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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밀분석] 법원 內 판사모임 우리법연구회 명단 공개

사회

by 김정우 기자 2011. 12. 1.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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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밀분석] 법원 內 판사모임 ‘우리법연구회’ 현직 회원 판사 129명·前 회원 53명 명단 공개
1988년 출범 후 대법관(朴時煥), 법무부장관(康錦實) 등 배출

현직 판사 회원은 총 129명. 전체 법관 중 약 3% 규모. 민주화 운동세력이 ‘우리법 연구회’의 모체… 사법파동의 核으로 나서

⊙ “우리법 연구회는 헌법 공부하는 학술 연구단체. 판사의 본분 넘어서지 않는다면 다양성 보장해야. 判事가 검사동일체처럼 판단하는 것은 우리 헌법에 맞지 않아”(문형배 우리법 연구회 회장)
⊙ “우리법 연구회는 판사집단 내에 왼쪽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회 전체로 볼 때 중간에서 오른쪽에 있는 중도우파”(우리법 연구회 관계자)
⊙ “대법원은 법원의 私조직화를 우려하는 국민의 우려 불식시켜야” (대한변협 성명서)

백승구 월간조선 기자 (eaglebsk@chosun.com)
김정우 월간조선 기자 (hgu@chosun.com)

대법원

서울 서초동에 위치한 대법원.

 ‘우리법 연구회’는 사법부 독립, 대법관 임명 등 법조계의 주요 현안이 발생할 때마다 소용돌이의 중심에 섰던 법원 內(내) 일부 판사들의 모임이다. 최근 申暎澈(신영철) 대법관 사태 때도 ‘우리법 연구회’가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1988년 출범한 우리법 연구회는 朴時煥(박시환) 현 대법관을 비롯해 康錦實(강금실) 전 법무장관, 金宗勳(김종훈) 전 대법원장 비서실장, 朴範界(박범계) 전 청와대 법무비서관 등을 배출했다. 회원 중 일부가 盧武鉉(노무현) 정권 때 주요 보직에 임용되면서 이 모임은 법조계 내외로부터 ‘정치적’이라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세상의 관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법 연구회는 그동안 정확한 규모가 알려지지 않았다. 月刊朝鮮이 입수한 명단에 따르면, 우리법 연구회의 현직 판사 회원은 총 129명이다. 전체 법관 중 약 3% 규모라고 한다. 연수원 17기부터 37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수와 연령대의 판사들이 가입돼 있다.
 
  부장판사급 20여 명을 비롯해 대법원, 고등·지방법원, 특허법원, 사법연수원, 법원행정처 등 근무기관도 다양하다. 우리법 연구회 측에 문의한 결과, 月刊朝鮮이 입수한 명단은 2009년 8월 현재 시점을 기준으로 작성된 것이 아니다. 작년과 올해 초를 기준으로 작성된 것으로, 일부 회원이 탈퇴했을 수 있다.
 
박시환 現 대법관
  우리법 연구회는 2005년 李容勳(이용훈) 대법원장 취임을 계기로 변화를 겪는다. 가장 큰 특징은 회원 가입 자격. 이전에는 변호사로 개업한 전직 법관들도 회원으로 활동했지만, 이용훈 대법원장이 국회 청문회에서 우리법 연구회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밝히면서 부장급 고참 판사와 변호사들이 연구회에서 탈퇴했다.
 
  당시 이용훈 대법원장은 “법원에 이런 단체가 있어서는 안된다. 젊은 판사들은 모르겠지만 부장판사 등 연장자들은 탈퇴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강금실 전 장관, 김종훈 전 대법원장 비서실장, 李光範(이광범) 서울고법 부장판사, 故(고) 韓騎澤(한기택) 판사 등 주요 창립 멤버들이 그해 연말 탈퇴했다.
 
  2003년 대법관 제청 파문 당시 사법개혁을 주장하며 사표를 냈던 박시환 당시 서울지법 부장판사도 2005년 11월 대법관이 되기 직전 연구회를 그만뒀다.
 
 
  한 달에 한 번씩 세미나 열어
 
강금실 前 법무장관
  우리법 연구회는 한 달에 한 번씩 세미나를 통해 서로의 견해를 주고받는다. 월례회에서 발표된 논문은 대략 5년 주기로 별도의 논문집으로 묶어 발간한다.
 
