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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격 인터뷰] ‘미네르바’ 박대성 석방 후 심경토로

인터뷰

by 김정우 기자 2009. 8. 17.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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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은 왜 이런가?”

“박연차, 주수도, 김경준… 구치소에서 ‘범털’들과 만나 대화 나눠 전 솔직히 (가짜 미네르바가) 필명을 사칭한 것은 별 관심이 없습니다.
기분 나빴던 것은 그 글(<신동아> 가짜 기고문) 때문에 검찰에서 이틀을 더 야간 조사받았다는 겁니다. 거기서 조사받아 본 사람은 알 거예요.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 내성적인 성격, 어린 시절의 꿈은 선교사
⊙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도서관에 가서 20개가 넘는 잡지를 빌려 온종일 읽어
⊙ 두원공과대학에서 RF(무선주파수) 엔지니어링 전공
⊙ 경기도 화성의 한 무선통신 제조업체, 포천의 안테나 생산업체에 취업하여 “열심히 안테나
    만들고 열심히 술 마셔”
⊙ IMF 때 자살한 친구 아버지 보고 새로운 인생 결심
⊙ 깔끔하지 못한 것을 용납 못하는 성격. 좋아하는 연예인은 ‘소녀시대’ 윤아.
    좋아하는 노래는 ‘지(Gee)’
⊙ 주가조작 혐의자들에게 증권거래법 배워

金正友 月刊朝鮮 기자 (hgu@chosun.com
취재지원 : 이무늬 月刊朝鮮 인턴기자


그는 말이 많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도 경제 현안과 사회 문제를 거침없이 쏟아낸다. 한 번 결정된 주제는 끝까지 이야기해야 하고, 질문에는 답을 잘 하지 않는다. ‘소통’이 그다지 쉽지 않은 사람이었다.
 
  ‘미네르바’와의 첫 만남은 지난 4월 22일 서울 서초동 법원 앞 삼거리에서 이뤄졌다. 허위 사실을 유포한 혐의로 구속됐다가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된 지 이틀 만이었다. 머리를 옆으로 기운 채 두 손으로 공손히 악수를 청하는 그에게선 ‘온라인 경제 대통령’이란 거창한 수식어보다 수줍음 많은 사춘기 소년의 느낌이 먼저 떠올랐다.
 
  첫날 대화부터 쉽지 않았다. 커피숍에 앉자마자 아이스 블랙커피를 한숨에 들이켠 그는 자신을 구속시킨 현 정권에 대한 서운함과 표현의 자유에 대해 거침없이 토로했다. 중간중간 개인 신상에 대한 질문을 던져 봤지만, ‘대화’는 이미 그의 관심 밖이었다.
 
  “逆(역)족쇄 이론이라고 있어요. 들어 보셨나요?”
 
  처음 듣는 말이다. 대답도 하기 전에 이미 그의 설명은 이어졌다.
 
  “자신이 던져 놓은 족쇄에 훗날 자신이 걸릴 수도 있다는 것이죠. 사회적 감시망을 지나치게 만든 지배세력은 스스로 그 감시망에 당하게 될 겁니다. 표현의 자유는 그래서 필요한 거예요.”
 
  내용은 이해됐지만, 사용하는 어휘는 여전히 어려웠다. 그에게 물어볼 말이 많았지만, 그날 ‘역족쇄’로 시작한 한 시간 동안의 대화는 결국 ‘역족쇄’로 끝났다. 동행한 金勝敏(김승민·박찬종 전 의원 보좌관)씨에게 “가급적 언론 인터뷰를 자제하고 기고를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했다. 김씨는 “예정된 인터뷰만 마치고 그렇게 하겠다”며 “때가 되면 月刊朝鮮 기고를 꼭 추진하겠다”고 했다.
 
