로 불린 태평양 도서국의 군사, 행정, 사법업무를 총괄했다.
일본의 지배를 받자 한인들의 이주도 시작됐다. 1936년경 10대의 어린 위안부를 시작으로, 강제징용된 노무자와 군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들은 진지구축이나 기반시설 공사에 투입됐다. 코로르 동쪽 요로(要路)에 자리한 '아이고 다리'는 혹독한 노동에 시달린 징용자들이 '아이고, 아이고'를 연발해 원주민이 지은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전쟁 후 2만5000여 명의 한인이 남양군도에서 한국으로 귀환했으며, 그중 팔라우 귀환자가 3000여 명에 이르렀다. 전쟁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현장에서 실종·사망했는지는 정확한 통계가 남아 있지 않다.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패망하면서 1946년부터 1985년까지 미국의 신탁통치를 받았다. 1986년 그들의 독립은 '숭고한 투쟁'의 결과가 아니라, 미국의 전략적 결정 때문이었다. 팔라우와 마셜제도는 독립 당시 모두 마이크로네시아연방에 속해 있었다. 현지에서 만난 팔라우 주민들은 '독립'에 대한 자부심, 또는 '식민지배'에 대한 치욕을 잘 알지 못했다. 1000년 이상을 가족과 부족 중심으로 살아온 그들에게 '국가'의 지위는 큰 관심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외적으론 정부의 외교적 활동이 중요하지만, 국내에선 섬 또는 주로 구성된 지역의 리더나 부족장 중심으로 움직인다.
다리 벌린 여성 조각상
팔라우 에피슨(Etpison) 박물관에 들어서면 다리를 180도 각도로 벌린 여성 조각상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신성화한 여자의 성(性)과 다산(多産)을 상징하는 것으로, 비슷한 모양의 조각상과 그림을 팔라우의 전통가옥, 관공서, 상점, 박물관 등 섬 곳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팔라우는 전통적으로 엄격한 모계사회다. 부족의 우두머리를 정할 때 여자들이 의사결정권을 갖고 있다. 장녀의 장남이 족장이 되는 식인데, 이러한 후계자들을 '왕자' 또는 '공주'라고 칭하기도 한다. 여성이 토지, 자금, 추장선택권 등을 보유하고 교육, 가문보전 등에 대한 책임을 진다.
팔라우의 사회적 조직 구조는 다른 지역보다 상당히 복잡하고 고차원적 구조로 돼 있다. 어머니의 남자형제들은 자식을 보호하고 혈육의 아버지와 비슷한 역할을 수행한다. 남자들이 추장으로서 마을을 지배한다고 하지만, 추장을 선택하고 폐지하는 것은 여성의 몫이다. 모계혈통을 기반으로 한 마을공동체는 2개의 정치적 그룹으로 나뉘는데, 남자들로 이뤄진 10계급의 부족대표모임(council of chiefs)과 토지와 돈에 대한 제어(control) 역할을 하는 여성 모임이다. 이러한 구조는 장례식, 결혼, 상속, 계급 계승 등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이러한 사회구조의 기원은 초기 정착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환초 안에서 대부분 식량을 충당할 수 있었던 이들의 조상은 먼 바다로 나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외양(外洋) 항해 기술은 퇴화했으며, 남자들은 근해(近海)에 충실한 어부(漁夫) 또는 해군(海軍)이 됐다.
섬에서 땅을 일구는 것은 여성의 몫이었다. 이들의 농경 활동은 식량의 규칙적인 공급을 확고하게 다졌고, 부족사회에서 정치적 입장을 높였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여성이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는 모계사회가 형성됐다.
모계사회의 특성은 5대 대통령을 역임한 쿠니오 나카무라(Nakamura) 씨의 삶에서도 투영된다. 팔라우인 추장 딸과 일본인 사이에서 출생한 그는 일본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다. 그의 일가족은 그가 두 살 때 일본의 패망으로 도일(渡日)했다가 얼마 후 다시 팔라우로 복귀했다. 모계사회 중심제 때문에 자녀의 귀향은 허가됐지만, 그의 아버지는 거주허가를 받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가 일본어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이유다. 1970년 그는 아이멜리크(Aimeliik)주의 유력 부족장의 딸과 결혼하는데, 훗날 강력한 정치적 배경이 됐다.
팔라우 섬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다리 벌린 여성 조각상. 신성화한 여자의 성(性)과 다산(多産), 그리고 엄격한 모계사회를 상징한다. ⓒ김정우
'식민'에서 '원조'로
팔라우는 총 16개 주로 구성돼 있다. 인구의 절반 이상인 약 1만2000명의 주민이 팔라우 중심지인 코로르주에 산다. 수도 응게룰무드(Ngerulmud)는 2006년경 코로르주에서 멜레케오크(Melekeok)주로 이전했다. 코로르 도심에서 자동차로 40분 정도 가면 미국 국회의사당과 비슷한 모습의 국회의사당과 대통령궁 신청사를 볼 수 있다.
