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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만에 6·25 납북 피해자법 통과시킨 李美一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사장

인터뷰

by 김정우 기자 2010. 5. 26.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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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상은 무슨… 대통령의 위로 한마디면 가슴이 뻥 뚫릴 텐데”

⊙ 8만2959명 拉北者 명부 50년 만에 발굴해 전쟁拉北 사건 再조명
⊙ “아버지 생존했다면 九旬… 더 늦기 전에 대책 마련해야”
⊙ “南北정상회담 의제에 전쟁납북자 문제 반드시 포함돼야”

李美一
⊙ 1949년 서울 출생.
⊙ 서울사대부고·이화여대 의류직물학과 졸업.
⊙ 사회복지사 자격으로 어린이집 운영하다 2000년 6·25사변납북자가족회 설립, 초대회장 역임.
⊙ 現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사장·한국전쟁납북사건자료원 원장.

1950년 9월 4일, 서울 청량리 이성환(李聖煥)씨 집에 ‘유 소좌’라 불리는 남자가 찾아왔다. 작은 키에 쌍꺼풀이 짙은 얼굴의 그는 함경도 사투리를 쓰며 이씨를 찾았다. 아내 김복남(金福南)씨는 집 뒤쪽에 있던 남편을 나오지 말라며 슬그머니 밀었다. 얼마 전 시아주버니(남편의 형)인 이성봉 박사가 인민군에 납치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씨는 다급해하는 아내에게 “괜찮다”고 말하며 마당으로 나왔다. 마루에 걸터앉은 유 소좌는 “서북청년단에 기부를 많이 했느냐”고 물었고, 이씨는 “이북에서 내려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해서 조금 했다”고 답했다. 유 소좌는 “조금은 왜 했느냐”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리고 다짜고짜 물어볼 게 있다며 지서로 가자고 했다.
 
 김복남씨는 그 후 60년 동안 남편을 만나지 못했다. 당시 이씨의 나이는 30세, 아내 김씨는 28세였다. 어린 세 딸 은일(銀一), 미일(美一), 영일(英一)은 영문도 모른 채 아버지와 헤어졌다. 2010년, 중년을 훌쩍 넘긴 딸들에게 이 ‘기억에도 없는’ 60년 전 사건은 가슴에 맺힌 한(恨)이 돼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통일부 업무보고에서 제외된 戰時납북자 8만2959명
 
이미일 이사장(왼쪽)이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 두 살 때부터 몸이 아팠던 그는 수술 후 결핵성척추염으로 판정받아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야 했다.

 6·25전쟁 중 이씨와 같은 식으로 납북(拉北)된 사람은 8만2959명에 이른다. 2002년 2월 <월간조선(月刊朝鮮)>은 ‘대한민국 정부’가 1952년 작성한 ‘6·25 사변 피랍치자 명부’를 단독 입수해 보도했다. 총 5권 중 1권으로 서울시 명단만 수록된 사료(史料)였다. 한 달 후 ‘6·25 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이사장 이미일·이하 가족회)’는 국립중앙도서관에 사장돼 있던 전국명부를 찾아냈고, <월간조선>은 이를 단행본으로 엮어 출간했다.
 
 납북인사의 직업은 정치인, 법률가, 공무원, 종교인, 교사, 언론인, 의사 등 사회지도 계층이 많았다. 북한이 남한의 기반을 무너뜨리기 위해 전쟁 전 치밀한 준비를 거쳐 나온 작전이었음을 증명하는 사례다. 소설가 이광수(李光洙), 현상윤(玄相允) 고려대 총장, 국회의원 안재홍(安在鴻), 방응모(方應謨) 조선일보 사장, 철학자 한치진(韓稚振) 등 유명인사들이 납북명단에 포함됐다.
 