 
  “한국 사회의 광기를 목격했다”
 
  朴大成(박대성·30)씨는 지난 2008년 대한민국 경제를 한 차례 들었다 놓은 인물이다. 포털사이트 ‘다음(Daum)’의 ‘아고라’ 경제 토론방에서 ‘미네르바’란 필명으로 활동하며 미국의 금융 그룹 리먼브러더스의 부실을 예측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한동안 박씨의 株價(주가)와 환율 예측은 여러 경제학자조차 궁금해 할 만큼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가 추천한 책은 베스트셀러가 됐고, 한 대형 서점은 ‘미네르바 추천도서 모음전’이란 행사를 열었다. 많은 언론이 앞다퉈 베일에 가린 그를 취재하려 애썼지만, 그는 스스로 ‘고구마 파는 늙은이’라 칭하며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온갖 소문과 추측이 난무했다. 한 경제 일간지는 “미네르바는 50대 초반의 해외 거주 경험 있는 전직 증권맨”이라고 정보당국자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낸 金泰東(김태동) 성균관대 교수는 미네르바를 두고 “가장 뛰어난 국민경제 스승”이라고 극찬했다.
 
  한국어에 능숙한 외국 투자가라는 말도 있었고, 남한의 혼란을 위해 북에서 보낸 간첩이란 의혹까지 나왔다. 그의 글 한 줄에 주가가 출렁거렸고, 그가 제시한 환율은 며칠 후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미네르바의 글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자 金慶漢(김경한) 법무장관은 국회 대정부질문 답변에서 “(미네르바의 글이) 범죄 구성요건에 해당하면 당연히 수사해야 한다”고 말해 논란을 야기했다.
 
  2008년 11월 13일, 그는 게시판에 짧은 글을 남기고 절필을 선언했다. 그리고 5일 후 발간된 시사월간지 <신동아> 12월호에 ‘미네르바’ 기고문이 게재됐다. “주가지수가 500까지 폭락하고 집값이 반 토막 날 것”이라고 예측한 이 글은 삽시간에 인터넷을 통해 퍼져 나갔다.
 
  2009년 1월 7일 미네르바는 허위사실 유포죄로 체포됐다. ‘전문대 출신의 30대 무직 남성’이란 신분이 공개됐고, 체포된 박대성씨는 “<신동아>에 기고한 적이 없다”고 밝혀 <신동아> 기고문을 둘러싼 진위 논란이 벌어졌다. <월스트리트저널(WSJ)> 등 주요 외신들은 박씨의 체포 소식을 국제뉴스 톱기사로 다뤘다.
 
  한 달 후 <신동아>는 ‘미네르바 기고는 박대성씨의 글이 아니었다’며 공식 사과했고, 박씨는 지난 4월 20일 1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고 풀려났다.
 
  사이버 공간의 익명성, 표현의 자유, 학력중심사회, 언론의 책임 등 수많은 논란을 낳았던 그는 한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 사회의 광기를 목격했다”며 “이민을 가고 싶다”고 털어놨다.
 
 
  “메뉴판 볼 것 없이 무조건 아메리카노 블랙”
 
  두 달 반 후, 박씨를 다시 만났다. 장소는 서울 창천동 ‘미네르바 카페’. 신촌에서 가장 오래된, 꽤 유명한 원두커피 전문점이라는데, 정작 걸어서 10분 거리에 사는 그는 단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단다. 약속시간보다 20분 정도 늦게 도착한 그는 “30분 동안 못 찾아 주변에서 헤맸다”며 땀을 뻘뻘 흘렸다.
 
  그는 여전히 말이 많았다. 그날도 역시 아이스 블랙커피를 시켜 한 번에 들이켰다. 남은 얼음을 스푼으로 세게 젓는 통에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메뉴판 볼 것 없이 전 무조건 아메리카노 블랙입니다. 오늘은 차갑게. 이렇게 더운 날 뜨거운 커피를 마시는 건 정말 잔인한 거죠.”
 
  바뀐 게 몇 가지 보였다. 먼저 여유가 있었다. 눈도 잘 마주치지 못했는데,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어 나갔다. 냉소적이기만 했던 대화는 현학적인 수사로 덧칠해졌다. 수줍은 언변이 어느새 화려한 달변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래서 자신 있게 녹음기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그는 바로 다시 긴장한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물었다.
 