코로르와 2700여 명이 거주하는 아이라이(Airai)주를 제외한 14개 주의 인구는 대부분 수백 명 정도다. 팔라우 남쪽 끝에 자리 잡은 하토호베이(Hatohobei)주는 총 인구가 44명이다. 이 섬의 경우 전력은 개별 발전기와 태양광을 활용하며, 교육은 유치원부터 9학년(중3)까지 가르치는 작은 학교와 도서관이 전부다. 물품은 하나뿐인 상점에서 구매할 수 있으며, 대부분 생계는 바다와 섬에서 스스로 해결한다.
서구 문명이 들어오기 전까지, 팔라우 사람들은 재화 축적의 개념이 없었다. 연중(年中) 28도가 넘는 기후에 사실상 무한한 열매와 생선이 있어 작물을 재배하거나 모아 놓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 피를 이어받아서인지 현지인 대부분에겐 현대적 경제개념이 쉽게 읽히지 않는다.
문명과 함께 시작된 '식민(植民)의 역사'는 전쟁이 끝난 지금도 '원조'와 '협력'이란 이름으로 이어지고 있다. 태평양 도서국에선 원조 자금을 쏟아붓는 만큼 상대국에 대한 긍정적 인식이 높아진다. 패망 후 섬을 떠났던 일본은 어느새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완벽하게 복귀했다.
일본은 1990년대부터 정부 차원에서 은퇴 후 팔라우 등 태평양 도서국으로의 이민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적극 개발해 인적자원 및 경제적 원조를 추진했다. 그 결과 현재 320명의 일본인이 팔라우에 거주하고 있으며,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 장기간 지속됐던 일본 경기 침체로 현재 타이완과 중국계 자본이 대거 팔라우에 투자됐다.
팔라우는 전통적으로 타이완의 투자가 많은 곳이나 최근 중국계 투자가들이 진출 기미를 보인다는 소문이 교민사회 등을 통해 확산되고 있다. 또 아베(安倍) 정권 들어 일본 경기가 회복하고 있다는 뉴스가 전해지면서, 팔라우의 일본·타이완·중국과의 관계에 새로운 전환점이 될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팔라우를 비롯한 마이크로네시아 섬나라들은 미국과의 자유연합협정에 따라 미국 내 취업 및 교육 지원을 받는다. 특히 섬나라 고등학교에서 미국 대학에 진학할 경우 다양한 혜택을 받게 되는데, 눈치 빠른 한국 학부모들은 이미 자녀들을 팔라우에 유학 보냈다. 현재 약 30명의 한국인 고교생이 유학 중이다. '국가의 정보력'보다 '엄마의 교육열'이 앞선 사례다.
팔라우 국회의사당 전경. 정면에 타이완이 청사 건설을 지원했다는 기념비가 보인다. ⓒ김정우
新태평양 교두보
한국은 현재 다양한 분야에서 팔라우에 진출을 시도하고 있다. 팔라우 최대 건설공사로 꼽히는 바벨다오브(Babeldaob)섬 순환도로는 대우건설이 2007년 완공했다. 미국 자본으로 1999년 시작된 이 공사로 총연장 85km의 왕복 2차선 도로가 깔렸다. 정부 차원에서는 외빈용 의전차량 지원과 연수생 초청 행사 등을 실시하고 있지만,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선 상당히 적은 규모다.
인기 관광지로 부각되면서 현지 관광산업이 크게 성장하고 있으며, 각종 연구 프로젝트도 진행되고 있다. 한국해양과학기술원은 팔라우국제산호초센터(PICRC)와 연계해 인근 해역에서 연구 프로젝트를 8월 중 실시할 계획이다.
팔라우국제산호초센터의 임낭 골부(Golbuu) 대표는 "팔라우는 각종 연구에 대한 기반이 약해 직접 연구를 수행하기 어렵다"며 "미국, 일본, 호주, 타이완 등 주요국에서 온 많은 연구진이 의미 있는 연구성과를 올리고 있으며, 한국의 연구 활동도 적극 지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팔라우국제산호초센터의 임낭 골부 대표(오른쪽)와 태평양해양연구센터의 박흥식 센터장이 해양연구 프로젝트에 대해 논의 중이다. ⓒ김정우
골부 대표와 연구장비 및 선박에 대해 논의한 한국해양과학기술원의 이상훈(李相勳) 박사는 "한국은 그동안 팔라우와 같은 섬나라에 큰 관심을 갖지 못했다"며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해양 연구의 전진기지로서 태평양 도서국은 큰 기회의 땅"이라고 설명했다.
