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취재] 북한 지하교회 지도자를 찾아서
“인민군 장교나 국가안전보위부 요원들로부터 성경 요청 늘어”
脫北 또는 중국을 방문한 북한 지하교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쳐서 다시 북한으로 보내는 중국 내 움막교회 최초 공개
북한의 한 道에서만 약 8만권의 성경 압수.
북한의 한 道의 道民 중 34%가 기독교 접해
김정우 월간조선 기자 (hgu@chosun.com)
편집자 注: 기사에 등장하는 모든 人名(인명)과 地名(지명)은 취재원과 탈북자의 안전을 위해 가명 또는 익명을 사용했다. 金·李·朴(김·이·박) 등의 성도 모두 실제 성과 다르다.
중국 지린성 한 야산에 위치한 움막교회. 이곳에선 북한 지하교인들을 대상으로 성경공부를 시켜 다시 북한으로 들여보낸다
“표시지점에서 100m 올라와 우측 길로 30m, 소나무 숲 사이… ‘宋(송) 사장’ 말대로면 여기 쯤인데….”
길을 안내하던 ‘金(김) 선생’이 멈춰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송 사장’과 통화를 몇 차례 시도했지만, 통화권을 벗어났다는 안내 메시지만 나온다. 도심을 떠나 비포장길을 달려온 지 두 시간, 사방엔 온통 울창한 숲밖에 보이지 않았다. 오후 5시, 해는 이미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그래도 멀리서 오셨는데, 마지막으로 이쪽으로 한 번만 더 가봅시다. 오, 주님….”
다시 발걸음을 뗀 ‘김 선생’이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정보는 턱없이 부족하고 앞은 첩첩산중이다.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가 쉬울 듯했다.
10분 후, 그의 기도가 통했는지 우리는 목적지를 찾아낼 수 있었다. 깊은 산속에 작은 움막이 있었고, 그 뒤쪽엔 한 노인이 겁에 질린 모습으로 우리를 경계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걱정 마세요. 지난주에 아랫동네서 뵈었던 적 있죠?”
김 선생이 반갑게 인사하자 노인이 숨을 내쉬며 답했다.
“난 또, 날 잡으러 온 줄 알았어. 세 번이나 잡혔다 죽을 각오로 도망쳤는데, 이번에 잡히면 정말 끝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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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막교회 내부 모습. |
10월 ○일 오후 5시30분, 중국 지린성(吉林省) ○○시에서 남쪽으로 60여km 떨어진 곳의 한 野山(야산). 우리는 북한 지하교인들의 ‘비밀 교회’에 도착했다. 그곳을 지키던 노인은 양강도 ○○시 출신의 탈북자였다. ‘선생’ ‘사장’ ‘회장’ 등은 외국인 선교가 금지된 중국에서 비밀 선교사를 부르는 호칭이다.
현재 북한의 지하교회는 평양에서부터 중국 접경에 이르기까지 거의 全(전) 지역에 분포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은 북한의 ‘공식적’ 기독교 조직인 ‘조선그리스도교연맹’과는 다른 형태로, 내부 감시를 피해 비밀리에 결성된 가정교회들을 의미한다.
對北(대북) 전문가들은 “지하교인 수가 최소 10만명이 넘으며, 현재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對北(대북) 선교단체인 ‘모퉁이돌 선교회’에 따르면, 1995년 이후 최소 3720명이 처형됐을 정도로 북한 지하교인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지하 가정교회의 ‘지도자’들 중 상당수는 중국에서 기독교를 접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중국 접경의 선교사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한 뒤, 성경책, 찬송가, MP3(성경), 라디오, CD 등을 공급받아 북한으로 다시 들어간다. 이들은 신앙생활이 발각될 경우 수용소로 보내지거나 처형을 당하게 된다.
필자는 북한 지하교인들을 직접 만나기 위해 10월초 중국-북한 접경지역을 다녀왔다. 랴오닝성(遼寧省) 단둥(丹東)에서부터 지린성 옌지(延吉)에 이르기까지, 各地(각지)를 돌아다니며 북한 지하교인과 그들을 지원하는 선교사들을 만났다. 현지에서 비밀리에 활동하고 있는 선교사들은 한국인을 비롯해 조선족, 미국인 등 다양한 국적을 가지고 있었다.
취재과정은 첩보조직의 비밀 작전을 방불케 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일정이 모두 바뀌었다. 숙소 예약은 모두 취소됐고, 이동경로는 하루에도 몇 번씩 변경됐다. 만나는 취재원들은 모두 가명을 썼고, 사진 촬영은 철저히 통제됐다. 수시로 전파감지기를 꺼내 도청이 없는지 확인해야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북한 지하교인의 생존과 필자의 안전을 위해서’였다. 이들은 철저하게 點組織(점조직) 형태로 연결돼 자신과 구성원들을 보호했다. ‘대북 선교’는 이들에게 ‘전쟁’이나 다름없었다.
“全 취재일정 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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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지린성 투먼(圖們)과 북한 온성군 南陽(남양)구를 잇는 ‘도문대교’. 중국에서 붙잡힌 수많은 탈북자들이 이 다리를 통해 北送됐다. |
10월 ○일 오후 4시30분, 중국 옌지 공항에 도착했다. 한국은 초가을인데, 옌지는 이미 겨울이 시작되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여름 옷만 몇 벌 가지고 왔는데, 새벽이면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다. 결국 두툼한 외투부터 한 벌 사 입어야 했다.
