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비상계엄 확대선포 이후 구금된 인원은 계엄사령부가 인정한 26명보다 훨씬 많다. 일부 부패혐의를 받은 정치인이 포함됐지만, 대부분은 무당파적 반체제 인사이거나 ‘투사(militant)’ 김대중(金大中)의 지지자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는 적어도 50명의 반체제 인사와 50명의 학생이 구금돼 있고, 당국은 여전히 남은 이들을 쫓고 있다고 추정했다.〉
1980년 5월 20일 한국에 있는 정보 수집원들이 미국 중앙정보국(CIA)에 보고한 기밀문건 내용 중 일부다. 《월간조선》이 입수한 당시 CIA의 기밀문건에 따르면, 미국은 당시 광주에서 발생한 소요사태에 확실한 파악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 관련 첩보를 집중 수집하며 사태를 예의 주시한 것으로 분석된다.
1980년 5월 광주의 상황을 전하기 위해 생산한 기밀문건 중 현재 공개된 것은 8건 정도다. 얼마 되지 않은 문건인 데다 삭제된 부분이 많아 본질 수준까지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한국 현대사의 이면은 미국 문건에 흔적이 남아 있다”란 말이 전해질 정도로 CIA 기밀해제 문건은 1차 자료로서 그 가치가 높다. 2002년부터 공개되기 시작한 관련 문건들을 통해 5·18의 이면을 추적했다.
1980년 5월 보고된 CIA 기밀문건들.
⊙ 광주, 서울, 북한, 중국 등 상황을 상세히 보고… 삭제한 부분도 많이 눈에 띄어
⊙ 사태 초기 확실한 파악 못한 미국, 남북 양측 관련 첩보 집중 수집·보고
⊙ 전문가들, “南北 교전, 北의 선전활동 보고내용을 북한군 개입설과 연결하기엔 개연성 약해”
21일 “계엄사령부는 권력의 고삐를 잡았다”
5월 20일 보고된 기밀문건엔 ‘현지상황 설명: 남한’이란 제목으로 서울과 광주의 상황 분석이 담겨 있다. 〈광주에 대한 최근 보고는 시내에 집결한 군중이 오늘은 아직 충돌하지 않았다는 것〉 이란 광주 상황과 함께 국회와 북한의 상황이 기록됐다.
〈오늘 소집 예정된 특별국회는 무기한 연기됐다. 국회는 보안병력에 의해 완전 봉쇄됐다. 국회에 들어가지 못한 신민당 의원 45명은 전원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했다. 다른 야당 의원들은 계엄령이 정치적 활동을 금지하는 것에 저항하는 기자회견을 보안부대가 방해한 당수(黨首) 김영삼(金泳三)의 집에서 회동했다. 김영삼은 구금상태는 아니지만, 가택연금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남한의 불안 상황을 처음으로 중요하게 언급한 북한은 서울이 지난주 전국적으로 계엄령을 확대한 것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했다. 그러나 남한에 개입하려는 의도에 대해선 부인했다. 남한은 북한의 개입 위협을 반정부 활동 탄압 정당화로 이용하고 있으며, 북한은 반체제 파벌에 대한 지지를 보이고 있음에도, 남한의 일에 관여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확실히 회피하려 한다.〉
다음 날인 21일, CIA는 ‘군부가 권력을 강화하다’란 제목하에 〈민간 정부의 최고위층을 제거하고 가장 강력한 반대자를 구금함으로써 계엄사령부는 권력의 고삐를 잡았다〉고 보고했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내용이다.
