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엘리베이터걸이 광고社 CEO가 되기까지 - 윤현정 휴크리에이티브 대표

김정우 기자 2011. 7. 25.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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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 CEO의 모델 - 윤현정 휴크리에이티브 대표
엘리베이터걸이 광고社 CEO가 되기까지

⊙ TV광고, 브랜드 컨설팅, 전시기획 등 성공… 스마트폰 앱 시장에 도전장
⊙ IMF 때 父母 사업 실패로 보충수업비 3만원도 못 내… 일찍 시작한 CEO의 꿈
⊙ “워키토키 무료 메신저로 전 세계인의 마음 사로잡겠다”

김정우 월간조선 기자 (hgu@chosun.com)
취재지원 : 서은내 월간조선 인턴기자



윤현정 휴크리에이티브 대표. ⓒ 서경리 월간조선 기자

2001년 7월 초, 대학 신입생 윤현정(尹賢貞)씨의 발걸음은 경기도 용인의 한 대형마트로 향했다. 신용카드 모집 아르바이트를 위해서다. 친구들은 해외 배낭여행을 떠나거나 학교 도서관에서 취업 준비를 했지만, 윤씨에겐 모두 사치였다.
 
  고교생이던 1998년, IMF 사태로 부모가 사업을 접으면서 윤씨의 대학 진학 자체가 불투명했다. 겨우 대학에 입학한 후엔 신문배달, 커피숍 서빙, 주유원, 학원강사, 과외, 예식장 안내 등을 하며 등록금을 벌었다. 빌딩 ‘엘리베이터걸’과 차창에 노래방 전단을 꽂는 일까지 마다하지 않은 그를 친구들은 ‘행자’라고 불렀다. 당시 인기있는 TV 드라마에 나오던 생활력 강한 여주인공 이름이다.
 
  2011년 현재, 윤씨의 직함은 CEO다. TV 광고 제작, 기업 브랜드 컨설팅, 공연·전시기획 등 굵직한 사업을 진행해 온 지 2년째다. 최근 ‘소라기’란 이름의 워키토키 메신저 스마트폰 앱(App·응용프로그램)을 기획해 정보기술(IT) 분야까지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윤씨에게 지난 10년은 그의 꿈을 남들보다 최소 10년 빨리 이루게 한 원동력이다.
 
 
 
“죽도록 살지 않으면 안 됐다”
 
윤현정 대표가 기획한 워키토키 메신저 앱 ‘소라기’. ⓒ 서경리 월간조선 기자
  “2003년 학교를 휴학하고 처음 입사한 회사의 사장이 32살이었어요. 항상 ‘CEO’라고 하면 지긋한 어르신을 떠올렸는데, 그분을 보고 생각을 고쳤죠. 꿈도 바꿨습니다. 32살이 되기 전에 ‘내 회사’를 만들어 CEO가 되겠다고요. 지금 돌이켜보면 좀 어이가 없지만 나름 큰 자극이었죠.”
 
  ‘어이없는’ 꿈은 현실이 됐다. 다른 대학생들이 전공 학점과 토익 점수에 매달리며 ‘스펙’을 쌓아 나갈 때, 윤씨는 일찌감치 ‘취업’ 대신 ‘창업’을 선택했다. “기업이 원하는 인재가 되기보단 자신이 원하는 기업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망설임 없이 실행에 옮겼다.
 
  ―원래 꿈은 무엇이었나요.
 
  “고교시절엔 아나운서가 꿈이었는데, 대학에 입학해선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워낙 집이 어렵기도 했고, 돈 버느라 꿈꿀 여유도 없었죠.”
 
  ―그렇게 어렵게 살았던 이유가 있었던가요.
 
  “어릴 땐 큰 부자는 아니어도 남부럽지 않게 살았어요. 그런데 부모님 사업이 망하니 학교 보충수업비 3만3000원 낼 돈도 없는 겁니다. 선생님께 그냥 못 내겠다고 했죠. 급식비나 교재비도 없었고, 친구들 도시락 빼앗아 먹으며 살았죠. 우리 가족은 하루하루 먹고사는 문제가 큰 고민이었어요. 어머니도 일을 4~5개씩 하셨고요. 고교 생활이 힘들 수밖에 없었죠.”
 