옌지의 첫인상은 날씨처럼 ‘스산함’ 그 자체였다. 취재 전 전달 받은 예상 일정은 출입국 날짜와 공항에서 찾아야 할 영문 이니셜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바뀌기 일쑤였다. 공항에 마중 나온 조선족 청년 리철혁(가명)씨는 필자에 대한 정보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도 “오후 4시에 공항으로 가 ‘M○○’란 팻말을 들고 있으라”는 내용만 그날 아침에 전달 받았다고 한다. 옌지에서 첫날 일정이 시작되는 줄 알았는데, 리씨는 필자를 차에 태우더니 곧바로 ○○시로 이동했다.
○○시에 도착, 한 호텔 앞에 차를 세우자, 바로 옆에 주차해 있던 차에서 사람들이 내렸다. 한국에서 미리 연락이 됐던 ‘金(김) 회장’과 ‘李(이) 사장’이었다. 옌지의 숙소에 예약을 취소하려고 전화기를 들자, ‘김 회장’이 급히 손을 잡고 막았다.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보안’입니다. 아마 국제 로밍이 돼있을 텐데, 추적당할 수 있습니다. 일단 이 전화를 사용하시죠. 그리고 여기 오기 전 계획했던 일정은 모두 취소됐습니다.”
그날 밤 필자와 일행은 세 명의 조선족을 만났다. 모두 북한을 오가며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로, 갈 때마다 한국에서 받은 ‘물자’들을 ‘배달’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물자’들은 쌀, 과자, 신발, 비누, 의약품 등 북한 주민들에게 꼭 필요한 생필품들이다. 가장 중요한 배달 물품은 ‘성경’이다. 정식으로 가져갈 경우 세관에서 바로 압수되기 때문에, ‘비공식적’으로 入北(입북)할 때 주로 배달된다. ‘비공식’이란 몰래 강을 건너 북한으로 넘어가는 밀입국을 말한다.
‘姜(강) 선생’으로 불리는 한 조선족이 ‘김 회장’에게 보고를 시작했다.
강 선생: “함경남도 ○○읍에 ‘洪(홍) 목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60대 후반이고, 돌아가신 아버지로부터 안수를 받았죠. 같이 돕는 ○○씨와 ○○씨는 모두 50대 후반으로, 이들의 부모 세대로부터 신앙을 물려받았습니다.”
김 회장: “홍 목사와 함께 예배 드린 적이 있습니까.”
강 선생: “예. ○○읍에서 비밀리에 예배 드리는 것을 봤고, 함경북도 ○○시에 갔을 땐 함께 예배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김 회장: “어떤 형식으로 예배를 드리던가요.”
강 선생: “○○읍에선 식사 시간에 소규모 단위로 모여 조용히 예배를 드립니다. ○○시에선 밤에 바닥에 누워 천장을 보며 함께 찬송과 성경을 봉독했습니다. 홍 목사는 성경을 거의 외우다시피 합니다. 그날도 신약성경 고린도전서 7장 내용을 가지고 설교했는데, 중국으로 돌아와서 확인해 보니 정확하게 외우고 있더군요. 다만 문장은 많이 달랐습니다. 아마 해방 전에 사용되던 성경 문장 같아요.”
김 회장: “지금까지 어떤 지원을 했고, 앞으로 어떤 지원을 해야 할까요.”
강 선생: “지난 10년간 제가 여러 차례 식량과 물품을 전해줬지만, 홍 목사는 항상 사양하다가 겨우 받습니다. 그는 먹을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 성경을 보내달라고 합니다.”
한 시간에 걸쳐 진행된 회의 후 그들은 홍 목사에게 의약품과 성경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또 건강 상태가 심각한 홍 목사를 직접 중국으로 데리고 나와 의료 지원을 비밀리에 추진하기로 했다.
“…가 죽어야 우리가 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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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지하교회 신자들이 비밀 처소에 모여 성경책을 가운데 놓고 기도하고 있다. |
강 선생은 자신이 직접 지원해온 북한의 여러 지하교인들을 소개했다.
“함경북도 ○○에 두 가정이 있습니다. 각각 4명과 6명으로 가족끼리 모여 예배를 드립니다. 바로 옆인 ○○에도 두 가정이 있고요. 조금 전 말한 홍 목사가 있는 ○○읍엔 제가 아는 신자만 20명이 넘습니다. 그 외에도 함경남북도 각 지역에 한두 가정씩 돕고 있어요.”
―북한의 지하교인 신자 수가 얼마나 될 것으로 예측합니까.
“제가 전국을 돌아다니며 통계를 내는 것도 아니고, 그분들이 워낙 비밀리에 전파되고 있어서 그 수를 알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외국인’인 제가 직접 접촉하는 지하교인만 200명이 넘는다는 사실입니다.”
―함경도의 최근 동향은 어떤가요.
“정말 이젠 끝까지 간 느낌이에요. 워낙 중국과의 왕래가 잦기 때문에, 정보가 금방 들어옵니다. 이젠 대놓고 ‘…가 죽어야 우리가 살지’, ‘…가 빨리 없어져야 해’라고 합니다. 서로 앞의 주어는 생략하지만, 누구인지는 모두가 다 알고 있습니다. 제가 20년 넘게 북한을 드나드는데, 예전엔 절대 불가능한 대화였죠.”
