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세 구글 상무 金玹裕의 성공 디자인
"한국인 최초의 구글 경영진 되겠다"
⊙ 초·중·고 한국에서 졸업한 연세대학교 역사학도가 구글의 신규사업 제휴 책임자가 되기까지
⊙ “똥 밟았다”던 삼성 입사 후 첫 담당지 이스라엘을 유대인 협상기술 배우는 ‘기회의 땅’으로
⊙ “반복된 도전이 곧 삶의 에너지이자 행복”
김현유(Mickey Kim) 구글 사업제휴상무. ⓒ서경리
그는 초·중·고 모두 한국에서 나왔다. 대학은 연세대에서 역사학을 전공했고, 군대도 만기제대했다. ‘해외 비즈니스’는 그가 어렸을 때부터 막연히 꿨던 꿈이었다. 외국인들과 만나 머리를 맞대고 회의하는 모습이 멋있어 보여서였다고 한다. 그는 꿈을 정교하게 설계했고, 그 꿈은 결국 현실이 됐다. 그것도 남들 직장생활 시작해서 얼마 되지도 않을 나이인 36세에 글로벌 기업의 임원이 된 것이다. 김현유(金玹裕·Mickey Kim) 구글(Google) 사업제휴상무의 이야기다.
대학에서 그를 가르쳤던 강규형(姜圭炯) 명지대 교수는 “현유는 복학생 시절 제 수업을 거의 다 듣고 모두 최고점수를 받았던 학생”이라며 “국내 대학에서, 그것도 역사학을 전공하고 세계적인 IT(정보기술) 기업의 상무로 고속 성장한 제자가 그저 놀랍기만 할 뿐”이라고 했다.
구글은 매년 전 세계 학생과 직장인들이 가장 일하고 싶어하는 직장으로 뽑아 명실상부 ‘신(神)의 직장’으로 불린다. 미국 실리콘밸리에 자리한 본사엔 현재 30여 명의 한국인 직원이 있다. 대부분 엔지니어들이며, ‘상무급’ 레벨은 손에 꼽을 정도라고 한다.
한국에 출장 올 때마다 그는 대학 특강과 인터뷰 등으로 쉴 틈이 없다. 많은 이가 궁금해하는 ‘그의 스토리’를 쉽게 설명하기 위해 지난달 《꿈을 설계하는 힘》이란 책을 냈다. 그는 책에서 ‘꿈꾸는 자의 유형’을 나누며 이렇게 설명했다.
“꿈을 꾸고 계획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사람은 드물다. 실행은 늘 가장 어려운 과정이다. 장황한 계획을 이야기하지만, 계획과 실행이 계속 흔들리는 사람과 한번 세운 계획을 진득하게 추진해 독하게 실행하는 사람이 있다. 성공은 당연히 후자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그가 말한 ‘꿈의 설계과정’이 궁금해 지난 10월 11일 서울 강남구의 구글코리아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미국 본사에 소속된 그는 한국 기업과 구글TV의 전략적 제휴를 위해 고국으로 장기 출장을 온 상태다.
점수 맞춰 선택한 역사 전공
“외국 회사에 다니다 보니 많은 분이 성장과정을 궁금해하더라고요. 전 ‘해외파’도 아니지만, 엄밀히 따지면 완전 ‘토종’도 아니에요. 아버지가 미국에서 교환교수를 했기 때문에 외국생활이 아주 생소하진 않았죠. 취학 전 3년 정도를 미국에서 보냈습니다. 초·중·고는 한국에서 나왔지만, 유치원은 미국에서 ‘졸업’했어요.”
그의 아버지는 재정학(財政學)의 권위자로 알려진 김동건(金東建) 서울대 명예교수다. 어머니 민숙기(閔淑基)씨는 해외 기업의 한국 진출을 돕는 사업을 했었다. 학자인 아버지보다 비즈니스를 했던 어머니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은 셈이다.
“어렸을 때 ‘친구 엄마들’은 주로 집에 계셨는데, 제 어머니는 밖에서 일하시는 모습이 왠지 멋져 보였어요. 영화나 드라마 보면 해외 호텔 로비에서 외국인 만나서 같이 회의하는 장면들이 나오는데, 고등학교 때까진 세상물정을 잘 모르잖아요. 막연하게 해외를 누비면서 ‘글로벌’한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막연한 꿈’은 대학에 입학한 후 현실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역사학이란 전공을 선택한 이유는 “점수가 맞는 학과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김 상무는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내 세대는 대부분 목표한 대학에 점수를 맞춰 전공을 고를 수밖에 없었다”며 “연세대 가려고 선택한 전공이었다는 사실을 거창하게 포장할 생각은 없다”고 했다.