  ―어린 마음에 상처가 많았겠는데요.
 
  “마음의 상처로 아파할 환경도 못됐어요. ‘죽도록 열심히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생겼다는 생각밖에 없었죠. 대학 때 아르바이트하면서 아무리 힘들어도 그냥 눈물 한 번 ‘찍’ 닦고 다시 시작해야 했습니다.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렸어요.”
 
  고교 시절 문과 전공이면서도 수학을 좋아한 윤씨는 경영학과로 진로를 선택하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교대, 약대, 영문학과 세 곳만 허락했다고 한다. 딸이 계속 반대하자 아버지는 컴퓨터 전공을 추가해 넷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
 
  “교대, 약대, 영문학과 모두 제 적성과 안 맞았어요. 전국 대학의 컴퓨터학과를 다 찾아봤더니 경희대에 ‘멀티미디어 창작과’가 있었습니다. 예술디자인학부에 소속된 과라 커리큘럼이 재미있었어요. 광고와 디자인을 부지런히 공부할 수 있는 곳이었죠.”
 
 
  공동 창업한 첫 회사의 자본금은 책상 3개
 
  ―전산하곤 거리가 있는 듯합니다.
 
  “‘멀티미디어’란 말이 있어 아버진 그게 공대인 줄 아셨어요. 우여곡절 끝에 허락받았죠.”
 
  생활고는 그를 강하게 했다. 아르바이트를 해도 경영자의 입장에서 생각을 했다고 한다. 커피숍 서빙을 할 땐 CRM (Customer Relationship Management·고객관리)을 고민했다. 여분의 테이블을 활용하고 손님 관리를 다르게 하면 매출이 늘 것 같았단다. 학교에서도 전공 외에 경영학 수업을 찾아가서 들었다.
 
  2003년 윤씨는 정식으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휴학생 신분이었지만, 경력을 인정받아 ‘마케팅 팀장’이란 직함도 얻었다. DMB, 와이브로(WiBro·무선 광대역 인터넷), 디지털TV 등 서비스 기획을 하는 IT 컨설팅회사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다 배우겠다”는 각오로 일했다고 한다. ‘32세 사장’을 만나 CEO 꿈을 키운 곳도 그곳이었다.
 
  “직원 수가 80명 정도였으니, 당시 IT업체치곤 꽤 큰 곳이었어요. 그곳에서 CEO가 되겠다고 결심했고, 열심히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혼자 창업을 하기엔 아직 역부족이란 생각이 들었죠. 일단 선배들과 함께 힘을 모아야 했습니다.”
 
  2005년 윤씨는 ‘가이아앤씨’라는 회사를 공동으로 설립했다. 대기업의 복리후생제도 컨설팅을 주로 맡아 병원과 연계하는 사업을 진행했다. 3명이던 직원은 1년 후 20여 명으로 늘었다.
 
  “대기업은 직원의 복지를 위해 포인트몰을 운영합니다. 문화공연이나 각종 서비스 혜택을 연간 100만~400만원 정도 규모로 제공하는 것이죠. 그런데 의료 서비스가 빠져 있는 것을 보고 병원과 연계를 시도한 거죠. 치과, 피부과, 한의원 등 임플란트나 미용 분야에 주력했습니다.”
 
  ―창업 자본금은 어떻게 마련했습니까.
 
  “자본금은 사실상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어요. 월세 80만원인 조그마한 사무실 하나 임차해 책상 3개 놓고 사장인 선배와 사업본부장인 저, 그리고 경리직원 딱 3명 앉아 있었습니다. 영업도 맨땅에 헤딩하는 식이었어요. 제안서 만들어서 무작정 병원에 찾아갔죠.”
 
 
  한 달 반 만의 첫 계약
 
  ―아이템이 꽤 좋아 보이는데, 계약은 쉽게 성사됐습니까.
 
