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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준과 포스코 - 짧은 人生을 영원 조국에, 그리고 제철 報國에

경제·IT

by 김정우 기자 2011. 1. 24.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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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을 일군 기업인들] 朴泰俊과 포스코

⊙ 제철보국, 우향우 정신, 열연 비상… 朴泰俊의 신념은 곧 포항제철과 대한민국의 역사가 됐다
⊙ 박태준의 실패는 포항제철의 실패, 포항제철의 실패는 곧 대한민국의 실패
⊙ 80%까지 진척된 공사현장에 부실 드러나자 다음 날 다이너마이트로 현장 폭파
⊙ 25년 대역사 준공 후 朴正熙 묘 앞에 서서 “각하, 임무 완수했습니다”


글 : 李大公 포스코교육재단 이사장  
정리 : 金正友 月刊朝鮮 기자  

1970년 4월 1일 포항제철 착공식에 참석한 박태준 사장, 박정희 대통령, 김학렬 부총리(왼쪽부터).

“자네, 한 달만 여기에 올 수 있겠나.”
 
  2006년 여름, 미국 플로리다 주(州)에 머물던 박태준(朴泰俊) 명예회장이 포항에 있던 내게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그날로 이구택(李龜澤) 당시 포스코 회장에게 보고하고 바로 짐을 쌌다. 평생 모신 분이기에 지극히 당연한 행동이었다.
 
  나는 1973년부터 그를 직접 모셨다. 덕분에 누구보다 그의 철학과 생각을 빠르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미국에서 한 달을 보냈다. 차도 그가 뒷자리에, 내가 조수석에 앉으니 마치 20년 전으로 돌아간 듯했다. 그는 변한 게 없었다.
 
  “여기 소나무가 많네. 미국에 웬 소나무가 이렇게 많을까.”
 
  “저 건물은 15층인데 위쪽 색깔이 다르네. 증축을 했을까, 아니면 처음부터 저렇게 설계를 했을까.”
 
  “이 동네엔 도요타 차가 왜 이리 많을까.”
 
  질문은 끝이 없었다. 사소한 것도 그는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나는 멍청히 지켜볼 뿐이다. 내 눈에는 절대 보이지 않는 것들이 그의 눈엔 너무나 크게 보였다. 40년 전 포항의 건설현장에서도 그는 그랬다. 아무도 몰랐던 부실현장을 발견해 수차례 바로잡았다. 그 눈이 없었다면 포항제철이 제대로 건설되기나 했을까.
 
 
 
‘교육王 박태준’
 
  ‘철강왕(王) 박태준’이란 말 이전에 ‘교육왕 박태준’이라 부르고 싶다. 그는 포항과 광양에 15개 초·중ㆍ고등학교, 유치원, 그리고 포항공대(포스텍)를 세웠다. 지역 기업이 성공하려면 인재 유치가 핵심인데, 이들이 오기 위해선 우수한 교육 수준이 보장돼야 한다. 그는 교육 수준을 양적으로만 넓힌 것이 아니라, 수월성 교육을 통해 교육의 질까지 끌어올렸다. 그 결과가 현재의 포스텍과 포스코교육재단이다. 1989년 노벨상 수상자 10명 초청, 제철장학회 71명 해외유학생 선발 지원, ‘베서머(Bessemer)금메달 수상 기념 장학회’의 16명 해외 장학생 선발 지원, 청암재단의 기초과학 분야 매년 30명 선발 지원, 한국 최초 체조 및 축구 전용 경기장 건립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교육 지원이 이뤄졌다. 복지교육의 모델인 핀란드와 최근 수월성 교육의 성공사례로 급부상한 상하이(上海)의 성공사례를 그는 이미 40년 전에 내다봤다. 그가 심혈을 기울인 주택단지 조성과 학교 설립은 직원의 충성도와 업무 효율에 큰 영향을 끼쳤다.
 
  박태준 사장의 합리적인 리더십은 직원들의 사기를 높여줬다. 그의 확고한 제철보국(製鐵報國) 신념은 포항제철 임직원 모두를 하나로 뭉치게 했다.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었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꿨다.
 
