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계에서 활동하는 사람 중 속된 말로 가장 약은 사람이 이순재다. 잔꾀를 부린다는 뜻이 아니고 아주 지혜로운 사람이다. 참 똑똑하다. 국회의원 나가기 전에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내 일생 한 번의 경험일 뿐이지 거기(정치)는 내가 길게 머물러 있을 데가 아니다’고. 이런 약속도 했다. ‘난 한 번만 한다. 염려하지 마라.’ 그 말을 그대로 실천했다. 인격이나 마음 씀씀이 모두 훌륭한 사람이다.”(MC 송해)
“이순재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작가인 나 자신도 놀랄 정도다. 내가 설정하고 그리는 인물 유의태 이상으로 연기를 한다. 그를 통해 집필에 또 다른 영감(靈感)을 얻는다.”(최완규 작가)
“이순재는 대단한 경지에 올라 있는 훌륭한 배우다. 내가 거기에 가깝게 연기를 하려고 접근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배우 백윤식)
“상대배우에 대해 말할 때 늘 ‘뻥’이 더해진다. 그러나 이순재는 내가 정말 존경하고 늘 마음이 쓰이는 남자다. 그런 분과 함께 연기할 수 있게 돼 정말 행복했다. 처음 함께 캐스팅됐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야! 해보자! 정말 하자!’라고 소리쳤다.”(배우 윤소정)
“나와 생각이 다른 부분이 있을 것 같아 걱정했지만, 대화를 나눠보니 이순재는 굉장히 건전한 보수였다.”(장진 감독)
배우 이순재씨. ⓒ서경리
⊙ ‘명품배우’, ‘원로배우’ 아닌 난 그냥 배우… 연기의 大家니, 연기를 완성했다는 건 헛소리”
⊙ 부상으로 피 흘리면서도 연극 마쳐… “일단 무대에 선 배우는 죽기 전까지 연기해야”
⊙ “김명민, 김혜수, 하지원, 이승기는 좋은 배우… 배우려는 마음 없는 아이돌 출신은 문제”
⊙ “쪽대본·당일 촬영 드라마 시스템, 전 세계 어디서도 안 하는 짓”
‘국민 롤모델’
이순재(李順載), 그는 작가에게 영감을 주는 연기자다. 동료 배우들은 그에게 찬사를 보낸다. 이덕화, 최수종, 이병준, 오현경, 정일우 등 굵직한 스타들이 그를 롤모델로 삼는다. 배우 정보석씨는 그를 일컬어 ‘교과서’라 했다.
그를 향한 존경은 연예계를 넘어선다. 한 생명보험사가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은퇴생활 롤모델’ 설문조사에서 이해욱(李海旭) 전 KT 대표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한 주간지에서 50세 남성 50명에게 “나이 들어가는 모습을 닮고 싶은 사람은 누구냐”고 물으니 아버지나 할아버지 등 ‘집안 어른’ 다음으로 이순재씨가 많은 표를 얻었다.
1935년생 이순재씨는 올해 10월 만 78세 생일을 맞는다. 내년이면 우리 나이로 팔순(八旬)이다. 1956년 시작한 연기 인생은 57년째 계속되고 있다. 정치권을 ‘혐오’하는 국민이 국회의원 경력까지 있는 그를 ‘국민 롤모델’로 꼽았다. 이유가 궁금했다.
지난 9월 9일 세종문화회관에서 만난 그는 연출 준비로 바빴다. 연극 〈시련〉은 배우 이순재가 1988년 〈가을 소나타〉 이후 25년 만에 연극 연출가로 돌아온 작품이다. 미국 유명 작가 아서 밀러(Miller)의 대표작으로, 한 언론은 이 연극을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 불어닥친 ‘매카시즘’ 광풍을 꼬집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매카시즘’ 얘기가 나온 김에 현재 최대 이슈인 ‘이석기 사태’부터 물어봤다.
—일부 인사들이 이석기 사태를 두고 매카시즘에 비유합니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매카시즘이 통할 나라인가요. ‘독재적 속성’이 남아 있다면 몰라도, 현역 대통령을 두고 ‘쥐새끼’라고 욕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민주주의를 유지하려면 법치가 강력해야 하는데, 지금은 법이 너무 물러진 것 같아요. 이번 사건에 대한 자세한 내막을 몰라 후에 결론을 봐야 알겠지만, 관찰하는 제3의 시민 입장에선 우려되는 게 사실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세끼 밥 먹고 누릴 것 다 누리면서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건 안 되죠. ‘반(反)정부’는 할 수 있어도 ‘반대한민국’은 안 되는 겁니다.”