  ―네 번째 만남인데, 제가 아직 어렵습니까.
 
  “어려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다 그런 거죠.”
 
  그는 할 말이 없으면 “다 그런 거죠”라고 말한다. 그러고선 손바닥을 마주치며 “인터뷰 빨리 시작하자”고 채근을 한다. 집에 들어가 써야 할 원고가 산더미처럼 밀려 있다는 이유였다. “초스피드로 한 시간 정도만 하자”던 그를 결국 4시간 동안 인터뷰했다. 먼저 이번 月刊朝鮮 기고문에 대한 내용부터 물어봤다.
 
  ―200자 원고지 160장 분량을 써 보내셨는데, 읽어 보니 내용이 너무 어렵고 길어 부담스럽습니다.
 
  “독자의 수준에 맞게 쓴 겁니다. 月刊朝鮮은 전문성 있는 분들이 많이 보시잖아요. 저도 사흘 동안 쓰면서 공부 많이 했습니다.”
 
  경제에 대한 인터뷰는 나올 만큼 나온 데다 기고문까지 있으니 오늘은 인생 스토리를 좀 듣고 싶다고 했다. 그는 의자를 뒤로 젖히며 한숨을 내쉬었다.
 
  “인생 스토리라… 험난했죠.”
 
  ―우린 ‘취재’를 하기보단 주로 ‘취조’를 합니다.
 
  “취조도 이제 익숙합니다.”
 
  그렇게 겨우 인터뷰가 시작됐다.
 
 
  神은 왜 이런가?
 
  박씨는 1978년 서울 수색동에서 태어났다. 홍제동에서 초등학교를 나온 그는 어릴 적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고 말했다.
 
  “홍제동에서 일산으로 이사 간 후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는데, 고등학교 때까진 정말 열심히 다녔습니다. 교회 건물의 장엄한 인테리어와 엄숙한 분위기, 그걸 바라보며 믿음을 키워 나갔죠. 그러다 고등학교에 와서 힘든 시기가 닥쳤고, 스스로 이렇게 질문을 하게 됐습니다. ‘神(신)은 왜 이런가.’”
 
  그의 아버지는 종교가 없고, 어머니는 불교 신자다. 20대 중반의 여동생은 1년째 인도로 선교활동을 떠난 상태다.
 
  ―교회는 어떻게 다니게 됐습니까.
 
  “저는 부모님의 영향은 거의 안 받고 자랐어요. 특별한 동기는 없었습니다. 동네 친구들과 놀다가 자연스럽게 교회에 나갔어요. 주일학교 같은 곳도 꼬박꼬박 나갔고요. 지금 우리 가족은 종교가 다 다릅니다. 삶이란 것이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몰라요. 조심해야 해요. 그래서 보험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그는 이렇게 한 가지를 물으면 다섯 가지 이상 대답을 했다.
 
  박씨는 어릴 적 내성적인 성격이었다고 한다. 많은 친구와 한꺼번에 어울리기보다는 조용히 몇몇 친한 친구끼리 얘기를 나눴다고 했다. 교회에서 본 십자가와 목사의 가운이 멋있어 선교사가 되는 꿈을 꾸기도 했다. 초등학교 땐 학원에서 태권도를 배웠고, 중학교 시절엔 학교에서 유도를 했다. 그렇게 평범한 학생으로 신촌에서 중학교까지 졸업한 그는 가정형편이 어려워 서울 신당동의 한 공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고 한다.
 
  이사를 자주 다녔다. 서울 홍제동에서 경기도 일산으로, 그리고 서울 신촌에 왔다 다시 일산으로 옮겼다. 대학 시절(두원공과대학)엔 경기도 안성에서 자취를 했고, 직장생활은 경기도 화성과 포천에서 했다.
 
  중견 건설회사에서 일했던 그의 아버지는 박씨가 고등학생이던 시절 일산에서 임대업을 시작했고, 지금은 부천에서 부부가 함께 여관을 운영하고 있다.
 