  이건희(李健熙) 회장은 “21세기엔 한 명의 천재가 10만명을 먹여 살린다”고 했다. 이 말은 20세기에도 통한다. 박태준 한 명이 적어도 수백만 명을 먹여 살렸다. 당시 산업의 파급 효과를 뜻하는 전후방 연관 효과는 석유산업이 가장 높았고, 그다음이 제철이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제철이 가장 높았다. 자동차, 조선(造船), 가전, 건설… 철이 안 들어가는 곳이 없었다. 박태준의 실패는 포항제철의 실패였고, 포항제철의 실패는 곧 대한민국의 실패였다.
 
  ‘박태준의 신화’는 ‘우향우의 기적’으로 불린다. 대일(對日) 청구권 자금으로 지어진 포항제철은 ‘선조의 피의 대가’였다. 그는 이렇게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우리 조상의 혈세로 짓는 제철소입니다. 실패하면 조상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 목숨 걸고 일해야 합니다. 실패란 있을 수 없습니다. 실패하면 우리 모두 ‘우향우’ 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합니다. 기필코 제철소를 성공시켜 나라와 조상의 은혜에 보답합시다. 제철보국! 이제부터 이 말은 우리의 확고한 생활신조요, 인생철학이 돼야 합니다.”
 
1968년 11월 불시에 포항 현지를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롬멜하우스 2층에서 박태준 사장의 보고를 받고 있다. 창 밖을 보던 박 대통령은 “남의 집 다 헐어놓고 제철소가 되기는 되는 건가…”라며 혼자 말했다.

 
  ‘우향우 정신’은 구호가 아니라 진실
 
  만약 포항제철이 실패했다면 그는 정말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었을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지켜본 그는 항상 말이 앞서지 않았다. 실패했다고 사표 내고 끝낼 상황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목숨 걸고 사업을 이끌었다.
 
  일본의 군신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ㆍ1849~1912) 대장은 뤼순(旅順) 고지 전투에서 부하 13만명 중 6만명이 전사하는 고전 끝에 승리했다. 그의 아들 2명도 전사자 명단에 포함됐다. 그는 ‘황군 6만명을 잃은 죄’를 씻기 위해 메이지(明治)왕에게 할복을 허락해 줄 것을 간청했지만, 허가를 받지 못했다. 7년 동안 조용히 지냈던 그는 메이지 왕이 죽자 그날 바로 할복했다. 국경을 초월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몸으로 실천한 사람이다.
 
  러일전쟁의 또 하나의 영웅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ㆍ1848∼1934) 제독은 러시아 발트함대와 싸우기 전날 밤 이순신(李舜臣) 장군에게 승전을 비는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영국의 넬슨보다 이순신이 낫다”고 한 그는 러시아 함대를 상대로 압도적 승리를 거뒀다. 그는 이순신 장군의 생즉사(生卽死) 사즉생(死卽生) 정신을 배웠다.
 
  6ㆍ25전쟁 당시 나토사령관이었던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아들은 육군 소령으로 참전했다. 그 조건은 “만에 하나 포로로 붙잡히면 자결하라”는 것이었다. 박태준 명예회장은 이들의 정신을 이어받았다.
 
  그는 평생 생사(生死)의 갈림길에서 싸워야 했다. 6ㆍ25전쟁 당시 육군대위였던 그는 포항 형산강 전투에 참전해 이후 함경도 청진까지 북진(北進)했다. 청진에서 흥남으로 내려올 땐 추위를 이기기 위해 드럼통에 고무호스를 꽂고 녹물이 섞인 ‘카바이드 소주(화학주)’를 빨아 마셨다. 흥남에선 맹장염에 걸려 응급수술 후 해병대 상륙함(LST)에 실려 후송됐다. 그는 일생이 전쟁이었고, 매일이 전투였다. 그의 우향우 정신은 생사를 건 그의 인생철학에서 나온 산물이다. 말뿐인 구호가 아니라, 그를 설명하는 사실이요, 진실이다.
 
  ‘롬멜하우스’란 곳이 있다. 현재 ‘포스코 회사 자산 1호’로 기록된 건물이다. 1968년 영일만 현장에 지어진 초라한 슬레이트 지붕의 목조 건물로, 건설 초기의 애환과 사연이 담긴 곳이다. 직원들은 이 건설사령탑을 사막의 영웅 롬멜(Rommel) 장군의 야전군 지휘소라 하며 ‘롬멜하우스’란 이름을 붙였다.
 