“솔직히 ‘글로벌 비즈니스’란 꿈과 역사학이란 전공은 별로 연관성이 없죠. 도전했던 기업 면접 때마다 ‘역사학 전공자가 왜 해외 업무를 하고 싶어하느냐’란 질문을 수없이 들어왔습니다. 그럴 때마다 준비된 답이 있었어요. ‘내 전공은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충분히 도움이 되며, 나는 이를 긍정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그는 “성공을 하려면 본인이 가진 모든 것을 100% 활용해야 한다”고 했다. ‘글로벌 비즈니스’에 대해서도 “결국 사람 대 사람의 커뮤니케이션은 상대방의 문화에 대해 이해가 선행되면 더욱 유리하다”며 “대학 시절 배운 여러 문명사(史)를 최대한 활용하려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역사학이란 ‘뜻밖의’ 전공도 그에겐 ‘한계’가 아니라 ‘기회’였다.
“터키 회사와 제휴를 맺을 일이 있었습니다. 첫 만남의 자리에서 저는 터키의 독립 영웅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와 오스만 제국에 대한 이야기로 대화를 시작했죠. 분위기가 쉽게 부드러워졌고, 서로 호감을 가지게 됐죠. 입장을 바꿔보면 간단하게 이해가 됩니다. 한국에 온 외국의 비즈니스 파트너가 가수 싸이뿐 아니라 이순신(李舜臣) 장군과 세종대왕까지 얘기한다면 한국인으로선 그를 싫어할 이유가 없죠.”
인턴 지원 위해 美 상공회의소 회원 주소록 뒤져
지난 9월 27일 에릭 슈미트 구글 회장이 가수 싸이에게 말춤을 배우는 현장에 함께한 김현유 상무.(출처 김현유 트위터)
꿈도 컸고 전공도 활용했지만, 결국 시작은 바닥부터였다. 그는 대학 2학년 때부터 인턴 활동을 시작했다. 요즘과 달리 대학생 인턴사원이 흔치 않던 시절이었지만, “회사생활을 해보고 싶다”는 단순한 목표를 두고 차근차근 계획을 세웠다.
당시 한국보다는 학부생 인턴이란 개념이 익숙했던 외국 회사에 지원하기 위해선 각 회사의 담당자 연락처를 구하는 게 우선이었다. 1997년은 인터넷이 막 태동하던 시기라 정보를 모으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수소문 끝에 주한미국상공회의소(AMCHAM)가 매년 출간하는 회원 주소록을 구했다. 한국에 진출한 미국 회사들의 연락처가 한곳에 모두 모여 있었다.
그는 관심이 가는 회사 중 임원 연락처를 확보한 회사 15곳을 추려 자신의 영문 소개서와 편지를 보냈다. 편지는 “당신의 꿈 많았던 대학 시절을 기억하십니까?”란 말로 시작했다. 답장이 온 곳은 단 한 곳, 당시 세계 최대 보험사였던 AIG였다.
“우여곡절 끝에 인턴을 시작했는데, 막상 가보니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더군요. 잔심부름을 주로 했죠. 하지만 그곳에서 저는 두 가지 소중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첫째는 ‘금융 분야는 나와 맞지 않다’는 점을 깨달았고, 두 번째는 ‘IT 분야가 흥미롭고 내게 잘 맞는다’는 생각이었죠. 사람은 어디에서든 반드시 배울 점이 있습니다.”
잡일을 하던 그에게 ‘엑셀 프로그램을 공부해서 직원들을 교육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그는 공부와 강의를 하면서 자연스레 IT 분야와 가까워졌다. 엑셀은 누구보다 능숙하게 다룰 수 있었고, 인터넷과도 본격적으로 친해지기 시작했다.
“한국에 초고속 인터넷망(網)이 가정까지 들어오기 전이었는데, 저는 빠른 회사망으로 ‘인터넷’이란 신세계를 마음껏 체험할 수 있었죠. 전산실 직원들에게 틈틈이 배운 지식으로 첫 홈페이지도 만들었어요. 저의 이력과 활동이 고스란히 담겨 지금도 활발히 운영중인 ‘현유닷컴(hyunyu.com)’의 출발이었습니다.”
군 생활을 마친 후 그의 도전은 계속 ‘인턴’으로 이어졌다. 제대 직전 이미 두 회사로부터 인턴 합격을 받았다. 그는 대형 은행과 IT 벤처기업 두 곳을 놓고 고민한 결과, AIG에서 깨달은 ‘금융보다는 IT’란 결론을 믿고 벤처기업을 선택했다.
