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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북한

[對北 선교작전 秘話] 북한 지하교회의 代父 이삭 목사 (모퉁이돌선교회 대표)

김정우 기자 2010.02.23 14:50
“평양 가면 절대 돌아오지 마라. 거기서 죽어. 거기서 묻혀!” (어머니의 당부)

소련 헬기 빌려 청진 앞바다에 전도지 살포, 성경 구절 인쇄된 풍선 북한으로 날리고 성경 수십만 권 북한에 밀수, 대북 선교방송, 중국 동북지역에서 탈북자 선교 교육시켜 북한에 지하교회 500여 개 구축 …

⊙ ‘禁神’의 땅 北·中에 24년째 성경 500만 권 이상 투입, 북한의 1500개 지하교회와 13만 지하교인
    비밀 지원
⊙ 황장엽·김덕홍 한국 망명 과정에도 깊이 개입
⊙ 로버트 케네디 도움으로 미국 이민, 목사 된 후 對中·對北 선교 시작
⊙ 주한미군 복무 시절 받은 첩보훈련, 비밀선교 작전에 도입

김정우 월간조선 기자 (hgu@chosun.com)

선교회 사무실 서재 앞에 선 이삭 목사. 북한 지하교인과 대북 선교사들의 신변 안전을 위해 얼굴을 가렸다.
 1991년 11월, 영하 30도의 혹독한 추위가 매섭던 중국 한 지방의 호텔. 하루 앞서 출국하는 동료를 먼저 공항으로 보낸 40대 중반의 남성이 홀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
 
  “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시계를 보니 밤 12시, 남자는 ‘잘못 찾아왔거니…’ 생각하며 무시했다. 1분여 동안 시끄럽던 노크 소리가 그치고 다시 잠이 들 무렵, 이번엔 전화 벨이 울렸다.
 
  윤락 여성들이 호텔 방마다 무작정 거는 전화이리라 생각한 남자는 벨 소리마저 무시했지만, 계속되는 소음에 결국 수화기를 들었다. 전화를 건 사람은 “공안이니 당장 문을 열라”고 고함을 질렀다.
 
  잠시 후 그의 방에 들어선 네 명의 중국인은 오버코트 속 권총을 보여주며 그에게 “일단 여권부터 내놓으라”고 했다. 그가 여권을 내놓자 곧바로 손에 수갑이 채워졌다.
 
  남자가 끌려간 곳은 시내에 위치한 한 건물의 작은 방. 그는 속옷만 입은 채 덜덜 떨며 조사를 받았다. 새벽 5시, 밤새 네 차례나 반복된 조서 작성을 마치자 옷이 다시 나왔다. 옷을 건네 받은 그는 조사가 다 끝났다는 생각에 호텔로 돌아가기 위해 문 쪽으로 걸어갔다. 옆에 있던 중국인 남자가 그를 가로막으며 말했다.
 
  “이 문 말고 저 문.”
 
  문을 열고 복도에 들어서니 고문을 당하는 듯한 여자의 비명소리가 옆방에서 들려왔다. 안쪽 넓은 방에 갇힌 그는 그때부터 80시간 동안 혹독한 물 고문과 전기 고문, 그리고 벌거벗겨진 채 영하 20도의 냉방에 갇히는 고문을 당했다.
 
  사흘이 넘는 기간 동안 그가 먹은 것은 자신의 똥오줌이 전부였다. 누구도 그에게 고문당하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포함한 주변 知人(지인)들과 고문을 가한 사람 모두가 알고 있었다. 바로 ‘불온서적(성경)’을 중국과 북한에 반입하고 ‘불온사상(기독교)’을 전파한 죄였다.
 
  남자의 이름은 이삭, 직업은 목사다. 이 목사의 ‘성경 밀수’와 비밀 선교는 고문을 당한 지 18년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자기 자신을 ‘無益(무익)한 종’이라고 부르는 그와 그가 세운 ‘모퉁이돌선교회’는 1985년부터 24년 동안 500만 권이 넘는 성경을 중국에 밀반입했고, 이 중 약 8만 권이 북한으로 흘러 들어갔다.
 
 
  북한에 기독교인 13만5000여 명으로 추산
 
  이 목사는 고문을 당한 후에도 수차례 중국과 북한을 방문해 목숨 건 ‘선교 작전’을 실행했다. 선교회를 통해 수많은 탈북자가 중국에서 기독교 선교 훈련을 받았고, 북한으로 돌아가 비밀 지하교회를 세웠다.
 
  북한은 당에서 운영하는 사이비 어용 교회를 제외하고는 기독교가 철저히 금지돼 있다. 만약 기독교를 믿다가 적발되면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북한에서는 기독교가 마른 들판의 불길처럼 번져가고 있다.
 
  모퉁이돌선교회 측에 의하면 현재 북한에서 목숨 걸고 은밀하게 활동하고 있는 지하교회 수는 약 1500개로 추정된다. 이 중 500여 개가 모퉁이돌선교회의 지원으로 세워졌다. 북한 전역에 퍼져 있는 약 13만5000명의 신도들이 10여 명 단위로 비밀 장소에서 주기적인 예배 모임을 갖는다.
 
  매년 수천 개의 라디오와 MP3, DVD가 여러 경로를 통해 북한으로 밀반입되고 있다. 옌지(延吉), 투먼(圖們), 지안(集安) 단둥(丹東) 등 北·中(북·중) 접경지 곳곳에 세워진 캠프에서 기독교 신앙 훈련을 받은 북한 지하교회 지도자들이 쌀, 약품, 의복 등과 함께 물품 밀반입을 수행하고 있다.
 
  선교대상이 북한 등 공산권 국가인지라, 이삭 목사와 모퉁이돌선교회의 활동은 지금까지 철저하게 비밀리에 진행됐다.
 