  “전혀. 의사들이 프라이드가 굉장히 강하잖아요. 나이가 어린 데다 경력까지 일천한 여자애가 찾아가는데 누가 반갑게 맞아주겠습니까. 그냥 앉아서 2시간이고 3시간이고 기다리는 겁니다. 잠깐 만날 기회가 생겨 설명하려고 하면 ‘아니, 됐어요’란 답이 돌아오기 일쑤였죠.”
 
  ―어떻게 극복했나요.
 
  “오기가 생겼죠. 매일 만남을 시도하면서 따로 아는 의사들에게 조언을 구했어요. 그렇게 시도하는 횟수가 늘면서 한 달 반 만에 첫 계약이 성공했습니다. 이후 하나씩 계약이 느니까 신기하고 재미가 붙더라고요.”
 
  ―그 사업은 왜 접었습니까.
 
  “어느 정도 일이 진행되니 시장 규모가 뻔히 보이더라고요. 사업 유지는 할 수 있지만, 성장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였어요. 2007년 대학 졸업하면서 함께 정리했죠.”
 
  윤씨는 졸업과 동시에 IT기업에 입사했다. 우연히 지인의 소개로 회사를 방문했다가 마케팅 본부장 직책을 맡았다고 한다. 직원 40여 명 규모로 영상과 서비스 기획을 하는 곳이었다. 1년 반 동안 근무하며 시장 흐름과 경영관리를 배운 윤씨는 2009년 6월 본격적으로 단독 창업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9월 1일 휴크리에이티브를 설립했습니다. 처음엔 전시·공연 기획 중심으로 운영했고, 지금은 TV광고나 기업보고서 디자인 같은 분야까지 진출했어요. 회사 설립과 동시에 ‘밀랍인형 전시회’를 준비했습니다. 홍콩의 박물관에서 우연히 밀랍인형을 보고 바로 기획을 시작했죠.”
 
  윤 대표의 휴크리에이티브는 한 언론사와 2009년 12월 밀랍인형 전시회 ‘월드스타체험전’을 공동 주최했다. 앤젤리나 졸리, 브래드 피트, 톰 크루즈, 비욘세 등 할리우드 스타들과 비, 신승훈, 박지성, 이승엽 등 국내 스타들은 물론, 안중근 의사, 김대중, 노무현 전(前) 대통령, 김수환 추기경 등 유명 인사의 밀랍인형 120여 점을 전시해 호황을 이뤘다.
 
 
  무전기 메신저로 스마트폰 앱 도전장
 
  “전시회를 하려면 밀랍인형, 장소, 인테리어 세 부분에 비용이 많이 들어갑니다. 자본이 없었기 때문에 우선 이익분배를 조건으로 인형을 빌려 왔어요. 인테리어 업체도 같은 방법으로 계약했습니다. 최소 비용으로 두 달 동안 전시를 할 수 있었죠.”
 
  전시회는 3억~4억원가량의 수익을 거뒀다고 한다. 절반 이상이 투자자들에게 돌아갔지만, 윤 대표가 회사 자본금을 마련하기엔 나머지 수익으로도 충분했다. 첫 사업의 성공은 회사 성장의 발판이 됐다. 의류, 식품, 백화점, 가전제품 등 다양한 분야의 TV광고를 유치하는 한편, 대기업들의 기업보고서와 카탈로그 디자인과 제작도 맡았다.
 
  윤 대표는 최근 스마트폰 앱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창업 전 IT 기업에서 쌓아 온 경력과 인간관계를 적극 활용하겠다는 전략이다. 처음 입사했던 회사 대표와 함께 무료 워키토키 메신저 ‘소라기’를 기획해 지난 6월 출시했다. 윤 대표는 “무료통화와 무료문자의 중간 개념쯤 된다”면서 “기존 서비스와 달리 PTT(Push To Talk·휴대전화 무전기 서비스) 기반으로 프로그램을 개발해 용량과 트래픽(데이터 전송량)을 최소화했다”고 강조했다.
 
  윤 대표가 자신의 스마트폰에 실행 중인 워키토키 모드를 변경하자 음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함께 앱을 기획한 사람들의 음성이 들리는가 하면, 회사 직원의 보고도 이어졌다.
 