〈군부는 어제 국회가 회의를 소집하고 계엄령 해제를 투표에 부치는 것을 금지했다. 군부 권력은 기존의 내각이 사임하면서 생긴 공석을 아마 그들이 선호하는 인물 또는 군 위원회의 인물로 채워 새로운 내각으로 대체할 것이다. 몇몇 정치인들은 부패 혐의로 체포된 상태다. 한국은 조용한 상태다. 그러나 남서쪽에 위치한 광주에서는 폭력적이고 큰 규모의 시위가 어젯밤과 오늘 아침에 발생했다.〉
〈반면, 북한은 지난주 남한이 계엄령을 전국적으로 확대하고 독재자 전두환이 정치적 반대 인사에 압력을 넣는 것을 비난했다. 그러나 평양(북한)은 남한에 개입하려는 의도에 대해서는 부인했다.〉
김재규(金載圭) 전(前) 중앙정보부장의 사형이 5일 이내에 집행될 것으로 예상한다는 정보는 20일과 21일 양일간 두 차례 보고됐다. 보고자는 “김재규의 사형이 그를 영웅시하는 학생들의 불만을 가중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당시 윤보선(尹潽善) 전 대통령 등 재야(在野) 일각에서는 김재규 구명노력이 있었지만, 큰 반향을 얻지는 못했다.
후에 공개된 미국 정부 성명서에 따르면, 이날 특전사 부대가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했을 즈음, 미국 정부는 사태가 극도로 심각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고 한다.
5·18 예측 못한 CIA 한국지부
5·18 당시 군차량을 탈취한 시위대가 광주 시내를 돌고 있다.(조선DB)
5·18 때 CIA 한국 책임자는 로버트 브루스터(Brewster) 10대 지부장이었다. 공군장교 출신으로 당시 53세였던 그는 눈이 아주 크고 시원한 인상에 개방적인 사람으로 알려졌다. 한국에 오기 직전 방광암(또는 췌장암) 수술을 받은 그는 재임 중 10·26, 12·12, 5·18 등을 경험했다. 한국 대통령을 세 명 겪었고, 중앙정보부장이 네 차례 바뀐 것을 보았다. 1986년 2월 한국 내 미 CIA에 대해 심층 분석한 《월간조선》은 브루스터 지부장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재임 중 암이 재발, 일시 귀국하여 2차 수술을 받고 돌아와 다시 근무에 임해야 할 만큼 격무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그는 병색을 일절 내보이지 않고서 의연하게 임무를 해내 부하들의 존경을 받았다. 한국 고위층과의 인간적 유대도 더욱 돈독해졌다. CIA 본부의 뜻도 그러했지만, 본인이나 한국정부도 그의 계속 근무를 희망했었다고 한다. 미국 CIA 지부장들 가운데는 자기가 주재하는 나라의 정계 실력자와 특별히 깊은 인간관계를 맺어, 주요한 시기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CIA에선 브루스터 씨를 그런 지부장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브루스터 씨는 그러나 1980년 말 암이 악화돼 본국으로 후송됐다. 그 얼마 뒤 그는 사망했다.〉
1986년 《월간조선》의 취재에 따르면, CIA 한국지부장의 임기는 2년이지만, 급박한 사태가 발생하면 기간이 단축되거나 연장된다. CIA 본부 입장에서 당시 한국지부는 중요한 거점이었다. ▲공산국과 대치하고 있는 민감한 군사분쟁 지역 ▲미군 주둔 ▲지정학적으로 미국 중공 소련 일본이 각축하는 중요한 자리 ▲격동하는 국내 정세 등 중요성을 반영해 CIA 한국 지부장으로는 대체로 거물들이 왔다.
1961년 5·16 당시 CIA는 곤욕을 치렀다. 사전정보를 파악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진압에도 실패했으며, 사후수습에서도 워싱턴 당국에 기선을 빼앗겼다. 1972년 10월유신 때는 달랐다. 구상단계에서부터 이를 추적해 선포 훨씬 전에 이미 전모를 파악한 것으로 알려졌다. 5·18을 정확히 예측하지 못한 CIA 한국지부는 사태 발생 후 첩보입수와 정보분석을 위해 그 역량을 총동원했다.
박정희(朴正熙) 정권 시절 CIA 한국지부장이 정기적으로 만난 사람은 중앙정보부장과 국군보안사령관이었으며, 중앙정보부장과는 매월 2~3차례 만났다. 특히 한미 양국이 1958년 군사정보교환 협정을 맺은 이후 CIA 한국지부와 중정은 연락관을 통해 서로 정보를 교환해 왔다고 한다. 5·18 당시 본국에 보고된 CIA 문건 내용 중 상당 부분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수집된 것으로 보인다.
