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권委 생명은 독립성… ‘대통령 바뀌면 사표 내라’는 말 동의할 수 없어”
⊙ “부동산 투기, 논문 표절, 아들 병역 등 각종 의혹, 이미 해명할 만큼 했고 언제든 또 할 수 있다”
⊙ “‘인권’이 뭔지도 모르고 ‘나 억울하다’고도 말 못하는 인권 사각지대 해결이 진정한 인권운동”
⊙ “1세대 인권인 자유권을 넘어 2·3세대 인권 추구해야 할 시점… 생활밀착형 인권에 집중하겠다”
현병철 국가인권위원장. ⓒ서경리
2009년 7월 16일 오전, 당시 공석이었던 국가인권위원장에 현병철(玄炳哲) 한양대 교수가 내정됐다. 이날 오후 곧바로 “현병철 차기 위원장 내정을 철회하라”는 시위가 시작됐다. 이른바 ‘진보 시민단체’들은 “내정 전까지 ‘인권’ 관련 활동을 한 경험이 전무하다”며 현 위원장 내정을 ‘날치기 임명’이라고 비난했다. 장애인들을 앞세운 인권단체의 격렬한 반대농성으로 취임식은 두 차례 연기됐다. 취임 일성(一聲)으로 ‘북한인권 공론화’를 선언한 현 위원장은 외부단체의 시위와 내부 조직의 반발로 내우외환(內憂外患)을 겪었다. 국가보안법에 대한 입장을 두고는 좌·우파 양측의 ‘협공’을 받았다. 2012년 6월 11일, 이명박(李明博) 대통령은 3년 임기를 마친 현 위원장을 재(再)선임했다. 첫 임명 때보다 반대 목소리가 더 커졌다. 민주통합당은 이날 “연임은 인권 포기 선언”이라며 공세를 펼쳤다. 《한겨레》는 ‘현병철 인권위원장, 청문회 설 자격조차 없다’는 사설을 내놓았다. 시민·사회라는 글자를 붙인 단체들의 반대 시위가 잇따랐다. 대선을 앞두고 여론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새누리당도 재임 반대 의견을 청와대에 전달했다. 현 위원장은 인사청문회를 통과하고 대통령의 승인을 받아 연임에 성공했다. 그를 반대하는 이들은 이를 ‘강행’, ‘파행’, ‘특혜’ 등으로 표현하며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지난 10월 국가인권위원회 국정감사 때도 그의 ‘자질’을 두고 여야 간 공방이 치열하게 이어졌다. 현 원장의 3년 반 임기는 ‘우여곡절(迂餘曲折)’이란 말로 요약된다. 일부 언론·단체·전문가들로부터 ‘인권무시위원회’, ‘인권후퇴·역주행’, ‘인권침해위원장’이란 비판을 들었다. ‘인권위원장’이란 직(職)이 무엇이기에 그는 버티고 있을까. 일방적 비난만 있었을 뿐 정작 본인의 입장은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 진보를 자처하는 매체들은 비난만 퍼부었을 뿐 현 위원장의 입장은 거의 싣지 않았다. 그래서 현 위원장은 언론과 정식 인터뷰도 하지 않았다. 인권위 관계자에게 인터뷰를 거절한 이유를 물었더니 “(의혹 해명에 대한) 본질은 무시되고 지엽적인 문제만 부풀려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수차례 시도 끝에 인터뷰가 성사됐다. 지난 11월 9일 위원장실에서 만난 그는 연임 반대 시위와 국회 청문회 등에서 제기된 핵심 의혹에 대해 모두 해명하겠다고 했다. “해명을 해도 정확히 써 주는 언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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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7월 20일 첫 출근한 현병철 국가인권위원장을 시민단체 회원들이 저지하고 있다. |
—3년 전 첫 임명 때부터 자질과 경험을 두고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그게 답답하다는 겁니다. 인권 현안에 대해 ‘무엇이 문제이고 틀렸다’고 하면 대화가 가능하겠지만, 무조건 인권 문외한, 비전문가라는 규정부터 합니다. 임명 당시 인터뷰를 두고 ‘나는 인권에 대해 모른다’고 말했다는 겁니다. 전체 인터뷰 내용은 인권위 조직축소 업무에 대해서 모른다는 내용이었지, 인권 자체를 모른다는 게 아니었어요.” 현 위원장은 당시 기사 스크랩을 내놓았다. 2009년 7월 17일자 《한겨레신문》에 실린 인터뷰에서 그는 “법학자가 인권에 대해서 모른다면 우스운 일”이라며 이렇게 밝힌 바 있다. “인권위원장은 반드시 현장에 있어야 하는가? 