 
  준공 직후 朴正熙 묘에서 “각하, 임무 완수했습니다”
 
25년 제철소 건설의 대역사를 마무리한 박태준 회장은 곧바로 박정희 대통령의 묘소를 찾아가 “각하, 임무를 완수했습니다”라고 마지막 보고를 했다.

  1968년 11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건설 현장을 불시 방문했다. 당시 현장은 황량한 모래벌판이었고, 건물은 롬멜하우스 하나였다. 박태준 사장은 박 대통령을 롬멜하우스 2층으로 모셨다. 두 사람의 눈에 들어온 광경은 초가집들을 헐어낸 폐허 그 자체였다. 박 대통령의 표정이 어두웠다. 자신 있게 시작했고 “하면 된다”고 했지만, 막상 현장에 와보니 걱정이 됐나 보다.
 
  “남의 집 다 헐어놓고 제철소가 되기는 되는 건가….”
 
  박 대통령의 한마디에 박태준 사장의 모골이 송연해졌다. 배짱 좋다던 분이 이날 위경련까지 일으켰다고 한다. 겉으론 강한 분이었지만 속은 항상 그렇게 타들어갔다. 그만큼 민족적 사명에 대한 부담이 컸던 것이다.
 
  박 대통령은 총 13차례 포항 현지를 방문했다. 직접 눈으로 현장을 보고, 직원들을 격려했다. 그의 의지가 이렇게 강하지 않았다면, 포항제철 역사는 오랜 기간 연기됐을 것이다.
 
  1970년 2월 공사가 한창이던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친필서명이 적힌 메모지를 주며 박태준 사장에게 설비구매에 대한 전권을 일임했다. 일명 ‘종이마패’다. 서슬이 퍼렇던 시절, 그 종이 한 장은 큰 힘이 있었다. 하지만 박태준 사장은 단 한 번도 그것을 사용하지 않다가 박 대통령 서거 후 공개했다.
 
  포스코에 단 6개월 관여한 사람들도 “내가 포항제철을 만들었다”고 자랑한다. 그러나 25년 4반세기 대역사 종합준공을 끝낸 그는 국립묘지의 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각하. 불초 박태준, 각하의 명을 받은 지 25년 만에 포항제철 건설의 대역사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삼가 각하의 영전에 보고를 드립니다.”
 
 
  박태준의 리더십
 
1971년, 계획보다 3개월 지연된 공기를 만회하기 위해 ‘하루 700㎥ 콘크리트 타설’이란 특명, ‘열연비상’이 내려졌다.

  미국 하버드대와 스탠퍼드대 등 세계적 기관에서 포항제철의 성공사례를 연구했다. 박태준 명예회장의 장남 박성빈(朴成彬)씨는 미국 스탠퍼드대 유학 당시 건축품질관리 사례로 아버지의 부실공사 현장 폭파 이야기가 나오는 수업을 들었다. 영국 학교의 교과서에도 포스코 사례가 실렸다고 한다. 이들이 꼽은 첫째 성공 요인은 모두 같다. 바로 박태준 회장의 리더십이다.
 
  ‘평상시’ 회사엔 다른 어느 곳보다 용역이 많았다. 그만큼 그는 전문가의 의견을 경청하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긴급상황’이 발생하면 분위기가 바뀐다. 톱다운(top-down) 방식으로 전환돼 업무 추진의 속도가 빨라졌다.
 
  자기희생적 솔선수범을 통해 조직문화를 정립했고, 부하직원을 철저하게 훈련해 내부 승진의 전통을 절대 고수했다. 이는 구성원의 조직 충성도를 더 높였다. 전투를 지휘하며 몸에 밴 리더십은 ‘동시다발’ ‘전천후’ ‘전방위’ 업무로 전환됐다. “지휘자의 최고 책임은 부하 육성 교육”이라며 상세한 설명을 통해 교육했다. 소통 경영을 위해 임원회의록을 전 임직원에게 공개 배포한 것도 획기적인 전통으로 남았다.
 