“인터넷 벤처기업에서 인턴을 하면서 파트너 미팅이나 자료 발표를 처음으로 경험해 볼 수 있었습니다. 규모가 큰 은행이라면 할 수 있는 일이 한정됐을 텐데, 상대적으로 벤처기업은 인턴이 이것저것 해볼 기회가 많았죠. 당시 대외적인 업무를 해본 경험이 졸업 후 취업 과정에서 큰 도움이 됐습니다.”
‘5년 후 MBA 지원’ 위해 미리 시험공부
제대 후 두 번째 인턴은 더 작은 규모의 신생 벤처기업이었다. 그는 “‘창업’에 대해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며 “회사 설립부터 서비스 출시까지 과정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했다”고 했다. 대학 4학년 때엔 세계 5대 회계법인인 아서 앤더슨(Arthur Andersen)의 컨설팅 조직에서 일할 기회를 얻었다. 회계 시스템을 구축하는 프로젝트부터 본사 감사팀의 한국법인 내부 감사 지원까지 다양한 업무를 경험했다.
“다양한 경험과 함께 인턴을 하면서 얻은 또 하나의 장점은 대학에선 보기 어려운 다양한 분야의 선배들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겁니다. 자주 부딪히다 보면 ‘롤모델’이 생길 수도 있고, ‘저렇게 돼선 안 되겠다’고 생각되는 분도 만나게 되죠.”
인턴 기간 중 그가 닮고 싶었던 ‘롤모델’ 중 상당수는 MBA(경영학석사) 과정을 마쳤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자연스레 MBA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귀찮을 정도로 그들에게 정보를 구했고, MBA를 다녀왔거나 실패한 사람 모두 가장 큰 난관으로 GMAT(경영대학원 입학시험) 공부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점을 뽑은 것을 알게 됐다.
이때부터 그의 ‘꿈 설계’가 시작됐다. ‘MBA를 가려면 4~5년의 직장 경력과 GMAT 점수가 필요하다.’ 그는 학부 졸업 후 국내에서 글로벌 업무를 경험한 후 5년 안에 MBA로 간다고 예상하고 유효 기간이 5년인 GMAT 공부를 대학 마지막 학기에 시작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그는 두 회사에서 합격증을 받았다. 인턴으로 일했던 아서 앤더슨과 삼성전자였다.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글로벌 비즈니스에 대한 오랜 꿈은 외국계 회사 대신 삼성전자를 선택하게 했다. 다양한 인턴 경험을 통해 얻은 판단력이었다. 그가 선택하지 않은 아서 앤더슨은 얼마 후 ‘엔론(Enron) 사건’이 터지면서 회사가 사라졌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대학 다니면서 인턴생활을 했던 네 곳의 기업 모두 현재 제대로 남은 회사가 없습니다. AIG는 2008년 금융위기로 몰락했고, 모모스 벤처스 그룹이란 이름의 IT벤처도 2000년대 초 인터넷 버블이 터지면서 인터넷을 접었죠. 창업에 참여했던 벤처도 얼마 후 망했고, 4학년 때 했던 아서 앤더슨은 2002년 ‘엔론 사건’과 함께 사라졌어요. 그들의 몰락은 제게 충격이자 소중한 교훈을 줬습니다. 기업의 흥망성쇠(興亡盛衰)가 결국 인간의 삶과 비슷하다는 거죠.”
‘똥 밟았다는 담당지역’ 이스라엘에서 유대인의 강점 배워
인턴 경력 기업은 모두 망했지만, 졸업 후 선택한 두 기업은 현재 세계적 기업이 됐다. 김 상무는 “삼성과 구글 모두 지금은 최고의 시절을 보내고 있지만, 기업은 조금만 방심해도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인턴 경력을 통해 직접 체험할 수 있었다”며 “무엇보다 기초가 중요하며, 초심을 잃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되돌아봐야 한다”고 했다.
2002년 봄, 부푼 꿈을 안고 출근한 삼성전자는 그에게 ‘이스라엘 담당’이란 업무를 줬다. 입사 동기들이 그러했듯 그도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선진국을 선호한 터라 실망이 컸다. 이스라엘 부서 선배들도 “이스라엘인의 공격적인 성격과 고집 때문에 일하기 어렵다”며 그를 위로했다.