전두환 만난 CIA 한국지부장 “소수 강경 주도에 데모 과열”
윌리엄 글라이스틴 전 주한미국대사(왼쪽)와 전두환 전 대통령. 5·18 당시 전두환의 직책은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 서리였다.
5·17조치 직후인 5월 18일 브루스터는 전두환(全斗煥)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 서리(署理)를 만났다. 《월간조선》이 입수한 당시 면담 기록에 의하면, 이 자리에서 브루스터는 5·17조치로 다수의 여야 정치인을 연행 조사하고 있는 목적을 물었다. 전두환은 “김대중과 같은 학생 소요 배후 조종 인물과 공산주의 용어를 사용해 선동을 주모(主謀)한 종교인, 박 대통령 시절 정치 요직을 담당했던 인물들의 권력남용 및 부정부패로 국민의 지탄을 받고 있는 자, 학생데모 주동자들을 조사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전두환이 브루스터에게 “미국인의 객관적 입장에서 지난 5월 14~15일 양일의 학생데모로 인한 사회혼란 상태하에서 민주발전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느냐”고 묻자, 브루스터는 “데모 과격화는 정치발전에 저해된다고 사료된다”면서 “글라이스틴(Gleysteen) 대사나 미 정부 관리 대부분은 정부의 데모 저지 노력에 호의적 반응을 보이고 있으며, 데모로 인한 정치발전 계획 차질(蹉跌)은 원치 않는다”고 답했다.
브루스터는 또 “미국은 한국 학생데모를 지지해 온 바 없고 학생 주장이 무리라고 믿고 있으며, 데모에 대한 정부 저지책에 대해 찬의(贊意)를 표해 왔다”, “소수(少數) 강경 학생 주동에 의한 데모 과열 현상으로 확신한다”면서 “미국은 금일(今日) 글라이스틴 대사가 이희성(李熺性) 계엄사령관에게 언급한 바와 같이 소수 한국인들의 미국 정부 간여 요망을 내정간섭으로 간주, 거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브루스터는 전두환과의 면담 말미에서 “한국의 맹방(盟邦)으로서 대한방위공약의 성실한 이행을 위한 미국의 대한(對韓) 희망사항은 현 정부와 군부가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가운데 정치발전을 이룩하는 것”이라면서 “미국과 한국의 환경에 적응될 수 있는 민주화가 필요하며 그 나라의 정부제도는 국민 대다수의 지지를 받아야 된다”고 했다. 다분히 신군부의 입장을 이해하는 듯한 말들이다.
美 대사 “12·12와 5·18은 新군부의 단계적 쿠데타 일환”
이는 같은 날 글라이스틴 대사가 이희성 계엄사령관을 만나 “미국 대통령께서는 5·17 결정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시했으며, 그 결정은 합법적인 한국 정부의 신뢰성을 희박하게 하고, 북괴 도발위협과 국민의 반발을 증대시킬 것으로 생각한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조치가 민간정부 당국과 충분한 협의 없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는 점이며, 더욱이 일찍이 표명된 바 있는 한미 상호 간에 중요한 협력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미국의 관심 표명을 무시한 것으로 보이는 점이다”라면서 “이번 조치에 대한 미국민과 의회의 반응은 매우 부정적이며 또한 앞으로 한미 간의 여러 사업에 큰 영향을 초래할 것”이라고 격하게 항의한 것과는 온도 차이가 느껴진다.
