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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북한

납북자 21명 평양에 살고 있다 - 평양 거주 단독 확인

김정우 기자 2011.11.02 14:30
납북자 21명 평양에 살고 있다

국정원 2006년 “北에 생존” → 북한 당국 “생존 확인 불가” → 北 당국이 작성한 주간조선 입수 자료서 평양 거주 확인

납북 고교생 이명우·이민교·최승민·홍건표
납북 어부 강병일·권용만·김명회·노성호·문경식·이광원·신태용·장진구·조규영·조석원
유럽서 납치 유성근 가족과 고상문
KAL기 피랍 성경희·정경숙·최석만

6·25 전후 납북된 505명 중 21명 평양 거주 확인
대부분 북한서 결혼… 16명은 노동당 가입

북한 당국 “납북자 없다” 주장 거짓 드러나
“내 가족 살아있냐” 확인요청 주간조선에 쇄도


김대현·김경민 기자  
김정우 월간조선 기자  (hgu@chosun.com)
박용현·김윤집 인턴기자  

 

납북고교생

▲ 납북고교생. (왼쪽부터) 이명우(천안농고 3년), 이민교(태광고 2년), 최승민(태광고 2년), 홍건표(천안상고 3년)


주간조선은 북한 당국이 작성한 만 17세 이상 평양시민 신상자료를 단독 입수, 지난주(2177호)에 보도했다. 이후 이 자료를 분석한 결과, 1977~1978년 전남 신안군 흑산면 홍도에서 납치된 고교생 이민교(52)·최승민(53)·이명우(51)·홍건표(51)씨가 평양에 살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주간조선은 국내 납북자 단체가 확보하고 있는 전후(戰後) 납북자 505명의 신상자료와 이번에 입수한 평양시민 신상자료를 일일이 대조한 결과, 이 같은 사실을 확인했다. 그동안 북한은 이들 ‘고교생 납북자’ 4명의 생사 여부를 확인해 달라는 남측 가족의 요구에 대해 생사확인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해 왔다.
   
   이들 고교생 납북자 4명 외에도 현재 평양에는 1960~1980년대 납북된 어부 10명과 1969년 납북된 KAL 승무원 3명 등 모두 21명의 납북자가 살고 있는 것으로 입수 자료 분석 결과 밝혀졌다. 이들 중 일부는 이산가족 상봉이나 북한 방송 출연, 북한으로부터의 통보 등으로 생사가 분명하게 확인된 사람들도 있지만, 상당수는 북한의 공식 문서를 통해 생사가 처음 분명하게 확인된 사람들이다. 북한은 그동안 공식적으로 “납북자는 없다”는 입장을 고수해 왔지만 이번 주간조선 입수 자료를 통해 그러한 주장이 거짓이었음이 드러난 것이다.
   
   평양시민 신상자료는 작성 시점이 정확히 언제인지 확인되지 않아 이들 평양 거주 납북자 21명 중 현재 몇 명이 생존해 평양에 살고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평양시민 신상자료를 주간조선에 제공한 대북 정보통은 “이 자료 작성 시점이 2005년으로 추정된다”고 밝혔지만 이 자료에는 2010년 시민증 재발급 기록도 기재돼 있다. 이를 보면, 2005년에 만들어진 자료가 최근까지 일부 업데이트가 이뤄졌던 게 아닌가 추정된다. 북한 당국이 사망자를 자료에서 삭제하는 작업을 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자료에 명시된 21명이 모두 생존해 있을 가능성도 있다.
   
   최성용 납북자가족모임 대표는 이번 평양 거주 납북자 명단 21명이 확인된 것에 대해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역사적 사건”이라며 “납북자 한 명을 생사 확인하는 것도 힘든데, 이렇게 무더기로 나온 것은 경천동지할 일”이라고 했다. 최 대표는 또 “북한이 끝까지 ‘생사 확인 불가’라고 주장했던 납북자들의 주소까지 상세하게 나온 상황”이라며 “북한이 그동안 범죄 사실을 은폐해 왔다는 증거가 드러났으니, 정부와 국제사회가 납북자 송환에 새롭게 나서야 한다”고 했다.
   
