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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전 확보한 '유조선 나포' 첩보…'통상적 조치' 해왔다는 외교부

정치·북한

by 김정우 기자 2021. 1. 8.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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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일 밤, 아랍에미리트(UAE)로 향하던 한국 유조선이 이란에 나포됐다는 속보가 AP통신을 통해 전해졌을 때 '뭔가 이상하다'는 직감이 들었습니다.

흔히 '해상 피랍'이라 하면 해적을 떠올리기 쉬운데, 주체가 '이란 혁명수비대'(IRGC)로 파악된데다 '나포'란 표현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IRGC는 1979년 이란혁명 후 기존 정규군과 별도로 창설된 정예부대로 준(準) 정부 수준의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조직입니다. 2019년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외국 정부 군대론 처음으로 IRGC를 '테러조직'(FTO)으로 지정하기도 했습니다.

해적이나 반군이 아닌, 사실상 정부 기관이나 다름없는 군대가 유조선을 나포했다는 의미는 단순 인질극이 아닌 '국가 대 국가' 차원의 외교 문제로 충분히 비화할 수 있었습니다. 앞서 이란은 영국(2019년)과 인도(2013년) 유조선을 나포한 '전과'도 있던 터였습니다.

보통 해외 피랍이나 인질 사건이 발생하면 외교부는 나름 신속하게 관련 내용을 확인해줍니다. 다만 우리 국민의 안전이 걸린 문제인 만큼, 석방이나 구출 전까지 엠바고(보도 유예) 조건으로 상황을 전파합니다. 피랍 사건이 크게 이슈화할수록 납치범들의 몸값 요구가 올라가 협상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국가 차원의 선박 나포가 발생했다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오후 8시쯤 속보가 뜨자마자 외교부 측에 곧바로 사실 확인을 요청했지만, 이에 대한 공식 답변은 2시간 반이 지나서야 짤막하게 나왔습니다. "국민 5명이 승선한 우리 국적 케미컬 운반선 1척이 이란 당국의 조사 요청에 따라 이란 해역으로 이동 중이며 선원 안전을 확인하고 선박 조기 억류 해제를 요청 중"이란 내용과 함께 "현재 청해부대(최영함)가 사고 해역으로 이동 중"이란 소식이었습니다. 국방부도 비슷한 시간 같은 내용을 전파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이란 반(半)관영 매체인 파르스(Fars)와 타스님(Tasnim) 등은 "7200t의 에탄올을 실은 한국 유조선이 해양오염으로 억류됐다"는 주장을 전한 상태였고, 서구 외신에선 이번 나포가 군부 실세 솔레이마니 암살 1년 만에 이란이 우라늄 농축 농도를 20%로 상향한 직후 발생한데다, 한국 내 동결된 수십억 달러의 이란 재산 문제 해결을 위해 한국 외교관이 테헤란으로 가기로 한 상태였다는 배경까지 설명돼 있었습니다. 이란 방문 예정인 외교관이 다름아닌 최종건 외교부 1차관이란 소문도 돌았습니다.

소말리아나 토고 출신 해적이 몇만 달러 낚아보겠다고 덤비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사건이었던 셈입니다.

이란 반관영 매체인 파르스 통신이 5일 공개한 한국케미호 나포 현장 모습. / 타스님뉴스 캡처


■ 한 달 전 전파된 '韓 유조선 나포 첩보'

나포 속보 직후 부산에 위치한 선사를 비롯해 이란 현지 대사관과 국내 전문가들에게 연락을 시도하며 취재를 하던 중, 한 외교 소식통으로부터 뜻밖의 얘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미 몇 주 전 이란 정부가 유조선을 나포한다는 첩보가 중동 일부 공관들에 전파된 상태여서, 크게 놀라울 건 없는 사건"이란 설명이었습니다.

한국 정부가 몇 주 전에 사건을 예측했다는 정보력도 놀라웠지만, 그런 첩보가 있었는데도 나포를 당했다는 사실도 이해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소식통은 "출처 불명이라고 했지만, 영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국제 협상 기관이 이러한 첩보를 제공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재외공관이나 외교부 입장에선 선사나 선박에 경고 조치를 하는 것 외엔 별다른 방법이 없었을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돈'이 이번 나포의 가장 큰 목적이라며 "미국의 제재로 한국에 묶인 원유 수출대금 반환을 이란이 비공식적으로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습니다.

사건 발생 다음날 한 조간 신문은 "최종건 외교부 1차관이 조만간 원유 수출대금 동결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이란을 방문하는 일정을 조율 중이었다"며 '이란 방문 예정 외교관'을 최 차관으로 특정했습니다.

70억 달러에 달하는 원유 수출 대금이 이번 나포의 가장 큰 배경이 됐고, 한국 정부가 차관을 보낼 만큼 상당한 수준의 합의가 이뤄졌지만 이란이 선박 억류란 초강경책을 내놓으면서 한국과 이란 사이는 물론 미국까지 복잡하게 얽힌 고차방정식 외교 사안이 됐습니다.