이날 브루스터가 학생시위 재연(再燃) 가능성과 정부의 대응조치를 물은 데 대한 답변 과정에서 전두환이 “5·17조치에도 불구하고 광주시에서 소수 학생데모가 발생해 특전여단 소속 병력을 급파한 바 있다”고 답한 것도 눈길을 끈다. 전두환은 “5월 21일 혹은 5월 22일 학생데모 발생 시 고등학교 학생마저 가담하게 된다면 전방 군 병력 동원 없이 수경사, 경비사, 특전사, 20사단 병력 등을 제외한 후방 방위업무를 담당한 군 병력(2500~3000명)만으로는 도저히 데모를 저지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글라이스틴 대사와 존 위컴(Wickham) 당시 주한미군사령관은, 1989년 간행된 《광주사건과 미국》(Americans and the Kwangju Incident)의 저자 마크 피터슨 교수와의 인터뷰에서 “12·12사태와 광주강경진압 조치는 전두환씨를 비롯한 신군부의 단계적 쿠데타의 일환”이라고 주장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미국은 주한미군의 철수와 대북정책의 변경, 헌법체제 옹호 등의 카드를 써 신군부를 견제하려고 했지만 결국 안보상의 우려로 이를 실행하지 못했다”면서 “기본적으로 미국이 거의 통제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한국 내 세력들 간 충돌의 성격을 띤 이 사태를 변경시켰을 만한 미국의 조치를 생각해 낼 수가 없다”고 했다.
24일 “새로운 유혈사태 가능성 열리고 있다”
1980년 5월 19일 금남로에서 학생시위대가 군인들에 의해 진압당하고 있다.(조선DB)
5월 24일 〈국가정보일지〉는 급박한 광주의 상황을 보다 자세하게 전하고 있다. 2012년 7월 16일 공개된 이 문건은 〈불안한 소강상태가 유지되고 있는 동안 반체제군과 정부 사이의 협상이 지연되고 있다〉며 〈새로운 유혈사태의 가능성이 열리고 있다〉고 기록했다.
〈한국군은 도시를 정부 통제하에 두기 위해 광주에 재진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갑차량을 도심과 반대편 진영의 바리케이드 근처에서 볼 수 있었다. 일부는 무장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수의 청소년이 단단히 무장한 채 도시를 다시 완전히 통제하려는 군대의 시도에 저항하려 했다. 산발적인 충돌이 계속 보고되고 있었다.〉
보고문에 따르면, 당시 정부는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특별사면, 피해복구를 위한 기금, 학생들의 석방 등을 준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당국은 “‘반체제 지도자(dissident leader)’ 김대중을 사면하고 ‘독재자(strongman)’ 전두환 장군의 권력찬탈과 그를 처벌하라”는 요구엔 응하지 않기로 확정했다.
보고자는 “작금의 사태들이 한국사회 전반에 깊은 우려를 야기했다”며 “서울의 학생들이 아직 불만을 유지하고 있고, 그중 30%는 아직 더 많은 시위가 필요하다고 했다”고 설명했다. 또 “사기저하는 부패 혐의를 받은 재계 엘리트와 정부관료, 특히 경제부처 관료들 사이에서 확대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고 덧붙였다.
이날 문건엔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외신을 상대로 계엄령 해제와 민주주의 복원을 요구하는 성명을 낸 것과 김재규가 학생들과 반체제 조직의 사면 노력에도 불구하고 교수형이 집행됐다는 사실이 함께 기록됐다.
사태의 막바지인 5월 27일엔 총 2건의 문건이 공개돼 있다. 오후 1시30분까지의 정보를 기록해 CIA 국가해외정보평가센터(NFAC)에 보고한 첫 번째 문건은 ‘1. 치안상황’과 ‘3. 북한동향’ 등 총 3개 부문으로 이뤄져 있다. 중요한 정보로 추정되는 2번 항목은 내부 보안 검토 과정에서 전면이 삭제된 상태다.