현장 경험을 꼭 필요로 하는가? 학계에만 있었으면 그게 안 되는가는 의문이다. 법학자가 추구하는 최선의 가치가 인권이다.” —본인에 대한 핵심 의혹이 무엇인지 압니까. “청문회 때 가장 많이 나온 개인 문제가 부동산 투기, 논문 표절, 아들 병역 비리입니다. 그 외에도 많이 있었는데 오늘 다 털어놓고 싶어요.” 그는 답답했는지 손에 들고 있던 인터뷰 답변자료를 자리 옆으로 치워 버렸다. 미리 보내준 질문에 대한 사전 답변 내용인데, 그는 “내가 알고 있는 내용 그대로 다 얘기할 테니 나중에 참고하라”고 했다. —각종 의혹부터 먼저 짚고 시작하겠습니다. 1983년 서울 동대문구 장안동 도랑 근처의 약 3㎡(1평) 땅으로 전입한 기록을 두고 ‘알박기 위장전입’을 했다는 의혹이 있습니다. “제가 들어갈 땐 이미 18가구가 들어와 있었고, 거기서 3년 살다 나온 게 전부입니다. ‘한 평 알박기’는 말도 안되는 얘기입니다. 후에 구청에서 서류 다 떼어 보고 확인이 된 게, 동네가 개발되니 구획정리가 되고 번지도 달라지면서 나온 오해입니다. 저는 1982년에 이미 완공한 건물에 전세로 입주했고, 약 4년 반 동안 거주하다 이사한 게 전부입니다. 정확하게 해명 다 했는데, 써 주는 언론이 거의 없더군요.” “부동산 재테크는 진짜 ‘문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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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16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민주당 한정애 의원이 현병철 위원장의 부동산 투기 의혹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 |
—아파트 투기 의혹도 제기됐는데요. “저는 평생 집을 딱 두 번 사 봤습니다. 봉급을 모아 집을 샀는데, 1년 지나니까 분양금을 다 갚으라는 겁니다. 경매는 들어간다고 하고, 모아 둔 돈이 없으니 집을 팔았는데, 집값이 올랐나 봐요. 오히려 싸고 조그만 집으로 줄여서 들어갔는데 이를 두고 투기라고 합니다. 저도 몰랐는데 청문회 때 보니까 2400만원 올랐다고 하네요.” —어쨌든 집값이 올랐으니 투기라고 할 수도 있겠는데요. “좀 복잡하지만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소유자와 매매계약 체결과 동시에 매입대금을 완불하고 같은 날 소유권이전등기 신청을 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이 합의에 따라 매매와 소유권이전등기가 같은 날에 이루어진 것이죠. 투기란 게 뭘 말하는 겁니까. 이익을 내기 위해 집을 가지고 장난치는 건데, 저는 집에 살기 위해 적법하게 매매계약을 체결한 게 전부예요. 자료 보면 1987년과 1988년에 두 번 집을 샀고, 나머진 전부 전세로 거주했습니다.” —등본상 1년간 전(前) 임대인과 동거인으로 기록돼 위장전입을 방조했다는 의혹도 제기됐습니다. “누가 전입신고를 하는지 전세 사는 제가 어떻게 압니까. 당시 이름이 거론된 임대인들은 거주한 적이 없습니다. 모든 사실을 인사청문회 할 때 처음 알았습니다. 이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 의혹이에요. 흔히 말하는 알박기, 투기, 위장전입은 저와는 거리가 먼 사례란 걸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1가구 2주택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까.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세금도 나 냈고, 지금도 전셋집 삽니다.” —현재 사는 곳의 전세는 얼마입니까. “꽤 오래됐는데, 3억5000만원입니다. 공직자 재산신고할 때 다 나옵니다. 동네 사람들도 다 알아요. 자랑할 건 아니지만, 부동산 재테크에선 진짜 ‘문외한’입니다.” —아들이 과체중으로 보충역 판정을 받아 병역비리 의혹도 제기됐습니다. “제가 독일에 교환교수로 있을 때,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이 보험에 못 들었어요. 