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造船·전자 역전당하자 핵심기술에 집중투자
⊙ 만나자마자 용건부터 말하는 실용적 국민성
⊙ 월러스틴 예일大 석좌교수 “진정한 패권大國은 영국, 미국, 네덜란드”
⊙ 시골 중소기업도 무역 전문용어 척척… 생활속 깊숙이 국제화
⊙ ‘합법적 매춘’에 제동 건 암스테르담市정부… 홍등가 폐업 잇따라
⊙ “한국이 네덜란드를 배워야 하는 시대 지났다. 이젠 협업해야” (하인스브록 駐韓 네덜란드 대사)
유로마스트 전망대에서 본 유럽 최대 항구 도시 로테르담 전경.
음습(陰濕). 첫 느낌은 그랬다. 건물 끝에 걸릴 것 같은 낮은 구름과 흩뿌려지는 빗방울은 일주일 취재 일정 내내 기자를 따라다녔다. 짙은 안개는 한 치 앞을 보기 어렵게 했고, 초저녁이면 해가 져버려 거리의 음산함을 더했다. 화창한 봄날 아름다운 튤립과 풍차가 어우러진 총천연색 네덜란드는 먼 나라 이야기였다.
유럽의 관문(關門), 히딩크의 고향, 자전거의 천국, 농업강국…. 네덜란드 하면 먼저 떠오르는 표현들이다. 좀 더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100여 년 전 일제의 강압을 폭로하기 위해 특사를 파견했던 헤이그, 나치의 잔혹한 탄압을 일기로 기록한 안네 프랑크의 집, 145년 전통의 하이네켄 맥주, 17세기 세계 최강 스페인 무적(無敵)함대를 무찌른 해군력, 20세기 전자기기 발달을 선도한 필립스, 인상파와 바로크 미술을 이끈 반 고흐와 렘브란트 등 네덜란드가 지닌 깊은 잠재력과 영욕(榮辱)의 역사를 말할 것이다.
바다를 메워 개척한 낮은 땅과 유럽 최강국 독일, 프랑스, 영국 사이에 자리 잡은, 남한의 절반도 안되는 땅에서 네덜란드인은 세계 역사를 뒤흔드는 기적을 일궈냈다. 무엇이 그들을 강하게 만들었을까. 2009년 11월 15일부터 일주일간 진행된 취재는 그 해답을 찾기 위한 노력이었다.
‘유럽의 허브’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은 인천국제공항이 벤치마킹한 공항답게 세계 각국에서 온 항공기와 승객으로 북적댔다. 수속을 마친 후 공항 밖으로 나오니 뭔가 빠진 듯 허전했다. 여행의 ‘목적’이나 ‘기간’을 묻는 그 흔한 질문도 없이, 일사천리로 출입국 심사와 세관을 줄 한 번 서지 않고 통과한 것이다. 최고 보안을 자랑하는 공항이니만큼 별문제가 없으니 통과됐겠지만, ‘유럽의 관문이 너무 쉽게 뚫리는 게 아닐까’란 기우(杞憂)가 생길 만큼 빠른 수속이었다.
담배꽁초와 쓰레기로 너저분한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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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 중앙역 앞 거리. 150여 개국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인종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
공항에서 암스테르담까지는 열차로 이동했다. 네덜란드의 철도 시스템은 처음엔 복잡해 보이지만, 조금만 익숙해지면 꽤 간단한 원리다. 우선 자동발매기에서 표를 산 후, 지정 플랫폼으로 가면 정시(定時)에 출발하는 열차를 탈 수 있다. 서울행(行), 부산행처럼 구간에 따라 플랫폼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각 시간별로 바뀌는 플랫폼을 찾아가는 원리다. 열차표엔 따로 시간과 좌석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원하는 시각에 도착하는 열차를 타서 아무 자리에나 앉으면 된다. 표 검사를 하는 일은 드물지만, 네덜란드인의 ‘성격상’ 무임승차는 거의 없다고 한다.
암스테르담 중앙역에 내렸다. 비잔틴과 르네상스 양식이 혼합된 역사(驛舍)가 낯설지 않았다. 1925년 조선총독부가 암스테르담 중앙역과 핀란드 헬싱키 중앙역을 본떠 지은 서울역의 이미지가 묘하게 겹쳐졌기 때문이다.
중앙역 앞은 바로 암스테르담 도심과 연결돼 있다. 인종전시장을 방불케 하는 다양한 피부색의 사람들이 바쁘게 오갔다. 좁은 전용도로를 따라 자전거가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남녀를 불문하고 누구든 자유롭게 길을 걸으며 담배를 피웠고, 거리 주변은 버려진 꽁초와 쓰레기들로 너저분했다.
암스테르담은 도심 곳곳이 물길로 연결된 ‘운하의 도시’다. 땅을 제방으로 둘러싼 후 고인 물을 빼기 위해 배수시설용으로 만든 운하는 시민의 중요한 교통로가 됐다. 네덜란드는 도시 이름에 ‘담(dam)’이 붙은 경우가 많은데, 말 그대로 오래전 강둑을 따라 건설된 댐을 중심으로 사람이 모여 마을이 생겨났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암스테르담은 암스텔강(江)을 가로지르는 댐이란 뜻이다.
암스테르담은 홍콩과 닮은 점이 많다. 홍콩은 중국 본토와, 암스테르담은 유럽 대륙과 연결된 중요한 물류중심지다. 대륙의 모든 경제 동맥이 한곳으로 모이고, 세계 각지의 물류가 쌓이는 거대한 시장이다. 교역을 위한 용역 수요로 인해 인구가 늘었고, 원료 가공으로 도시는 부를 얻었다.
만나면 용건부터 말하는 네덜란드 국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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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천 암스테르담 KBC 센터장은 “네덜란드인의 실용적 국민성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
자유로운 사유(思惟)를 즐기는 암스테르담 시민은 그곳을 진보적인 도시로 바꿨다. 유럽에서 가장 늦게 태형을 없앤 곳이지만, 사형제를 가장 먼저 폐지한 곳도 바로 암스테르담이다.
자유로운 사유는 해상무역 발달로 이어졌다. 동인도회사를 최초로 설립한 나라는 영국이 아닌 네덜란드다. 1602년 설립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동인도의 여러 섬을 점령해 향신료 무역을 독점했다. 1799년 해산 때까지 동인도회사를 통해 식민지 경영이 이뤄졌고, 헤이그의 재무성은 이를 통해 이윤을 남겼다.
자금력이 확보된 네덜란드는 19세기 후반부터 본격 성장 궤도에 올랐다. 1871년 독일을 통일한 비스마르크는 강력한 산업화 정책을 추진했다. 라인강 하구에 자리한 네덜란드는 자연스럽게 독일의 관문이 됐다.
2010년 현재 네덜란드는 세계 8위의 무역대국이다. KOTRA 암스테르담 코리아비즈니스센터(KBC)에 따르면, 네덜란드의 연간 교역규모는 7000억 유로(약 1135조원)에 육박하고, 세계 500대 기업 중 14개를 보유하고 있다. 외국인이 투자하는 유럽물류센터의 75%가 네덜란드에 있고, 유럽 수입물량의 60%, 수출물량의 30%를 취급해 유럽의 ‘작은 거인’으로 불린다. 세계 2대(大) 대한(對韓)투자국으로 연간 10억 달러 이상을 한국에 투자한다.
윤재천(尹在天) 암스테르담 KBC 센터장은 “네덜란드는 경쟁력 유지를 위해 핵심기술을 특화해 의료첨단장비, 금...
계속...
월간조선 2010년 2월호 (기사 全文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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