〈광주 상황은 금일 군사작전으로 반란군의 저항을 진압함에 따라 진정됐으며, 도시는 정부 통제하에 돌아왔다. 밤 10시 이후 소요사태에 대한 보고는 없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공격을 수행하던 특수부대 병력은 일반 보병으로 대체됐다. 최규하(崔圭夏) 대통령은 광주의 안정과 복구를 위한 위원회를 구성하라고 서울에서 지시했다. 음식, 의료품, 구호물품이 도시로 보내지고 있다. (중략) 문화공보부 장관은 광주에서 희생당한 이들의 고통에 대해 위로하고 사과하는 성명을 내놓았으며, 국방장관은 국민에 대한 위로 메시지를 발표했다. 서울은 소문의 학생시위가 실현되지 못했고, 잠잠했다.〉
일부 지워진 문건 많아
계엄군 철수 당시 버려진 장비와 소총으로 무장한 시위대가 전남도청앞을 경비하고 있다.(조선DB)
1980년 5월 본국으로 전송된 대다수 CIA 문건은 내용 중 절반 정도가 삭제돼 있다. 기밀해제된 CIA 문건의 일반적인 특성이지만, 일부 지워진 부분의 경우 문단이 아닌 문장 일부분이 잘려 나가 의혹을 더욱 증폭시킨다. 앞에 언급된 보고내용 중 구호물품이 광주로 보내지고 있다는 부분과 문공부 장관의 성명 사이에서 삭제된 문장은 내용을 쉽게 짐작하기 어렵다.
문건에 따르면, 북한은 27일까지 계엄군의 광주 점령에 대해 언급이 없었다. 하지만 5·18에 대한 북한의 선전활동은 상당히 거세져 있었다. 이어지는 북한 관련 내용도 내부첩보로 추정되는 문단 앞뒤가 모두 지워졌다. 삭제되지 않은 내용 중 일부다.
〈5월 25일 평양에선 남한의 계엄령 확대를 비난하는 집회가 열렸다. 대변인의 논평은 조선중앙통신의 성명을 그대로 따랐다. 평양의 비밀 ‘통일혁명당 방송’은 광주 반란군이 무기를 계속 장악하기를 부추겨 왔으며, 계엄사령부와의 타협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죽음을 의미한다며 경고하고 있다.〉
같은 날 작성된 상황보고 문건은 계엄군의 광주 점령 상황을 보다 자세히 분석했다. 〈무장반란(rebellion) 9일 후, 오늘 새벽 광주시는 군에 의해 함락됐다〉는 문장으로 시작된 보고문은 당시 광주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정부군은 날이 밝기 전 무력을 앞세워 도시로 진격했고, 신속하게 도청 건물을 접수했다. 최초 보고는 사상자가 많지 않았다며 2명의 군인과 13명의 과격분자(militant)가 사망했고, 폭도(rioter) 300명은 체포됐다고 명시했다. 군대가 집집이 검색을 하며 이따금 발포를 한다는 언론 보도가 산발적으로 있었지만, 도시는 정상화하고 있었다.〉
문건 작성자는 “서울의 당국자들이 타협적 노선을 취하고 있다”며 “계엄사령관은 관대하게 보이라는 지시를 군에 내렸고, 정부 대변인은 사건에 대한 깊은 유감을 표명했으며, 최규하 대통령은 총리에게 광주의 안정과 복구를 위한 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지시했다”고 보고했다.
실제로 광주진압 작전에 참여했던 박준병(朴俊炳) 당시 20사단장은 소준열(蘇俊烈) 교육사령관을 통해 20사단이 광주 지역에 더 머물면서 시가지 복구와 농번기 대민지원을 하겠다고 건의해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중국의 반응도 함께 실렸다. 문건에 따르면 중국은 전날 정부가 남한 국민을 ‘진압(suppress)’한 것을 ‘방조(conniving)’한 미국을 비판했다. 《인민일보》 사설에 실린 이 내용은 중국이 남한의 위기상황을 미국과 연관 지은 첫 시도였다. 사설은 〈미국이 남한 광주 문제에 대해 평화적 방법을 모색할 것을 촉구했다〉고 덧붙였다.
5·18 당시 북한 정세
1980년 5월 광주 금남로 모습. 미국은 5·18 초기 사태 파악을 확실히 하지 못했다.(조선DB)
CIA가 사태 한 달 후인 6월 17일 기록한 〈동아시아 보고서〉란 제목의 문건은 5·18의 배경과 당시 남한의 상황에 대해 정밀 분석했다. 특히 마지막에 첨부된 사건일지(chronology)엔 4월 30일부터 6월 3일까지 북한 정세가 기록돼 있다. 다음은 일지의 주요 내용이다.