 1946년 김일성(金日成)은 ‘남조선에서 인테리들을 데려올데 대하여’란 담화에서 “부족한 인텔리 문제를 해결하자면, 북조선에 있는 인텔리들을 다 찾아내는 한편, 남조선에 있는 인텔리들을 데려와야 한다”고 했다. 북한은 서울 점령 기간 중 남한의 국회의원들이 피신하자 자수 권고 기사를 신문에 냈고, 인력난이 계속되자 남한 내 기술자들을 찾아내 북으로 데려갔다.
 
 명부까지 공개됐지만, 정부의 반응은 여전히 미온적이었다. 관련법과 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그 실체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지난해 12월 31일 통일부장관의 대통령 새해 업무보고 중 발표된 ‘국군포로·납북자 및 이산가족 현황’에서도 8만여 명의 전시(戰時) 납북자는 제외돼 있었다. 통일부는 “전체 내용 중 일부만 발췌해서 보고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기술적인 문제”라고 해명했지만, 담당부처의 무관심은 가족회 회원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안겼다.
 
 
 戰後납북자만 언급한 DJ 기자회견 본 후 활동 결심
 
 지난 3월 2일, ‘6·25전쟁 납북피해 진상규명 및 납북피해자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가족회가 16대 국회였던 2003년부터 추진한 법안이 7년 만에 빛을 발한 것이다. 법안은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6·25전쟁 납북피해자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위원회’를 두고 납북사건에 대한 진상조사와 명예회복에 대한 사업을 추진하는 내용이 골자다.
 
 10년에 걸친 ‘또 하나의 전쟁’의 중심엔 항상 이미일(李美一) 가족회 이사장이 있었다. 아버지 이성환씨의 납북 당시 두 살이었던 그는 사실상 평생을 ‘납북’이란 커다란 짐을 등에 진 채 60년 세월을 보내야 했다. 결핵성척추염으로 굽은 그의 등은 질곡(桎梏)의 무게를 보여주는 듯했다.
 
 “전쟁을 겪었던 분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기 시작하니까, ‘당연한 사실’이 ‘모호한 추정’으로 바뀌는 것에 너무 놀랐습니다. 1950~60년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끊임없이 사설과 기사를 통해 납북 민간인 문제를 거론했죠. 그런데 2000년대가 되니 역사가 설화(說話)로 바뀌더군요. 어느 순간부터 납북 사실 자체가 아득한 세월 속에 방치돼 버린 거죠.”
 
 이 이사장이 본격적으로 납북자 관련 운동을 하게 된 계기는 김대중(金大中) 정권의 납북자에 대한 발언이었다. 2000년 9월 열린 기자회견에서 김 전 대통령이 “납북자가 300~400명”이라고 언급한 것에 대해 그녀는 큰 충격을 받았다.
 
 “전후(戰後) 납북자의 사례만 합산했다면 당시로선 비슷하게 맞는 숫자였죠. 그런데 분명 전쟁 납북자는 훨씬 많았거든요. 그래서 해당 기사를 쓴 기자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숫자가 잘못됐다, 오보다’라고 하니, 그 기자가 ‘단체를 만들어서 활동하면 기사로 쓰겠다’고 하더군요. 혼자 얘기해 봐야 힘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이 이사장은 곧바로 단체 결성에 들어갔다. 2000년 11월 30일 ‘6·25사변납북자가족회’를 결성해 100만인 서명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정부 측에 수정 요구를 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명부가 없다는 이유였다. 통일부의 이산가족 담당자는 “전쟁 중이라 명부 자체가 제작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정지었다. 하지만 이 이사장은 명부의 존재에 확신을 갖고 있었다. 어릴 적 당했던 연좌제의 고통과 전쟁 직후 어머니(김복남)가 활동했던 가족회의 신고 과정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존재하지 않는다”던 명부, 月刊朝鮮이 하루 만에 찾아내
 