  별 탈 없이 평범한 학창시절을 보내던 그의 인생을 바꾼 것은 바로 IMF였다.
 
  “친구가 있었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알던 녀석이고, 기독교 집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 아버지가 IMF 오기 직전에 재산을 몽땅 날린 겁니다. 자영업을 하셨는데, 주식으로 가지고 있던 재산 까먹고 보증 잘못 서서 남은 재산 날리고…. 온 집안이 정말 힘들어했죠.”
 
 
  자살한 친구 아버지 보고 새로운 인생 결심
 
  결국 그 아버지는 자살을 선택했다. 당시 장례식장을 찾은 박씨는 완전히 넋이 나간 채 앉아 있는 친구를 보며,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됐다고 한다.
 
  “장소도 기억납니다. 신촌 세브란스병원이었어요. 가족들의 표정을 봤는데, 마치 모든 것을 다 잃은 듯했어요. 어렸던 저도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모든 게 바뀌었어요. 다 좋지만 일단 자신부터 챙겨야겠다. 국가가 날 보호해 주지 못하니 자기 재산은 스스로 지킬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친구 아버지는 어떻게 자살했습니까.
 
  “그건 말하기 어렵습니다. 안 좋은 얘기니까 적당히 하고…. 그 당시 많이 자살했어요. 흔한 일이었죠.”
 
  박씨는 한국인들이 ‘집단’을 강조하는 문화 때문에 개인이 피해를 보고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고 했다. 그는 지금까지 언론에 보도됐던 것과는 달리, “소상공인이나 서민을 위해서라기보단 스스로 소상공인이자 서민인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경제 공부를 시작했다”고 했다.
 
  “IMF가 제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됐습니다. 첫째, 신에 대한 믿음을 버렸고, 둘째 개인은 스스로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1997년 박씨는 경기도 안성에 있는 두원공과대학에 입학했다. 전공은 RF(무선주파수) 엔지니어링으로 안테나와 휴대전화 중계기 등 무선통신 분야를 공부했다.
 
  ―대학 다닐 땐 공부만 했습니까. 취미는 없었나요.
 
  “솔직히 그 시절엔 술 먹는 게 일 아니겠습니까. 공부도 열심히 하고, 저녁땐 술도 열심히 마시고, 낮엔 안테나 열심히 만들고…. 아무튼 열심히 살았습니다.”
 
  ―학점은 잘 나왔나요.
 
  “나빴어요. 관리를 안 해서…, 하하.”
 
  “공부 열심히 했는데 왜 학점이 나빴느냐”고 물었지만, 그는 크게 웃더니 “그냥 열심히 살았다. 다시 한다면 더 열심히 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1998년 11월, 박씨는 강원도 102보충대에 입대했다. 군 생활은 강원도 홍천의 11사단에서 보냈다. 그는 군에서도 “열심히 총 쏘고 열심히 뛰었다”고 했다.
 
  “M60 알죠? 지금은 K3로 바뀐…. 그거 메고 한겨울에 산 위에 올라가 눈 덮인 논밭을 보며 열심히 뛰었습니다.”
 
  ―군에서 사고 친 적은 없습니까.
 
  “따로 영창 가거나 말썽 일으킨 적은 없습니다. 1년에 절반 이상은 산 타고, 텐트 치고, 자고, 걸어야 하니까 그럴 여유도 없었죠.”
 
 
  “깔끔하지 못한 것을 용납 못하는 성격”
 
  ―특별히 기억에 남는 병사가 있나요.”
 
  “한 사람 있어요. 통영에서 온 분이었는데, 저보다 두 달 선임이었습니다. 굉장히 꼼꼼한 사람이었어요. 몽당연필 있으면 볼펜 자루에 끼워서 쓰고, 검열 있으면 랜턴 배터리까지 미리 다 점검했어요. 그때 생각했죠. ‘아, 저런 식으로 꼼꼼하게 살아야 하는구나’라고요.”
 