  그의 리더십은 여러 방향으로 확대됐다. 저가(低價) 설비 구매, 공기 단축을 통한 건설원가 절감, 원료 염가 확보, 주택단지, 직원 자녀 교육을 비롯한 폭넓은 복지정책 등이 오늘날 포스코를 만들어낸 핵심요소들이다. 모두가 안된다고 할 때, 박태준은 확고한 비전을 품었다. 눈으로는 황량한 모래벌판을 보면서 머릿속엔 세계 최고 수준의 제철소를 이미 그리고 있었다.
 
  1978년, 중국 덩샤오핑(鄧小平)이 일본 기미쓰(君津) 제철소를 방문했다. 그는 이나야마 요시히로(稻山嘉寬) 당시 신일본제철 회장에게 “중국에도 포항제철과 같은 제철소를 지어 달라”고 했는데, 이나야마의 답변은 간단했다.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지 않소?”
 
  1969년 당시 IBRD 실무자였던 자페(Jaffe)는 한국의 일관제철소 건설에 타당성이 없다는 보고서를 냈다. 그리고 18년 후인 1988년 방한(訪韓)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포철에 대한 당시 나의 보고는 정확했다고 아직 확신한다. 다만 박태준 같은 리더가 한국에 있다는 것을 몰랐을 뿐이다.”
 
  빅토르 사도브니치 모스크바 대학 총장은 광양제철소 방문 당시 “마르크스와 레닌이 꿈꾸던 노동자의 천국을 광양에서 봤다”고 했다. 신화가 된 그의 역사는 철강인 최고의 명예인 ‘베서머(Bessemer)’ 금메달과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Legion d’honneur)’ 훈장 등 수상으로 증명됐다.
 
 
  ‘담배꽁초 강철파일’
 
  “왜 나한테만 보이나. 너희 눈엔 안 보이나.”
 
  1971년 봄, 제강공장 건설 현장을 둘러보던 박태준 당시 포항제철 사장의 눈에 강철 파일(pileㆍ땅속에 박아넣는 말뚝) 몇 개가 들어왔다. 마침 레미콘 이 콘크리트를 쏟아부었는데, 파일이 옆으로 슬쩍 기울었다. 이를 눈여겨본 사람은 없었다. 공사 책임자, 건설회사 책임자, 현장간부들 모두 그냥 넘어갔다. 하지만 그의 눈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박태준 사장은 공사를 중단시키고 불도저를 불렀다.
 
  “밀어 봐.”
 
  불도저가 파일을 밀었다. 모래 위에 박힌 담배꽁초처럼 힘없이 쓰러졌다. 엄청난 부실공사 현장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용광로에 쇳물을 정제하는 제강공장은 아무 땅에나 짓지 않는다. 땅속 깊은 암반에 강철 파일을 박고, 콘크리트를 친 후, 그 위에 다시 앵커볼트(기초볼트)를 연결한다. 그리고 그 위에 제강공장을 ‘얹는다.’ 한마디로 지구 암반에 고정시켜 짓는 셈이다.
 
  포항의 평균 지반 깊이는 38m다. 38m 정도 길이의 파일을 박아야 제대로 고정이 된다. 지반 높이가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파일을 박아넣으면 남는 부분이 생긴다. 당시 일부 현장에선 2~3m 길이의 남은 토막 파일들을 대충 모아 꽂아놨다. 대형 부실공사였다. 박태준 사장은 건설회사 소장과 일본 설비회사 현장감독을 불러 크게 호통을 쳤다. 일본인 현장감독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그 현장은 곧바로 전면 재시공에 들어갔다.
 
  그날 ‘담배꽁초 파일’이 박태준 사장의 눈에 안 들어왔다면 어떻게 됐을까. 100년을 가야 할 공장이 10년도 안돼 무너졌을 것이다. 그게 무너졌다면 포항제철이 망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망하는 것이다. 2006년 여름, 명예회장과 함께한 한 달 동안의 미국 합숙 기간에 그 시절이 다시 떠올랐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오직 아이젠하워의 눈에만 보였다. 인천상륙작전은 오직 맥아더의 눈에만 보였다. ‘영일만 상륙작전’은 오직 박태준의 눈에만 보였다. 모두가 실패할 거라 했지만, 이들은 확고한 신념과 계획을 갖고 있었고, 죽음을 각오했다.
 
