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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도서국 14개국 르포] ③ 한국과의 공존 꿈꾸는 거친 잠재력의 섬, 축(Chuuk)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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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도서국 14개국 르포] ③ 한국과의 공존 꿈꾸는 거친 잠재력의 섬, 축(Chuuk)

김정우 기자 2013.10.31 14:00
"나는 헛살았다!"

소설가 김훈(金薰)이 웨노(Weno)섬을 다녀가며 남긴 말이다. 지난해 2월 마이크로네시아연방(FSM·또는 미크로네시아연방) 축주(Chuuk州)의 섬들을 7일간 여행한 그는 웨노섬에 자리한 한국 태평양해양연구센터 방명록에 "평생 처음 보는 아름다운 자연"이란 글귀와 함께 열대 밀림 앞에 선 인간의 무력함을 한 문장으로 논했다.

명망(名望) 높은 작가의 인생을 '헛삶'으로 표현하게 한 섬의 비밀은 무엇이었을까. 태평양 2만5000여 개 섬 중 가장 거칠다는 주민들의 삶 속에서 그가 발견한 깨달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는 여행 후 기록한 글에서 "내 느낌은 대부분 언어화되지 않는다"고 털어놨다. 대양 가운데 자리한 섬을 언어화하는 것은 탁월한 작가에게도 쉽지 않은 일인 모양이다. 거대한 환초(環礁)에 둘러싸인 축의 섬들은 더욱 그렇다.

 

마이크로네시아연방 축(Chuuk)주 태평양해양 연구센터에서 바라본 초호(礁湖) 모습. ⓒ김정우


'축'이란 이름은 현지어로 '산'이란 뜻이다. 과거 독일 지배 당시의 영향으로 꽤 오랜 시간 트럭(Truk)섬으로 불렸다. 이집트의 홍해(紅海), 말레이시아의 시파단(Sipadan)과 함께 세계 3대 스쿠버다이빙 코스로 유명한 이 섬들을 많은 다이버는 지금도 '축'이 아닌 '트럭'으로 부른다.

축을 비롯해 폰페이(Pohnpei), 코스라이(Kosrae), 얍(Yap), 총 4개 주로 구성된 마이크로네시아연방의 인구는 약 11만명이며, 이 중 7만여 명이 축주에 산다. 축 주민 중 약 4만명이 주도(主島)인 웨노섬에 거주하고, 나머지 3만여 명은 290여 개의 섬들에 흩어져 산다. 공항이 자리한 웨노섬은 축에서 유일하게 전기가 들어오는 곳이다.

'가장 낙후된 환경'

 

축 웨노섬 도로는 빗물이 고인 노상 곳곳에 '포트홀'이 자리 잡아 초행길에 차를 운전하다간 바퀴가 구멍에 빠지기 일쑤다. ⓒ김정우


축 공항에 내려서자마자 시골 정류장 냄새가 물씬 났다. 마이크로네시아 섬들의 시외버스 격인 완행비행기(Island hopper)를 타고 축에 내린 30여 명의 승객 중 11명이 한국인이었다. 기자를 포함한 8명은 태평양해양연구센터가 목적지였고, 3명은 현지교민 일행이었다. 활주로 옆 철조망 너머로 수십 명의 축 주민들이 우리를 관찰하고 있었다. 한국인을 제외한 20여 명을 마중나온 이들이라고 하기엔 공항 대합실까지 가득 메운 인원이 너무 많았다.

"특별한 목적이 있어 공항에 온 게 아니라 그냥 신기해서 구경 나온 사람들이에요."

태평양해양연구센터의 김한준(金翰駿) 연구원이 이들의 '정체'에 대해 설명해 줬다. 하루 한 번 들어오는 비행기 시각에 맞춰 외지인을 구경하기 위해 모여든 현지인들의 '진풍경'은 반세기 전 한국의 시골장터를 떠올리게 했다.