  지난 7월 경기도 수원의 한 기도원에서 열린 집회에서 강사로 참가한 이 목사를 만났다. 매서운 눈매와 다부진 체격의 그는 또박또박한 말투로 설교를 시작했다. 주제는 북한 지하교회였다. 1시간30분 동안 그의 설교가 진행되면서, 대학생들로 구성된 집회 참가자들의 표정이 점점 바뀌어 갔다. 처음엔 웃던 이들의 눈에 어느새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날 이후 필자는 세 차례 더 이삭 목사를 만났다. 집회 현장을 찾아가 인터뷰를 할 때마다 누군가는 눈물을 흘려야 했다. 설교를 듣던 신도들이 울거나, 인터뷰에 응하던 이삭 목사 본인이 울거나, 아니면 필자가 울거나.
 
 
  “예, 어머니”
 
  이삭 목사는 1945년 북한의 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이○○(1919~2008) 목사는 신학을 공부하던 학생이었다. 어머니 강○○(1923~1963) 여사는 목사였던 그녀의 아버지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물려받았다.
 
  아버지 이○○ 목사는 14세 때 외국 선교사가 연 부흥회에 참석해 기독교를 처음 접했다. 북한에서 신학교에 다니던 그는 광복 후 청년운동을 하다 동료들이 하나 둘 공산당에 잡혀 가는 것을 보고 서울 서대문의 감리교신학교로 학교를 옮겼다. 그 후 여덟 차례 38선을 넘어다니다 6번을 소련군에게 잡혔다. 아내의 제안으로 1947년에 越南(월남)을 결심하게 된다. 이삭 목사의 증언이다.
 
  “아버지는 먼저 내려가 있었고, 어머니와 제가 월남하기 위해 38선 근처 한 민가에 들어갔는데, 민가 사람들이 신고를 하는 바람에 소련군에게 끌려갔죠.”
 
  이삭 목사의 어머니는 밤이 깊자 수용소를 탈출, 우여곡절 끝에 서울에서 재회했다. 아버지는 신학교를 졸업해 목사가 됐다. 곧바로 6·25전쟁이 터졌고, 이들은 제주도로 피란을 갔다.
 
  전쟁 당시 이삭 목사는 7세에 신약 성경을 두 번 읽었다. 이 목사의 말이다.
 
  “일곱살짜리가 뭘 알고 그랬겠습니까. 전쟁 중에 할 일이 없어서 읽었겠죠. 다 읽고 나니까 어머니가 이런 말을 합디다. ‘너 목사 돼라’고.”
 
  ―뭐라고 답했나요.
 
  “저는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라고 평생 믿어 왔습니다. 그래서 ‘예’라고밖에 할 말이 없었습니다.”
 
  7세 아이가 목사가 되겠다고 誓言(서언)하자, 그의 어머니는 다음 임무까지 설명했다. 당시 母子(모자)의 대화다.
 
  “너 나이 들면 목사 되고, 목사 되면 갈 나라가 있어.”
 
  “예, 어머니.”
 
  “몽골, 소련, 중공, 그리고 마지막으로…, 북한 가라.”
 
  그에 대한 이 목사의 답 역시 “예, 어머니”였다.
 
  그리고 10년이 흘렀다. 전쟁은 끝났고, 그의 가족은 서울로 돌아왔다. 아버지 이○○ 목사는 용산의 한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미국인 선교사들이 자주 교회와 집안을 드나들었고, 이삭 목사는 어릴 적부터 영어를 배웠다. 이 목사의 설명이다.
 
  “없는 살림에 영어 학원까지 갔습니다. 처음엔 영어 배우라고 하기에 그러려니 하며 그냥 다녔죠. 나중에서야 어머니의 깊은 뜻을 알았습니다.”
 
 
  눈을 뽑아 팔려고 병원에…
 
  1962년 초 어느 날, 어머니는 17세가 된 아들을 불러서 물었다.
 
  “얘야, 우리나라 여권 가지고 북한에 갈 수 있니?”
 
  “못 가요. 어머니.”
 
  “너 그럼 일단 미국부터 가라. 미국 시민권을 받으면 너도 북한에 갈 수 있단다.”
 
  17세 이삭의 대답은 역시 “예, 어머니”였다. 그런데 이삭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돈 한 푼 없는 집안에서 미국은 어떻게 가고, 시민권은 어떻게 받을 것인가. 그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그런데 돈이 없어요.”
 
  어머니는 대답 대신 그에게 옷부터 입으라고 했다. 그리고 그들은 전차를 타고 서울 시내로 향했다. 도착한 곳은 병원이었다. 어머니는 아들을 밖에 세워 두고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30분 뒤, 어머니가 나왔다.
 
  “다른 곳에 가 보자.”
 
  그렇게 병원 네 곳을 다닌 후 다시 전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어머니가 아들에게 병원에 간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얘야, 매일 거지들 들어올 때마다 밥을 해줘야 하는데, 지금까지 집에 돈이 없어서 내가 피를 뽑아 팔아서 그 돈으로 쌀 사고, 밥을 해 먹였단다. 그런데, 너를 미국 보내려고 하니까, 피를 뽑아선 못 보내겠어. 그래서 눈을 뽑아 팔려고 병원에 갔는데….”
 
  이삭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화를 냈다. 다행히 의사들은 ‘눈 뽑는 비용이 더 많이 든다’며 그녀를 돌려보냈다. 그날 저녁, 교회 예배당에서 울음소리가 크게 들렸다. 화장실에 가던 이삭은 예배당 문을 열고 들어가 보았다. 그의 어머니가 무릎을 꿇고 엎드린 채 통곡하며 기도하고 있었다.
 
  “하나님, 내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내놓을 게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 내가 내 민족을 위해 내놓을 게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 내가 내 아들을 위해 내놓을 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삭은 조용히 뒤로 다가가서 어머니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어떻게든 미국에 가겠다”고 다짐했다. 그런 아들에게 어머니는 단호하게 말했다.
 
  “나중에 평양 가면, 절대 돌아오지 마라. 거기서 죽어. 거기서 묻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모자의 대화에, 아들은 한결같이 같은 대답이었다.
 
  “예, 어머니.”
 
 
  어머니의 갑작스런 죽음
 
  그날 이후, 이삭의 어머니는 본격적으로 아들의 渡美(도미)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선교사와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자금을 마련했지만, 이삭은 수속 과정에서 자신이 폐결핵이란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 아들의 미국行(행)은 무산됐고, 대신 아버지가 1963년 4월 미국으로 떠났다.
 