〈5월 6일: 총리급 회담을 준비하기 위해 남북의 실무대표단이 판문점에서 7차례 만났다. 진전은 없었지만, 양측은 5월 22일에 다시 만나는 것에 합의했다.
5월 7~13일: 김일성은 티토(Tito) 대통령(유고슬라비아)의 장례식에 참석했는데, 소련을 거쳐 출발해 돌아올 땐 (연료 주입을 위해) 중국을 거쳤다. 베오그라드에서 소련의 브레즈네프(Brezhnev) 서기장과 중국의 화궈펑(華國鋒) 주석 등 타국 정상들과 짧은 회담을 가졌다. 북한에 돌아오기 전엔 4일간 루마니아를 방문했다.
5월 12일: 늦은 밤 판문점 근처에서 북한에서 온 잠입자로 추정되는 작은 규모의 인원과 미군 정찰병 간 총격이 오갔는데, 사상자는 없었다. 북한은 사건에 대해 즉각 항의했다.
5월 14일: 조선중앙통신은 5월 12일 북한이 남한을 위협했다는 이유로 남한이 수도권의 군사증강을 정당화하려 한다는 비난성명을 발표했다.
5월 15일: 공동경비구역 내 미군 정찰대와 북한 잠입자들로 추정되는 인원과 총격이 또 오갔다. 사상자는 없는 것으로 보고됐다.
5월 20일: 조선노동당과 기관조직은 남한이 5월 17~18일 주말 동안 계엄령을 시행한 것을 비난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401회 군사정전위원회가 북한의 요구로 판문점에서 열렸다. 양측은 5월 12일과 15일에 공동경비구역에서 일어난 사건과 관련해 비방을 주고받았다.
5월 22일: 총리급 회담 준비를 위한 제8차 남북실무회담이 열렸다. 진전은 없었고, 북한은 5월 20~21일 남한의 내각개편을 이유로 다음 예비회담 전에 그 간격을 한 달로 늘리는 것을 제안했다. 양측은 6월 24일에 만나기로 동의했다.
5월 23일: 조선중앙통신은 광주의 소요에 남한 공산당원이 관련됐다는 혐의와 남한이 김대중을 공산주의 동조자와 연결짓는 것을 비판하는 성명을 냈다.
5월 24일: 남한 경찰 당국은 5월 23일에 서울에서 북한 공작원을 체포했다고 밝혔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그 공작원은 학생 주도로 반란을 이용하기 위해 광주에 들어가려고 시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5월 29일: 남한 군부가 광주를 탈환한 지 2일 후, 북한 《노동신문》은 광주시민의 저항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한편, 조만간 제2, 제3의 광주가 나올 것이라 예상했다.〉
5월 24일 서울 시경이 체포했다고 발표한 간첩 이창용(李昌龍)은 후에 광주 시위와는 상관없이 남파됐다가 검거된 것으로 밝혀졌다. 남북 간 교전이나 북한 측의 선전활동도 5·18에 북한군이 개입했다는 주장과 연결하기엔 개연성이 없다는 게 대북(對北)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영화 〈화려한 휴가〉, 북한軍 개입說보다 심각해”
CIA 기밀문건의 주요 내용은 일부 단어 선택에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전체적인 내용은 1995년 서울지방검찰청과 국방부가 발표한 5·18 수사보고서 내용과 크게 어긋남이 없다. 미국은 1989년 한국정부의 요청에 따라 총 48개 항의 질의서에 대한 답변을 〈광주사태 배경설명(Backgrounder)〉이란 문건을 통해 상세하게 밝혔다. 5·18기념재단에 따르면, CIA 기밀문건은 미 국무부 비밀해제 전문과 함께 201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재미(在美) 블로거 안치용씨는 2010년 5·18 관련 CIA 기밀해제 문건 중 일부를 자신의 블로그에 공개했지만, 국내언론의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안씨는 CIA 문건 공개와 함께 1980년 5월 7일 미 국무부 비밀 전문을 분석해 “시위 진압에 특전사 병력이 투입될 것을 미국이 사전에 알고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5·18은 무수한 의혹과 유언비어(流言蜚語)를 낳은 사건으로, 그 논란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월간조선》은 과거 총 사망자 수에 대해 광주발(發) 2000명 설(說)보다 정부의 191명 설이 더 정확하다는 입장을 취하다 광주에서 불매운동을 당했지만, 결국 수사결과 정확한 보도였음이 밝혀졌다.
