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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北 경제전쟁, 중화학공업으로 승리의 쐐기를 박다

경제·IT

by 김정우 기자 2011. 1. 24.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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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기적을 만든 사람들] 朴正熙 경제참모의 증언

⊙ 중국, 인도 경제발전 모델의 원형은 한국의 ‘수출제일주의+공업입국’(EOI) 개방 경제
⊙ 최종제품→중간제품→중간원료→기초원료 順 ‘피라미드型 개발전략’ 채택으로 한국型 산업혁명 완성
⊙ ‘자력갱생ㆍ자급자족’의 주체사상 외치다 망한 북한
⊙ ‘중화학공업 진입 마지막 버스’ 탄 한국, ‘진정한 기술강국’으로 성장

글 : 吳源哲 전 대통령 경제 제2수석비서관  
정리 : 金正友 月刊朝鮮 기자  


1971년 지하철 공사현장을 시찰하는 박정희 대통령.



 “임자! 100억 달러 수출하자면 무슨 공업을 육성해야 하지?”
 
  1972년 5월 30일 오후,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내게 질문을 던졌다. 서재 소파에 앉은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는 불필요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 항상 정확한 질문을 했고, 참모들은 정확한 답을 제시해야 했다. 나는 오래전부터 구상해 온 ‘산업구조 고도화에 대한 전략’을 밝힐 때가 됐다고 결심했다.
 
  “각하! 중화학공업을 발진시킬 때가 왔다고 봅니다.”
 
  답변은 육하원칙으로 짧고 명료해야 했다. “100억 달러 수출을 위해서(Why), 중화학공업 육성을(What), 일본 정부가 중화학공업 육성을 국가 중요시책으로 추진한 것과 같이(How), 대한민국도(Where), 앞으로 10년간(When), 정부 주도 아래 민간 기업체가 담당해서(Who) 추진한다”고 설명했다.
 
 
  ‘중화학공업 진입을 위한 마지막 버스’
 
박 대통령이 직접 작성해 중화학공업기획단에 하사한 ‘전 산업의 수출화’ 휘호.

  이날의 짧은 대화는 역사가 됐다. 한국 산업구조가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그해 우리나라 수출 목표는 18억 달러로, 15년 전 일본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일본은 수출액이 20억 달러였던 1957년 중화학공업화 정책으로 전환했고, 10년 만에 100억 달러를 돌파했다.
 
  다음 보고는 며칠 후에 이뤄졌다. 나는 일본의 중화학공업 정책과 수출 목표 달성 관계를 자세히 설명했다. 한국은 1960년대 ‘선진국에서 사양화돼 가던’ 섬유산업 등 경공업을 유치, 수출산업으로 육성했다. 1970년대는 중화학공업 육성의 적기였다. 나는 “경쟁 관계에 있던 동남아국가보다 먼저 출발해야 한다”며 “현 시점이 ‘중화학공업 진입을 위한 마지막 버스’를 탈 수 있는 기회”라고 보고했다.
 
  박 대통령은 한참 동안 도면을 들고 지켜봤다. 몇 분 동안 침묵이 흘렀다. 나는 설명을 이어나갔다.
 
  “각하! 우리나라는 이미 중화학공업 건설을 시작했습니다. 종합제철과 석유화학입니다. 그런데 그 규모는 국제 규모의 3분의 1입니다. 하루속히 국제 규모의 공장을 건설해야 수출도 가능합니다.”
 
  조선공업, 전자공업, 자동차공업, 방위산업 등에 대한 현황과 계획도 함께 이어졌다. 그러자 박 대통령의 눈이 빛났다. 아마 ‘이 정도라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 듯했다. 이때 함께 회의에 참석한 김정렴(金正濂) (대통령)비서실장이 “자금 문제 중 내자(內資)는 문제없다. 외자(外資)도 수출이 순조롭게 증가하는 한 차관이 가능하다”며 성공 가능성에 힘을 실었다.
 
  또 잠시 말이 없던 박 대통령이 한마디를 던졌다.
 
  “오 수석! 우선 중화학기획단 같은 것을 구성해서 계획을 짜보도록 하지!”
 