  같은 해 8월 1일, 막내 동생이 태어났다. 5일 후 어머니는 다시 아들을 불렀다.
 
  “얘야, 이 길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아니? 너뿐 아니라 네 동생들도 모두 목사 만들어라.”
 
  당시 18세 이삭에겐 세 명의 동생이 있었다. 둘째는 12세, 셋째는 7세, 그리고 막내는 태어난 지 5일. 다음날 새벽 2시 어머니는 다시 큰아들을 불렀고, “고향 간다”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향년 39세, 死因(사인)은 심장마비였다. 동생들을 모두 목사로 키우라는 말은 어머니의 유언이 됐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18세 이삭은 홀로 세 동생을 돌봐야 했다. ‘핏덩어리’ 막내를 안고 젖 동냥을 다녔고, 두 동생을 키워냈다. 3년이 지나 영장이 나왔다. 하지만 어린 동생들을 돌봐야 했다. 아버지는 미국에 있고 친척도 없었다.
 
  미국 LA에 있던 아버지는 한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美(미) 정부 복지국을 찾아갔다. 담당 직원에게 “아내가 심장마비로 죽었고, 큰아들은 폐결핵에 동생 셋은 어리다”며 “아들들을 데리고 올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미국인 직원의 대답은 ‘노(no)’였다.
 
  그 직원은 “혹시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이 사람이 도와줄 수도 있을 것”이라며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 명함엔 ‘월퍼 프로덕션(Wolper Production)’이란 회사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아버지는 속으로 ‘늑대제작소라니, 미국인들은 늑대도 만드나 보네’라고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명함을 구겨 넣고 밖으로 나와 차에 올라탔다. 당시 영어가 짧았던 그는 ‘Wolper’를 ‘Wolf(늑대)’로 해석한 것이다. 이삭 목사의 말이다.
 
  “당시 아버지 차가 엄청 고물이었습니다. 시동을 켜면 10여 분을 기다려야 했어요. 운전석에 앉아 할 일이 없으니 다시 명함을 꺼내 봤겠죠. 월퍼 프로덕션 주소를 보니 15분 거리에 있는 겁니다.”
 
  아버지가 도착한 곳은 늑대제작소가 아니라 영화제작사였다. 막상 찾아왔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사무실 앞을 어슬렁거리던 그에게 한 미국인이 다가와 “왜 왔느냐”고 물었다. “복지국에서 보내서 왔다”고 답하자 그는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방 안에 들어서자 책상에 앉아 있던 다른 미국인이 아버지를 반갑게 맞았다. 아버지는 또다시 “아내가 죽고, 아들이 병들었다”며 자신의 형편을 설명했다. 설명이 끝나자 미국인이 답했다.
 
  “OK. 불쌍한 것도 됐고, 가난한 것도 됐네요. 그러면, 아들들이 못생겼습니까?”
 
  이 목사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Yes, they are(예, 그렇습니다).”
 
  미국인은 너무 좋아하며 곧바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드디어 미국으로 올 가족을 찾았습니다.”
 
  전화기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이 목사의 국적과 더불어 불쌍해 보이는지, 가난해 보이는지, 그리고 못생겼는지를 차례로 물었다. 미국인의 대답은 모두 ‘예스’였다.
 
 
  로버트 케네디 도움으로 미국 이민
 
  전화를 끊은 그가 아버지에게 “준비가 다 돼 있으니 곧 미국으로 오면 된다”고 했다. 이 목사는 환호성을 지르며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말이 안되는 이야기였다. 장남인 이삭은 폐결핵으로 여권 자체가 발급되지 않았다. 그는 영화사에 전화를 걸어 물었다. 미국인의 대답은 간단했다.
 
  “문제 없다. 우리가 해결하겠다.”
 
  회사 측은 곧바로 한국에 전화를 걸어 丁一權(정일권) 당시 국무총리에게 이 목사 가족의 여권을 요청했다. 그러자 가족에게 즉시 여권이 발급됐다. 비자는 미국 총영사관에서 발급해 줬다. 거액의 항공료까지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아버지 이○○ 목사는 한참 후에야 전화 속 목소리의 주인공이 존 F. 케네디 前(전) 미국 대통령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당시 유력한 대권 후보로 떠오른 로버트 케네디는 미국의 이민 역사에 대한 내용을 담은 <A Nation of Immigrant>란 영화를 제작하고 있었다. 그 영화에 출연할 미국으로 새로 이민 오는 가정이 필요했다. 가급적이면 못생기고, 가난하고 불쌍해 보이는 주인공을 찾았는데, 이삭 목사의 가족이 선택된 것이다. 이 목사의 설명이다.
 
  “지금도 매년 11월 22일이 되면 미국의 한 케이블 방송에서 그 영화가 방영됩니다. 영화 45분쯤 지나면 화면이 바뀌면서 ‘1967, 서울 코리아’란 말과 함께 4명의 한국인 형제가 탁 튀어나옵니다. 그중 큰아들이 바로 저예요.”
 
  미국에 온 이삭 목사는 1969년 미군에 입대, 한국 근무를 하게 됐다. 당시 그는 의정부에 위치한 부대에서 특수 임무를 맡았다고 한다.
 
  “첩보 훈련을 받고 그쪽 임무를 담당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제가 그런 쪽으로 좀 발달한 것 같아요. 첩보영화를 보면 눈에 뻔히 보이는 겁니다. 계속 그쪽으로 나갔어도 잘했을 거라 믿어요. 그런데 목사가 된 거죠.”
 
  ―군 훈련 경험이 對北(대북) 선교에 도움이 됩니까.
 
  “비밀리에 북한에 들어가 성경 전해 주고 복음 전하는 것이 저희 임무인데, 군 시절 배웠던 것이 많은 도움이 되죠.”
 
  1971년, 군 제대 후 그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됐다.
 