 
  볼트 24만 개 재조사, 부실현장은 폭파
 
박태준에게 부실공사는 곧 이적행위였다. 1977년 발전 송풍설비 공사현장에서 부실이 발견되자, 그는 80% 진척된 공사현장을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했다.

  그에게 부실공사는 곧 이적행위였다. 그는 끊임없이 현장을 찾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제강공장을 시찰하던 중 철골구조물 연결 볼트가 허술하게 조여진 것을 발견했다. 모든 간부를 집합시켜 즉시 모든 볼트를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대형볼트 24만 개를 일일이 조사한 결과 400여 개가 잘못 조여진 것으로 밝혀졌다.
 
  1977년 발전 송풍설비 공사현장, 그의 눈에 부실 현장이 들어왔다. 80% 정도 진척된 공사현장을 다음 날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했다. 당시 포항제철의 관련 임직원, 건설 책임자, 외국인 기술 감독자 등이 한자리에 모여 이 광경을 지켜봤다. 따로 설명하거나 강조할 필요도 없었다. 그의 완벽주의에 대한 확실한 인상을 직원들에게 보여줄 수 있었다.
 
  1978년 6월, 아침 8시 회의에 참석하러 가던 그가 갑자기 방향을 바꿔 건설현장을 찾았다. 현장소장은 없었고, 반장이 대략적인 인원을 보고했다. 조말수(趙末守) 당시 비서과장(후에 포항제철 사장)이 동행해 보고사항을 기록했다.
 
  8시 회의, 현장소장이 헐레벌떡 도착했다. 전날 늦게까지 과음하고 곧바로 회의에 나온 것이다. 그는 박태준 사장이 아침 일찍 현장에 다녀온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박 사장의 질문이 시작됐다.
 
  “오늘 현장 인원이 몇 명인가?”
 
  “875명입니다.”
 
  “다 나왔나?”
 
  “다 나왔습니다.”
 
  박태준 사장은 “현장에 직접 가봤느냐”, “보고 내용에 책임질 수 있느냐”며 물었고, 현장소장은 “현장에 가서 직접 확인했고, 책임질 수 있다”고 답했다. 박 사장은 조말수 비서과장을 불렀다.
 
  “조 과장, 아까 내가 가서 본 숫자와 비교해서 발표해 봐.”
 
  현장소장의 얼굴이 순간 하얘졌다. 거짓말이 들통났고, 그날 이후 모든 건설현장의 인원을 5일 동안 전면 재조사했다. 그런데 조사 결과가 분명하게 나오지 않았다. 사람 수가 계속 틀렸다. 직원들은 이상하다 생각했고, 박태준 사장은 새로운 지시를 내렸다. 전체 공장을 포위한 후 한 명도 빼놓지 말고 사람 수를 조사하라고 했다.
 
  그러자 정확한 결과가 나왔다. 이쪽에서 조사를 하면 다른 현장에 있던 인부들이 여기저기서 몰려왔다. 서로 돌려가면서 ‘인원 메우기’를 했다. 하지만 결국 박태준 사장의 ‘군사작전’에 모두 들통났다. 박 사장은 그들을 ‘유령’이라 불렀고, 시공회사 책임자로부터 20%의 작업인원 조작이 있었다는 실토를 받아냈다. 자재와 인력이 충분했음에도 예정 공기(工期)를 따라가지 못했던 이유가 밝혀졌다.
 
  그는 사소한 것도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었다. 이런 부분은 정주영(鄭周永), 이병철(李秉喆) 회장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답답한 사람 눈에는 모두 보인다. 회사에서 가장 답답한 사람은 CEO고, 나라에서 가장 답답한 사람은 대통령이다. 본인은 몰라도, 부모 눈에는 자식의 얼굴 상처가 보인다. 이런 눈을 가진 리더만이 조직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다.
 