  비서실장에겐 기획단 구성에 대한 내각 지시 명령이 내려졌다. 이 간단한 지시가 ‘중화학공업 발진 명령’이었다. 대한민국이 ‘승부수’를 거는 상황이었다.
 
 
  북한의 실패
 
2010년 8월 비날론 공장을 시찰하는 김정일. 북한의 잘못된 경제정책은 주민의 의식주도 해결하지 못했다.

  2010년 8월, 김정일(金正日)이 함경남도 비날론 공장을 시찰한 사진이 북한 매체를 통해 보도됐다. 나는 사진을 보며 “북한이 완전히 망했다”고 확신했다. 비날론은 한국에선 더 이상 찾아보기도 어려운 섬유다. 그 공장을 재가동한다고 떠들썩한 나라는 정상이 아니다. 전후(戰後) 기반시설과 자원 환경에서 남한을 월등히 앞섰던 북한 경제가 실패한 이유는 무엇일까. 북한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다.
 
  1952년 4월 27일, 북한에서 과학자대회가 열렸다. 핵심과제는 ▲전력 및 지하자원 개발 ▲기계공업과 철강공업 육성 ▲식량문제 해결 ▲의류문제 해결 ▲과학원 창설이었다. 김일성은 이를 자력갱생, 자급자족 원리로 이루겠다며 주체사상을 내놓았다. 북한경제의 고립화와 후진성이 공식적으로 선포되는 순간이다.
 
  약 60년 후, 결과는 참혹하다. 가장 기본적인 식량문제와 의류문제부터 북한은 실패했다. 1인당 농토가 남한의 2.4배에 달했지만, “인민에게 쌀밥에 고깃국을 먹이겠다”는 김일성의 약속은 어느새 손자의 몫이 됐다.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은 주체농법이다.
 
  결과가 평등한 집단농장체제는 사람들을 게으르게 만들었다. 남의 배부름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중국은 개혁ㆍ개방 이후 집단농장을 포기하면서 6할 증산이란 성과를 이뤄냈다. 현재 북한 주민들은 자신의 먹을 것과 별로 상관없는 농장보다는 개인 텃밭을 가꾸는 데 더 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의(衣)와 식(食)뿐 아니라 주(住)도 실패했다. 주택문제의 가장 기본은 난방이다. 북한은 석탄 등 지하자원이 우리보다 훨씬 풍부하다. 하지만 북한은 땔감 쓴다며 산을 모두 민둥산으로 만들어버렸다. 반면 남한은 연탄 보급 정책으로 에너지와 산림녹화란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북한의 전기 사정은 최악이다. 도시를 벗어나면 전선 가설이 제대로 안되어있고, 전봇대도 찾아보기 어렵다. 현대사회에서 전기는 곧 ‘문명’을 뜻한다. 전기는 정보교환의 가장 중요한 도구다. 전기가 없으면 신문부터 보기 어렵다. 배달만 이틀 걸리는 신문을 누가 보겠는가. 라디오와 TV방송은 말할 것도 없다.
 
 
  한국型 산업혁명과 전화 보급
 
중화학공업 육성계획 확정을 보도한 1973년 5월 25일자 <조선일보>.

  우리나라 경제발전 요인으로 경부고속도로를 많이 꼽는다. 나는 고속도로보다 농어촌 전화(電化)사업이 국민 생활에 더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경부고속도로는 km당 1억원, 총 429억원의 건설비가 투입됐다. 농어촌 전화사업은 만 15년간 926억원이 들었다.
 
  박 대통령은 이 사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1964년 서독에서 농민들이 사는 모습을 직접 보고 크게 자극을 받은 그는 우선 우리나라 농가에 전기부터 가설해 줘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야만 사람답게 살 수 있고, 소득을 올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박 대통령은 귀국 후 농어촌 전화사업, 즉 전기가설 사업을 전개했다.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 농촌의 전화율은 고작 12% 정도였다.
 
  석유 판매 세금 전액을 농어촌 전화사업비에 투자하는 등 적극적인 정책 추진 결과, 새마을농촌에서 전화사업 붐이 일었다. 농촌 출신 여공(女工)들은 월급의 일부를 시골의 부모님에게 송금하면서 전기라도 놓고 살라고 권했다. 휴가 땐 라디오와 전기다리미를 선물로 사갔다. 이런 일들이 유행처럼 전국으로 퍼지면서 전화사업은 급진전하게 됐다.
 