—곧 방영할 시트콤 〈감자별〉 포스터를 보니 역할이 상당히 코믹해 보입니다. 뭔가 ‘노는 할배’ 이미지인데요.
“아흔에 가까운 주책없는 영감으로 나와요. ‘이 자식, 저 자식’ 욕을 입에 달고 사는 그런 영감.”
—〈사랑이 뭐길래〉 ‘대발이 아빠’ 이미지에 국회의원까지 한 터라 점잖은 분으로 생각했는데, 시트콤에선 완전 달라 보였습니다.
“원래 점잖아요(웃음). 그런데 배우라면 역할에 따라 변해야 하니까.”
—시트콤 〈하이킥〉 때 ‘야동순재’ 역할은 솔직히 하기 싫지 않았나요.
“원래 안 하려고 했어요. 학교 동창들이 보면 뭐라 하려나, 점잖은 시청자들은 ‘배운 놈이 별짓 다하네’라고 할까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으니 해야죠. 그 부분에 있어선 지금까지 안티가 없더라고. 그만큼 우리 문화가 많이 개방되고, 다양성을 수용하기 시작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매카시즘’과 ‘야동’을 오가는 질문에도 그는 거침이 없었다. 민망한 주제를 피해가려 하지 않았고, 모호한 답변으로 자신을 방어하지도 않았다. 그 진실성이 대가(大家)를 만든 듯했다.
이순재씨가 25년 만에 연극 연출가로 돌아온 작품 〈시련〉의 연습 장면.(조선DB)
“아프리카 여행하고 싶다”
그가 최근 신구(申久), 박근형(朴根瀅), 백일섭(白日燮) 등 원로 배우들과 함께한 예능프로그램 〈꽃보다 할배〉는 ‘할배 전성시대’란 말을 만들어낼 정도로 인기를 모았다. 평균 나이 75세 ‘할배’들의 좌충우돌(左衝右突) 배낭여행 도전은 〈하이킥〉 시리즈 이후 그를 다시 ‘젊은 스타’로 만들었다.
눈치 볼 것 없는 원로들이라 예기치 못한 돌발상황이 자주 발생했다. 식사자리엔 술이 오르고, 여행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제작진과 화투판을 벌이는가 하면, 이순재는 커피 심부름을 거부한 ‘칠순 막내’ 백일섭에게 “나보다 열 살이나 어린놈이”라며 눈총을 보내고, 걸그룹 ‘소녀시대’ 멤버 써니에게 “이수만이 돈 잘 주느냐”고 대놓고 물었다.
—‘출구파’와 ‘학구파’, ‘숙소파’와 ‘산책파’ 등 말을 만들어낼 정도로 여행 중 특히 백일섭씨와 갈등을 겪는 모습이 자주 방영됐는데, 실제론 어떻습니까.
“실제로 잘 못 걷더라고. 자꾸 투정을 부렸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무릎이 안 좋다고 해요. 그래서 담배 끊으라고 했죠. 담배를 끊으면 대사가 안 외워진다고 합디다. 연기가 주업인데 그러면 안 되지. 그래서 다시 피우라 했어요.”
—최근 방영된 에피소드에서 써니를 보고 상당히 좋아하던데, 그전엔 실제로 전혀 몰랐나요.
“냄새 나는 영감들만 있는데 신선하고 좋잖아요. 특히 서진이가 무척 좋아하더라고. 명랑하고 밝은 아가씨예요. 처음엔 누군지 몰랐는데 소녀시대라고 하더군요. 이수만 조카인 줄도 몰랐어요.”
—소녀시대 멤버가 누군지는 아나요?
“몰라… 예쁘긴 한데 우리 나이에 노래는 전혀 전달이 안 돼요.”
〈꽃보다 할배〉 다음 시즌에서 가보고 싶은 곳이 어디냐고 물으니 그는 중남미, 동유럽, 아프리카 등을 예로 든 후 “아프리카에 가면 걸음 느린 백일섭이 사자한테 잡힐 수도 있겠다”며 웃었다.