  연구회는 창립 때부터 지금까지 20년 동안 다섯 권의 자료집을 냈다. 논문집에 따르면, 우리법 연구회는 민주주의와 통일을 지향하며 노동·여성·인권·북한 등 사회 주요 현안에 대해 다뤄 왔다.
 
  가장 최근에 나온 논문집은 2005년에 출간한 ‘우리법 연구회 논문집’이다. 1998년부터 2005년까지의 논문들이 수록돼 있다.
 
  이 기간 동안 연구회가 다룬 주제는 다양하다. 그중에서 사법개혁·대법원의 기능과 구성·대법원장의 권한·법관인사제도 등 司法學(사법학) 분야가 가장 많다. 양심적 병역거부·사면권 통제·행정수도 위헌결정 등 憲法(헌법) 분야와 외국인 노동자·근로자 파견제·정리해고·공무원 노동조합·복수노조·산업재해 등 勞動法(노동법) 분야도 관심대상이었다.
 
故 한기택 판사
  양형문제·구속제도·형사공판절차의 개선·증거능력·성폭력범죄·피해자 보호 등 형사사법제도의 개선에도 중점을 뒀다.
 
  우리법 연구회가 사법제도 변혁에 큰 관심을 두고 있는 이유는 모임의 탄생 배경과 관련 있다. 우리법 연구회의 출발은 1988년 이른바 ‘제2차 사법파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2차 사법파동이란 1988년 당시 사회 전체에 불어닥쳤던 민주화 열기 속에 서울·수원·부산·인천지역 소장판사 430여 명이 대법원장 선임과 관련해 ‘법원 독립과 사법부의 민주화’를 요구하며 서명에 참가한 사건을 말한다. 이로 인해 盧泰愚(노태우) 정권이 유임시키려 했던 金容喆(김용철) 당시 대법원장이 퇴진하고 李一珪(이일규) 대법원장이 취임한다.
 
 
  “소위 운동권이 사법부에 편입돼 1988년 6월 서명운동 기획·주도”
 
김종훈 前 대법원장 비서실장
  우리법 연구회 창립멤버인 김종훈 전 대법원장 비서실장은 2002년 4월 우리법 연구회 홈페이지에 2차 파동 당시 상황을 회상하는 글을 올렸다. 글의 한 대목이다.
 
  “1988년 6월 10일 통근버스를 이용해 퇴근했다. 집에 일찍 도착하여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밤 9시경 서교호텔 뒤 맥주집으로 불려 나갔다. 나를 불러낸 사람은 사법연수원 13기 동기생으로 서울민사지방법원에 근무하고 있던 유남석, 이광범, 한기택 판사와 심규철 시보였다.
 
  유남석 판사는 나와 대학동기생, 이광범, 한기택 판사는 1년 후배로 대학시절 서울법대 학보(Fides) 편집위원이었고, 심규철 시보는 이념서클인 농촌법학회 회원이었는데, 대학시절 학보편집실을 중심으로 친하게 어울리던 사이다. 서울법대가 ‘유신법대’로 놀림받던 시절에 학회활동을 하였기에 그 자체만으로도 동지애를 느낄 수 있었다.
 
  (중략) 당시 사법부의 최대 관심사는 대법원장 임명을 비롯한 대법원 구성이었고, 대법원장에는 김용철 대법원장의 유임이, 대법관은 민주정의당·평화민주당·통일민주당의 나누기가 확정적이었다. (중략) 우리는 여러 말할 것 없이 성명을 내자는 데 합의했다. 대상에 대해서는 일단 서울지방법원 관내로 하기로 했고, 인천지방법원은 내가 주도하여 서울지방법원 판사들의 성명에 동의하는 형식을 취하기로 하였다. (중략)
 
1988년 6월 소장판사 430여 명이 집단 성명에 참가한 2차 사법 파동으로 사퇴한 김용철 당시 대법원장이 잔무를 처리한 후 대법원 청사를 나서고 있다.
  결과적으로 전국 법관의 반수 가까이인 430여 명이 서명에 참가했지만, 우리는 30명만 서명해도 성공이라고 생각했었다.”
 
  2차 사법파동의 발단이 된 이날 모임은 며칠 후 실행에 옮겨졌고 마침내 우리법 연구회의 모체가 만들어졌다. 김종훈 전 비서실장이 쓴 글의 다른 대목이다.
 
