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이 외교다
런던 펍(pub)이 석 달만에 문을 열고 예루살렘에선 마스크를 내던진 시민들이 자유를 만끽한다. 6억회분의 백신을 확보했다는 미국은 이른바 '3차 부스터 샷'까지 추진한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이름도 생소한 변방국들이 남아도는 백신을 '자국 관광용'으로 홍보한다는 기사도 보인다.
'게임체인저'(game changer)의 힘은 막강하다. 누적 확진 3000만명에 사망자 50만명을 넘기며 '최대 피해자'로 불리던 미국은 '백신의 게임'(game of vaccines)에서 일찌감치 선두를 확보한 뒤 '백신 패권'까지 재정립할 기세다. 미국과 함께 '방역에 실패한 선진국' 1·2위를 다투던 영국도 '세계 최초 접종' 이후 대담한 도박(bold gamble)에 성공해 '제국의 자존심'을 회복했다.
'3T'(Test-Trace-Treat)라는 '획기적' 모델로 K-방역 신드롬을 세계의 표준으로 만들겠다던 한국의 원대한 포부는 '백신전쟁' 앞에서 맥을 못추는 분위기다. OECD 회원 37개국 가운데 35위 한국보다 낮은 접종률을 유지해온 일본까지 바이든-스가 정상회담 직후 "화이자 7200만명분 계약"이란 '무리수'를 두고 나서자 한국 정부는 더욱 난감한 처지가 됐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사면초가 한국과 일본 호주를 한 데 묶어 "초기 방역엔 성공했지만 백신 접종엔 가장 뒤처진 선진국"이라며 "이 느림보들(the laggards)은 상대적으로 낮은 감염과 사망률로 시간적 사치를 누렸다"고 힐난했다. 마스크 열심히 쓰고 거리두기 열심히 지켜가며 5공·6공 때도 보기 드물었던 '5인이상 집합금지' 조치에도 순응했던 국민은 '사치를 누린 느림보들'로 취급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 백신 13차례나 강조했는데…
청와대에 따르면 문재인 대통령은 2020년 한 해 동안 '코로나 백신'을 최소 13차례 이상 강조했다.
지난해 4월 9일 한국파스퇴르 연구소 방문 당시 "치료제와 백신 개발, 확실히 돕겠다"고 다짐한 것을 시작으로 빌 게이츠 빌&멜린다 게이츠 재단 이사장과의 통화, 국무회의, 수석·보좌관회의, 내부 참모회의, SK바이오사이언스 방문, 바이오산업 행사 등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백신'을 강조했고, 지난해 11월30일 참모회의 때는 "과하다고 할 정도로 물량을 확보하라. 대강대강 생각하지 마라"라는 지시까지 남겼다고 한다.
그런데 최초 지시로부터 1년을 훌쩍 넘긴 현재, 한국은 여전히 '상대적 백신 빈곤국'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총체적 난국을 책임지겠다는 사람은 안 보이고, 성급히 장밋빛 미래를 확신했던 관료들에게서도 반성의 목소리는 찾기 어렵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능한 사람들이 모였다는 정부관료들이 대통령 지시를 '대강대강' 들었을 가능성은 낮다. 다만 당시 대통령의 '백신 지시'는 대부분 '도입'이나 '확보'보다는 '개발'에 무게를 싣고 있었다. 백신과 치료제를 한 테두리로 묶어 '자력개발'에 집중하다 '외부 도입'에 한 발 늦은 대응이 결국 세계 110위권이란 접종률을 불러왔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백신 외교의 시대'는 이미 지난해 시작됐다. '방역 실패국'으로 꼽히던 이스라엘은 정보기관인 모사드가 무기구매 네트워크까지 총동원해 작전을 벌인 결과 초기 백신 물량을 대거 확보할 수 있었다. 백신 개발국인 영국은 물론 프랑스와 독일 등 유럽 주요국들도 백신 접종률을 빠르게 높여가고 있다. 상황이 여의치 않은 칠레나 UAE 등 몇몇 국가들은 '울며 겨자먹기'일 수도 있겠지만 중국과 러시아산 백신을 과감히 선택했다. 최종 평가는 훗날 이뤄지겠지만, 모두 '백신 외교의 영역'에서 이뤄진 결과물들이다.
