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북한

영혼 없는 공무원과 '신내림 서기관'

김정우 기자 2020. 12. 21.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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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년 1월 국정홍보처의 대통령 인수위 업무보고. 이날 "영혼이 없는 공무원"이란 발언이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 조선일보 DB

 

2008년 1월, 이명박 정부 대통령직 인수위가 국정홍보처로부터 업무보고를 받았다.

노무현 정부가 임기말 밀어붙인 '취재선진화'란 이름의 '기자실 폐쇄' 등 방안이 쟁점이었다.

대선 압승으로 기세가 등등한 MB 인수위는 '기자실 대못질'을 진두지휘한 홍보처를 폐지하고 각 부처 기자실을 복원하겠다는 입장이었고, 홍보처는 "대통령 중심제에서 국정홍보는 어쩔 수 없다"는 논리로 부처의 기능 존속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버텼다고 한다.

한쪽이 '점령군 행세'를 했는지, 아니면 다른 한쪽이 '철밥통 방어'를 했는지는 12년이 훌쩍 넘은 세월에 모두 잊힌 잡사가 됐지만, 그날 한 공무원이 남긴 어록 한 마디는 역사로 기록됐다.

"우리는 영혼이 없는 공무원이다." 

무명의 관료가 막스 베버(Weber)를 인용했다는 이 경구(警句)는 정확히 1년 만에 기획재정부 장관이 취임 후 첫 확대간부회의에서 언급할 정도로 유명세를 탔다.

2009년 1월 윤증현 기재부 장관은 "기획재정부 공무원은 자본주의·시장경제를 지키는 보루인만큼 '영혼'을 가져도 좋다"고 격려했다.

하지만 1년이 더 지난 2010년 1월, 그의 공식 발언은 "공무원은 '혼'이 없다고 그러지 않느냐"로 바뀌어 있었다.

'공무원의 혼'은 그때나 지금이나 지키기 힘들다. 정권이 두 번 더 바뀐 뒤에도 무사안일(無事安逸) 공무원의 민낯을 묘사하거나, 공복(公僕)의 숙명을 반증하는 사례로 '영혼의 부재(不在)'가 인용된다. 때로는 권력에 저항하는 반골(反骨)이 '실종된 영혼을 되찾는다'는 명분을 내세우기도 한다.

YS 시대 때 화려하게 등장한 '복지부동(伏地不動)'이란 '나름의 신조어'가 10여년 만에 '영혼 없다'는 수식어로 사실상 대체된 셈이다.

2017년 도종환 문체부 장관은 취임사에서 "영혼이 있는 공무원이 돼라"고 당부했고, 민주당 기동민 의원은 일명 '영혼 없는 공무원 방지법'이라며 국가공무원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마치 온 국민이 공무원의 영혼 찾기에 나선 것같은 진풍경이 벌어졌다.

어떤 면에선 '그 영혼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대통령까지 공무원의 '영혼 독립'에 각별히 신경을 썼을 정도다.

적폐청산을 국시(國是)로 삼을 것 같았던 그는 취임 후 첫 부처별 업무보고를 받던 날 관료들을 향해 "영혼 없는 공직자가 되지 마라"고 준엄하게 훈시했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정부는 공무원의 영혼을 '압수'하고, 공무원들은 자신들의 영혼을 밤늦게 '삭제'한다. 한편에선 '직무정지' 당한 영혼이 있는가 하면, 다른 쪽에선 영혼이 '전면 재검토'의 대상이 된다.

"직무를 수행할 때 소속 상관의 직무상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복종의 의무'를 법적으로 짊어진 이들에게 영혼과 직(職)을 걸고 도전할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사라진 '영혼'의 자리엔 언제나 '정치'란 괴물이 나타나 주인행세를 한다. 머릿속에 표계산만 가득한 정치꾼들은 자신의 다음 선거 이해관계를 두고 주판알을 굴린다. 국익이나 공익은 안중에도 없다.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뜯어먹을 예산과 표를 찾아 어슬렁거리며 '공무원의 영혼 가출'을 부추긴다.

지난해 말 감사원의 조사 과정에서 PC에서 원전 관련 문건 444개를 삭제한 산업통상자원부의 한 서기관이 '감사 정보를 미리 안 것 아니냐'는 의혹에 대해 "나도 내가 신내림을 받은 것 같았다"는 답을 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진위를 떠나 정부의 '탈원전 정책' 와중에 나온 무지막지한 어록에 법조계에선 "믿는 구석이 있지 않고선 할 수 없는 황당한 진술"이란 반응이 나왔다고 한다.

압수되고 삭제되고 직무정지 당한 공무원들의 영혼에 '신내림'(降神)이란 영험한 능력이 채워진 셈이다. "이제 '신(神)'의 정체를 밝히면 된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탈(脫)영혼 시대다. 어느 누구도 탓할 수 없는 구조적 그늘에 국민의 영혼만 더욱 피폐해진다. 공무원들의 잃어버린 영혼을 끌어모은 '영끌' 지도자는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영혼을 악마에게 파는 '파우스트 공무원'만 현존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 / 김정우 기자 (20.12.09. 취재후Talk)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448&aid=0000313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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