공항 밖도 분위기는 비슷했다. 대리석으로 세워진 번듯한 공항 표지판 앞은 섬을 찾은 방문객들을 환영하기 위한 꽃 목걸이를 파는 노파들로 가득했다. 한 노인은 금이 간 조개껍데기를 내주며 연방 "파이브 달러"를 외쳤다. 집요하게 돈을 요구하는 그에게 물건을 사는 대신 1달러를 건넸다. 얼마 후 그가 축을 처음 찾은 외국인들만 대상으로 구걸하는 꽤 유명한 노인이란 사실을 전해 들었다.

태평양 주요 섬 중 '가장 낙후된 환경'으로 알려진 축은 웨노섬 북서쪽 공항을 중심으로 깔린 4km 도로를 제외하곤 대부분 비포장길이다. 빗물이 고인 노상 곳곳에 '도로 위의 지뢰 포트홀(pothole)'이 자리 잡아 초행길에 차를 운전하다간 바퀴가 구멍에 빠지기 일쑤다. 축에서 "길을 안다"는 말은 "포트홀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해 피해갈 수 있다"는 의미와 같다.

한국해양과학기술원에서 세운 태평양해양연구센터는 웨노섬 동북쪽 끝에 자리 잡았다. 공항에서 약 8km 떨어진 곳으로, 축에서도 가장 거친 주민이 사는 사푹(Sapuk) 지역에 속한다. 한국에선 10분이면 도착할 거리를 30분이 넘게 이동했다. 그나마 한국인들이 길을 보수해 줘서 과거 1시간이 넘던 시간이 많이 줄었다고 한다.

 

김훈 작가는 축을 떠나며 “나는 헛살았다!”는 문구를 방명록에 남겼다. ⓒ김정우


거친 성향의 원주민들

사푹 주민들은 외지인들에게 배타적이다. 몇몇 주민은 웅덩이가 파인 집 앞 도로를 보수해 주겠다는 한국인의 제안에 오히려 돈을 내놓으라고 했다. 그 길은 현재 가장 거대한 포트홀을 형성해 운전자들을 괴롭힌다. 외국인의 자금을 들여 집을 새로 짓게 하고선 쫓아내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운전자를 위협하는 장애물은 포트홀만이 아니다. 밤낮 가리지 않고 길 한가운데로 불쑥 튀어나오는 주민들을 피하지 못하면 큰 사고가 날 수 있다. 술에 취하거나 마약에 중독돼 어슬렁거리는 이들은 주변의 자동차나 사람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거친 성향의 주민들에 대한 주 정부의 통제력도 약해 축은 마이크로네시아 섬 중 가장 치안환경이 열악한 곳이다.

도로변 곳곳엔 온갖 쓰레기들과 함께 폐차들이 방치돼 있었다. 고철 처리와 운송이 쉽지 않은 태평양 섬나라에선 흔한 광경이지만, 축은 유독 버려진 차들이 많아 보였다. 문명의 도입과 함께 게을러진 주민들은 짧은 거리도 차를 타고 이동하기 시작했고, 새 차를 사면 기존 차량을 집 앞에 쌓아뒀다. 폐차는 모두 개인 또는 부족 소유이기 때문에 정부가 마음대로 관리할 수 없다.

자동차 부품을 구하기 쉽지 않은 섬이기 때문에 폐차는 자연스레 부속 덩어리가 됐다. 집 앞에 폐차가 몇 대 있느냐에 따라 그 부(富)를 측정하는 풍습까지 생겨났다고 한다. 폐차는 그들에게 '자존심'과 같은 존재였다.

폐차를 보면 최근 중국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보인다. 사실상 미국과 일본의 영향력 아래 있던 이 섬에 중국이 고철처리 시설을 세운 것이다. 이들은 섬 곳곳에 방치된 차들을 거침없이 수집하기 시작했다. 주민의 반발과 비용 때문에 어느 외국인도 섣불리 도전하지 못했던 사업이었다.

'태평양 영향력'에 뒤늦게 도전장을 내민 중국은 막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섬나라들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축의 공항과 활주로를 증축하고 주 정부청사 공사까지 완료했다. 인구 1만여 명의 얍엔 4000실 규모의 대형 리조트를 짓기 시작해 "사실상 얍을 독립시켜 섬 전체를 점령하는 것 아니냐"는 논란이 제기됐다.