—현재 라이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 세대엔 서로 속한 방송이 다르기 때문에 라이벌이라고 말하기가 뭐했어요. 언론통폐합 전까지 TBC(동양방송)에서 17년간 연기했는데, 당시 MBC에선 최불암, KBS에선 신구가 톱이었죠. 물론 상대적인 경쟁의식은 있었지만, 실제 경쟁은 내부에서 있었어요. 이낙훈, 오현경, 김성옥 등과 선의의 경쟁을 펼쳤죠.”
“김명민 연기는 완벽”
—많은 배우의 롤모델인데, 본인의 롤모델은 누구인가요.
“배울 만한 외국 배우들이 많아요. 기본부터 제대로 훈련받았고, 이론적으로도 탄탄한 명배우들. 영국의 로렌스 올리비에(Olivier)나 존 길구드(Gielgud)는 작위를 받았죠. 프랑스의 장 루이 바로(Barrault), 미국의 알 파치노(Pacino), 로버트 드 니로(De Niro), 더스틴 호프만(Hoffman), 메릴 스트립(Streep) 등은 제대로 공부한 진정한 연기파들입니다.”
—이른바 ‘아이돌 가수’의 연기력에 대해 충고한 발언이 지금도 회자합니다.
“모두가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 어디서 떴다고 하니 간혹 훈련 과정 없는 ‘생짜’가 들어와요. 보면 답답하죠. 자신은 연기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런 연기는 누구나 할 수 있어요. 예전엔 기본기가 있는 사람들이 연기를 했습니다. 신인 배우들의 경우 연출, 작가, 선배 배우들이 일일이 지적을 해줬어요. 그러니 자기 차례가 아니더라도 현장에 와서 선배들 연기를 보는 거예요. 시간 될 때마다 국어사전 펼쳐놓고 피차 치열하게 토론도 했습니다.”
—요즘은 어떻게 달라졌나요.
“드라마가 워낙 급하게 제작되다 보니 아무도 지적을 안 합니다. 대충 연기하면 광고 들어오고, 그렇게 돈을 벌어요. 존엄성을 갖고 시작해야 하는데 너무 쉽게 해버리니까 문제죠. 그러다 까다로운 연출자나 작가를 만나 훈련하면 도망가버립니다. 이 드라마 안 해도 돈 버는 데 문제없으니 그렇게 하는 거죠. 안타깝습니다.”
그는 후배 배우들에 대한 칭찬도 잊지 않았다. 연기와 행실이 그의 마음에 든 배우는 김혜수, 이서진, 김명민, 하지원, 이승기 등이었다.
“김명민은 연기가 완벽해요.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 할 때 지휘를 어떻게 하는지 유심히 봤습니다. 겉으론 좀 건방을 떨 것 같은 이미지인데, 전혀 아니더라고요. 연구를 정말 많이 한 모습이 보였습니다. 저도 1981년 〈코리아 환상곡〉이란 작품을 하면서 금난새씨에게 지휘를 배웠거든요. 그때 베토벤 운명 교향곡을 두 달 넘게 들으며 다 외워버렸습니다. 물론 진짜 지휘까진 아니더라도 연주를 따라갈 정도론 흉내를 내야 했거든요. 그런 성의가 평가를 받는 겁니다. 김명민은 후에 보니 작품 할 때마다 용모가 변해요. 영화 〈페이스 메이커〉를 위해 살을 쏙 뺐잖아요. 그게 배우입니다.”
배우 이순재씨와 인터뷰 중인 방송인 임재민씨. ⓒ서경리
출혈 연기
—김혜수, 이서진, 하지원, 이승기는 어떤가요.
“김혜수는 고등학생일 때 봤는데 이미 대형급이더라고. 하지원도 정말 열심히 하는 배우입니다. 이서진은 실력 있고 멋진 친구입니다. 이승기는 배우려는 마음이 좋습니다. 그래서 승기한테 ‘넌 노래는 잘하지만 조용필만큼은 아니니 연기 열심히 하라’고 했어요. 언급한 사람들 외에도 잘하는 후배들이 많습니다.”
‘대가’가 생각하는 ‘진정한 연기’란 무엇인지 궁금했다.
“여기 지금 현역 지도교수부터 시작해 명배우들이 와서 연극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두 달 반 연습해도 내 양엔 안 차는 부분이 있어요. 연기가 그렇습니다. 깊이로 따지면 한이 없어요. 누가 감히 ‘나는 연기의 대가요, 연기를 완성했다’는 헛소리를 할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죽을 때까지 배워야죠.”