다른 태평양 도서국들과 달리, 팔라우는 현재 빠른 속도로 성장·발전하고 있다. 박흥식 태평양해양연구센터 센터장은 "2년 전 방문했던 모습과 지금의 팔라우는 완전히 달라 보인다"며 "어느 정도 과성장한 모습도 보이지만, 관광객이 급증하는 등 한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지금이야말로 한국이 신(新) 태평양 교두보를 세울 절호의 기회"라고 분석했다.
박근혜(朴槿惠) 대통령은 여고 시절인 1968년 부모와 함께 사모아를 방문해 우리나라 원양어선단을 직접 둘러본 바 있다. 당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자신과 가족을 영접하러 공항에 나온 사모아 총독에게 딸을 소개하는 사진이 최근 공개됐다.
지난 노무현(盧武鉉)·이명박(李明博) 정부 시절 남미와 아프리카에 집중됐던 현장외교가 이제 태평양으로 향해야 한다는 전망이 조심스럽게 나오는 지금, 박 대통령의 태평양 도서국과의 각별한 인연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한국해양과학기술원 이상훈 박사. ⓒ김정우
[인터뷰] 토머스 에상 레멩게사우 팔라우 대통령
"팔라우는 낙원이 아니다"
토머스 에상 레멩게사우(Remen-gesau) 대통령은 팔라우의 대표적 정치 엘리트다. 미국 미시간(Michigan)주에서 유학했으며, 1984년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아버지도 과거 대통령을 두 차례 지냈다. 2000년과 2004년 대선에서 승리해 2001년부터 2009년까지 대통령을 연임한 바 있다. 지난해 11월 대선에서 다시 이겨 올해 초 세 번째 대통령 임기를 시작했다.
토머스 에상 레멩게사우 팔라우 대통령 ⓒ김정우
—국가의 대표로서 팔라우를 간단하게 소개한다면.
"우리 선조는 별과 바람에 카누를 맡겨 거대한 바다를 건너 이 섬까지 왔습니다. 그들의 탐험 기술을 지금도 유지하고 있죠. 팔라우는 자유민주주의와 인권 등 현재적 가치와 우리 문화와 같은 전통적 가치 모두 중요하게 여깁니다. 민주주의가 발달하면서 전통적 가치도 잘 보존된 한국은 우리에게 아주 좋은 모델입니다."
—한국에 몇 차례 방문했던 것으로 아는데, 어떤 점이 가장 인상 깊었습니까.
"한국인 모두가 열심히, 그리고 빨리 일하는 모습에 감명을 많이 받았습니다. 특히 다른 나라보다 IT기술과 교육 측면에서 발달한 부분이 인상에 남았죠. 경제발전을 이뤄 국민이 나라에 대한 애국심과 성취감을 갖게 되는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팔라우는 일제강점기를 겪은 한국과 공통된 역사적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은 우리와는 조금 다른 역사적 인식을 가진 듯합니다.
"역사적 가치는 과거 실수에서 배우고 극복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한국과 팔라우는 2차 세계대전 중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은 아픔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좋은 점과 나쁜 점이 공존한다고 봅니다. 징용자들이 와서 건설 기반을 닦은 것은 좋은 영향을 줬지만, 전반적으론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전쟁을 통해 충격적인 기억을 많이 가지게 된 것은 분명 악영향이 됐죠. 과거가 그대로 현재가 되라는 법은 없습니다. 미국과 일본은 전쟁까지 했지만, 지금은 서로 도움을 주고받죠. 한국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과거와 현재는 분명 다르죠."
토머스 에상 레멩게사우 팔라우 대통령(오른쪽)과의 인터뷰 모습. 가운데 말하는 이는 한국해양과학기술원 김선욱 연구원.
"후손 위한 지속가능 환경보전"
—해외 순방 중 경험한 팔라우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무엇입니까.
"좋은 오해와 나쁜 오해가 있는데, 좋은 오해는 이곳이 낙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웃음). 열대 태평양에 자리한 국민 모두가 행복할 거라 생각하지만, 이 작은 나라에서도 정치적, 경제적 문제는 항상 존재합니다. 큰 나라 입장에선 작은 나라의 문제가 그리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겠지만, 지금 우리가 겪는 '작은 문제들'이 언젠간 큰 나라는 물론 지구 전체에까지 영향을 끼칠 수 있죠. 지구온난화와 환경 문제가 그 대표적 사례입니다. 지금은 작은 문제로 보이겠지만, 언젠간 큰 문제가 될 겁니다."
—이른바 '태평양 패권'을 두고 미·중 G2의 대립이 심화된다는 보도가 외신을 통해 자주 등장합니다.