다금바리 1kg보다 귀한 '못 먹는 식물' 1g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이 태평양해양연구센터 부지에 설치한 위성 관제 안테나 기지. ⓒ김정우


일본인을 돌아서게 한 축 주민의 배타성은 웨노섬에서 약 2.5km 떨어진 파노(Fano)섬에서도 관찰할 수 있다. 태평양해양연구센터 출입문에 서면 육안으로도 뚜렷이 보이는 이 섬엔 100여 명이 사는데, 한국 연구원들의 방문 요청을 모두 거절했다. 이들은 한국인뿐 아니라 다른 섬 주민들의 방문도 철저히 통제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방식대로 섬을 보호하며 생활한다고 한다.

30여 분 동안 축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태평양해양연구센터에 도착했다. 센터엔 현재 19명이 상주하고 있다. 이 중 연구원 2명은 한국해양과학기술원이 파견했고, 2명은 현지교민이다. 현장 작업과 경비 등을 맡은 15명은 모두 축 현지인이다. 13년 전 설립 당시엔 한국인 사업가가 운영하던 리조트 일부를 임차해 운영했지만, 숙박 사업 철수로 현재는 6500m2(약 1980평) 규모의 리조트 전체를 연구 거점으로 운영 중이다.

주 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은 한국 연구진은 ▲기초생태계 모니터링 ▲환경정보 확보 ▲해조류 등 유용 생물 소재 확보 등 기반 연구를 수행하며 ▲스피룰리나 대량 생산 ▲흑진주 항체기술 개발 ▲자생식물 씨앗 대량 확보 등 현지 연구 지원 사업도 진행하고 있다. 그 결과 90여 종의 천연물을 분리하고 400여 종 생물의 시료를 확보하는 등 연구 성과를 거뒀다.

설립 초기부터 현재까지 연구센터 운영에 참여한 박흥식(朴興植) 센터장은 "224km 둘레의 환초 안팎으로 4000여 종의 어류가 존재하는 '해양의 열대우림'인 축은 2000년 당시 미국 외엔 선진국의 연구 결과가 전무할 정도로 미지의 섬이었다"며 "주요 선진국들의 각축전으로 이미 레드오션이 된 태평양에서 축은 몇 남지 않은 블루오션"이라고 설명했다.

"과거엔 생물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눴습니다. 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오로지 '먹을 것'을 위해 바다를 연구했고, 못 먹는 것은 모두 폐기처리 했죠. 그런데 시대가 바뀌었어요. 먹을 수 없는 것에서 더 다양한 가능성이 발견됩니다. 의약품이나 기능성 소재로 주목받는 물질이 산호초 곳곳에 숨어 있습니다. 예전엔 그냥 버렸던 '못 먹는 식물' 1g이 항암제로 알려지면서 다금바리 1kg보다 더 가치가 큰 시대가 됐죠. 저희도 이곳에서 먹을 것을 생산하기보단 여러 성분을 놓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마이크로네시아연방


마이크로네시아연방 정부청사 중앙에 휘날리는 연방국기와 4개 주기(州旗).


서구에 발견된 이후 캐롤라인제도(Caroline Islands)로 불리던 섬들이 미국으로부터 1986년 독립하며 구성된 연방국이다. 독립 전까지 마셜제도(Marshall Islands), 마리아나제도(Mariana Islands), 팔라우 등과 함께 마이크로네시아로 불렸다. 현재 폰페이, 축, 코스라이, 얍 4개 주로 이뤄져 있으며, 면적은 705km2, 인구는 약 11만명이다. 수도는 폰페이 섬에 자리한 팔리키르(Palikir)이며, 8개의 토착언어와 함께 영어를 공용어로 쓴다.

