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북한

문재인-김정은, '언택트' 남북화상정상회담 가능할까

김정우 기자 2021. 1. 13.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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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월 해양수산부 공무원이 서해상에서 북한군에 피살된 사건이 발생했다.

북한군이 비무장 공무원을 상대로 사격을 가하거나 시신을 훼손했다는 정보와 함께 '실종자가 월북한 것으로 판단한다'는 정부 발표가 있었다.

북한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이례적 사과'가 담긴 통지문을 청와대에 보냈고, 문재인 대통령은 "각별한 의미로 받아들인다"며 화답했다.

그러면서 "비극적 사건이 사건으로만 끝나지 않고 대화와 협력의 기회로 만들고, 남북관계를 진전시키는 계기로 반전되길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통일·북한 전문가나 남북관계를 오랫동안 취재해온 기자들은 도발이나 충돌이 어느 정도 수위를 넘을 경우 '다음 수순'을 미리 대비할 수밖에 없다. 극단적 도발이 급진적 대화로 급변하는 패턴을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2015년 목함지뢰 폭파 사건이 우리 군의 대북확성기 방송 재개와 북한의 서부전선 포격도발로 이어지면서 남북 긴장이 최고조에 올랐을 때 '판문점 고위급 접촉'이 시작됐다. 8년 만에 이뤄진 장관급 이상 남북 회담이었다.

2017년 트럼프 대통령의 이른바 '화염과 분노'(fire and fury) 대북 압박에 북한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로 평가되는 화성-15형을 발사하며 맞섰다. 강대강 긴장 국면도 결국 싱가포르 정상회담으로 일단락됐다. 사상 첫 미북정상회담이었다.

지난해 가을, 여권에선 또 한 번 그런 '극적 타결'을 기대하는 기류가 보였다. 여권에선 '남북 공동조사'란 명목으로 대화 재개를 모색한다는 주장이 나왔고, 정부는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6일 청와대에서 온라인 영상회의 형식으로 열린 2021 신년인사회에서 발언하는 모습 / 사진: 청와대


■ 평양도 백두산도 '기시감'

'대화의 방식'을 놓고 고민이 시작된 시점도 그때쯤이었다. '과연 이런 와중에 남북대화가 되겠느냐'고 묻는 정치권 인사들이 꽤 많았다. 그때마다 "대화의 방식은 다양하고, 정부는 확고한 의지를 가진 것 같다"고 답을 하면서도, '과연 어떤 방식이 있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현 정부와 여권 입장에선 '김정은의 답방'보다 좋은 시나리오는 없다. 하지만 북한 최고권력자의 서울 방문은 현실적 난관이 많아 '기적에 가까운 일'로 평가된다.

그 외 방식의 남북정상회담은 이미 국민에게 기시감이 드는 상황이다. 판문점은 물론 평양에 백두산까지 두 정상이 함께 오른 이력이 있는데다 이미 비핵화를 약속하는 선언과 군사합의까지 한 마당에 더 이상 새로울 게 없는 '이벤트'로 끝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금강산 정상회담'을 떠올렸고, 다른 이는 '한라산 방문'을 포기하지 않았다. 도쿄올림픽 계기 남북미일 정상회담이 제안됐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그 즈음 탁현민 청와대 의전비서관의 SNS가 눈에 띄었다. 비대면 화상정상회담의 새로운 포맷을 만들기 위해 시도된 세트를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LED와 LG 롤러블 TV를 이용한 영상 등을 활용해 '다들 놀라워하고 관심을 보였으며 이 시스템을 참고할만하다는 점을 인정받았다'고 자평했다. 사진으로만 봐도 굉장히 잘 연출된 회담 세트장이었다.

탁현민 청와대 의전비서관이 지난해 11월 SNS에 올린 화상정상회의 세트장 사진. / 탁현민 비서관 페이스북


'남북화상정상회담엔 어떨까.'

문득 떠오른 생각이었다. 코로나 팬데믹 시대에 세계 각국 정상이 화상회의를 하는 마당에 북한 국무위원장이라고 예외일 필요는 없다. 실제 그런 움직임이 있을까 싶어 여권 인사 몇몇에게 물었더니 '좋은 아이디어'란 수준의 답이 돌아왔다. 야권 인사들에게 얘기하니 "4월 선거 전에 또 쇼를 하려는 것"이란 지적이 나왔다. 양측 모두 뻔한 반응이었다.

북한이 상대인 회담은 '비핵화'나 '남북 평화' 등의 목표가 분명하지만, 의도했든 안 했든 선거에도 큰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2018년 4월 남북정상회담과 6월 미북정상회담 직후 치러진 6·13지방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은 광역단체장 17곳 중 14곳을 '싹쓸이'하는 압승을 거둔 바 있다.

물론 회담 때문에 선거를 이겼다고 할 순 없지만, 여러 형태의 정상 메시지가 이어지는 자체가 여권에 호재로 작용했다는 평가와 함께, 사사건건 지나치게 트집을 잡은 야당엔 되려 악재가 됐다는 분석도 있었다.