 
  첫 쇳물이 나오던 날
 
1973년 첫 쇳물이 나오던 순간 포항제철 모든 임직원이 만세삼창을 외치고 있다. 다른 이들과 달리 박태준 사장은 이 순간에도 굳은 표정을 지은 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열연비상’은 그의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다. 1971년 8월, 그는 계획보다 3개월이나 지연된 공기를 만회하기 위해 보고서 위에 ‘9월-700입방미터’라고 썼다. “9월 중엔 무조건 하루 700m³의 콘크리트 타설을 실시하라”는 특명이 내려졌다. 이것이 포항제철의 제1호 건설비상, ‘열연비상’이다. 당시 하루 300m³ 정도 타설했던 건설현장은 24시간 비상체제에 들어섰다. 최대 장비와 인원이 동원돼 밤낮없이 일했다. 결국 두 달 만에 5개월 분량의 타설을 완료했고, 10월 31일, 박태준 사장은 ‘열연비상’을 풀었다.
 
  1973년 6월 9일 오전 7시30분, 첫 아들이 나왔다. 오랜 산고 끝에 첫 쇳물이 터져 나왔다. 한국 최초의 대형 고로인 영일만 제1 고로의 첫 출선(出銑)을 바라보던 포철 임직원들은 모두 머리 위로 두 팔을 올리며 만세를 외쳤다. 그 순간 언론의 모든 카메라는 일제히 쇳물을 향했다. 포철의 사진기사가 방향을 돌려 마지막 만세를 외치는 임직원들을 찍었다. 공보과 이재영 기사가 유일하게 포착한 이 사진이 지금까지 수많은 지면에 등장한 출선 사진이다. 1초만 늦게 몸을 돌렸다면 영원히 놓칠 뻔한 사진이다.
 
  사진을 보면 모든 사람이 크게 웃으며 만세를 외쳤다. 그런데 단 한 명만이 입을 다문 채 굳은 표정을 짓고 있다. 가장 큰 주인공인 박태준 사장은 그날 크게 웃지 않았다. 사진 속 그의 시선은 평소와 똑같았다. 한곳을 응시한 채 흔들림이 없었다. 모두가 감격할 때도 그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조국근대화를 위한 종합제철소 건설은 애초 ‘불가능한’ 민족적 과제였다. 박태준 명예회장과 모든 임직원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5차례 제철소 건설 시도가 있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5개국 8개 회사로 구성된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은 와해됐고, IBRD도 포항제철 사업의 타당성을 부인했다.
 
  첫 단추부터 풀기 어려웠던 자금조달 문제를 박태준 당시 사장은 ‘대일청구권 자금 전용 계획’이란 ‘하와이 구상’을 통해 성사시켰다. 그는 하와이에서 바로 귀국하지 않고 일본으로 갔다. 야하타 제철의 이나야마 사장과 후지 제철의 나가노 사장 등 철강선진국인 일본 철강산업의 대표들을 직접 만나 기술협조 약속을 얻어냈다.
 
  KISA의 조강 연산 50만t 계획은 하와이 구상 후 1단계 조강 연산 103만t 규모로 확대됐다. 당시 대일청구권 자금 사용 잔액을 제철소 건설에 투입했는데, 만약 건설에 실패했다면 대한민국 경제가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포항제철은 당시 대일청구권 자금 중 7370만 달러와 일본수출입은행 상업차관 등 총 1억2370만 달러로 지어졌다. 그리고 2000년 10월 초 민영화되면서 배당금과 주식매각 및 양도 등으로 모두 3조6155억원을 정부에 갚았다.
 
 
  한 달 독서량 30권
 
박태준의 집념은 공기 단축을 통한 건설원가 절감으로 이어졌다. 사진은 1978년 포항 3고로 본체 공사 장면.

  박태준 명예회장은 한 달에 책 30권을 읽는 ‘독서광’이다. 그가 사장이던 시절 비서실과 도쿄(東京)사무소 직원들은 읽을 책을 찾아서 그에게 보내는 것이 큰 업무 중 하나였다. 관심을 가지고 읽는 책은 속독(速讀)했고, 아주 중요한 책일 경우엔 천천히 정독(精讀)을 했다. 그리고 자신이 본 책을 다른 사람에게 추천할 땐 책에 친필로 메모해서 보내줬다.
 