이미일 이사장의 아버지 이성환씨가 납치되기 전 사용했던 명함. 뒷면에 영어로 기록된 철학서적과 원자재 등에 대한 메모가 인상적이다.
  첫 작업이 시작됐다. 대한적십자사가 1956년 전쟁납북자 가족들의 신고를 받아 작성한 ‘실향사민(失鄕徙民)등록자명부’ 사본을 입수했다. 명부엔 총 7034명의 납북자 인적사항이 기록돼 있었다. 자신감을 얻은 가족회는 정부기관의 공식 명부를 찾아보기로 결정했다. 관계 기관에 서신을 발송해 자료 보관 여부를 물었지만, 한결같이 부정적인 답만 돌아왔다. 통일부는 여전히 정부 내(內) 납북자 명단에 대해 “찾을 수도, 있을 수도 없다”고 주장했다.
 
  직접 발품을 팔 수밖에 없었다. 전국의 도서관, 고서점을 다니며 고서 장서가와 잡지 소장가들을 만났다. 결국 한 장서가에게서 1950년 12월 1일 공보처 통계국에서 작성한 ‘서울특별시피해자명부’를 입수했다. 총 4616명의 피살·납치·행방불명자 명단과 인적사항이 기록돼 있었다. 그중 납북자의 수는 2438명이었다.
 
  이 이사장은 명부를 <월간조선>에 건네고 심층취재를 요청했다. 당시 취재를 담당했던 김성동(金成東) 기자는 단 하루 만에 전화 한 통으로 통계청 전시관에 전시된 ‘6·25 피립치자 명부’를 찾아냈다. ‘립’은 ‘납(拉)’자의 오자(誤字)였다. 그리고 곧 국립중앙도서관에 ‘6·25사변 피랍치자 명부’가 마이크로 필름 형태로 보존돼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통일부가 찾을 수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주장하던 납북자 명단이 하루 만에 발견된 것이다. 이 이사장의 설명이다.
 
  “정부 공식 명단과 납북자 수가 최초로 밝혀진 순간이었죠. 5권 중 1권밖에 없어 전체 명단은 확보하지 못했지만, 전국 납북자 수가 ‘총 8만661명’이라고 명기돼 있었습니다. ‘전국 명부만 찾으면 되겠다’고 생각했죠.”
 
  2월 16일, 납북자 가족인 오세영씨가 <월간조선> 기사를 보고 가족회 사무실을 찾아왔다. “아버지가 납북됐다”며 그가 내놓은 서류는 ‘6·25사변피랍치자명부 추가분’ 표지와 아버지 이름이 표시된 면의 복사본이었다. 처음 본 명부에 깜짝 놀란 이 이사장은 출처를 물었고, 오씨로부터 국립중앙도서관에 5권의 전국 명부가 있다는 사실을 듣게 됐다. 이렇게 1952년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작성한 8만2959명의 ‘6·25사변 피랍치자 명부’가 확보된 것이다.
 
 
  8만여 명 명부 DB화해 준 金明浩 강릉대교수
 
  명부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전국의 납북자 가족들의 발길이 가족회 사무실로 이어졌다. 명부에 적힌 이름 석 자만 보고도 가족들은 오열했고, 이미일 이사장은 그들 곁에서 함께 울었다. 8만여 명의 명부를 일일이 확인하는 것도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각 지역과 성명별로 데이터베이스(DB)화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이 이사장은 정부에 명부 DB화를 요청했지만, 정부는 예산의 한계로 난색을 표했다.
 
  “그때 김명호(金明浩) 강릉대 교수가 직접 나서 줬습니다. 억대의 예산이 들어가는 작업이었는데, 석 달 동안 매달려 마무리해 줬어요. 지금도 가장 고마운 분입니다. 김 교수팀의 작업 덕분에 8만여 명의 인적사항을 모두 입력, 검색할 수 있었죠.”
 