그 나이엔 약 50kg이 넘으면 안 받아 주는데 그걸 못 받을 정도로 몸이 컸습니다. 고등학생일 때도 100kg이 훨씬 넘었고, 생활기록부에 기록이 다 남아 있습니다. 재수를 하면서 운동을 못하니 살이 더 쪘어요. 재검까지 받고 공익근무요원 판정을 받은 겁니다. 갑자기 불린 몸일 수가 없어요.” “인권委는 인권法과 원칙 따르는 게 당연” —복무지가 국민연금공단으로 지정된 데다 해외여행까지 다녀와 특혜 논란이 있습니다. “당사자가 아니라 병무청에서 복무지 지정을 한 것입니다. 오히려 본사도 못 가고 신사동 지사로 발령이 나서 더 힘들게 오가고 있어요. 150명 직원 중에 공익근무요원이 1명뿐이라 심부름 혼자 다 해야 하는데 항의도 못해요. 괜히 본사로 가겠다고 항의했다가 아버지 때문에 특혜받는다고 할까봐. 해외여행은 변호사가 꿈인 아들이 로스쿨 다니면서 베트남어를 공부했어요. 호찌민대학에서 시험을 봐야 해서 휴가를 안 쓰고 다 모아 2주 동안 다녀온 겁니다. 병무청에 미리 공식적으로 신고하고 허가까지 다 받았어요.” —청문회 당시 논문 표절 논란도 제기됐습니다. “그 부분은 제가 일부 시인을 했습니다. 2004년 법학교수회에서 제시한 논문인용 및 작성에 관한 기준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새로운 아이디어의 추가 부분이 있거나 했을 경우 기존의 자기 논문에 대해서 중복게재의 관행이 어느 정도 용인이 되는 추세였습니다. 하지만 이 논문들로 인해 승진이나 연구비 수령과 같은 혜택을 본 것은 없어요. 2004년 규정도 당시 법학교수회 사무총장이었던 제가 직접 주도해서 만들었습니다. 제가 만든 규정이니 누구보다 내용을 잘 알죠. 또 쟁점이 된 게 뭐가 있습니까.” —업무추진비 중 97%를 ‘술값과 밥값’으로 지출했답니다. “우선 업무 외에 쓴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술을 전혀 못합니다. 맥주 한 잔도 마실 줄 몰라요. 임기 초부터 비판이 많으니 관련 단체 인사, 전문가, 학자들을 만나야 할 것 아닙니까. 점심때 틈날 때마다 만나 밥 먹으면서 인권 현안에 대해 듣고 입장을 설명했어요. 소통하려면 그렇게라도 해야죠.” —독립기관을 대표하면서 현 정부의 눈치를 봤다는 말도 있습니다. “여기 처음 올 때 세운 방침이 ‘업무 추진에 있어 헌법, 국가인권위원회법, 유엔(UN)인권규범을 따른다’는 겁니다. 인권에 대한 구체적인 인식은 전 국민이 다 다릅니다. 여야 모두 다른 개념을 두고 충돌하니, 법을 기준으로 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닙니까. 국가인권위원회 업무는 인권위원회법과 원칙에 따라 해야죠. 위원장 마음대로 하면 되겠습니까.” “몸 아픈 운동가 데리고 시위한 것도 문제” —2010년 장애인의 점거농성 당시 전기와 난방을 끊어 활동가 한 명이 급성폐렴으로 사망한 일이 있었습니다. “우선 그 일에 대해선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분명히 말씀드릴 것은 인권위가 전기와 난방을 끊은 적이 없습니다. 현재 이 건물 관리는 관리업체인 포스코에서 하고 있어요. 제 임기 중 장애인 관련 단체가 점거시위 한 날이 현재까지 총 79일입니다. 2001년 인권위 출범 때까지 다 합치면 420일 정도 됩니다. 저희가 전기와 난방을 끊고 할 상황이 아니에요. 원래 6시가 되면 난방이 꺼지는데, 점거됐다고 무작정 난방을 계속할 수도 없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돌아가신 분도 처음에 안에서 문을 잠그니 인권위 직원이 접촉을 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아프다고 해서 구급차가 왔습니다. 입원을 했는데, 얼마 뒤 나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아직 회복이 덜됐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분이 성치 않은 몸으로 국회 앞 집회에 참석했다가 병세가 급격히 악화돼 돌아가셨다고 들었어요. 