각 주별로 1명씩 4년 임기의 의원을 선출하고 2년 임기 의원은 주 인구에 따라 축 5명, 폰페이 3명, 코스라이 1명, 얍 1명 등 총 10명이 있다. 대통령과 부통령은 4년 임기 의원 중 서로 다른 지역 출신 의원 1명을 각각 선출한다. 임마누엘 모리(Mori) 현 대통령은 축 출신으로 연방 최초로 연임에 성공했다.

미국과 자유연합협정(Compact of Free Association)에 따라 군사·안보는 미국이 담당하며, 외교와 행정은 연방 정부가 맡고 있다. 정부 재정은 연간 2억 달러 규모의 미국 원조와 한·미·일·타이완 등으로부터 받는 연간 2000만 달러 규모의 입어료 수입 등으로 충당한다. 1인당 GDP는 약 3000달러 수준이다.

한국과는 1991년 수교해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양국의 교역 규모는 2010년 기준 약 870만(수출 812만·수입 60만) 달러다.

"바다 中層 정복하는 국가가 바다 지배"

태평양의 평균수심은 약 4300m다. 이 중 어업이 이뤄지는 깊이는 약 200m에 불과하다. 해양연구는 주로 표면과 저층을 목표로 실행되는데, 심해 저층은 이른바 '쌍끌이 작업'을 통한 수집으로 연구가 가능하다. 표면과 저층을 제외한 중층은 여전히 미지의 세계다. 박 센터장은 "결국 깊이 1000m 이상의 중층을 가장 먼저 정복하는 국가가 모든 바다를 지배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축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환초를 보유하고 있다. 항공사진으로 보면 크고 작은 수백 개 섬을 거대한 목걸이 모양의 환초가 넓게 두른 모양새다. 산호초로 구성된 환초의 폭은 보통 100m에 이르며, 넓은 곳은 300m를 훌쩍 넘긴다. 화산과 산호의 상호작용이 만들어낸 이 '작품'은 태평양 섬들의 과거와 미래를 한눈에 볼 수 있게 해준다.

섬과 환초의 거리는 섬의 '수명'에 따라 다르다. 화산섬 해안을 따라 거초(裾礁·fringing reefs)가 두른 코스라이는 가장 젊은 섬이다. 가운데 화산섬이 가라앉아 연안에 초호(礁湖·lagoon)가 형성된 폰페이는 어느 정도 '섬의 진화'가 시작된 곳이다. 오랜 세월이 흐르면 축과 같이 화산섬의 꼭대기만 남은 모양이 되며, 화산섬 전체가 수면 아래 가라앉고 환초만 남은 마셜제도의 마주로(Majuro)나 콰잘렌(Kwajalein)과 같은 섬은 화산섬의 마지막 단계인 셈이다.

태평양해양연구센터 연구진과 함께 축의 바닷속에 뛰어들었다. 세계 3대 스쿠버다이빙 명소에 걸맞게 형형색색(形形色色) 산호초와 열대어가 눈앞에서 장관을 연출했다. 무슨 냄새를 맡았는지 작은 상어 한 마리가 기자를 따랐지만, 큰 위협은 되지 않았다. 환초 안쪽의 평균 수심은 40m, 최대 수심은 80m다. 환초를 넘어서면 곧바로 1000m가 넘는 심해가 펼쳐진다.

축 해역의 수온은 평균 28~29℃다. 25℃ 이상이 되면 수중의 인(燐) 함량이 적어진다. 유기물이 필요한 플랑크톤은 인을 확보하기 위해 산호 안으로 들어가고, 이들이 배설한 포도당은 산호의 먹이가 된다. 공생(共生) 관계는 바닷속 플랑크톤을 산호 속으로 모으는 구조로 진화하면서 투명한 열대바다가 완성된다.

"나와 결혼할 사람?"

