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가 김은숙이 100년 전 망국(亡國)과 저항을 다룬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은 수많은 명대사를 쏟아냈다.
"귀하가 내 삶에 있소" "합시다 러브" 등 주인공들의 명대사 홍수 속에 한 조연이 흘러가듯 뱉은 대사 하나가 유독 뇌리에 남았다.
극중 노름에 빠진 철없는 사대부 아씨 고애순(박아인 분)에게 추노꾼 출신 전당포 업주 일식이(김병철 분)가 '옛 성현 말씀'이라며 들려주는 대사다.
"그 판에서 누가 호구인지 모르겠으면 니가 바로 그 호구다."
게임은 사람의 뇌를 흥분시킨다. 과욕이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헛된 희망'은 고집을 키운다. 판돈이 걸린 노름판에선 이러한 증상이 배가(倍加)된다. 똑똑한 사람이 쉽게 '호구'가 되는 이유다.
이러한 현상과 개념은 개인뿐 아니라 조직과 국가로도 확장된다. 국제질서에서 큰 판이 벌어지면 관련국은 모두 '잭팟'을 노리며 국력을 집중하기 마련이다. 치킨게임(game of chicken)과 제로섬게임(zero-sum game)을 오가며 고차방정식처럼 얽힌 외교전을 벌이다 최악의 경우 '판을 엎어버리는' 전쟁으로까지 확대된다. 권력자의 오판엔 큰 희생이 따른다.
세계 패권을 쥐고 중국의 도전을 초강수로 대응 중인 트럼프 대통령은 시진핑 주석을 '월드클래스 포커 플레이어'로 평한 바 있다. 싱가포르 회담 직전 북한과 줄다리기를 벌일 땐 "우리 모두 게임을 한다"(everybody plays games)고 말했다. 워싱턴 정가와 대다수 언론은 트럼프가 주도하는 현 국제정세를 게임(game) 또는 겜블링(gambling)으로 묘사한다.
한 마디로 세계적인 판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혹자는 이를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이라 칭한다. 새로운 국제질서가 짜여지고 있다. '일식이'의 말이 다시 떠오를 때다. 지금 이 판에선 누가 '그뤠잇 호구'로 남을까.
김은숙의 드라마는 구한말 열강의 각축장이었던 한반도의 무력한 현실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당시 대한은 '제국'(empire)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동북아 패권을 잡은 일제(日帝)의 '전리품' 취급을 당했다. 대한제국의 순종(純宗)은 청(淸)제국의 푸이(溥儀)와 함께 20세기초 동아시아사(史)에서 가장 치욕을 겪은 마지막 황제(the last empire)가 됐다.
21세기 대한민국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국가다. 10위권의 무역규모와 군사력을 보유했고, 문화적 영향력도 무시 못한다. 하지만 잘 나가던 신흥국의 부침(浮沈)을 목도해온 우리는 이러한 몇 개 수치가 급변하는 정세 속 국가의 존립와 안전을 담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특히 '큰 그림'을 놓고 치열한 판이 벌어지는 격동의 시기엔 한 순간의 선택이 국운을 결정한다.
두 대국(大國)의 덩치 큰 지도자들은 수천억 달러어치 판돈(관세)을 던지며 치킨게임을 벌인다. 백두산의 주인이라는 젊은 독재자는 사실상 자신의 목숨을 걸고 판에 뛰어들었다. 장기집권 중인 두 열강의 지도자는 신중하게 관망하며 후속 기회를 노리고 있다.
한 싱크탱크는 올해 벌어진 이 판을 '비자유주의 국제질서(illiberal international order)의 부상'으로 분석했다. 법의 지배(rule of law)나 열린 시장경제, 인류 보편가치에 대한 도전이 나타나고, 대결과 분열, 개별이익, 제로섬게임, 압박과 거래 등이 증가할 것이란 전망이다. 누군가 '호구'되기 딱 좋은 구도다.
입지가 확실한 강대국은 주변국에 '관용'을 베풀 수 있다. 하지만 패권 경쟁이 본격화하면 철저히 자국 이익을 중심으로 협력자와 경쟁자를 구분하기 마련이다. 호구 취급을 받는 건 국가의 강약(强弱)과 대소(大小)를 가리지 않는다. 강대국이든 약소국이든 언제든 당할 수 있다.
일식이의 고언을 무시하고 대박을 꿈꿨던 고애순은 결국 뒤늦게 자신이 당한 걸 깨닫는다. "내가 호구라니”라며 한탄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항상 호구는 자신의 현실을 가장 늦게 파악한다. 그리고 같은 호구짓을 반복하기 마련이다.
'호구'는 원래 바둑 용어다. 바둑돌 석점이 둘러싼 모양을 호랑이의 아가리(虎口)에 비유한 말인데, 뜻을 보면 무시무시하다. 개인이든 국가든 호랑이 입속에 머리를 넣는 자충수는 자칫 패가망신과 일언상방(一言喪邦)을 불러올 수 있다. 악당에겐 욕이 쏟아지지만, 호구에겐 피가 따른다. 미생(未生)들만 또 죽어난다.
열화(熱火)와 같은 시국이다. 부디 모두 냉철한 이성과 판단력으로 누가 호구인지 빨리 파악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래야 스스로 호구가 되지 않는다.
- 2018년 9월 26일에 쓴 글. 7년이 흐른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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