정말 안타깝지만, 몸 아픈 분 데리고 시위한 것도 상식은 아니라고 봅니다.” —내부 설문조사 결과 인권위 직원의 약 90%가 연임에 반대했다고 합니다. “설문결과는 정말 유감입니다. 인권위 직원이 총 185명인데, 보도내용에 따르면 설문은 총 159명을 대상으로 진행됐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중 86명이 응답했고, 항목별로 73~78명이 반대했습니다. 설문은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인식이 크게 달라지는데, 이 결과를 두고 직원 90%가 반대했다고 하는 건 과장 아닐까요. 독자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2010년 올해의 인권상 수상자들이 상을 거부하며 사퇴를 촉구한 일이 있었습니다. “2개 단체가 거부했습니다. 두 단체는 한 달 전에 직접 신청을 해 놓고 본인들이 거부했어요.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공모전 수상자 일부 거부 사태에 대해선 본인의 의사이니 어쩔 수 없지만 아쉽게 생각합니다.” —연임 당시 새누리당이 반대 입장을 청와대에 전달해 당·청 충돌 조짐까지 일었습니다. 새누리당에서 사전에 언질은 없었습니까. “전혀 없었습니다. 할 말은 많지만, 정당에서 한 일을 두고 지금 제가 이런저런 말을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재임 중 인권위의 국제적 위상이 추락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사실과 다릅니다. 취임 초 ICC(국가인권기구국제조정회의) 의장직을 포기한 것은 준비가 제대로 안 된 것이 원인이었습니다만, 재임 중에 ICC에서 위원회가 맡은 역할을 보면 금방 알 것입니다. 가령 승인소위 위원, 집행이사회 위원, 기업과 인권 실무그룹 아태지역 공동대표, 노인인권실무그룹 아태지역 대표 등 모두 제 임기 중 수행했습니다. 작년엔 유엔인권최고대표사무소가 위원회에 요청한 유엔 인권조약기구 시스템 강화를 위한 국제회의, 정보인권을 주제로 한 아셈인권세미나도 개최했습니다.” “MB와 전혀 몰랐던 사이” —이명박 대통령과는 예전부터 친분이 있었습니까. “예전엔 전혀 모르는 사이였습니다. 인권위원장 내정된 것도 언론보도를 통해 알았어요. 개인적으로 만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대학 공식 행사 때 특강을 하러 갔다가 한 번 악수한 일이 있고, 후보 시절엔 공개석상에서 사이버대 관련 브리핑 한 번 한 게 전부입니다.” —누가 추천한 인사였습니까. “저도 그게 궁금합니다. 정동기(鄭東基) 당시 민정수석이 한양대 인맥이라고 하기에 저도 그런가 했어요. 그런데 저와 그럴 만한 사이도 아니고 당시 추천할 만한 상황도 아니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3년 반 임기 중 가장 큰 난관은 무엇이었습니까. “처음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인권에 대한 이해가 이른바 사회지도층과 국민 모두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이란 것을 매일 절실히 느꼈습니다. 어떤 분들은 ‘우리나라가 민주주의를 이만큼 이뤘는데 인권이 무슨 문제가 되느냐’라는 분이 있는가 하면 ‘우리 사회 인권이 현병철이가 와서 없어졌다’고 합니다. 서로 극단을 달려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습니까. “우리나라를 다른 측면에서 보면 아직 ‘인권의 사각지대’가 많습니다. 현장 방문을 다녀 보면 인권이 뭔지도 모르고 단 한 번 ‘나 억울하다’고 말도 못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 분들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게 가장 우선 아닐까요.” —기억에 남는 구체적인 사례가 있습니까. “얼마 전 종로 쪽에서 요양보호사들을 만난 적 있습니다. 위원장이 간다고 하니까 전국에서 20~30명이 모였어요. 근로조건이 얼마나 열악한지 그분들 얘기를 듣는데 눈물이 나더라고요. 