 

축(왼쪽)과 폰페이 섬 곳곳에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방치된 전차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김정우


수몰된 일본군의 망령과 다이빙 명소와의 '역설적 조화'는 우리 역사와도 무관하지 않다. 전쟁 당시 팔라우와 함께 일본 '남양군도(南洋群島)'의 요충지였던 축은 3000여 명의 한국인이 강제 징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자국인 전몰자 유골을 수습하고 대리석으로 번듯한 추모비까지 세워둔 일본과 달리, 한국은 제대로 된 조사도 시도하지 못했다. 다만 이를 안타까워한 한 사업가가 태평양해양연구센터 입구에 한국인 희생자를 추모하는 불상(佛像)을 세운 게 전부다.

한국의 축 진출은 전쟁의 상흔(傷痕)에 방치된 역사와 현재를 바꾸고 있다. 일제의 잔혹함을 경험한 주민들은 지금도 일본엔 마음을 열지 못하고 있다. '대양의 틈새'로 들어온 한국 과학자들은 각종 현지 연구 사업과 시설 지원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거친 성향으로 외지인을 배척했던 사람들을 채용하고 설득한 결과, 약 6600m2(2000평) 규모의 신축 연구센터 매립 부지까지 완성하는 등 가시적 성과를 거두기 시작했다. 박흥식 센터장의 설명이다.

"마이크로네시아연방은 태평양 도서국 중 세 번째로 큰 바다를 보유한 '해양대국'입니다. '주인 없는 바다가 없다'는 태평양에서 축과 같은 틈새시장을 고른 건 큰 행운이자 도전이었죠. 1999년 연간 예산 1억원으로 이 사업을 시작할 때만 해도 정말 막막했습니다."

태평양해양연구센터는 1999년 한·일 어업협정 때 '졸속체결'이란 비판으로 악화한 여론을 만회하기 위해 김대중(金大中) 정부에서 내놓은 대책이었다. 구체적 방안 없이 간판만 걸린 센터를 짓기 위해 박흥식 센터장을 비롯한 연구진은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을 해야 했다.

"전기수급이 불안정하고 지적도도 제대로 된 게 없었습니다. '세 번째 나무에서 네 번째 바위까지'라는 식으로 표기됐더군요. 정부에 뭔가 요청해 봐야 불가능하단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게 됐죠. 결국 이 지역 지적도는 저희가 GIS(지리정보시스템)를 동원해 직접 측정했습니다."

축 현지 교민 김도헌(金度憲)씨는 한국 연구진에 큰 힘이 됐다. 서울 토박이인 그는 1996년 한 사업가의 권유로 축에 건너왔다. 2~3년 동안 요트 만드는 일을 하다 귀국할 예정이었는데, IMF 사태가 터지는 바람에 섬에 눌러앉았다.

정착 당시 그가 리조트 주방에서 일하던 원주민 여성 3명을 앉혀놓고 "나와 결혼할 사람?"이라고 차례로 물어 "예스"라고 답한 세 번째 여인과 사흘 만에 결혼한 일화는 지금도 연구진 사이에서 '축 인간극장'으로 자주 회자된다.

최고 인기 직장

 

한국해양과학기술원 송한주 팀장이 축 현지 어린이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김정우


김씨의 아내가 된 여성은 추장의 딸이었고, 1남3녀를 낳아 가정을 이뤘다. 일찍 세상을 떠난 '장인 추장'은 한 번도 못 봤지만, 장모인 다아꼬 시삼(Sisam·78)은 작은 섬 하나를 소유할 정도로 영향력과 넓은 인맥을 가졌다. 부부가 일하던 리조트가 폐쇄되면서 김씨는 서울로 돌아갈 생각도 했지만, 현재는 대신 입주한 태평양해양연구센터에서 과장 직책과 함께 시설 관리 업무를 맡고 있다.

술과 마약만 들이켜면 난동을 부리는 현지 젊은이들을 상대하며 김씨는 '국가재산'을 지켜냈다. 불안정한 전력 사정에 자체 발전기까지 멈추면 그는 양초를 켜고 버텼다. 고졸 출신인 그는 "우수한 박사님들과 일하는 자체가 영광"이라고 했고, 연구원들은 "김 과장이 축에 미리 정착한 자체가 국가적 행운"이라고 했다. '축 인간극장'을 만난 지 한 달 후, 서울에서 재회한 박 센터장은 김씨의 KBS <인간극장> 출연이 확정됐다는 소식을 전해줬다.