4월 서울·부산 보궐선거를 앞두고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질 경우, 어떤 방식으로든 선거 판세에 큰 변수로 작용할 거란 전망에 이의를 제기하긴 어렵다. 다만 단순한 구도로 여당에 호재가 될지, 아니면 괜한 이벤트로 역풍의 빌미가 될지는 저마다 해석이 다르다.

여야 정치권과 정부 측 인사들을 접촉해 '남북화상정상회담' 가능성을 물어봤지만, 속시원한 대답을 내놓는 이는 없었다.

문재인 대통령 2021년 신년사 / 청와대


■ 대통령이 던진 '비대면 대화'

그러다 해를 넘기니 엉뚱한 곳에서 관련 언급이 나왔다. 11일 발표된 대통령 신년사였다.

문 대통령이 남북협력과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강조하면서 "언제든 어디서든 만나고, 비대면의 방식으로도 대화할 수 있다는 우리의 의지는 변함없다"고 천명한 것이다.

'비대면'을 두고 '핫라인 통화'와 같은 여러 해석이 나왔지만, 코로나 시대에 '비대면 대화'는 '온라인 화상'으로 보는 게 가장 합리적인 시각이다. 결국 지난해 가을 예측했던 '화상회담'에 대한 정부의 의지가 대통령의 신년사를 통해 어느 정도 확인된 셈이다.

청와대 국정상황실장 시절 특사단으로 평양을 방문해 김정은을 만나고 남북 정상 핫라인 개설을 주도했던 민주당 윤건영 의원은 대통령의 신년사가 나온 직후 "전세계의 정상회의가 화상으로 이뤄지는 시대인데, 남북이라고 안 될 게 어딨느냐"며 "비대면으로라도 하루빨리 만나 같은 목표를 어떻게 이룰지 의논해야 한다"고 힘을 실었다.

정부는 벌써 행동으로 실천하는 분위기다. 통일부는 신년사가 나온 다음날인 12일 조달청을 통해 '남북회담 영상회의실 구축 사업 추진'이란 제목의 긴급 입찰 공고를 냈다.

4억원의 예산이 배정되는 입찰 제안요청서엔 "남북회담본부 회담장 대회의실에 남북회담 영상회의실을 구축해 남북회담, 관계부처, 국내외 전문기관 간 언택트 협의 등에 활용한다"는 계획이 담겼다. 속전속결이다.

연이은 부동산 실책과 코로나 백신 논란 등으로 여론 악화를 경험한 문재인 정부 입장에선 남북화상정상회담을 통한 대화 모멘텀의 전환이 새로운 반전의 기회가 될 수 있다. 제대로 성사돼 가시적인 성과까지 거둘 경우 임기말 레임덕 대신 국정 주도권을 유지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4선 현역 의원으로 통일부를 맡은 지 벌써 반년이 된 이인영 장관 입장에서도 다음 정치행보를 위해선 남북대화 성과가 필수적인 상황이다.

북한 노동당 8차 대회에서 '총비서'로 추대된 김정은은 "남북관계 회복은 남측에 달려있다"고 주장했다. / 조선중앙통신


■ 김정은의 '본질적 조건'

지난 9일 북한 김정은 위원장이 당대회 사업총화 보고에서 "남북관계가 회복·활성화될지 못될지는 전적으로 남조선당국의 태도에 달렸다"며 '3년 전 봄날 같은 남북관계'를 언급하자, 통일부는 "남북 합의를 이행하려는 우리의 의지는 확고하다"며 "가까운 시일 내에 한반도 평화·번영의 새 출발점을 만들어나가기를 기대한다"는 즉답을 내놨다.

남북 정상의 연설 행간에 읽히는 기류, 당국의 움직임, 여당 정치인들의 발언 속에서 남북 물밑접촉과 사전교감 가능성이 엿보인다. 어느 순간 갑자기 남북화상정상회담 개최 소식이 전해져도 크게 놀랄 것 없는 분위기다.

하지만 이제 문제는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다.

최근 '총비서'로 추대된 북한 최고권력자는 이미 대남 가이드라인을 '디테일하게' 제시해놨다. 방역 협력, 인도주의적 협력, 개별관광 같은 '비본질적인 문제들'은 애초에 꺼내들지도 말라는 메시지와 함께 "대가는 지불한 것만큼, 노력한 것만큼 받게 돼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어설픈 협력사업 대신 '통 큰 대가'를 준비해 미국까지 설득하라는 요구로 읽힌다.

남북 정상은 현 정부 들어 이미 네 차례 '역사적인' 만남을 가졌다. 미국과 북한 정상도 세 차례의 '세기적' 회담을 통해 '빅딜'을 논했다.

올봄 남북 정상의 '언택트' 화상회담이 성사된다면 '3년 전 봄날'이 재현될 수 있을까. 정부가 내놓을 '본질적 카드'가 궁금해진다. / 김정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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