강 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 내부는 현재 불확실한 정보들이 서로 비밀스럽게 전파돼 다양한 루머들이 생산되고 있다고 한다. 그는 “金正日(김정일) 사망설, 평양에서의 內戰(내전)설, 가짜 김정일설 등 사실인지 거짓인지 모를 소문이 무성하다”며 “중국과 남한을 통해 들어온 소식이 와전된 사례도 많다”고 했다.
함께 자리한 ‘李(이) 선생’은 1990년부터 대북 선교활동을 해왔다. 그는 직접 북한 북부 지역을 돌며 성경을 가르쳤다고 한다.
“1990년 무렵만 해도 물 떠놓고 손 모아 비는 기독교 신자가 있었습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기는 했는데, 기독교를 그저 祈福(기복)의 종교로만 이해한 거죠. 그런 분들 서너 명씩 모아 산에 올라가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최근 지하교회의 예배 방식은 남한 교회의 ‘열린 예배’ 방식과 비슷해졌다고 한다. 이 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예배가 사도신경 고백―대표자 기도―성경 통독―소감 발표―주기도문 순서로 진행된다.
조직 구성은 남한 교회의 ‘구역’과 개념이 비슷하다. 사람이 많이 모이면 발각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최대한 작은 규모로 예배 모임을 갖는다. 그리고 구역 지도자끼리 한 달에 한 번 정도 모임을 따로 가진다.
“워낙 비밀리에 전파되고 있기 때문에, 예배 방식이나 조직 구성이 지역마다 크게 다릅니다. 얼마 전 한 지도자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15명이 함께 예배 드리고 헤어졌다고 보고하는 겁니다. 깜짝 놀라서, 다시는 그렇게 모이지 말라고 했죠.”
軍·보위부 타깃 ‘전략적 선교’
최근 북한의 특권층들에 대한 선교가 확대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날 모인 조선족 선교사들은 한목소리로 최근 軍(군) 장교나 국가안전보위부 요원 등 북한 주요 인사로부터 성경 요청이 꾸준하게 증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 조선족 선교사의 증언이다.
“우리가 성경과 함께 기독교 영화 CD도 함께 보급합니다. 그런데 제가 보낸 것 중 50장이 군대로 갔습니다. 서로 돌아가면서 보다가 자꾸 필요하니까 더 달라고 하는 거죠. 뭔가를 몰래 하는 것은 바깥보다 군 내부가 오히려 편할 수가 있어요.”
보위부의 경우 지하교인 수사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기독교 관련 자료들을 접하게 된다. 북한은 이미 상당수의 성경을 압수한 것으로 전해진다. 중국 랴오닝성의 접경 지역에서 활동 중인 한국인 선교사 朴(박)모씨는 북한의 한 道(도)에서만 약 8만권의 성경이 압수됐다고 주장했다.
“제가 직접 북한 내부의 한 유력 인사를 통해 확인한 결과입니다. 어느 도라고 밝힐 수는 없지만, 자체 조사 결과 약 34%의 도민이 ‘기독교를 접했다’는 통계가 나왔다고 해요. 실제로는 훨씬 더 되겠죠.”
―한 도에서 34%라면 믿기 어려운 숫자인데요.
“정확한 통계입니다. 그 도에선 중국에 다녀온 사람이 50% 이상입니다. 절반 이상의 주민이 ‘탈북’ 또는 ‘出國(출국)’을 했다는 의미인데, 충분히 가능한 결과입니다.”
북한 핵심 세력을 목표로 한 선교는 보다 치밀한 준비를 필요로 한다. 보위부에서 2중 첩자를 보내 선교활동 자금을 받아 가고 지하교인을 색출하기 때문이다. 在中(재중) 선교사 박씨의 증언이다.
“보위부의 지령을 받은 가짜 탈북자들이 중국으로 와서 성경공부를 이유로 우리에게 접근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들의 목적은 선교에 필요한 돈을 받아서 보위부로 빼돌린 다음, 진짜 비밀 지하교회 조직 명단을 확보해 그들을 체포하는 것입니다.”
박씨는 “이들의 작전은 역효과를 불러오는 경우가 있다”면서 “보위부 요원들이 ‘진짜’ 지하교인화되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성경을 함께 공부하던 젊은 탈북자 친구가 하루는 제게 할 말이 있다고 합니다. 저희는 느낌이 대충 옵니다. 이유가 셋 중 하나거든요. 첫째, 남한이나 동남아 국가로 가고 싶다. 둘째, 이성관계 상담. 셋째, 자신이 사실은 정부 관계자다. 그 친구는 세 번째였습니다.”
―실제로 그렇다면 위험한 상황 아닙니까.
“제가 먼저 당당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정부 관계자는 내가 수없이 만나 왔다. 할 말 있으면 하라’고. 그러자 이 친구가 명단을 내놓습니다. 중국에 있는 탈북자와 남한조선족 선교사들의 명단이었죠. 계획적으로 제게 접근했던 겁니다.”