   이번에 생존 사실이 확인된 4명의 ‘고교생 납북자’는 1977년 전남 신안군 흑산면 홍도에서 납치된 이민교(당시 18세)·최승민(당시 17세)씨와 1978년 같은 장소에서 납치된 홍건표(당시 17세)·이명우(당시 17세)씨다. 그동안 북한은 이들에 대해 남측 가족들의 생사 확인 요청에도 불구하고 “확인 불가”라고 답했었다. 지난 2006년 7월 통일부 당국자는 “고교생 납북자를 이산가족 범주에 포함시켜 관리해 왔는데 고교생 납북자 최승민, 이민교, 홍건표씨에 대해 북측이 생사 확인이 불가능하다고 통보해 왔다”고 밝힌 바 있다. 당시 통일부는 “또 다른 납북 고교생 이명우씨는 가족이 최근에야 상봉 신청을 해왔기 때문에 향후 상봉 행사에서 최우선으로 생사 확인 요청을 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이후 이명우씨도 생사를 확인할 수 없었다.

평양 주민 신상 자료

▲ 북한 당국이 작성한 주민 신상자료 원본 파일


   이들 외에 1978년 군산 선유도에서 실종됐던 고교생 김영남(당시 16세)씨는 2006년 6월 14차 상봉 행사장에서 어머니와 재회해 살아 있음이 밝혀졌다. 당시 김씨는 일본인 납북자 요코타 메구미의 남편으로 밝혀져 주목을 받았었다. 메구미는 대한항공 858기 폭파범 김현희의 일본어 교사였다. 김영남씨를 포함한 이들 5명의 고교생 납북자에 대해서는 2006년 4월 당시 김승규 국가정보원장이 국회 정보위에서 “북한에 생존해 있다”고 정보위원들에게 보고한 것으로 전해졌지만, 북한은 김영남씨를 제외한 4명의 고교생 납북자의 생사 여부에 대해서는 끝까지 침묵을 지켰다.
   
   이번 주간조선 입수 자료에 따르면, 이민교, 최승민, 홍건표씨 등 3명은 112연락소 지도원(연락소는 간첩 교육기관)으로 근무하고 있다. 만경대구역 팔골2동으로 주소지도 같다. 또 이명우씨는 ‘인민경제대학 학생’의 신분으로 룡성구역 룡성 1동에 거주하고 있었다. 평양시민으로 분명한 직업까지 갖고 있는 이들에 대해 북한이 “생사 확인 불가”라고 답해온 것이 거짓이었음이 드러난 것이다.

평양시민 이름 분석
   
   김정일 0명, 김일성 1명, 김정은 59명
   
   자료에 나온 평양시민 중 김정일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은 ‘국방위원장’을 빼곤 단 한 명도 없다. 김정일 이름을 쓰다 개명한 사람은 총 38명이다. 최연소 ‘김정일’이 1968년생인 점을 감안하면 김정일이 1970년대 김일성의 후계자로 지목된 뒤 ‘작명 금지령’이 내려진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이란 이름은 순안구역에 1명이 존재한다. 김일성의 경우 개명한 사람은 없고 본명인 ‘김성주’도 찾을 수 없었다.
   
   김정남, 김정철, 김정은, 김한솔 등의 이름은 다수 확인됐다. 이들 대부분의 생년월일과 직업 등 신상정보는 ‘김씨왕조’와 관련이 없었다. 김정남은 1476명, 김정철은 1782명, 김정은은 59명이 있고, 김한솔은 1명(1968년생)이 평양에 살고 있다.

   피랍 고교생 이민교씨의 어머니 김태옥(79)씨는 아들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주간조선에 달려와 “아들이 납북된 후 34년이 지났지만 그동안 아들의 밥과 수저를 밥상에 같이 차려왔다. 아들 생각이 날 때면 ‘미쳐버릴 것 같아’ 산에 올라가 나무를 부둥켜안고 운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라며 울먹였다.
   
   이번에 평양에 살고 있는 것으로 밝혀진 납북 어부는 권용만(76)·김명회(56)·문경식(60)·이광원(62)·신태용(68)·장진구(56)·조규영(56)·조석원(58)·강병일(71)·노성호(50)씨 등 모두 10명이다. 이중 노성호씨는 2009년 9월 금강산에서 남한의 누나와 22년여 만에 상봉해 살아 있음이 확인됐고, 강병일씨는 2000년 북한을 탈출한 납북 어부 이재근씨가 “당진 출신 중앙당 대남연락소 지도원”이라고 밝혀 생사 여부가 간접 확인됐었다. 나머지 8명은 그동안 생사 여부가 제대로 확인된 적이 없다.
   