처우에 대해 권고를 했습니다. 그리고 부산에선 다문화가정 여성분들을 만났는데, 한국에 시집와서 겪는 어려움을 말하는데 앉아 있기 부끄러울 정도였어요. 희귀병 환자들도 있습니다. 사람이 적으니 사회가 큰 관심을 갖지 않고 있습니다. 군인과 노인 인권 문제도 아주 심각합니다. 이러한 분들을 위해 특별팀을 통해 정책을 만들고, 직권조사를 하거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등 여러 방면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法의 본질이 곧 인권” —인권에 대한 서로 다른 인식을 어떻게 연결해야 할까요. “큰 틀에서 방향을 잡아야 합니다. 저는 이젠 생활밀착형 인권이 중요하다고 봐요. 인권은 원래 인간의 자유를 강조한 자유권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면 사회권이 되죠. 생활밀착형 인권이 바로 사회권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봅니다. 진보 성향의 인권학자들 논문에서도 이런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어요.” —생활밀착형 인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까요. “우리나라의 민주화 역사를 보면 민주주의와 인권이 동시에 달성됩니다. 선진국에선 민주주의, 법치주의, 인권 세 가지가 함께 갑니다. 법치주의가 실현된 나라에선 자유권에 대한 사회적 방어막이 어느 정도 형성돼 있습니다. 그래서 무게중심이 사회권으로 옮아가게 되죠. 저는 그게 생활밀착형 인권이라고 봅니다.” —결국 어떤 사람을 어떻게 도와줄지 기준을 세워야 하는데요. “인권 문제가 굉장히 감성적입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 무조건 어려운 사람 돕자고 호소하면 여론에 끌려갈 수밖에 없어요. 인권위는 국가기관입니다. 법과 규정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어요. 법이 만들어진 이유가 뭡니까. 과거 전제 군주가 자의적으로 지배하던 것을 못하게 하려고 만든 게 법입니다. 법의 본질이 곧 인권이에요.” —법에 대해 여러 갈래의 해석이 나올 땐 그 기준을 결국 위원장이 결정하는 것 아닙니까. “제가 아니라 인권위원들이 전원회의에서 합니다. 제가 대표자니까 책임은 제게 있지만, 결정은 여러 위원이 협의합니다. 요즘엔 가급적 제 의견을 얘기 안 해요. UN이 권장하는 인권접근의 원칙 중 ‘비(非)정치적’이란 조건이 있습니다.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해 인권을 이용돼선 안 된다는 의미죠. 인권위가 일을 진행하려면 정치적인 힘은 있어야겠지만, 이를 정치적 수단으로 써선 안 됩니다.” —취임 일성으로 ‘북한인권’을 내걸었는데요. “초창기 상임위원 중 한 분이 북한 인권에 대해 ‘해도 욕먹고 안 해도 욕먹는다’고 하더군요. 정치적 지향점이 다르다고 인권 문제도 나눠서 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북한 인권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위해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에 의뢰해 로드맵을 만들었고, 인권 탄압 실태에 대한 사례도 분석했습니다. 헌법상 대한민국 국민인 북한 주민을 바로 앞에 두고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잖아요.” “난 중국 비자도 나오지 않아” —북한 주민의 인권 개선을 위해 어떤 방안이 있습니까. “가장 기본적인 문제가 굶주림인데, 이는 생명권과 직결된 문제이니 인도적 지원은 계속 이뤄져야 한다고 봅니다. 국민 세금으로 지원한 물자가 다른 용도로 전용되지 않게 하기 위해선 투명성을 높여야 하겠죠. 북한 인권 실태에 대해 정확히 알리고, 전 세계 양식 있는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구체적인 방법이 있습니까. “과거 소련이 UN인권선언문이 국민에게 알려지는 것을 막으니까, 전 세계 인권운동가들이 지속적으로 시도해 결국 문이 열렸잖아요. 