박씨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 보위부 요원이었던 ○○씨는 계획적인 접근을 시작했지만, 6개월 동안 성경공부를 하면서 마음을 돌렸다. ○○씨는 선교사 박씨에게 이렇게 고백했다고 한다.
“내가 예수쟁이들을 잡으러 이곳에 왔지만, 직접 접해 보고 너무 놀랐습니다. 全(전) 조선 땅에서 이렇게 따뜻하고 진실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너무나 많은 것을 몰랐던 것 같습니다.”
한국 선교사들과 북한 정부는 그야말로 ‘선교 전쟁’ 중이었다. 박씨는 보위부 요원과 함께 군 장교, 방송국 고위 간부의 자녀 등 수많은 고위층 인사들이 선교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전했다.
“이들은 다른 이들보다 더 긴 시간이 소요됩니다. 처음 3개월은 그냥 건성으로 대답하고 배웁니다. 배가 고파 왔으니 일단 먹고 보자는 것이죠. 하지만 그러다 진정한 진리를 깨닫게 되고, 조국에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을 갖게 됩니다. 결국 북한 정권을 무너뜨리는 가장 큰 힘은 기독교입니다.”
비밀 接線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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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북한 지하교회 신자가 성경 구절이 녹음된 MP3를 듣고 있다. 왼쪽 가슴에 달린 김일성 배지가 눈에 띈다. |
10월 ○일 오전 7시, 아침 식사를 위해 한 식당을 찾았다. 함께 식사하기로 약속한 김 회장과 이 사장은 아직 도착 전이었다. 맞은편 테이블에 한 중년의 외국인이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우연히 그의 통화를 엿들었는데, 내용은 주로 북한의 기독교 가정을 돕기 위해 무언가를 준비하는 내용이었다. 잠시 후 도착한 김 회장이 그 외국인을 반갑게 맞으며 필자에게 소개했다.
“이분은 저희 단체에 재정 문제를 도와주고 있는 D씨입니다. 미국인으로, 현재 국제적인 식품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죠.”
소개를 마친 후 이들은 북한 내부의 주민들에 대한 지원 방법에 대해 논의했다. 김 회장은 최근 자신이 직접 다녀온 북한의 동향을 설명했고, D씨는 여러 방식의 지원 방법을 제안했다.
D씨는 북한에서 구해온 ‘조선행정구역도’를 펼쳐 들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조선인민군지도출판사에서 발행한 지도로, 지도 위편엔 ‘조선 인민의 철천지 원쑤인 미제 침략자들을 소멸하라!’란 글귀가 적혀 있었다. 다행히 D씨는 한글을 읽지 못했다.
오후엔 D씨와 함께 두만강 접경지대를 찾았다. ‘凉水鎭(양수진)’이란 지역에 이르자 끊어진 다리 하나가 나타났다. 일명 ‘穩城斷橋(온성단교)’라고 불리는 곳으로, 일본군이 패망 직전 파괴한 것으로 전해진다. 두만강 건너 북한 온성군이 보였다. 다리 아래로 물이 흐르고 있었지만, 깊어 보이진 않았다. 워낙 가까운 곳이라, 겨울이 되면 수많은 북한 주민들이 강을 건너 중국으로 넘어온다고 한다.
끊어진 다리 끝에 서서 동편을 바라보니 멀리 높은 탑이 우뚝 서 있었다. 金日成(김일성)의 항일투쟁을 기념해 지어진 ‘왕재산 대기념비’다. 밤이 되면 강 건너엔 불빛 하나 보이지 않지만, 기념비 꼭대기에 위치한 횃불은 크게 타오르고 있다.
조선족 청년 리철혁(가명)씨는 “한쪽은 저렇게 캄캄한데, 저 횃불은 끝까지 타오르는 이곳이 바로 북한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현장”이라고 했다.
“북한 주민들은 어둠 속에서 계속 죽어가고 있지만, 김일성을 기념하는 횃불이 저렇게 활활 잘 타오르고 있네요. 역사의 비극이자 저주입니다.”
끊어진 다리를 떠나 한참을 달리던 중, 이 사장이 갑자기 차를 세웠다.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 차에서 내렸다. 화장실이 급한 줄로만 알았는데, 잠시 후 차 뒤쪽을 보니 길 건너 편에 서 있는 차에서 내린 한 남자와 대화 중이었다. 무슨 일이냐는 필자의 질문에 김 회장이 짧게 대답했다.
“접선. 문 열지 말고 가만히 계세요.”
왕복 2차로 도로 양편에 서로 차가 세워져 있고, 한쪽 차에서 박스 몇 개가 내려졌다. 그 중 일부가 필자가 타고 있던 차에 실렸다. 북한으로 전해질 ‘물자’가 배분되는 순간이다. 그들은 물자를 전달한 후, 이 사장에게 몇 가지 정보를 알려주고 곧바로 사라졌다. 접선 소요 시간은 3분 정도였다.
그날 저녁, 이 사장은 접선 과정에서 입수한 북한의 내부 동향을 필자에게 알려줬다. 최근 평양에서 일어난 북한 핵심층들의 권력다툼과 김정일의 건강 상태 등이었다. 확실한 증거가 없어 확인은 불가능했지만, 꽤 신빙성이 있는 정보였다.