  “목사가 됐는데 목회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설교도 어설펐어요. 그렇게 평범하게 있었는데, 하루는 한 목사님이 오셔서 제게 ‘너 중국 가라’ 그러더군요.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중국인처럼 생겼다는 거죠. 걷는 것도 중국인, 느린 것도 중국인, 생긴 것도 중국인…. 처음엔 농담으로 듣고 웃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중국 가게 됐습니다. 그리고 중국에 가서야 제 恩賜(은사·하나님이 준 재능)를 발견했죠.”
 
  ―은사가 뭐였습니까.
 
  “밀수.”
 
  그는 지난 20여 년간 중국에만 성경 500만 권을 ‘밀수’했다. 무게만 해도 1000t이 넘는다. 북한에도 약 8만 권의 성경을 몰래 들여보냈다.
 
  月刊朝鮮은 1996년 12월 ‘북한 지하교회 100개 살아있다’란 기사에서 북한 지하교회의 현실과 대북 성경 밀반입 현장을 자세하게 소개한 바 있다. 당시 보안상의 이유로 ‘김 부장’ 등으로 불리며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졌던 대북 사업가들이 바로 이삭 목사와 모퉁이돌선교회 선교사들이었다.
 
  ‘밀수 방법’은 다양했다. 북한의 무역업체와 계약을 맺고 중국에서 빵을 생산해 대량으로 넘기는 방식이다. 중국 단둥(丹東)에서 신의주로 가는 화물열차 바닥에 ‘쪽복음’ 성경을 대량으로 깔고, 그 위에 빵을 실어 보냈다. 서류상으로는 북측 업체가 빵을 구입하는 모양새지만, 사실은 무료로 제공하는 것으로 무역업체 직원도 북한 지하교인이었다.
 
 
  북한으로 성경 밀수 秘話
 
북한 지하교인이 자필로 적어서 만든 찬송가.

  압록강 유역에서 20㎏들이 쌀주머니를 가득 단 고무보트를 떠내려보내는 방법도 실행됐다. 쌀주머니 안에는 성경책이 담겨 있었는데, 이런 방식으로 한 달에 수 t의 쌀과 수백 권의 성경이 북으로 흘러들어갔다. 호주의 자선단체에서 헌 옷가지를 모아 북한으로 보낼 때 옷 속에 1달러 지폐와 성경책을 함께 넣는 방법도 사용했다. 이삭 목사의 말이다.
 
  “방법은 수백 가지가 있어요. 자전거 삼각 지지대를 분해해 파이프 속에 작은 성경책(꼬마 성경)을 넣으면 40여 권이 들어갑니다. 이 방법들은 발각돼 많은 지하교인이 순교했기 때문에 더 이상 쓰지 않는 방식이라 공개를 합니다. 이 외에도 공개하지 못하는 방법이 많아요. 전 세계 각국에서 이용되는 밀수 수법은 모두 동원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러시아를 유랑하던 탈출 벌목공들도 이삭 목사의 도움을 받았다. 이 목사는 러시아 벌목 현장에서 탈출한 그들을 러시아 각지의 은신처로 피신시키고 도피 경로를 마련해 주기도 했다. 또 블라디보스토크 모처에 숨어 있던 탈출 벌목공 수십 명을 단체로 선박에 태워 한국으로 귀순시키기 위해 제3국 선박을 수배했는데, 선박회사에서 경비정 또는 군함의 추격에 대한 보험료를 터무니없이 비싸게 부르는 바람에 포기해야 했다.
 
  이 과정을 취재했던 月刊朝鮮 金容三(김용삼) 기자(現 月刊朝鮮 편집장)는 ‘피랍·탈북 인권연대’의 대표 故(고) 李犀(이서) 목사에게 ‘다국적 NGO와 언론을 동원한 대량 해상 탈북’을 제안했다. 그 결과 시도된 것이 2003년 1월 중국 산둥(山東)성 옌타이(煙臺)에서 터진 ‘78명 대량 해상 탈북(보트피플)’ 사건이었다.
 
  한국과 일본의 탈북자 지원단체들이 계획한 이 시도는 사전에 중국 공안에 정보가 누출돼 탈북자 58명과 한국인 2명(프리랜서 사진기자 석재현, 무역업 종사자 최영훈), 조선족 1명이 체포돼 실패했는데, 만약 성공했다면 북한 인권과 탈북자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크게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가 북한 선교를 시작하게 된 사연은 이렇다.
 
  “1983년에 선교 훈련 과정 중 처음으로 중국에 ‘정탐’을 갔습니다. 그때 북·중 접경지에서 조선족들을 만났는데, 규모는 작지만 이미 나름의 방법으로 성경을 북한에 들여보내고 있더라고요.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제가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도청 장치 앞에다 설교 테이프 틀어놓아
 
  미국에 돌아온 이삭 목사를 선교단체에서 다시 불렀다. 한 미국인 선교사가 이 목사에게 자신들이 10년 동안 찾아 헤맸던 ‘북한 선교 적격자’를 드디어 찾았다며 그를 만나게 해주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저를 어느 방으로 데려가더라고요. 그런데 방이 비어 있었어요. 그 적격자가 바로 저였어요. 북한에서 태어나, 미국 시민권을 갖고 있고, 얼굴·피부색·언어가 같은 제가 북한 선교를 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이삭 목사는 곧바로 중국·북한 선교 준비에 착수했다. 미국과 한국에 모퉁이돌선교회를 정식 등록하고, 중국을 드나들면서 성경 밀수 루트를 개발했다. 그의 설명이다.
 
  “당시 북한 선교는 일본, 독일, 중국 교회가 중심이 돼 일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조총련의 북송사업 당시 선교를 위해 함께 북한으로 들어간 민단 소속 기독교인들이 있었고, 동독 출신의 엔지니어들은 영국에서 인쇄된 ‘쪽복음 성경’을 북한에 보급했습니다. 중국 교회는 당시 1년에 합법적으로 드나드는 15만명이나 되는 조선족을 통해 성경뿐 아니라 양식과 의약품을 북한에 반입했습니다.”
 
  이삭 목사의 모퉁이돌선교회도 친척 방문을 위해 합법 또는 불법적으로 중국에 건너오는 북한 주민들에게 성경을 전달했다. 이 목사의 말이다.
 