  전기와 통신 분야에서 고속 성장을 이룬 한국은 노동시간 확대, 학습능력 증대, 고속 정보 교류 등에서 큰 성과를 거뒀다. 북한은 이 모든 부분에서 ‘미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남북 경제 정책의 가장 큰 차이는 ‘피라미드형 개발전략’에서 찾을 수 있다. 섬유제품을 예로 들면, 피라미드의 최하부는 의류다. 그리고 위로 직물, 합성섬유, 석유화학이 자리 잡고 있다. 아래에서부터 최종제품→중간제품→중간원료→기초원료다. 위로 올라갈수록 높은 수준의 기술력이 필요하다. 이 구도는 곧 한국의 수출 전략 순서가 됐다.
 


  한국은 처음부터 중화학공업을 육성하지 않았다. 와이셔츠와 같은 최종제품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직물과 같은 중간원료 공장을 세워 수출했고, 이후 폴리에스테르와 같은 합성섬유를 개발했다. 이 피라미드의 마지막 단계가 석유화학공장 및 종합제철 건설이다.
 
  북한은 반대였다. 처음부터 “자급자족하겠다”며 그네만의 틀로 전략을 세웠다. 석유를 석탄으로 대체하는 등 세계 조류와 동떨어진 정책을 밀어붙였다. 출발부터 비현실적 정책을 추진한 1957년 제1차 5개년계획은 사실상 실패로 돌아갔다. 김일성은 “5개년계획을 2년 반 만에 완수, 공업 총생산이 2.6배로 증가했고 공업생산 증가율이 매해 36.6%에 달했다”고 자평했지만, 통계치를 분석해 보면 의혹투성이다. 결국 북한은 1960년에 심각한 식량난을 경험했고, 이는 50년 후인 현재까지 해결되지 않고 있다.
 
  경공업 수출을 통한 산업개발 전략으로 ‘산업혁명’에 돌입한 한국의 실험 결과는 수출액 증대로 나타났다. 1964년 12월 31일 저녁 10시경, 수출 1억 달러를 돌파해 ‘수출산(山)’ 정상 정복의 베이스캠프를 마련했다. 바로 제1단계 산업혁명이다. 밤늦게 대기하고 있던 상공부 직원들은 모두 감격의 만세를 불렀다. 소식을 기다리고 있던 박 대통령에게 상공부장관이 전화로 보고를 시작했다.
 
  “각하! 수출대전(代錢) 1억2000만 달러가 입금됐습니다. 이로써 금년도의 목표를 달성했음을 보고 올립니다.”
 
  3년 후인 1967년 말, 한국은 수출 3억 달러를 돌파했다. 3억 달러는 당시 미국으로부터 받았던 연간 원조금의 최고 수준이었다. 1965년 방한(訪韓)한 미국의 경제학자 로스토(Rostow)는 한국이 경제성장의 결정적 전환기인 ‘이륙(take off)’ 단계에 진입했다고 말해 우리 국민에게 도약의 용기를 심어줬다.
 
  1967년부터 1970년까지는 제2단계 산업혁명이다. 수출공업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고, 새로운 공장이 우후죽순 늘어났다. 주로 경공업 위주의 산업구조였지만, ‘원료의 국산화’를 위해 기초원료 공업과 제철공업 건설이 시작됐다. 대망의 수출 10억 달러를 달성하던 날 풍경은 이랬다.
 