조선족 선교사 “내가 직접 가르친 지하교인만 300명 넘어”
10월 ○일 오후 3시40분, 지린성의 한 호텔 앞에서 우리는 택시에 올랐다. 행선지는 비밀에 부쳐졌다. 바로 북한 지하교인들이 탈북해 머무르고 있는 在(재)중국 북한 지하교회였기 때문이다.
‘金(김) 선생’이라 불리는 30대 여성이 동행했다. 그녀는 자신이 지금까지 만나 온 탈북자들과 북한 지하교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필자에게 들려줬다.
“탈북자를 돕다가 북한 보위부의 조사도 받고 중국 감옥에도 갇혔습니다. 그렇게 당하고 나니 더 용기가 생기더라고요. 이젠 그 무엇도 두렵지 않습니다. 죽으면 죽는다는 마음으로 이 사역을 계속할 거예요.”
김씨는 탈북 또는 중국을 방문한 북한 지하교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쳐서 다시 북한으로 보내는 조선족 선교사로, 2000년경부터 탈북자 지원 사역을 시작했다. 어릴 적 할아버지의 신앙을 이어받은 그녀는 거의 매일같이 북한을 드나들었다. 친척이 있는 곳은 모두 돌았고, 친척이 없으면 자신이 중국에서 가르쳤던 지하교인에게 연락해 가짜 등기를 등록하게 했다.
그녀는 지금까지 자신이 가르친 탈북 지하교인만 300명이 넘는다고 했다. 직접 명단을 작성해 ‘관리’한 인원이 그 정도고, 지나가며 도운 사람은 수천 명에 이른다고 한다.
“몇 달 전 한 중국 남자가 제가 돌봐줬던 북한 여성을 데리고 저희 집에 들이닥쳤어요. 인신매매를 한 것 같은데, 다짜고짜 저에게 돈을 내놓으라고 행패를 부렸습니다. 저희 남편은 어리둥절해서 정신을 못 차렸고, 결국 제가 ‘너도 나도 같이 감옥 가자’며 맞섰죠.”
3년 전에는 북한을 방문했다 보위부에 잡혀 곤욕을 치렀다. 이미 그녀에 대한 정보가 북한에 있어 한 달 내내 조사를 받아야 했다. 조사 내용은 “왜 성경을 가르치는지”, “언제 어디서 모이는지”, “몇 명의 북한 기독교인을 관리하고 있는지”, “지하교회가 어디에 있는지” 등이었다고 한다.
“보위부 사람이 절 보자마자 책상을 내리치며 ‘아줌마! 정신 있어?’라고 고함을 쳤습니다. 처음엔 당황도 되고 겁도 났죠.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 그냥 귀 막고 기도만 했습니다.”
오전 7시부터 밤 10시까지 하루 종일 계속된 조사는 그녀의 힘을 다 빼놓았다. 보위부 건물 밖에선 그녀의 ‘제자’ 5~6명이 매일 진을 치고 기다렸다. 보위부 요원들이 쫓아내려고 했지만 그들은 “조사 방해 안 하고 그냥 밖에 서 있겠다”며 버텼다고 한다.
한 할아버지는 김씨를 위해 직접 콩죽을 만들어 왔다. 첫날부터 다른 제자들과 함께 김씨를 쫓아다녔지만, 그녀가 “위험하니 제발 멀리 있으라”고 간청해서 매일 100m쯤 떨어진 곳에서 그녀를 따라다녔다고 한다. 결국 마지막 조사를 받고 떠나는 날, ‘김 선생 쓰러질까 싶어’ 직접 콩죽을 들고 찾아온 것이다.
마을잔치 후 15명 모여 비밀예배
2007년 ○월 ○일, 갑자기 사복을 입은 공안 10여명이 김씨 집에 들이닥쳤다. 非法入境者(비법입경자·탈북자)를 도왔다는 죄명이었다. 이미 소문이 날 만큼 크게 했던 활동인지라, 별수 없이 잡혀갈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년형을 받고 헤이룽장성(黑龍江省)의 한 형무소에 갇혔지만, 우여곡절 끝에 형기를 앞당겨 나올 수 있었다.
“감옥에 들어가서도 동포들에게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얼마 전 옥중 동료였던 한 분이 출소해 직접 인사를 전하러 왔더군요. 지금은 열정적인 기독교 신자가 됐습니다.”
20년째 선교 활동을 해오고 있는 조선족 선교사 이 선생은 북한의 한 마을 잔치에 다녀온 일화를 전했다.
“작년 중국 접경 지대의 한 마을을 찾아갔습니다. 지하교인 분들과는 이미 이야기가 돼 있었지만, 다른 마을 주민들은 그저 중국에서 온 손님인 줄로만 알았죠. 북한에선 개 한 마리가 80원 정도 하더군요. 가서 보신탕을 해먹었는데, 북한 분들이 워낙 못 먹고 지내서 그런지 제대로 넘기지를 못했습니다. 속에서 받아주질 않는다며 반 사발 먹고 모두 남겼습니다.”
결국 250원짜리 노루 한 마리를 사왔다. 기름기 없는 고기를 골라 육회로 먹었다. 보신탕은 느끼해서 못 먹던 주민들이 그릇을 다 비웠다고 한다. 잔치가 끝난 후 주민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였다. 정리를 한다는 이유로 15명이 남았다. ‘정리’는 핑계였고, 실제 목적은 ‘예배’였다. 이씨의 아내가 망을 보고, 15명이 한자리에 모여 기도했다. 이씨는 당시 예배 광경을 이렇게 회상했다.