   주간조선 입수 자료에 따르면, 이들 납북 어부들은 대부분 직장을 갖고 평양에 거주하고 있었다. 강원도 고성 출신의 금융호 선원 김명회씨, 전남 무안 출신 흥덕호 선원 이광원씨, 전북 군산 출신 풍복호 선원 문경식씨는 모두 직장이 112연락소다. 전남 보성 출신 안영호 선원 신태용씨와 강원도 강릉(주문진) 출신 창명호 선원 조규영씨는 130연락소, 전북 김제 출신 만복호 선원 장진구씨와 태양호 선원 조석원씨는 26연락소 소속으로 기록돼 있다. 노성호씨는 금성정치대학 학생으로 신분이 기록돼 있고, 강병일씨는 ‘조선로동당 26연락소’에 근무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납북 어부 중 대구 출신의 천왕호 선원 권용만씨만 특별한 직장이 없는 ‘부양’ 상태로 나온다.
   
   납북 고교생 4명과 납북 어부 10명 외에도 이번 자료 분석을 통해 북한에서의 신상이 구체적으로 밝혀진 납북자들이 적지 않다. 1969년 납북된 KAL 부기장 최석만(79)씨는 이번 자료 분석을 통해 평양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 처음 드러났지만, 북한 당국은 2006년 3월 통일부를 통해 최씨의 사망 사실을 최씨 가족에 통보한 바 있다. 최석만씨는 1982년 697연락소에 배치받아 직원으로 근무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최씨는 1979년 같은 연락소 근무자인 최윤옥(67)씨와 결혼해 평양시 사동구역 송화1동에서 살았다. 북한은 2006년 3월 통일부를 통해 남한의 최씨 가족에게 최씨가 사망한 사실을 밝히면서 북한에 있는 최씨의 딸을 만날 의향이 있는지를 물었다는 게 최씨 가족의 설명이다.

KAL

▲ 1969년 KAL기 납북 사건 당시 북한에 착륙했던 동형의 대한항공 여객기.


   최씨와 함께 납북된 KAL기 여자 승무원 성경희(65)·정경숙(65)씨도 평양에 거주하며 연락소에 근무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중 성경희씨는 2001년 3차 이산가족 상봉 때 모습을 나타내 살아 있음이 확인됐지만 정경숙씨는 당시 성씨를 통해 생존 사실이 간접적으로 전해졌을 뿐이다. 성경희씨는 평양시 모란봉구역 흥부동에서 남편 림영일(67)씨와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25연락소에서 1970년부터 근무해온 성씨는 1973년 김일성종합대학 교원인 림영일씨와 결혼했다. 정경숙씨 역시 성씨와 같은 모란봉구역 흥부동에 거주해온 것으로 밝혀졌다. 정씨와 성씨의 거주지 번지수는 ‘한 번지’ 차이로 인접해 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씨는 성씨에 비해 약 22년 늦은 1992년 25연락소에 배치받았다. 정씨의 남편은 고려산업은행 처장인 오웅걸(67)씨다. 1992년 북한을 탈출한 오길남 박사(‘통영의 딸’ 신숙자씨의 남편)는 “성경희·정경숙은 구국의 소리 방송요원”이라고 증언한 바 있는데, 이번에 성경희·정경숙씨가 ‘구국의 소리’ 방송국이 있는 25연락소 소속이라는 점이 밝혀진 것이다.
   
   이번 자료 분석을 통해 1979년 노르웨이에서 납북된 수도여고 교사 고상문(63)씨의 구체적인 신상도 확인됐다. 그동안 북한 방송에 등장해 반한(反韓)·반미(反美) 발언을 해온 고씨의 공식 직위는 ‘농업과학연구원 도서관 사무원’으로 기록돼 있다. 고씨는 류인수란 이름의 북한 여성과 1995년 재혼한 것으로 나온다. 신혼 10개월 만에 남편 고씨가 납북되자 전처 조복희씨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다 1996년 투신자살했다.
   