  꼼꼼함은 박대성씨도 못지않다. 서울구치소에서 무죄로 풀려난 후 함께 생활했던 김승민씨는 박씨에 대해 “집에서 일을 하다가도 조금만 여유가 생기면 청소기와 걸레를 들고 청소를 한다”며 “깔끔하지 못한 것을 용납 못 하는 성격”이라고 했다.
 
  ―사귀는 사람은 없습니까.
 
  “본격적으로 사귀어 본 적은 없습니다. 길어야 3개월 정도. 대부분 그냥 술친구들이었어요.”
 
  2001년 1월, 만기 제대한 그는 학교에 복학한 후 또 “열심히 안테나 만들고 열심히 술을 마셨다”고 했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박씨는 경기도 화성의 한 무선통신 제조업체에 입사했다. 중계기 제작과 테스트 업무를 맡았던 그는 6개월 후인 2002년 초 경기도 포천의 안테나 생산업체로 직장을 옮겼다.
 
  당시 수입은 월 200만원 수준. 약 1년 동안 안테나 관련 업무를 배우면서 근무한 그는 “개인 시간이 없어 직장생활이 힘들었다”고 했다. 그는 결국 2003년 회사를 나왔다.
 
  박씨는 그 후 인테리어 업계에서 일을 시작했다. 대학 전공과 전혀 다른 일을 고른 이유는 자기 생활을 가질 수 있어서였다.
 
  “일산에 살 때 목조주택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걸 보면서 ‘나중에 목조 인테리어나 배워서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죠. 고등학교도 사실 건축과를 나왔습니다. 그러다 대학 갈 때 ‘미래는 IT’다 해서 방향을 튼 거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경제 공부를 시작했습니까.
 
  “아뇨. 딱히 언제 정확하게 시작한 것이 아니라, 중학교 때부터 관심을 가져오다 고등학교 때부터 자세히 공부를 하게 된 거죠.”
 
  ―<맨큐의 경제학>(하버드대 경제학교 교수 그레고리 맨큐가 쓴 경제학 개론서-편집자 주)은 언제 봤습니까.
 
  “고등학교 3학년 때 학교에서 빌려 봤습니다. 경제 공부할 때 특정 책들을 골라서 보는 게 아니라 신문 경제 섹션과 관련 잡지를 자주 봤어요.”
 
 
  도서관에서 온종일 닥치는 대로 잡지 읽어
 
  박씨는 TV를 거의 보지 않는다. 주로 신문과 잡지를 보는데, ‘선입견이 생길 것을 우려해’ 구독은 하지 않았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도서관에 가서 20개가 넘는 잡지를 빌려 온종일 읽었다고 한다.
 
  “주말에 주로 갔어요. 잡지 읽기에 도서관만큼 좋은 곳이 없습니다. 캔커피 두 개를 갖다 놓고 온종일 그냥 닥치는 대로 읽는 겁니다.”
 
  박씨는 2006년 중반부터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주로 포털사이트 뉴스 댓글 게시판에서 활동했다. 네이버 뉴스엔 그의 아이디로 기록된 댓글이 591개 남아 있다. 2008년 2월까지 기록된 그의 댓글을 살펴보면 李明博(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글이 많이 발견된다.
 
  ―예전에 미네르바 취재를 하면서 네이버 댓글을 살펴봤던 적이 있습니다. 다음 아고라 토론방에서의 성향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던데요.
 
  “그땐 정말 변화에 대한 기대감이 컸습니다. 잘못돼 가는 경제 상황을 바꿔 줄 대안 카드라고 생각했어요.”
 
  ―돈 받고 쓴 건 아닙니까.
 
  “돈 받고 썼으면 지금 이러고 있겠습니까. 크루즈 타고 여행이나 다니겠지.”
 
  ―2007년 대선 때 누구 찍었습니까.
 
  “투표 안 했습니다. 만약 했으면 이명박 대통령 찍었을 거예요. ‘새로운 대안을 가지고 잘하겠지’라고 기대했었어요.”
 
  ―다음 아고라에선 언제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까.
 
  “2008년 3월부터입니다.”
 
  ―왜 성향이 갑자기 바뀌었나요.
 
