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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옛날 이름이 김현희였어?” - 김현희씨의 12년 만의 서울 나들이

정치·북한

by 김정우 기자 2011. 8. 16.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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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희씨의 12년 만의 서울 나들이
“엄마 옛날 이름이 김현희였어?”

두 아이의 학부모가 된 김현희씨가 말하는 ‘나의 남편, 나의 아이들, 나의 생활’

⊙ “성형수술한 적 없고 남편이 없었다면 이 고통 견디기 어려웠을 것”
⊙ 알아보는 사람은 별로 없고 억양 때문에 연변에서 온 사람인 줄 알아
⊙ 아이들이 사춘기가 되면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해줄 것
⊙ 학부모 입장으로 학교를 찾아갈 수 없는 처지라 아이들에게 늘 미안
⊙ 20대에 결혼했다면 외모를 보고 남편감을 골랐겠지만…


김성동 월간조선 기자 (ksdhan@chosun.com)
김정우 월간조선 기자 (hgu@chosun.com)

김현희

지난 4월 월간조선사를 찾은 김현희씨


지난 4월 23일 오후 月刊朝鮮 사무실로 손님이 찾아왔다. 金賢姬(김현희)씨. 그녀는 1997년 결혼과 함께 世人(세인)의 관심에서 사라졌다가, 월간조선 2월호와의 인터뷰, 지난 3월 부산에서 일본인 납북 피해자 다구치 야에코(田口八重子) 씨의 아들 이즈카 고이치로(飯塚耕一郞) 씨와의 공개 만남 등으로 다시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라며 한 남자의 아내로, 두 아이의 엄마로 평범한 삶을 살고자 했지만,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낼 수밖에 없었던 김현희씨의 얼굴은 사진으로 봤던 과거의 모습과 비교해 많이 야위어 있었다.
 
  알려진 대로 그녀는 둘째 아이가 돌을 막 지난 무렵이었던 2003년 11월, MBC 취재진에 자신의 집이 노출된 다음날 새벽 그곳을 떠나 지금까지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좌파정권하에서 그녀는 “‘KAL858기 폭파 사건’은 조작됐고, 김정일의 공작지시는 없었다”는 대답을 직간접적으로 강요받았다. 그녀는 그 배후 중의 하나가 좌파정권하의 국정원이었다고 주장하며 국정원의 공식사과와 책임자 문책을 요구하고 있다. 국정원이 자신을 가짜로 모는 프로그램을 제작 중인 MBC 출연을 요구했고, 국정원 간부로부터는 제3국으로 이민을 떠나라는 권유를 받기도 했다는 것이다.
 
  좌파정권하의 ‘싸늘했던 시대’가 ‘평범한 여자’로 살아가고 싶었던 그녀의 바람을 철저하게 짓밟은 것이다. ‘살벌한 시대’는 그녀를 투사로 만들었고, 살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더 강해져야 했다고 한다. 그 결과가 그녀에게 안겨준 것은 ‘야윈 얼굴’이었다.
 
 
 
좌파정권에 맞선 당찬 여인
 
KAL 858기 폭파 사건과 관련 재판을 받던 시절의 김현희씨 모습.
  국정원 직원이었던 남편 정모씨는 필자에게 이런 말을 자주했다.
 
  “김(정씨는 다른 사람 앞에서는 부인 김현희씨를 ‘김’이라고 호칭했다)이 강한 정신력 없는 일반인이었으면 이런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을 겁니다.”
 
  그런 고통의 시절이 마무리되어 간다고 느낀 것일까. 그녀는 지난해 연말 필자에게 크리스마드 카드를 보내 왔다.
 
  ‘올해는 그 어느 해보다 힘들고 보람 있는 한 해였습니다. 어려운 저에게 늘 격려와 힘이 되어 주신 은혜에 깊이 감사 드립니다….’
 
  승용차에서 내린 김현희씨는 “사무실에 기자들이 많은가”부터 물었다. 많은 사람의 시선을 동시에 받는다는 게 부담스러운 눈치였다. 그녀는 지난 3월 부산에서 있었던 일본인 납북자 가족들과의 만남 후 열흘 가까이 몸살을 앓았다고 한다.
 
  필자의 “月刊朝鮮에는 모두 다 김현희씨 편만 있으니까 안심하고 들어가시죠”라는 답변에, 김씨는 “칼을 댄다는 무시무시한 글을 쓴 분을 직접 보니 호리호리하시네요”라며 웃었다.
 
  김현희씨의 ‘칼을 댄다’는 표현은 月刊朝鮮 2004년 1월호 ‘추적/MBC·SBS 등 방송들은 왜 갑자기 ‘김정일도 인정한 KAL 858機(기) 폭파사건의 조작의혹’을 다루는가’ 題下(제하) 기사에 실린 필자의 글 때문에 나온 말이었다. 당시는 방송사와 좌파매체, 親北(친북)인사들이 한몸이 되어 ‘KAL 858기 폭파사건 조작설’을 제기할 무렵이었다.
 