한국도 '겉으로 보기엔' 남부끄럽지 않은 총력전을 벌였다.
우선 대통령이 직접 나섰다. 지난해말 모더나사(Moderna社)의 스테판 반셀(Bancel) CEO와 27분간 화상통화를 한 문 대통령은 2000만명 분량인 4000만 도스의 백신 공급에 합의했다며 공급 시작 시기도 3/4분기에서 2/4분기로 앞당기기로 했다고 청와대가 발표했다.
지난 2월엔 "코로나는 코리아를 이길 수 없습니다"란 문구까지 내걸고 군사작전을 방불케하는 군·경 합동 백신 수송작전도 대대적으로 벌였다.
1병(바이알)으로 6명이 맞을 백신을 7명으로 늘일 수 있다는 '최소잔여형주사기'(LDS)를 세계 최초로 개발해 "미국, 유럽, 중동, 동남아 등에서 대량 구매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는 희소식도 전해졌다.
2월 26일 아스트라제네카(AZ) 백신 접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한 달쯤 지나 문 대통령 부부도 종로보건소를 찾아 직접 팔을 걷어올렸다.
■ 르완다와 비교되고 '러시아 백신'까지
하지만 위기는 다시 찾아왔다.
'세계의 백신 공장'으로 불리던 인도 정부가 자국 접종을 위해 수출 제한을 시작했고, 세계 백신의 4분의 1을 생산한다는 미국도 백신 장벽을 높였다. 백신이 어느 순간 석유처럼 '보유국'과 '비(非)보유국'으로 나뉘면서, 공급 불균형과 격차가 심화했다.
한국이 세계 110위권인 1%대 백신 접종률을 기록하면서 르완다·레바논·방글라데시와 비교되기 시작했다. '국내 주력 백신'으로 꼽히는 AZ의 경우 혈전 부작용 발생 소식이 이어져 불안감을 가중시켰다. 방역당국은 "단순 백신 접종률만 따질 게 아니라 각국의 확진자 수나 사망률까지 고려해 평가해야 한다"거나 백신 불안감을 조장하는 '가짜뉴스'엔 엄정 대응하겠다는 입장이지만, 국민 여론은 이미 기울기 시작했다.
한국갤럽이 지난 20~22일 전국 18세 이상 1003명을 대상으로 '정부가 코로나19 대응을 잘하고 있는지'를 묻는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의 49%가 '잘못하고 있다'는 답을 내놨다. 지난해 2월말 이후 1년 2개월만에 코로나 대응에 대한 '긍정평가'와 '부정평가'가 역전된 결과다.(자세한 내용은 한국갤럽이나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정부의 노력에도 국민 불안이 커지는 가운데(일부 친여권 인사들은 국민불안의 이유를 놓고 '언론탓'을 한다) "러시아 백신 도입 검토"란 보도까지 나왔다.
SBS는 지난 21일 문 대통령이 최근 러시아산 백신인 '스푸트니크V' 도입 가능성을 점검하라고 지시했다고 보도했고, 조선일보는 다음날인 22일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최근 외교부에 러시아 백신 관련 정보를 수집해달라고 요청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차기 대권을 노리는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앞서 "러시아 백신의 공개 검증을 청와대에 요청했다"고 밝혔고, 민주당에서 차기 당권을 노리는 송영길 국회 외교통일위원장은 러시아 의회에 백신 협의 내용을 담은 서한을 발송했다고 한다.