  1969년 12월 31일, 대만 소형어선 20척 수출 작업이 끝났다. 인수증 서명도 받았고, 한국에 갖고 오면 수출 절차가 마무리된다. 그런데 마침 서울에 큰 눈이 내려 항공기 운항이 중지됐다. 인수증을 든 직원은 자동차 비상등을 켜고 서울까지 달려왔다. 도착한 시각은 오후 3시였고, 종무식은 이미 12시에 시작해 끝난 상황이었다. 은행은 마감시한을 연장해 그를 기다렸다. 당시 상공부에선 장관과 모든 직원이 이 순간을 애타게 지켜봤다. 은행으로부터 ‘입금완료’란 통보가 오는 순간, 모두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1970년부터 1977년까지는 제3단계 산업혁명이다. 1973년 중화학공업화 선언 후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 분야로 주력산업이 옮겨갔다. 제1단계는 여자 단순기능공의 공이 컸던 반면, 제3단계는 남자 기능공의 역할이 커졌다. 기술자와 과학자도 양성됐고, ‘기계의 국산화’가 이뤄졌다. 국제적으로 경쟁력이 있는 제철소와 석유화학공장이 증설됐고, 조선소, 자동차공장, 공작기계공장, 전자공업공장 등이 건설됐다. 수출액이 크게 늘어 100억 달러 수출을 이룩했다.
 


 
  南北 간 제2의 전쟁은 경제전쟁
 

중화학공업 건설은 방위산업 육성으로 이어졌다. 사진은 1978년 국산전차 생산현장.

  1977년 이후 제4단계 산업혁명은 중화학공업에 정밀공업과 두뇌공업이 더해졌다. 산업구조 개편을 끝내 내실을 다진 단계다.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동시에 에너지와 자원을 절약하는 정책이 세워졌다. 수출은 1000억 달러를 돌파했다.
 
  기적에 가까운 산업혁명을 가능케 한 핵심 키워드는 ‘수출제일주의’와 ‘공업입국’이다. 이를 영어로 표현하면 ‘EOI(Export Oriented Industrializationㆍ수출주도산업화)’다. ‘피라미드형 개발전략’은 CEOI(The Construction of Pyramid type EOI)다. EOI가 “노동집약적 상품의 수출을 장려하는 정책만으로도 수출이란 견인력에 의해 공업을 선두로 경제가 발전한다”는 이코노미스트(economist)적 관점이라면, CEOI는 “공업기반이 없는 한국에서 수출을 기반으로 하는 산업구조(피라미드)를 정부 주도하에 새로 구축한다”는 테크노크라트(technocrat)적 관점이다.
 
  한국은 경제개발 모델이 다른 나라와 완전히 달랐다. 당시 대부분 선진국은 공업발전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중화학공업화가 이뤄졌고, 수출도 늘어났다. 우리나라는 먼저 수출 목표를 수립해 놓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중화학공업 건설을 추진했다. 이 점을 누구보다도 잘 파악한 사람이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그는 1972년 5월 30일, 상공부가 개최한 수출확대회의를 마친 후 수출 상품 전시장을 시찰했다. 마침 자동차 부품이 전시됐는데, 박 대통령은 기계제품 수출에 관심이 컸다. 피스톤 핀(piston pin)의 정밀도에 대한 그의 질문에 한 관계자가 “1/100mm 정도 되는, 아주 정밀한 부품”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그는 “M16 총열의 정밀도와 비슷하구먼”이라고 해 함께 있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 내게 수출 100억 달러 달성에 관한 ‘역사적 질문’을 했다.
 
  중화학공업 발진 명령 직후 나는 우리나라가 공업을 발전시켜 오는 과정에서 얻은 경험을 정리, 종합해서 박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중화학공업화와 80년대의 미래상’이란 제목의 보고로, 후진국 경제개발 전략, 공업화 발전의 5단계, 경제개발계획의 계획상 문제점과 대안 등이 포함돼 있었다. 그날 보고는 이렇게 마무리됐다.
 
  “각하! 우리나라가 중화학공업을 건설한다는 것은 ‘남북 간의 경제전’에 돌입한다는 뜻입니다. 이 전쟁에서 패하면 패한 쪽의 체제는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중화학 건설의 성공 여부로 남북문제는 결판이 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우리나라 국민은 앞으로 10년간 ‘제2의 한국전쟁’을 치른다는 단단한 각오로 출발해야 하겠습니다. 정부나 기업가나 국민이 모두 필승의 신념을 갖고 분투노력하겠다는 결의를 다져야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쟁을 개시할 때 선전포고를 하는 식으로, 각하께서 정부의 단호한 의지를 국민에게 다짐하는 절차가 필요하다는 건의를 올립니다.”
 