  “미국서 선교 훈련을 받을 때 두 가지 배운 것이 있어요. 첫째는 ‘앞문으로 들어가라. 그게 불가능하면 뒷문으로 들어가라. 뒷문도 안되면 주위에 불을 질러라’입니다. 그땐 몰랐는데, 후에 보니 휴전선이 앞문, 중국은 뒷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불을 지르는 것은 조선족 교회의 활성화였죠.”
 
  ―두 번째는 무엇입니까.
 
  “북한에서 할 수 있는 선교방법으로 ‘훔쳐보게 하라, 훔쳐 갖게 하라, 훔쳐 듣게 하라’예요. 훔쳐보는 것은 성경책, TV, DVD 등이고, 훔쳐 갖는 것은 삐라 등을 통해 뿌려 줍게 하는 것, 듣게 하는 것은 도청과 라디오죠.”
 
  ―도청은 어떤 방법을 말하는 겁니까.
 
  “평양을 방문해 호텔에 들어가면 도청을 하는 게 뻔히 보입니다. 저는 도청장치 앞에다가 설교테이프를 반복해서 틀어놓습니다. 북한 입장에선 항의할 수도 없어요. 항의 자체가 도청을 인정하는 거니까요. 외출할 땐 성경도 펼쳐놓고, 설교집과 기독교 관련 소책자들을 두고 갑니다.
 
  영화 CD나 비디오도 많이 가져갔습니다. <벤허> <나사렛 예수> <십계명> 등 영화 테이프를 방 안에 꽂아놓고 나가면 2~3일 뒤에 다 없어져요. 그리고 나중에 떠날 때쯤 다시 꽂혀 있습니다. 그들이 가져가서 복사하거나 봤다는 얘기죠.”
 
 
  1993년부터 북한으로 풍선 날려
 
月刊朝鮮 1994년 7월호에 게재된 ‘기독교인들이 나선 북한동포 구출 작전의 비화’ 기사. 2년 동안 2만 개의 풍선을 날린 ‘L목사’와 ‘○○선교회’는 각각 이삭 목사와 모퉁이돌 선교회를 뜻한다.

  이 목사는 성경책을 북한에 직접 뿌리기도 했다. 산책을 핑계로 작은 성경책을 코트 속에 숨기고 나와 버스정류장이나 우체통 등에 두고 오는 방식이다.
 
  최근 탈북자 단체들이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는 대북 삐라도 그 시작은 이삭 목사였다. 이들은 북·중 접경지대와 경기도의 자유로 부근에서 신약성경 마가복음 全(전) 구절이 인쇄된 주황색 풍선을 만들어 북한 쪽으로 수없이 날려보냈다.
 
  1947년부터 러시아에 성경 밀반입 활동을 해온 리차드 범브란트 목사가 이 목사에게 “루마니아에 풍선을 보낸 지 1년 만에 독재자 차우셰스쿠가 축출당했다”며 적극적으로 풍선 보내기를 제안했고, 이삭 목사는 1993년부터 북한으로 풍선 날리는 작업을 시작했다. 정확히 1년 뒤 金日成(김일성)이 사망했다.
 
  “풍선을 보낸 지 6개월 만에 호주 첩보기관에서 연락이 왔어요. 자신들이 입수한 정보를 이야기해 주더군요. 북한의 한 마을에서 아이가 학교에 가려는데 울타리에 주황색 풍선이 걸려 있더라는 겁니다. 아이가 그걸 주워서 어머니에게 주니까, 놀란 어머니는 학교에서 절대 이야기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기독교인이었던 친정 어머니에게 보여줬답니다. 그러자 친정 어머니는 ‘우리가 잊힌 줄 알았는데’라며 눈물을 글썽였고, ‘언젠가 국군이 이곳에 오면 이 풍선을 들고 나가자’고 했답니다. 북한 지하교인들은 남한이나 외부 세계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성경 삐라를 통해 자신들이 잊히지 않았다고 다시 한 번 다짐을 하는 거죠.”
 
  月刊朝鮮은 1994년 7월호 ‘기독교인들이 나선 북한동포 구출 작전 비화’ 기사에서 2년 동안 2만 개의 풍선을 날린 이들의 ‘작전’을 자세히 소개했다. 기사에 등장한 ‘L목사’와 ‘○○선교회’는 각각 이삭 목사와 모퉁이돌선교회를 뜻한다.
 
  풍선 외에도 수십만 장의 전도지가 북한에 뿌려졌다. 1990년대 초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소련군 헬기를 빌려 하루 동안 북한 동편 바다에 전도지 5000장을 뿌리기도 했다.
 
  “당시 소련군 헬기를 하루 빌리는 데 미화 200달러면 충분했어요. 비닐봉투에 전도지와 사탕 등을 넣고 북한 청진 앞바다에 열심히 뿌렸습니다.”
 
 
  북한 지하교인과 만나다
 
북중 접경지 한 야산에 위치한 지하교인 피신처. 이곳에서 비밀리에 선교 훈련을 받은 북한 지하교회 지도자들은 입북 후 북한 주민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하고 있다.

  1987년 이 목사는 처음으로 중국에서 북한 지하교인을 만나게 된다. 이 목사를 만난 북한 할머니는 “평생 소원이 마음 놓고 기도 한 번 해 보고, 마음 놓고 찬송 한 번 해 보는 것”이라고 했다. 그에게 한국에서 가져간 <톰슨 성경>을 전해 주면서 이 목사가 “성경이 너무 커서 가져가는 게 위험하지 않으냐”며 묻자, 할머니는 “죽으면 빨리 천국 가는데 무슨 상관 있느냐”며 성경책을 소중히 받아 들고 돌아갔다.
 
  1989년 1월, 이삭 목사는 처음 북한을 공식 방문했다. 미주 동포들의 북한 관광단에 합류해 북한에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한 해 동안 세 차례를 연이어 방북했다. 그때 이 목사는 한 북한인 안내원과 의미 있는 만남을 가지게 된다.
 
  “우리 여행단에 북한인 가이드가 따라붙었는데, 그 사람이 신의주까지 함께 동행하고 싶다는 겁니다. ‘친척이 신의주에 산다’는 이유였는데, 계속 감시하겠다는 표현을 그렇게 하더라고요.”
 