  “(중략) 원래 디데이는 6월 15일이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무슨 사정에서인지 6월 15일에 서울민사지방법원에서 서명이 있었고, 곧바로 서울가정법원과 시내 支院(지원)의 서명이 잇달았다. (중략) 이일규 대법원장 시대의 출범은 6·15 서명운동의 가시적 성과라 하겠다. (중략) 1988년 서명운동은 향후 사법 조직 내 민주화 운동세력이 자신감을 가지고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가시적으로는 그해 8월 우리법 연구회의 모체가 탄생했다. 가장 큰 성과 중 하나다.”
 
 
  강금실 판사와 일부 소장판사들이 창립
 
박범계 前 청와대 법무비서관
  ‘우리법 연구회의 모체’란 당시 강금실 판사를 포함한 일부 소장판사들의 법학서적 독서회와 2차 사법파동의 중심에 섰던 판사들이 함께 모여 토론하던 모임을 말한다.
 
  이 모임은 이듬해 우리법 연구회라는 명칭으로 정식 출범했다. 김종훈·유남석·이광범·강금실·강신섭·박윤창 판사와 박종술·이태화 변호사 등이 창립멤버였다. 이들 대부분은 司試(사시) 23회 및 사법연수원 13기 동기생들이다. 사시 23회(사법연수원 13기)는 합격 인원이 300명으로 늘어난 첫 번째 기수다.
 
  인원이 300명으로 늘어나면서 다양한 성향의 법조인이 법조계에 들어왔다. 김종훈 전 대법원장 비서실장이 쓴 글에 이런 대목이 있다.
 
  “사법시험 300명 세대 1기생인 사법연수원 13기 중에는 사법시험 선발 인원이 100여 명이었다면 아예 사법시험 공부를 할 엄두를 못 냈을 사람들이 뒤섞여 있었다. 그만큼 다양한 사람이 사법부에 진출했던 것이다. 유신과 긴급조치 시대의 법과대학생은 권력에 앞장서 순응하는 사람들이었다. 오죽했으면 서울법대를 유신법대라 했겠는가.
 
이용훈 대법원장이 2005년 9월 대법원장 지명자 신분으로 국회 인사청문회에 출석, 인사말을 하고 있다.
  1978년엔가, 1979년에 서울대에서 동맹휴학을 한 적이 있다. 서울법대생들의 대부분은 평소에는 강의실에 나타나지 않고 도서실에 처박혀 있었는데, 동맹휴학을 한다고 하니까 혹시 찍힐까 봐 출석률이 90%에 육박했다. 정말 부끄러운 군상들의 집합체였다. 그런 사람들이 오늘날 사법조직의 상위그룹에 속해 있다.
 
  그런데 사법연수원 13기가 되면서 비록 일부나마 소위 운동권이 사법조직에 편입되었고, 그런 사람들이 1988년 6월 15일의 서명운동을 기획하고 주도했던 것이다. 양적 변화가 질적 변화를 가져왔다고 말할 수 있다.”
 
 
  박시환 대법관과 사법파동
 
2003년 대법관 제청 파문 당시 사법개혁을 주장하며 사표를 낸 박시환 현 대법관(당시 서울지법 부장판사)이 서울지방법원장실에서 법원장의 사표 반려 권유를 받고 나오고 있다.
  우리법 연구회는 일부 판사들의 ‘목숨 건 행동’에서 출범했다. 이런 분위기 탓인지 우리법 연구회의 전·현직 회원들 중 일부는 과감한 언행으로 주목을 받아 왔다. 우리법 연구회의 명칭을 作名(작명)한 것으로 알려진 박시환 대법관이 그중 한 명이다.
 
  박 대법관은 ‘사법파동’과 뗄 수 없는 관계다. 그는 네 차례의 사법파동 중 세 차례에 걸쳐 주역으로 활동했다. 2차 사법파동은 1985년 불법시위 대학생을 석방한 박시환 당시 인천지법 판사가 강원도 영월지원으로 좌천되자 법원 내 팽배해 있던 불만이 터져 나온 측면이 없지 않다.
 
  1993년 박시환 당시 서울민사지법 판사는 서울민사지법 단독판사들과 함께 ‘사법부 개혁에 관한 건의문’을 채택하고, 법관회의 제도화를 요구했는데 이게 3차 사법파동으로 번졌다.
 