 
  ‘중화학공업화’와 ‘국민과학화’
 
  박 대통령은 이날 보고에 만족했다. 그는 “기능자는 조국근대화의 기수”라고 했다. ‘기능자→중화학공업 건설→조국근대화→민족중흥’이란 행정 식이 성립된 셈이다. 그는 또 공단계획을 수립할 때 주거지역에 대한 도시계획까지 포함하라고 했다. 공단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국토 전체를 놓고 보라는 의미였다. 기술인력 양성 문제와 국토개발 문제 등 중화학공업 건설에 필요한 모든 사항을 계획에 포함하라는 지시다.
 
  이는 우리나라의 공업구조를 완전히 개편하는 계획이다. 군대식으로 표현하면 ‘작전계획’이 아니라 ‘전략계획’을 수립하란 의미였다. 박 대통령은 이미 결심을 굳혔고, ‘남북 간의 경제전’은 이미 개시됐다. 나는 임무의 중대성과 책임의 막중함에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박 대통령은 10월 17일 ‘대통령 특별선언(10월 유신)’을 발표했다. 이를 체제개혁에만 한정해 보는 것은 옳지 않다. 10월유신에서 ‘체제개혁’과 ‘혁명과업’은 차량의 두 바퀴와 같은 개념이다. 이제 중화학공업 건설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박 대통령은 1973년 1월 12일 연두기자회견에서 ‘중화학공업화’와 ‘국민과학화’를 선언했다. 그날 회견 내용 중 일부다.
 
  “우리나라 공업은 바야흐로 ‘중화학공업 시대’에 들어갔습니다. 따라서 정부는 이제부터 ‘중화학공업 육성’의 시책에 중점을 두는 ‘중화학공업 정책’을 선언하는 바입니다. 또 하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 국민들에게 내가 제창하고자 하는 것은 이제부터 우리 모두가 ‘전 국민의 과학화 운동’을 전개하자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과학기술’을 배우고, 익히고, 개발해야 되겠습니다. 그래야 우리 국력이 급속히 신장할 수 있습니다. 과학기술의 발달 없이 우리는 절대 선진국가가 될 수 없습니다. 80년대에 가서 우리가 100억 달러 수출, ‘중화학공업의 육성’ 등등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범국민적인 ‘과학기술의 개발’에 총력을 집중해야 되겠습니다.”
 
  ‘100억 달러 수출’은 그 의미가 크다. 목표가 달성되면 우리나라 국력은 북한을 완전히 압도하게 되고, 국민 생활 수준이 북한 주민보다 월등히 윤택해진다. 방위산업을 비롯한 중화학공업이 북한을 능가해, 감히 6ㆍ25전쟁과 같은 도발을 하지 못하게 억제할 수 있다. 남한의 자유경제체제가 북한의 사회주의체제보다 우월하다는 것이 입증돼 남북한 간 ‘체제 경쟁’에서 완승하게 됨을 의미한다.
 
 
  “내가 전쟁을 하자는 것도 아니지 않으냐”
 
  1973년 1월 31일, 나는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 김종필(金鍾泌) 국무총리, 태완선(太完善) 부총리, 남덕우(南悳祐) 재무장관 등 주요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공업구조 개편론’에 대해 최종 브리핑을 했다. 중화학공업 계획, 방위산업과의 관계 등 핵심 사안이 모두 포함돼 있었다.
 
  이날의 클라이맥스는 브리핑이 끝난 후 박 대통령의 짧은 네 문장의 말이었다. 엄숙하고 조용한 말투였는데, 한마디 하고 말을 끊고, 한참 후 다음 말을 하고 또 말을 끊었다. 이때 박 대통령의 표정은 중대 결심을 앞둔 군사령관과 같았다. 입은 굳게 다물었고, 시선은 줄곧 정면을 향했다. 부동의 자세로 홀로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최종 결단에 앞서, 또 한 번의 정리를 하기 위해 자문자답을 하는 것이었다.
 
  “내가 전쟁을 하자는 것도 아니지 않으냐.”
 