“정말 뜨겁게 기도하고 찬양했습니다. 새벽부터 찾아온 사람들이 서로 떠나기 싫어 웃고 울었습니다. 그 사람들의 소원은 단 한 가지입니다. 그저 배불리 먹는 것도, 민족의 위대한 통일도 아닙니다. 다만 마음 놓고 예배 한 번 드리는 것이죠. 그것이 그들에겐 바로 천국입니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듣는 동안, 필자가 탄 택시는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중국 동북부의 전형적인 시골마을이었다. 장터에서 탈북자들을 위해 사과 두 박스를 50위안(약 9000원)에 샀다.
약 10분 동안 비포장길을 달려 한 시골집에 도착했다. 마당에 탈북자로 보이는 세 청년이 보였다. 두 명은 커다란 천을 접고 있었고, 한 명은 메마른 짚단을 들어 옮기고 있었다. 방 안에서 한 중년남자가 나오자 김 선생이 반갑게 인사했다.
“송 사장님, 김 선생입니다. 잘 지내셨죠? ○○ 할아버지 건강 어떤지 보러 왔어요.”
○○ 할아버지는 기독교인인 손녀 姜(강)○○씨를 따라 이곳을 찾아온 탈북자다. 肝(간) 상태가 심하게 좋지 않아, 당장 치료가 필요했다. 김 회장은 우선 강씨의 손을 붙잡고 기도부터 하기 시작했다. 메마른 강씨의 눈이 어느새 촉촉이 젖어 있었다.
탈북자들을 보호하고 있는 조선족 사업가 송씨는 처음엔 탈북자들을 도울 생각보다는 그들의 싼 인건비를 이용하겠다는 의도가 더 컸다고 한다. 그러나 몇 해 동안 탈북자들과 동고동락하며 지내온 그는 이제 지하교회 운영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됐다.
20분 동안 김 회장과 송 사장은 강씨를 놓고 대책을 논의했다. 최대한 빨리 한국인 의사를 섭외해 치료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강씨 마을을 오가는 ‘지도자’들을 통해 의약품과 식량을 전달하기로 했다.
‘움막교회’ 최초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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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지하교회 신자가 사용해온 찬송가와 성경책. 1945년 해방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
짧은 일정을 마친 우리는 곧바로 차에 올랐다. 산속에 있는 비밀 움막교회로 가기 위해서다. 이들이 중국 공안이나 북한 보위부에 적발되는 ‘사고’를 당했을 때 피하는 곳으로, 외부 노출이 철저하게 금지된 곳이었다. 김 회장은 각별히 보안에 주의해 줄 것을 당부했다.
“지하교회를 지원하기 위해 지어진 움막이 언론에 공개되는 것은 이번이 최초입니다.”
20여분 산길을 달리자 작은 나무 울타리가 나왔다. 그곳부터는 차가 들어갈 수 없어 내려서 걸어야 했다. 차에서 내리던 김 선생이 웃으며 말했다.
“오늘 이곳에 올 것이라 전혀 예상을 못해 높은 구두를 신고 왔네요. 워낙 이 조직이 비밀스럽게 움직이기 때문에, 항상 이런 식이랍니다.”
한참을 걸어 올라갔다. 고요한 가운데 저 멀리 물 흐르는 소리와 꿩 울음 소리가 들려온다. 주변 몇 km는 사람이 살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얼마나 올라갔을까, 작은 집 한 채가 나왔다.
“이곳에서부터는 저도 처음입니다. 조금 전 송 사장님 말대로라면 여기서 100m쯤 올라가서 우측 길이 나오면 30m 전방에 소나무 숲이 보인다고 하네요. 움막은 그 사이에 있다고 합니다.”
송 사장의 말대로라면 5분 안에 충분히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하지만 우리는 그곳에서 한 시간을 헤매야 했다. 그만큼 움막은 비밀스러운 곳에 철저히 숨겨져 있었다.
통화권은 이미 훨씬 벗어나 있었고, 우리는 이미 메말라 가는 나무들을 헤치며 길을 찾고 또 찾았다. 산속이라 해가 빨리 졌다. 겨우 5시인데 이미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전등을 켜야 주변이 보일 때쯤 겨우 움막을 찾을 수 있었다. 그곳을 홀로 지키고 있던 탈북자 할아버지는 草(초)담배에 불을 붙인 후에야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렸다. 그는 이미 탈북 과정에서 세 차례나 적발돼 온갖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할아버지와 대화를 마친 김 선생이 움막에 대해 소개하기 시작했다.
“이곳은 지난 봄에 ‘사고(공안 적발)’를 피해 송 사장네 식구들이 몇 달 동안 머물렀던 곳입니다. 11명이 이곳에 있었죠. 그중 네 명은 중국에 남았고, 일곱 명은 북으로 돌아갔습니다. 몇 주 동안 이곳에서 함께 기도하고 예배 드렸죠.”
―산속에 있는 움막이라 마음 놓고 모임을 가질 수 있겠습니다.