  “막상 대통령이 되니 인수위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요. 親(친)기업 정책을 펼쳐 기업을 살리는 것까지는 좋은데, 기업을 살리기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박씨의 정보 소스는 주로 인터넷이었다. 통계청 등 기관 홈페이지와 구체적인 데이터를 제공하는 사이트들을 통해 정확한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영어가 자유롭지 못해 외신기사는 주로 번역된 자료를 읽었다고 했다.
 
  박씨는 현재 구글 뉴스 서비스를 자주 이용한다. 아고라 토론방은 이제 더 이상 찾지 않는다. 그는 “다음 사이트 자체를 방문하지 않는다”면서 “어떤 악의가 있기보다는 자신이 체포된 배경이 된 곳인데다 현재 자신의 항소심 재판이 진행 중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신동아>의 가짜 미네르바 기고문 덕에 이틀 더 야간 조사
 
  ―미네르바 이슈가 한창이던 당시, 자기 스스로를 ‘고구마 파는 노인’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까.
 
  “특별한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냥 해 본 말이었어요.”
 
  ―지난해 12월, 가짜 미네르바가 <신동아>에 기고했을 땐 왜 가만히 있었습니까.
 
  “연예인들 가십 기사처럼 잠깐 그러고 조용해질 줄 알았어요.”
 
  ―그것 때문에 체포 직후 진위 논란이 거셌습니다.
 
  “전 솔직히 필명을 사칭한 것은 별 관심이 없습니다. 기분 나빴던 것은 그 글 때문에 검찰에서 이틀을 더 야간 조사받았다는 겁니다. 거기서 조사받아 본 사람은 알 거예요.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검찰에서 처음 그 글(<신동아>에 게재된 가짜 미네르바의 기고문)을 읽었는데, 황당했어요. 다 읽은 후에 ‘중동 정세에 대한 분석도 틀렸고, 투자은행(IB)과 상업은행의 기본적인 개념조차 모르는 사람이 쓴 것’이라며 검사에게 돌려줬습니다.”
 
  그는 <신동아>에 자신의 필명을 빼앗겼던 것보다 검찰수사 기간이 더 길어진 것에 대해 화가 나 있었다.
 
  ―존경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딱히 존경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누군가요.
 
  “쉽게 말해서 대통령 세 명입니다. 한 명은 조지 W. 부시 前(전) 미국 대통령, 그리고 대통령은 아니지만, 북한의 金正日(김정일). 나머지 한 명은 이야기 못 하겠습니다.”
 
  ―어느 나라 대통령입니까.
 
  “그냥 대통령이란 것만 알아 주세요.”
 
  ―구치소에 수감됐던 당시 月刊朝鮮 2009년 3월호에 게재된 서면 인터뷰에서 “정제되지 못한 표현을 쓴 글이 너무 창피하고 신경이 쓰인다”며 “몇몇 분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해 드린 것에 대해 사과하고 싶다”고 했는데요.
 
  “욕한 것은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다들 어르신인데, 제가 말을 함부로 했었죠. 하지만 그때도 분명하게 언급한 것이 제 글이나 행동에 대해선 후회하거나 따로 사과할 마음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꿈이 뭐였습니까.
 
  “선교사였습니다. 목사가 멋져 보였어요. 가운에 걸린 십자가도 좋았고.
 
  ―앞으로 꿈과 목표는 뭔가요.
 
  “단기적으론 최대한 빨리 재판(항소심)을 끝내는 것입니다. 신경이 쓰여서 다른 걸 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장기적으론, 유학을 갈 수 있으면 어느 나라든 가서 현지의 선진금융기법을 배우고 싶어요. 그리고 아시아에 상품先物(선물)시장을 만드는 것이 꿈이자 목표입니다.
 
 
  “좋아하는 연예인은 ‘소녀시대’의 윤아”
 
  ―독자들을 위해 추천 종목 몇 가지 말해 주시죠.
 