  그는 계속 먼 곳만 바라봤다. 질문인 동시에 대답이었다. 이 말의 뜻은 “나(박 대통령)는 6ㆍ25와 같은 전쟁의 재발을 막으면서 평화통일을 하자는 것이지, 동족상잔의 전쟁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이런 목적 아래 중화학공업을 추진코자 하는 것이다”란 의미였다. 독백은 천천히 이어졌다.
 
  “일본은 국가의 운명을 걸고 전쟁을 일으켰는데도, 국민들이 기꺼이 따라줬다.”
 
  “(일본이) 태평양전쟁 때 패전을 해서 국민에게 막중한 피해를 주었지만.”
 
  “이 정도의 사업에 협조를 안 해줘서야 되나.”
 
  방위산업 육성과 중화학공업 건설에 대한 그의 결론이 나왔다. 마지막 한마디 말의 뜻은 “중화학공업은 꼭 해야만 한다. 그 결과는 역사가 증명해 줄 것이다. 최후의 결단은 국가원수인 내가 혼자서 내려야 한다”였을 것이다. 이날 박 대통령은 누구보다 고독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2월 12일, 박 대통령은 ‘전 산업의 수출화’라는 휘호를 직접 써서 중화학공업기획단에 하사했다. 중화학공업 건설의 목적은 수출에 있다는 명령이었다. 중화학공업기획단은 이 휘호를 액자로 만들어 단장실 정면에 걸었다.
 
  중화학공업 건설은 조국의 근대화와 민족중흥을 이룩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었다. 조국의 국운(國運)을 건 민족적, 역사적 과업이었다. 한국이 중화학공업 국가가 된다는 것은 “우리도 산업혁명을 이룩했다”는 의미다.
 
  1970년대 세계정세는 우리에게 크게 유리하지 않았다. 남북 간의 긴장이 고조됐고, 석유파동에서 시작된 에너지 위기로 물가가 인상되는 등 경제불안이 이어졌다. 당초의 3차 5개년계획은 근본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난관을 우리나라는 슬기롭게 극복해 냈다.
 
 
  진정한 기술강국
 
  1973년 원유 값 폭등이 수입상품 가격 인상을 불렀고, 이는 경상수지 적자로 이어졌다. 1960년대 ‘달러 고갈’이 몰고 온 위기 후 두 번째 경제위기였다. 박 대통령은 긴급조치를 통해 국민 불안 심리를 안정시키고 중동 진출로 위기를 기회로 바꿨다.
 
  우리 역사엔 나라가 위태로울 때마다 스스로 목숨 걸고 나선 이들이 있었다. 우리는 이들을 의병(義兵)이라 부른다. 삼국통일 때의 화랑, 임진왜란 때의 어린 의병, 6ㆍ25전쟁 때의 학도병은 모두 10대 후반의 청소년이었다. 1973년 석유위기로 나라 경제가 파국지경에 이르렀을 때, 어린 용사들은 분연히 나섰다. 중동에 파견된 17~18세 청소년 기능사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수만 리 이국 땅의 경제전쟁의 최전선에서 나라와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 일했다.
 
  1974년, 세계가 마이너스 성장을 하는 동안 한국은 GNP 8.1% 성장, 수출 38.3% 성장이란 대기록을 세웠다. 기능사와 기술자를 양성해 중화학공업과 엔지니어링 산업을 육성했다. 공업구조를 선진화해 해외에 플랜트까지 수출할 수 있게 됐다. 수출 100억 달러와 중화학공업 비율 50% 이상을 이룬 한국은 완전한 선진공업국으로 성장했다. 기적 같은 업적을 국민이 이뤄낸 것이다. 방위산업의 육성은 자주국방 실현 의지를 한 발자국 앞당겼다.
 
  세계는 ‘불굴의 도전’으로 이룬 ‘한강의 기적’을 주목했다. 20세기 후반 경이적으로 발전한 4마리의 용(龍ㆍ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 중 선두주자로 한국을 꼽았다. 1977년 미국 <뉴스위크>는 커버스토리로 한국을 다뤘다. ‘한국인이 몰려온다(The Koreans are coming)’란 제목의 이 특집기사는 한국인을 “미국이나 일본과 같은 공업구조와 국민 생활을 갖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일본인을 게으른 사람으로 보는 세계 유일한 국민”이라고 소개했다.
 