  노무현 정권 출범 첫해였던 2003년 박시환 당시 서울지법 부장판사는 4차 사법파동으로 법복을 벗었다. 그는 당시 연공서열 위주의 대법관 인선에 반대하며 “기대가 철저히 외면됐다”며 사표를 냈다.
 
  법원을 떠난 직후 박시환 당시 변호사는 2003년 8월 우리법 연구회 게시판에 사표를 낼 때의 심정을 글로 올렸다.
 
  “내가 한 행동에 대해 여러 가지 평가가 있을 수 있고 우리법 연구회 회원들 사이에서도 서로 다른 시각들이 있을 것이다. (중략) 나는 이런 생각이 든다. 어떤 상황에 대해 누구나 가장 적절한 행동을 해야 하고, 각자가 가지고 있는 카드를 최고의 효율을 낼 수 있는 기회에 적절히 골라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 (중략) 이번의 실행이 100%의 효율도를 갖지 못했다 하더라도 60~70%의 효율도를 갖지 않았을까 생각하면서 자위해 본다.”
 
  최근 ‘촛불집회 재판 촉구’논란으로 법원 조직이 떠들썩했던 ‘신영철 대법관 사태’ 때 박시환 대법관은 이 사건을 ‘5차 사법파동’으로 규정했다. 박시환 대법관은 신영철 대법관 사태 당시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 상황은 5차 사법파동으로 볼 수 있다. 만약 이번 사태를 신 대법관 개인의 일탈 행위로 치부하고 넘어가면 또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재판 개입은 유신, 5공 때부터 계속돼 왔던 것이다. 역사적 흐름 속에서 원인 규명을 제대로 해서 이번 기회에 끊고 가야 한다.”
 
  우리법 연구회 회원 중 일부는 박시환 대법관의 뜻과 같이하며 신 대법관의 사퇴를 주장했다.
 
 
  “법원 내 사조직 해체해야” (변협 성명)
 
2009년 5월 보수단체 회원들이 서울 서초동 대법원 앞에서 사법파동 조장 중단과 박시환 대법관의 사퇴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대한변호사협회(회장 金平祜)는 지난 5월 ‘법원의 단합과 결단을 촉구한다’는 성명서를 내고 “대법원은 법원 내 엘리트 사조직의 존재 여부 및 활동상황을 조사해 해체하는 등의 적절한 조치를 단행해야 한다”고 했다. 성명서의 일부분이다.
 
  “신영철 대법관의 거취문제를 둘러싸고 법원 내외의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법원 내 엘리트 사조직으로 알려진 우리법 연구회의 초대 회장을 지낸 박시환 대법관이 최근의 법원 내부 상황을 4·19 및 6월 항쟁과 같은 정치적 사건에 비유한 것은 참으로 부적절한 발언이다. 이를 기화로 정치권과 사회단체가 너도 나도 나서서 대법관의 ‘탄핵’ 및 심지어는 대법원장 책임론까지 거론하는 정치논쟁으로 사태가 번져 나가고 있다. (중략)
 
  사법의 중추인 법원이 조속히 정상화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전국의 법관이 개별 행동을 중단하고 언행을 조심하며 법원의 首長(수장)인 대법원장을 중심으로 일치 단합하여야 한다. 대법원은 이념적인 엘리트 사조직의 존재 여부 및 활동상황을 조사하여 해체하는 등의 적절한 조치를 조속히 단행함으로써 법원의 사조직화를 우려하는 국민의 우려를 불식시켜야 한다. 법원의 권위와 신뢰는 누구보다 먼저 법관 스스로가 법원 조직을 존중하고 신뢰하여야만 가능한 것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바이다.”
 
  대한변협의 고위 관계자는 우리법 연구회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처음 모임을 시작할 때 비판적이면서도 건설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모임을 만든 것으로 안다. 우리 사법부가 군사정권을 지내오면서 바람직하지 못한 부분을 극복하자는 취지에서 시작한 모임이라는 인상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 뒤에는 어떻게 변했는지 모른다”고 했다.
 