  명부 발견 후 각종 관련 문건의 발굴이 이어졌다. 미국 국무부를 비롯한 국내외와 북한 내부의 문건까지 발견됐다. 이 이사장은 다큐멘터리 감독 사유진씨가 자료 발굴에 큰 도움을 줬다고 말했다.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란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준비하던 분이었어요. 전쟁납북자와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3년 동안 뛰어다녔습니다. 결국 그 과정에서 ‘납북자’란 단어가 왜 ‘실향사민’으로 바뀌었는지 알게 됐죠. 휴전협상 테이블에서 북한 측의 요청으로 생긴 말입니다. 지금도 북한은 ‘전쟁 중 소식을 모르게 된 사람’이라고 해요. 용어상의 양보가 결국 문제를 역사 뒤편으로 사장시켜 버렸죠.”
 
  언론을 통해 명부 보도가 이어졌고 관련 문건과 자료가 계속해서 쏟아졌지만, 정부의 반응은 냉담했다. 이 이사장은 수차례 통일부를 방문해 진상규명을 요청했지만, 담당자는 명부를 못 믿겠다며 실태조사가 필요하다고 했다.
 
  “우리가 실태조사를 직접 할 순 없잖아요. 통일부에서 해 달라고 했더니 예산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산이 없어도 된다. 신고자료 인쇄비와 공고 비용만 있으면 된다. 행정기관에 신청서 비치하고 나머지는 인터넷으로 하면 되지 않느냐’고 했어요. 1950년대에도 실태조사를 해서 명부를 만들었는데, 지금 못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러니까 ‘행자부의 협조가 필요한데, 법이 없어서 어렵다’고 합니다.”
 
  이 이사장은 법 제정을 위한 본격 준비에 착수했다. 2003년 10월 ‘6·25전쟁납북자명예회복및지원에관한법률안’이 송영진(宋榮珍) 의원에 의해 발의됐지만, 16대 국회가 종료되면서 폐기됐다. 2004년 11월 전여옥(田麗玉) 의원이 다시 상정했지만, 보상에 대한 규모가 커서 계류되다 17대 국회와 함께 또 폐기됐다. 결국 18대 국회까지 연기된 법안 제정은 2008년 12월 김무성(金武星) 의원, 2009년 1월 박선영(朴宣映) 의원 발의에 의해 다시 상정됐고, 올해 3월 2일 본회의를 통과했다.
 
 
  “아버지는 와세다大에서 법철학 전공한 엘리트”
 
  ―법안이 통과됐을 때 어떤 심정이었습니까.
 
  “이제야 한 단계 올라섰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7년 동안 끌 것도 아닌데 너무 지체됐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법 통과는 시작일 뿐입니다. 이 운동을 처음 시작했을 때 어머니 연세가 팔순(八旬)에 가까웠어요. 지금은 구순(九旬)을 바라보고 계세요. 이미 납치 피해자 가족분들 중에 상당수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하루빨리 일을 진행해야죠.”
 
  이 이사장의 어머니 김복남씨는 1922년 개성에서 태어나 개성 호수돈여고와 경성여의전을 졸업했다. 학교부속병원과 도립병원에서 소아과 의사로 근무하다 이성환씨를 만나 결혼한 후 사직했다. 이씨는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법철학을 전공한 엘리트였다. 미군정에서 통역관으로 활동하던 그는 청량리에 토지를 매입해 유기(鍮器)공장을 열었고, 김씨는 남편을 내조하며 딸 셋을 낳았다. 셋째 딸을 본 지 한 달이 채 안된 1950년 9월 4일, 북한 정치보위부원이 집에 들이닥쳤고, 부부는 생이별을 했다.
 