'유조선 나포 첩보설'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복수의 외교 관계자와 소식통을 접촉했습니다. 대다수는 처음 듣거나 모르는 일이라고 했지만, 한 취재원을 통해 보다 구체적인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첩보가 발생한 시점은 지난달 11일이었고, 호르무즈 해협 인근 페르시아만 인접 공관에 "이란 정부가 보복 조치로 유조선을 나포할 계획"이란 경고가 전파된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금일 출처 불명의 첩보가 입수되어 본부가 유관기관과 연락체계를 구축하여 대응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내용은 대이란제재로 인하여 한국내 교역대금이 묶여있는 상황에 불만을 품은 이란 정부(혹은 준정부기관, 정부지원단체)가 보복조치로 호르무즈 해협을 출입하는 우리 유조선을 나포할 계획이라는 첩보가 입수되었습니다.

제 공관 여러분께서는 관련 사항 조사 및 상황 모니터링을 통해 만일의 관련 상황 발생시, 즉각 본부 해외안전지킴센터에 유선 통보 및 전문 처리를 부탁드립니다."

이란 매체들이 공개한 한국케미호 나포 직전 영상 / 이란타임스 유튜브


■ 이례적 첩보…외교력으로 선제 대응했어야

나포 사건이 발생하기 거의 한 달 전에 이미 '교역대금 불만', '호르무즈 해협 출입', '우리 유조선 나포' 등 구체적인 정황이 정확하게 예측된 셈입니다.

나포 선박 선사 측 관계자에게 혹시 관련 경고를 받았는지 물었습니다. 중동의 경우 위험 지역을 통과할 때 군인이 함께 승선하는 등 나름 대처를 하지만, 워낙 많은 경보가 뜨기 때문에 일일이 모든 사안에 대응하긴 어렵다는 취지의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외교 소식통은 "수많은 해적 피랍 경보를 봤지만, 이런 형태의 첩보 전파는 극히 드문 사례"라며 "정부 차원의 유조선 나포를 예고하면서 선제적인 외교 대응을 하지 못한 부분이 아쉽다"고 했습니다.

애초부터 국내에 동결된 교역대금이 원인이 된 만큼, 물리적·군사적 방어보다는 '외교력'에 집중했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습니다.

지난 5일 TV조선 '뉴스9'는 "외교부, 한달전 '이란 선박 나포 위험' 첩보 전파하고도 당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이번 나포가 상당 기간 준비된 조직적 움직임이었고, 우리 정부는 동향을 입수하고도 제대로 대응을 했는지 의문을 갖게 하는 대목"이라고 보도하면서 첩보 문건 내용을 공개했습니다.

그리고 이틀 후 <조선일보>는 첩보 관련 내용을 인용하면서 "지난달 청와대가 관계 부처로부터 이란 정부 또는 정부 지원 단체가 페르시아만을 항해하는 우리 선박을 나포할 가능성이 있다는 내용의 정보 보고를 받았고, 문재인 대통령이 국가안보실 중심으로 관계 부처들의 적극 대응을 주문한 것으로 전해졌다"며 "(한국케미호 억류 후) 문 대통령이 상황 보고를 받은 자리에서 참모들과 일선 부처의 안일한 대응을 지적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습니다.

'유조선 나포 첩보'가 일부 재외공관뿐 아니라 청와대까지 보고됐다면, 단순 첩보를 넘어선 '주요 정보' 수준이었을 가능성도 제기됩니다.

1월 5일 TV조선 뉴스9 '한달전 유조선 나포 첩보 전파' 보도


■ '통상적 조치' 강조한 외교부


외교부는 7일 대변인 브리핑에서 이와 관련해 "해외 안전 측면에서 여러 가지 유동성이 매우 민감·예민한 지역으로 외교부를 포함한 우리 정부는 중동 정세 등을 포함해서 해당 지역 상황을 항상 예의주시하고 있다"면서 "여러 가지 안전 관련 징후 등이 있을 때마다 관계부처나 공관 또는 심지어 민간기업 모두에게 관련 상황을 공지하고 주의를 촉구하는 조치들을 당연히 재외국민 보호 차원에서 수시로 해오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또 "해당 해역은 우리 국적 선박만 해도 매일 20여 척이 왔다 갔다 할 정도로 빈번한 지역으로 통상적인 조치를 늘 취해왔다"며 "특정시기의 특정조치 등에 대해서는 일일이 확인해 주기는 어렵다"고 답했습니다.

결국 매일 20여 척이 오갈 정도로 빈번한 지역에 '통상적 조치'를 취하는 정도로 첩보 대응을 마무리했다는 취지로 읽힙니다. '외국 정부 차원의 나포 위험'을 사전에 파악하고도 적극적인 외교로 이를 해결하기보다는 단순 해적 경고 수준으로 조치했다는 것인지도 의문이 남습니다.

억류든 나포든 인질극이든 피해국은 협상·구출과 국내 여론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할 수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단호한 태도로 '협상불가론'을 주장하면 자국민 안전과 재산이 위협 받고, 그렇다고 원만한 협상에만 신경을 쏟을 경우 향후 같은 사건이 재발하거나 '글로벌 호구' 취급을 받을 가능성이 커지게 됩니다.

외교부는 최종건 1차관이 오는 10일부터 이란을 직접 방문해 재정과 보건 문제 등을 놓고 포괄적 협의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가장 시급한 사안은 억류된 선원과 선박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일부 매체가 보도한 대로 최 차관이 '창의적 방안'을 내놓을 거란 전망이 나오는데, 그보다 먼저 충분히 예견된 나포 사태가 발생하기 사전에 외교적 해법이 나왔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취재후 Talk] 한달전 확보한 '유조선 나포' 첩보…'통상적 조치' 해왔다는 외교부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448&aid=0000315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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