조갑제(趙甲濟) 전(前) 《월간조선》 대표는 최근 ‘대규모 북한군 개입설’에 대해 “사실이 아니다”라고 했다가 일부 우파인사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조 전 대표는 33년 전 《국제신문》 기자로서 회사 방침에 불복하고 5월 23일부터 27일까지 직접 광주에서 유혈사태를 취재한 바 있다. 그는 최근 발간한 《趙甲濟의 광주사태》란 책에서 5·18을 이렇게 정리했다.
〈2000명 사망설이 퍼진 것이나 북한군 개입설이 퍼진 배경엔 믿고 싶어하는 감정이 있었다. 전두환 정권을 증오하는 사람들은 2000명 사망설을, 좌파나 호남에 반감(反感)을 가진 이들은 북한군 개입설로 기울었다. … (공수부대원들이 무릎쏴 자세로 애국가를 부르는 시민을 향해 무차별 사격하는 장면이 나오는) 영화 〈화려한 휴가〉의 왜곡은 ‘북한군 개입설’보다 더 심각하다.〉⊙
5·18 북한개입說의 진실
1980년 광주사태 당시 북한이 개입했느냐 하는 것은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다. 일각에서 주장하는 600명의 북한군 특수부대가 개입했다는 주장은 당시 안보상황 등에 미루어 볼 때 믿기 어렵다. 1968년 울진·삼척지구 공비사건 당시 침투한 무장공비가 120명이었다. 전국이 계엄하에 있는 상황에서 계엄군이 엄중 포위하고 있는 광주시로 600명의 특수부대가 침투하는 것이 가능했을까?
하지만 북한의 대남(對南)공작 부서에서 고정간첩이나 자생적 좌파조직을 활용해 상황을 악화시키려 했을 가능성은 배제할수 없다. 1998년 망명한 황장엽(黃長燁) 전 북한노동당 비서와 김덕홍(金德弘) 전 여광무역 사장은 그해 《월간조선》 7월호 인터뷰 중에 그런 가능성을 시사(示唆)하는 말을 했다. 하지만 이 내용은 당시 안기부의 요청으로 게재되지 못했다. 당시 누락됐던 내용을 기사 작성자인 김용삼(金容三) 전 《월간조선》 편집장의 동의를 얻어 싣는다.
황장엽 전 북한노동당 비서.
—황 선생께서는 96년 11월 10일 자 친필 서신에서 ‘광주학살 문제도 그들을 뒤에서 사주한 북의 공명주의자들이 책임전가한 일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광주 문제와 북한이 어떤 연관이 있다고 보시는 겁니까.
황: “북에서는 자기네들의 대남사업에 대한 공로를 과장하느라 그랬는지 모르지만 남한에서의 모든 운동, 투쟁은 다 자기네가 지하조직을 통해서 지도한 것으로 주장합니다.”
김: “북한의 통일전선부에서는 분기에 한 번씩 강연을 하는데, 광주 문제를 자기네들이 한 것으로 이야기하더군요.”