주 정부에서 고위 공직자로 근무하다 은퇴한 카스터 시삼(Sisam) 씨는 김씨와 사돈관계다. 축에 정착한 한국인의 이미지에 대해 묻자 그는 "한국인과 가족관계인데 나쁜 말을 할 순 없지 않으냐"며 너스레를 떨었다.

"한국인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모습은 '열심히 한다'는 점입니다. 이곳 젊은이들에게 '열심'이란 없는 개념이었죠. 게으르고 방황하던 젊은이들이 이곳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기술은 물론 책임감까지 배웠습니다. 예전엔 고장 난 차는 그냥 버렸는데, 이젠 장비와 부품을 구해 와 고치는 모습을 보고 놀랐어요. 축의 주요인사들은 모두 한국과 관계가 잘 지속되기를 바란다고 확신합니다."

 


태평양해양연구센터는 축 젊은이들 사이에 최고의 인기 직장이다. 번듯한 일자리가 없는 섬나라에서 외국 연구센터에서 일한다는 자체가 큰 명예가 되기 때문이다. 높진 않지만 안정적인 임금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자녀 또는 자신의 취업을 위해 서로 한국인에게 줄을 대려 안달이다. 덕분에 웨노섬에서 가장 세다는 '전직 건달' 청년과 경찰청장을 역임한 원로급 인사가 센터 보안을 책임지게 되면서 치안이 상당히 안정됐다고 한다.

사푹 지역의 추장이자 현직 상원의원인 알론소 촐리메이(Cholymay)는 한국인들의 든든한 협력자다. 현재 연구센터가 자리 잡은 토지의 소유주로, 주 정부와 관련된 각종 민원을 해결해 준다. 한국해양과학기술원의 초청으로 수차례 방한 경험이 있는 그는 "한국의 빠른 국가발전 속도와 친절한 사람들과의 인연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아시아에선 일본이 유일하게 발전한 나라라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에 가보고 오판이란 걸 깨달았죠. 잠수함까지 자체 생산하는 광경을 직접 볼 수 있었는데, 축에선 상상도 못할 일이죠. 한국인들이 우리를 친구나 동료처럼 대해 주는 것에도 감명을 받았습니다. 우리 속담에 '탁자 안에 숨겨둔 것을 내주는 친구'란 말이 있는데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게 한국에선 '정(情)'으로 불린다더군요."

고립된 섬과 에이즈

한국과 축은 과거 식민지였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김도헌씨의 장모 시삼은 어릴 적 어느 나라가 무슨 이유로 싸우는지도 몰랐던 전쟁의 아픔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한국인 노무자들로부터 들었던 '아리랑' 선율을 지금도 흥얼거릴 수 있다.

자본과 문명은 주요 섬의 생태와 문화를 변화시켰지만, 멀리 떨어진 한적한 섬은 여전히 야만의 경계 선상에 놓여 있다. 축 환초에서 약 110km 거리에 있는 놈윈(Nomwin)이란 이름의 산호섬엔 20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박흥식 박사는 10년 전 진주조개를 조사하기 위해 이 섬을 방문한 바 있다.

"환초를 벗어나면 파도가 거세집니다. 작은 보트가 크게 흔들려 GPS를 확인하기도 벅찰 정도였죠. 도중에 놈윈에서 축으로 향하는 원주민들을 만났는데, 천진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던 그들은 GPS 장비 없이도 망망대해를 자유롭게 오가더군요. 그들 말로는 구름을 보고 뱃길을 알고, 풀 냄새를 맡고 100km 떨어진 섬을 찾는다고 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섬에서 한국 연구진은 5일 동안 머물렀다. 이들을 200여 섬 주민이 신기해하며 종일 따라다녔다. 아이들은 모두 이른바 '언청이'로 알려진 구순구개열 증상을 보였고, 치아 상태도 엉망이었다. 고립된 섬에서 이뤄진 근친혼의 영향인 것으로 판단됐다고 한다. 그런 섬에 에이즈가 들어온 것은 역설적이다. 한국 연구팀이 해양 수집에 한창일 때, 세계보건기구(WHO)에서 온 팀은 에이즈 역학조사를 하고 떠났다.