 
  화제를 불러일으킨 판결 사례
 
  우리법 연구회의 창립멤버였던 김종훈 전 비서실장이 모임 홈페이지에 올린 글처럼 우리법 연구회에 ‘민주화 운동세력’ ‘운동권 성향’의 법조인이 일부 유입되면서 소속 회원들의 발언과 판결 사례는 사회적으로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우리법 연구회 초대 회장을 역임한 박시환 대법관은 2008년 宋斗律(송두율)씨에 대한 선고공판에서 “위헌적 요소가 제거되지 못한 국가보안법은 마땅히 폐지되거나 근본적으로 개정돼야 하며, 법원으로서는 국가보안법 조항에 대해 다시 한 번 위헌법률심판제청을 하는 것이 합리적인 태도”라는 별개의견을 내놓았다.
 
  박 대법관은 판결문에서 “사상과 표현의 자유의 제한에 대한 엄격한 해석은, 지난 시기에 국가보안법이 정권안보 차원이나 비판세력에 대한 탄압 수단으로 오·남용되고 공안담당 기관의 과잉의욕에 의하여 무리한 법집행이 이루어짐으로써 국민의 인권이 침해당하고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중핵인 기본권이 위태롭게 되었던 지난 시대를 정리하고 다시는 그런 전철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과거로부터 확실한 단절을 긋는다는 의미에서도 반드시 확실히 해 두어야 할 부분”이라고 주장했다.
 
  김○○ 서울중앙지법 판사는 2008년 일심회 사건으로 징역 7년형이 확정된 장민호씨 등 5명이 “피의사실을 공표하고 변호인과의 접견교통권을 침해했다”며 金昇圭(김승규) 전 국정원장과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내렸다.
 
  그는 지난 5월 ‘김용준 간첩조작 사건’으로 징역 8년을 살았던 김용준씨와 가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김씨는 위법하게 징역살이를 했고, 가족도 사회적 냉대와 신분·경제상의 불이익을 당했다”는 이유로 국가가 2억2640만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유승룡 판사는 지난 2월 업무상 횡령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5·18 구속부상자회의 양모 회장과 임원 이모씨 2명에 대해 “임시총회 개최를 둘러싼 정상화대책위원회의 논의 과정이 정당했고, 예산집행도 하자가 없는 것으로 보이며, 특히 집행된 예산으로 양 회장과 이씨가 개인적으로 이득을 취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다.
 
  그는 2008년 인사비리 혐의로 기소된 李正燮(이정섭) 전남 담양군수에 대해 암수술을 받는 등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보석을 허가했지만, 4개월 뒤인 11월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하고 보석을 취소해 법정 구속했다. 같은 해 9월에는 金載均(김재균) 민주당 의원의 부인을 기초의회 의장 후보자들이 준 뇌물을 받은 혐의로 사전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서민에겐 선처, 정치인에겐 냉혹
 
2009년 봄 ‘촛불집회 재판 촉구’로 논란이 된 ‘신영철 대법관 사태’ 당시 우리법 연구회 회원들은 법원 내부 게시판에 신 대법관의 사퇴를 주장하는 글을 잇달아 올려 문제를 제기했다.
  현재 우리법 연구회 회장직을 맡고 있는 文炯培(문형배) 부산지법 부장판사는 재판 과정에서 이례적 행위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2007년 자살하기 위해 여관방에 불을 질렀다가 붙잡힌 피고인에게 “자살을 열 번 연이어 외치라”고 한 후, “자살이 우리에겐 살자로 들린다. 삶의 이유를 찾으라”고 했다.
 
  그는 피고인에게 중국 작가 탄줘잉의 에세이집 <살아 있는 동안 꼭 해야 할 49가지>를 선물한 후, 징역 1년에 집행유예(2년)를 선고했다. 2006년 7월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집에 불을 지르려 한 피고인에게 같은 책을 선물했다.
 
  가정폭력을 휘두르던 남편을 살해한 30대 주부에게 이례적으로 집행유예를 선고했고, 상습적으로 가정폭력을 휘둘러 온 60대 아버지를 때려 숨지게 한 혐의로 기소된 20대에게 정상을 참작해 집행유예 판결을 내렸다.
 
  또 화폐위조 대학생에겐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최소 5년 이상 또는 사형·무기징역인 화폐위조범에 대해 그는 “청년실업으로 취업을 못 한 수석 입학생이 경제적으로 곤궁해 범행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선처했다.
 
  이처럼 서민들에겐 너그러운 판결을 내린 문 부장판사는 정치인들에게는 냉혹했다. 그는 2005년 裵英宇(배영우) 창원시의회 의장을 뇌물공여 ... (계속)

기사 全文 보기 : 월간조선 2009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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