  33년 후, <뉴스위크>는 또 하나의 특집기사를 내놨다. 미소(美蘇) 냉전 이후 새로운 세계질서 지형도를 인종ㆍ종교ㆍ문화적 요인을 기초로 재조명한 기사다. 미국 채프먼 대학의 조엘 카트킨(Kotkin) 석좌 연구원이 분류한 북미동맹, 중남미 자유주의국, 이란 권역, 중화 왕국 등 복잡한 구도에서 한국은 일본, 프랑스, 브라질, 스위스 등과 함께 ‘자립국가(stand-alones)’로 구분됐다. 중요한 대목은 그들이 한국을 ‘진정한 기술강국(true technological power)’으로 규정한 부분이다. 40년 전 아프리카 가나보다 경제 수준이 낮았던 나라가 일본과 대등한 힘으로 성장한 것에 대해 그들은 또 한 번 놀랐다.
 
  하지만 여전히 위기는 존재한다. 인접한 대국(大國) 중국의 경제는 무섭게 성장하고, 일본은 여전히 막강한 힘을 유지하고 있다. 북한은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등을 통해 우리의 안보를 위협한다.
 
2010년 9월 미국 <뉴스위크>가 보도한 새로운 세계질서 지도. <뉴스위크>는 한국을 ‘진정한 기술강국’으로 규정했다.

 
  2061년의 대한민국
 
  한국은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위한 새로운 국가전략을 제시해야 한다. 국태를 위해 자주국방과 유비무환(有備無患) 정신을 확립하고 국민생활 안정 및 향상이란 민안을 이뤄야 한다. 이것이 바로 부국강병(富國强兵)이다.
 
  핵심정책으론 우선 전 국민의 정신무장이 필수다. “하면 된다” 정신과 근면ㆍ자조ㆍ협동ㆍ저축 정신이 부활해야 한다. 그리고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는 안보 정신이 투철해야 한다. 1970년 닉슨독트린에 의한 주한미군 7사단 철수 당시 ‘한국군 현대화 5개년계획’이란 협의가 있었다. 한국 측은 한국군의 현대화를 위해 25억~30억 달러가 필요하다고 요구했지만, 결국 15억 달러로 낙착됐다. 당시 경제 규모로도 우리는 ‘자위(自衛)’에 경주했다. 지금은 훨씬 큰 경제규모와 국력을 가지고도 제대로 된 안보정책을 수립하지 못하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를 달성하면 국민 총생산은 1조8000억 달러가 된다. 국방비로 5%를 쓴다면 900억 달러를 지출할 수 있게 된다. 한 해 1000억 달러 정도의 시장이 형성되면 최첨단 군 장비의 연구, 개발, 생산이 가능해진다.
 
  국가안보 확립과 국부창출을 통해 후손을 위한 미래지향적인 국토개발과 경제개발을 이뤄야 한다. 전 산업의 수출화와 전 국민의 과학화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선진 최첨단 기술공업국가를 건설하고 이를 위한 인력 양성을 지속해야 한다. 과학기술 발전은 우리에게 선택이 아니라 필수조건이다.
 
  50년 전 경제개발계획은 오늘날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가난하고 못 배운 여성근로자들의 희생으로 시작된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땀은 세계사(史)에 유례없는 초고속성장을 이뤄냈다. 경제사령관 박정희는 조국을 경제강국으로 만들었다. 경제개발계획 100주년이 되는 2061년,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일까. 현재 우리의 선택과 노력이 후손에게 잠시 빌린 조국의 흥망(興亡)을 결정한다.⊙

吳源哲
⊙ 1928년생.
⊙ 북한 해주동공립중ㆍ서울대 공대 화학공학과 졸업.
⊙ 공군소령 예편, 시발자동차회사 공장장, 상공부 화학과장ㆍ공업제1국장ㆍ기획관리실장ㆍ
    광공전 차관보, 대통령 경제 제2수석비서관, 기아경제연구소 상임고문 등 역임.
⊙ 現 한국형 경제정책연구소 상임고문.
⊙ 저서 : <한국형 경제건설>(7권) <박정희는 어떻게 경제강국 만들었나> <더 코리아 스토리> 등.


월간조선 2011년 신년호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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