러시아가 '91.6% 예방 효과의 세계 최초의 백신'이라 자부하는 '스푸트니크V'를 도입하려는 이런 요란한 움직임에 과연 국민 중 어느 정도가 신뢰를 보일진 여전히 의문이다. 정부 관계자들에 따르면 '러시아 백신 검토'는 사실상 '해프닝'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 정의용 '스와프' 발언에 美 "프라이빗 대화"
이런 와중에 설화도 더해졌다.
정의용 외교부 장관은 지난 20일 국회에 출석해 "미국 측과 백신 스와프(swap)를 상당히 진지하게 협의하고 있다"며 "존 케리 미국 대통령 기후 특사가 (한국에) 왔을 때도 이 문제에 관해 집중적으로 협의했다"고 발언했다.
4개월 전부터 '백신을 빌려 되갚는 스와프'를 주장하는 야당의 질문에 상대국 인사의 실명까지 거론하며 한미 협의 상황을 전격적으로 공개한 셈이다. 5월 한미정상회담에서 백신 스와프가 성사된다면 꽉 막힌 백신 수급에도 숨통이 트일 거란 전망이 나왔지만, 다음날 분위기는 다시 반전됐다.
정 장관은 21일 관훈토론회에 참석해 "미국도 국내 사정이 아직도 매우 어렵다는 입장"이라며 "(미국이) 집단면역을 이루기 위한 국내 백신 비축분에 여유가 없다는 입장을 설명했다"고 전했다. '집중 협의'란 말이 하루 만에 '여유 없다'는 상황으로 뒤바뀐 셈이다.
정 장관은 이런 미국에 지난해 한국이 진단키트와 마스크를 공수해준 것을 언급하면서 '어려울 때 친구가 진정한 친구'란 점을 강조했다고 한다.
정 장관의 이런 '장외 여론전'에도 미국의 반응은 냉담하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해외로 보내는 걸 확신할 만큼 충분히 갖고 있진 않지만, (앞으로)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며 캐나다와 중미 지역을 거론했다.
국무부는 한 발 더 나아갔다. 네드 프라이스 대변인은 정 장관이 말한 '백신 스와프 협의'에 대해 "비공개 외교적 대화(private diplomatic communications)에 대해 언급하지 않겠다"며 선을 그었다. 일부 전문가들은 정 장관이 상대국 동의 없이 협의 상황을 공개한 것에 대한 미국의 불만이 담긴 입장이란 분석을 내놨다.
프라이스 대변인은 "미국은 공중 보건 분야에서 리더십 역할을 수행해 왔다"며 특정국들을 거론했는데, 캐나다와 멕시코, 그리고 중국 견제용 협의체인 '쿼드'(Quad) 가입국(호주·인도·일본)이었다. 이를 두고 '백신 아메리카나'를 꿈꾸는 미국이 인접국(캐나다·멕시코) → 쿼드3국(호주·인도·일본) → 동맹국(한국 등) 순으로 백신을 지원할 가능성이 제기됐다. 뉴욕타임스가 '느림보'라고 힐난했던 세 나라 중에 한국을 뺀 호주와 일본은 한 숨 더는 모양새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문 대통령이 중국이 주도하는 보아오포럼에 화상으로 참석해 중국의 '백신 기부' 노력을 높이 평가한다면서 "어떤 나라도 혼자만의 힘으로 이웃에 대한 배려 없이 코로나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고 연설한 건 미국 입장에선 더욱 거북하게 들릴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다음달 한미정상회담 과정에서 백신이 또 하나의 외교 지렛대(leverage)로 작용한다면, 협상 우위를 빼앗긴 한국으로선 외교적 실익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우려도 있다.
■ '백신은 질병당국에'…넘기는 외교부
백신이 외교다. 세계 주요국들은 이미 지난해부터 총성 없는 '백신 외교전'을 벌였다.
정부의 방역 컨트롤타워인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가 지난해부터 매일같이 열어온 회의에 외교부 장·차관이 꾸준히 참석하는 이유 중 하나도 방역과 백신이 외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걸 방증한다.