“‘그냥 똥 밟았다고 생각하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그곳에서 새로운 기회와 긍정적인 면을 봤습니다. 최선을 다해 좋은 성과를 내야겠다고 다짐했죠. 주어진 환경은 항상 완벽하지 않지만, 이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큰 기회를 잡을 수 있죠. 저와 연세대에 함께 입학했지만 경영학과나 법대 등 ‘더 좋은 과’에 간 친구들, 저와 삼성전자에 같이 입사했지만 저보다 ‘더 좋은 부서’에 갔던 친구들, 그들이 현재 저보다 더 성공했다고는 생각하지 않거든요. 누군가에겐 실패겠지만, 저에겐 모두 기회였습니다.”
두 달 중 2주는 항상 이스라엘로 출장을 떠나야 했던 그는 그곳에서 세계적인 창업자, 과학자, 예술인, 금융인 중 상당수가 유대인이란 사실에 주목했다. ‘유대인의 협상 기술’을 배웠고, 그들의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려고 애썼다.
“삼성전자 입사 후 이스라엘을 담당하게 됐다는 얘기에 연세대 은사님인 강규형 교수님은 ‘유대인들과 일한 경험은 훗날 미국 유학 과정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격려해 주셨죠. 지금 돌이켜보면 정확한 말씀이었어요. 미국에서 MBA를 할 때도, 실리콘밸리의 구글에 근무할 때도 큰 도움이 됐습니다.”
대학 시절 이미 GMAT 점수를 확보한 그는 본격적인 MBA 진학 준비에 돌입했다. 출퇴근과 출장 일정 등 대부분의 자투리 시간을 에세이 작성에 공들였다. 치밀한 계획에 따라 진행된 그의 도전은 최고 수준으로 알려진 MBA 네 곳의 합격증으로 돌아왔다. 그는 IT 분야에 강한 UC 버클리의 하스 경영대학원을 선택했다.
“이마에 Google이라고 쓰여 있다”
어릴 적 짧게나마 외국 체류 경험이 있어 영어 사용이 크게 불편하진 않았지만, 미국 현지에선 완벽하지 못한 영어가 걸림돌이 될 수 있었다. 김 상무는 “영어는 멋진 발음이나 완벽한 문법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며 “창피해하거나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말하는 게 최선”이라고 했다.
자신감은 그를 ‘하스 테크 클럽’ 회장까지 당선되게 했다. ‘하스 테크 클럽’은 대학원 내 학생클럽 중 가장 큰 규모로, 재학생의 절반이 가입할 정도였다. 그는 “당시 제대로 판을 벌이려면 클럽 회장을 반드시 해야겠다는 목표를 세웠다”면서 “클럽 운영 경험이 MBA 생활에서 가장 보람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가 ‘나만의 톱(top) 5 회사’를 정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그는 구글, 애플(Apple), 어도비(Adobe), 마이크로소프트(MS), 야후(Yahoo) 등 총 5개의 회사를 ‘특별 관리 대상’으로 정하고, 회사별 정보와 뉴스를 파일로 정리했다.
“5개 중에서도 구글의 위상은 남달랐어요. 지인들이 제게 ‘왜 MBA를 가느냐고 물어볼 때마다 이렇게 답했죠. ‘미국에 가서 구글 같은 회사에서 일하고 싶어서’라고. 저의 별난 ‘구글 사랑’에 MBA 동기들이 ‘이마에 Google이라고 쓰여 있다’고 할 정도였어요.”
그는 ‘모든 것을 보여주겠다’는 각오로 면접에 임했다. 구글 면접은 지원자의 답변 중 논리의 빈틈을 파고드는 경우가 많아 까다롭다고 한다. 신규사업제휴 분야를 지원한 그에겐 협상 경험에 대한 질문이 많았다. 그는 삼성전자 시절 이스라엘 사람들과 협상하며 어려운 시장을 담당해 낸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고 했다.
그는 결국 ‘꿈의 회사’에 합격했다. 단 6명을 뽑은 신규사업팀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린 것이다. 3개월간의 인턴생활을 마친 후 그를 포함한 4명이 정식 채용 계약을 했다. 김 상무는 “대학생 시절, 이스라엘로 출장 다니던 시절, MBA에서 앞만 바라보고 달린 시절이 한순간에 스쳐 지나갔다”며 “‘정말로 간절히 원하는 것은 이뤄진다’는 말을 실감했다”고 했다.
현재 그는 구글TV의 전략적 제휴 책임자로 일하고 있다. 첫 정식 직장이었던 삼성전자는 물론, LG, 소니, 비지오 등 제조사가 그의 파트너가 됐다. 현재 그는 한국 기업과의 사업제휴 때문에 고국으로 장기출장을 온 상태다. “삼성에 ‘사실상 금의환향(錦衣還鄕)’한 것 아니냐”는 물음에 그는 “전에 같이 일했던 삼성의 선배나 동료를 만나면 가족같이 편하고 즐겁지만, 그만큼 겸손해지려고 애쓴다”고 답했다.