놈윈섬은 환초다. 가운데가 뚫린 둥근 도넛 모양으로 섬 안과 밖이 모두 바다다. 큰 해일이 몰려오면 섬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다. 역사가 기록되기 전 이미 섬은 주인을 수차례 바꿨을지도 모른다. 태평양의 섬들은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상식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인터뷰] 존슨 엘리모 축 주지사
"한국과 밀접한 관계 원해… 임기 내 목표는 에코투어리즘"

 

ⓒ김정우


존슨 엘리모(Elimo) 축 주지사는 표정이 한껏 밝았다. 2주 전 치른 주지사 선거에서 박빙의 승부로 재선(再選)에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2005년 부지사에 당선됐으며, 주지사였던 웨슬리 시미나(Simina)가 연방 대표 상원의원으로 떠나면서 2011년 7월부터 주지사직을 수행해 왔다.

그는 당선 일성(一聲)으로 "에코투어리즘(eco-tourism·생태관광) 활성화"를 주창했다. 생태계를 보호하는 친환경 여행을 뜻하는 말로, 최근 세계 각국에서 각광받는 추세다.

"축에는 자원이 많지 않습니다. 한국과 비슷하죠. 가장 큰 자원은 말 그대로 아름다운 자연인데, 에코투어리즘을 활성화해 이를 보호하고 활용하는 게 임기 중 가장 큰 목표입니다. 어업도 물론 중요하지만, 지금과 같은 속도로 진행될 경우 어느 순간 쇠퇴할 수밖에 없어요. 섬의 잠재력을 위해선 새로운 대안이 필요할 때입니다."

—태평양해양연구센터를 중심으로 한국 연구진의 진출 규모가 확대되고 있는데요.

"잘 알고 있습니다. 축 주민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가 가진 얕은 지식으로는 해저(海底)에 어떤 생물이 사는지 알 수가 없어요. 수면 가까이에 있는 물고기는 잡을 수 있지만, 본격적인 연구엔 한계가 있죠. 해양생태계를 이해하려면 한국의 태평양해양연구센터와 같은 기관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한국을 방문한 적은 있습니까.

"예전에 제주도를 방문해 양식기술을 본 적이 있는데 아주 감명받았어요. 그런 뛰어난 기술이 이곳 정부와 잘 연계돼 섬 곳곳으로 잘 전파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축 주민은 한국과 지금처럼 밀접한 관계가 계속 유지되길 희망합니다."

—미국과 중국이 G2 구조를 형성하며 전 세계를 무대로 경쟁 중인데, 축도 비슷한 상황인가요.

"축을 비롯한 마이크로네시아연방은 지금도 미국에서 오는 원조가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미국의 경제 사정에 따라 지원규모가 영향을 받기 때문에 민감하게 관찰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최근 정부 차원에서 공항과 주 정부청사를 증축하는 등 투자를 본격화하고 있죠. 이뿐 아니라 폐차를 처리하는 고철회사와 같은 민간자본도 속속 들어오고 있습니다. 이곳도 G2 구도에서 자유롭지 못한 셈이죠."

—거대자본을 무기로 한 중국의 진출이 부담스럽지는 않습니까.

"주지사로서 이곳에 중국이 좋은 의도를 가지고 경제적 지원과 함께 진출하는 것은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이는 중국뿐 아니라 모든 국가에 해당하겠죠. 정치적 의도나 부정적 의미를 내포하지 않는다면 언제든 환영합니다."

엘리모 주지사는 질문 중 강대국(powerful nation)이란 단어가 나오자 "요즘 가장 강한 나라는 북한 아니냐"며 농을 던졌다. 마침 인터뷰를 한 시기가 북한이 4차 핵실험을 강행하며 전 세계를 상대로 도발하던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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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조선 2013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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