그는 경지에 오른 연기자지만 상복(賞福)이 없다. 총 140여 편의 작품활동을 했지만, 국내에서 연기대상이나 남우주연상을 받은 적은 없다. 오히려 최근 중화권 3대 영화제인 금계백화영화제에서 첫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사실 방송국 대상은 TBC 시절에 서너 번 받았습니다. 언론통폐합 이후엔 못 받았어요. 대종상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얼마 전에 줄 것처럼 부르더니 결국 안 주더구먼. 드라마도 〈풍운〉, 〈사랑이 뭐길래〉, 〈허준〉… 이 정도 했으면 줄 만도 한데 잘 안 주네요.”
—상복이 왜 없을까요.
“아직 미흡해서. 1년 단위로 평가해서 상을 주는 것이니 그해 능력이 모자라면 못 받는 거죠. 예전엔 TV와 영화 사이에 미묘한 경계가 있었어요. 1977년 〈어머니〉란 작품이 대종상 작품상을 받았습니다. 언뜻 들으니 남우주연상 투표에서 11:3 정도로 내가 결정됐다고 해요. 그런데 막상 TV 탤런트라고 제외됐다는 겁니다. 그리고 얼마 후 영화진흥공사에서 미안하다고 특별남우주연상을 주더군요.”
그는 지난해 4월 연극 〈아버지〉 공연 중 장비에 부딪혀 눈두덩이 찢어지는 부상을 당했지만, 공연을 끝까지 마쳤다. 피가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장면을 본 관객들이 술렁거렸지만, 그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부상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초연(初演) 때 벌어진 일입니다. 무대가 조금 협소해 보인다 생각했는데, 신발 던지는 장면에서 사건이 터진 거죠. 그래도 어쩔 수 없어요. 배우라면 일단 무대에 서면 죽기 전까진 연기를 해야 하니… 그냥 피 닦아가면서 계속 진행했습니다.”
떡 먹듯 드라마 만드는 한국
그는 후배 연기자와 연출가들에게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방송에 출연해 “지각, 특별대우, 발음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세 가지”라고 했고, 한 인터뷰에선 “연출이 재해석을 하더라도 작가의 본질적 의도, 사상성, 작품성, 문학성 등을 살려가면서 재해석을 해야 하는데, 그것도 모르면서 자기만의 예술세계라고 재해석하는 건 관객에 대한 사기행위”라고 했다.
—지난 5월 유진룡(劉震龍)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의 오찬 자리에서 방송 제작 환경에 대해 작심하고 ‘쓴소리’를 했는데요.
“한마디로 전 세계 어디서도 안 하는 짓을 우리가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드라마를 만드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어요. 예전엔 우리도, 300~400명의 엑스트라들이 있어도 콘티가 정확하니 실수할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배우는 콘티를 보고 카메라 방향에 따라 대사를 연구해야 하는데, 요즘은 사방팔방에서 일단 찍고 보니…. 미국은 물론이고 일본도 대본은 삼교(三校)가 기본입니다. 완벽한 대본을 보고 연기하고, 최단 3개월, 길게는 1년 뒤에 방영되니 작품성이 높은 거죠. 말도 안 되는 환경에서 떡 먹듯이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한국은… 정말 ‘천재’들의 나라예요.”
—어떻게 ‘오늘 드라마를 오늘 찍는 상황’이 벌어졌을까요.
“예전엔 문단에 등단한 대가들이 극본을 썼습니다. 작가는 물론 대본에도 권위가 있었어요. 완성되면 토씨 하나 못 바꿨습니다. 그들의 어휘 선택을 보면 감탄사가 절로 나와요. 김수현(金秀賢)씨 등 몇 사람이 지금도 그 계보를 이으며 작품의 품격을 높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때부터 작품 수요가 늘고 젊은 작가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시간에 쫓기는 일이 다반사예요. 그들의 문제 때문이라는 게 아니라, 제작 시스템이 그렇게 된 거죠. 배우 입장에선 기계가 아닌데 찍어내듯 연기할 순 없는 노릇 아닙니까.”
—해결책이 있을까요.