하지만 전임 외교장관이나, 청와대 안보실을 책임졌던 현 외교장관이나 세계 주요국들이 백신 확보전을 벌일 때 어떻게 제역할을 했는지 국민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정의용 외교부 장관은 '백신 스와프'를 언급한 지난 20일 국회에서 "방역 상황과 관련해 정부가 조금 안이하게 대처한 측면이 있다고 솔직히 인정한다"면서 "우리가 과연 '외교적으로' 백신 도입에 국민들을 안심시킬 수 있을 정도로 했느냐는 것에 대한 반성"이라고 했다.
백신 수급 문제를 놓고 현 정부 고위당국자로선 거의 처음으로 '반성'과 '인정'이란 표현을 쓰면서 사실상 '외교적 실책'을 일부 시인한 셈이다.
하지만 외교당국의 자세는 여전히 답답하다.
최영삼 외교부 대변인은 지난 22일 정례브리핑에서 '백신 스와프'나 '러시아 백신 도입 여부' 등을 묻는 질문에 "백신 도입 자체와 관련된 문제는 질병당국에 문의해달라"는 답변을 4차례 반복했다. 정부 당국자들이 흔히 내세우는 '원 보이스' 기조를 강조한 의미겠지만, 외교부는 여전히 '백신 현안'에서 '유관부처' 정도의 역할이란 식으로 읽힌다는 지적도 있다.
지난해부터 외교 당국자들을 만날 때마다 백신 수급에 대한 질문을 하면 "방역당국의 영역"이라거나 "민간 제약사와의 계약 문제"라며 외면하는 이들이 다수였다. 대통령이 '대강대강하지 말라'며 '범정부적'으로 '전방위적' 노력을 강조했지만, 여전히 외교당국에선 그럴듯한 해법이 나오지 않고 있다.
■ '믿어달라'는 정부와 '믿음직한' 정부
현재의 백신 불안이 영원히 지속되진 않는다. 하반기가 시작되고, 정부가 약속한 11월이 되고, 연말이 다가올 때쯤 전세계적 분위기와 맞물려 '집단면역'을 달성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지금은 백신 부족에 허덕이고 있지만, 공급망이 확대되고 추가 개발에 성공하는 글로벌 제약사가 늘어나면 한국에서도 누구나 쉽게 백신을 맞을 날이 온다. 청와대와 정부는 "대량의 백신 추가 구매가 곧 성사되고, 특정 계기에 발표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2~3주 정도만 지나면 백신 숨통이 어느 정도 풀리고, 다음달 한미정상회담을 할 때쯤이면 굳이 '스와프'가 필요 없을 정도로 여유가 생길 것이라고 확신하는 고위관계자도 있다.
더디긴 하지만 한국이 자체개발하는 국산 백신에 대한 기대도 여전히 남아있다. '연내 접종'은 어렵더라도, '매년 접종'이 현실화한 만큼 내년부터 'K-백신'을 맞을 수 있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하지만 건강과 생업이 걸린 서민들에겐 늦춰지는 하루하루가 생사의 고비다. 한달에 1000건 넘는 파산 신청이 법원에 접수되고, 눈덩이가 된 빚더미에 자영업자들은 '잠재적 파산자'로 내몰린다. 백신 외교전에서 '어느 나라가 얼마나 많은' 백신을 확보할지도 중요하지만, 결국 '언제' 확보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좌우된다. '국제적 느림보'로 일상을 겨우 회복한 후 "코로나는 코리아를 이길 수 없습니다"라며 뒤늦게 자축하는 민망한 상황은 부디 없길 바란다.
'상반기 1200만 접종'과 '11월 집단면역'을 강조하는 정부는 계속 "믿고 기다려달라"고 호소한다. 하지만 지친 국민에게 필요한 건 '믿어달라'는 정부보다 '믿음직한' 정부다. 그 시작은 '외교력'에 달렸다. / 김정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