   1971년 서독에서 납치된 주 서독대사관 노무관 유성근(78)씨와 딸 경희(47)·진희(41)씨의 신상도 분명하게 기록돼 있다. 유성근씨도 2004년 3월 이산가족 상봉 행사장에서 남한의 형과 동생을 만나 자신의 직업에 대해 통일연구소 명예연구사라고 밝힌 바 있지만, 신상자료에는 ‘서문대학교 졸업’이라고만 기재돼 있다. 오길남 박사의 증언에 따르면 유씨는 대남공작기구인 ‘한국민족민주전선(한민전)’의 기관지 편집담당 요원이었다. 유씨의 맏딸 경희씨는 ‘사회과학원 세계경제연구소 연구사’이고, 둘째 딸 진희씨는 ‘김일성종합대학 박사원생’이다.

자진 월북자 행적
   
   ‘신생철학’ 윤노빈 전 부산대 교수 조국통일연구원 책임지도원으로
   
   자진 월북자들의 행적도 확인됐다. 이른바 ‘신생철학’의 주인공 윤노빈 전 부산대 교수는 현재 ‘조국통일연구원 책임지도원’이란 직위를 갖고 평양에 살고 있다. 1982년 싱가포르에서 가족 5명을 대동하고 월북한 그는 ‘통영의 딸’ 신숙자씨의 남편인 오길남 박사와 함께 칠보산연락소에서 방송요원으로 활동했었다. 당시 사용한 가명인 ‘정영호’를 정식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대동강구역 동문2동에 살고 있다.
   
   1967년 프랑스 유학 중 부인과 함께 월북한 정현룡씨는 101연락소 소속인 것으로 확인됐다. 정씨는 서울대 금속공학과 출신으로, 월북 후 칠보산연락소에서 ‘장석규’란 가명을 사용하며 대남 방송 ‘민중의 메아리’ 방송국 부소장을 역임한 바 있다. 경기여고, 이화여대, 영국 옥스퍼드대학 학력을 가진 정씨의 부인 윤향희(한성애)씨는 월북 후 ‘구국의 소리’ 영어 방송 요원으로 활동했으며, 현재 26연락소에 소속돼 있다.
   
   1976년 귀순한 북한 공작원 김용규씨의 증언에 따르면, 김일성은 유성근씨의 사례를 토대로 남한 선동 전략의 일부를 수정했다고 한다. 대학생들을 무조건 시위 현장에 내몰 것이 아니라 고시 공부를 시켜 남한 핵심부에 침투시킨다는 의도다. 김씨가 당시 증언한 김일성의 발언 내용이다.
   
   “유성근의 경우를 보면 현재 남조선에는 고등고시에 합격하기만 하면 행정부, 사법부에도 얼마든지 파고들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 이제부터 검열된 학생들 가운데 머리 좋고 똑똑한 아이들은 데모에 내몰지 말고 고시 준비만 시켜라. 열 명을 준비시켜서 한 명만 합격한다 해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된다. 그러니까 고시 공부를 하는 학생들에게는 그들이 근심·걱정 없이 고시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적극 지원해 주어야 한다.”
   
   이번에 평양에 살고 있는 것으로 밝혀진 21명의 납북자는 대부분 한국에서 쓰던 이름과 고향을 시민증 등록에 그대로 사용했으며, 모두 북한에서 결혼(또는 재혼)해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이중 절대 다수는 대남공작기관의 일종의 ‘조선로동당 ○○○련락소(연락소)’에서 근무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21명 중 15명이 연락소의 지도원, 사무원, 부원 등의 직위로 근무 중이다. 연락소 외 다른 직장으로는 연구소, 도서관, 대학(학생) 등이 있다. 납북자 21명 가운데 16명은 노동당에 가입한 사실도 확인됐다.
   
   이번 주간조선의 분석 결과는 평양시에 거주하고 있는 전후 납북자 중 신원이 정확하게 일치한 납북자만 확인한 수치이기 때문에, 6·25전쟁 당시 납북자 8만여명과 타지역 거주 납북자를 모두 포함하면 북한 생존 납북자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따라 그동안 정부가 사실상 손을 놓고 있던 납북자 송환 운동도 다시 활기를 띠게 될 전망이다. 이미일 6·25 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사장은 “납북자 생사 확인 요청은 이산가족 상봉 때에만 순번이 돌아오기 때문에 납북자 가족들이 아직 생사 확인 요청조차 하지 못한 사람들도 많다”고 말했다.