“지금으로선 없어요. 계속 고민하고 개발해서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수준으로 해야 하는데, 쉽지 않습니다. TV조선을 비롯한 종합편성채널(종편)도 마찬가지예요. 새로 시작할 때 종편은 안 그럴 줄 알았습니다. 공중파와 똑같이 해선 따라갈 도리가 없잖아요. 그러면 시청률까지 계산한 사전제작을 시도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된 것 같습니다.”
2000년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 연습 중 쉬는 시간에 이순재씨가 아서 밀러의 원작을 읽는 모습. 연기 인생 57년째인 그는 지금도 배우고 공부할 게 많다고 했다.(조선DB)
정치, 잘만하면 최고의 예술
—언젠가부터 사극이 ‘판타지’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원로 작가 신봉승(辛奉承)씨는 “사극이 아니라 사기극”이라고, 역사 왜곡을 비판했는데요.
“왜곡 수준이 아니라, 우리나라처럼 역사인식이 ‘개판’인 나라가 없습니다. 이건 영화, 연극, 드라마 모두 마찬가지예요. 복식(服飾)만 봐도 심각합니다. 조선 중기가 배경인데 몽골식 옷을 입혀놨어요. 상투도 안 틀고 국적불명이에요. 그래 놓고 퓨전이라고 합니다. ‘창조’가 요즘 키워드라고 역사까지 창조하나요? (북한) 인민군 옷은 왜 그렇게 잘 입히는지 모르겠어요. 남북관계 회복을 담기 위한 하나의 희망이라고 보는데, 그래도 실체는 다릅니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그렇게 주장하면서 왜 북한 주민의 삶에 대해선 아무 소리를 안 하는지. 진짜 자유민주주의 입장에서 그들의 삶을 제대로 그려보라고 하고 싶어요. 엄연한 현실인데 왜 모두 외면합니까.”
—최근 천안함 폭침을 둘러싼 의혹을 다룬 영화 〈천안함 프로젝트〉가 상영중단되면서 논란이 일었습니다.
“천안함 사건은 불과 엊그제 얘기 아닌가요. 영화를 안 봐서 평을 할 순 없지만, 역사를 다루려면 사실에 입각하는 건 기본입니다. 엄연히 증명된 사실을 지금 무슨 근거로 뒤집어엎는지 모르겠습니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정치로 이어졌다. 그는 스크린과 무대에서 수없이 대통령과 왕 역할을 해본 인물이다. 현실에선 국회의원도 역임했다. 그런 그가 “의원도 해보고, 대통령역(役)도 해봤지만 요즘 같은 정치는 못 봤다”고 했다. “정치 인생 8년, 한 번도 행복하지 않았다”고도 했다.
—다시 정치할 생각은 없습니까.
“정치는 내 본업이 아닙니다. 두 차례 공천을 받았는데, 직접 신청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당에서 출마하라 하니까 한 것이고, 선거엔 내 돈 한 푼 안 썼습니다. 정치하려 했으면 좀 더 일찍 했겠죠. 이회창(李會昌), 이한동(李漢東)이 동창인데 대선(大選)까지 이미 출마하지 않았습니까.”
—정치에 대한 야망은 나이와 상관없는 것 아닌가요.
“정치는 잘만하면 최고의 예술입니다. 국민을 위해 기여하고 국가의 미래를 열어주는 것만큼 훌륭한 예술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쉽지 않아요. 정치를 하려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적어도 국회의원 하려면 직계가족의 희생이 필요하고, 대통령 하려면 사돈의 팔촌도 포기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朴 대통령 지금까진 잘해와”
그의 정치 입문은 친구 고(故) 이낙훈(李樂薰)씨의 권유 때문이었다. 11대 국회 때 탤런트협회 회장이던 이씨가 비례대표로 입성했다. ‘탤런트 나부랭이’로 불리던 시대에 배우를 정치권에서 영입하는 것을 본 이순재씨는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했다.
친구를 돕기 위해 입당(入黨)한 그에게 13대 총선을 앞두고 서울 중랑갑 지구당 위원장을 맡아달라는 요청이 왔다.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생각지도 않았던 선거에 출마한 그는 740여 표 차로 낙선(落選)했다. 그는 다음 선거에 다시 출마하는데, 낙선에 대한 오기도, 정치에 대한 매력을 느껴서도 아니었다.