김현희씨가 김성동 기자에게 보낸 크리스마스 카드.
  필자는 기사 말미에 “역사는 친북세력들과 거기에 부화뇌동하는 언론인들의 가슴에 칼을 대게 될 것이다”라고 썼다. 그녀는 지금도 그 글이 가슴에 와 닿는다고 한다. 그녀가 어떤 생각을 품고 지금까지 좌파정권과 싸워 왔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주는 대목이다.
 
  이날 김현희씨 부부와 月刊朝鮮은 저녁식사 시간을 포함해 5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月刊朝鮮에서는 金玄浩(김현호) 대표, 金容三(김용삼) 편집장, 필자, 白承俱(백승구) 기자, 金正友(김정우) 기자가 참석했다. 이날 김현희씨는 자녀교육 문제 등 생활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를 했다. ‘생활인 김현희’의 여러 모습을 그녀는 솔직담백하게 이야기했다.
 
  필자는 김현희씨 부부와의 만남 후, ‘자연인으로서의 김현희’의 삶을 갈망했던 ‘생활인 김현희’의 모습을 독자들에게 전달해 주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이제는 정말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라고 갈망했던 그녀에게 ‘평범한 삶’을 우리 사회가 돌려주어야 할 때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그녀를 ‘미모의 테러리스트’가 아닌 ‘좌파정권에 맞서 싸운 당찬 여인’으로 기억해 주어야 할 것이다. 4월 23일 月刊朝鮮과 김현희씨가 나눈 대화들을 문답형식 위주로 재구성한다.
 
 
  “빨래하는 게 큰 일”
 
  그녀의 억양에는 북한 사투리와 현재 생활하고 있는 지역의 사투리가 뒤섞여 있었다. 그녀는 1997년 결혼과 함께 시댁이 있는 지역으로 내려간 후 6, 7년 전 친척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에 잠깐 들른 것을 제외하고는 이번의 서울 방문이 결혼 후 처음이라고 했다. 김현희씨 가족은 2003년 11월 집을 나온 후 전화도 없고 컴퓨터도 없는 단칸방에서 네 식구가 살고 있다고 한다. 큰아이는 초등학교 3학년이고 둘째 아이는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했다고 한다.
 
  ―여가 때는 주로 뭐하십니까.
 
  “빨래하는 게 제일 큰일이고(웃음), 애들 뒷바라지하는 것도 제게는 중요한 일이죠.”
 
  ―세탁기가 없습니까.
 
  “있긴 있는데 물이 잘 안 나와요. 보통 1시간이면 빨래가 끝나잖아요. 그런데 4시간이 더 걸립니다. 물이 잘 안 나오니까. 통에 물을 받아서 넣고 하다 보면 4시간이 더 걸립니다. 북한에서 했던 생활을 그대로 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국가로부터 정신적, 물질적 보상을 받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물질적 보상을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까지 우리 가족이 이렇게 집을 나와 있는 게, 아무 이유 없이 나와 있는 겁니까. 지금에 와서 자꾸 ‘그 집 팔고, 다른 집 가면 되지 않으냐’고 그래요. 우리가 살던 집이 5년반째 그대로 있거든요. 사실 그 집이 증거 아닙니까. 지금 안 그래도 국정원이 저한테 폭파사건에 대한 조작진술을 강요했다고 볼 수 있는 근거가 없다고 하는데, 그것까지 팔 수는 없죠. 사실 지금 사는 데가 참 어렵거든요. 보일러도 옛날식인데다가, 물도 잘 안 나와요. 북한생활을 다시 하는 것 같아요. 처음에 가니까, 부엌도 콧구멍만 하고 버너로 밥과 국을 끓였어요. 국을 끓이다 보면 금방 불이 죽고, 불이 죽으면 또 흔들어서 쓰고, 밥을 못할 정도였어요.”
 
 
  쥐들이 득실대는 비좁고 낡은 집에서 감금 생활
 
다구치 야에코 씨의 오빠인 이즈카 시게오 씨(왼쪽)와 다구치 씨의 아들 이즈카 고이치로 씨가 2009년 3월 11일 부산 벡스코에서 김현희씨와 만나고 있다.
  ―집이 비좁고 낡았나 보죠?
  
  “부엌이고 화장실이고 하도 좁아서 혼자 외에는 못 들어갑니다. 생쥐하고 바퀴벌레가 약을 놔도 3개월 지나면 또 생겨요. 쥐가 집에도 막 들어와요. 그게 참 영리하데요. 사람 있으면 못 나가고 있다가, 문 열면 확 나가는 쥐가 많거든요. 바퀴벌레도 요즘 바퀴는 (집게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이만해요. 서양 바퀴인지. 지난 3월에 부산 가기 전날에도 새벽에 자다가 일어나서 이불 위로 지나가는 큼지막한 바퀴벌레를 잡다가 잠을 설쳤어요. 그런데 그런 곳에서 사는 저를 그날은 국가원수 경호하듯이 그러니까 그것도 참 어색하...



월간조선 2009년 6월호 - 기사 全文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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