“예. 이곳에선 온 성도들이 크게 목소리 높여 기도하고 찬양을 합니다. 북한 지하교인들에겐 이곳이 곧 천국이죠.”
―주변에 아무 것도 없는데, 식량이나 생필품은 어떻게 지원합니까.
“조금 전 갔었던 송 사장 집에서 모두 보내 옵니다. 오늘은 좀 헤매긴 했지만, 실제론 그리 멀지 않아요.”
―내부가 꽤 넓어 보이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머무를 수 있습니까.
“지금까지 가장 많은 인원이 모인 것은 20명 정도입니다.”
김 선생과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할아버지는 계속 안절부절 못한 채 담배만 태우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낯선 사람들이 자신을 해칠까 두려워했다. 취재를 마치고 산을 내려오기 전에 필요한 것 없느냐고 물었다.
“송 사장한테 돼지 먹거리나 좀 보내 달라고 전해줘.”
지하교회 지도자와의 만남
10월 ○일 오전 10시,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의 한 식당에서 화교 출신 북한 지하교인(북한에서 태어난 화교)인 李모(가명)씨를 만났다. 39세의 그는 필자에게 “조선에서 죽어가는 동포들을 살리겠다는 사명감으로 글을 써 준다면 취재에 응하겠다”는 말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대화를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이미 그의 눈엔 눈물이 가득 맺혔다.
“저는 정말 벌레보다 못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돈이 최고인 줄 알았고, 그저 나 혼자만 살자고 온갖 악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긴 지금 이 순간 제 영혼은 그 어느 때보다 평안합니다.”
6~7년 전 탈북해 중국 옌지(延吉)에 정착한 그는 사업을 시작해 2년 동안 큰 돈을 벌었다. 중국에서 탈북자 여성을 만나 결혼했고, 수많은 친구들과 동료들을 만났다. 하지만 행복한 시간도 잠시, 2004년 겨울 그는 한 중국인으로부터 ‘협작(사기)’을 당했다. 집만 남겨놓고 모든 것이 사라졌다.
이곳 저곳을 헤매다 그가 정착한 곳은 교회. 신앙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외국인의 교류가 많아 돈벌이가 되겠다는 단순한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그는 계속 가난에 찌들었고, 결국 친구들도 잃었다.
그러던 중 지린성(吉林省) ○○의 한 교회에서 ‘진짜 믿음’을 갖게 됐다. 성경을 공부하다 신앙에 눈을 뜬 그는 더 깊은 공부를 하기 위해 조선족 신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몇 달 후, 탈북자 신분이 탄로나 신학교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그는 계속 신앙의 끈을 놓지 않았고, 인근의 교회에서 아내와 함께 북한 선교 활동을 계속했다. 2005년 말 부부는 결국 조선行(행)을 결정한다.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치밀한 준비를 했고 때를 기다렸다.
얼마 후 결단의 날이 왔고 이씨 부부는 중국 접경의 한 마을을 찾았다. 오후 3시쯤 아내가 먼저 강을 건넜다. 5시간 후엔 지원 물자를 보냈다. 그리고 자신의 渡江(도강) 시간을 기다리던 중, 새벽 1시쯤 전화가 걸려 왔다. 아내가 붙잡혔다는 전갈과 함께 그도 빨리 피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씨는 선양의 피신처에 도착하자마자 入北(입북) 준비를 서둘렀다. 한 달 후, 그는 다시 두만강으로 왔다. 계절은 봄이었지만 날씨는 여전히 쌀쌀했다. 솜바지를 입은 채 갈대밭을 지나 강을 건넜다.
뒤편으로 큰 건물이 보였다. 그가 발걸음을 옮기는 정면에 초소 경비병이 보였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이미 아내가 붙잡힌 뒤라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는 그날 중국과 북한의 초소 사이를 통해 도강했다.
“네가 믿는 예수한테 구원해 달라고 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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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북한인연합 이민복 대표가 북한에 날려보내는 ‘삐라(전단)’와 각종 물품들. 김정일 정권의 허구성과 기독교 복음에 대한 내용이 인쇄되어 있다. |
강은 무사히 건넜지만, 한 마을에서 중국 돈을 바꾸다 적발된 그는 안전부를 거쳐 道(도) 집결소로 옮겨졌다. 그는 “집결소에서 ‘생지옥’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그곳은 사람이 사람같이 보이지 않습니다. 강냉이 대충 갈아서 나오는 식사는 며칠 동안 입에도 못 댔습니다. 넋이 나간 한 여성은 ‘살아야 또 중국 간다’면서 저에게 식사를 권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도 기독교 신자더군요. 중국서 교회를 갔는데 친구가 신고했다고 합니다.”
그는 한 여성 수감자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집단 폭행을 당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청소를 하다가 방에서 면도칼이 나왔어요. 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창틀에 올려뒀는데, 간수들이 왜 ‘바치지 않았냐’며 집단 폭행을 했죠. 남자 네 명이 여자 하나를 던져놓고 마구 밟았습니다. 한 간수가 소리쳤어요. ‘네가 믿는 예수가 있으면 어서 구원해 달라고 해봐!’”