북한도 마찬가지입니다. UN을 중심으로 범세계적인 운동이 전개된다면 인권 상황이 크게 개선될 것입니다. 지금 미국, 일본 등에서 세미나와 포럼을 통해 이를 알리고 있습니다.” —중국에선 시도 안 합니까. “중국 비자가 안 나옵니다. 몇 번 시도했는데, 중국 측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다시 시도할 것입니다.” —북한 인권 문제가 세계적 사안이라고 봅니까. “가장 잔혹한 인권침해 사례가 나치의 아우슈비츠 학살입니다. 집단수용소가 가장 잔인한데, 나치는 이미 역사 속 이야기가 됐죠. 그런데 북한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민족의 수치이자 부끄러운 얘기입니다. 전 세계 대부분의 사람이 공감하는 내용인데, 왜 국내에선 정치적 사안으로 바뀌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인권과 통일문제는 따로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기본적 존엄성인 인권이 전제돼야 통일해도 문제가 없겠죠. 북한에도 인권위원회가 세워져야 합니다.” —그게 가능할까요. “얼마 전 유럽연합(EU) 의회 대표단을 유럽에서 만났을 때 북한에 가면 꼭 말해 달라고 했어요. ‘북한이 인권위원회 만들면 우리가 어떻게든 도와주겠다’고. 후에 EU 의원이 북한의 상당히 고위층에 이 말을 전했는데, 긍정도 거절도 안 하더라는 겁니다. 계속 시도한다면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닐 거라 봅니다.” ‘3세대 인권’ —두 번째 임기에서 가장 중점을 둔 분야는 결국 북한 인권인가요. “북한 인권도 계속하면서 국내 인권 현안도 개선해야 하겠죠. 인권위 중장기 계획에 따라 진행 중인데, 노인, 장애인, 군인, 학생 등 분야에 대한 업무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또 1세대 자유권과 2세대 사회권에 이어 3세대 인권이란 게 있습니다. 중국에서 넘어온 황사는 국내에서 해결한다고 되는 게 아니듯 연대권(連帶權)이 필요합니다. 다국적기업의 노동착취를 막기 위해 기업인권이란 개념도 나왔죠. 표현의 자유와 연결된 정보권도 중요합니다.” —만약 이번 대선에서 정권이 바뀐다면 위원장 사퇴 요구가 더욱 거세질 듯합니다. “인권위의 생명은 독립성입니다. 대통령과 전혀 무관한 저를 두고도 ‘독립성이 훼손됐다’고 비난하던 분들이 ‘대통령 바뀌면 사표 내겠느냐’고 묻습니다. 독립성을 누가 무너뜨리는 겁니까. 인권위를 정말 모르는 거죠.” —3년 임기를 다 채울 작정인가요. “인권위의 진정한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해야죠. 1년에 약 6만 건의 민원, 상담, 진정이 들어오는데, 제 취임 후 50% 정도 늘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가장 힘없고 어려운 사람들이 이곳저곳 호소하다가 마지막에 오는 곳이 인권위입니다.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한, 마지막 희망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노력하겠습니다.” —임기 후 계획이 있습니까. “저는 법학을 공부했고, 인권위원장을 했습니다. 직위가 없더라도 기회가 되는 대로 ‘인권전도사’ 활동을 하고 싶습니다. 특히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해 노력할 계획입니다.” 인터뷰는 예상된 시간을 훌쩍 넘어서까지 진행됐다. 현 위원장은 수많은 의혹에 대해 모두 해명하려고 했고, 자신의 인권 철학에 대해 역설했다. 그의 ‘전쟁 아닌 전쟁’이 어떻게 마무리될지는 누구도 모른다. 결국 판단은 독자의 몫이고, 평가는 역사의 몫이다.⊙
월간조선 2012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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