  남편이 납치된 후 김씨는 매일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 9·28 서울 수복 후엔 시체를 찾으러 시내 곳곳을 돌아다녔다. 시체만 찾으면 어린 딸 셋과 함께 죽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씨의 시체는 보이지 않았고, 1·4후퇴가 닥쳐 부산으로 피란을 떠났다. 둘째 딸 미일이 아프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남편 돌아올까’ 60년 동안 청량리 못 떠나
 
이미일 이사장의 아버지 이성환(왼쪽)씨와 어머니 김복남씨. 사진 속 젊은 부부는 어느새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김씨는 ‘만일 애 아빠가 죽었으면 결국 우리도 다 죽을 건데’라고 생각하면서 딸의 병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다 생각이 바뀌었다. ‘애 아빠가 돌아오면 건강한 아이를 보여줘야겠다’며 밤새워 병원을 찾아다녔지만 차도가 없었다. 병명은 결핵성척추염, 일곱 살 때 수술을 했지만, 뼈의 병이 그대로 진행돼 미일은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했다.
 
  전쟁 후 김씨는 다시 병원 일을 시작했다. 수도의대에 편입해 산부인과 전문의 자격증을 딴 후 ‘성일산부인과’란 이름으로 개원했다. 장소는 남편의 형인 이성봉 박사가 병원을 하던 종로구 계동이었다. 1963년 6월 청량리로 병원을 이전했다. 남편이 납치 전 유기공장을 하던 그 자리였다. 김씨와 딸은 청량리의 그 땅을 60년 동안 포기하지 않았다. 혹여 남편이 돌아왔다 가족이 안 보여 다른 곳을 헤맬까 걱정이 들어서란다. 현재 이미일 이사장이 운영하고 있는 가족회도 바로 그 자리에 있다.
 
  “언니와 동생은 모두 미국에 갔어요. 어머니는 저도 갔으면 하셨죠. 미국은 장애인의 천국입니다. 몇 년 전만 해도 한국은 장애인들을 굉장히 하대하는 문화가 팽배했어요. 몇 주 가서 지내 보니 정말 장애인에 대한 배려가 철저한 나라란 생각이 들더군요. 어머니도 진지하게 물으시더라고요. 미국으로 가지 않겠느냐고.”
 
  ―왜 안 갔습니까.
 
  “미국에 있을 때, ‘그래도 한국이 내 살 곳’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뜬금없이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저는 대한민국을 사랑합니다. 아무리 불편해도 조국을 떠날 순 없었어요. 아버지의 영향도 컸죠. 끝까지 이곳에 남아서 아버지를 기다리던 어머니의 마음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소녀 이미일은 두 살 때부터 몸이 아팠다. 6·25 발발 직후 그를 봐주던 할머니가 업다가 떨어뜨려 척추를 다쳤다. 병원에 입원했는데 마침 결핵 환자들로 가득 찬 병동이었다. 전쟁 후 수술을 받았지만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학교를 못 가서 열 살 때까지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공부를 했다.
 
  국민학교 5학년 나이에 처음으로 학교에 갔다. 들어가자마자 본 시험에서 그는 1등을 했다. 어머니가 직접 수련장(문제집)을 골라 주며 한 가정학습이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졸업할 때가 되자 받아 주는 중학교가 없었다. 장애인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됐다는 이유였다.
 
 
  총 2346쪽 사료집에 127건 증언 채록 실어
 
  경기, 창덕, 숙명, 이화 등 시내 여중을 모두 돌아다녔지만 허탕이었다. 어머니 김씨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서울사대부속중학교의 최창규 교장을 찾아갔다. “장애가 있지만 학습엔 문제없다”며 부탁하자, 최 교장은 “입학하라”고 했다. 김씨는 그 자리에 앉아 펑펑 울었다. “그래도 일단 입학시험에 합격해야 한다”는 말은 그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미일은 전교 석차 6등으로 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고3 때까지 학급 1등을 놓치지 않았다. 고3이 되자 지인들이 의대나 치대에 진학하라고 했다. 하지만 결국 이화여대 의류학과를 선택했다.
 
  “어릴 적부터 우울한 것을 싫어했어요.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살고자 했죠. 의사가 돼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도 좋지만, 환자를 매일 보는 건 자신 없었어요. 결국 가정대에 가서 의상디자인을 전공했죠.”
 