  오전에 평양을 떠난 이들은 점심 때가 돼 도시락을 꺼내 먹었다. 도시락을 먹다가 이 목사는 갑자기 북한 주민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눈물이 났다. 북한인 가이드가 “밥 먹다가 울면 체한다”며 물 한 잔을 권했다. 김일성의 친필이 적힌 ‘신덕샘물’을 따라주며 그는 “이 물을 마시면 얼굴이 고와지고 오래 산다”고 덧붙였다. 이 목사는 “이 물 마신다고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살고 죽는 것은 조물주에게 달렸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가이드는 “맞다. 사람이 오래 사는 것은 하나님께 달렸다”고 맞장구를 쳤다.
 
  이삭 목사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목사 신분을 밝히지 않았기에 ‘하나님’을 ‘조물주’로 표현했는데, 상대방은 ‘하나님’이라고 대답한 것이다. 이 목사는 그를 잠시 불러 세웠다.
 
  “여보게, 아까….”
 
  “제가 말할게요. 목사님이시죠?”
 
  가이드는 자신이 장로의 아들이며 자신도 예수를 믿고 있다고 고백했다.
 
  이 목사는 그 후 가이드를 비롯해 군인, 호텔 종업원, 당 관계자 등 수없는 북한의 지하교인들을 만나게 됐고, 성경 밀반입 작업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북한에 두 번 방문하니 공항 세관이 아주 단순하다는 걸 알았어요. 셰퍼드 한 마리를 끌고 와 가방을 밟아 보고 냄새를 맡게 하는 것이 끝입니다. 책은 문제가 없겠다 싶어 세 번째 방문 때 가방 세 개에 성경책 75권을 나눠서 갖고 들어갔죠.”
 
 
  고문 후유증으로 기억상실
 
이삭 목사의 자택 벽 곳곳에는 그의 아내가 직접 적은 성경 구절 메모로 가득차 있다.

  1991년 11월, 결국 중국 공안에 덜미를 잡혀 물고문, 전기고문, 냉동고문을 80여 시간에 걸쳐 당했다. 고문을 하던 중국인들은 “당신은 왜 자꾸 성경을 가져오느냐”고 항의했고, 이 목사는 “나는 중국을 사랑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일을 한다. 당신들도 나처럼 중국을 사랑할 날이 올 것이다”고 답했다.
 
  “물과 전기고문을 받은 후 정신을 잃은 저를 질질 끌고 가더라고요. 영하 20도가 넘는 냉방이었습니다. ‘똥오줌이 마렵다, 화장실에 가게 해달라’며 소리를 질렀지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결국 그 자리에 앉아서 용변을 봤습니다.”
 
  냉방에 이틀 동안 갇혀 있으면서 이 목사는 눈물을 흘리며 주기도문의 첫 구절을 수천 번 되뇌었다.
 
  당시 이야기를 하던 이삭 목사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18년 전 악몽이 떠오르는 듯 그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며칠 후 그들이 옷을 주면서 가자고 합디다. 그런데 일어날 수도, 걸을 수도 없었어요. 또다시 질질 끌려가 트럭에 실려 시내를 40여 분 동안 빙빙 돌다가 호텔에 데려다 줬습니다. 그런데 영어를 할 줄 알던 한 중국인이 이 목사에게 영어로 이렇게 속삭였다.
 
  “왜 당신은 화를 안 냅니까? 우리가 한 달에 70명을 고문하는데 당신 같은 사람은 처음입니다.”
 
  이삭 목사는 대답하려고 해도 말을 할 수 없었다. 입술과 혀가 모두 찢기고 헐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로 몸이 회복되자 이번엔 자신이 누구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전기고문의 충격으로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이다. 아무런 연락처도 생각나지 않았다. 벽만 쳐다보면서 계속 외쳤다. “하나님 우리 집 전화번호 가르쳐주세요”라고. 몇 시간 동안 그러고 있으니까, 갑자기 벽에 숫자 환영이 보였다. 바로 전화를 걸었다. 어떤 여자가 전화를 받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보, 나야.”
 
  이삭 목사는 아내의 목소리도 전혀 기억할 수 없었다. 아내의 음성조차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다. 결국 3주 만에 기억을 되찾을 수 있었다.
 
 
  북한말 성경 제작, 對北 선교방송…
 
모퉁이돌선교회가 북한에 밀반입하는 ‘북한말 성경’. 남한말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북한 주민들의 요청에 전문가들을 모아 ‘번역’했다. 성경 아래 비닐용지는 1993년부터 북한에 보내기 시작한 ‘풍선 삐라’.

  13년 후, 그는 다시 그 도시를 찾았다. 그동안 무서워서 찾지 못했던 곳이었다. 자신의 신변 때문이 아니라, 혹시나 작은 도시에서 자신을 고문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어떻게든 그들을 죽일 것 같다는 증오의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런데 꼭 가야 되는 상황이 생겼어요.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별 수 없이 그 도시에 다시 가야 했죠. 그곳에서 한 아주머니를 만났어요. 길을 걷는데 제 옆에 나란히 서서 ‘목사님’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날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죠. 그녀는 대답 대신 이렇게 물었습니다. ‘13년 전 여기서 고문당한 적 있죠? 고문했던 사람들은 용서하셨습니까’라고요.”
 
  이 목사는 그녀에게서 놀라운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된다. 13년 전 자신을 고문했던 4명과 그 가족들이 모두 기독교인이 됐다는 것. 그들은 모진 고문에도 아무 말 없이 참는 모습을 보고 감명을 받아 교회를 찾았다. 그녀는 길 건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남자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가장 혹독하게 목사님을 고문했던 사람입니다. 제 남편인데, 지금은 목사가 됐어요.”
 
