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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炫 디자인파크 대표

인터뷰

by 김정우 기자 2010. 5. 26.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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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을 디자인한 남자, 이제 세계를 디자인한다

⊙ ‘호돌이 아빠’에서 400개 기업ㆍ단체 CI 만드는 아이덴티티 디자인의 代父로
⊙ 35차례 공모전 떨어진 후 10년간 70회 수상한 ‘공모전의 전설’
⊙ “배고픔을 이기기 위해 목숨 걸고 도전… 내겐 성공이 아니라 生存”
⊙ “호랑이, 십장생으로 문화상품 만들어 세계에 한국 알리겠다”

金炫
⊙ 1949년 충남 서천 출생.
⊙ 경기공업고등전문학교 공예과ㆍ중앙대 예술대 졸업, 건국대 교육대학원 석사.
⊙ 조영제CIP연구소 연구원, 대우그룹 기획조정실 디자이너, 대한민국 디자인전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 등 역임. 서울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 대전엑스포 마스코트 꿈돌이 디자인 선정.
⊙ 現 디자인파크 대표.
⊙ 상훈: 1988년 월간 <디자인> 선정 올해의 디자이너ㆍ2000년 밀레니엄 디자인 어워드
    올해의 디자이너 선정, 산업디자인진흥대회 산업포장, 미술인의날 산업미술 유공자상,
    문화의날 화관문화훈장 수훈.

김정우 월간조선 기자 (hgu@chosun.com)
취재지원 : 具希彦 月刊朝鮮 인턴기자

88서울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 앞에 선 김현 대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그를 피해 갈 수 없다. ‘김현(金炫)’이란 이름은 낯설지라도, 그가 만든 기업 로고와 정부기관 심벌을 보지 않곤 살아갈 방도가 없다.
 
 GS그룹, 국민은행, BC카드, LIG, T머니, 청정원, 교보생명, 아이리버, EBS, 코트라, 한국도로공사, 한국토지주택공사…. 김현 대표가 설립한 디자인파크는 25년 동안 400여 개의 기업이미지통합(CI)과 브랜드 아이덴티티(BI)를 창조해냈다. 청와대, 헌법재판소, 보건복지가족부, 금융감독원, 서울시 심벌도 모두 그의 작품이다.
 
 그는 1988년 서울올림픽의 마스코트 호돌이와 1993년 대전엑스포의 꿈돌이를 디자인했다. ‘세계적 흥행’을 달성한 2002년 한일(韓日) 월드컵 마스코트는 많은 사람이 기억하지 못하지만, 20세를 훌쩍 넘긴 호돌이는 아직도 한국인의 가슴속 깊이 자리 잡고 있다. 여전히 많은 이가 김 대표를 ‘호돌이 아빠’라고 부르는 이유다. 백 마디 설명보다 잘 만든 로고 하나가 기업과 국가의 브랜드 가치를 좌우하는 시대에서 그가 만들어낸 작품의 가치는 돈으로 쉽게 환산할 수 없다.
 
 “디자인 분야에선 박사 학위가 있다 해서 디자인을 더 잘할 것 같진 않습니다. ‘디자인 최고 전문가’를 굳이 학위로 나타낸다면 아마도 박사보다는 ‘도사(道士)’란 표현이 더 그럴듯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디자인 도사학위를 준다면 단연 디자인파크의 김현 대표를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40주년 기념展서 “60년은 해야…”
 
 김인철(金仁哲) 국민대 교수가 ‘국내 최고의 디자인 프로젝트 실적을 갖춘 현상공모 최다(最多) 수상자’인 김현 대표를 두고 표현한 말이다. 박암종(朴岩鍾) 한국시각정보디자인협회 회장은 “그는 자신이 ‘소가 뒷걸음치다가 쥐를 잡았다’고 하지만, 그는 뒷걸음으로도 쥐를 잡을 만한 능력을 갖춘 낭중지추(囊中之錐)의 인물”이라고 했고, 디자이너 안동민(安東敏)씨는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광고 한 편과 다시금 펼쳐보고 싶게 하는 책 한 권이 떠오르는 이”라고 그를 설명했다.
 