  졸업 후 의상실을 열어 1년 동안 운영한 이씨는 하반신마비 장애인이었던 최모씨를 만나 결혼했다. 서울대 미대를 졸업한 최씨는 군 시절 막사 공사 중 부상을 당해 원호대상자가 됐다. 결혼 후에도 대학원에서 공부를 한 최씨는 1980년 지방의 한 대학 강사가 됐다. 그동안 물리치료를 꾸준히 해 몸도 회복된 상태였다. 지방에서 함께 생활했던 둘은 1987년 헤어졌다.
 
  이씨는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국립사회복지연수원 연수를 통해 사회복지사 1·2급 자격증을 땄고, 어린이집을 개원해 원장으로서 아이들을 돌봤다. 어린이집의 위치도 아버지의 유기공장이 있던 청량리였다. 안정된 생활에 별 탈 없는 삶이었지만, 2000년 대통령의 기자회견은 결국 그를 ‘전쟁 아닌 전쟁’에 뛰어들게 됐다.
 
  이 이사장과 가족회는 지금까지 2권의 사료집을 제작했다. 총 2346쪽에 달하는 사료집엔 피해 가족들의 증언과 납북 관련 사료들이 담겨 있다. 127건의 가족 증언이 실렸는데, 문인 이광수, 철학자 한치진, 이시영(李始榮) 부통령 비서실장 박영화(朴泳和), 국회전문위원 전봉빈(田鳳彬) 등 각계 지도층 인사들의 증언자료가 상당수 포함됐다.
 
  “일단 증언자들이 대부분 60세 이상의 고령자들이었어요. 사실상 납치를 직접 목격해 기억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하나둘 떠나고 있습니다. 나라가 부강해지면 이 미해결 과제를 해결해 줄 거라 생각하며 평생을 기다려 온 분들인데, 물리적으로 시간의 한계에 와 있습니다.”
 
  ―명예회복과 피해보상이 선행돼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피해보상은 남한이 아닌 북한에 신청해야”
 
  “보상은 무슨… 일단 대통령이 위로 한마디라도 해 줬으면 좋겠어요. 사과도 아닙니다. 그저 ‘가장을 잃고 아들을 빼앗기고, 얼마나 힘들었나. 조국은 당신과 가족을 절대 잊지 않겠다’라고요. 대통령의 위로가 곧 대한민국의 위로 아니겠습니까. 그 말 한마디면 저희 피해 가족 대부분의 가슴이 뻥 뚫릴 것입니다. 60년 마음의 응어리가 조금씩 풀리겠죠.”
 
  인터뷰를 하던 그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60년 동안 가족을 보지 못한 이들의 요구는 소박했다. 납북을 증명하는 사료는 넘쳐나고, 실체는 더욱 분명해졌다.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유일한 조직은 “용납할 수 없는 반공화국 모략소동”이라며 반발하는 북한뿐이다.
 
  ―피해보상은 완전히 포기한 건가요.
 
  “절대 포기 안 합니다. 그런데 청구할 대상이 틀렸어요. 가해자는 북한이지 대한민국이 아닙니다. 사과나 피해보상은 원칙적으로 북한에 요청해야죠. 전쟁 납북자 문제를 조기에 해결 못하니 전후 납북이 국내외에서 계속 발생한 것 아닙니까. 그것도 똑같은 가해자에게서요.”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만약 열린다면 회담에서 납북 문제가 언급될까요.
 
  “반드시 의제가 돼야 합니다. 두 차례의 정상회담이 있었지만 자꾸 덮어 두려고만 했죠. 6·25전쟁과 납북은 현실이자 역사입니다. 김정일(金正日)은 2002년 9월 평양을 방문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에게 ‘(납치 문제는) 참으로 불행한 일로서 솔직히 사과하고 싶다’고 털어놨습니다. 일본 총리도 받아낸 사과를 대한민국 대통령이 받지 못해서야 말이 되겠습니까.”
 
