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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김정일 訪北 조문한 박상권 평화자동차 사장 “김정은, 조문 때 ‘감사합니다’ 외엔 말 안 해”

인터뷰

by 김정우 기자 2012. 2. 20.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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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北에서 먼저 이희호ㆍ현정은 육로 선택 가능성 귀띔… 반대하던 통일부 수차례 설득해 MDL 넘어 入北
⊙ 남북관계는 항상 50대 50. 전·현 정권 경험 모두 살려야
⊙ 총 193차례 訪北… 김정일 사망 전날(12월 16일)까지 평양 체류

김정우 월간조선 기자 hgu@chosun.com
사진 취재지원 : 崔多恩 月刊朝鮮 인턴기자 

박상권

사진: 평화자동차 제공

지난해 12월 19일 김정일(金正日) 사망 사실이 발표되자 곧바로 방북(訪北) 조문 논란이 벌어졌다. 찬반양론으로 남북ㆍ남남 갈등을 빚은 끝에 정부는 김대중(金大中) 전(前)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李姬鎬) 여사와 현정은(玄貞恩) 현대그룹 회장의 방북을 허가했다. 박지원(朴智元) 의원과 노무현(盧武鉉) 전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權良淑) 여사 등은 조문단 명단에서 제외됐다.
 
  이 여사와 현 회장 일행은 12월 26일 오전 육로를 통해 방북길에 올라 금수산기념궁전의 김정일 빈소를 찾아 조의를 표한 후 다음 날 귀환했다. 이들이 김정은과 짧게 대화하는 장면이 북한 TV방송 등을 통해 보도됐지만, “별도 만남이나 특별한 대화는 없었다”고 전해져 논란은 일단락됐다.
 
  한 달여 후, 엉뚱한 곳에서 논란이 재점화됐다. 미국 국적 한인 3명이 이희호 여사 일행보다 이틀 앞서 군사분계선(MDL)을 넘어 방북 조문한 사실이 뒤늦게 확인됐기 때문이다. 이들 3명은 문형진 통일교 세계회장, 박상권(朴商權) 평화자동차 사장, 워싱턴타임스 주동문 회장으로, 방북 당시 중국을 통해 입북(入北)한 것으로 알려졌었다. 정부 측이 “북한 매체의 보도를 통해 알았다”는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정부가 민간 차원의 조문을 일절 불허한 것과 이들의 군사분계선 통과를 비밀리에 도운 사실이 맞물려 다시 논란이 일었고, 통일부는 “이들 3명은 모두 미국 국적자라서 중국을 통해서라도 북한을 방문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만큼 육로를 통한 방북에 편의를 제공한 것”이라고 뒤늦게 해명했다.
 
 
 
“내가 제일 먼저 가야겠다” 생각
 
평양시에 자리한 평화자동차 건물(위)과 전시된 차량.(사진=평화자동차 제공)
  지난 2월 10일, 서울 신사동 평화자동차 본사 집무실에서 방북 일행 중 한 명인 박상권 사장을 만났다. 육로 방북 논란이 있은 후 첫 언론 인터뷰였다. 그는 “민감한 시점에 엉뚱한 방향으로 방북 루트가 공개돼 상당히 곤혹스러웠다”며 “통일부도 처음엔 불허했지만, 우리 측의 간절한 요구 끝에 이뤄진 사안이니 큰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고 설명했다.
 
  ―이희호 여사, 현정은 회장보다 이틀 빨리 입북했는데요. 어떤 상황이었나요.
 
  “김정일 사망 소식이 전해진 시각이 한국은 정오, 미국은 밤 10시였습니다. 당시 뉴욕에 있었는데, TV 전 채널에서 긴급속보로 보도됐습니다. 뉴스를 보자마자 무작정 ‘내가 제일 먼저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곧바로 북측에 가겠다는 의사를 타전했고, 22일에 통보를 받았습니다. 이미 보도된 대로 중국이나 러시아를 경유해 갈 수도 있었는데,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남한을 통한 육로 방북을 선택했습니다.”
 