  고문 사건 후에도 그의 북한 선교는 계속됐다. 남한말로 번역된 성경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에 전문가들을 모아 북한말 성경을 펴냈다. 당시 번역작업엔 姜哲煥(강철환) 조선일보 기자를 비롯한 탈북자들과 성경학자, 헬라어·히브리어 학자 등 전문가들이 대거 참여했다. 대북 단파 방송을 송출하고, MP3와 라디오 등을 북한에 지속적으로 보냈다. 북한의 어용 기독교 조직인 ‘조선그리스도교연맹’에도 미국 기독교인들로부터 지원 받은 약품을 컨테이너 에 실어 2년 동안 보냈다. 컨테이너 한 개당 약 500만 달러치의 약품이 실려있었다. 이 목사의 설명이다.
 
  “그냥 ‘알아서 쓰라’고 했어요. 약을 보내면 누군가는 혜택을 받을 것 아닙니까. 당시 저는 ‘김정일 회개하라’고 글도 쓰고 북한 정권을 비난하는 방송도 하니까 저쪽(북한)에서 연락이 오더라고요. 때가 되면 욕을 잔뜩 적어서 서신을 보낼 날이 올 것이니 이 서신을 받으면 북한에 들어오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해 10월에 나를 이중인격자라며 욕을 하는 팩스를 보내 왔더라고요. 나중에 알았죠. 그 사람들이 나를 살리려고 그렇게 했다는 것을.”
 
 
  黃長燁 망명에도 깊이 개입
 
중국 창바이(長白)현에서 압록강 다리를 건너 북한 혜산시로 가는 트럭들. 모퉁이돌선교회는 북·중 무역 현장에서 다양한 경로를 통해 성경과 영상 자료를 대량으로 밀반입시키고 있다.

  북한을 탈출해 중국으로 온 탈북자들을 비밀장소에서 선교 훈련을 시킨 후, 다시 북한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도 모퉁이돌선교회의 중요한 사역 중 하나다. 지금까지 수백 명의 탈북자들이 선교회를 통해 교육을 받았고, 이들이 북한으로 돌아가 지하교회를 세워 극비리에 활동하고 있다. 이 목사의 말이다.
 
  “몇 해 전 65명의 북한 주민들이 중국으로 몰래 나왔습니다. 그중 79세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는데, 제가 ‘왜 (북한을) 나오려고 하느냐’고 묻자 ‘찬송 한 번 마음껏 불러보고 싶어서’라고 하더군요. 가슴이 너무 찡해서 한국으로 들여보내 주겠다고 했어요. 할아버지는 잠깐 기도할 시간을 달라고 하더라고요. 기도를 끝낸 할아버지는 자신이 응답받은 내용을 제게 전했습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 너희를 북한 땅에 남겨둔 줄 아느냐’며 ‘매 맞는 것도, 굶는 것도, 65명이 수용소에 들어가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뜻’이라며 한국으론 못 가겠다는 겁니다. 다 떨어진 신발에 난 구멍으로 튀어나온 발가락에 입을 맞추면서 통곡을 했어요. ‘서울 가시면 이 신발 안 신으셔도 돼요’라며 소리쳤지만, 할아버지는 ‘하나님이 북한에 남으라고 하셨다’며 결국 북한으로 돌아갔어요.”
 
  이들 65명 전원은 북한으로 돌아가는 중 체포됐다. 그중 젊은이 6명은 군에 반항했다는 이유로 폭행당해 죽었고, 나머지 59명은 수용소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이삭 목사는 1996~97년 黃長燁(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의 한국 망명작전에도 본의 아니게 개입하게 된다. 당시 月刊朝鮮의 김용삼 기자는 이연길 북한민주화촉진협의회장(2009년 작고)을 통해 극비리에 황장엽, 김덕홍과 접촉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북한 내부에서 자신들의 입지 강화를 위해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방미 초청장을 받아줄 것을 요청했다. 이연길씨는 이에 대한 협조를 김용삼 기자에게 했고, 김 기자는 이삭 목사에게 협조를 요청했다. 당시 이 목사는 미국의 유력 인사들의 도움으로 카터 재단과 접촉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대신 미국 상원의원들의 방미 초청장은 가능하다는 답을 얻었다.
 
  이렇게 되자 사정이 급해진 황장엽씨는 의약품 지원을 요청했다. 김 기자로부터 의약품 지원 요청을 받은 이 목사는 황장엽 비서가 대표로 있는 평양의 국제주체재단 앞으로 의약품 컨테이너 발송을 준비하던 도중, 두 사람은 일본을 방문하고 귀로에 들렀던 베이징에서 망명을 감행한 것이다.
 
 
  북한 난민 구호 위한 준비도
 
한국 집무실에서 작업 중인 이삭 목사. 낡은 책장과 집기들은 그의 소박한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1994년 8월 홍콩 빅토리아 이민국 감호소에 수감 중인 북한 특수부대 출신 탈북자 홍철남씨를 발견한 이도 이삭 목사였다. 홍씨는 베이징 주재 한국 대사관에 귀순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고, 선전을 거쳐 홍콩으로 탈출, 홍콩 주재 한국총영사관에 귀순을 재시도했다. 그러나 한국 영사관의 외교관들이 그를 홍콩 경찰에 넘겨버렸다.
 
  당시 月刊朝鮮이 사건의 전말을 보도하자 홍콩 경찰은 즉시 그를 석방했고, 그가 한국으로 귀순할 때까지 홍콩에서 1년 동안 보호해 준 이가 이삭 목사였다.
 
  이 목사의 최대 관심사는 ‘대량 탈북 난민’이다. 이제는 소수의 탈북자를 넘어 대량 난민 발생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목사의 말이다.
 
  “몇 해 전 제주도에서 북한 난민에 대한 세미나가 열렸습니다. 전 세계 각국에서 난민구조활동을 하는 조직과 단체들이 참여했죠. 각국의 난민 사례와 대책 등에 대해 활발한 토론을 했는데, 개최국인 한국은 멍하니 있더라고요. 난민에 대한 대책을 세워 본 적이 없으니까요.”
 
  이삭 목사는 외출 시엔 반드시 여권과 현금을 가지고 다닌다. 언제든 북한에 급변사태가 발생하면 중국으로 들어가 난민구호활동을 하기 위해서다. 만약을 대비해 유엔 산하 언론사 기자증도 함께 가지고 있다.
 