  1992년, 그는 “앞으로 중국이 원료의 블랙홀이 될 것”이라며 원료 조기 확보를 강조했다. 최근 중국과 일본의 분쟁 가운데 발생한 희토류 수출 통제 일화를 보면서, 18년 전 이를 정확히 예고한 그의 독서력을 다시 한 번 떠올리게 됐다.
 
  박태준 명예회장은 외강내유(外剛內柔)의 리더십이다. 제철소 건설을 성공적으로 끝낸 날, 지난 시절 밤낮없이 돌관(突貫) 공사를 하던 중 처벌된 모든 임직원을 징계해제 조치했다. 지금 말로 표현하면 일반사면을 단행한 셈이다.
 
  그는 레이디 퍼스트(lady first)를 철저하게 지키는 신사다. 엘리베이터를 탈 때도 항상 부인인 장옥자(張玉子) 여사가 먼저 타게 한다. 딸들은 부모를 ‘닭살 부부’라 할 정도였다. 학교에 방문할 때, 여교사가 아무리 젊어도 말을 놓는 법이 없다.
 
  그는 평생 세 번 눈물을 흘렸다고 알려졌다. 1973년 6월 9일 첫 출선에 성공했을 때 첫 눈물을 흘렸다. 두 번째 눈물은 초등학교 때 아버지를 포항에 보낸 장녀 진아씨가 결혼할 때가 돼 아버지에게 쓴 편지를 읽었을 때 나왔다. 세 번째 눈물은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 서거 때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박태준 명예회장의 관계는 유성룡과 이순신처럼 특별한 관계였다. 1969년 3선개헌 당시 예비역 장성 500명이 지지성명을 발표했다. 박태준 당시 사장은 “정치엔 끼지 않겠다”며 거절했다. 이를 보고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의외로 담담했다.
 
  “그 친구 원래 그런 사람이야. 제철소 일이나 열심히 하게 건드리지 마.”
 
  5ㆍ16군사혁명 당시에도 박정희 소장은 박태준 대령을 배려해 혁명에 직접 가담시키지 않았다. 다만 혁명이 실패할 경우 그의 가족을 책임져 달라는 부탁을 했고, 박태준 대령은 이를 받아들였다.
 
 
  ‘므리바’
 
1999년 1월, 포항중앙교회를 찾은 박태준 회장이 세례를 받기 위해 꿇어앉은 모습.

  그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낸 몇 안되는 애국자다. 수많은 이가 번지르르한 말을 하며 자신의 공을 내세우지만, 그는 초연하게 일했고, 그 결과가 현재의 포스코다. 그의 업적은 포항제철소, 광양제철소, 포항공대를 보면 된다.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인물이다. 이 글은 사족(蛇足)에 불과하다. 다만 곁에서 지켜본 사람으로서 감히 주제넘게 글을 썼다.
 
  보잘것없는 내 이야기를 정리하는 <월간조선> 기자에게 나는 ‘므리바’ 이야기를 계속 강조하고 있다. 구약성경 <민수기>에 나오는 물가 이름이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는 지팡이로 바위를 쳐 백성이 필요한 물을 솟아오르게 했다. 하지만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자신의 능력인 것처럼 행동했다가 결국 꿈에 그리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오늘날 포스코의 영광은 박태준과 박정희,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의 몫이다.
 
  박태준 명예회장의 종교는 기독교다. 2006년 포항 지역 목사님들의 요청에 의해 박태준 명예회장이 어떻게 기독교인이 됐는지 간증한 적이 있다. 그날 제목은 ‘포스코의 기적을 주관하신 하나님’이었다.
 
  박태준 명예회장은 미국에 거하던 시절 교회에 처음 출석했고, 1999년 1월 포항중앙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날 ‘천하의 박태준’이 꿇어앉은 모습을 보며 난 생각했다. 하나님께서 이 한민족을 살리기 위해 박태준을 보내신 거라고.⊙

李大公
⊙ 1941년생.
⊙ 경기고ㆍ서울대 법대 졸업. 서울대 행정대학원 수료.
⊙ 1969년 포항종합제철 입사 후 홍보실장, 비서실장, 총무이사, 부사장, 포항공대 건설본부장 등 역임.
⊙ 現 포스코교육재단 이사장.

월간조선 2011년 신년호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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