  ―‘먼저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든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평화자동차 사훈(社訓)이 ‘남다른 발상, 남 먼저 행동’입니다. 다른 이유는 없었습니다. 대북(對北)사업을 하는 입장이라면 당연한 것 아닌가요.”
  
   ―육로 방북 때문에 다시 논란이 크게 일었습니다.
 
  “우리는 미국 국적이라 남한 정부의 허가 없이 북한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북한에서 통보가 올 때 이희호 여사와 현정은 회장이 육로로 올 것 같다는 얘기도 함께 들었습니다. 이미 개성에 자주 다녀온 경험이 있어 굳이 중국이나 러시아로 갈 필요가 없겠다 생각했습니다.”
 
  ―통일부에선 바로 허가했습니까.
 
  “북측에서 길을 열어준다니 통과시켜달라고 했습니다. 처음엔 거부했습니다. 언론을 통해 제기된 반발과 같은 이유에서였습니다. 어차피 이희호 여사 일행도 계획에 잡혔으니 시간 절약을 위해 수차례 더 요구했습니다. 사실 외국인은 판문점을 통해 가면 안 된다는 법도 없지 않나요.”
 
 
 
“김정은은 듣기만 했다”
 
  ―정부에서 이를 알리지 않았는데요.
 
  “숨긴 게 아니라 브리핑할 필요가 없는 문제였습니다. 제대로 물었다면 정확한 답이 나왔을 텐데, 3국으로 갔느냐 물으니 ‘그런 것 같다’는 답이 돌아온 것으로 압니다. 그리고 정확히 말하면 3명이 아니라 문형진 회장의 비서를 포함해 총 4명입니다. 다른 수행원은 없었습니다.”
 
  ―분향소 안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모두 훌쩍이거나 소리지르며 우는 분위기였습니다. 26일 당시 외국에서 온 조문객 100여 명이 한꺼번에 모였습니다. 일본 조총련을 비롯해 중국과 유럽 등지에서 온 단체들이었습니다. 이희호 여사와 현정은 회장은 우리 바로 앞에서 조문했습니다.”
 
  ―김정은은 처음 만났나요.
 
  “처음입니다. 사진대로 김일성(金日成) 주석을 많이 닮았더군요. 성형설이 있는데, 개인적으로 아니라고 봅니다. 그냥 할아버지를 빼닮은 겁니다. 북한을 대할 땐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좋습니다. 굳이 얼굴 생김새까지 왜곡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어떤 대화를 나눴나요.
 
  “사실 대화가 아니라 혼자 독백했습니다. 미리 멘트를 준비해 ‘강성대국을 맞아 사업을 잘해 보자’는 얘기를 길게 설명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대북사업가로서 할 수 있는 뻔한 얘기입니다. 김정은은 계속 고개만 끄덕였고, 마지막에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김정은 이미 결혼한 듯”
 
  ―보안이 까다롭다거나 특별한 주의사항은 없었습니까.
 
  “평상시에 하는 검색 정도였고, 주의사항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일부러 ‘주의사항은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상갓집에서 혼사 얘기한다’는 속담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혼사 얘기만 안 하면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누가 거기서 핵이나 금강산 얘길 하겠습니까.”
 
  ―영결식 날 김정은과 함께 영구차를 호위한 7인이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중 따로 만난 사람은 없었나요.
 
  “(김정일 사망) 이전엔 몇 번 만난 사람도 있지만, 그땐 아무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29일 목란관에서 외국 조문객을 위한 김정은 주최 위로연이 있었습니다. 그때 김영남(金永南) 최고인민회의 위원장이 나와 연설문을 읽었습니다. 김정은은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김정은 뒤에 선 여인은 처음엔 ‘(김정은의 친여동생인) 김여정 추정’으로 보도됐다가 후에 ‘김여정 확실’로 바뀌었습니다.
 
  “김여정이 확실합니다. 북한 측에도 직접 물어봤더니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북한 TV에 발인 장면이 방영되던 중 또 한 명의 젊은 여성이 카메라에 포착돼 김정은의 부인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직접 보진 못했고, 얘기만 들었습니다. 사실 분향소엔 꽤 많은 여성이 근무 중이었고, 다들 젊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지난 1월 일본 매체를 통해 김정은이 결혼했다는 증언이 보도됐는데요.
 