  이 목사는 ‘영화광’ 김정일에게 책과 영상물을 보내는 작업도 하고 있다. 기독교적 메시지가 담긴 야쿠자 영화 DVD를 보냈고, 이라크 전쟁 때는 ‘두려움을 느끼게 하려고’ 미군의 폭격 장면을 편집한 DVD를 보냈다.
 
  “어렵지 않습니다. 중국, 일본, 싱가포르 등지에 가서 북한 노동당 주소와 수신자를 ‘김정일 국방위원장 귀하’라고 씁니다. 김정일 이름이 적힌 이상 함부로 버리진 못하겠죠. 최소한 보고는 할 것 아닙니까. 지금도 새로 나온 영화는 부지런히 보내고 있어요.”
 
  성경과 영상물뿐만 아니라 月刊朝鮮도 북한에 밀반입했다. 지난 2000년 2월, 평양 고려호텔 객실에 月刊朝鮮이 비치된 모습이 평양을 방문한 金順權(김순권) 국제옥수수재단 이사장 일행에 발견돼 月刊朝鮮에 게재됐다. 당시 月刊朝鮮 4월호는 “북한 당국이 月刊朝鮮을 ‘애독’하고 있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지만 호텔방에 내놓은 이유를 현재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는 것이 아쉽다”고 전했다.
 
 
  月刊朝鮮 북한에 밀반입
 
  간단한 해프닝으로 넘어갈 만한 일이었는데, 곧바로 평양방송이 ‘날조’라고 주장하며 반박 논평을 내 사건이 커졌다. 평양방송은 “우리의 평양 고려호텔에는 그런 구린내 나는 괴뢰들의 모략지가 놓여 있을 수도 없고 있어 본 적도 없다”고 주장했다.
 
  이 사건의 주인공도 이삭 목사였다. 당시 모퉁이돌선교회는 북한을 방문하는 미국 국적의 비밀 선교사들에게 月刊朝鮮 과월호를 정기적으로 전해줬고, 그들은 평양에 들어가 자기들이 묵는 호텔과 주요 기관에 몰래 책을 두고 나왔던 것이다. 그 사건 이후에도 그들의 月刊朝鮮 배달은 당분간 지속됐다.
 
  이 목사는 대북방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한국 내에선 정부의 불허로 단파 방송을 할 수 없어 이들은 전 세계를 떠돌며 북한을 향해 복음을 전하는 전파를 발신하고 있다.
 
  “예전엔 필리핀, 일본, 페루 등 세계 각지에서 단파 방송을 했습니다. 심지어 公海(공해)상에 배를 띄워 해적방송을 할 생각까지 해봤어요. 그러나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포기했어요. 제일 간단한 방법은 남한에서 전파를 쏘는 건데 정부가 허가를 내주질 않더군요.”
 
  ―대북 선교방송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입니다.
 
  “현재 상황에서 북한 주민의 자유를 위한 가장 강력한 방법 중의 하나가 대북 선교방송입니다. 그 전에 성경이 먼저 보내져야 하고요. 북한을 비폭력적으로 문을 열게 하는 가장 강한 햇볕은 기독교에 있다고 봅니다. 선교야말로 통일 후 북한 주민이 받을 충격을 크게 완화시켜 줄 것입니다.”
 
  ―외국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1984년의 일입니다. 미국의 한 선교단체 사무실을 방문했는데, 커다란 북한 지도가 벽에 붙어 있었어요. 그곳에 북한 기독교인이 발견될 때마다 표시를 했는데, 그 당시 숫자가 3500명이었습니다. 한국에선 대북 선교의 개념조차 없을 때였죠. 지금 세계 각국에서 많은 사람이 북한 주민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입니까.
 
  “예전에 홍콩을 방문해 중국 기독교 리더들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왜 당신들은 북한 선교에 적극적이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그건 한국인들의 몫’이라고 대답하더군요. ‘정상적인 외교관계도 없고, 비자도 못 받는 한국인이 하기엔 너무 어렵지 않으냐’고 되물으니 ‘언제 성경이 여권 받고 비자 받고 들어갔느냐’며 저를 책망하더라고요. 역사적으로 성경은 단 한 번도 쉽게 들어간 적이 없습니다. 항상 피를 흘려야 했지요.”
 
 
  네 형제 중 세 형제가 목사 돼
 
  이삭 목사와 모퉁이돌선교회 선교사들은 지금도 북한을 오가며 북한 주민들을 위해 성경과 의약품을 공급하고 있다. 네 형제 중 세명은 목사가 됐다. ‘네 형제 모두 목사가 돼라’는 45년 전 어머니의 말씀이 실천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연간 200여 차례 강단에 선다. 나이는 이미 환갑을 넘었지만, 패기는 20대 청년들보다 더 강하다. 모든 집회 현장엔 항상 아내가 동행하며 내조하고 있다. 이 목사는 단 한마디 불평 없이 40년 동안 힘든 사역을 도와준 아내에게 항상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고 했다.
 
  한국뿐 아니라 미국과 일본 등의 기독교 단체와 개인들이 모퉁이돌선교회를 적극적으로 돕고 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외국의 기독교인들이 북한 주민을 위한 구호활동과 기독교 전파를 위해 뛰고 있는 이 선교회를 말없이 지원하고 있는 것이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매일 긴장해야 하는 북한 선교가 무섭지 않으냐고 물었다.
 
  “북한을 방문했을 때 한 번은 북한 관리들이 똑같은 질문을 하더군요. 제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무섭죠. 하지만 나는 북한을 사랑해요. 당신들이 나를 아무리 괴롭혀도 저는 북한을 사랑하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입니다.’”⊙

이삭
⊙ 1945년 북한 출생.
⊙ 1967년 渡美, 미국 개혁장로회 신학교 졸업. 라성 빌라델비아 교회 부교역자 역임.
⊙ 現 모퉁이돌선교회 대표.
⊙ 저서: <붉은 예수쟁이> <북한도 복음화하라> 등 다수.

月刊朝鮮 2009년 10월호

[정치·북한] - [현지취재] 북한 지하교회 지도자를 찾아서
[정치·북한] - 로버트 박, 入北 5개월 전 중국 현지에서 사전 점검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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