아내는 한국인 최초의 트위터 직원
삼성과 구글을 비교해 보란 질문엔 “삼성은 조직력을 바탕으로 실행하는 추진력이 강하고 구글은 개인역량을 키우는 환경이 장점”이라고 했다.
“삼성뿐 아니라 우리나라 대기업 대부분은 의사결정만 되면 무서운 추진력을 보입니다. 그게 한국 기업이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라고 생각해요. 실리콘밸리에선 개인에게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와 환경을 줍니다. 그렇게 새로운 혁신이 시작되죠.”
김 상무의 아내 이수지씨는 한국인 최초의 트위터(Twitter) 직원이다. 연세대에서 캠퍼스 커플로 만난 두 사람은 비슷한 시기에 MBA를 거쳤고, 함께 실리콘밸리의 세계적 기업에 입사했다. 아내 이씨는 입사 2년차로, 트위터 한국시장 개발 매니저로 활동하고 있다.
마침 인터뷰를 진행한 날, 방한(訪韓)중인 오스만 라라키(Laraki) 트위터 해외사업담당 부사장이 “트위터가 본격적인 한국어 서비스를 확대한다”고 밝혔다는 뉴스가 보도됐다. 김 상무의 아내 이씨는 이번 프로젝트와 관련 한국에 장기출장중이다. 김 상무는 “우연히 출장 일정이 겹쳐 아내와 딸 모두 함께 한국에 오게 됐다”며 “긴 출장을 가족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은 큰 행복”이라고 했다.
한국의 상당수 젊은이에게 전 세계를 누비는 그는 ‘꿈의 대상’일 것이다. 수많은 목표를 세워 성취해 온 그에게 ‘현재의 꿈’을 물었다.
“아직 멀었다고 생각합니다. 실리콘밸리에 한국인이 많긴 하지만, 규모 있는 기업에서 경영진의 위치에 선 사람은 아직 못 본 것 같아요. 저는 그 목표를 꼭 이루고 싶습니다. 좀 더 범위를 넓혀보면 ‘끊임없이 무언가를 추진하는 사람’이 됐으면 합니다. 도전을 해야 에너지를 얻고 행복감을 느끼는 스타일인 것 같아요. 안주하고 싶지 않습니다.”
IT와 인문학의 융합
6개월마다 한 번씩 자신의 성과를 정리해 기록하는 것은 그의 꽤 오래된 습관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신의 경력을 스스로 관리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경력은 스스로 정리돼야 다른 사람에게도 잘 보여줄 수 있다”며 “평소에 자신의 이력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고민해 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터뷰를 하던 그의 모습에서 어렴풋이 스티브 잡스(Jobs)의 모습이 떠올랐다. 전공이나 살아온 과정은 차이가 있지만, IT와 인문학이 접목된 인생의 흐름이 묘하게 겹쳤다. 대학 중퇴 후 철학과 인문학 강의를 도강한 잡스는 특히 타이포그래피 서체 수업에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훗날 그의 인문학 지식은 매킨토시를 만들 때 큰 역할을 했다. 김 상무의 말이다.
“스티브 잡스는 실리콘밸리를 상징하는 아이콘이자 제가 꿈꾸는 미래의 영감(靈感)을 주는 존재였습니다. 창업자인 그와 직원인 저는 걸어온 방향이 다르지만, 자신이 쌓아온 영역을 서로 연결하는 강점은 제게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현재 국내 이공계의 가장 큰 화두는 ‘융합’이다. 자동차 한 대를 생산해도 BT(생명공학), ET(환경공학), IT(정보기술), NT(나노기술) 등 모든 기술이 융합돼야 하는 시대다. 역사학과 첨단 IT 산업이란 간극이 그의 인생에선 분명한 선으로 연결돼 있었다. “만약 다시 대학을 가라면 무슨 과를 선택할 거냐”란 질문에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역사학을 다시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역사학이 아니더라도 공학이나 경영학 대신 인문학을 선택할 겁니다. 어떠한 전공이 됐든 꿈을 현실로 만드는 것은 정확한 꿈의 설계와 집요한 실행의 힘이겠죠.”⊙
金玹裕
⊙ 36세. 연세대 역사학과 졸업. 미국 UC 버클리 하스 경영대학원 경영학석사.
⊙ 삼성전자 근무 후 구글 입사. 現 구글 신규사업제휴 상무.
<월간조선> 2012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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