우여곡절 끝에 처참한 감옥 생활을 마친 그는 탈북 전에 살던 자기 집으로 돌아왔지만 아내는 찾을 수 없었다. 2007년 봄, 한 60대 할머니가 그를 찾아왔다. 그의 아내와 함께 탈북자 감옥소에 수용됐던 사람이었다. 출소될 당시, 이씨의 아내가 꼭 가 봐 달라고 신신당부해서 왔는데, 남편 집인 줄은 몰랐다고 한다.
그녀는 그의 아내를 ‘천사’라고 불렀다. 60년 넘는 세월을 살았지만 그런 여자는 처음 봤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말은 잔인했다.
“내가 나올 땐 살아는 있었는데, 지금쯤은 분명 죽었을 거야. 그곳은 도저히 인간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야. 그만 아내를 잊게.”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지만 이씨는 마음을 다잡았다. 자신을 찾아온 할머니도 알고 보니 지하교회 신자였다. 그날부터 그는 마을을 다니며 비밀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17명의 지하 성도들이 조직됐고, 그는 중국을 오가며 물자를 전달하고 있다. 그가 북한에서 태어난 화교 출신이어서 다른 주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감시가 덜한 편이기 때문에 중국을 나다닐 수 있다고 한다.
“그때 할머니가 그러더군요. ‘우리가 기도하고 있고, 전 세계가 기도하고 있다’고. 그 말 하나로 전 지금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기적이에요.”
그는 한 달여 동안 중국에서 성경 공부를 한 후 다시 북한으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했다. 그를 돕던 한국인 선교사 ‘趙(조) 선생’은 그를 위해 MP3 성경과 노트북을 준비했다. 조 선생은 “다음 중국 일정 때는 지하교인 한 명을 더 데리고 나와서 지도자 교육을 받으라”고 했고, 이씨는 “여성 신도 한 명을 데리고 나오겠다”고 답했다. 끝으로 조 선생은 이씨에게 다음과 같이 ‘기도 요청’을 했다.
“형제님, 무엇보다 남한의 교회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저는 북한에서 나오는 기도가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한 교회가 다시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야 북한에 진정한 복음이 전해질 것입니다.”
북한을 향한 가장 강력한 햇볕
중국-북한 접경은 20년 가까이 ‘소리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다. 이들은 총칼 대신 성경과 식량을 들었고, ‘神(신)의 이름’으로 북한 전 지역을 융단폭격하고 있다. 취재에 동행했던 김 회장은 “현재 북한의 가장 큰 主敵(주적)은 미국도 남한도 아닌 바로 ‘예수쟁이들’이라며 “북한 정권은 결국 ‘예수쟁이들’에 의해 무너질 것”이라고 했다.
지난 60여년간 북한을 지켜 온 큰 기둥은 ‘수령의 유일적 영도체제’와 ‘주체사상’이었다. 10년 전 黃長燁(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망명을 통해 주체사상은 사실상 무너졌고, 현재 김정일의 지배체제만이 북한을 지탱하고 있다. 김 회장의 말이다.
“그 불안한 체제를 기독교가 뒤흔들고 있습니다. 수많은 탈북자들이 ‘주체사상에서 김일성 대신 하나님을 넣으면 가장 잘 이해가 된다’고 합니다. 실제 미국의 한 종교관련 통계사이트는 지난해 북한의 주체사상을 세계 10번째 종교로 발표한 바 있죠.”
지난 9월 19일, 미국 국무부는 북한을 종교자유탄압 ‘특별관심국(CPC)’으로 지정했다. 2001년 이래 8년째다. 중국, 미얀마(버마), 이란, 수단, 에리트레아(아프리카 북동부), 사우디아라비아, 우즈베키스탄이 북한과 함께 지정됐다.
지난 10월 2일 군사실무회담을 먼저 제의한 북한 대표가 개성공단 폐쇄까지 들먹이며 ‘삐라(전단)’ 문제를 중점적으로 거론해 관심을 모았다. 대북 전문가들은 “하늘에서 대량으로 뿌려지는 자유와 번영의 소식들이 미국 미사일보다 더 큰 위협으로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현재 남한과 중국에서 가장 활발한 ‘삐라 활동’을 하고 있는 곳은 모두 기독교 단체들이다. 李民馥(이민복) 기독북한인연합 대표는 1995년 탈북난민 1호로 남한에 온 후 수년째 자신이 직접 개발한 장치로 대형 풍선을 날리고 있다. 그가 보내는 삐라에는 북한 정권의 허구성과 함께 기독교 복음에 대한 내용들이 가득하다.
휴전선과 함께 중국 접경지역에서도 꾸준히 삐라가 보내지고 있다. 실제 한 탈북자는 함경북도에서 신약성경 ‘마가복음’書(서)가 인쇄된 풍선 삐라를 본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 랴오닝성 ○○시에서 만난 한 한국인 선교사의 말이다.
“저는 북한 지하교회 선교가 진정한 ‘햇볕정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10년 동안 정부에서 했던 정책은 ‘햇볕’ 아니라 ‘땡볕’이었죠. 지금 꽉 막힌 북한을 뚫는 가장 강력한 ‘햇볕’은 바로 ‘복음’입니다. 지금 북한의 지하는 기독교의 불길로 펄펄 끓어오르고 있어요. 화산 같이 폭발할 때가 멀지 않았습니다.”⊙
[정치·북한] - [對北 선교작전 秘話] 북한 지하교회의 代父 이삭 목사 (모퉁이돌선교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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