"국가의 수장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의 생존과 안전입니다. 나라의 자유와 안보가 먼저 고려돼야 합니다. 두 대국이 제한된 자원을 가지고 경쟁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 구도는 팔라우뿐 아니라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 모든 국가가 경험하는 현실이죠. 21세기는 모든 국가가 서로 도움을 주고 교류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좋은 관계가 지속되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겠죠."
—팔라우에 환경이란 어떤 의미입니까.
"환경은 경제이고, 경제는 환경입니다. 또 문화와도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죠. 이곳에서 가장 큰 딜레마는 경제발전과 환경보호를 어떻게 조절하느냐는 것입니다. 현재 개발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지속가능성'인데, 환경을 이용하면서도 파괴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죠. 그래서 한국과 일본 등 인접국들과 함께 지구온난화, 해수면 상승, 해양자원 고갈 등의 주제에 대해 깊이 있는 논의를 해야 한다고 봅니다. 팔라우는 분명 자원에 한계가 있는 국가입니다. 환경에 대한 실수는 바로잡기 어렵죠."
—대통령으로서 이번에 시작한 새 임기의 비전은 무엇입니까.
"가장 큰 비전은 지속가능한 환경을 후손을 위해 보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이 자연은 과거 조상에게 그저 물려받은 것이 아닙니다. 미래지향적 시각으로 후손에게 보전해 줘야 하죠. 경제적, 기술적인 발전도 중요하지만, 환경보호와 균형을 맞춰야 합니다. 이를 두고 국가 간 다양한 협력이 이뤄져야 한다고 봅니다. 환경에 있어서 세계는 한 가족이죠."
레멩게사우 대통령은 인터뷰 중 '김치', '아리랑' 등 한국어를 언급하며 "수준 높은 여행자이자 방문객인 한국인을 팔라우는 언제든 환영한다"고 강조했다.⊙
[인터뷰] 캐시 버그 OTV 수석프로듀서
"마이크로네시아에 언론자유를"
캐시 버그 OTV 수석프로듀서 ⓒ김정우
OTV는 마이크로네시아를 비롯한 태평양 27개국을 상대로 한 현지 방송국이다. 미국 변호사인 캐시 버그와 영화감독 제프리 바라브(Barabe)에 의해 2006년 설립됐다. 주로 각 지역의 이슈를 다루며, 현재 20여 명의 스태프가 24시간 방송을 송출하고 있다.
미국 정부 파견 변호사로 처음 섬을 밟은 버그는 "태평양의 아름다움과 역동적인 삶을 도서국들과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방송국을 설립했다"고 밝혔다.
"원래 본업은 법률이고 영화 쪽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섬에 와서 보니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공유할 방법이 없었어요. 도서국 주민들은 서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제대로 된 섬나라를 세상에 보여주고자 방송국을 설립하게 됐습니다."
그는 미국 또는 전 세계인이 마이크로네시아와 태평양 도서국에 대해 "작은 섬에 사는 사람들은 상당히 자유롭고 심심한 삶을 살 것"이란 오해를 갖고 있다고 했다. 소규모 도서국에도 분명 정치적 이슈가 있고 사건과 사고가 빈번하다는 것이다.
"해변에 누워서 책만 보는 곳이 아닙니다. 미국이나 한국에서 열정에 비해 큰 기회를 얻지 못했다면, 태평양에 와 보시길 권합니다. 이곳은 능력과 열정만 있다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이니까요."
버그는 태평양 패권을 두고 벌어지고 있는 미·중 양국의 경쟁구도에 대해 "현재 태평양 도서국들의 정치적 입장이 상당히 중요하다"며 "껄끄러운 주제가 될 수 있지만, 그만큼 자금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만약 미국이 작은 섬나라에 연간 2억 달러를 원조하면서 국제기구에서 자신의 편에 서 달라고 하면 이를 거절할 나라가 얼마나 될까요. 이곳은 기본적으로 자국의 이익을 다른 국가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한국과 일본같이 경제적으로 독립적이지 못하죠. 돈을 얼마나 주느냐에 따라 입장이 바뀝니다. 이른바 '수표외교(checkbook diplomacy)'라고 하죠."
중국과 수교한 마이크로네시아연방과 달리, 팔라우는 타이완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버그는 "팔라우는 상대적으로 중국의 영향을 크게 받지는 않아 미·중 양국의 대립을 직접 느낄 일은 없다"며 "패권에 대한 생각과 느낌은 태평양 도서국마다 온도차가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을 하면서 가장 기쁜 것은 마이크로네시아와 태평양 도서국 사람들이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이죠. 태평양에 사는 모두가 진정한 '언론자유'를 누리는 그날까지 이 일을 멈추지 않을 계획입니다."
월간조선 2013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