  “종목 분석을 아직 안 해서 추천 종목을 찍을 수가 없어요. 개별 종목에 대해 분석을 철저히 해야 하는데, 일단 모아 둔 데이터들을 아직 돌려받지 못했습니다. 사용하던 외장 하드, 노트북, 데스크톱 모두 검찰에 압수당했죠. 그래서 분석하기 전까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래도 한두 종목만 고른다면.
 
  “국내는 재생 에너지 관련 종목, 중국은 금융·보험 쪽입니다. 상하이(上海) 증시가 폭등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펀드도 하나 추천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진짜 아직은 모르겠다”며 대답하지 않았다. 몇 주 전 한 인터넷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박씨는 별생각 없이 일부 원자재 펀드를 추천했다. 10일 후 해당 펀드가 급등했고, 박씨는 결국 ‘작전세력’으로 오해까지 받았다고 한다.
 
  그는 종종 30대 남성이 아니라 사춘기 소년 같은 순수한 모습을 보여줬다. 어떤 연예인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남자 연예인 이름만 나열했다. 여자 연예인을 골라 달라고 하자 한참 후 돌아온 대답이 “넘어가시죠. 좋아하는 연예인 없습니다”였다. 계속 집요하게 질문하자 그가 결국 손을 들었다.
 
  “예, ‘소녀시대’의 윤아 좋아합니다.”
 
  그는 정말 부끄러운 듯 테이블에 엎드려 얼굴을 가렸다.
 
  ―가장 감명 깊게 본 영화가 있습니까.
 
  “<루디 이야기>라고, 잘 모르실 겁니다. 미국 풋볼 영화인데, 가슴 찡한 감동적인 영화예요. 사실 영화는 안 가리고 다 봅니다.”
 
 
  구치소에서 유명인사들 만나 대화 나눠
 
  ―감명 깊었던 책은.
 
  “구치소에서 읽었던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입니다. 거기 가면 말할 기회가 잘 없어요. 며칠 말 않고 있으니 말하는 방법까지 잊어버리겠더군요. 그래서 책을 펼쳐 놓고 육성으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읽은 책이에요. 별 기대 없이 봤는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평생 큰일 한 번 겪지 않고 조용히 살아온 그가 검찰 마약수사대에 연행돼 100일 이상 독방에 갇혔다. 길지 않은 수감생활이 박씨에게 끼친 영향은 상당히 클 수밖에 없었다. ‘좋아하는 노래’가 있느냐고 묻자 여성그룹 ‘소녀시대’의 ‘지(Gee)’라고 답했다. 이유는 구치소에 있던 시절 가장 많이 들었던 노래였기 때문이란다.
 
  “아침, 점심, 저녁 라디오를 틀어 주는데, ‘지’가 계속 나왔어요. 거기가 굉장히 우울한 분위기인데, 특히 저녁에 석양이 지면 더 심해집니다. 그럴 때마다 발랄한 노래 들으면서 마음을 푸는 거죠. 우울증 예방에 좋은 것 같아요.”
 
  ―지금 서울구치소에 언론에 등장한 유명인사들이 다 있다고 들었습니다. 만나봤습니까.
 
  “朴淵次(박연차) 태광실업 회장, 朱水道(주수도) JU그룹 회장, 김경준씨, 모 공기업 前(전) 사장…, 유명했던 분들 만난 사례가 꽤 많습니다.”
 
  ―만나면 뭐합니까.
 
  “뭘 하긴… 딸기우유나 서로 나눠 마셨죠. 거기 들어가면 다 똑같아요.”
 
  그는 냉수 한 잔을 더 주문했다. 인터뷰 시작 때 아이스 커피를 훌쩍 들이켜고선 조금 민감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냉수를 주문해 마셨다. ‘높은 분들’ 이야기가 나오자 다시 긴장이 됐는지 네 잔째 냉수를 마시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박연차 회장은 변호사 접견 대기실에서 한 세 번 정도 봤습니다. 몸이 많이 안 좋아 보이더군요. 눈을 거의 반쯤 감고 다니세요. 옆자리에 앉아서 서로 이야기를 나눴는데, 제게 ‘억울하다’, ‘이용당했다’는 말을 했습니다.”
 