 2009년 12월 4일, ‘김현 디자인 40년 & 디자인파크 25주년 기념전(展)’이 열린 서울시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그를 만났다. 1969년 공모전에서 당선된 그의 작품들과 디자인파크에서 제작한 기업과 단체의 CI를 한자리에서 볼 수 있었다. 전시회 도록(圖錄) 첫 장에 적힌 김 대표의 간결한 서문이 인상적이다.
 
 “10년은 해야 일하는 법을 배우고, 20년은 해야 제 몫을 하기 시작합니다. 30년은 해야 괜찮게 한다 할 수 있고, 40년은 해야 꽤 많이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50년은 해야 자기만의 세계를 열었다고 할 수 있고, 60년은 해야 정말 잘하는 경지에 다다르겠지요. 이제 40년… 아직 갈 길이 멉니다.”
 
 디자이너 김현은 1949년 충남 서천군 장항읍에서 태어났다. 두 살 때 6·25전쟁이 발발해 부산으로 피란을 간 그의 가족은 전쟁이 끝나고 서울 종로구 계동에 새 터전을 잡았다. 장항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는 그는 누군가 고향을 물으면 ‘그냥 편하게’ 서울이라고 대답한다.
 
 그의 아버지는 금광을 찾아다니는 광산업자였다. 사업이 여의치 않아 그의 가족은 부암동에 집을 사기까지 17년 동안 8차례 이사를 다녀야 했다. 김 대표는 어린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경복궁과 금원(禁苑·비원) 사이에 있는 마을 안에서 이사를 할 때마다 집이 조금씩 좁아졌습니다. 저희 5남매는 점점 장성해 가는데, 집은 점점 작아졌죠. 아버지는 결코 꿈을 포기하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꿈이 큰 만큼 우리의 꿈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어요. 유년을 떠올리면 늘 부재중인 아버지가 거기 있습니다.”
 
 어린 시절 그의 놀이터는 다름 아닌 경복궁이었다. 1961년 산업박람회가 열리기 전까진 일반인에게 알려지지 않아 드나드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어린 김현과 그의 친구들은 책보를 든 채 경회루에서 잉어를 잡고, 왕이 집전하던 대청마루에 누워 숙제를 하거나 낮잠을 잤다.
 
 일곱 살 때부터 그는 빈 종이만 있으면 무엇이든 그려댔다. 학교에 입학한 후엔 대회 때마다 상을 휩쓸었다. 가끔 상을 타지 못한 적도 있는데 그 이유는 “어른이 손을 봐줬기 때문”이었다.
 
김현 대표가 月刊朝鮮에 최초로 공개한 호돌이 초안 스케치.

 
 고등학교 때 빵집 간판 아르바이트
 
 “그때 구도와 색채감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이 잡힌 것 같습니다. 무엇이든지 보기만 하면 닥치는 대로 그렸어요. 별생각 없이 그렸던 그때의 기초가 50년이 흐른 현재의 작업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봅니다.”
 
 윤보선(尹潽善) 전 대통령 장남을 비롯, 정·재계 명망가의 자녀들이 다녔던 재동국민학교에서도 그가 기죽지 않았던 이유는 미술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술부가 없는 학교 진학과, 아버지의 빚잔치에 수차례 가재도구를 빼앗겼던 그는 그림과 담을 쌓고 우울한 중학교 시절을 보내야 했다.
 
 잠시 접었던 꿈은 5년제인 경기공업고등전문학교 공예과에 진학하면서 부활했다. 가난도 그의 미술실력 향상을 도왔다.
 
 “빵집 간판을 그리는 일부터 학습지 표지나 삽화 디자인까지 일감이 있으면 닥치는 대로 했습니다. 그때 경험도 소중해요. 맡은 일을 어떻게든 잘 해결하려고 궁리하고 감각을 키웠죠.”
 
 대기업이나 정부기...

계속...

월간조선 2010년 2월호 (기사 全文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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