“배우가 지구당 위원장을 맡으니 엉망이더라는 소리를 안 듣기 위해서 열심히 관리했습니다. 중랑구는 민심이 훤히 보이는 곳이에요. 시장 돌면서 악수하면 상대가 누구를 지지하는지 바로 압니다. 당시 ‘표 장사’들이 와서 ‘몇 표 모아올 테니 얼마 주시오’라고 하는데, 근처에도 못 오게 했습니다.”
4년간 바닥 민심을 읽고 노력한 그는 결국 14대 총선에서 약 3800표 차로 승리를 거뒀다. 원내 진출 후에도 인기가 좋았던 그는 충분히 재선(再選)에 도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멈췄다. 자신의 천직(天職)이 배우라는 생각에서였다.
—대통령을 수차례 연기해 본 ‘선배’로서 현 대통령에게 조언할 것은 없나요.
“대통령은 국민의 지지가 필요한 자리입니다. 최소한 자기를 찍어준 이상으로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죠. 이제 막 시작했는데, 지금까진 잘해온 것 같습니다. 하지만 국민 정서를 봐서라도 야당과의 문제는 빨리 해결했으면 좋겠어요. 오해는 오해대로 풀고, 같이 만나서 논의할 건 논의하고 해야죠. 새누리당과 민주당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헐뜯고 싸울 게 아니라 상대가 잘하게 돕고 자신은 더 잘하면 되는 거죠. 우리도 영국처럼 섀도 캐비닛(Shadow cabinet)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봐요. 야당이라고 영원히 집권 안 합니까. 대안을 갖고 비판하고 보복 대신 타협을 해야죠.”
그는 함경북도 회령 출신으로 네 살 때 할아버지와 함께 서울로 내려왔다. 서울고 재학시절 6·25전쟁을 겪었다. 피란 중 목격한 폭발 사고와 버려진 아이들의 모습은 6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는 “전쟁의 참상을 아는 세대가 점점 주는 지금, 젊은 세대와 그 경험을 나누고 어떤 식으로든 전쟁은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이순재씨의 연기 장면. 그는 “작품마다 변신할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배우”라고 했다.
“은퇴시기는 암기력에 문제 생길 때”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한 그는 3학년 때 유진 오닐(O’Neill)의 작품 〈지평선 너머〉에 출연하면서 본격 연기를 시작한다. 대학 졸업 후 ‘실험극장’의 창립 멤버가 되는데, 훗날 TV연기의 중추를 이룬 이낙훈, 김동훈, 오현경, 여운계 등이 함께했다.
그는 현재 57년째 연기를 하고 있다. 잠깐 정치계에 발을 들이긴 했지만, 천직이 배우라고 여겨왔다. 팔순이 다 되도록 현장에서 뛰는 그는 ‘국민 롤모델’이 됐다. 건강관리 비결이 궁금했다.
“특별히 하는 건 없어요.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보단 92세까지 사신 어머니 체질을 많이 닮은 것 같아요. 그리고 술과 담배를 안 합니다. 담배는 1981년에 끊었어요. TBC에서 연기생활하다 언론통폐합 후에 잘 안 팔리던 시절이 있었는데, 대하드라마 〈풍운〉의 대원군역 제의가 들어왔어요. 아직 KBS에선 날 모르는 사람이 많았으니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왕 역할이라 크게 연설하는 장면이 많아 딱 끊어버렸습니다.”
그는 “쓰러지지 않는 한 도전은 계속할 것”이라고 했고, “대사 암기력에 문제가 생겨 NG를 반복적으로 낼 때가 은퇴 시기”라고 했다.
“암기력이 있어도 안 써주면 그만둬야 하는 거고, 계속 써주는데 내가 못 외우면 스스로 끝내야 하는 거죠.”
—‘원로배우’, ‘명품배우’, ‘연기의 대부’, ‘현역 최고령 배우’ 중 어떤 호칭이 마음에 드나요.
“그냥 배우. 지금도 안 되는 게 분명 있어요. 시청자들은 모르겠지만 제 양심으로 봤을 땐 아직 배워야 할 게 많습니다.”
—‘야동순재’, ‘호통순재’, ‘직진순재’, ‘마이클순재’, ‘미스터 쓴소리’ 등 별명이 많은데 마음에 드는 게 있나요.
“잘 모르겠어요. 그냥 그렇게 불러주는 게 감사할 따름이지.”⊙
월간조선 2013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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