평양 거주 납북자

▲ *이름 옆 괄호 안에 적힌 납북 연도와 납북 당시 신분을 제외한 사항은 주간조선 입수 평양시민 신상자료에 기록된 것을 그대로 옮긴 것임


   주간조선이 지난주 평양시민 신상자료 단독 입수 사실을 보도하면서 평양 연고자를 찾아드리겠다는 기사를 내보낸 후 주간조선에는 평양에 살고 있을지 모르는 가족과 친지를 찾는 문의전화가 쇄도하고 있다. 러시아에 살고 있는 탈북자 등 해외에서도 이메일을 통해 문의가 쏟아지고 있다. 자신을 “잠적한 몸”이라고 소개하며 러시아에서 여동생을 찾는 이메일 문의를 보내온 한 탈북자는 여동생이 평양에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주자 “너무 감격해서 눈물이 앞서고 손이 떨려서…”라며 “14년 만의 소식”이라며 감격해했다. 1997년 북한을 탈출해 한국에 살고 있는 김모씨는 “우리 가족 생사를 몰라 그리워 미치겠다”며 “(가족이) 저 때문에 자살하지 않았는지…”라며 애타게 가족을 찾았다. 또 인도네시아 수라바야에 거주하는 정모씨는 6·25 때 반공포로에서 석방된 후 홀로 월북한 아버지의 생사를 문의했다. 재독 이북5도민회 정원교 중부지역 회장은 주간조선에 이메일을 보내 주간조선에서 평양 연고자 확인 작업을 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회원들에게 알려 회람시켰다는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1969년 KAL기 납북 사건
   
   강릉발 김포행 KAL YS-11기 피랍… 승객·승무원 47명 중 11명 귀환 못해
   
   KAL기 납북 사건은 1969년 12월 11일 일어났다. 강릉을 떠나 김포로 향하던 KAL YS-11기가 강원도 대관령 상공에서 북한 고정간첩 조창희에 의해 북으로 납치됐다. 납치된 비행기는 함경남도 원산 근처 선덕비행장에 강제 착륙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비행기엔 기장 및 승무원 4명과 간첩을 포함한 승객 47명이 타고 있었다. 납북 직후 북한은 전원 송환을 약속했으나 이듬해 2월 14일 판문점을 통해 돌아온 인원은 승객 39명뿐이었다. 나머지 북한 측 간첩을 제외한 11명의 피랍자들은 북한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1969년 사건 발생 당시 치안국은 “북괴의 고정간첩이며 강릉에서 자혜병원을 경영하던 승객 채헌덕(당시 38세)이 주범으로, 다른 승객 조창희와 부기장인 최석만을 포섭해 비행기를 납북해 갔다”고 발표했었다. 하지만 그해 12월 15일 조중훈 당시 KAL 사장은 기자회견을 갖고 “최석만의 가정과 과거 생활태도로 보아 간첩 행위를 할 만한 결정적 단서가 없다. 경찰의 단순한 추정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1970년 2월 15일 중앙정보부와 치안국은 송환된 피랍자들에 대한 재조사 결과 고정간첩이었던 조창희가 남한에서의 간첩 활동 후 북한의 지령을 받고 비행기가 이륙한 지 약 14분 후에 조종사를 위협해 납북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 발표에서 부조종사 최석만이 채헌덕에게 포섭됐다는 전년도의 치안국 발표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이번에 주간조선이 평양 거주를 확인한 KAL YS-11기 피랍자 3명을 제외하고, 확인이 되지 않은 9명의 신원은 다음과 같다. 기장 유병하(남·당시 37세)씨와 승객 김봉주(남·당시 28세)씨, 임철수(남·당시 49세)씨, 장기영(남·당시 41세)씨, 채헌덕(남·당시 35세)씨, 황원(남·당시 32세)씨, 이동기(남·당시 48세)씨, 최정웅(남·당시 30세)씨다. 이 9명은 이번 평양시민 명단에선 이름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명단에 없다고 해서 생사(生死)가 확인된 것은 아니다. 이들이 평양 외 지역에 거주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납치 피해자 황원씨의 아들이자, ‘1969년 KAL납치피해자 가족회’의 대표인 황인철씨는 10월 19일 주간조선과의 통화에서 “올 8월에 비공식적 통로를 통해 아버지가 평양 근교에 살아계신다는 말을 들었다”며 “이번 명단을 통해 파악되진 않았지만 아직 희망의 끈을 놓기엔 이르다”고 말했다.

주간조선 2178호(2011. 10. 24) 기사 원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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