  “정확히 설명할 순 없지만, 이미 결혼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나이도 그렇고 후손 문제도 있으니, 아버지(김정일)가 시키지 않았을까 합니다.”
 
  ―귀환은 어느 루트로 했습니까.
 
  “입북 때와 같은 경로로 넘어왔습니다.”
 
 
 
金正日 사망 하루 전까지 평양 체류
 
  ―김정일은 사망 전 만난 적이 없었나요.
 
  “따로 없습니다. 행사를 참석하면 멀리서 봤을 뿐입니다.”
 
  박 사장은 18여 년 동안 총 193차례 북한에 다녀온 대북사업가다. 인터뷰를 마치고 지난 2월 14일 또 입북했으니 194번째다. 192번째 방문 때는 김정일 사망일 하루 전인 12월 16일까지 평양에 머물렀다. 16일 아침 북한 매체에 박 사장 일행과 김영남 위원장의 기념사진이 김정일의 ‘마지막 현지지도’ 사진과 함께 게재됐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그만큼 북한의 속사정을 잘 알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드물다.
 
  그가 경영하는 평화자동차는 작년 한 해 1873대의 자동차를 북한에서 팔았다. 평화항공여행사와 평양보통강호텔도 함께 운영한다. 자유롭게 북한에 가기 위해 2003년 미국 국적을 취득했다.
 
  그는 “이념적 쟁점을 떠나 일단 사업하는 입장에서 모든 사안에 대해 설명할 수밖에 없다”며 “이슈가 일어날 때마다 남ㆍ북한 양측에 곤란한 상황을 설명해야 한다”고 했다.
 
  “매스컴에서 북한에 대한 뉴스가 나오면 항상 끝에 학자가 등장해 모든 것을 정리합니다. 가끔 실제로 본 것과 전혀 다른 얘기가 나오는 걸 보면 정말 답답합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직접 공부해서 ‘전문가’가 되기로 했습니다. 이번에 고려대 북한학과 석사 과정을 마칩니다. 박사까지 하면 매스컴에서 ‘사업가’가 아닌 ‘전문가’로 대우해 줄 것 아닙니까. 그만큼 제대로 된 정보를 전달하고 싶습니다.”
 
  ―200차례 가까이 북한에 다녀왔는데, 대부분 평양에 체류했다고 들었습니다. 평양만 보고 북한 전체를 이야기할 순 없지 않나요.
 
  “좋은 지적입니다. 북한에 대해 공부하고 내린 결론이 ‘50% 철학’입니다. 누구도 북한에 대해 100% 말할 수 없습니다. 평양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체로 확산해서도 안 되지만, 일부 지방에서 일어난 사건을 전체로 보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일단 평양이 굶지 않고 배급이 나온다고 하면 아직 그쪽 기준으론 ‘살 만하다’는 얘기입니다.”
 
  ―얼마 전 탈북자로부터 최근 평양에서도 물이 부족해 분수대 물을 떠먹고, 아파트에선 분뇨를 봉지에 싸서 내다버린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직접 가서 본 상황과는 조금 다른 얘기입니다. 일부 사실일 수도 있지만, 전체로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현재 평양은 18년 전과 큰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 정보는 어느 지방에서 나온 소스인지 정확히 확인해야 합니다.”
 
 
 
“윤이상 유족, 평양 집 반납하면 오해 풀릴 것”
 
  ―정치범수용소, 종교 탄압, 탈북자 송환 등 북한 인권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판이 거셉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어느 정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 생존 탈북자들이 한국과 미국 등에서 그런 증언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다만, 의문스러운 부분도 있습니다. 만약 그 정도로 악한 정권이라면 수차례 탈북한 사람을 죽이지 않고 어떻게 살려두겠습니까. 어떤 탈북자는 5~6번 잡혔다가 탈북했다고 하던데, 그게 가능한지도 의문입니다. 인권도 마찬가지입니다. 50%를 봤으면 그 이면도 봐야 합니다. 인권문... (계속)

월간조선 2012년 3월호
기사 전문 :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nNewsNumb=201203100026&ctc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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