  ―무료통화 앱까지 나온 상황에서 워키토키 방식은 구식으로 보이는데요.
 
  “많은 분이 그렇게 지적을 해 옵니다. 하지만 한 번 사용해 보면 분명한 차별성을 알 수 있어요. 무료통화가 된다고 무료문자를 이용 안 하진 않잖아요. 워키토키 방식은 통화, 문자, 음성메시지 모두와 분명 구별됩니다. 그룹 기능도 있어 여러 명이 동시에 대화가 가능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이용하나요.
 
  “처음엔 트렌드에 민감한 학생들이 재미로 이용했죠. 서비스가 안정화하면서 산업 쪽에서도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한 대형마트는 전국 물류센터 직원을 대상으로 테스트를 했어요. 사용 범위는 다양하고 넓습니다. 콜택시 기사들이 이용할 수도 있고, 백화점 매장이나 공항에서도 활용할 수 있겠죠. 보안 점검을 거치면 경찰이나 공공기관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 한마디로 현재 무전기를 사용하는 그룹이면 다 관심을 가져볼 만하다는 거죠.”
 
 
  “‘소라기’는 적은 전송량으로 음성 전달”
 
  ―해당 분야에 직접 제안이나 마케팅을 하진 않습니까.
 
  “‘소라기’는 한 번도 직접 홍보한 적이 없습니다. 언론도 《월간조선》이 처음이고요. 홍보에 1원도 투자 안 했는데, 소문을 타고 가입자가 급속도로 늘어났죠. 출시 한 달 만에 20만명을 돌파했고, 현재 하루 최대 1만명 정도 추가 가입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소라기’는 현재 안드로이드 운영체제에서만 다운받을 수 있다. 애플사(社)의 아이폰용 앱은 8월 중 오픈할 예정이다. 영어, 중국어, 일본어 등 외국어 버전도 함께 출시한다.
 
  “저희는 처음부터 글로벌 시장을 염두에 두고 앱을 개발했습니다. 무료통화는 글로벌 시장까지 확대될 경우 그 전송량을 쉽게 감당하기 어려울 겁니다. ‘소라기’는 적은 전송량으로 충분히 음성을 전달할 수 있기 때문에 전 세계로 확대해도 큰 문제가 없어요.”
 
  ―전송량이 커지면 어떤 어려움이 생깁니까.
 
  “요즘 무료통화 앱이 나오고 있지만, 데이터 전송량이 엄청나기 때문에 저희 같은 중소기업에선 서버를 유지할 엄두도 못 냅니다. 사용자 입장에서도 통화 기능을 계속 실행하면 배터리 소모가 많아질 수밖에 없겠죠. ‘소라기’도 처음엔 채팅, 무전기, 대화, 멀티미디어 전송 등 다양한 기능이 포함돼 배터리가 금방 소모됐어요. 수차례 수정을 통해 타사의 4분의 1 수준으로 전송량을 줄여 이를 해결했습니다.”
 
  또래와는 다른 생을 살아온 듯한 윤 대표에게 현재 ‘반값 등록금’과 ‘88만원 세대’ 등으로 대변되는 20대에게 전하고픈 말이 있는지 물었다.
 
  “입학이 어렵고, 취업이 어렵고, 결혼이 어렵고… 모두 힘들다고 이야기하죠. 그런데 가만히 돌이켜보면 어느 세대나 힘든 건 똑같은 것 같아요. 지금까지도 그래 왔고, 저희 다음 세대도 분명히 ‘내가 제일 힘들다’고 하겠죠. 다 힘든데 굳이 ‘내가 더 힘들다’고 외치기보단 상황을 어떻게 극복하고 성장할지 고민하는 게 훨씬 나은 선택이라고 봅니다. 힘들 땐 가능한 한 덤덤하게 생각하고 가능한 한 빨리 극복하려고 합니다.”⊙

윤현정
⊙ 수원 권선고·경희대 멀티미디어학과 졸업.
⊙ 유온커뮤니케이션 기획팀장, 티원시스템즈 마케팅본부장 등 역임. 現 휴크리에이티브 대표이사.

기사 全文 보기 : 월간조선 2011년 8월호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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