황: “북한 내부에서 대남사업을 하는 내용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상식화되어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생활수준이 높아 가는 한국에서 왜 데모나 운동이 일어나는가. 그것은 모두 북에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대남정책에서 두 가지가 달라졌습니다. 하나는, 남로당 때와 같이 (조직을) 노출시키지 말라는 겁니다. 그래서 지하당을 이중, 삼중으로 만들어 누가 지도하는지 모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노동자나 군인 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는 학생들 속으로 들어가라는 겁니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듣다 보니까 광주에서 사람들 학살당하게 만든 배후조종자가 책임져야 한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김: “모든 문제는 통일이 되어야 밝혀집니다. (북한에서는) 각 부서에 자신의 사적(기록)이 다 있습니다. 김일성, 김정일의 비준 받은 것, 광주에 가서 어떻게 하겠다는 시나리오가 다 남아 있고, 그 성과로 표창 받고 훈장 받은 사적들이 모두 정리되어 있습니다.
통일이 되면 모든 것이 다 나타나기 때문에 여기서 얘기할 필요가 없어요. 통일이 된 후에 구체적으로 누구의 조작에 의해 광주문제가 생겼는가, 물론 많은 시민이 민주화 투쟁에 나선 것은 사실이지만 역사 앞에 책임질 장본인이 있습니다. 북한에 이런 것들이 다 기록되어 있어요.”
황: “광주 문제에 대해 우리는 공개적으로 말 못합니다. 저네들(북한)이 조직한 증거가 없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국내에서 일어나는 운동에 대해선 평가를 안 합니다.”
—북한에서 어떤 식으로든 광주 문제와 관련하여 접촉과 지령과 움직임이 있었다는 뜻입니까.
황: “그건 우리가 모르지요.”
김: “김일성종합대학 옆에 3호청사가 있어요. 광주운동 이후에 3호청사 사람들이 표창을 많이 받았어요.”
황: “동생, 그런 얘기 했다가 또 혼이 나려고 그래?”
김: “형님, 우리가 이런 얘기 하자고 남한에 온 것 아닙니까. 형님은 왜 자꾸 말을 못하게 하십니까. 여기 남한에 와서 꼭 하고 싶은 얘기를 해야겠습니다. 3호청사에 소속되어 있던 사람들이 광주민주화운동이 끝난 후 일제히 훈장을 받았습니다. 내 친구들이 그 부서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 친구들도 광주민주화운동 후에 훈장을 탔다고 축하술을 함께 마시면서 그들에게 직접 들은 겁니다. (광주 문제는) 통일되기 전에 서둘러서 평가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한편 북한 무장공작원 출신 김동식씨는 지난 3월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와 박사학위 논문 〈북한의 대남혁명전략 전개와 변화에 관한 연구〉에서 5·18 직후 북한 공작기관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북한은 비슷한 유혈 상황이 다시 발생할 경우를 대비해 100명의 정예요원을 선발, 특수전 훈련을 시켰다는 것이다.
김씨의 논문에 따르면, 당시 북한은 5·18과 비슷한 상황이 다시 발생할 경우 1968년 울진·삼척으로 침투시켰던 ‘무장선전대’(무장공비)와 같은 게릴라부대를 투입해 무장봉기를 남한 전역으로 확산시킬 계획이었다. 기획은 노동당 통일전선사업부(통전부)가 담당했으며, 훈련은 노동당 작전부가 담당해 1981년부터 1984년까지 3년간 진행했다.
북한의 예상과 달리, 5·18과 같은 상황은 다시 발생하지 않았다. 침투계획을 주도했던 노동당 대남담당비서 겸 통전부장인 대남 강경파 김중린(金仲麟)은 1983년 해임됐다. 100명의 정예요원은 ‘졸업’ 후 본래의 목적(무장침투)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101연락소나 개관연락소 등 통전부 산하 기관에 배치됐다.
논문을 쓴 김동식씨는 “이 내용은 전직 대남침투요원 S씨의 진술을 기반으로 작성했다”며 “나 자신도 이들과 인접해 수년간 훈련을 함께 받았기 때문에 누구보다 정확히 당시 상황을 알고 있다”고 밝혔다. 최근 제기된 “5·18 당시 북한군이 직접 개입했다”는 의혹에 대해선 “논문에 게재된 내용 외엔 직접 체험하거나 들은 바가 없어 사실 여부를 전혀 모른다”고 답했다.⊙
월간조선 2013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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