  이 이사장의 아버지 이성환씨는 살아 있다면 올해 구순이다. 휴전 후 바로 조치가 취해졌다면 아내와 장성한 딸들과 함께 평온한 생을 보냈을 것이다. 정부의 무관심 속에 ‘가족은 같이 살아야 한다’는 소박한 희망은 이뤄지지 못했다. 최강대국 미국은 “조국은 당신을 잊지 않는다”며 세계 곳곳의 수십 년 전 유해를 지금까지 찾고 있다. 강제로 북한에 끌려간 그들의 가슴에서 ‘조국’이 잊혀가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 1952년 휴전회담회의록에 나타난 민간인 拉北 문제
 
  휴전회담회의록은 2009년 10월에서야 국문으로 번역됐다. 휴전 후 반세기를 훌쩍 넘어서였다.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가 번역·발표한 ‘포로문제를 다룬 휴전회담회의록’에 따르면, 북한은 당시 휴전협정을 서두르던 UN 측의 정치적인 입장을 간파해 대한민국의 존재를 부정하며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 갔던 것으로 드러난다.
 
  UN은 결국 ‘납치’ 문제를 의제화하는 데 실패했다. 1951년 12월 27일 14차 회담내용에 따르면 북한군(軍) 간부 이상조는 “우리가 반복해서 말했듯이 당신네는 핵폭탄과 같은 사악한 선전과 군사적 위협으로 수십만의 우리 사람들을 납치해 갔다”고 주장했고, UN 측은 17차 회담부터 ‘납치(kidnap, abduction)’란 단어 대신 북한의 요구인 ‘실향민간인(displaced civilians)’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북한은 “그들(실향민간인) 중에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존재가 없다”며 대한민국의 존재 자체를 부정, 납치 문제를 철저하게 회피했다. UN은 북한의 조직적, 의도적인 납북에 대해 파악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휴전협정에 장애요소가 되는 것을 두려워해 제대로 된 ‘납북민간인’ 문제를 끝내 거론하지 못했다. 또 ‘휴전회담(armistice)’을 정치적인 이유로 ‘군사회담(military armistice)’으로 한정시켰는데, 이는 국제형법과 국제인도법상 ‘미필적 고의(dolus eventualis)’에 속하며, 국제사법상 ‘부작위(不作爲·negligence)’에 속한다.
 
  그 후 지금까지 북한은 단 한 번도 ‘대남(對南) 납치’를 인정한 적 없다. 이미일 이사장과 가족회가 여러 언론 매체를 통해 납북자 문제를 거론할 때마다 북한은 자신들의 공식 매체를 통해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냈다.
 
  2006년 8월 14일 <동아일보>가 6·25 납북자 9만6013명을 분석한 기사를 보도하자, 북한은 9월 5일 <로동신문>을 통해 “남조선 극우보수세력의 날조”라며 “인간의 존엄과 권리를 가장 귀중히 여기는 북조선에 ‘납북자’ 문제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같은 해 10월 한국전쟁납북사건자료원에서 주최한 학술논문 발표회에서 ‘휴전체제의 전환과 전시 민간인 납북자’란 주제의 논문이 발표된 것에 대해 북한 <로동신문>은 “대결 미치광이들의 불순한 날조품” “리명박 정부의 모략에 의한 산물” 등 과격한 표현으로 반박했다.
 
  김미영(金美英) 한국전쟁납북사건자료원 연구실장은 “남한 정부는 물론, 시민사회도 무겁게 침묵하고 있는 이 문제에 대해서 북한이 보여주는 반응은 역설적으로 매우 구체적이고 성실하기까지 하다”며 ‘납북자 문제 해결에 적극적인 관심의 필요성’을 촉구했다.
 
  조은정 月刊朝鮮 前 인턴기자
 

월간조선 2010년 4월호 (기사 全文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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