  ―박 회장이 미네르바를 알던가요.
 
  “몰랐습니다.”
 
  ―누가 먼저 말을 걸었습니까.
 
  “기억이 잘 안 나요. 그냥 앉아있다 보면 서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어요. 제가 아마 ‘어르신’이라면서 말을 걸었던 것 같습니다.”
 
  ―주수도씨는 미네르바를 알던가요.
 
  “예. 알고 있었습니다. 이모씨라고, 주가조작으로 들어온 분이 있어요. 그분과 자주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 어르신(주 회장)이 오신 거죠. 방이 따로 있기 때문에 주로 변호사 접견 대기실에서 만났습니다. 처음 하는 이야기는 다 똑같아요. ‘어떻게 지내느냐, 밥은 먹었느냐, 반찬이 영 아니지 않으냐’ 그러다가 사업 이야기도 하고, 사건 이야기도 하고 그럽니다. 그때 국정원을 고발한다고 하더군요. ‘바다이야기는 곧 터질 시한폭탄’이라며 사건에 대해 꽤 자세히 설명해 줬습니다. <일요신문>에 나온 자신의 기사를 보여주며 ‘이런 나라가 어디 있느냐’고 하더군요. 저도 그렇지만 그분도 나라에 대한 실망이 큰 것 같았습니다.”
 
  ―모 공기업 사장과는 무슨 이야기를 했습니까.
 
  “별 이야기 안 했어요. 그냥 딸기우유 하나 주시더군요. ‘고생이 많다’고 하며 서로 격려해 줬어요. 김경준씨는 말이 좀 어눌해서 알아듣기 어려웠어요. 한국어를 잘 못합니다. 지금 대충 기억나는 이야기는 자신과 누나가 일을 해결해야 하는데, 여기 갇혀 있어서 답답하다는 것이었어요. 그 외에도 여러 사람 만났는데, 크게 다른 점은 없습니다. 만나 보면 다들 좋은 분들이세요.”
 
 
  주가조작 혐의자들에게 증권거래법 배워
 
  ―노건평씨는 본 적 없습니까.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분은 ‘VVIP’라 따로 다른 곳에 있었던 것 같아요.”
 
  박씨는 코스닥 상장사 ‘UC아이콜스’의 전·현직 대표인 이모씨와 박모씨, 한국도자기 창업주의 손자인 김모씨 등과 같은 방을 쓰면서 대화를 나눴다고 했다. 모두 주가조작 혐의로 구속된 이들이다.
 
  “보름에서 20일 정도 같은 방을 썼어요. 덕분에 증권거래법에 대해 상세하게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그 외 미국에서 헤지펀드를 하다 한국에 온 이모씨와는 쪽지로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비밀문건을 유출해 들어온 정모씨와는 운동시간에 대화했죠.”
 
  박씨는 해외도박 원정을 하다 붙잡힌 방송국 예능 PD와 지난해 용산참사 관련 용산철거민대책위의 이모씨 등과도 같은 방을 썼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구치소 생활이 많이 힘들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다시는 가기 싫은 곳”이라고 했다.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졌고, 그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개인의 자유’를 철저히 빼앗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항소심이 마무리되면 ‘편한 마음’으로 유학을 떠날 예정이라고 했다. 후원자가 확정되는 대로 유학 대상 국가를 정해 선진 금융기법과 정책을 공부할 계획이란다. 일단 중국과 일본 등 아시아 국가들을 8월 중 방문할 예정이며, 현장에서 직접 보고 들은 내용을 글로 정리해 책을 출판할 계획도 갖고 있다.
 
  재판이 끝나지 않아서인지 그는 속마음을 쉽게 열지 않으려 했다. 인터뷰 도중 종종 횡설수설하는 습관은 여전했다. 자신의 진실을 감추려는 모습도 조금씩 보였다. 박씨의 속마음은 ‘황혼이 짙어지면 날기 시작할’ 미네르바의 부엉이처럼 먼 훗날이 돼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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